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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그라운드 기획전 <감정의 시대: 서비스 노동의 관계미학> 김숙현·조혜정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Feature / 2022-11-04

<감정의 시대: 서비스 노동의 관계미학>(2014)에는 아홉 개의 증언이 등장한다. 영화는 보육교사, 휴대폰 AS센터 수리 기사, 콜센터 직원, 미용사, 경호원, 마트 캐셔, 간호조무사, 조리사, 승무원이 수행하는 노동을 차례대로 들려준다. 얼굴 없이 목소리로만 존재하는 인터뷰이는 각자 감당하는 노동의 내용과 고충, 임금 수준과 근무 환경에 관해 여과 없이 털어놓는다. 인터뷰 음성과 일터의 현장 소음이 교차하는 동안, 화면에서는 2분 30초가량 퍼포먼스가 진행된다. 퍼포머는 해당 직업에 걸맞은 복장과 소품을 갖추고서 주어진 시간만큼 기이한 포즈로 정지 상태를 유지한다. 감정을 통제하는 서비스 노동과 움직임의 자유를 박탈당한 퍼포먼스가 맞물리며 자아내는 ‘관계미학’은 작품을 공개한 지 8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신랄하다. 미술과 영화를 오가며 작업 영역을 넓혀온 김숙현, 조혜정 감독은 <감정의 시대: 서비스 노동의 관계미학>을 “우리 작품 중 가장 효녀”라고 칭했다. 영화는 두 감독의 세 번째 협업 결과물이자, 극장과 갤러리는 물론 온라인 공간까지 그간 다양한 장소에서 관객과 만났다. 영상 설치, 퍼포먼스, 상영 등 작품의 형태 또한 각양각색이다. 이번 인디그라운드 특별 기획전에서는 ‘견딜 수 있겠는가?’라는 부제가 달린 버전을 상영한다. 스크린 안팎에는 견딜 수 없는 상태를 견디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영화는 참고 버티는 일이 곧 노동을 의미하는 현실을 기록한다. 한동안 공동 작업을 중단했던 두 감독을 같은 자리에 초대했다. 그들에게 ‘감정의 시대’는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을까? 다시 한번 관객 앞에 나서게 해준 영화를 길잡이 삼아 두 감독의 최근 작업과 관심사까지 두루 들어봤다. (특별 기획전 '인디플렉스 데이: 가을날의 단편영화관'은 11월 13일까지 indieground.kr에서 즐길 수 있다)

 

 

8년 전 작품을 다시 선보이게 됐다. 상영 기회가 아주 적지는 않았는데. 두 감독의 영화중에서 생명력이 가장 끈질긴 작품이 아닐까.

김숙현_ 아무래도 관련 이슈가 계속 진행 중이다 보니 시간이 지나도 꾸준히 찾아주는 것 같다. 실험 예술이라고 일컫는 영역과 다큐멘터리 속성이 잘 결합한 작품이다. 감정노동이라는 당대 문제를 다루면서 좀 더 확장된 영역과 만나는 접점이 생겼던 것 같다. 상영 횟수로 따지면 다른 작품들과는 비교할 수가 없을 정도다. 솔직히 우리 영화중에 아까운 것도 진짜 많은데. 영상, 전시, 공연 등을 동시에 진행하면서 작품에 들인 노력에 비하면 영화계에 소개될 기회가 특히 부족했다.

조혜정_ 우리가 한 걸음만 앞서면 되는데 두세 걸음씩 앞서간다. (웃음) 최근 작가와 감독들이 댄스 필름을 만들기 시작하는데 우리는 이미 10년 전에 <홀드 미>(2013)를 했으니까. 일러도 너무 일렀지. 당시에는 그렇게 작품을 완성하면 겨우 실험영화 언저리에서만 소개됐다. 조금이라도, 한 발짝만 살짝 건너도 잘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공동 연출은 <스크린+액션!>(2017)이다. 그동안 어떤 일에 에너지를 쏟으며 지냈나.

