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감독, 관객이 되다!
감독들이 뽑은 DMZ Docs 기대작 10
리버스 / Feature / 2018-09-10

제10회 DMZ국제다큐영화제가 9월13일부터 8일 동안 열린다. 상영작으로 선정된 39개국 144편의 다큐멘터리 영화가 이미 관객과 만날 채비를 끝냈다. 뭐부터 볼까, 고민하는 관객들을 위해 <리버스>는 역대 DMZ국제다큐영화제 수상 감독들에게 특별한 초이스를 부탁했다. 관객의 입장으로 돌아가 카탈로그 정보만을 확인한 뒤. 가장 보고 싶은 작품을 딱 한 편만 선택하기! 9명의 감독들이 보내준 10편의 기대작 목록과 그 이유에는 자신이 그동안 관심을 가져온 주제, 동료에 대한 따뜻한 응원만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고유정, 김일란, 노은지, 박배일, 백승화, 손경화, 오정훈, 이현정, 이혁상 감독이 선택한 올해 DMZ국제다큐영화제 최고 기대작! 

 

 

 

네 자매 1 The Four Sisters (Part 1)

감독 클로드 란츠만| 프랑스 | 2017년 |154분 | DCP | Color | 클로드 란츠만 추모 특별상영

시놉시스 

히포크라테스 선언 The Hippocratic Oath
1939년 3월 나치가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했을 때, 루스는 17세였다. 그녀와 가족들은 농장에서 3년 동안 숨어 지냈지만, 결국 1942년 4월 테레지엔슈타트 캠프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1년 후 루스는 임신하게 되었지만, 임신한 여성의 생존 가능성이 거의 없는 아우슈비츠로 강제 이송되면서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발루티, 유대인 게토 Baluty
유대인 게토 ‘우츠’에 대한 자료는 일기나 몇 장의 사진만 남아있을 뿐, 그곳에 대한 생존자의 증언은 거의 없다. 당시 그 게토의 유대인 여성 경찰 중의 한 명이었던 폴라의 증언은 매우 예외적인 것이다. 그녀가 보여주는 세부적인 것에 대한 예리한 시선과 정확성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운 증언의 신빙성을 강조해준다.

<네 자매 1>

네 자매 2 The Four Sisters (Part 2)

감독 클로드 란츠만| 프랑스 | 2017년 |120분 | DCP | Color | 클로드 란츠만 추모 특별상영

시놉시스 

강제수용소 벼룩소굴 The Merry Flea
에이다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날부터 엄청난 공포에 직면하게 되었다. 마을의 모든 남자는 숲에서 처형당했고, “어떻게 죽게 될까?”라는 질문이 그녀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 질문은 그녀가 소비보에 도착할 때까지 지속되었으며, 25만 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가스실에서 처형되던 그 날 끝난다. 에이다는 50명의 생존자 중의 한 사람이 된다.

노아의 방주 Noah’s Ark
1944년 시오니스트 구조 위원장인 루돌프 카스트너는 중립국으로 향하는 1,684명의 유대인이 탄 기차를 구하기 위해 아이히만과 협상을 했다. 그 기차의 승객이었던 한나가 〈쇼아〉(1985) 촬영 중에 증언했던 고통스러운 이야기는 4만 5천 명의 친인척들이 나치에 의해 처형되는 가운데 구출된 수백 명 중의 하나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되새기게 해준다.

