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매달리기
인디그라운드 기획전 <신기록> 허지은·이경호
글 손시내 사진 이영진 / Feature / 2022-10-31

허지은, 이경호 감독의 영화들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들이 일터와 가정, 학교와 일상에서 겪는 부조리와 폭력의 양상을 담는다. 개인의 경험을 세밀히 포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경험이 놓인 자리를 냉정히 관찰하면서, 허지은과 이경호는 각기 다른 장소에서 고군분투하는 여성의 삶이 서로 연결돼있음을 역설한다. 제17회 미쟝센단편영화제, 제39회 청룡영화상에서 수상한 <신기록>(2018)은 두 사람의 관심을 세상에 알린 작품. 여기엔 두 여자가 있다. 경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소진(이태경)은 한 남자의 집착으로 괴롭고, 현숙(정경아)은 남편의 계속되는 폭행으로 삶의 의지를 잃은 듯 보인다. 얼핏 접점이 없어 보이는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나는 공간은 뜻밖에도 운동장이다. 달리기 기록을 단축하기 위해 훈련하는 소진은 매일 같이 철봉에 매달리는 연습을 하는 현숙을 먼발치에서 바라본다. 답답한 현실 속에서 이들은 어떤 길을 찾을 수 있을까? <신기록>은 소진과 현숙의 의지가 만나는 놀라운 장면을 향해 묵묵히 나아간다. 전남대학교 영화 동아리에서 처음 만나 함께 영화를 공부했고, 이제는 서로 없어서 안 될 동료가 된 허지은과 이경호의 팀명은 ‘믿는 구석.’ 작업이 막힐 때면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하며 슬며시 옆을 바라본다. 그렇게 탄생한 영화들은 배우 이태경이 전하는 것처럼, 두 감독을 닮아 “다정하면서도 진취적”이다. 2010년대 단편영화를 상영하는 인디그라운드 특별 기획전을 계기로, 두 감독에게 <신기록>의 기억을 물었다. (특별 기획전 '인디플렉스 데이: 가을날의 단편영화관'은 11월 13일까지 indieground.kr에서 즐길 수 있다)

 

 

2010년대라는 가까운 과거를 돌아보면 무엇이 떠오르나.

허지은_ 2010년대 전반부는 대학 졸업하고 계속 지역에서 영화를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시기였다. 각자 사회생활 시작하면서 영화랑 멀어지기도 했고. 그러다 2016년 이후에 다시 기회가 생겼다. 당시 어떤 영화들이 만들어지고 있나 열심히 찾아보려던 게 기억난다.

이경호_ 유튜브나 SNS가 단순한 자기표현의 수단이 아니라, 사회적 이슈와 결합하면서 소통의 도구가 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허지은_ 아무래도 2015년 이후의 페미니즘 리부트를 언급해야 할 것이다. 우리 역시 그런 흐름 속에서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싶어 했고, 작업하고 싶어 했던 사람들이었으니까. 영화를 통해 나와 내 주변의 일들을 표현하고 싶었다. 우리가 사회적으로 연결된 존재라는 걸 이야기를 통해 드러내는 작업 방향을 잡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다.

이경호_ 사회 변화에 대한 기대감이 없던 때도 있었다. 변화가 눈에 보이지 않았고, 내가 참여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2010년대 후반부는 뭔가 달랐다. 내게도 어떤 변화들이 보였다. 거기에 영향도 많이 받았고.

허지은_ 한편으론 2010년대를 거치면서 예전에 좋아했던 영화들을 계속 좋아하기 힘들겠다고 생각한 경우도 많다. 지금 관점에선 점차 보기 힘들어지는 게 늘어나고 있으니, 그럼 우리는 어떻게 찍어야 할까 더 많이 고심하게 된다. 지금 창작자들이 공통으로 고민하는 지점 아닐까.

 

두 감독에게 <신기록>은 어떤 의미를 갖나. 영화제 수상작이기도 하고, 이후에도 영화에 관해 이야기할 자리가 많았을 텐데.

이경호_ 수년이 지나 다시 봤는데, 좀 이상하고 특이하더라.

 

어떤 점에서?

