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언제든지
<모퉁이> 신선·박봉준·하성국·이택근
글 손시내 사진 이영진 / Interview / 2022-08-11

<모퉁이>는 처음부터 “오랫동안 영화를 같이 해온 친구들과 작업하는 걸 목표로” 삼았다. 대부분은 한데 어울려 즐겁게 놀았고, 술과 함께 무르익는 이야기 속에서 각자 질문을 길어냈던 동료들은 지난해 여름, 영화를 한 편 만들었다. 영화과 졸업생들이 주인공이지만, 그들의 현실이 세세히 묘사되는 게 아니라 곳곳에서 비밀이 솟아나는 <모퉁이>다. 단골 식당 앞 모퉁이에서 마주친 성원(이택근), 중순(하성국), 병수(박봉준)의 이야기는 창작하고 연기하는 이들의 지극히 현실적인 고민을 담고 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 만남이 마치 하룻밤 꿈처럼 기억되니 어딘지 기묘하다. 앞뒤를 맞춰보려 할수록 무언가 어긋난다. 다만 이 이상함은 영화적 야심의 발현이라기보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서로에게 인사를 건네려는 마음의 반영처럼 보인다. <모퉁이>가 남기는 질문은 여럿이지만, 종국엔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을 어떻게 하면 소중히 여길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남는다. 이 영화를 만든 이들은 어떻게 서로를 만나 무슨 대화를 나눴을까. 영화 안팎의 시간을 두루 듣고 싶어 세 배우와 감독을 만나고 나니, 네 사람이 힘껏 껴안고 또 떠나보낸 모든 날 또한 영화의 일부 같이 느껴졌다.

 

 

영화를 완성한 지 꼬박 1년 만에 개봉한다. 드디어 관객을 만나게 됐는데, 어떤 마음으로 지내고 있나.

이택근_ 개봉이 확정되고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기대되고, 걱정도 되고, 그러면서도 좋게 봐주셨으면 하는 마음이 크다.

하성국_ 지금까지는 영화에 대해 우리끼리, 매일 보던 얼굴들끼리만 이야기했는데, 관객분들은 어떻게 보실지 궁금하다. 물론 설레는 마음도 크다. 아마 <모퉁이> 개봉이 올여름 가장 큰 일이 되지 않을까 싶다.

박봉준_ 얼마 전에 아이폰이 1년 전 추억이라며 첫 촬영 때 찍은 사진을 보여주더라. 그걸 보니 비로소 실감이 났다. 그때를 돌이켜보며 “참 좋았지!” 하고 있었다. (웃음)

신선_ 개봉하면 되게 기쁠 줄 알았는데 그보다 부담이 크더라. 지금은 개봉 준비를 차근히 하고 있고, 다음 작품을 준비하는 시간도 갖고 있다. 뭘 안 하고 있으면 불안해하는 편이라 그동안 시나리오를 한 편 완성했다.

 

신선 감독과는 <모퉁이>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되기 전에 만난 적 있다. 이후 영화제 관객을 만나기도 하고, 시간도 꽤 흘렀는데, 영화가 달리 보이는 지점이 있는지 궁금하다.

신선_ 후반작업 마무리가 잘 안된 상태에서 영화제에 가게 됐다. 그때는 영화를 잘 못 보겠더라. 다녀오자마자 재편집했다. 택근 형이 많이 도와줬다. 영화는 워낙 많이 봐서…. 최근에도 혼자서 다시 봤는데, 오히려 더 좋은 지점도 있고, 다시 새롭게 만지고 싶은 장면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더 할 수 있는 부분은 이제 없다고 생각한다. 잘 떠나보내야지. (웃음)

이택근_ 마지막 촬영하고 그날 바로 같이 밤을 새워서 가편집본을 만들어 영화제에 보냈다. 접수 마지막 날이었거든. 발표 때도 감독님이랑 같이 있었다. 전날 한잔하고 누워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더라. 받고는 벌떡 일어났지. (웃음)

 

이야기를 직접 쓰지 않은 배우들 입장에선 그동안 영화를 나름의 방식으로 다시 이해하고 소화하는 과정을 거쳤을 거다.