<네 자매 2>

김일란 감독이 선택한 <네 자매>

“완벽한 걸작”. 영화 <쇼아>에 대한 시몬 드 보브아르의 결론이다. 물론 <쇼아>는 너무나 결정적인 영화이지만, 여성운동의 1세대인 보브아르의 이 평가는 좀 과장된 듯 하다. 1985년 <쇼아>가 처음 상영된 이후로 가장 논쟁적인 영화 중 하나로 언급되는 것은 9시간 30분이나 되는 긴 상영 시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사실 9시간이 넘는 긴 상영 시간은 이 영화를 온전히 체험하기 어려운 결정적인 요소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주 오래전에 이 영화를 단지 1시간 30분 보았다). 클로드 란츠만의 <쇼아>는 재현 불가능한 과거의 사건을 현재 실존하는것으로 소환하기 위해 9시간이 넘는 상영 시간을 유지해야만 했고, 이것은 결국 재현 불가능성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의 숙명을 확인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란츠만은 현재의시점에서 과거의 비극을 재현할 수 없기 때문에, 현재와 과거를 허무는 방식으로 드러낸다.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과거의 공간을 재현하거나 푸티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생존자의기억 속에 존재하는 그 공간을 구현하기 위해서, 수용소가 있던 자리, 소각로의 잔해들, 완전히 폐허가 된 현재의 흔적들을 집요하게 보여준다. 생존자들의 현재적 증언은 관객들을 과거의 공간으로 이끈다.

나는 용산참사 다큐멘터리 <두 개의 문>을 제작할 때, 오랜만에 <쇼아>를 다시 보았다. 물론 그 때도 역시 끝까지 다 본 것은 아니다. <쇼아>를 통해 다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재현불가능성, 즉 경찰이 망루 안으로 진입한 영상자료나 망루 안에서 화재가 발생한 것을 촬영한 영상자료와 같은 푸티지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순간을 증언할 사람들도 없고  더불어  6명을 죽음에 이르게 했던 모든 작용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과연 어떻게 진실을 전달할 것인가 혹은 진실을 재현할 것인가에 대한 힌트를 얻고 싶었다. <쇼아>를 통해서 다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재현불가능성을 인정하는 것’과 ‘재현의 실패’는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때 <쇼아>를 다시 보면서, 가장 논쟁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역시 여성 생존자들의 위치와 무게에 관한 것이다. <쇼아>에서 여성 생존자들은 핵심적으로 다뤄지지는 않는다. 클로드 란츠만 감독에게 과연 여성 생존자는 어떤 의미일까. 몹시 궁금했다. 이 궁금증에 대한 답변이 왔다. <네 자매>. 클로드 란츠만 감독은 생전에 DMZ국제다큐영화제에 참석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하지만 <쇼아> 이후, <네 자매>로 돌아온, 클로드 란츠만 감독의 대답을 이 영화로 꼭 듣고 싶다.

김일란 감독은 <3xFTM>(2008), <두 개의 문>(2011), <공동정범>(2016) 등을 연출했다. <공동정범>으로 2016년 제8회 DMZ국제다큐영화제 최우수한국다큐멘터리상과 관객상을 받았다.

 

 

네이팜 Napalm

감독 클로드 란츠만| 프랑스 | 2017년 |100분 | DCP | Color | 클로드 란츠만 추모 특별상영

시놉시스

한국전쟁으로 황폐해진 북한에 초청받았던 최초의 서유럽 대표단이었던 프랑스 청년 란츠만은 평양의 적십자 병원 간호사와 짧고도 아름다운 만남을 갖게 된다. 그들이 당시 서로 정확히 이해한 단어는 ‘네이팜’ 뿐이었다. 2015년 북한을 다시 방문한 란츠만은 짧았던 사랑 이야기와 함께 네이팜탄에 심각한 피해를 입었던 북한을 다시 떠올린다.

이현정 감독이 선택한 <네이팜>

미친 더위에 진을 빼다 살아나 생각해보니, 올해 상반기에 일어났던 일 중에 내게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두 번째 판문점 회담이다. 4월 27일의 첫 번째가 아니라, 이미 몰래 만나고 돌아와 기습 발표한 두 번째 말이다. “내일 좀 만날까요?” “좋습니다.” 만남이 저렇게 쉬운 것이었구나! 작정하면 쉽게 만날 수 있는 관계였구나, 하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이 오싹할 정도였다. 그리고 인터넷에서 “통일되면 가 볼 만한 북한의 관광지” 같은 제목의 글들이 우후죽순 올라오는 것을 보며, 정말 뭔가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도 느꼈다. 두근두근 한반도!

