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 먹고 맴맴
인디그라운드 기획전 <오목어> 김진만
글 손시내 사진 이영진 / Feature / 2022-11-04

작은 물고기 한 마리가 물 밖을 궁금해한다. 그는 지금 “나는 누구, 여긴 어디”의 고민에 빠져있다. 학자 물고기와 현자 거북이를 만나서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눠보아도 세상은 여전히 수수께끼. 언젠가는 저 밖으로 나가 답을 얻을 수 있을까? 잠깐, 그런데 여기가 물속은 맞는 걸까? <오목어>(2012)의 프레임은 빽빽이 쌓인 국수의 단면으로 채워진다. 오목어는 ‘누들 스크린’을 꾹꾹 눌러 오목하게 만든 캐릭터. 오목어 주변엔 볼록 튀어나온 다른 바다 생물들도 있다. <오목어>는 그처럼 한 땀 한 땀 빚어낸 프레임이 이어져 역동적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다. 20년 전 조소과 학생이던 김진만 감독은 우연히 접한 핀 스크린 기법을 국수에 적용해 ‘국수 애니메이션’이라는 새 장르를 열었다. 모두가 오목한 오목별에서 홀로 볼록 튀어나온 외톨이를 주인공으로 삼은 <볼록이 이야기>(2003)가 그의 첫 번째 작품. 이후 애니메이션을 공부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한 후 그는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 <소이연(所以然)>(2007), <그믈>(2009) 등의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작업을 이어갔다. <오목어>는 그가 20대 내내 빠져있던 실존적 고민의 집대성이자, 국수 애니메이션의 또 다른 지평이다. 전주국제영화제, 서울 인디애니페스트, 바르샤바 국제영화제 등에서 수상하며 정신없는 한 해를 보내는 동안 얼른 집으로 돌아가 작업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장 많이 했다는 김진만 감독. 그때처럼 지금도 작업 생각뿐인 그를 만났다. (특별 기획전 '인디플렉스 데이: 가을날의 단편영화관'은 11월 13일까지 indieground.kr에서 즐길 수 있다)

 

 

최근 서울 인디애니페스트에서 상영한 <저주소년>(2022), 유튜브 채널을 통해 공개 중인 <먼지요정 후와 무> 등 올해 선보인 작품이 꽤 있다.

전작인 <춤추는 개구리>(2018) 작업 기간이 길었다. 10분 만드는 데 3년. (웃음) 계속 이렇게 하다가는 몇 작품 못 만들 것 같아서 방식을 바꿔봤다. 펠트로 사람 캐릭터를 만들었더니 확실히 작업 속도가 빨라지더라. 지금은 <꼬리 도깨비 뽀삐>라는 중편 애니메이션을 완성해나가고 있다.

 

<먼지요정 후와 무> 에피소드는 계속 공개되는 건가. 귀여움에 빠져서 보다가 코끝이 찡해지는 시리즈인데.

특별한 일 없으면 매일 찍고 있다. 아내와 함께 재밌게 만드는 중이다. 목소리도 각자 녹음한다. 아내는 후, 나는 무. 서로 즐기면서 오래 할 수 있고, 따뜻하면서 개그 코드도 들어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스튜디오 이름도 ‘후무’다. <오목어>를 만들 땐 지하에서 시작했다는 의미로 스튜디오에 ‘B01’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결혼하면서 작업의 지속을 고려해 법인을 만들고 이름도 바꿨다. 어떤 이름을 붙일까 고민하다가 ‘후무후무누쿠누쿠아푸아아’라는 물고기를 떠올렸다. 예전에 하와이 여행 갔을 때 알게 된 예쁜 물고기다. <먼지요정 후와 무>도 거기서 나왔다. 후는 먼지가 훅하고 뭉쳐서 탄생한 캐릭터다. 무는 알타리 무처럼 생긴 토끼고. 쉽게 지었다.

<저주소년>
<먼지요정 후와 무>

무는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진짜 토끼와 마주치기도 한다.

결혼하고 11년 동안 기른 토끼 부숭이다. 지금은 하늘나라에 있다.

 

아내 천지영 감독과는 언제부터 공동작업했나. <저주소년>를 함께 연출했고 <춤추는 개구리>에서도 꽤 많은 역할을 분담했다.

아마 <오목어> 때부터 각색을 도와줬을 거다. 아내는 출판 일을 했고 그림책 작가가 되고 싶어 했다. 원래는 결혼하면서 일 그만두고 그림책을 내려고 했다. 그런데 오히려 내 작업을 도와주게 됐지. 옷도 만들어주고, 이야기도 같이 짜주고, 편집도 함께 해줬다. 지금은 거의 반반씩 작업한다.

 

<오목어> 만들고 10년이 지났다. 당시 ‘국수 애니메이션’으로 화제를 모았는데, 돌이켜보면 어떤가.

