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의심의 크로스캡
인디그라운드 기획전 <숲> 엄태화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Feature / 2022-11-02

두 남자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산을 오른다. 카메라를 쥔 태식(엄태구)이 “오케이, 컷!” 외치기 전까지 구정(정영기)은 뒤를 돌아볼 수 없다. 땀을 뻘뻘 흘리며 숲속 한가운데 도착한 둘은 서둘러 촬영을 재개한다. 태식은 기가 막힌 페이크 다큐멘터리를 완성해서 세상을 놀라게 할 작정이다. 그게 말처럼 쉽겠냐며 의심하는 구정에게 카메라를 넘겨준 후, 태식은 나무에 매단 전깃줄 앞에서 인생 최고의 눈물 연기를 선보인다. 계획한 대로 목을 거는 시늉까지 했으니 이제 컷을 외쳐야 하는데, 어쩐지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간다. 그와중에 영화는 보란 듯이 컴컴한 숲을 벗어나 화창한 과수원으로 배경을 옮긴다. 꽃이 피고 열매가 익는 계절, 에스더(류혜영)가 웃고 장난칠 때마다 두 남자 사이에는 이상 기류가 감돈다. <숲>이 두 개의 공간을 축으로 실재와 허구, 과거와 현재, 꿈과 현실을 거침없이 오가는 동안 인물들은 상대의 속내를 어림짐작하며 지독한 게임에 휘말린다. 승패를 결정하는 규칙은 믿음이다. 누군가는 이기기 위해 믿고, 누군가는 지지 않으려 믿지 않는다. 최종 승자는 누구일까? 믿음으로 겨룬다는 것이 가능하긴 할까? 엄태화 감독은 한국영화아카데미 재학 시절 연출한 <숲>(2012)으로 영화 속 태식이 예견한 성공을 거머쥐었다. 제11회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으며 “사고 좀 쳐주고”, “제대로 된 나만의 시나리오”를 완성해서 이듬해 첫 장편영화 <잉투기>(2013)도 개봉했다. 시간이 멈춘 세계에서 고독을 견디며 어른이 된 아이와 유일하게 그를 알아본 친구의 우정을 그린 <가려진 시간>(2016)에 이어 그는 지난 시간 꾸준히 탐구해온 영화적 요소를 바탕으로 SF 재난 스릴러에 도전한다. 신작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마무리하며 바쁜 시간을 보내는 엄태화 감독에게 인디그라운드 특별 기획전을 계기로 만남을 청했다. 10년 전 <숲>은 알려줬다. 진실은 의외로 단순하다고, 더 믿는 쪽이 강한지는 모르겠으나 덜 믿는 쪽이 후회하기 마련이라고. 10년이 흐른 지금도 감독의 마음은 여전한 듯했다. 그는 영화를 향한 믿음이 이해받기를 바라며 계속 외친다. “오케이, 컷!” (특별 기획전 '인디플렉스 데이: 가을날의 단편영화관'은 11월 13일까지 indieground.kr에서 즐길 수 있다)

 

 

<이장>(정승오, 2020)에서 금희(공민정)와 영상 통화하는 애인 역으로 잠시 얼굴을 비춘 후 오랜만에 본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촬영을 마치고 1년이 흘렀는데, 현재 진행 상황은 어떤가.

그때 정승오 감독이 불쑥 연락해서 출연을 부탁했다. 어떻게 또 나를 닮은 캐릭터를 만들었더라. (웃음)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후반 작업 막바지에 다다랐다. CG와 음악 작업에 공을 들이고 있다. 특히 CG는 또다른 주인공이라고 할 정도로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개봉은 내년 상반기 예정이다.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다. 2019년 말부터 시나리오를 썼으니 햇수로 벌써 4년째더라. 후반 작업과 동시에 차기작 준비도 병행하고 있다. 정승오 감독과 각본을 공동 집필한다. 인디그라운드 특별 기획전에서 상영하는 정 감독의 단편 <새들이 돌아오는 시간>(2016)을 인상 깊게 봤다.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심사위원과 상영작 감독으로 처음 만나 좋은 관계를 유지하다가 이번에 협업을 제안하게 됐다.