올해 DMZ국제다큐영화제에 “클로드 란츠만 추모 특별상영”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그는 <쇼아>라는, 20세기의 비극인 홀로코스트를 다룬, 10시간이 좀 못 되는, 제목만으로도 가슴이 철렁해지는, 걸출하고 긴 작품을 만든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지난 6월 사망했다. 이번에 상영되는 <네이팜>은 그가 가장 나중에 만든 작품이라고 한다. 거장의 최근작을 본다는 것은 자체로 기대되는 일이며, 그것이 한국전쟁 직후 북한을 방문했던 청년이 나이가 들어 다시 방문하는 이야기라고 하니, 가장 먼저 카탈로그에 동그라미를 쳐놓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북한에 직접 들어가 촬영한 해외 다큐멘터리가 국내 영화제에 상영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내가 갈 수 없는 곳에 갈 수 있는 감독에게 괜히 부아가 났다. 마치 이혼한 전 남편의 소식을 알려주는 얄미운 친구처럼. 그러나 <네이팜>은 그런 마음 없이 볼 수 있을 것 같다. 죽기 전에 나도 갈 수 있을지 몰라요, 하는 너그러움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현정 감독은 다큐멘터리 <192-399: 더불어 사는 집 이야기>(2006), <편지>(2014) 등을 연출했다. <편지>는 2015년 7회 DMZ국제다큐영화제 한국경쟁 부문 최우수한국다큐멘터리상을 받았다.

 

 

데스메탈 할머니 Death Metal Grandma

감독 레아 갤런트 | 미국 | 2018 | 13분 | DCP | Color | 다큐패밀리 

시놉시스

나치 학살 수용소의 생존자이자, 2018년 97세가 된 오스트리아 태생의 진스베르그 할머니는 생의 마지막 도전이 될지도 모를 일을 감행한다. 그것은 「아메리카 갓 탤런트」에 데쓰 메탈 가수로 출전하는 것이다.

<데스메탈 할머니>

백승화 감독이 선택한 <데스메탈 할머니>

영화제 팸플릿을 통해 상영작들을 살펴보는 것을 좋아한다. 간략히 적혀진 시놉시스와 제목을 통해 나머지 이야기들을 마음대로 상상하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근데 <데스메탈 할머니>라니. 제목부터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제목 짓는 대회가 있어서 이보다 더 흥미로운 제목을 지으려고 해도 짓기 어려울 정도다. 그래서 궁금한 다른 영화들을 일단 제쳐두고 무조건 이 영화를 꼽기로 했다.

시놉시스를 살펴보자면 나치 학살 수용소의 생존자이자 97세인 진스베르그 할머니가 ‘아메리카 갓 탤런트’에 데스메탈 가수로 출전하는 내용이라고 한다. 이 또한 매우 흥미롭다. 13분이라는 짧은 상영 시간에 출전 결과까지 담겨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그 결과보다는 과정이 궁금한 다큐멘터리가 아닐까한다. 올해 97세의 할머니가 어떤 연유로 데스메탈을 하게 되셨는지도 궁금하지만 무엇보다 노인의 도전을 어떠한 시선으로 담아내었을지도 그 못지않게 궁금하다.

그간 DMZ국제다큐영화제를 통해 본 다큐멘터리들 중 기억에 남는 작품 중 하나가 2012년 개막작이었던 <핑퐁>이다. 80세 이상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세계 탁구 대회에 참가하는 전 세계 노장 선수들을 다루었던 이 다큐멘터리는, 인생의 마지막 막을 앞두고 레저나 취미정도로 탁구를 즐기는 노인들의 짙은 애환 같은 걸 다룰 것이라는 나의 편견 혹은 기대와는 달리 엄청난 승리욕과 자부심을 가진 뜨거운 스포츠 선수로서의 노인들을 만날 수 있는 흥미진진한 작품이었다. 이는 국내 극영화나 다큐멘터리에서 종종 보여지는 노인을 다루는 시혜적 시선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더 강렬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핑퐁>의 그 흥미진진함을 <데스메탈 할머니>에서도 기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 물론 제목과 시놉시스만 보아서는 알 수 없는 게 영화라지만 말이다.

