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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양말복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Interview / 2022-11-12

전부 그만둘 작정이었다. 머리 깎고 중이 되겠다고 하자 스님은 차분히 설득했다. “다시 생각해봐라.” 절에서 석 달쯤 보냈을 무렵, 양말복은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시나리오를 읽었다. 마음에 달라붙은 찌꺼기에 몸서리치며 괴로워하는 두 여자, 절단된 관계를 봉합하는 대신 맹렬히 상처를 씹어대는 모녀. 양말복은 대본 속 수경과 이정을 보며 자연스레 '엄마와 나'를 떠올렸다. 갈팡질팡하는 기색을 들킨 것도 그때였다. 스님은 전보다 단호한 말투로 타일렀다. “내려가서 연기해라. 그것이 네 길이다.” 인터뷰 내내 양말복은 여러 인물을 연기했다. 해외 영화제에 다녀온 소감을 물으면 가짜 독일어까지 써가며 베를린에서 목격한 특별한 관객을 묘사했다. 디렉팅 과정을 설명할 땐 수줍은 듯 주저하면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는 김세인 감독 특유의 화법을 따라했다. 상대 배우와의 호흡은 어땠냐고 질문하자 곧장 1인 2역을 소화하며 임지호 배우와 나눈 대화를 실감 나게 전달했다. 양말복은 70대 남성처럼 헛기침하고, 20대 여성처럼 눈을 부릅떴다. 표정과 목소리를 쉴 새 없이 바꾸면서 겪고 느낀 바를 표현했다. 수경으로 살 때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의 엄마, 애인, 친구이자 수경 자신인 그 인물을 연기하는 동안 양말복은 유연하게 변모한다. 역할이 달라질 때마다 옷을 갈아입다가 어느 밤엔 모조리 벗고서 맨몸으로 선다. 감독이 말한 대로 “냉탕과 온탕을 왔다 갔다 하는 다양한 얼굴”을 보여주면서 그 모두를 수경이라는 한 사람으로 엮어낸다. 그녀가 지닌 무쌍한 재주의 비결은 관찰이다. 양말복은 인물의 앞과 뒤를 살피며 겉과 속을 채운다. 인간에게 기울이는 애정도, 세상을 향한 호기심도 좀처럼 마르지 않으니 그의 연기는 갈수록 흥미롭다. 스님 말이 옳다. 양말복에게 연기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업이다. 번뇌 들끓는 사바인 줄 알았는데, 나락에서 발견한 해방구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가 등을 내리치는 죽비처럼 다가왔다는 그에게 다시 선 길에서 무얼 깨우쳤는지 물었다.

 

 

작년 이맘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를 공개했다. 1년 동안 어떻게 지냈나.

<D.P.> 시즌2 촬영을 얼마 전 마쳤다. 한준희 감독님이 작년 서울독립영화제 장편경쟁 부문 심사위원이었다. 그때 영화를 인상 깊게 봤다면서 함께 작업하면 좋겠다고 연락하셨다. 감사한 마음으로 참여했다. 촬영 기간이 7개월 가까이 걸렸는데 그사이에 단편영화도 몇 편 찍었다. 우리 영화가 독립영화계에서는 나름 명성을 얻지 않았나. (웃음) 덕분에 시나리오가 많이 들어왔다. 최근에는 김민하, 최희서 배우 등과 <폭로>(전선영)를 촬영 중이다. 민하 배우와는 단편 <귀가>(유현진, 2020)로 처음 만났는데 다시 보니 반갑더라. <파친코>(코고나다, 저스틴 전, 2022)를 찍으며 어땠는지, 이전과 비교할 때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무엇인지 이것저것 물어봤다. <폭로>는 12월 말에 크랭크업 예정이다. 한 해를 꽉 채우는 느낌으로 보낼 듯하다.

 

해외영화제도 여러 차례 초청됐다. 동행한 적이 있나.

베를린국제영화제에 갔다. 코로나19로 상황이 안 좋아서 걱정했는데, 세인 감독이 “지금 아니면 우리가 거길 언제 또 가보겠어요”라면서 설득하더라. 일단 극장 사이즈에 놀랐다. 크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광대한 규모였다. 무엇보다 관객 연령대에 깜짝 놀랐다. 한국에서는 2~30대 관객이 80%를 차지하는데 독일에서는 60대 이상이 80%였다. 객석에 젊은이가 듬성듬성 앉아 있는 풍경이 신선했다. 관객 반응 역시 한국과는 여러모로 달랐다. 일부러 맨 뒷줄에 앉아서 영화를 봤는데 다들 첫 장면부터 웃더라. 엄숙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집에서 삼삼오오 모여 TV 볼 때와 비슷했다. 우리도 드라마 보면서 꼭 한마디씩 하지 않나. “저 상황에서 저렇게 행동하면 안 되지”라며 주인공을 다그친다거나 “다음 장면에 분명히 이런 일이 벌어질 거야”라고 사건을 예측한다. 베를린 관객들이 그랬다. 특히 70대쯤 되어 보이는 한 남성 관객이 기억에 남는다. 중간중간 말씀하시는데 발성이 너무 좋더라. 연극배우 아닐까 싶을 정도로. (웃음) 내용을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느낌상 줄거리를 짐작하는 듯했다. 본인이 예상한 대로 영화가 흘러가면 “거봐, 내 말이 맞지?” 하는 뉘앙스로 또 한마디 얹고.