요즘도 가끔 <오목어>로 특강을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한 번씩 보는데 아무래도 미흡한 점이 눈에 띈다. 특히 연기가 부족했다는 게 느껴진다. (웃음) 초등학교와 교과서에 <오목어>가 실려 있다. 요새 고등학생들을 가르치는데, 교과서에서 봤다며 말을 걸어오는 학생들이 종종 있다. 그럴 때 뿌듯하다.

 

바르샤바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하는 등 국내외에서 많이 주목받았다. 여기저기 불려 다니느라 바빴겠다.

그런 경험이 처음이라 둥둥 떠 있었다. 정신없었지. 비슷한 질문도 정말 많이 받았다. 국수는 다 먹었냐고 꼭 물어보더라.

 

유통기한 지나고 벌레가 생겨 다 버렸다고 들었는데. (웃음) <오목어>는 독특한 표현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작품이지만 내용은 실존에 관한 고민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20대 때 철학서와 과학서를 탐독했고, 자유의지나 운명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어느 세대나 다 힘들겠지만 20대는 나름의 고민이 굉장히 많은 시기잖나. 난 어렸을 때부터 ‘나는 누구인가’ 하고 자주 물었다. 군대 제대하고 본격적으로 대학 생활하면서 명상도 많이 했다. 출가를 고민하기도 했고. 불교적 탐구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그렇다고 종교적 믿음은 없었기 때문에 출가는 어려웠다. 그것 외에 현실에서 할 수 있는 게 명상이더라. 인도에도 다녀왔다. 20대 때는 그렇게 명상하고 책 읽고 고민하면서 보냈다. 그 와중에 사라지지 않는 게 창작 욕구였다. 그래서 30대 때는 대학원에서 애니메이션 공부를 새로 했고 본격적으로 작업도 시작했다. 20대 때 고민했던 것들이 <오목어>에 담겨있다.

<오목어>
<오목어>
<오목어>

<오목어>는 그로부터 10년 전 홍대 조소과에 재학하며 만든 국수 애니메이션 <볼록이 이야기>(2003)의 먼 후속작이기도 하다. 당시 못다 한 이야기를 각색한 거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어떻게 이어지는 이야기인가.

맨 처음에 4편짜리 이야기를 썼다. 대학교 3학년 때 1편, 4학년 때 2편을 찍고 합쳐서 <볼록이 이야기>를 만들었다. 근데 너무 힘들어서 3, 4편은 포기했다. (웃음) 찍지 않은 3, 4편은 볼록이가 사라진 여자친구를 찾아다니는 내용이다. 우주의 별을 돌아다니며 도사님들을 만나고, 뭔가 깨달음을 얻고, 나중에 국수에서 빠져나온다. <오목어>와 비슷한 결말이다.

 

<볼록이 이야기>가 졸업 작품인가.

맞다. 시각 디자인을 복수 전공했기 때문에 영상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

 

10년 만에 국수 애니메이션을 다시 작업한 이유는.

그사이에 많이 배웠고 카메라나 조명 기술도 더 발전했으니까, 다시 한번 해보자는 마음이었다. 마치 <아바타>처럼. (웃음)

 

핀 스크린 기법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그걸 국수로 구현할 생각을 했다니 놀랍다. 국수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나.

일단 면류를 좋아했다. (웃음) 핀 스크린이라는 기법을 처음 접했을 때, 확인할 수 있는 이미지가 없었다. 핀을 누른다는 텍스트뿐이었다. 그런데 그걸 읽자마자 어릴 때 어머니가 사 오셨던 원통형 국수를 꾹꾹 눌렀던 기억이 떠올랐다. 바로 국수를 사 와서 모양을 잡고 조명을 비춰봤다. 그런 식의 부조 기법으로 충분히 애니메이션이 가능하겠더라. 스파게티 면과 달리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들었던 것도 좋았다. 아이보리색이라 예쁘기도 하고.

 

국수 전용 접착제와 트래킹이 가능한 누들 스크린도 직접 만들었다고.

조소과에서는 워낙 온갖 재료를 다루잖나. 재료에 맞게 접착제나 이탈제 같은 걸 직접 만들어서 쓴다. 그게 작품의 디테일을 결정하기 때문에 레시피를 남들한테 잘 안 알려주기도 한다. 본인만의 노하우를 만드는 거다. 국수 접착제는 오공 본드와 핸디코트, 물을 적절히 섞어서 만들었다. 카메라를 x축으로 움직일 수 없으니, 움직이는 국수틀을 제작해야 했다. 조명 때문이다. 부조는 조명에 의해 양감이 조절되거든. 흔들리지 않아야 해서 바닥 판도 엄청 튼튼한 걸로 댔다.

<볼록이 이야기>
<춤추는 개구리>

작업량은 어떻게 됐나. 종일 작업해도 하루에 6초 정도 만들 수 있었다고 들었는데.