백승화 감독은 다큐멘터리 <반드시 크게 들을 것>(2009), <반드시 크게 들을 것 2: WILD DAYS>(2012) 등을 연출했다. <반드시 크게 들을 것2: WILD DAYS>는 2012년 4회 DMZ국제다큐영화제에서 관객상을 차지했다.

 

 

기프실 Gipeusil

감독 문창현 | 한국 | 2018년| 96분 | DCP | Color | 한국다큐쇼케이스

시놉시스

할머니 댁이 있는 기프실 마을이 4대강 사업의 일환인 영주댐 건설로 변해가고 있다. 열 가구 남짓 남은 기프실은 마치 멈춰버린 시간 속에 있는 듯하다. 마을 주민들은 기한 없이 미뤄지는 이주를 앞두고도 뜯겨난 땅에 또다시 삶을 일구고, 떠나가는 이웃을 배웅하며 함께 생활한다. 나는 그분들과 섞여 하루가 다르게 비어 가는 기프실의 모습과 황폐해져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담는다.

<기프실>

사수 For Dear Life

감독 김설해, 정종민, 조영은 | 한국 | 2018 | 100분 | DCP | Color | 한국다큐쇼케이스

시놉시스

2011년 5월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공장인 유성기업은 납품처인 현대차의 지시에 따라 노조파괴를 시작한다. 5년 뒤 용역의 폭력과 차별, 징계, 고소고발이 일상이 된 일터에서 노동자 한광호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남은 동료들은 그의 장례조차 치르지 못한 채 더 이상의 비극을 막기 위해 노조파괴에 맞선 싸움을 이어가지만, 끝이 잘 보이지 않는다.

<사수>

박배일 감독이 선택한 <기프실> <사수>

영화제 시간표를 짜는 게 취미인 내가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프로그램을 훑어보면서 가장 눈의 들어왔던 영화는 조르조 페레로, 페데리코 비아신 감독의 <아름다운 것을 기억하며>였다. 영화제에서 관람할 영화를 고르는 기준 중 하나인 ‘다음 작업에 영감을 줄 작품’에 가장 부합하는 영화로 특별한 연결 지점이 없는 네 남자의 노동이 자본주의와 조우하는 흐름에 눈이 갔고 그걸 이어주는 형식이 역동적인 음향과 음악이라는데 마음이 갔다.

이렇게 글을 쓰고 위에 쓴 문장을 읽어 내려가는데 뜨끔한 마음이 든다. 정말 내가 <기프실>과 <사수>를 제쳐 놓고 ‘마음이 갔다’는 말을 할 수 있는가? 대답은 단호하게, NO!! 그래서 보지도 않고 기대 평을 남기는 걸 끝내고 프로듀서로 참여해 올해 함께 마무리한 두 작품을 소개한다.

문창현 감독의 <기프실>은 4대강 사업의 일환인 영주댐 사업으로 감독의 할머니 댁이 수몰되는 과정을 담은 영화다. 영화는 4대강 사업의 허와 실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대신 고향을 떠나는 주민들과 사라져 가는 마을을 찬찬히 바라보면서 감독의 기억 속에 꽁꽁 묶어둔 불안을 살피는 영화다. 결국 영화는 쉼 없이 땅을 일구는 할머니의 손을 바라보면서 우리에게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를 함께 고민하자고 말을 건넨다.

김설해, 조영은, 정종민 감독의 <사수>는 유성기업의 노조파괴에 맞선 노동조합이 국가와 법, 그리고 자본의 폭력 앞에서 끝끝내 사수하고자 하는 것을 주목하는 작품이다. 청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세 감독은 유성기업 노동자들과 끈끈한 유대 속에서 연대의 한 방법으로 다큐멘터리 작업을 선택한다. 그 관계를 바탕으로 한 영화는 언론에서 볼 수 없었던 노동자들의 무너지는 마음과 그럼에도 다음 투쟁을 선택하는 그들의 의지를 온전히 담아내고 있다. 여전히 거리에서 투쟁을 외치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자문하게 된다.