 

영화에 관한 해석에서 정서와 문화 차이를 느꼈던 순간도 있나.

수경이 친구와 시장에서 화해하는 장면. 앞서 친구는 자기 남편과 수경 사이를 의심했던 상황인데, 그때 남편에게 사과받았음을 알리며 “(남편이) 집 명의 내 이름으로 바꿔줬어”라고 한다. 한국 관객들은 보통 그 장면에서 웃는다. ‘그래, 덮고 가야지 별 수 있나.’ 동조해주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근데 베를린 관객들은 아주 싸늘했다. ‘그걸로 타협한다고? 이게 그럴 수 있는 문제라고?’ 대부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분위기가 완전히 얼음이더라. 이정의 독립에 관해서도 여러 차례 질문을 받았다. 성인이 되면 부모 곁을 당연히 떠나야 하는데 어째서 이정은 스물아홉까지 엄마와 함께 사느냐고. 한국 사회 상황이나 인물의 특수성을 고려해야겠지만, 무엇보다 가족 관계를 대하는 시선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우리는 유대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나. 관계에서 끈끈함을 유지하길 원하고 싸울지언정 곁에 두려 한다. 반면, 독일을 비롯한 서구에서는 개인의 삶을 중시하는 것 같다. 암묵적 약속이라고 해야 할까, 부모와 자식 모두 ‘성인이라면 응당 스스로 책임지고 자기 인생을 살아야지’ 생각한다. 관습에서 비롯한 정서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봤다. 다만, 이러한 차이를 굳이 강조하고 싶지는 않다. 영화 자체에 대한 논의가 아닐뿐더러 괜히 옳고 그름을 나누며 이분법적 잣대로 인물을 판단할까 봐 걱정스럽더라. 앞으로 더 많은 나라의 관객들을 만나서 다양한 생각을 나눌 기회가 있다면 좋겠다.

 

주연 배우 둘 다 연기상을 받은 영화이기도 하다.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독립스타상을 받을 때 어땠나.

세인 감독에게 고마웠다. 좋은 대본과 동료, 현장의 집중력. 그것들이 한자리에 모이면 이토록 가슴 뿌듯한 순간이 오는구나 싶었다. 한편, 상 받은 후에 주변에서 자꾸 날 신인 배우라고 칭하더라. 그동안 어디 있다가 이제야 나타났냐는 듯이. 요즘 내가 정정하고 다닌다. “신인 배우가 아니라 무명 배우입니다.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합시다.” (웃음) 그래도 20년 넘게 연기밥 먹은 사람인데 신인이라고 할 수 있나. 난 무명이지, 무명 배우.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한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이름을 가졌다. 무슨 뜻인가.

내 이름인데 내가 지을 수가 없다는 게 아이러니다. 나중에 선택권을 주면 좋을 텐데. 부모님도 아니라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이다. 삶이 다하는 날까지 복을 누리라는 의미를 담으셨다. 뜻 자체는 참 좋다. 으레 삼복 가운데 마지막 복날로 알아서 그렇지. 여름 되면 말복에 치킨 쿠폰 많이 받는다. (웃음) 내 생일인 줄 알고 축하한다면서 계속 보낸다. 전에는 개명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스물일곱에 연극을 시작했는데 당시 내가 무대에서 보여주는 이미지와 이름 사이에 간극이 컸다. 선생님들이 먼저 이름을 바꾸면 어떻겠냐고 하셨다. 요즘 시대에 걸맞은 이름도 아닌데다 내 얼굴이 이름처럼 토속적이지도 않다고. 잠시 고민했지만 개명은 안 했다. 이름이 그렇게 중요할까 싶었거든. 어차피 연기할 때마다 눈앞에 새로운 이름이 놓이지 않나. 수경이면 수경, 숙희면 숙희. 배역의 이름으로 사는 것이 훨씬 시급하고 중요한 일로 다가왔다. 근데 요즘 들어 내 이름이 좋더라. 나이가 들수록 몸에 말복이라는 이름이 잘 붙는다. 이제야 얼굴과 이름이 맞아 떨어져 가는구나 싶고. 양수경보다는 양말복이 낫지 않나. (웃음)

 

잘 어울린다. 아무에게나 어울릴법한 이름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고. 그나저나 스물일곱이면 살짝 늦게 시작한 감이 있다. 대학 졸업 후 다른 일을 하다가 대학로에 들어간 건가.