이경호_ 설명을 과도하게 안 하고, 이미지에 집중했으니까. 누구나 쉽게 받아들이고 좋아할 만한 스타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편한 영화는 아니잖나. 불편하게, 긴장하면서 봐야 하는 영화다. 그런데도 그 메시지가 명확하게 닿았다는 평가를 받았다는 건, 다들 그 메시지를 기다리고 있었고, 이미 공감하고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난 한때 좋은 영화는 어디서든 좋은 영화고, 세상엔 본질적 아름다움 같은 게 존재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신기록> 이후로는 특정한 문화 안에서 함께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예술 장르의 가치를 깨닫게 됐다. 우연히도 그걸 알 소중한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허지은_ <신기록>의 메시지와 소재를 사람들이 더는 듣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여자가 자살 시도를 한다거나, 오히려 남편을 공격해서 죽인다는 식의 뉴스는 잊을 만하면 계속 나왔고, 가정폭력은 그 심각성에 비해 사람들에게 피곤하고 해결할 수 없는 일로 여겨지고 있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이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정말 많이 고민했다. <신기록>은 그 고민이 담겨있는 영화라서, 메시지나 주제를 중요하게 여기며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 우리에게 종종 기준이 돼주곤 한다. “우리가 그때 어떻게 했었지?” 하면서 되돌아보는 거다.

<신기록>
<신기록>

두 사람은 이전에도 계속 협업한 거로 안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공동 연출을 시작한 건 <신기록>부터였다고.

허지은_ 각자 좋아하는 영화, 재밌어하는 소재나 장르 같은 게 꽤 달랐다. 그런데 페미니즘을 접하면서 비슷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전부터 이경호 감독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다. <오늘의 자리>(2017) 시나리오를 쓰며 많이 헤맸는데, 그때도 방향을 잡아줬다. 촬영장에만 안 나왔을 뿐이지, 편집도 많이 도와줬고. 추구하는 방향이 같은 사람과 하는 작업이 재밌다는 걸 그때 느꼈다. 다음 작품도 같이 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광주에서 독립 단편영화 제작 지원이 처음 생기면서 기회가 생겼다. 이경호 감독이 틈틈이 써놨던 단편 소설을 영화로 만들어보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오랜만에 연출하게 된 이경호 감독이 먼저 공동 연출을 제안했다.

이경호_ 혼자는 힘들 것 같더라. 시나리오를 쓴다고 해서 바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 여정을 함께 할 수 있는 힘, 같이 고민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원작이 된 단편 소설은 어떻게 쓰게 됐나.

이경호_ 일상 속의 성폭력에 조금씩 관심을 두기 시작한 시기가 있었다. 조금만 찾아봐도 사람들이 얼마나 말하고 싶어 했는지, 또 그게 얼마나 들리지 않았는지 알 수 있더라. 나 역시 완전히 공감하기보다는 계속 상상해보고 질문하면서 그 문제에 가까워지는 단계였다. 그러다 한 아파트에서 어떤 여성이 자살 시도한 직후의 상황을 목격하게 됐다. 난간에 오래 매달려 있다가 구조됐던 거다. 그때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건 안심한 사람들의 대화였다. “그냥 부부싸움을 했나 보네.” “다행이다.” 그 여성의 문제는 이후로도 계속될 텐데, 사람들한테는 그렇게 잠깐 반짝하고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는구나. 한편엔 죄책감도 있었다.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으니까. 당시 느꼈던 여러 감정을 담아보고 싶었다.

 

현숙이라는 인물을 좀 더 알고 싶어서 <신기록>을 찍었다고 말한 적 있다. 무슨 뜻인가.

이경호_ 그 사건이 일기에만 남는 기록 이상의 무언가가 되길 바랐다. 내게 영화는 일이 아니라 삶의 일부다. 영화가 나의 방법이라는 뜻이다. 캐릭터와 이야기를 만들고 주제를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더 많이 느끼고 고민할 수 있고, 소재와 사람에게 최대한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허지은_ 이야기의 기반이 됐던 사건을 들었을 때, 나 역시 사람들의 반응에 놀랐다. 한편으론 그렇게 매달려 있는 모습을 사람들이 일종의 시위나 퍼포먼스처럼 받아들였다는 생각도 들었다. 시나리오 쓰면서 비슷한 사건을 다룬 기사들을 찾아봤는데, “죽으려면 죽지 왜 매달려 있었냐?”는 식의 댓글이 달리더라. 그렇게 비난하거나 단순히 ‘가정폭력’이라고 말하기 전에 그 사람과 더 가까워지고, 그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

 

<신기록>에는 여성이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위협과 폭력이 세밀하게 담겨있다. 여성이 상대에게 여지를 줬으리라는 짐작, 신상 정보가 노출되는 상황에 대한 불안,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버리는 폭행까지.

