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다는 얘기를 벌써 네 번이나 했네요.” 배우로 사는 마음에 관해 묻자 김용지는 금세 들뜬 표정이 됐다. 실은 재밌다고 일곱 번쯤 말한 뒤였다. 그가 말하는 ‘재미’는 할 이야기가 없어 나오는 범용한 표현이 아니다. 다양한 것들에 쉽게 흥미를 느끼지만, 거기서 재미를 발견하려면 여러 가지 노력과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고. “온전히 제 것이 됐을 때 재미있다고 말할 수 있어요.” 김용지의 재미는 그러니까 분투의 산물이다. 다른 인물의 삶을 살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는 일은 그를 끊임없이 즐겁게 했다. 배우가 되고 싶었던 평생의 꿈을 이뤄서라기보다 마음이 동하는 일을 끝없이 찾아 흘러온 결과다. 어릴 땐 요리와 연극연출을 공부했고, 우연히 사진작가와 협업한 일을 계기로 프리랜서 모델이 됐으며, 호기심을 좇아 배우로 살기 시작했다. 극의 중심에 자리 잡지 못하고 잠시 머물다 가는 인물을 주로 연기하면서, 그 외로운 마음을 더듬기 위해 김용지는 편지를 자주 썼다. <둠둠>은 드라마 조연으로 우리 눈에 익은 김용지가 처음 선보이는 영화이자, 그가 길게 써 내려간 편지를 가득 품은 작품이다. 김용지가 연기한 이나는 혹독한 시기를 지나고 있다. 그는 한때 잘나가는 테크노 DJ였으나, 책임져야 할 어린 딸과 정신적으로 취약한 엄마 사이에서 힘겨워하며 음악을 ‘잠시 쉬는 중’이다. <둠둠>은 그런 이나가 옛 동료들을 만나고, 디제잉을 다시 시작하며, 독일로 떠날 수 있는 오디션에 참가하는 과정을 그린다. 절박하게 시작했으나 뜻밖에도 삶은 눈에 띄게 변하지 않는다. 외려 그 여전함에 반했다는 김용지가 빼곡히 채운 편지의 뒷면을 보여줬다.
크게 주목받은 <미스터 선샤인>의 호타루와 <구미호뎐>의 기유리는 매력적이고 특색 있는 캐릭터였지만, 극을 이끌고 가는 역할은 아니었어요. 그보다 폭넓게 인물의 서사와 성격을 그릴 수 있었다는 점에서 <둠둠>은 새로운 경험이었을 거예요. 그만큼 책임감도 더 필요했겠지만.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셨어요. (웃음) 제 연기와 선택에 따라 많은 게 바뀔 수 있고, 스스로 확실히 정해야 하는 부분이 있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작업이었어요. 그전에는 일종의 감초라고 할까, 캐릭터가 도드라져서 확 이목을 끌어야 하는 역할을 주로 했어요. 극을 잠깐 환기하거나, 의문을 품게 만드는 인물들이었죠. <둠둠>의 이나는 계속 잔잔히 흘러야 해요. 오묘한 감정도 많고요. 처음 해보는 거라 어려웠고, 긴 호흡을 어떻게 유지해야 하나 고민도 많았어요. 인물들과의 관계에서 이나의 각각 다른 모습이 조금씩 보여야 하니, 그 관계에 들어가려고 되게 애썼고요. 전체 그래프를 그리면서도 군데군데 감정을 콕콕 짚을 수 있어야 했어요. 그런데 그런 과정들이 되게 재밌었어요. 호흡을 놓치면 감독님이 다시 잡아주셨고, 현장에서 모두와 상호작용하며 연기했던 게 너무 좋은 경험이었어요.
드라마 촬영 현장은 카메라도 훨씬 많고 복잡하지 않아요? <둠둠>은 어땠나요. 좀 더 집중하기 수월한 환경이었나요?
저는 어딜 가도 다 정신없던데요? (웃음) 촬영지에 머무는 시간이 더 길었다는 게 차이예요. 한 장면 찍고 집에 가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요. 다른 배우들이 연기하는 것도 보고, 사이사이에 감독님과 대화도 많이 했어요. 제가 등장하지 않는 장면을 다 보게 되니까, 저도 거기에 맞춰 반응하게 됐고요. 드라마는 아무래도 속전속결로 찍어야 하는 경우가 많죠.