원래 춤을 췄다. 중고등학교 내내 리듬체조를 했는데 대학 들어갈 때는 무용으로 전공을 바꿨다. 오랜 시간 선수로 살아온 터라 입학하고 나서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갑자기 너무 많은 자율권이 생겼거든. 이전까지는 아침부터 밤까지 시키는 대로 훈련하면 됐는데 대학에서는 뭐든 스스로 선택해야 했다. 하루아침에 달라진 상황에 혼란스러웠고 연습실에서 같은 레퍼토리를 반복하다 보니 지치기도 했다. 그렇다고 완전히 다른 영역으로 넘어가기도 어렵고. 그때부터 무대에서 할 수 있는 다른 일을 찾았다. 우연히 연극을 접했고 코러스부터 시작했다. 현장에 들어가서 연기를 조금씩 배운 케이스다. 당시만 해도 이만큼 오래 연기할 줄은 몰랐다.

 

처음 출연한 영화는 <블랙잭>(정지영, 1997) 맞나.

맞다, 그때도 우연이었다. 애초 출연이 결정된 상태가 아니었거든. 같이 연극 했던 선배 따라 현장학습 가듯 촬영장에 갔다. 선배 입장에선 ‘영화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맛이나 보라는 의미였지. 말 그대로 견습이었다. 근데 감독님이 날 보더니 마침 역할이 있다면서 카메라 앞에 서보라고 하시더라. 그날을 기점으로 연극을 열심히 했다. 연기에 관해 전혀 몰랐거든. 이렇게 무지한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겠구나 싶더라. 물론 연극이 재밌기도 했고.

 

무용할 때보다 잘 맞는다는 느낌이 들었나.

무용했던 경험이 도움을 준 것 같다. 다른 배우처럼 연극에 필요한 기호와 기술을 습득하지는 못한 채로 무대에 올랐지만, 몸으로 표현하는 부분만큼은 익숙했거든. 언어를 통해 설명하는 능력이 다소 떨어져도 몸으로 상황을 해석하는 능력을 갖춘 상태였던 거다. 덕분에 기존 배우들과는 다른 개성을 지닌 배우로 인식됐다. 물론 무대의 기본을 모르니 문제도 많지. 무용했던 습관이 나오는 바람에 자꾸 뒤꿈치 들면서 걷고. (웃음) 시작하고 6년은 무진장 힘들었는데 그걸 넘어서니 재밌어지더라. 같은 작품도 매일 다르게 다가온다는 것이 연극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관객이 다르고 무대에서 주고받는 호흡이 바뀌고 극장 공기가 변했다. 동일한 텍스트를 갖고서 매번 다르게 연기할 수 있다는 점이 신기했다.

양말복 ©이영진

무진장 힘들었던 6년은 어떤 마음으로 버텼나.

선생님이 그때 말씀하셨다. “네가 여기서 6개월을 버티면 6년을 버틸 거다. 그리고 6년을 버티면 넌 평생 연기할 거다.” 다들 6개월 접어들 무렵에 고비를 맞닥뜨리거든. 몸도 마음도 고되다 보니 그만두고 싶고 지금이라도 빨리 다른 일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초조해진다. 근데 내게 연극 무대는 낯선 영역이어선지 생각보다 정신없이 시간이 흘렀다. 어찌어찌 6개월을 보내고 나니 금세 6년이 가더라. 결국 선생님 예언대로 됐지. 6년을 넘겼을 때는 ‘빼도 박도 못하겠네’ 싶더라. 이제 와서 달리 돌아갈 곳도 없고. (웃음) 

 

그렇게 20년 가까이 쉬지 않고 연기했지만 장편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건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가 처음이다. 이 또한 낯선 영역이자 새로운 경험이었을 듯한데.