하성국_ 영화제에서 처음 영화를 봤을 땐 촬영 끝난 지 얼마 안 돼서 그랬는지, 감독님이 의도했던 대로 우리가 딱 그만큼 했구나, 정도의 감상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다시 보니, 준비하고 촬영할 땐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이 조금씩 보이더라. 특히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극에 드러난 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떠나서, 감독님과 영화의 관계 같은 여러 관계와 관계성이 새로 보였다. 이건 도대체 무슨 관계이기에 친구들이 이렇게 힘을 모아서 영화를 완성하게 된 걸까? 뭐 그런 질문도 해보게 됐고. (웃음)

이택근_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면 그저 좋았던 기억뿐이다. 영화를 준비하고 촬영하는 여러 단계에서, 감독과 배우, 스태프가 서로 감정 상하는 일 없이 한 마음으로 힘을 모았다. 이후에도 기분 좋게 지냈다. 그야말로 <모퉁이>의 해를 보냈지.

박봉준_ 단편영화를 찍어보긴 했지만, 내게는 <모퉁이>가 첫 영화나 다름없다. 택근 형 말대로 좋았던 기억도 많았지만, 스스로 더 나아질 수 있는 지점을 찾게 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모퉁이> 조연출을 맡았던 친구와 최근에 단편을 하나 찍었다. <모퉁이> 때 야외촬영을 처음 해봤는데, 그때는 적응을 잘 못 했고,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 야외촬영을 하며 예전의 두려움이 많이 해소된 걸 느꼈다. <모퉁이>가 내게 많은 도움이 됐다는 걸 다시금 상기하게 되더라.

<모퉁이>

신선 감독과 이택근, 하성국 배우는 건국대학교 영화과 동문이라고. 학교 다닐 때부터 다 같이 친한 사이였나.

신선_ 맞다. 워낙 오래된 인연이다.

이택근_ 선이랑은 학생회도 같이 했다.

하성국_ 둘 다 학생회장 출신이다. (웃음) 그때는 영화에 대한 열의보다는 학교 다니는 게 재밌어서 우리끼리 열심히 놀았다.

이택근_ 성국이랑은 같이 연극을 했다. 단편 찍을 때 집을 빌려서 촬영한 기억도 있고.

하성국_ 학교에서는 워낙 단편 작업을 많이 하니까, 어떤 현장에 가도 있는 얼굴이었다. 선이 형은 한참 선배님이었는데 불러줘서 현장에서 스태프로 일도 해보고 그랬다.

이택근_ 감독님은 나보다 선배였지만 나이가 한 살 어리다. 그래서 처음엔 좀 불편했지. (웃음) 근데 바로 형, 동생 하면서 빠르게 친해졌다.

 

박봉준 배우와는 어떤 인연인가.

하성국_ 나와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다.

신선_ 성국이 소개로 만나고 굉장히 급속도로 친해졌다. 애교도 많고 착한 친구다.

하성국_ 이렇게까지 친해질 줄은 몰랐는데, 가족이 돼 있더라.

 

그러다 영화까지 함께 찍게 됐는데, 뭔가 잘 맞는 부분이 있었나 보다.

신선_ 택근이 형과 성국이는 원래부터 같이 하기로 마음을 정했고, 함께 영화 얘기도 많이 했다. 봉준이는 먼저 잘해보고 싶다며 확 다가오더라. 그게 좋았다. 의지를 가지고 뭔가 하려는 태도, 다른 사람들이랑 잘 지내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박봉준_ 처음으로 읽어 본 시나리오가 <모퉁이>다. 난 책도 이미 죽은 옛날 작가들의 소설을 즐겨 읽는 편이라, <모퉁이>가 작가를 만나는 거의 첫 경험이었다. 그전에는 글 쓴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사는지 직접 알기 어려웠는데, 무려 살아있는 작가를 만나보게 된 거다. (웃음) 술 마시고 친하게 놀다가 “형, 시나리오 하나 보내주세요.” 했고, 읽어보니 너무 좋더라. 특정 역할이 아니라 그냥 그 작품을 같이 하고 싶었다.