6년 이상 현장에 결합해 서로 다른 스타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두 영화를 연결해서 관람하면 2018년 한국독립다큐멘터리가 현장에서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지 명징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박배일 감독은 <소성리>(2017). <깨어난 침묵>(2016), <밀양아리랑>(2014), <밀양전>(2013) 등을 연출했다. <밀양아리랑>으로 2014년 6회 DMZ국제다큐영화제에서 심사위원특별상을 받았다.

 

 

통금 Tong Guem: I Hate Curfews 

감독 소람 | 한국 | 2018 |40분 | DCP | Color | 한국다큐쇼케이스 

시놉시스

'나'는 통금 때문에 괴롭다. 밤을 즐길 권리를 침해당한다. 통금으로 인해 좋은 사람들과 술 마실 권리, 남자친구와 사랑을 나눌 권리, 그리고 새벽 감성에 밖에서 촬영할 권리도 박탈당했다. '밤을 즐길 권리'를 찾기 위해 우여곡절 끝에 독립하게 된 '나.' 하지만 혼자 사는 여성은 범죄의 표적이 되기 쉬웠고 여성들은 다양한 이유로 시공간의 제약을 받고 있었다.

고유정 감독이 선택한 <통금>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 작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뜬금없게도 돌아가신 할아버지 때문이었다. 할아버지는 장사하는 분인데도 뭐든 굽히는 게 없었다. 도리에 맞으면 덥석 외상도 주고, 손님이 불손하다며 나가라고도 했다. 불의를 아주 잘 참고 비굴한 줄 알았던 나는, 막상 회사에서 우리 할아버지 같았다. 잉여인력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대쪽같이 살아야만 하는 저주받은 유전자를 지닌 나는 그 유전자의 근원인 할아버지의 삶을 되짚어보기로 했다.

그렇지만 내가 소람 감독의 <통금>을 처음 본 건, 그렇게 야심 차게 시작했던 작업이 이리저리 엉켜서 자신감이 바닥을 칠 때였다. <통금>은 대쪽 같은 영화다. 실은 이상했지만 일일이 싸우기는 뭔가 애매했던 금지의 경계선을 찾아 깨뜨리려는 감독의 시도는 거칠지만 유쾌하고, 치열하지만 관객들을 비탄에 빠지게 하지는 않는다. 딸이 아내가 되고 어머니가 되어도 사라지지 않는 통금이라는 빗장을 발로 차내면서 감독은 집에서 골목, 골목에서 대로로 카메라를 들고 나간다. 시종일관 빵 터지는 감독의 투쟁기를 지켜보던 관객들은 이 대로에서 부조리를 외치는 여성들의 무리와 합류하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여성이 걷는 밤의 민낯, 사회의 시선을 마주하게 된다. 

DMZ에서 이 영화를 만나보길 권한다. 빙빙 돌리거나 숨지 않고, 엄숙주의에 빠지지 않으며 당차게 밀고 나가는 영화의 기운은 나처럼 하고 싶은 말을 품은, 모든 답답한 이들에게 자극을 줄 것이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영화를 본 후, 나는 우리 할아버지가 매번 집을 나서는 내게 그랬듯, 거리에서 외치는 여성들의 모습을 한참씩 지켜보게 됐다. 아무 탈 없이 기죽지 말고 힘차게 나아가길 바라면서.

고유정 감독은 <옥탑방열기>(2012) 등을 연출했다. <옥탑방열기>는 2012년 4회 DMZ국제다큐영화제 한국경쟁 부문 최우수한국다큐멘터리상을 차지했다.

 

 

