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 평양, 그리고 제주
<수프와 이데올로기>
차한비 / Choice / 2022-10-22

한반도 분단 이후 부모는 ‘재일코리안 사회의 축소판’이라 부르는 오사카 이쿠노구에 정착했다. 스물두 살에 결혼한 어머니는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고, 열성 넘치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활동가인 아버지와 함께 정치 활동에 뛰어들었다. 조선학교에 입학한 자녀들은 ‘애국 교육’을 통해 자연스레 북한의 이념과 사상을 습득했다. 부모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조국’ 북한으로 아들 셋을 전부 보냈는데, 그중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장남은 김일성의 환갑을 축하하는 인간 선물로 선발되어 강제 북송됐다. 북한으로 이주한 가족들이 생활고를 겪는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뒤, 어머니는 수십 년간 돈과 생필품을 전달하며 아들을 포함한 일가친척 모두의 가장 역할을 도맡았다. 한편, 오빠들이 떠나면서 졸지에 외동딸이 되어버린 양영희 감독은 부모에게 말하지 않는 것이 차츰 늘어났다. 아버지의 신념만큼이나 어머니의 희생이 버거웠고, 얽히고설킨 관계를 들여다볼수록 원망은 물론 그 후에 뒤따르는 죄책감도 깊어졌다.

양영희 감독에게 가족은 단지 애정 어린 공동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제대로 이해하기 전까지는 벗어날 수도, 끌어안을 수도 없는 존재. 가족이 거쳐온 세월은 현대사의 암울한 역사와 고스란히 맞물리고, 그 안에서 싹튼 의심과 불안은 영화를 만드는 동력으로 작동했다. 10년 동안 아버지와 카메라를 매개로 대화하며 완성한 <디어 평양>(2006), 평양에 사는 조카의 눈을 빌려 북한 사회를 다각도로 관찰한 <굿바이 평양>(2011)에 이어 감독은 10년 만에 세 번째 다큐멘터리를 내놓는다. 3부작을 마무리하는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4.3 체험자인 어머니 강정희의 증언과 기억을 따라가는 동시에 감독이 남편 아라이 카오루를 만나 새로운 가족을 꾸리는 과정을 담는다. 애정의 둥지가 아니라 의무와 부담의 거처였던 가족의 곁을 떠났다가 결국 자신을 끈질기게 붙잡는 문제에 직면하기까지의 경로가 고스란히 담긴 작품이다. 남과 북,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이산의 고통을 기록해온 기나긴 양영희 감독의 영화 여정은 어떤 결말을 맞이할까.

<수프와 이데올로기>
<수프와 이데올로기>

오래전 녹화한 비디오에서 딸이 아버지 량공선에게 어떤 사위를 바라느냐고 묻는다. 아버지는 단호히 답한다. “미국 놈, 일본 놈은 안 돼.” 식탁 위에서 실랑이와 농담이 한바탕 지나간 후, 아버지는 다시 간결한 말투로 돌아온다. “밥 먹자.” 그로부터 시간이 얼마간 흐른 후, 오사카 집에 일본인 아라이 카오루가 방문한다. 아버지가 살아 있다면 펄쩍 뛰었을지도 모르지만, 한여름에 정장까지 갖춰 입고 인사하러 온 예비 사위에게 어머니는 환대의 의미로 백숙을 대접한다. 무엇보다 그것이 중요하다는 듯 “밥 먹자”고 힘주어 말했던 아버지처럼, 세 사람은 곧 얼굴을 맞대고 땀을 뻘뻘 흘리며 수저를 뜨는 일에 열중한다. 이후 영화에는 ‘수프’가 두 번 더 등장한다. 처음엔 카메라를 든 딸 앞에서 장모가 사위에게 백숙 만드는 법을 알려주고, 그다음엔 사위가 장모에게 배운 대로 수프를 끓여 상을 차린다. 그렇게 2016년 여름을 더불어 나는 동안, 세 사람은 식구가 된다.