 

원래 여러 작품을 동시에 굴리는 편인가.

<가려진 시간>을 공개한 다음 준비했던 작품이 따로 있다. 2년 동안 그 작품에만 매달렸는데 시나리오가 잘 풀리지 않아서 중단했다. 그렇게 멈추고 나니 아무것도 없는, 그야말로 제로에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 닥치더라. 계속 이런 방식으로 작업해서는 안 되겠다 싶었지. 여건이 되는 한 여러 프로젝트를 움직이려고 한다. 그래야 다음 작품을 좀 더 빨리 시작할 수 있을 테니까.

 

멀티 플레이어로서 소질이 있나.

내 딴에는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해보니 쉽지 않더라. 선배들 찾아가서 물어봤다. 다들 “하다 보면 하게 돼”라는데 맞는 말 같다. 어쨌든 마감 일정을 맞추다 보면, 진척이 더딜지언정 꾸준히 나아가긴 한다.

 

신작 준비 와중에 오래전 작품을 선보이게 됐다. 최근에 <숲>을 다시 본 적 있나.

나는 이상하게 내 영화가 재밌더라. 좋아하기도 하고. (웃음) 최근에 다시 본 적은 없는데, 사진첩을 들추듯 가끔 예전에 만든 영화를 찾아본다. 되게 묘하다. 객관적으로 영화를 볼 수 있을 만큼 시간이 흐른 덕분인지, 이제 뭘 봐도 내가 찍은 영화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온전히 관객이 된 입장에서 나와 무관한 어떤 영화를 보는 기분이다.

 

<잉투기>에선 잠시 출연도 했다. 과거의 얼굴을 마주하면 정말 사진첩을 열어보는 기분이겠다.

그때는 진짜 피치 못할 사정으로 출연했다. 상황이 열악해서 보조 출연을 충분히 구할 수가 없었다. 나뿐만 아니라 현장에 있던 스태프들 대부분을 투입해서 찍었다. 편집 과정에서 소스들을 보다가 ‘그래, 이런 장면 하나쯤 있어도 되겠다’ 하며 넣었다. 사실 한 군데 더 있다. 태식이 ‘키보드 배틀’하는 장면인데, 클로즈업 신을 찍으려고 태구를 다시 부르기가 좀 그렇더라. 그때 영화에 나오는 눈과 손은 내 것이다.

<숲>
<숲

<숲>은 한국영화아카데미에 진학하고 나서 만든 작품이다. 감독에게는 몇 번째 연출작인가.

한 다섯 번째 작품 정도 되는 것 같다. <숲>을 찍을 때, 정말 즐겁고 행복했다. 상업영화 연출부로 일하면서 내 영화를 찍고 싶다는 마음이 점점 커졌다. 상업영화 한 편 끝내면 그 현장에서 만난 친구들과 단편을 하나씩 찍는 식이었는데, 아무래도 외부에서 인력을 모아 영화를 찍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들어가는 돈도 만만치 않고. 그러다 한국영화아카데미에 진학하면서 다른 일에 신경 안 쓰고 영화만 찍을 수 있는 환경을 마주한 거다. 몸은 힘들었지만, 살면서 이토록 즐거웠던 적이 또 있었나 할 정도로 재밌게 작업했다. 물론 스태프들은 엄청나게 고생했다. 촬영지가 김천 자두밭과 양평 휴양림이거든. 대구보다 일조량이 많은 곳이 김천이라고 하더라. 국내 생산하는 자두의 70퍼센트가 김천에서 나온다. 자두가 빨갛게 익는 기간은 채 일주일을 넘지 않는데, 우리가 그때 찾아갔다. 해가 가장 뜨거운 시기에 땡볕에서 촬영했다는 뜻이지. 그러고 나서 숲으로 넘어갔다. 그늘이 있으니 더위는 비교적 참을만했지만, 그때부터는 벌레와의 싸움이었다. (웃음)

 

듣다 보니 궁금한데, 영화에 등장하는 과일이 꼭 자두여야 했던 이유가 있나.