김숙현_ 서울여자대학교 언론영상학부에 교수로 취직했다. 줄곧 불안정한 삶을 살다가 마흔에야 정규직으로 일하게 됐다. 최근 몇 년 동안 엄청나게 바쁘기는 했다. 나름 지난한 과정이지 않나. 강의하며 1년 6개월 만에 논문을 3개 써야 했고 임용 심사도 몇 차례 거쳤다. 아, 결혼하고 애도 낳았다. 그새 아이가 쑥쑥 자라서 네 살이 됐다. (웃음) 정신없이 보내긴 했는데, 그래도 작년에는 틈틈이 작업을 진행했다. 나까지 작가 넷이 모여서 ‘콜렉티브 워크’라는 프로젝트팀으로 전시와 퍼포먼스를 선보였고, 그 작품들을 엮어서 <리빙 시그널>로 완성했다. 얼마 전 제5회 서울동물영화제에서 상영하며 관객과 만났다. <리빙 시그널>도 거의 세 걸음 정도는 앞서 있지. (웃음) 영화계에서 소비하기 쉽지 않은 콘텐츠다. 동물영화제라고 하면 으레 고양이와 개의 이미지를 떠올릴 텐데 우리는 비인간 동물, 자연, 생물 등에 집중했거든.

조혜정_ 늘 그랬던 것처럼 계속 작업했다. 나는 영화가 아니라 미술에 적을 두고 있다 보니 숙현 씨와는 필드가 다르긴 하다.

김숙현_ 이쪽은 큰 프로젝트를 진행한다기보다는 계속 작업하고 전시하는 게 일이니까. 언니는 그사이에 개인전도 열었다.

조혜정_ 일단 영화는 예산이나 인력 규모가 미술에 비해 크다. 오랫동안 고민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우리는 기본적으로 개인 작업이라는 점에서 사실 움직이기가 편하긴 하다. 작업이 곧 생활인 셈이다.

김숙현_ 그래도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언니를 존경할 만한 점이 바로 그거다. 자신을 잃지 않고 중심을 잡으면서 꾸준히 작업하기, 그 자체로 대단한 일이다. 심지어 언니는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하다. 어떻게 애를 둘이나 키우면서 이걸 다 했을까. (웃음)

<감정의 시대: 서비스 노동의 관계미학>
<감정의 시대: 서비스 노동의 관계미학>

<홀드 미> <감정의 시대: 서비스 노동의 관계미학> <스크린+액션!>까지 조혜정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대부분 김숙현 감독과 협업한 작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김숙현 감독이 영화 하자고 부추기는 쪽인가.

조혜정_ 영화 쪽 필모그래피에 기재되지 않았을 뿐 작품이 없는 건 아니다. 우리는 영화가 아니라 영상 작업이라고 하지. 숙현 씨와 작업할 때도 ‘이제 영화를 만들겠어’라고 생각했다기보다 항상 해오던 작업의 연장으로 받아들였다.

김숙현_ 언니 전시에 가보면 영상을 여러 편 볼 수 있다. 그중 몇몇은 서울국제실험영화제나 서울국제대안영상예술페스티벌에서 상영했고, 필모그래피에 올라간 영화들은 대부분 그런 경우다.

조혜정_ 개인 작업할 때는 영화제에 제대로 작품을 내본 적이 없다. 숙현 씨가 언급한 두 영화제 정도에만 출품했고 주로 갤러리 상영에 집중했다. 공동 연출한 작품들도 숙현 씨 아니었으면 영화제 상영을 이만큼 못 했을 거다. 덕분에 상영료 나오면 반씩 받고. (웃음) 요즘에는 조금 아쉽긴 하다. 러닝타임이 길고 다큐멘터리 성격을 띤 작업을 많이 했거든. 지금은 너무 오래돼서 영화제에 낼 수가 없다. 제작 당시 영화제 문을 적극적으로 두드려서 좀 더 많은 관객과 만났다면 어땠을까 싶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떻게 처음 만났는지 궁금하다.