모델 일을 하다가 연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로, 좀 더 호흡이 긴 인물을 연기해보고 싶어서라고 답한 적 있어요. 영화와 드라마 주연까지 맡았으니, 호흡이 점점 더 길어지고 있는 셈입니다. 배우로서 목표로 삼는 바가 있어요?
여전히 재밌고, 다음에 어떤 역할을 맡게 될지 계속 기대돼요. 하지만 별다른 목표는 없어요. 그냥 흘러가는 대로가 좋아요.
반려견 루, 라이와 함께 살죠? 책임질 생명이 있다는 점에서 이나와 교점이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강아지에 빗대 그 책임감을 설명한다면 제 입장에선 대입이 쉽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어요. 엄연히 반려견이잖아요. 많은 분이 자식과는 또 다르게 느낄 거라고 생각해요. 또 이나가 지안이에게 느끼는 감정은 책임감보다 더 큰 무엇일 거고요. 엄마한테는 분명히 책임감을 느끼겠지만요. 이나는 주어진 상황 자체를 불편해해요. 어떻게든 탈출구를 찾으려 하죠. 정해진 대로만 살고 싶어 하는 인물은 아니에요.
지난해 봄에 촬영한 영화예요. 어떻게 합류했어요?
오디션 보고, 수차례 미팅했어요.


처음 시나리오 접했을 때 어땠는지 기억하나요?
이나의 성격이 저와 정반대라 흥미로웠어요. 이나는 표현하는 걸 어려워해요. 솔직하다고 말할 순 없는 인물이에요. 지금까지 이나가 겪은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겠죠. 그런데 저는 그렇지 않거든요. 불편한 게 있으면 확실히 풀어야 해요. 원래 영화를 보면 이해 안 되는 상황과 사람을 이해하게 되잖아요. 삼자의 입장에서 다 훑어주고 보여주니까요.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머리로는 이해가 되더라고요. 완성된 영화를 본다고 생각하니 여러 가지 감정도 생겼고요. 그런데 내가 연기한다면? 일단 재밌겠다는 생각에 욕심이 났어요. 음악이라는 소재가 들어가 있는 것도 좋았고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영화를 상영한 뒤 했던 인터뷰에서 “촬영 들어가기 전에 감독님을 많이 괴롭혔다”고 하셨어요. 질문할 게 많았던 모양입니다.
이나가 왜 이렇게까지 표현하지 않는 사람인지, 왜 본인이 한 선택에 충실히 책임지지 않는지 궁금했어요. 이도 저도 아닌 포기한 상태로 삶을 산다는 걸 이해하기 어려웠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접근하면 안 됐어요. 이나는 이렇게 살았구나, 참 힘들겠다, 하고 이해해야 하는데 자꾸 제 친구들 상담하듯이 “아니, 왜? 왜 그래?”했던 거예요. 이나는 이런 애라며 인물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했어요. 그 과정을 감독님께서 많이 도와주셨고요. 또 감독님이 이나가 말하고 싶어 하지 않을 때의 표정을 중요하게 생각하셔서, 서로 영화도 추천하고 그랬죠.
어떤 영화를 봤어요?
<이다>(파벨 포리코브스키, 2015)와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기예르모 델 토로, 2018), 그리고 <그을린 사랑>(드니 빌뇌브, 2011).
정원희 감독은 프리 프로덕션 때 함께 시간 보낸 게 기억에 많이 남는다고 하시더군요. 테라스가 있는 카페에서 처음 만났는데, 시나리오 얘기보다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는 평화로운 시간이었다고요.