6초? 여섯 프레임일 거다. (웃음) 하루나 이틀에 1초 정도 나왔던 것 같다. 밥 먹고 작업하고, 작업하다가 자는 식이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작업실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집에서 하거든. 예전에는 집에서 작업한다는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작업실에서 숙식하는 기분이다. 그래도 즐겁다. 힘들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다.

 

등장 어류들의 생김새가 제법 디테일하다. 도감을 펼쳐놓고 만들었나.

가지고 있는 도감이 되게 많다. 민물고기 도감, 바닷물고기 도감, 동물도감, 식물도감, 해부학책까지. 작업할 때 그런 게 늘 필요하더라.

 

지금까지 다룬 재료도 여럿이다. <춤추는 개구리>를 만들 땐 실리콘을 종류별로 연구했다고.

개구리 책 정말 많이 읽었다. (웃음) 다큐멘터리 보면서 움직임도 계속 연구했다. 실리콘을 여러 가지 사서 실험하기도 했고. 그러니 작업 기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지금 다루고 있는 펠트도 마찬가지다. 펠트를 배울 수 있는 곳은 많지만 스톱모션을 하려면 추가로 개발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톤, 질감, 투명도 등을 연구하고, 맞춤 도구도 만든다.

 

개발의 연속이다.

그래서 스톱모션 회사마다 캐릭터가 다 다르잖나. 각자의 노하우가 있다. 스톱모션 분야는 지금도 계속 발전하고 있다. 유리나 스펀지 등 여러 가지 질감의 캐릭터가 시도되고 있다.

 

<오목어>는 그간 해온 단편 작업 중 예외적으로 대사가 많은 작품이다. 모든 캐릭터를 전부 혼자 더빙했는데, 군데군데 웃음 포인트가 있다. 거북이가 사라지는 장면이라든지.

아무래도 영화를 좋아해서 그런지 연기에 대한 욕심이 좀 있었다. (웃음) 고등학교 때 연극반 활동도 했다. 또 어릴 때부터 개그 욕심이 있었다. 남들 웃기는 걸 좋아했다. 예민했고 고통에 관심이 많아서 진지한 작품을 만들어왔지만 학교 다닐 땐 발랄한 학생이었다.

<소이연(所以然)>
<그믈>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나.

항상 TV 앞에서 살았다. 다른 놀거리가 없었으니까. 그러다 하루는 <전설의 고향> 다 보고 자러 가려는데, 아버지가 채널을 돌리셔서 레이 해리하우젠의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을 보게 됐다. 해골이 나와서 칼싸움하는 거였는데 보고 엄청나게 충격받았다. 그걸 어떻게 만들었는지 너무 신기하더라. 근데 그 이후로 다른 스톱모션 작품에 별다른 매력은 못 느꼈다. 그러다 대학 졸업할 때쯤에 얀 슈반크마이에르와 퀘이 브라더스의 작품을 보며 두 번째 충격을 받았다. 그런 매력적인 스톱모션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조소과엔 어떻게 갔나.

어릴 때부터 만들고 그리는 걸 좋아했는데 집안 형편상 진학을 포기했다. 그런데 내가 고3 때 집안 사정이 좋아졌다. 뒤늦게 수능 공부를 시작하고 미술 학원에 다녔다. 조각을 시작한 특별한 이유는 없다.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의 주인공이 조소과 학생이었는데 그걸 보고 결정했다. (웃음) 꽂히는 대로 간 거다. 처음엔 조각가가 되고 싶었다. 다만 졸업하기 전에 애니메이션 한 편은 만들고 싶었다.

 

<오목어> 말미에 마침내 물 밖으로 나간 오목어는 카메라와 콘티, 감독의 손을 마주한다. 재치와 냉소가 동시에 느껴지는 대목이다.

가끔 내가 만든 캐릭터들이 안쓰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영화 속에서는 잘 살아있는데 작업실에서는 뻣뻣하게 멈춰 있으니까. 근데 또 내가 만지면 바로 살아난다. 스토리보드대로 움직이는 거다. 그게 내 모습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20대 내내 ‘나는 누구인가’ 고민했는데, 결국 나는 별거 아니더라. 그런데도 너무 많은 집착과 고통을 안고 힘겹게 살아가잖나. 운명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내 모습이 영화에 투영됐다고 생각한다. 나도 가끔 힘들 땐 사주도 보고 별점도 본다.

 

마치 스토리보드를 보듯이.

그러니까. (웃음) 국수 먹는 장면에는 “내가 너를 먹어서 해방해줄게.” 하는 마음도 들어있다.

 

국수 애니메이션은 또 도전해볼 생각인가.

일단 작업을 오래 하고 싶다. 오래 하고 싶어서 식단과 체력 관리를 꾸준히 한다. 70살까지는 해보고 싶다. 그러는 동안 아내가 좀 쉬고 싶다고 하면 나 혼자 국수 작업을 할 수도 있겠다. 국수가 틀 안에만 있는 게 아니라 실제 세상을 돌아다니는 콘셉트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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