코야니스카시 Koyaanisqatsi 

감독 고드프리 레지오 | 프랑스 | 1982년 | 86분 | DCP | Color | 내 생애 최고의 다큐 10

시놉시스 

호피 족 인디언의 언어로 ‘균형 깨진 삶을 의미하는’ 〈코야니스카시〉라는 다큐멘터리의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기술문명의 위선이 몰고 온 위험을 깨닫지 못하는 인간의 통제불능상태. 그 옛날의 자연이 지녔던 평정심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내러티브나 대사 없이 음악과 영상으로만 되어 있는 이 작품은 고대 인디언들이 그린 벽화에서 시작된다. 경이롭고도 광활한 자연 그 자체의 모습, 그리고 인간이 자연에 미치는 손길.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발전하면서 인간들이 자연을 등지고 스스로 무언가를 ‘생산’하는 모습과 인간들이 살아가는 생활 모습들이 정신없이 빠르게 나타난다. 20년지기 친구였던 고드프리 레지오 감독이 현대 음악의 거장 필립 글래스에게 음악을 부탁해서 만들어진 이 다큐멘터리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혁명적인 작품이다. 자연- 파괴- 도시와 인간 - 소외의 흐름에 따라 흐르는 영상과 함께 필립 글래스의 아름답고 영적인 음악이 어떻게 서로 조응을 이루는지 살펴보는 것이 이 영화 감상의 키포인트다.

<코야니스카시>

손경화 감독이 선택한 <코야니스카시>

상영작 목록에서 <코야니스카시>를 보는 순간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반응했다. 심쿵.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있다니!

<코야니스카시>를 처음 본 건 친구들과 첫 장편을 만들던 10년 전이었다. 장황하게 펼쳐진 촬영 소스를 엮어 어떻게든 내러티브를 만들어보려고 애쓰던 때였다. 미래가 넉넉히 남아있다고 믿으며 영화를 잘 만드는 것에 모든 시간을 바치던, 성장의 욕망이 나를 지배하던 초보 시절이었다. 나는 막힌 구성을 푸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열 편의 해외 다큐가 들어있는 DVD를 차례로 보다가 이 영화를 만났다.

사전 정보 없이 본 <코야니스카시>는 이상한 영화였다. 제목을 주문처럼 반복하는 음악과 함께 고대 벽화가 나오더니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볼 법한 대자연이 나오다가 건물이 맥없이 무너지는 장면으로 이어졌다. 대사는 하나도 없었다. 나는 이 영화가 좋은지 싫은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미지와 음악에 압도되어 보는 걸 멈출 수는 없었다. 영화가 끝나갈 무렵 발사 준비 중인 로켓이 나왔다. 로켓은 나아가는 데 실패하고 폭발한다. 슬로 모션으로 떨어지는 로켓의 잔해를 보며 나는 서럽게 울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무엇이 서러운지도 모르고 흘렸던 그때의 눈물이, 그날의 영화가 나아가야 한다는 마음으로 똘똘 뭉쳐있던 내 가슴에 작은 틈을 하나 만든 것 같다. 그 틈은 점점 넓어져 나는 이제 다시는 일에 모든 시간을 쏟아붓지 않는다.

영화의 제목인 코야니스카시는 균형 잃은 삶, 다른 삶의 방식을 필요로 하는 생활 상태라는 뜻의 호피어라고 한다. 1982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가 당시에 대한 진단이라면 그 진단은 지금도 유효하다.

로켓의 잔해는 여전히 애처로울까? 스크린으로 볼 <코야니스카시>를 기대하고 있다.

손경화 감독은 <그 자식이 대통령 되던 날>(2011), <의자가 되는 법>(2014) 등을 연출했다. <의자가 되는 법>으로 2014년 제6회 DMZ국제다큐영화제 최우수한국다큐멘터리상을 차지했다.

 

 

엘리펀트보이 Elephant Boy

감독 박환성 | 한국| 2018년 | 52분 | DCP | Color | 한국다큐쇼케이스 

시놉시스

네팔에 사는 열두 살 소년, 크리스가 가장 좋아하는 건 아빠, 그리고 코끼리다. 코끼리 조련사 아빠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코끼리와 친숙하게 지내왔기 때문이다. 연례행사인 코끼리 축제가 다가오고, 아빠는 코끼리를 혹독하게 훈련시킨다. 사춘기 소년은 그런 아빠의 모습에 실망하고 상처를 받게 된다. 코끼리를 사랑하는 아빠와 아들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엘리펀트보이>

오정훈 감독이 선택한 <엘리펀트 보이>

그와의 인연은 어느 상영회 마치고 뒤풀이 자리였다. 소탈한 그에게 나는 약간의 시비를 걸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서로를 인정하며 환하게 웃었다. 그는 자연 다큐멘터리를 주로 제작하였고, 방송을 통해 사회적 말 걸기를 했다. 나는 독립영화라는 범주에서 고집을 피우며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그의 작품이 이번 DMZ국제다큐영화제 한국다큐쇼케이스에 상영된다. 

