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은 당신을
<애프터 미투>
손시내 / Choice / 2022-10-06

“내 침묵은 나를 지켜준 적이 없습니다. 당신의 침묵도 당신을 지켜주지 않을 것입니다.” 흑인 레즈비언 시인이자 페미니스트 작가인 오드리 로드는 「침묵을 언어와 행동으로 바꾼다는 것」이라는 짧은 글에서, 말하는 용기와 소수자의 삶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는 침묵을 깨고 말하는 행위야말로 사회의 변화를 불러오며 서로 다른 여성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이라고 평한다. ‘피해자일 뿐만 아니라 전사(戰士)’라는 표현이 보여주듯, 이때 중요한 건 여성을 침묵하게 한 횡포와 억압의 서사만이 아니다. ‘말하기’에 기어이 도달하고야 마는 주체의 의지와 힘에 집중할 때, 이전까지는 상상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지난 몇 년 한국 사회의 중요한 화두였던 ‘미투 운동(#MeToo)’이 만들어낸 성과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성폭력 범죄 신고와 피해 사실 폭로를 넘어, 여성들은 다양한 경험을 서로 나누며 말하기의 장을 넓혀가고 있다. 이전까지는 공적 사회의 주요 주제로 부각되지 않던 여성의 문제가 공론장을 차츰 채운다. 네 개의 단편 다큐멘터리로 이뤄진 <애프터 미투>는 그처럼 새로운 세상을 열어젖힌 목소리에 관한 영화다.

박소현 감독의 <여고괴담>은 중·고등학교에서 발생하는 성폭력 사건에 대응하고 공론화하는 운동, 스쿨 미투를 다룬다. 스쿨 미투의 시작이 된 용화여고의 사례를 중심에 두지만, 개요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고 전문가의 말을 덧붙이는 시사 프로그램 같은 방식은 아니다. <여고괴담>은 조각난 목소리들을 모아 완성한 모자이크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것들을 가득 적어둔 일기장을 읽는 목소리,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결정을 내린 학교에 저항하는 목소리, 피해를 모른 척했다는 죄책감과 친구를 지켜주고 싶다는 다짐이 동시에 실리는 목소리. 이 목소리들엔 얼굴이 없다. 목소리는 그저 흑백으로 찍힌 학교의 풍경들 위를 부유할 뿐이다. 발화자를 실질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취했을 이러한 선택은 또 다른 중요한 효과를 낸다. <여고괴담>의 목소리는 “그 선생님 조심해”라는 말처럼 소문과 웅성거림의 형태로 전해질 수밖에 없는 여성 경험의 보편적 성질을 드러낸다. 영화는 그 목소리들이 모여 어둠을 밝히는 용기의 순간을 포착한다.

<여고괴담>
<100. 나는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다>

이솜이 감독의 <100. 나는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다>에선 오직 한 사람의 목소리만 들려온다. 그의 이름은 행복, 혹은 박정순이다. 본인의 설명에 따르면 그는 노동자, 중년여성, 씩씩한 사람, 이혼녀 등 많은 정체성을 지닌 존재다. 일터에 나가고 귀가하는 행복의 일상이 나열되는가 싶더니 영화는 불현듯 캐리어를 끌고 여행길에 오르는 그를 보여준다. 춤과 영상 일기 등 자신을 회복하고 치유하는 여러 과정을 겪으면서도 좀처럼 하지 못했던 일을 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피해 경험을 말하기 위해서다. 영화는 그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어떤 아픔을 가졌는지 먼저 알려주지 않는다. 그저 무언가 망설이고 머뭇거리며 끝내 결심하는 행복의 자취를 천천히 따라갈 뿐이다. 떨리는 손으로 마이크를 쥔 행복은 그가 나고 자란 고향에서, 이제는 폐허가 된 집과 텅 비어버린 벌판에서 오랫동안 간직해왔을 말을 꺼낸다. 친족 성폭력과 가정폭력의 피해 생존자이자,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기 위해 부단히도 애써온 그는 “너 때문에”로 시작해 마침내 “아픈 내 몸과 마음을 용서”하는 것으로 끝나는 말하기의 여정을 완수한다. 카메라는 그 길의 든든한 동반자로 남는다.