대본대로 찍으면 러닝타임이 3시간 40분에 육박한다. 그만한 두께를 가진 이야기인데 현재 완성된 영화의 러닝타임은 1시간이 줄어든 2시간 40분이다. 영화에서 편집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사실도 배웠다. 처음 봤을 때는 덜컥 두려움이 앞섰다. 이렇게 생략하고 압축해도 괜찮나? 수경이 너무 나쁜 사람처럼 보이면 어떡하지? 사실 내 눈에는 진짜 못된 사람처럼 보였거든. (웃음) 근데 우리 엄마가 떠올랐다. 내가 치를 떨었던 엄마의 모습이 수경에게 겹치더라. 동시에 이정을 보면서는 엄마에게 무던히 뭔가를 기대했던 내 모습을 발견했다. 엄마도 사는 동안 굉장히 힘들었겠구나 싶더라. 애써 키워놨는데 독립하지 못하는 딸. 가장 밀접한 관계인데 책임져줄 방법을 알지 못했던 엄마. 두 사람이 나란히 눈에 들어왔다. 우리 엄마 참 불쌍하구나 싶더라. 지금보다 훨씬 척박한 세월을 살아내야 했던 사람 아닌가. 그런 엄마에게 이상적인 애정을 기대했던 것 같다. 나를 알아주는, 내 모든 아픔을 보살피고 이해해주는 엄마를 원했다. 몇 해 전에 엄마가 돌아가셨다. 뭔가를 바라는 대신 그냥 좀 더 잘해줄 걸 싶더라. 촬영부터 개봉까지 이 영화와 3년을 보내는 동안 엄마를 서서히 용서하게 된 듯하다.

 

엄마랑 같이 보고 싶은데 그럴 엄두가 안 나는 작품이다. 엄마들은 항상 두 마음과 싸우는 것 같다. 어제는 “내가 널 위해 이렇게까지 희생했는데”라며 억울한 심정을 토로하고, 오늘은 “너한테 이것밖에 못 해줘서 미안하다”라며 사죄한다. 엄마만큼 딸의 마음도 널뛸 수밖에 없다.

캐스팅 확정되고 감독님과 깊은 대화를 나눴다. 직전 해에 엄마가 돌아가셨던 터라 나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장례 치를 때 눈물이 한 방울도 안 나왔다. 그 관계에 오래 시달렸거든. 엄마가 날 괴롭혔던 건 아닌데 나 혼자 괴로웠던 부분이 있던 거다. 게다가 엄마가 10년 동안 투병하셨다. 요즘 ‘독박 육아’를 포함해서 여성에게 돌봄을 강요하는 상황이 사회 문제로 언급되지 않나. 집안에 아픈 사람이 생기면 으레 딸이나 며느리에게 간호를 기대한다. 특히 결혼하지 않고 안정적인 직장이 없는 여성에게는 당연하다는 듯 책임이 돌아온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오빠들이 있지만 엄마 곁을 지키며 케어한 사람은 나였다. 엄마가 눈을 감을 때 ‘그래도 마지막엔 평온하게 가셔서 다행이다’ 생각했고, 한편으로는 ‘이제 엄마에게서 벗어나서 나도 좀 살자’ 싶었다. 근데 울지 않는다는 이유로 온갖 말을 들었다. 진심으로 애도하지 않는다고, 참 독하다고 하더라. 그들이 기대하는 프레임이 들어맞지 않는 딸이었던 셈이지. 근데 아니거든. 애도 방식이 다를 뿐이다. “아이고” 통곡하지 않는다고 해서 슬픔을 모르는 게 아니다. 그때 다시 한번 경험했다. 이해의 폭이 이렇게 좁구나, 여전히 모녀 관계를 고정된 틀로만 바라보는구나.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가 흥미롭게 다가왔던 이유도 그래서다. 엄마와 딸 사이에는 정말 지긋지긋한 면이 있는데 영화는 엄마를 다른 시각으로 보게 한다. 수경이라는 인물을 설명하는 논법이 다양하니까. 엄마도 한 사람일 뿐인데 지나치게 많은 걸 기대했다는 생각이 들더라. 엄마를 조금씩 이해하면서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었다. 결국 관계다. 수경이 삐걱거리는 모든 지점이 꼭 모녀 관계에서만 비롯하지는 않거든. 완벽하지 않은 한 개인이 타인과 관계 맺는 방법을 터득해가는 과정, 영화는 그걸 다룬다.

 

수경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 좀 더 듣고 싶다. 어떤 점이 특히 매력적이었나.