감독님은 대화 나눌 때 순식간에 깊어지는 사람이에요. 농담 따먹기 같은 것도 잘하고 서로 즐기지만, 어떤 토픽 하나를 얘기할 때 되게 깊게 진심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분이죠. 인물과 작품에 대한 확신이 있으셨고, 그 모습이 좋아 보였어요. 또 저를 관찰하는 모습이 재밌더라고요. 며칠 동안 만나는데,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쭉 살펴보셨어요. 저는 또 그 모습을 관찰했고요. 감독이라는 사람을 사적으로 그렇게 오래 만난 게 처음이었어요. 감독님은 나를 이렇게 보는구나, 생각했죠.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 예상하지 못한 채”라고 덧붙여주시던데요? (웃음) 배우 입장에선 어떤 게 제일 어려웠어요?
프리 단계를 길게 잡았다고 생각했는데도, 현장에서 의견이 맞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그게 이 얘기였어요?” 하는 거죠. 하지만 그걸 좁히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어요. 많은 시간을 함께한 다음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물리적으로 고생했죠. 시간도 넉넉하지 않았고, 코로나로 제약도 많을 때였으니까요.
정원희 감독은 김용지 배우가 가진 밝고 강인한 면모가 시나리오에 표현된 이나의 어두움에 묻어나길 바랐다고 했어요. 실제로도 그렇게 된 부분이 많아 인물이 흥미롭게 표현됐다고요.
과찬이세요. 제가 볼 땐 이나가 저처럼 느껴지진 않아요. 독립된 인물로 보이지, 저라는 사람과 연관해서 보게 되진 않더라고요. 그런데 작품을 본 친구들 이야기를 듣고 생각해보면, 분명 제 안에도 그렇게 어두운 지점이 있다는 걸 알게 돼요. 저한테 없다고 생각한 색깔을 어느 순간 발견하는 거죠. 제가 불편해했던 제 모습을 이나를 연기하면서 보게 됐어요.
이나는 무채색의 헐렁한 옷을 주로 입어요. 물론 극이 전개되면서 변화를 겪지만 드라마틱하진 않죠. 인물의 외양과 취향을 구상하는 과정은 어땠어요? 감독님은 패션이나 음악적 취향이 넓은 배우의 아티스트적 면모가 DJ로서 이나의 모습에 묻어났다는 얘기도 하시던데.
이나가 입는 옷에도 캐릭터가 많이 묻어있죠. 옷은 의상 실장님과 많이 상의했고 피팅도 굉장히 여러 번 했어요. 누가 입힌 것 같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의견이었어요. 이나다운 자연스러움을 찾기 위해 애썼어요. 그런데 그게 제 아티스틱한 면과 크게 관계있는 것 같진 않아요. 도움을 많이 받았죠. 음악도 그래요. 테크노라는 장르를 원래 알긴 했지만, 이렇게 딥한 테크노를 듣거나 클럽 문화를 즐기진 않았거든요. 음악 감독님이 도움을 많이 주셨어요.
평소 패션 스타일은 어때요? 트레이닝복 얘길 많이 하던데요.
맞아요. 트레이닝복 가장 좋아해요. (웃음) 항상 개와 함께하거든요. 그러면 예쁘고 비싼 옷 입기가 어려워요. 애들이 작지 않아서 사고도 적당히 치거든요. 데님이나 트레이닝복처럼 스포티한 옷을 즐겨 입어요. 테니스가 제 삶의 일부이기도 하고요.
<둠둠>은 디테일이 강한 영화예요. 결과와 결말보다 거기까지 가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고, 각각의 상황을 묘사하는 데 공을 들이죠.
말씀하신 대로 ‘이래서 이렇게 된다’가 중요한 작품은 아니라고 봐요. 이렇게 하고, 또 저렇게도 해보고, 하다가 말아보고, 그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감정이 중요하죠. 촬영할 때도 모든 배우가 명확히 한 방향을 향해 연기하기보다, 각자의 해석과 이야기를 품고 있었어요. 그렇게 흘러가는 와중에 어떤 일은 잘 안되고, 또 막히고, 계속 그래요. 그런데 전 그게 좋았어요. 딱 한 가지 정해진 대로 표현하지 않아서요. 살다 보면 화를 내지 말아야 할 상황에 그냥 화가 날 때도 있잖아요? <둠둠>은 그런 일상적 상황이나 일들이 담겨있는 영화라고 생각해요. 결국엔 큰 탈출구가 없다는 걸 찾게 되는 이야기 같고요. 그 모든 일이 지나고 난 뒤에도 이나는 여전해요. 그런데 그 여전하다는 말 안에 조금의 변화가 있어요. 엄마도 마찬가지예요. 그 변화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주진 못하겠죠? 하지만 엄마는 알 거예요.