허지은_ 당시 SNS뿐만 아니라 친구들을 통해서도 다양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전에는 그냥 이상한 경험을 했다고 말하는 데서 그쳤을 텐데, 왜 이런 경험을 공통으로 하고 있는지 자꾸 되새기고 분명히 문제가 있다는 방향으로까지 나아가게 되더라. 그런 이야기를 이경호 감독에게 들려주곤 했다.

이경호_ 그 중엔 정말 무서운 이야기도 있었다. 그런 것들을 그대로 쓰는 건 비윤리적이라고 판단해서 바꾸고 순화하는 과정을 거쳤다.

 

<신기록>은 상황에 대한 직접적 설명을 자제하는 간결한 영화다. 앞서 특이하다고 평하기도 했는데, 시나리오의 특징이기도 했나.

이경호_ 시나리오에서 바뀐 부분이 거의 없다. 다만 편집하면서 순서가 좀 바뀌었다.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대사는 별로 없어도 되겠다고 판단했다.

허지은_ 설명하기보다 이미지로 보여주는 것이 더 효과적인 전달 방법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이게 뭘까?” 하며 지켜보게 해서, 끝내 이런 이야기였다는 걸 알게 하자는 마음이었지.

이경호_ 서스펜스, 스릴러 소설의 장르적 특징에서 도움을 얻었다.

허지은 ©이영진

본래 제목은 ‘오래 매달리기’였다고. 그에 비하면 ‘신기록’은 상상의 여지를 훨씬 열어놓는 제목이다.

이경호_ ‘오래 매달리기’는 현숙이라는 인물이 난간에 매달려있던 상황, 그 첫 이미지에서 시작된 제목이다. 그런데 촬영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과정에서 계속 안타까웠다. 앞으로 나아간다는 느낌이 없으니까. 그런데 나중에 소진이 현숙을 구하는 컷을 넣을 수 있게 되면서 제목이 바뀌었다.

허지은_ 사실 시나리오는 소진이 현숙을 구하러 뛰어 올라가며 끝난다. 그렇게 뛰어 올라가는 동안 소진이 어떤 생각을 할까 상상하며 인서트 컷을 여러 개 찍어두었다. 미끄러지는 현숙의 손, 그걸 잡는 소진의 손 등 여러 컷이 있었다. 그런데 편집하다가 문득 그렇게 손을 붙잡는 모습까지 영화 마지막에 넣어보면 어떨까 싶었다. 그게 우리가 원했던 방향이라는 것을 편집 마무리 과정에서 알았다.

이경호_ 억지로 쥐여주는 희망이나 위로 같은 게 될까 봐 무척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촬영할 때도 여지를 조금 남겨두는 정도였다. 그런데 편집하면서 바로 그 마지막 장면에서 희망과 연대로까지 갈 수 있는 힘이 나온다는 걸 알게 됐다. 다행스러웠고 기뻤다.

허지은_ 소진이 달려가며 하는 상상에 여러 버전이 있었다. 손을 잡는 컷도 있었지만, 아예 소진의 손이 들어가지 않는 컷도 있었다. 애초 연출 의도는 ‘우리가 그 손을 붙잡을 수 있을까, 우리가 닿을 수 있을까’ 하고 질문하는 거였는데, 여러 선택지를 두고 고민하면서 결국 우리가 원하는 답을 찾았으니 정말 신기한 경험이다.

이경호_ 앞으로 어떤 영화를 찍더라도 다시 하기 힘든 경험일 것 같다.