원래 사과였다. 숲속은 채도가 낮다 보니, 숲 밖에서 촬영하는 장면은 오히려 비현실로 느껴질 만큼 채도를 높이고 싶었다. 직관적으로 녹색과 빨간색의 대비를 떠올렸다. 근데 6월 말에 촬영하려고 보니, 붉은 사과가 없는 거다. 부랴부랴 자두밭을 섭외했다. 결과적으로는 훨씬 좋은 선택이었다. 사과나무는 조금 밋밋한데 자두나무는 모양 자체가 되게 그로테스크하거든. 다만, 그때 자두 역시 익어가는 중이라 내가 원하는 만큼 붉지 않았다. 농장주에게 양해를 구한 후 낙과를 모아서 색칠했다. 영화에 담긴 빨간 자두는 우리가 일일이 칠해서 나무에 철사로 매단 것들이다. 나도 얘기하다 보니 계속 생각난다. 배우들이 먹는 자두에는 물감을 칠할 수가 없지 않나. 처음에는 조금이라도 빨간 자두를 구하려고 밭을 뒤졌는데, 사흘 동안 하루가 다르게 자두가 익어서 마지막 날에는 딱히 손대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평생 먹을 자두를 그때 다 먹은 것 같다. 자두를 엄청나게 좋아했는데 <숲> 이후로는 잘 안 먹는다. (웃음)

 

영화에 입문한 경로가 독특하더라. 본래 광고디자인을 전공했는데 영화 미술팀에서 아르바이트했고, 그 후에는 정식, 박찬욱 감독의 작품에서 연출부로 일했다. <쓰리, 몬스터>(박찬욱, 2004) <친절한 금자씨>(2005) 등을 경험했으니 현장에 자리 잡을 법도 한데, 5년쯤 지나서 다시 학교에 들어갔다.

실은 입학하기 전에도 한국영화아카데미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 계속 지원했는데, 합격을 못 했던 거다. (웃음) 재밌는 일화가 있다. 2006년쯤 아카데미 시험을 보러 갔다. 영어 시험에 논술 시험까지 볼 때다. 논술 문제를 딱 보는 순간, 자괴감이 밀려왔다. 도저히 문제를 풀어서 답안을 쓸 자신이 없었다. 한 줄도 안 쓰고 백지를 내고 나왔다. 근데 나중에 입학하고 나서 조교가 알려주더라. 옛날에 내가 백지로 낸 자료가 그대로 남아 있다고.

 

그런 사람이 드문가 보다.

그러게, 다들 어떻게든 쓰나 보다. 그날 시험장에서 가장 먼저 나갔다. 10분 정도 가만히 앉아 있다가 밖으로 나왔는데, 곧장 집에 가기가 그렇더라. 너무 창피했거든. 버스 타고 한 바퀴 돌았던 기억이 난다. 그 후에 다시 지원했을 때는 다행히도 논술 시험이 없었다. (웃음)

 

‘나는 영화를 만들고 싶구나’ 자각했던 때는 언제였나.

대학 졸업 작품으로 단편 <선인장>(2003)을 찍을 때만 해도 잘 몰랐다. 첫 연출이기도 했고, 내 영화를 만든다기보다는 영화라는 걸 흉내 내보고 싶은 마음에 가까웠다. 그러다 다른 감독님들의 현장에서 연출부로 일하며 다양한 자극을 받았다. 그게 쌓이고 쌓였을 때, 아카데미에 가서 풀어냈던 것 같다.

 

<선인장>을 만들고 나서 필모그래피가 한동안 공백이다. 2010년에 <유숙자>와 <신봉리 우리집: 흔한 이야기>를 연달아 선보이기까지 어떻게 지냈을까 했는데 궁금증이 풀렸다. 일하고, 불합격의 고배도 마시고. (웃음)

욕구불만 상태였지. 그때 영화도 세 편 정도 찍었다.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채 집에만 있는 영화들. (웃음) 학교에 들어간 후 누구보다 동료들에게 많이 배웠다. 비슷한 고민을 공유하는 이들을 한자리에서 만난 셈 아닌가. 대부분 대학을 졸업한 다음이고 그러다 보니 대학 때와는 마음가짐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곳을 나가면 말 그대로 실전이니까. 다들 치열했고, 워낙 친하다 보니 시나리오 리뷰할 때도 가감 없이 얘기해줬다. 좋은 건 좋다, 별로인 건 별로다. 그 과정에서 든든한 동료를 얻었다. 특히 홍석재 감독과는 신기할 만큼 좋아하는 소재가 겹쳤다. 매번 그랬고, 최근 작업 중인 작품도 마찬가지다.