디제잉을 몸에 익히는 과정은 어땠어요?
디제잉 기계와의 사투는 굉장히 힘들었어요. 재밌었지만, 라이브라는 게 어렵더라고요. “다시 할게요.”가 없잖아요. 제가 그런 데 취약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연습을 정말 많이 했어요. 집에 장비를 다 들여서 아침마다 똑같은 셋을 계속 틀고, 밤에 집에 가서 또 틀고. 손이 익숙해 보여야 하니까 계속 반복했죠. 그런데 막상 촬영해보니 그렇게 익숙해 보이지 않아 속상했어요. 제가 좀 뻔뻔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조금 연습해서 노련함을 흉내 낸다는 게 좀 민망했다고 할까요?
하지만 연기는 뻔뻔해야 하는 일이잖아요.
그러니까요. (웃음) 그게 참 어렵더라고요.
모델 일을 막 시작했던 즈음의 인터뷰를 읽었는데, 당시의 무심한 패기가 느껴져 흥미로웠어요. 자유로워지고 싶어서 에이전시와 계약하지 않겠다고 답한 부분도 있고요. 그게 언더그라운드에서 고집스럽게 활동하는 준석(박종환)과 닮아 보이더라고요.
와, 맞아요. 그랬어요. 그래서 저도 민기(김진엽)보다 준석에게 더 감정이입이 됐던 것 같아요. 주변에도 분명 그런 친구들이 있고, 저도 어느 순간에는 그런 과정을 겪었을 테니까요. 이나가 음악을 하고 싶어 하는 마음도 이해하지 못할 게 아니죠. 누구나 그런 게 하나쯤 있잖아요. 직업이 아니더라도, 무언가 꼭 하고 싶은데 그럴 상황이 아닌 경우요. 당장 떠나고 싶든지,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고 싶든지.
대중음악계에 진출해 잘나가는 친구 민기도 그리 밉게 그려지지 않아요. 혹시나 관계가 안 좋은 방향으로 흐를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민기 역시 스스로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인물이죠. 끝까지 저를 응원해주기도 하고요. 민기와의 사랑 이야기가 없다는 건 정말 좋았어요. 제가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잖아요. (웃음) 민기와 준석 다 이해가 돼요. 그 둘의 면모를 균형 있게 가지고 있으면 좋을 텐데, 항상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죠. 게다가 이나는 그 두 가지를 전부 가지고 있지 않으니, 그들을 동경하고 그들에게 의지도 조금은 했을 거예요.
새로 알게 된 테크노의 매력이 있어요?
음, 춤을 추긴 어려운 음악이라고 생각해요. (웃음) 뭐든지 많은 장르를 접하는 건 좋다고 봐요. 모르는 것보단 아는 게 당연히 낫잖아요. 그 문화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됐고, 모르던 아티스트들을 더 알게 되면서 음악적 견해가 넓어졌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았어요. 음악을 좀 더 풍요롭게 즐길 수 있게 됐죠.
이나의 엄마는 일상적으로 강박과 불안을 느끼는 인물이고, 섬뜩한 순간도 종종 보여줘요. 그런 엄마와 극 중에서 정말 많이 부딪혀야 했는데, 윤유선 배우와는 현장에서 주로 어떤 이야기를 했어요?
선배님은 정말 천사 같은 엄마고, 저는 이나 같지 않은 딸이에요. 서로 본인과 반대인 인물을 연기해야 했어요. 그런데 선배님이야 워낙 잘하시고요, 제가 도움을 많이 받았죠. 엄마와 감정적으로 부딪히는 장면을 찍을 때마다 항상 손을 잡아주셨어요. 리딩과 리허설을 정말 많이 했는데, 제가 제대로 화를 내기까지 오래 걸렸어요. 좀 소심하게 연기했던 것 같아요. 그럴 때 선배님이 끝까지 함께 계셔주셨다는 게 너무 감사해요. 엄마와 이나가 집에서 만나는 씬은 일주일 동안 몰아서 찍었어요. 그 덕에 둘 사이의 관계와 제 상태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죠.