하지만, 감독을 만날 수는 없다. 그는 2017년 촬영을 위해 아프리카로 갔다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는 맥주를 좋아하며, 디스코를 좋아했던 것 같다. 나는 그를 먼저 만났고, 작품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가 만들었던 작품 안에는 ‘인간과 자연, 특히 동물과 공존’이 담겨있다. 동물을 의인화하거나 약육강식의 논리, 생태적 탐구보다, 인간이 어떻게 동물의 세계에 침범하고 있는지, 동물 세계가 인간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는지를 생각하게 했다. 인간과 동물, 동물과 인간의 공존을 다루면서 인간의 책임과 윤리에 대해 성찰의 시간을 주었다. 

멀리 떠나간 그와 이제는 툭툭거리며 맥주 한잔 나눌 수는 없지만, 나는 이번 영화제에서 또 다른 그를 만나러 갈 것이다. 박환성 감독, 그의 영혼을 만날 수 있는 <엘리펀트보이>를 통해서.

오정훈 감독은 <벼꽃>(2017), <나는 노래하고 싶어>(2012), <새로운 학교-학생인권 이등변삼각형의 빗변 길이는?>(2011) 등을 연출했다. <벼꽃>으로 2017년 9회 DMZ국제다큐영화제 관객상, 심사위원특별상을 받았다.

 

 

야광 Glow Job

감독 임철민 | 한국| 2018년 | 81분 | DCP | Color | 한국경쟁 

시놉시스

공공의 극장으로 기능하면서 동시에 남성 성소수자들의 ‘크루징스팟’으로 향유되었던 장소들은 1960-90년대에 걸쳐 서울의 파고다극장, 극동극장, 성동극장 등을 중심으로 나타났고 전국적으로 확장되었다. 크루징의 주 무대가 되었던 공간들은 물리적인 공간에서 가상의 필드로 이동해 이제는 더이상 시대에 유효하지 않은 듯하다.

<야광>

이혁상 감독이 선택한 <야광>

영화를 만드는 게이 감독으로서 영화제 상영작 목록을 보며 퀴어영화를 체크하는 것은 내겐 당연한 절차 또는 전통의 의식이 되었다. 

그렇다면 올해 디엠지다큐영화제의 기대작은? 단연코 임철민 감독의 <야광>이다. 이젠 손안의 스마트폰으로 누군가를 만나는 시대가 되었지만, 게이로서 누군가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극장이라는 물리적 공간이었던 시대가 있었다. 고릿적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만, 생각처럼 오래된 과거는 아닐 수도 있겠다. 내가 ‘P싸롱’이라 불리던 파고다극장에 처음 ‘데뷔’했던 날 상영하던 영화는 다름 아닌 팀 버튼의 <화성침공>이었으니까. 화성인이 신나게 지구를 침공하는 와중에, 나의 모든 촉각은 극장 안 풍경에 집중하고 있었다. 왜 이 극장은 불을 완전히 끄지 않는 걸까. 왜 사람들이 서 있는 걸까. 왜 그들은 자꾸 나를 쳐다보는 걸까. 왠지 모를 당혹감에 서둘러 극장을 나왔던 초짜 게이는 이제 새로울 것 없이 무덤덤하게 살아가는 중년이 되었지만, 그 당혹감에 얹혀져 있던 해석 불가능한 에너지와 기이한 공동체의 정서만큼은 잊을 수 없는 감각으로 각인되었다. 