김숙현_ 이것도 ‘롱 스토리’다. 내가 학교를 오래 다니다 보니 아르바이트로 다양한 일을 했다. 그중 하나가 코디네이터였다. 큐레이터를 보조하며 기획전을 여러 번 진행했다. 유비호 작가가 만든 그룹전에서 우연히 혜정 언니를 만났다. 그때 언니가 8mm 필름 얘기를 꺼내더라. 나도 필름 작업을 할 때라 자연스레 대화가 이어졌다.

조혜정_ 결혼이나 생일 같은 가족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아빠가 홈비디오처럼 8mm로 찍어놓은 자료가 꽤 있었다. 가족 어페어 관련 작업을 활발하게 할 때라 푸티지가 필요했다. 8mm 자료를 디지털로 바꿔야 하는데 방법을 모르겠더라. 예전에 시카고에서 공부할 때 영화를 만드는 친구가 그걸 변환해준 적이 있거든. 그게 떠올라서 숙현 씨를 만났을 때 물어봤다. 혹시 어디서 변환할 수 있는지 아느냐고. 숙현 씨가 ‘스페이스셀’을 알려줬고 그때부터 워크숍을 들으면서 우리 관계도 쭉 이어졌다. 숙현 씨가 유학을 다녀 온 뒤에도 스페이스셀에서 프로젝트를 함께했다. 처음 같이 한 작업이 댄스 프로젝트였다. 이전까지 다른 장르에 있는 분들과 작업해본 적이 없는 터라 혼자 소화하기엔 부담스러워서 숙현 씨에게 협업을 제안했다.

김숙현_ 그렇게 나온 작품이 <홀드 미>다.

조혜정_ 당시 나는 영화적 개념으로 작품에 접근했다기보다는 퍼포머와 그의 퍼포먼스를 영상으로 담는 작업에 흥미를 느꼈다. 실제로 해보니 너무 재밌더라. 작업 마치고 “우리 다음에는 뭐 할까?” 얘기하던 중에 숙현 씨가 어느 날 감정 노동에 관한 작업을 해보자고 아이디어를 냈다.

 

두 감독의 작업에는 젠더, 정치, 문화, 실험 등 겹치는 키워드가 여럿이다. 협업을 결심하기까지 그리 고민하지는 않았겠지만, 막상 공동 연출하면서 영역을 배분할 때는 어려움을 겪지 않았을까 싶다.  

조혜정_ 사실 생각보다 명확하게 역할이 나뉜다. 숙현 씨가 기획부터 시나리오 작업까지 전반적 과정을 책임지고, 나는 프로듀서 역할을 맡는다.

김숙현_ 혜정 언니가 기동력이 정말 강하다. 나는 굼뜬 편이거든. 고민하는 시간도 길고.

조혜정_ 그때는 우리 애들이 훨씬 어렸잖나. 생각할 시간이 별로 없다. (웃음) 어쨌거나 집으로 돌아가면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니 밖에 나왔을 때 빨리빨리 일을 처리해야 한다.

김숙현_ 언니의 기동력에 힘입어 완성했다. 게다가 <감정의 시대: 서비스 노동의 관계미학>은 이번 인디그라운드 기획전에서 상영하는 작품 하나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프로젝트다. 영상만 해도 여러 버전이 존재하고 그중에는 언니가 연출한 영상도 있다. 출연자 인터뷰 또한 자료를 수집하는 수준이 아니라 논문을 쓰듯 진행했다. 한 직군당 2시간 이상 인터뷰했고 관련 자료집을 만들었다. 사운드 작업, 전시 기획, 공연 연출 등 다양한 경로로 뻗어나간 프로젝트다.