허지은_ 소설에서 시나리오로 각색하던 과정도 떠오른다. 소설은 소진이 현숙의 딸과 함께 난간에 매달린 현숙을 보는 장면에서 끝난다. 각색을 진행하면서 마지막에 소진은 어떤 행동을 할까, 어떻게 하고 싶을까 고민하다가, 이경호 감독이랑 눈이 마주치면서 “뛰어 올라갈까?”라고 했다. 그 순간에 어떤 희열이 있었다.

이경호_ 소설에서는 뛰어 올라가지 않았고, 시나리오 쓸 때 뛰어 올라갔고, 편집에서 손을 잡았지.

허지은_ 촬영하면서도 알지 못했는데, 우리가 하나씩 남겨두었던 것들이 연결되면서 이야기가 이어져 간 느낌이다. 참 신기하다.

이경호_ 어쩌면 변화는 큰 깨달음이나 삶의 철학이 아니라 충동에서, 작은 관찰에서 시작될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나도 예전엔 공부를 많이 하고, 모든 게 준비된 다음에 실천하려는 사람이었다. 위대한 영웅들의 서사만 보고 자라왔으니까.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소진 같을 거라고 생각한다.

 

여러 작업을 함께 한 이태경 배우, 광주에서 연극 활동을 하는 정경아 배우가 출연했다. 자칫 단면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인물들인데, 발산하지 않는 절제된 연기가 각각의 상황을 깊게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허지은_ 현숙의 폭력 남편으로 나오는 노희설 배우와 정경아 배우는 실제 부부 사이기도 하다.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시는 연극배우인데, 그간 같이 작업할 기회가 없었다. 다른 감독님들과 작업하는 것만 보다가 <신기록>을 계기로 제안하게 됐다. 태경 씨는 전작 <오늘의 자리>에서 만난 인연으로 함께 했다.

이경호_ 현숙의 경우는 무력감이 키워드였고, 소진은 애매한 상황에서 고통받고 있다는 게 중요했다.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사례를 수집하면서 그런 부분들을 표현하고 싶었다. 배우들에게 최대한 설명하고 싶어서 인물 별로 에세이를 써서 드렸다. 그게 우리가 아는 유일한 연출 방법이었다. (웃음) 현장에서 배우들은 늘 우리가 기대했던 것 이상을 보여줬다.

허지은_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는 우리가 정말 연기를 몰랐지. (웃음) 배우가 자기 방식으로 인물을 해석하고 표현하는 걸 보며, “우리가 상상한 것보다 더 잘 나오고 있어!” 하곤 했다.

 

이태경 배우는 허지은, 이경호 감독과의 작업에서 힘을 많이 받았다고 하더라. 촬영할 때 감독들이 무조건 격려해준다고. 함께 일하는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동시에, 기분 좋은 긴장을 느끼게 하는 현장이라는 말도 덧붙여줬다.

이경호_ 아이고, 원래 잘하셔서 그런 건데.

허지은_ 태경 배우랑 할 땐 거의 첫 테이크 아니면 두 번째 테이크에 오케이라는 느낌이 온다. <신기록> 촬영 때 소진이 엘리베이터 타는 장면에서 첫 테이크가 너무 좋아서 바로 이경호 감독이랑 마주 봤는데, 그 모습을 보고 우리 스태프가 웃었던 기억이 난다. 너무 행복해 보인다고 하더라. (웃음)

 

<신기록>은 소진의 웃지 않는 얼굴이 인상적이다. <해미를 찾아서>(2019) 같은 다른 작품에서도 인물의 얼굴과 표정을 진득하게 들여다보는 편인데, 얼굴에서 무엇을 보나.

이경호_ 소진이 겪는 건 명확하게 표현되지 않는 공포였기 때문에, 그 표정이 콘셉트에 맞았다고 본다. 그렇다고 표정을 짓지 말라고 디렉팅한 건 아니다. 시나리오를 통해 우리가 표현하고 배우가 받아들인 부분이 비슷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게 아닐까.

허지은_ 평소에 그런 표정들이 자꾸 보였다. 불편한 자리에서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지만 여자들끼리는 알아볼 수 있는 미묘한 표정의 변화, 웃음소리의 변화 같은 것들이 계속 눈에 들어왔다. 평소에 잘 감추고 있다가,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인물을 우리가 주로 그려내는 듯하다.