 

이전까지는 뮤지컬을 주로 했다고. 재학 시절의 짧은 소개 글에는 “인생의 기나긴 방황 끝에 연기를 하게 됐다.”고 쓰여 있더라.

박봉준_ 아, 그건 교수님이 쓰신 문구다. (웃음) 원래는 공대에 다녔다. 연기 할 생각은 없었고, 공부가 하기 싫었다.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나중에 보니 그렇지도 않더라. 그냥 느릿하게 학교에 다니다 졸업하고 뮤지컬을 몇 편 했는데, 언젠가부터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해보고 싶어졌다. 그러다 오랜만에 성국이를 만나게 됐고, 선이 형까지 만난 거다.

하성국 ⓒ이영진

이택근, 하성국 배우는 어떻게 연기를 시작했나. 어떤 점이 좋았는지도 궁금하다.

이택근_ 처음부터 영화를 공부하고 싶었던 건 아니다. 고등학교 때는 체대 입시를 준비했다. 꿈이 많았다. 형사, 경찰, 군인 다 하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영화 보는 걸 좋아했는데, <블루>(이정국, 2002)에서 신현준 배우가 특수부대 요원으로 나오는 걸 보니 갑자기 부럽더라. 배우는 다양한 직업을 넘나들 수 있다는 점에 매력을 느껴서 23살에 상경해 학원에 다녔다. 그러다 운 좋게 건국대에 가게 됐다. 학교에서는 배우라는 직업보다,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재미를 많이 느꼈다.

신선_ 이택근 배우, 하성국 배우 모두 단편영화 연출도 많이 했다.

하성국_ 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우연히 20대 초반에 배울 수 있었던 게 내가 좋아하는 거였고, 또 그걸 하다 보니 재밌었으니까. 막연하게 계속해봐야겠다는 생각만 하던 차에 졸업을 앞두고 내가 왜 연기하는 걸 좋아하는지 돌이켜봤다. 결국 이게 지금으로선 내가 더 좋은 사람,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짓’인 것 같더라. (웃음) 그래서 마음을 굳히고 더 해보는 중이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가 있을까?

하성국_ 연기가 내 마음을 이해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면 더 많은 걸 들여다보게 되고, 그럼 오늘의 내가 어제보다는 더 나은 모습이 되는 게 아닌가 싶어서.

 

<모퉁이>는 영화과 졸업생들의 이야기라 각자 공감할 여지가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처음엔 다들 시나리오를 어려워했다고. 밤에 술 마시고 감독을 찾아간 적도 있다고 들었는데. (웃음)

이택근_ 아마 내가 제일 많이 갔을 거다. (웃음)

박봉준_ 형이 가면서 “봉준아 갈래?” 하면 “당연하죠.” 하면서 같이 갔다.

이택근_ 성원이 내 기본적인 성향과 참 다른 인물이란 생각에 좀 어려워했다. 나였다면 영화 속 상황에서 화를 낼 수도 있었을 텐데, 성원은 그렇지 않으니까. 그럴 때 감독님이 성원은 감정적으로 크게 오르내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면서 내게 계속 믿음을 줬다. “형은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안에 그런 게 있다고 했지. (웃음) 감독님이랑 대화하면서 자신감을 점차 얻었다. 시나리오만 봤을 땐 내레이션도 길고, 말로 풀어놓은 게 많아서 막상 영화로 만들어지면 괜찮을까 싶기도 했는데, 촬영할 때 되게 잘 흘러가더라. 밤새 가편집을 끝내고 났을 땐 기분이 무척 좋았다. “영화가 생각보다 너무 괜찮은 것 같아!”하는 마음이었지.

 

박봉준 배우는? 어떤 지점을 어려워했나.