<숲>
<숲>

<잉투기>와 <소셜포비아>(홍석재, 2015)가 ‘현피’라는 키워드를 공유하는 것처럼?

맞다, 근데 또 해당 소재에 접근하는 방식을 놓고 보면 정반대라고 할 정도로 다르다. 그런 차이가 무척 흥미롭게 다가오더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상대의 장점을 흡수하고,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나의 단점을 찾아내는 과정이 유의미했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재학 시절에는 <숲>과 <하트바이브레이터>(2012), 첫 장편영화 <잉투기>까지 모든 작품을 엄태구, 류혜영 배우와 함께 만들었다. 두 배우와 작업을 지속한 이유는 뭐였나.

MBTI가 I로 시작한다. 감독에게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은 당연한 일이지만, 난 가능하면 아는 사람과 작업하기를 선호한다. 당시 배우를 찾을 때도 그랬다. 말하자면 내가 아는 배우 중에 제일 친한 사람이 동생이었던 거다. 이미 잘 아는 상대이기에 태구와는 새로 맞춰갈 것도 없고, 내 입장에서는 현장이 너무 편했지. 혜영 배우와도 한 차례 작업하고 나서 친해졌다. 다음 시나리오를 쓸 때, 나도 모르게 혜영 배우의 캐릭터를 자연스레 들여오게 되더라. 그렇게 셋이 연달아 작업하면서 시너지를 냈던 것 같다.

 

엄태구 배우는 <숲>을 기점으로 <잉투기>와 <가려진 시간>에 출연하는 내내 ‘태식’이라는 이름으로만 불린다. 혹시 형제끼리 주고받는 신호인가.

그건 아니고, 사실 이름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편이다. ‘한 번 태식이라고 했으니 그냥 태식으로 쭉 가자.’ (웃음) 요즘에는 이름을 신경 써서 지으려고 한다. 소품 하나에도 의미가 있는데, 이름도 중요하겠구나 싶어서. 말이 나온 김에 얘기하면 왠지 구정은 태식에 비해 잘 사는 집 아들 같은 느낌이 들더라. 부유한 동네를 떠올리다가 압구정에서 이름을 따왔다. (웃음)

 

에스더는?

초등학교 다닐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 이름이다. 어쨌든 남자 둘의 이야기인 터라, 그사이에 낀 여자 캐릭터를 대상화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걱정했다. 다만, 짧은 영화에 모든 캐릭터를 풍성하게 담기는 어려웠다. 이름이라도 특별하게 지어주고 싶었다. 한 번 들으면 까먹지 않을 이름을 찾다가 에스더라고 지었다. 사실 그렇게 <숲>을 찍고 나서 아쉬움이 남았다. 류혜영이라는 좋은 배우를 더 날뛰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잉투기>의 영자를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혜영 배우의 이름에는 의미가 좀 있다. 영자는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여자 주인공 이름이다. <잉투기>가 현대의 <바보들의 행진>이 되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그 이름을 가져왔다.

 

<유숙자>에서는 기존에 캐스팅한 배우가 출연을 거절해서 엄태구 배우를 급히 투입했다고 들었다. 삭발에 전신 노출까지 그야말로 몸 고생했는데, <숲>으로 캐스팅할 때는 뭐라고 설득했나.

설득하진 않았다. 같이 하자고 했더니 태구도 알겠다고 했다. 사실 같이 하자는 얘기도 안 했을걸? 그냥 시나리오를 써서 태구에게 보여준 게 전부였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태구도 당연히 자기가 출연하는 거라고 이해했던 것 같다.

 

대화를 많이 나누는 형제는 아니구나.