김숙현 ©이영진

<감정의 시대: 서비스 노동의 관계미학>을 제작한 2014년은 ‘감정 노동’이라는 용어가 일상에 자리 잡고, 서비스 노동자의 근무 조건과 환경이 사회적 이슈로 쟁점화되는 시기였다. 현실에 기민하게 반응한 작품인데, 제작 당시를 돌이켜보면 어떤 기억과 풍경이 강렬하게 떠오르나.

김숙현_ ‘땅콩 회항’ 사건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감정 노동 관련해서 여러 목소리가 쏟아졌고, ‘갑질’이라는 용어가 보편화됐다. 사회과학 분야에서 본격적으로 감정을 다루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했는데, 마침 나 역시 대학원에서 사회과학을 공부했던 때라 자연스레 관심이 갔다. 동시에 줄곧 어떤 갈증을 느끼기도 했다. 어째서 파인 아트는, 그중에서도 특히 무용은 사회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을까? 현실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결국 권력이나 욕망 같은 추상적 차원에 머무른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걸 좀 더 구체적인 방식으로 표현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조혜정_ 감정 노동이라는 단어로 어떤 직업군을 모으긴 했지만, 결국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놓고 보면 우리가 평소에 늘 마주치는 사람들이었다. 마트 캐셔, 핸드폰 수리기사, 간호조무사 등 가까이에 있는 노동자들. 그러다 보니 작업하면서도 현실과 무척 맞붙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히려 지금은 잘 모르겠다. 과거에는 비정규직 차별과 감정 착취라는 면에서 공감대가 명백했는데, 지금은 감정 노동을 포함해서 노동에 관한 논의 자체가 또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 것 같거든.

김숙현_ 어쨌든 다른 노동 현장에 비하면 감정 노동은 그나마 담론이 잘 형성된 경우다. 이후에 감정 노동자를 보호하는 장치들이 많이 생기기도 했고.

 

‘감정의 시대’라는 명명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는 감정노동자의 목소리가 등장한다. 어떤 기준으로 인터뷰이를 섭외했나.

김숙현_ 말 그대로 알음알음 구했다. 다양한 직군을 만나자는 목표는 사전 리서치하면서 일찌감치 정했다. 누군가는 웃음을 강요받는가 하면, 누군가는 감정 상태를 전혀 드러내선 안 된다고 요구받았다. 경호원은 어떤 상황에서도 근엄한 표정과 자세를 유지해야 하는데 그런 부분이 흥미롭게 다가오더라. 한편, ‘땅콩 회항’ 사건의 여파로 승무원을 섭외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현재 일하는 분들은 물론이고 휴직하고 계신 분들조차 몸을 사리더라. 누구 만날 때마다 주변에 아는 승무원 없냐고 묻고 다녔다. 결국 친구를 통해 외항사에서 근무하다가 퇴사하신 분을 어렵게 만났다.

 

모든 인터뷰이에게 공통으로 질문했던 바는 뭐였나. 혹은 질문은 달랐으나, 답변에서 발견한 공통점이 있다면.

김숙현_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공통 질문만큼이나 직업에 따라 준비한 개별 질문이 많았다. 질문 내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한 건 답변들이 서로 연결됐다는 점이다. 사운드 편집할 때 질문은 들어내고 답변만 잘라서 이어 붙였는데 어색하지 않더라. 거의 한 사람의 목소리처럼 붙었다. 감정 노동이 그만큼 비슷한 결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감정의 시대: 서비스 노동의 관계미학>
<감정의 시대: 서비스 노동의 관계미학>

공연자 대부분은 정해진 시간만큼 특정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퍼포머가 신체 활용을 극대화하는 데 익숙한 무용수라는 점을 상기하면, 그들에게 무척이나 고된 작업 아니었을까 싶더라.