남의 눈에 그럴듯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인지 끈질기게 묻는 사람. 물론 표현은 거칠고 영화에서 지적받듯 다혈질이다. 우리 수경 씨는 아침과 저녁에 기분이 다르거든. (웃음) 누굴 만나는지에 따라 모습이 또 바뀌고. 근데 당연하지 않나. 목석이 아닌 사람이다. 언제나 똑같을 순 없다. 수경은 막연하게나마 목표를 세우면 그와 연결된 뭔가를 계속 시도한다. 부동산이나 연금 같은 경제적 목표가 아니라 삶을 어떻게 살고 싶다는 방향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자세히 보면 수경은 사회의 한 부품처럼 일상을 감당한다. 일터에서 자기가 해야 할 역할을 누구보다 잘 알고 남들 이야기를 성실하게 들어준다. 그러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 함몰되지 않으며 목표를 바라본다. 애인, 친구, 손님 앞에서는 나름대로 능숙하게 역할 놀이도 하고. 근데 엄마 역할 놀이만 안 하려고 한다. 기본적으로 “그랬다 치고” 넘어가는 법이 없는 인물이지만 딸에게는 유별나다 싶을 만큼 한 치의 양보도 없다. 이정이 원하는 대로 해줄 마음이 없고, 이정은 그런 자신을 당연히 이해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말 수경 씨 어이없는 사람이라니까. (웃음) 대체 왜 그럴까. 왜 유독 딸한테 억세게 굴까.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우리 엄마를 생각해보면 ‘삶이 버거워서 그랬나 보다’ 싶더라. 밖에서는 너무 많은 옷을 입고 가면을 써야 하지 않나. 집안에서만이라도 만사 제쳐두고 온전히 쉬고 싶은데 딸이 있는 거다. 내가 부딪히고 책임져야 하는 가장 강력한 사람. 수경은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 것 같다. 딸에게 더는 헌신하지 않기로, 너그럽게 지켜보고 들어주는 카운셀러 역할은 안 하기로 마음먹은 것처럼 보인다. 집이라는 공간에서는 모든 역할과 책임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예전에 우리 엄마가 집에서 훌러덩훌러덩 벗고 돌아다니셨다. 그럼 나는 옷 좀 입으라고 잔소리하고. 근데 혼자 살다 보니 내가 그러더라. 먹고 싶을 때 먹고 입고 싶을 때 입고 자고 싶을 때 자니 너무 편했다. 나만의 공간이 주는 자유를 만끽했지. 딱 하나 아쉬웠다. 아무도 냉장고에 반찬을 채워주지 않는다는 것. (웃음)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시나리오가 아무리 탄탄하더라도 연기하다 보면 배우 스스로 채워 나갈 부분이 생긴다. 직접 아이디어를 내서 영화에 반영된 부분이 있다면.

현장에서 쫑알쫑알하며 아이디어를 많이 내는 편이다. 다른 사람 같으면 피곤하다고 했을 텐데 세인 감독이니까 참아냈지. (웃음) 세인 감독은 참 잘 듣는다. 듣는 귀가 좋다고 해야 하나. 그동안 자기 얘기를 떠들기보다는 남들 얘기 많이 들어주면서 살았구나 싶기도 했다. 듣기도 훈련이니까. 내가 아이디어를 내면 작품에 반영하는 속도도 무척 빨랐다. 이래도 되나 싶어서 “다 바꿔주면 안 돼. 나도 사실 잘 모르고 하는 얘기야” 했더니 걱정 말라고 하더라. “아녜요. 선배님 의견이 맞아요. 바꾸는 게 좋겠어요.” 그러다 아닌 것은 또 아니라고 딱 잘라 얘기한다. 퇴짜 맞은 것 중 하나가 후반부 샤워 신이다. 나는 박박 문질러서 닦아야 한다고 했다. 엄마들은 목욕할 때 거의 제 몸을 안마하듯 치고 문지르면서 닦지 않나. 아무도 만져주지 않는 몸을 스스로 만지면서 뻐근한 데를 푸는 거다. 다 씻고 수건으로 물기를 훔쳐낼 때도 시원시원하게 움직이고. 난 실제성을 중요하게 여기며 거침없이 씻었는데 그때 감독이 촬영을 멈췄다. “선배님, 그거 하지 마세요.” (웃음) 영화가 꼭 현실 그대로여야 하냐며 이 장면은 몽환적으로 연출하고 싶다고 하더라. 곱게 씻고, 그냥 톡톡 물기만 닦아내면 좋겠다고. 나는 가짜라고 주장했다. 광고에서나 나올 모습이지 수경 성격과는 안 맞는다고 봤거든. 감독이 “그것도 편견 아닐까요?” 묻더라. 혼자 있는 곳에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수경은 제 몸을 다르게 대할 수도 있다고 말이다. 결국 감독 말대로 조심스럽게 씻고 나왔다. 한편, 리코더를 부는 엔딩 장면에는 내 의견이 들어갔다.

 

안 그래도 궁금했던 장면이다. 헝가리 무곡을 완주하는 모습이 롱테이크로 담겼다.