둘 다 말수가 적은데 요새는 그래도 대화가 늘었다. 그때는 정말 안 친했다. 영화를 같이 안 했으면 지금도 비슷했을 것 같다. 배우와 감독으로 만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소통해야 할 부분이 생겼다. “너 예전에 그런 일 겪었잖아. 그때 감정으로 연기해보면 어때?” 하면서 자연스레 옛날얘기도 꺼내고, 서로 기억하는 바가 다르다는 걸 깨닫기도 하면서 조금씩 친해졌다. 사실 아직도 친한 사이라고 할 수 있나 싶긴 한데. (웃음) 어떤 형제들은 애정 표현도 하고 그러지 않나. 서로 아끼는 마음이야 있지만 태구나 나나 그걸 드러내는 편은 아니다.

<잉투기>
<유숙자>

<숲>은 제11회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았다. 4년 만에 선정한 대상작이어서 큰 화제를 모았는데. 당시 수상을 예감했나.

그전에 단편을 찍을 때마다 미쟝센단편영화제에 출품했는데 한 번도 상영된 적이 없었다. 영화제에서 작품들을 봐도 이유를 모르겠더라. ‘내 영화보다 그렇게 대단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왜 내 영화는 안 뽑아주지?’ (웃음) 그러다 <숲>으로 처음 영화제에 가서 대상까지 받으니 얼떨떨했다. 이전 시간이 통째로 눈앞에 지나가는 듯했고, 되게 이상하면서도 기분 좋았다. 근데 나중에 미쟝센단편영화제 심사를 맡으면서 이유를 파악했다. 감독이 어떤 목적으로 영화를 찍었는지 생각보다 잘 보이더라. 영화를 그렇게 찍어선 안 된다는 법은 없지만, 당시 나는 영화제에 가려고 영화를 찍었던 것 같다. 영화의 본질보다 내 욕망이 앞서다 보니 아무리 본질이 좋아도 흐려지는 거다. 예를 들어 <유숙자>는 미쟝센단편영화제에 가겠다는 목표로 정말 갈고 닦아 만든 영화였다. 이렇게까지 찍었는데도 안 뽑아주면 말이 안 된다고 여겼는데 끝내 안 됐다. 당시엔 상심했는데 시간이 좀 지나서 보니 그럴 만하다 싶더라.

 

<숲>을 찍을 때는 뭐가 달랐나.

확실히 전작에 비해 좀 더 자유로운 상태로 찍었다. 어떻게든 영화제에서 인정받아야 다음 단계로 진입할 수 있다는 생각이 강했는데, <숲>을 만들 때는 그런 압박보다 즐기자는 마음이 훨씬 컸다.

 

영화 속 태식의 대사가 떠오른다. 태식은 페이크 다큐멘터리를 찍겠다며 정구에게 큰소리친다. “이 바닥이 진짜 한 방이거든. 영화제 몇 군데에서 사고 좀 쳐주고, 제대로 된 나만의 시나리오만 있으면 게임 끝이야.”

그때 내 마음이지. (웃음) 그러니까 내 눈에는 상업영화 감독으로 데뷔하는 루트가 빤히 보이는데, 정작 실전에서는 뜻대로 풀리지 않는 거다. 그런 답답한 마음을 대사에 쓴 것 같다. 허세라고 볼 수도 있고. 가장 고민했던 건 마지막 대사였다. 과거에 태식은 에스더에게 귓속말로 구정의 비밀을 속삭인다. 그때 태식이 뭐라고 했는지 에스더가 다시 구정에게 알려주는 장면인데, 시나리오 쓸 때는 대사를 못 정했다. 심지어 촬영할 때도 마땅한 대사가 떠오르지 않아서 그 장면만 빼놓고 촬영했다. 한참 고민하다가 그냥 동생한테 물어봤다. 촬영할 때 혜영 배우에게 뭐라고 했냐고. 귀에 대고 그냥 “속닥속닥”했다더라. 마음에 들어서 그대로 사용했다. 추가 촬영할 때 정영기 배우와 일정을 맞추기가 어려워서 홍석재 감독을 급하게 불렀다. 그 장면에 나온 귀는 홍석재 귀다. (웃음)

 

<숲>은 일종의 영화 만들기에 관한 영화다. 어떤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나.