보통 새로운 배역을 만나고 촬영 들어갈 때 어떤 과정을 거치나요?
편지를 써요. 스스로에게도 쓰고, 말을 전해야 하는 상대한테도 써요. 주어진 대사에 없는 말들을 가지고 쓰죠. 그 과정을 꼭 거쳐요. 이나는 할 말을 잘 못하는 사람이잖아요. 계속 여러 가지를 생각해왔는데도 결국 이 말밖에 못한다는 게 카메라에 보였으면 했어요. “알겠어.” 한마디에도 원래 하고 싶었던 말들이 다 담긴다고 보거든요. 그 말들을 와르르 써보는 거예요. 욕이어도 상관없어요. 제가 지금껏 말로 많은 걸 표현하는 역할을 해왔던 게 아니라서, 나름의 비법, 혹은 어쩔 수 없이 거치게 된 과정 같아요.
<둠둠>은 어땠어요? 편지와 일기 중 뭐가 더 많았나요?
엄마한테 쓰는 편지가 가장 많았고, 지안이한테 쓰는 편지도 있었어요. 지안이와 관련해서 이나가 뭔가 선택해야 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걸 정말 여러 버전으로 찍었거든요. 오열도 해보고 건조하게도 해봤는데, 그 감정을 다 가지고 있기 위해 꼭 필요한 작업이었어요.
인물의 어떤 점을 이해할 때 연기에 가장 크게 도움이 된다고 여겨요? 과거, 욕망, 성격, 습관 등 여러 가지 선택지가 있을 텐데요.
MBTI? (웃음) 굳이 표현하자면 MBTI의 형태일 수 있을 거예요. 그 사람이 어떻게 결정하고 실행하는지, 그 프로세스를 이해하면 쉽죠. 그리고 인물 간의 관계를 봐요. 어떤 무리에 가든 내가 해야 하는 역할이 다 다르잖아요. 단편적으로는 갑과 을일 수도 있고. 그걸 이해하는 게 중요해요.
듣고 보니 소설이나 시나리오를 써도 잘할 것 같아요.
항상 쓰려고 노력해요. 그냥 저 혼자 쓰는 거예요. 메모하는 걸 좋아하거든요. 좀 특이한 상황이나 사람을 보면 적어놓고, 그 인물의 과거와 미래를 생각해봐요.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거죠.
연극연출을 전공하기도 했잖아요. 예전에는 뮤직비디오 만드는 게 목표였다고 했어요.
꼭 해보고 싶긴 해요. 그런데 이나 고민이랑 비슷해요. 다 버리고 음악을 해야 하나? 나중에 해도 되려나? 이나가 계속 음악을 듣듯 저도 계속 노트를 하는 거죠. (웃음)
<둠둠>을 촬영하고 무엇을 얻었나요?
주인공은 힘든 것이다? (웃음) 주연 배우로만 출연하시는 분들이 정말 대단하게 느껴져요. 물론 책임과 압박이 큰 만큼 기쁨과 성취도 크다는 건 분명하고요. 영화라는 시스템 안에 처음 들어가 봤는데, 그 과정이 너무 즐거워서 앞으로도 계속해보고 싶어요. 또 이나를 통해 제가 어떤 사람인지 좀 더 명확히 알게 됐고요. 그런데 가장 좋은 건 감독님이라는 좋은 친구가 생긴 거예요. 함께 했던 시간과 추억이 언제 회자해도 즐겁고 좋고 웃길 것 같아요.
이름의 뜻이 ‘지혜로운 얼굴’이라고요. 얼굴 중에선 유독 입매의 표현이 도드라져 보여요. 가만히 있을 땐 무척 무심해 보이지만, 입꼬리가 슬픔과 기쁨을 폭넓게 그려내죠.
용도에 따라 잘 사용되는 입매인 것 같긴 해요. 제가 워낙 얼굴을 과감하게 쓰는 편이에요. 표정을 다양하게 짓는 게 익숙하고요.