대본에는 ‘완벽하게 연주하는 수경’이라고 쓰여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완벽은 불가능했다. 수경은 일주일에 한 번 겨우 시간을 내서 문화센터에 간다. 거기 가보면 알겠지만 수업 딱 50분 하거든. 그렇게 배우고 와서 일하다 손님이 없을 때 틈틈이 동영상 보며 연습했던 거다. 감독님 찾아가기 전까지 고민했다. 혹시 내가 모르는 영화적 약속인가? 현실에서는 어렵지만 영화에서나마 뭔가를 완벽하게 해내는 수경을 보여주고 싶은가? 결국 촬영 막바지에 의견을 냈다. 솔직히 얘기하면 연습해도 안 되더라. (웃음) 두 달 넘도록 매일 연습했는데 연주할 때마다 음 이탈이 났다. 수경은 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 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고 나보다 나이도 좀 더 많다는 설정이거든. 악보를 익혀서 연주한다기보다는 손가락을 눈대중하며 흉내 내는 입장인데 완벽할 수 있을까. 감독이 가만히 듣더니 “생각 좀 해볼게요” 하더라. 우리 감독님 특유의 말투가 있거든. 결정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완벽할 필요 없으니 서툴면 서툰 대로 연주해보라고 했다. 숨 쉬어야 할 때 쉬고 틀려도 멈추지 마라. 대신 끝까지 찍어보자. 그래서 순 엉터리였지만 완주하긴 했다. 다 찍고 컷 사인이 나오니까 갑자기 스태프들이 손뼉 쳤다. 순간 ‘뭐지?’ 했다니까. 그동안 수많은 연기를 했는데 여기서 박수가 나오는구나 싶어서. (웃음)

 

왜 하필 헝가리 무곡이었나.

원래 에델바이스였다. 초보자가 가장 많이 연주하는 곡이거든. 사실 헝가리 무곡은 꽤 길고 어렵다. 근데 이 춤곡이 집시 음악에서 왔다고 하더라. 수경은 어쩌면 집시와 비슷할지 모른다. 떠도는 사람이고, 뭔가에 기대지 않고 세상과 직면하면서 독립적으로 사는 사람이다. 그때그때 눈앞에 놓인 것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집시와 수경의 삶이 닮지 않았나 싶다.

 

감독이 디렉팅하며 종종 “더 강하게 해주세요” 요청했다고. 근데 수경은 소리를 지르거나 때릴 때보다 오히려 침묵하는 장면에서 훨씬 세게 느껴진다. 이정이 사과를 요구하자 무슨 사과냐며 싸늘하게 쳐다보는 장면에서는 정말 무섭더라. 이정이 무슨 수를 써도 수경 마음속으로 들어가긴 어렵겠구나 싶고.

어찌 됐든 기대되는 모성에서 벗어난 이미지를 구축하여 이야기를 끌고 가야 했다. 나중에 말했다. 피해자뿐만 아니라 가해자 역할을 소화하는 배우도 트라우마가 생기는 것 같다고. 연기일지언정 가해 아닌가. 프레임에 그 충격이 효과적으로 담겼다고 감독이 판단할 때까지 반복해야 하고. 하루는 후배가 현장에 왔는데 묻더라. “연극 할 때는 절대 안 하는 짓을 왜 여기서 하세요?” 무대에서는 그만큼 과하게 연기한 적이 없거든. 어쨌든 인물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극대화된 연기가 필요하다고 봤다. 한편, 완성된 영화를 보니 내 눈에도 웃는 듯 마는 듯 조용하게 넘어가는 부분이 더 강렬하게 들어오더라. 이정이 “엄마 나 사랑해?”라고 물을 때도 말없이 돌아서고. 차라리 때릴 때는 속이 드러난다. 쟤 화났구나. 지금 불쾌하다는 거구나. 근데 표현을 안 하면 무섭지. 대체 무슨 생각하는지 속을 알 수가 없으니까.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수경이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쩌면 그때 자신에게 처음으로 물어봤을 수도 있다. ‘나는 이정을 사랑하나?’ 딸 앞에서는 유난히 척을 안 하는 사람 아닌가. 너무 진실하지. (웃음) 밥은 먹었니, 힘들지는 않니, 그렇게 습관적으로 타인에게 건네는 말을 일절 안 한다.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딸에게는 투명하게 내보인다.

양말복 ©이영진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모습도 인상적이다. 수경은 자칫 비호감으로 치우칠 인물인데 작품에서 외로움, 천진함, 사랑스러움 등 다양한 면모를 보여준 덕분에 밉지 않더라. 여러 모습을 드러내면서도 한 인물로 보여야 했는데 얼마나 의도하면서 연기했나.