꿈을 좋아한다. 일기는 안 쓰는데, 꿈은 꼬박꼬박 기록한다. 나중에 그걸 읽다 보면 현실보다 꿈이 더 진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어릴 적에 살던 동네가 꿈에 나온 적이 있다. 내게는 그 동네에 관한 마지막 기억이 꿈인 셈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그 동네에 방문했는데 꿈속에 와 있는 것처럼 되게 비현실적인 느낌을 받았다. 워낙 꿈에 관심이 많다 보니 자연스레 주요 소재로 가져오게 됐다. 한편, 숲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경우에는 동생의 실제 경험에 착안했다. 다른 현장에서 목매는 장면을 촬영하다가 비슷한 일을 겪었다고 하더라. 다행히 사고 없이 내려왔는데 동생의 이야기가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목을 매는 사람과 밑에서 잡는 사람, 둘 사이에 만약 미묘한 긴장이 흐른다면? 한쪽이 상대에게 열등감을 느낀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꿈과 숲, 두 이야기를 어떤 타이밍에 어떻게 나누고 엮을지 많이 고민했다. 시나리오를 따로 쓴 후에 여러 버전으로 조합해보며 완성했다.

 

<숲>은 연이어 만든 <잉투기>보다는 오히려 <가려진 시간>(2016)과 더 많이 겹쳐 보이더라. 초록이 무성한 공간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관계가 눈에 띈다. 그저 친밀한 관계인지 아니면 권력과 질서가 작동하는 관계인지 인물들은 의심하고 또 의심받는다.

처음 듣는 해석인데, 내가 오해받는 상황을 되게 싫어하거든. 내 의도는 A인데 상대가 B로 받아들이거나, 내가 하지도 않은 행동을 한 것처럼 누군가가 말하고 다닌다거나. 일상에서뿐만 아니라 영화 속에서도 오해는 내게 중요한 갈등 요소로 작용한다. 결국 이해받고 싶다는 마음과 연결되는 것 같다.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어떤 이야기를 전하지 않나. 작품과 사람마다 편차가 발생하기 마련인데 내 의도와는 아예 다르게 전달될 때도 있더라. 재밌는 부분이지만, 이따금 그런 오해가 부정적 효과를 내기도 한다. 최근에는 모호하게 남겨두기보다는 명확하게 드러내는 일에 집중하는 것 같다. 이것이 사과라면 관객 눈에도 사과로 보이게끔 공을 들인다. 음, 완전히 좋다고 확신할 수 있는 방향인지는 모르겠다.

 

지나치게 분명하면 매력이 줄어들기도 하니까.

애매한 영화가 주는 즐거움이 있다. 감독은 사과라고 생각하며 던졌지만 관객은 자두나 복숭아로 받아들일 때 예상치 못한 재미가 생겨나기도 하거든. 다만 대규모 자본이 투입되는 대중영화를 만들다 보니 모호함을 경계해야 할 순간이 찾아온다. 실제로 오랜 시간 영화를 만든 감독들의 작품을 쭉 따라가면 끝에는 정수만 남은 영화와 마주하게 된다. <매치 포인트>(우디 앨런, 2006)를 보면서 군더더기라곤 하나 없는 모든 것이 칼 같이 떨어지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근데 사방에 이것저것 늘어놓는 우디 앨런의 옛날 영화도 재밌지 않나.

<가려진 시간>
<가려진 시간>

일전에 단편에서 장편, 독립에서 상업으로 영역을 옮길 때마다 “너무 상투적이게 되어버릴까 봐 조심스럽고 고민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대중의 공감을 확보하는 일과 개성을 드러내려는 욕구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맞추려고 하나.