문재인 대통령이 ‘조선’ 국적자의 입국을 허용하겠다고 밝히면서 식구들의 대화에는 기대감이 피어오른다. 내년에는 제주에서 열리는 4.3 추모식에 참석할 수 있겠다는 희망이 보여서다. 2015년 무렵부터 어머니는 오랫동안 가슴 속에 묻어둔 고향 제주와 4.3에 관한 기억을 조금씩 꺼내 놓는다. 부모가 보는 앞에서 군경이 아이를 때려죽였다는, “빨갱이 사냥”한다면서 학생이든 임산부든 닥치는 대로 줄 세워 기관총으로 쏘아댔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다. 강정희는 떨리는 음성으로 열여덟 살에 겪은 대량 학살의 공포를 전한다. 잔인한 진압 작전에 맞서 한라산 무장 부대에 합류했던 약혼자를 잃은 후, 강정희는 동생 둘을 데리고 일본 밀항을 감행한다. 피난길에 나선 지 반세기가 훨씬 지난 다음에야 말문을 뗀 어머니를 지켜보며, 감독은 서서히 4.3의 윤곽을 그려 나간다.

<수프와 이데올로기>
<수프와 이데올로기>

4.3은 목숨을 걸어야 했던 어머니의 애달픈 청춘이자, 뿔뿔이 흩어져 살아가는 디아스포라 가족의 운명을 결정한 사건이다. 2018년 봄, 한국 정부가 임시 발급한 강정희의 일회용 여권을 보면서 카오루는 “난민 비자”라고 칭한다. 그때 비자가 아니라고 정정하는 감독의 목소리가 일순 가라앉는다. 어머니는 유년 시절을 보낸 고향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없는 처지다. 영화 제작으로 인해 북한 출입을 금지당한 감독은 언제쯤 오빠와 조카들을 다시 만나고 평양에 묻힌 아버지의 묘를 찾아갈 수 있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그렇게 어머니와 딸은 난민의 정체성을 공유한다. 남한을 부정하고 북한에 충성하는 어머니, 기도문을 외듯 수령 찬양가를 습관처럼 부르는 어머니. 끝내 온전히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거라 여겼던 대상이 어떤 시간과 경험을 품고 사는지 깨달은 후, 감독은 드디어 마주한 제 뿌리 앞에서 울음을 터뜨린다. “4.3을 알고 나니까 엄마를 탓하지 못하겠네.” 4.3은 강정희와 감독을 이어주는 가슴 아픈 다리가 된다. 비극의 그 날이야말로 강정희의 생을 구성하는 핵심이다.

제주에서 세 식구는 사방을 빼곡하게 채운 위패 앞에 머문다. 수많은 이름 중 친밀한 이름을 찾아보려 하지만 어머니는 치매로 기억을 점차 잃어가는 중이다. 영화는 다른 주제로 말을 돌리거나 고요히 잠에 빠진 강정희를 재촉하며 집요하게 캐묻는 대신 듣지 못한 대답을 그대로 남겨둔 채 나란히 선 가족의 모습을 기록한다. 그들은 대화와 침묵을 통해 역사를 이해해나간다. 백숙 만드는 법을 딸과 사위에게 가르쳤던 것처럼 어머니는 비밀로 간직했던 이야기를 띄엄띄엄 풀어내고, 딸과 사위는 잘게 조각난 어머니의 기억을 그러모으며 “슬픈 일은 담아두면 힘드니까 잊는 것도 좋겠다”고 위로한다. 그들 방식대로 전수와 계승을 진행하는 동안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위계 없이 동일선상에 놓인다. 삶에 자리한 모든 사연이 어우러지며 한 사람의 이데올로기를 구축한다. 닭의 배 속에 온갖 재료를 넣고 꿰매야 하는 요리, 하지만 봉합으로 끝나지 않고 긴 시간 냄비에 담아 푹 끓여야 비로소 완성되는 그 수프와 마찬가지다.

 

수프와 이데올로기 Soup and Ideology 감독 양영희 출연 강정희, 양영희, 아라이 카오루 제작 PLACE TO BE, 나비온에어 배급 엣나인필름 제작연도 2021년 상영시간 118분 등급 12세이상관람가 개봉 2022년 10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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