그리고 이제,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그 극장들이 카메라 앞으로 소환되었다. 영화와 극장, 그리고 그 안의 게이 문화와 역사라니, 영화를 만드는 게이 감독으로서 어찌 매혹되지 않을 수 있을까. 솔직히, 이 소재를 먼저 낚아챈 임철민 감독에게 용심이 나는 것도 어쩔 수 없겠다. 그런 의미에서 <야광>은 진정 올해 디엠지의 ‘원픽’이다. 게다가 영문 제목이 ‘글로우 잡’이라니. 야릇한 기대가 무럭무럭 커진다. 하지만, 상기해야겠다. 임철민 감독은 그리 호락호락한 연출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전작에서처럼, 임철민 감독은 이 공간의 역사를 범상치 않은 예술적 시도와 영화적 실험으로 담아낼 것이다. 난해하고 불가해하겠지만, 그 야광이 끌어내는 매혹의 황홀경에 기꺼이 빠져들고 싶다.

이혁상 감독은 <종로의 기적>(2010), <공동정범>(2016) 등을 연출했다. <공동정범>으로 2016년 제8회 DMZ국제다큐영화제 최우수한국다큐멘터리상과 관객상을 받았다.

 

 

달과 닻 Moon and Anchor

감독 방아란 | 한국 | 2018년 | 75분 | DCP | Color | 한국다큐쇼케이스 

시놉시스

비전향 장기수 할아버지 두 분이 사는 ‘만남의 집’에서 나는 북한에서 온 박희성 선생님을 처음 만났다. 대화를 거듭하던 사이 나는 박희성 선생님의 꿈이 영화 촬영 기사였다는 것을 알게 되고 선생님께 비디오카메라를 선물한다. 박희성 선생님은 카메라로 자신이 남기고 싶은 것들을 촬영하기 시작하고 나는 그런 선생님과 함께 비전향 장기수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담기 시작했다.

<달과 닻>

노은지 감독이 선택한 <달과 닻>

어떤 영화를 볼까? DMZ국제다큐멘터리 영화 리스트를 볼 때마다 고민합니다. 무엇보다 상영 작품 수가 많고 처음 만나는 감독도 많아서 어떤 영화일지 감을 잡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보통 시놉시스를 보고 좋아하는 소재를 다룬 영화를 선택하게 됩니다. 모두가 그렇겠지만! ㅋ 

올해 상영작을 훑어보니 반가운 영화가 눈에 띕니다. 방아란 감독의 <달과 닻>입니다. 방아란 감독은 꽤 오랫동안 이 영화에 등장하는 비전향장기수 박희성 선생을 만나왔고 그분 '곁'에 있어 왔습니다. '만남의 집'에는 이제 두 명의 선생님만 살고 계시는데 저도 <송환>을 만든 김동원 감독을 따라 몇 번 방문 한 적이 있습니다. 집 앞에 있는 조그만 터에 작은 배나무가 있고 선생들의 빨래를 널 수 있는 빨랫줄이 있으며 이것저것 심어놓은 꽃과 식물들이 소소하게 자라나고 있습니다. 볕이 잘 들지만 집안 스며든 그 볕이 따뜻했다기보다는 반대로, 찾아오는 사람이 적고 조용히 하루하루를 살고 계시는 선생의 모습과 겹쳐져 조금 더 쓸쓸한 느낌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한동안 북한 문제가 사회적 이슈에서 멀어지고 한국에 남은 비전향장기수의 존재를 잊어갈 때 방아란 감독은 그 집을 찾아갔습니다. 섬세하고 젠틀한 성격의 박희성 선생과 잘 맞는 짝꿍이 되어줬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선생을 담아야할지 오랫동안 고민한 줄로 압니다. 언제 이 영화를 만나게 될까 기다렸는데 올해 상영 리스트에 있어서 정말 반가웠고 꼭 보러 가고 싶은 영화로 선택하게 됐습니다. 

영화를 통해서 박희성 선생이 일상에서 바라본 풍경을 보고 싶고, 그 곁에 아마도 조금씩 존재하게 될 김영식 선생도 보고 싶습니다. 몇 년 동안 내 삶의 자리만 지키느라 누군가 '함께 하는' 행동을 안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 간접적으로나마 영화를 보며 함께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도 작품을 완성한 감독님께 축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노은지 감독은 <밀양, 반가운 손님>(2014), <옥탑방열기>(2012) 등을 연출했다. <옥탑방열기>로 2012년 4회 DMZ국제다큐영화제 한국경쟁 부문 최우수한국다큐멘터리상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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