여전히 고민하는 부분인데 결국 ‘관객의 마음을 얻는가? 얻지 못하는가?’라는 문제라고 본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내 방식대로 보여줄 때 이해하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예술 영화’라고 부르는 영역에 쉽게 놓이는 것 같다. 예술 영화를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라 상업 영화를 찍는 이상 산업적 측면에서 고려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뜻이다. 자본 회수라는 과제를 무시할 수 없고, 직업인으로서 좀 더 책임감을 느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잉투기>를 찍을 때 직감했다. 내 마음대로 찍을 수 있는 영화는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고. 근데 이만큼 시간이 흐르고 보니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도 관객의 마음을 얻는 길이 전혀 없지는 않구나 싶다. 내가 좀 더 무르익으면 두 개를 잘 섞어낼 수 있지 않을까. 개성을 표현하면서도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 지금 <콘크리트 유토피아> 후반 작업하면서도 그 부분을 끊임없이 고민한다.

 

<숲>과 <가려진 시간>은 믿음이라는 주제를 공유하기도 한다. <숲>에서 인물들은 친구가 받쳐줄 거라 믿으며 몸을 뒤로 쓰러트리는 ‘믿음 놀이’를 반복한다. 신뢰와 불신을 가시화하는 제스처인데, 태식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구정은 좀처럼 그 놀이에 성공하지 못한다.

내가 종교를 가진 사람이다 보니 자연스레 믿음에 관해 고민하는 것 같다. 열심히 믿고 싶은데 자꾸 의심이 올라오거든. 달리 보면 믿음은 의심이 있어야 존재한다. 믿음과 불신은 늘 양립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믿음이라는 가치가 특별하게 다가온다. 앞서 오해에 관해 얘기했던 바와도 이어진다. 뭐랄까, 믿음은 타인에게 이해받기 어려운 영역이기도 하거든. 자칫 현실을 외면하는 맹신자처럼 비칠 수도 있고. 그런 나를 이해받고 싶은 마음도 영화에 담기는 듯하다.

 

흔히 종교를 가진 사람은 과학적 사고를 못한다고 오해받으니까.

맞다,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무한의 세계로>라는 다큐멘터리를 봤다. 무한대란 무엇인지 질문하며 보이지 않는 세계를 찾아가는 내용인데, 처음에는 숫자로 시작해서 마지막에는 신이라는 존재로 넘어간다. 수학과 과학이 초월적 영역과 연결된다는 점이 굉장히 흥미롭더라.

 

어떤 감독이 되고 싶냐는 질문에 투병 중인 스즈키 세이준 감독을 영화제 GV에서 만났던 일화를 여러 차례 언급했더라. 최근에 그처럼 ‘감독으로서의 나’를 질문하게 했던 강렬한 순간이 있다면.

<헤어질 결심>(박찬욱, 2022)을 봤을 때. 정말 애쓰며 만든, 세공하듯 빚어낸 영화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박찬욱 감독님께 이것저것 많이 여쭤봤다. 실제로 편집 과정에서 프레임 하나하나 넣고 빼기를 반복하셨다고 하더라. “너도 편집 적당히 하지 말고 끝까지 붙들어”라고 말씀하셨는데, 감독님 영화에서 그런 노력이 고스란히 느껴져서 감동했다. 참 좋은 스승을 뒀구나 싶어 기쁘기도 했고. 감독님은 성실하기로 유명하다. 아침 10시에 작업실로 출근해서 저녁 7시에 퇴근하신다. 매일 그렇게 집과 작업실만 오가며 일하는 분이고 옆에서 지켜보며 많이 배웠다. 저렇게 해야 좋은 작품이 나오는구나, 그래야 스즈키 세이준처럼 오래 영화를 만들 수 있겠구나.

 

인디그라운드 기획전처럼 예전 영화를 상영할 기회가 생기면 극장에서 꼭 틀고 싶은 작품이 있나.

<가려진 시간>. 이전까지는 영화를 만들 때 흥행을 염두에 두지 않고 그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풀어내는 데 열중했다. <가려진 시간>은 물론 상업영화치고 다양한 시도를 했던 작품이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이 봐주길 기대하며 만들었다. 근데 개봉 당시 그만큼 관객을 만나지 못했고 시기도 좋은 편이 아니었다.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 강동원 배우가 인터뷰에서 <가려진 시간>을 “아픈 손가락”이라고 칭했는데 내게도 마찬가지다.

엄태화 ©이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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