김숙현_ 협업을 완벽하게 하려면 사전에 무용수들을 만나서 같이 이야기도 나누고 충분히 시간을 보냈어야 하는데, 솔직히 그런 상황은 아니었다. 일단 무용수들이 너무 바빴다. 출연한 무용수들 대부분은 그날 현장에서 처음 봤다. 실제로 만나기 전까지는 누가 오는지도 몰랐을 정도다. 무용수들은 각자 바쁘게 연습하다가 선배나 친구에게 연락받고 급히 와줬던 거다. 그러니까 되게 어색한 상태로 촬영할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연기 디렉팅하기도 어려웠다. 상대는 전문 배우가 아니지 않나. 게다가 다들 나름대로 프라이드가 있는 무용수들이고. 우선 몇 가지 동작을 준비해서 갔고, “힘들어도 계속 웃어주세요”라는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포즈 같은 경우에는 현장에서 의견을 주고받으며 즉흥적으로 시도하기도 했다. 핸드폰 기사를 담당했던 김성현 씨는 가장 적극적으로 본인 의견을 개진한 무용수였다. 현대인에게 휴대폰은 무엇보다 소중한 물건이 된 것 같다는 아이디어를 내며 두 팔로 떠받드는 포즈를 제안하더라.

 

“컷!”하는 소리에 맞춰 공연이 끝나고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포즈에서 벗어나는 순간, 공연자는 서로 다른 표정과 몸짓을 보여준다. 누군가는 드디어 해방이라는 듯 숨을 몰아쉬고, 또 누군가는 여전히 앞선 시간에 매여 있다.

김숙현_ 우리 모두 컨트롤 당하고 있다는 의미다. 영화 찍는 행위도 마찬가지 아닌가. 컷하기 전까지 엄청나게 컨트롤하면서 제대로 끝나기만을 기다린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고강도 노동인 셈이다. 마지막에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헉헉하는 숨소리가 들린다. 촬영 감독이 짐벌을 들고 버티면서 내는 소리다. 그렇게 영화 안팎으로 진행되는 노동 행위들은 결국 감정과 시간을 컨트롤한다는 점에서 상통한다. 출연자가 한껏 긴장했다가 컷 사인을 기점으로 이완하는 순간까지 담으면 형식에 완결성이 생길 거라 봤다.

 

최근에는 무엇에 관심이 있나. 조혜정 감독은 ‘미투 운동’의 열기가 한창 끓어올랐던 2018년, 페미니즘 리부트에 지지를 보내며 향후 혐오에 관한 작업을 진행하고 싶다고 했다.

조혜정_ 그러고 놀았지. (웃음) 솔직히 어떻게 풀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서 그 후로 다른 작업에 전념했다. 여성 혐오에 관해 급하게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한동안 백래시가 엄청났고 그 과정에서 여러 주장이 팽팽하게 오갔다. 어떤 말은 듣기도 힘든가 하면 어떤 말은 전부 틀린 것 같지도 않고. 그러한 말들 속에서 스스로 중심을 잡기가 어렵더라.

<홀드 미>
<스크린+액션!>

‘여성들의 목소리’라고 일컫는 범주에서도 동의할 수 없는 주장이 존재하니까.

조혜정_ 맞다, 내가 어디까지 옹호하고 지지할 수 있는지 고민하게 된다. 최근 청소년들이 페미니즘에 엄청나게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모습을 보고 크게 충격받았다. 나는 어릴 적부터 페미니즘이라든지 사회적 이슈에 관심이 많았다. 우리 애들도 나랑 살았으니 크게 반감을 느끼지는 않는데, 주변 친구들은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을 너무나 혐오적으로 이야기한다고 하더라. 이렇듯 상황이 복잡하다 보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고, 지금 당장 작업을 진행하기는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또 정권이 바뀌면서 사회 분위기가 달라지는 중이지 않나. ‘여가부 폐지’라든지 주요 이슈를 살펴보면 사회가 점점 보수화된다는 느낌을 받는다. 차라리 세팅 자체가 뒤바뀌면 페미니즘에 관한 인식에도 커다란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싶다. 그때 내 작업에도 새로운 실마리가 나타날 것 같다.

 

김숙현 감독은 2017년 무렵 <모던한 쥐 선생과의 대화>(2007) 후속편을 만들고 싶다는 의향을 내비쳤다. 현재 진행 중인가.