내 안에도 수경처럼 다양한 면이 있다. 사람들은 타인을 보고 싶은 대로 본다. 길을 지나가면 나를 아줌마라고 부른다. 흰머리를 하고 있으면 자연스레 할머니라고 칭한다. 연극배우라고 하면 아주 힘들게 사는 사람으로 본다. 사실 가난하다고 힘들지는 않거든. 가난을 담보로 삼을 만큼 커다란 기쁨을 누리는데 그건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 편한 대로 이해하고 마는 거다. 늘 생각한다. “당신들이 보는 나보다 내 안에 더 많은 내가 있어.” 여성, 중년, 배우 등을 이유로 내 정체성을 일반화한다는 걸 안다. 살면서 그런 시선에 자주 노출됐기에 오히려 그에 속하지 않는 다양한 모습을 지켜내려 했다. 마음 안에 또 다른 욕망과 이야기를 차곡차곡 쌓아온 것 같다. 그동안 작품에서 표현할 기회가 적었다. 내가 지닌 여러 면을 의도적으로 드러내거나 대입해서 표현할만한 인물을 만나기가 어려웠다. 수경은 그런 점에서 참 반가웠다. ‘아줌마라고 불려도, 누군가의 엄마여도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어. 소도시의 후줄근한 좌훈방에서 일하는 그저 그런 직업인이라고 보겠지만 사실 수경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 내 안에 자리 잡은 여러 감정과 모습이 수경을 통해 나올 수 있었다.

 

물속에 있는 수경이 떠오른다. 앞서 말한 샤워 신이라든지 수영장에서 햇빛을 받는 모습, 증기를 쐬면서 제왕절개 흉터를 보는 순간. 대사 없이도 인물이 상실하거나 단념했던 바가 무엇인지 일러준다.

지금 말한 세 장면에서 수경은 가장 수경답다. 물속에서 맘껏 놀고 몸을 씻으면서 돌보고. 증기 장면에서는 누구도 어루만질 수 없는 제 흉터를 스스로 만져주지 않나. 누군가와 대면해서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오롯이 자신으로 존재하는 장면이다.

 

임지호 배우와 격렬한 몸싸움을 소화해야 했다. 날 선 감정을 연기하며 배우 역시 예민해질 수밖에 없을 텐데 현장 분위기는 어땠나.

현장 집중력이 어마어마했다. 세인 감독은 큰소리를 낸 적도 없고 말을 많이 하는 편도 아니다. 근데 감독이 자기 세계에 확실히 들어가 있으니 집중하는 분위기가 자연스레 형성됐다. 뭐랄까, 세인이 둘러놓은 테두리 속으로 쑥 빨려드는 느낌이었다. 고요하지만 엄청난 에너지로 현장을 감싸 안는 거다. 현장 분위기는 감독 성격을 따라간다고 하지 않나. 사뿐사뿐, 사근사근. 동시에 모든 팀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서 배우들이 연기에 몰입할 수 있도록 배려해줬다. 지호 배우의 경우, 본인이 가장 힘들 텐데 나를 챙겨주려고 하더라. 주역으로서 책임감이 컸다. 구타하는 장면이라든지 액션 장면을 찍을 때는 현장에 항상 무술 감독과 보조 출연자가 있었다. 사전에 장비를 꼼꼼하게 점검했고 리허설도 여러 번 거쳤다. 다만, 물리적 공격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려웠다. 세게 때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타격이 덜한 액팅을 찾아내려고 다들 고심했다. 연기라고 해도 때려야 하는 입장이다 보니 마음이 불편했는데, 촬영 들어가기 전에 지호 배우가 의연하게 말하더라. “선배님, 저 강골이라서 괜찮아요. 한 번에 가요.” 힘들다는 얘기를 안 하는 친구라 속내를 전부 알 수는 없지만 많이 힘들었을 거다. 고생했지.

 

앞서 트라우마를 언급했다. 촬영 마치고서 어떻게 시간을 보냈나. 수경이 좌훈방에서 듣는 이야기를 공해라고 표현하듯 배우 또한 작품에서 말하고 행한 것들이 몸과 마음에 쌓였을 텐데.

생계를 위해서라도 곧장 다른 작품에 들어가야 했는데 당시 코로나19로 작업을 이어가기가 어려웠다. 한동안 멍하게 지냈던 것 같다. 그러다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연극 동료들과 함께 스터디하면서 매주 한 편씩 썼는데 나도 모르게 엄마 얘기를 많이 쓰더라. 내 안에 묻어둔, 스스로 풀어내야 하는 부분을 영화가 건드렸구나 싶더라. 엄마에 관해 쓰면서 자연스레 나를 들여다보게 됐다. 세인 감독이 작품을 통해 나에게 던진 질문들, 관계에 대한 고민이라든지 사회 문제 역시 글을 쓰며 정리해볼 수 있었다. 

 

결국 ‘나로서 사는 삶’을 이야기하는 작품이구나 싶다.

1년 정도 꾸준히 글을 쓰다 보니 자문하게 되더라. 도대체 나는 어디에서 왔을까? 현재 내 모습은 무엇에 기인할까?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은?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동안 다른 사람이 내게 뭔가 해주기를 바랐다. 근데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를 만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삶이란 내가 나로서 할 수 있는 일, 나에게 줄 수 있는 것을 찾는 과정이구나 싶더라.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그래서 찾았나. 양말복에게 자존과 독립은 뭘 의미하는지?