<신기록>
<신기록>

<신기록>은 따로 얘기해도 충분히 의미 있지만, 허지은, 이경호 감독의 맥락 안에서 더 풍부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영화다. 계속해서 한국 사회의 여성문제를 그리는데, <신기록> 이후로는 훨씬 다층적인 방식으로 혐오와 연대를 다루고 있다.

이경호_ 우리가 결코 우울감에서 멈추지 않아도 된다는 걸 깨닫게 해준 게 <신기록>이다. 자연스럽게 그럼 다음엔 어떤 걸 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됐다. <신기록> 다음에 만든 작품들은 전부 내게 숙제를 줬다. 손을 잡았으니까 만나게 해보자, 만나서 무언가를 함께 해보자는 식으로 계속 다음을 하게 됐다. 그런 의미에서 <신기록>은 첫 번째 숙제다. 숙제를 기다려왔던 사람처럼 행복하게 찍고 있다.

 

“여성의 이야기를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고 말한 적 있다. 소재보다는 방법에 대한 고심으로 들린다.

이경호_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조지 밀러, 2015)를 최고의 상업 페미니즘 영화라고 생각한다. (웃음) 사이버펑크 세계에서 현대적인 메시지를 풀어놓을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꼭 갖춰야 하는 형태가 있는 게 아니라,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니 어떤 옷을 입어도 상관없다는 마음이다.

허지은_ 소재에 대한 고민도 물론 한다. 계속 연결되는 이야기를 해왔으니 주변에서도 그다음을 궁금해하고, 나 역시 어떻게 필요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다만 한없이 소재에 대한 고민만 넓히는 게 아니라 다른 표현 방법을 찾아보려고 노력 중이다.

 

전남대 영화 동아리에서 만났다고. 동아리 이름은 뭐였나.

허지은_ 상상공작실. (웃음) 내가 1학년, 이경호 감독이 4학년일 때 생긴 신생 동아리였다. 술 마시고 많이 놀았다. 동아리는 다 그런가 싶었는데, 이경호 감독은 열심히 하더라. 기계 같은 걸 먼저 공부해서 많이 가르쳐주곤 했다. 지역에는 동료를 만들고 같이 우당탕탕 하며 소소하게 망해볼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공간이 많지 않다. 동아리에서 그런 소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이경호_ 그러네. 그때는 영화감독이나 스태프를 꿈꾸지도 않았으니까.

 

지금은 왜 계속 영화를 하는 것 같나.

이경호_ 그 전에 시도 썼고 소설도 썼다. 물론 너무 행복했지만 출판되지 않는 이상 사람들과 공유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영화는 좀 달랐다. 한 공간에 모여서 틀고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가 좋더라. 덜 외롭다고 생각했다. 피드백이 바로 오고, 영화를 본 사람들의 얼굴을 바로 볼 수 있어서 기뻤다.

허지은_ 20대 후반에 회사를 다니면서, 내게 영화가 뭐기에 다시 찍어야 하는 걸까 고민한 적이 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영화로 세상과 연결됐다는 느낌을 별로 못 받았다. 그런데 그 느낌을 찾고 싶었다. 처음 영화를 하고 싶었던 이유도 거기 있었으니까. 언젠가는 꼭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계속 영화를 해보겠다고 결정했다.

 

‘긴 밤’이라는 제목으로 장편을 준비 중이라고 들었다.

허지은_ 장편을 제대로 써보자는 생각에 각자 시나리오를 썼다. 내가 쓴 이야기가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피치 앤 캐치에 선정돼 기획개발비를 받았고, 제작을 추진 중이다. 아동 폭력을 겪은 자매의 이야기고, 그들이 성장해서 다른 누군가를 지켜주고 싶어 하는 내용이다. 처음엔 일반적인 드라마로 시작했는데, 이경호 감독과 함께 각색하면서 여러 방향을 생각해보는 중이다. 구성과 장르를 달리해서 만들 수 있는 효과를 탐색하고 있다. <신기록> 때 생각이 많이 난다.

이경호_ 첫 장편인 만큼 좋아하던 장르인 스릴러나 서스펜스가 드러날 수 있도록 작업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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