김숙현_ 몇 해 전 서울문화재단 지원사업에 신청했는데 떨어졌다. 열심히 준비했기에 결과를 보고 한동안 허망했다. 그러다 임신하면서 일상이 숨 가쁘게 흘러갔다. 뭐라고 해야 할까, <모던한 쥐 선생과의 대화> 같은 작업을 하려면 사색하는 시간이 좀 필요하거든. 지난 4년 동안 그럴 여유가 없는 생활인으로 살았다. 애 울면 달래야 하고 밥 먹이고 기저귀도 갈아줘야 하고. 시간이 정말 빠르게 가더라.

조혜정_ 근데 얘길 듣다 보니 요새 영화 쪽은 어떤지 궁금하다. 미술에서는 그렇게 어떤 담론이나 현상에 관해 문제를 제기하는 작업이라든지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전시가 많이 없어졌거든.

김숙현_ 영화는 그래도 다큐멘터리라는 장르가 있으니까 미술보다 덜하긴 하다. 다만, 현장을 다루는 다큐멘터리가 줄어들었다는 느낌은 받는다. 실험적이거나 좀 더 세련된 화법을 추구하는 작품이 많아졌다. 확실히 사회 문제와 영향을 주고받는 것 같다. 세월호 참사 당시 우리가 전부 볼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작품이 나오지 않았나.

조혜정_ 어쨌든 차츰 흐름이 달라질 거라 예상한다. 숙현 씨가 준비했던 작업을 이어 나가면 좋겠다. 현시점에서 또 다른 의미를 가질 듯하다.

 

두 감독의 또 다른 협업을 기대해봐도 좋을까. 이 콤비를 다시 만날 기회가 있다면 좋겠다.

조혜정_ 희한한 거 하나 만들어볼까. 숙현 씨라면 ‘막장 드라마’ 같은 시나리오도 충분히 쓸 텐데. (웃음)

김숙현_ 대놓고 B급 영화로 만들면 너무 재밌겠다. 그간 공동작업이 뜸하긴 했다. 오랫동안 같이 했고 그러다 보니 중간에 서로 힘들어서 안 만나기도 했고.

조혜정_ 우리 막 싸운 적도 있거든.

김숙현_ 다시 해보면 재밌을 것 같다. 요즘 들어 ‘그때 참 좋았구나’ 싶다. 프로젝트를 연이어 진행하면서 피로가 쌓이기는 했지만, 돌이켜보면 또 그때만큼 활기차게 작업한 적도 없다. 

조혜정_ 이제 숙현 씨도 자리를 잡고 나도 여유가 생겼으니 조금씩 시작해봐도 좋겠다. 한번 작업을 멈추면 재개하기가 쉽지 않다. 사는 게 워낙 바쁘니까.

김숙현_ 게다가 너무 멍청해진다고 해야 하나. 어느 순간 멍하게 있는 나를 발견한다. 작업과 완전히 무관한 사람이 될까 봐 되게 두렵더라. 계속 공부하고 작업하고 대화하고 그래야지. 안 그러면 기능을 멈춘다. 예전에는 말도 그냥 툭툭 나왔는데 이제 아는 것도 복기하지 않으면 기억에서 지워진다.

조혜정_ 일상과 작업을 함께 가져가기가 쉽지 않다. 심지어 이제 육아를 병행해야 하고. 그래도 그 과정을 먼저 겪은 사람으로서 말할 수 있다. 잃는 것도 많지만 그에 못지않게 얻는 것도 많다고. 첫째와 둘째가 6살 차이인데, 둘을 초등학교에 보낼 때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첫째 입학할 때는 집 밖에서 일하는 엄마가 나까지 딱 다섯이었다. 근데 둘째가 학교에 들어갈 때는 그 반대였다. 숙현 씨도 잘 해낼 거라 믿는다.

조혜정 ©이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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