타이밍이 신기했다. 사회가 요구하는 쪽으로 무릎 꿇기 시작할 때쯤 이 작품을 만났거든. 한때는 절에 들어갈 생각도 해봤고 차라리 드라마 출연에 집중하자고 마음먹기도 했다. 언젠가부터 연극과 점점 멀어졌다. 나도 돈 벌어야 하니까. 남들도 다 그렇게 사니까. 이제 세상의 기준을 받아들이고 나도 전세방에서 좀 벗어나자 싶더라. 그런 계획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내가 소중히 여겨온 가치를 내 손으로 버리려고 했다는 게 문제였다. 한 작품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주고받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 이야기가 밖으로 나와 여러 사람을 만나며 발전하고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좋아서 배우가 됐다. 근데 마음속 화두를 놓아버린 채 상품이 되는 길에 은근슬쩍 발을 담가보려 했다. 하마터면 살아지는 대로 살뻔했는데 수경 덕분에 무사히 돌아왔다. 수경이 일침을 가하더라. 여태 살고 싶은 대로 살아온 주제에 왜 갑자기 살아지는 대로 살려고 하냐고.

 

죽비로 내려치는 것처럼. (웃음)

그렇지, “정신 차려!”

 

언제 연기를 어렵다고 느끼는지 궁금하다. 지금껏 경험한 배역 중에 가장 어려웠던 인물은 누구였나.

어떻게 연기해야 하는지 알고 연기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알아가려고, 어떻게든 주어진 배역에 다가가려고 애썼다. 작가의 마음을 알고 싶었다. 어떤 과정을 거쳐 그 인물을 창조했는지, 배우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그걸 알고 싶고 그대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근데 요즘에는 잘못 생각했구나 싶다. 작가라고 해도 인물에 관해 전부 알 수는 없거든. 작가를 신과 같은 존재라고 말하지만 작가가 곧 신은 아니다. 스크린과 무대에서 어떤 인물로 재탄생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복잡한 인물보다는 오히려 전형적이고 사회 통념에 딱 들어맞는 인물을 연기할 때 굉장히 버겁다. 수경처럼 사회적 기준에서 빗겨나간 인물을 연기하면 배우로서 창작 욕구가 불타오른다. 어떤 인물로 나올지 확신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건 창조이니까. 근데 전형적 인물을 표현할 때는 특정 기준에 끼워서 맞춰야 한다.

 

배우로서는 역할이 축소되는 느낌이겠다. 연기가 아닌 정답 맞추기 같기도 하고.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시나리오를 읽을 때 인물을 표현하는 방식에 놀랐다. 수경과 지호, 두 인물의 밀도가 워낙 높기에 사실 주변 인물을 놓칠 법하거든. 근데 분량과 관계없이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설득력이 있다. 나 역시 단역을 많이 하는데 이런 작품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대다수 작품에서 주조연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은 존재보다는 기능이 앞설 때가 많거든. 배우 입장에서는 그때 더 어렵고 힘들다고 느낀다.

 

필모그래피를 확인해보니 그간 이름 없는 배역을 자주 맡았더라. 이름 대신 ‘누구 엄마’ ‘누구 아내’라고 기재하는 식이다. 엄마이지만 엄마라는 역할에 갇히기를 거부하는 수경을 만나서 속 시원했을 듯하다. 지금은 무얼 기대하고 기다리나. 배우로서 욕심이 있다면.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길 바란다. 여성을 어떤 프레임에 가두면서 역할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해석할 여지가 있는 인물로 빚어내는 작품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를 찍는 동안 감독, 스태프, 배우들과 종종 대화를 나눴다. 우리는 모녀가 아닌 ‘두 여자’의 관계에 집중했고 관객에게도 그렇게 다가가기를 원했다. 영화는 현주소를 담고 있다. 20대 후반에도 독립하지 못한 이정, 평생 고생하면서도 삶의 조건을 바꾸지 못한 수경. 둘 다 집과 일터를 오가며 고생하고 각자 사회에서 부침을 겪는다. 현재 여성의 삶 또한 그리 다르지 않다고 본다. 다만, 이제 다음으로 가고 싶다. 다음엔 뭐가 있을까? 미래엔 어떤 모습일까? 상상력과 용기를 불어넣는 작품이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현주소를 다룰 때도 지금보다는 인물의 정체성과 관계를 폭넓게 바라보면 좋겠고.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를 통해서 이루고 싶은 건 딱 하나다. 이 작품을 씨앗 삼아 다양한 질문이 나왔으면 한다. 서로 생각을 묻고 나누면서 새로운 세상으로 줄기를 뻗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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