연기를 따로 배운 적 없이 <미스터 선샤인> 오디션을 보고 연기를 시작했어요. 그 오디션에서 어떤 걸 했는지 기억해요?
대사가 없었어요. 그냥 카메라 테스트 정도만 받았어요. 모르는 게 용감하다고, 정말 아무 생각 없이 갔어요. 뭘 하고 온 건지. 지금 생각하면 무섭죠. (웃음)


그럼 연기에 대한 배움은 어디서 얻는 편이었어요?
일단 동시대에 나오는 최대한 많은 작품을 보는 거? 모델 할 때까지도 국내 작품은 거의 안 봤거든요. <프렌즈>나 <브레이킹 배드> 같은 드라마를 다섯 번, 여섯 번씩 돌려보는 편이에요. 그런데 드라마 찍으러 현장에 가보니 제가 선배님 성함도 잘 모르는 거예요. 배우를 하겠다는 사람이 그러는 게 너무 예의가 없고 창피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 이후로 한국 드라마를 최대한 많이 챙겨봤어요. 그렇게 모니터링하는 게 저한테 도움이 많이 됐어요.
모델 일은 혼자 했고, 연기를 시작하면서부터는 회사와 협업하고 있어요. 매니지먼트와 상의하는 부분은 어떤 게 있고, 여전히 홀로 맞닥뜨려야 하는 건 무엇이 있나요?
제가 아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거의 모든 걸 상의해요. 혼자 결정할 수 있는 게 별로 없거든요. 그렇게 하는 게 예의가 아닐 때도 많고요. 모르니까 물어보는 거예요. 영화를 개봉하기까지의 과정도 저로서는 처음 겪는 거라 매번 놀라요. 이걸 다 해야 하는구나! 지인을 초대하고, 무대 인사를 하고, 이렇게 인터뷰도 하고요. (웃음) 연기도 마찬가지예요. 메이크업이나 스타일링도 도움을 받아야 하고, 총기 사용처럼 배워야 하는 것도 많고요.
학창 시절에도 딱히 꿈을 정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았다고요. 여전히 자유롭다고 느껴요?
네 자유로워요. 그게 저한테는 자연스럽고요. 배우가 됐다고 달라진 점도 없어요. 뭔가를 숨기거나 더 드러내야 한다고 여기지도 않고요.
호기심이 많고 늘 하고 싶은 게 많은 것이 원동력이라고 했죠. 고등학교 때는 캐나다에서 요리를 배웠고, 서울예술대학교에서 연극연출을 전공했어요. 그러다 우연히 모델이 됐고 이제 연기를 합니다. 그 외에도 취미의 목록이 주르륵 있을 것 같아요.
테니스가 저한테 가장 큰 탈출구였어요. 성취감이 있고, 하고 나면 해소되는 부분도 있고요. 테니스를 치기 위해 야외 공간에 가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치는 행위가 저한테는 무언가에서 벗어나는 과정이었거든요. 지금은 부상으로 잠시 멈춘 상태예요. 그 외에는 도예! 도자기를 꾸준히 만들어요. 잡념이 없어져서 좋아요. 눈과 손이 한 곳에 있으면 평화롭게 느껴져요.
서울에 강아지 공원을 만들고 싶다고 말한 적 있어요. 함께 사는 친구들로부터 무엇을 얻어요?
그건 제가 이룰 수 없는 꿈이라는 걸 최근에 깨달았어요. 일단 땅값이 너무 비싸요. (웃음) 그 비슷한 취지의 활동을 할 순 있겠지만, 서울 시내에 응급센터가 있는 강아지 공원, 유기견 보호소를 제가 만들 수는 없을 거예요. 좋은 아이디어인 것 같으니, 참고해서 기업에서 하길 바랍니다. (웃음) 우리 강아지 루, 라이는 제게 원동력과 마찬가지예요. 제가 가장이잖아요. 남은 견생, 더 좋은 사료를 먹이고 더 좋은 공원에 데려가고, 더 오랫동안 함께 보내고 싶어요. 제 삶을 바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같이 잘살자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