강유가람 감독의 <이후의 시간>은 문화예술계에서 성폭력 문제에 대응하는 활동을 해오고 있는 여성 예술인들의 목소리를 담는다. 각각 시각예술, 영화, 연극 등으로 세부 분야는 다르지만, 자신이 몸담은 장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공동체의 역할을 고민한다는 점에서 이 목소리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들의 이야기는 미투 운동의 진전과 성폭력 문제 해결에 필요한 실질적 노력을 생각하게 한다. “그게 그렇게 힘든 일인지 아무도 몰랐”던 채로 시작해, “자꾸 담당이 되어버리고, 자리마다 불려다니”는 시기를 거쳤다는 이들은 묻는다. 단지 몇 명이 성폭력 문제 해결의 전담자가 된다면, 그 구조는 과연 괜찮은 것인가? 영화는 활동과 작업 사이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는 이들의 상황 역시 다룬다. 활동은 나날이 가중되고 작업은 번번이 멀어진다. 그러다 보면 내가 작가인지 활동가인지 모르겠는 때도 오고 만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한두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는 공동체적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일이다. <이후의 시간>에 모인 목소리들은 미투 운동이 문화 예술계에 던진 화두를 계속해서 넓힌다.

<이후의 시간>
<그레이 섹스>

소람 감독의 <그레이 섹스>는 피해와 가해의 용어에서 비켜난 회색지대의 목소리를 듣는다. 얼굴을 드러내거나 드러내지 않는 인터뷰이들은 여성의 성적 욕망이 안전하고 편안한 방식으로 실현되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을 말해준다. 각자 겪은 일은 전부 다르지만, 이들이 들려주는 경험의 핵심에는 어떤 간극이 있다. “그 사람이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내가 겪은 건 범죄 같다는 생각.” 미투 운동의 뜨거운 물결 속에서 많은 이들이 이름 없이 떠돌던 자기 경험을 피해라고 분명히 명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폭력과 피해라는 규정 속에서 제대로 조명할 수 없는 욕망과 불쾌감의 문제 역시 남았다. 너무 비참하고 찝찝했던 그 경험을 도대체 어떤 식으로 이해하고 말해야 할까? <그레이 섹스>는 ‘데이트 폭력’이나 ‘가스라이팅’ 같은 용어와 거리를 둔 채 인터뷰이들의 목소리를 화면에 옮기는 데 집중한다. 다양한 애니메이션 기법과 비너스를 그린 명화들, 리듬감이 도드라져 선언적으로 들리는 음악이 한데 모여 우리가 경청해야만 하는 회색의 목소리를 완성한다.

<애프터 미투>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처음으로 증언했던 故 김학순의 이야기로 문을 연다. 하고 싶은 말은 언제든지 꼭 하고야 말겠다는 그 선연한 다짐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이에게 단단한 용기를 불어넣는 듯한 시작이다. 짧게 편집된 오프닝은 ‘위안부’ 피해 사실 증언과 더불어 말하기의 역사를 보여준다. 2003년에 시작된 성폭력 생존자 말하기 대회부터 해시태그 운동(#OOO_내_성폭력)과 거리의 행진까지, 영화는 미투 운동 이전에 결코 아무것도 없었던 게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강조한다. 그 역사를 딛고 현재에 도달한 여성들은 성평등하지 못했던, 성차별과 성희롱이 만연하고 당연한 사회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다”고 소리 높여 이야기한다. 그 외침을 엔딩에 새겨두는 <애프터 미투>는 영화란 사회를 가로지르는 목소리들을 만나게 하는 장소가 될 수 있다고 함께 외치고 있다.

 

애프터 미투 #AfterMeToo 감독 박소현, 이솜이, 강유가람, 소람 출연 <여고괴담> 용화여고 졸업생, 용화여고성폭력뿌리뽑기위원회 <100. 나는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다> 박정순 <이후의 시간> 송진희, 이산, 남순아 <그레이 섹스> 달콤, 토기, 삐삐, 귤 제작 애프터 미투 프로젝트 팀 배급 (주)영화사 그램 제작연도 2021년 상영시간 85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2년 10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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