박봉준_ 처음 연기 시작했을 때, 난 남들 앞에 나서서 뭔가 표현하는 일에 되게 서툰 사람이라고 느꼈다. 그럴싸하게, 근사하게 해내는 연기는 잘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사람 자체로 무언가 느껴지는 연기, 말로 딱 표현할 순 없어도 보고 있으면 마음속에 뭔가 들어오는 연기를 좋아하게 됐다. <모퉁이>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그런데 막상 연기하려니, 내 그릇이 그만큼 커져 있는지 의문스럽더라. 선이 형한테 묻고 싶었던 건 그런 확신들이었다. “대사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가 아니라, “해낼 수 있을까요?” 물론 이렇게 정확히 말한 건 아니지만. (웃음) 형이 나를 많이 믿어줬다. 결국은 그 믿음 때문에 할 수 있었다.

하성국_ 시나리오엔 세 사람이 만난 날의 표면적인 이야기만 쓰여 있는데, 각자 뒤의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서 관객을 설득하기엔 좀 어려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또 구조적으로도 헷갈리는 부분들이 있잖나. 누가 죽었고 누가 안 죽었지? 시간은 어떻게 된 거지? 얘는 왜 이런 말을 하게 된 거지? 그런데 막상 현장에서 감독님이 모니터 앞에서 연출하는 걸 보니, 우리가 미처 모르는 볼륨이 더 큰 이야기를 감독님이 이미 다 가지고 있다는 게 보였다. 그래서 촬영 시작하고는 걱정이 없어졌다.

신선_ 사실 나도 걱정이 많았고, 나 역시 내가 쓴 걸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처음부터 시나리오에 절대 넣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 것들은 있었다. 세 사람의 속 깊은 사정 같은 건 보여주지 않기로 이미 정해놓고 있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지 그런 방식의 작업을 해보고 싶었다. 처음엔 영화제에 가거나 개봉하려는 목표도 없었고, 우리끼리 뭔가를 만들어보는 게 가장 중요했다. 그래서 시나리오도 그렇게 작업한 거고. 막상 촬영 들어가니까, 지금 잘 흘러가고 있다는 걸 계속 느끼게 되더라. 배우들도 글에 잘 안착해서 쭉쭉 나아갔다.

박봉준 ⓒ이영진

지금의 방식을 시도해보고 싶었던 이유는? 성원의 대사처럼 뻔한 게 싫어서일까?

신선_ 그런 건 아니다. (웃음) 사람이나 사건을 볼 때, 좋은 점과 안 좋은 점을 단적으로 가르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 특정한 요소 때문에 누군가 곧장 나쁜 사람이 되거나, 어떤 사건이 그 하나만으로 잘잘못을 따지는 원인이 되는 게 싫었다. 그러다 보면 “난 그런 문제가 없으니까 잘났어, 부끄러운 게 없어.” 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 같거든. 그런 걸 보면 그게 그 정도로 자랑할 만한 일인지, 정말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갈 수 있는지 의문이 들곤 했다. 영화도 그렇게 딱 가르지 않는 방식으로 접근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인물들의 사정도 처음부터 중요하지 않았다.

 

영화과 나온 친구들 이야기라고 하면, 보통 녹록지 않은 현실과 치기 어린 도전을 떠올리게 되는 경향이 있는데, <모퉁이>는 주저하는 마음과 깊은 불안 등을 그 자체로 질기게 붙잡는다. 이야기를 쓸 때부터 그런 감정들을 진득하게 들여다보고 싶었나.

신선_ 영화 내용이 고스란히 내 경험인 건 아니고, 실제로 영화 속 대사를 그대로 해본 적도 없지만, 내가 가진 불안이 그대로 드러난 건 맞다고 본다. 그걸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 시나리오를 쓸 때 내러티브에 집중하기보다는 감정 덩어리들을 쭉쭉 나열하고, 그것들이 한꺼번에 조금씩 떠오르게 하고 싶었다. 영화에 죽음도 나오는데, 죽음의 이유보다는 죽음 자체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글을 썼다. 사람들은 보통 저 사람이 왜 죽었는지, 죽을만한 이유가 있었는지 궁금해하잖나. 하지만 그런 건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런 지점들을 생각하면서, 계속 시나리오가 더 퍼지지 않도록 모으는 작업을 하려고 했다.

 

배우들은 인물의 속사정보다는 감정 덩어리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작업이 어땠나. 어떤 지점에 공감하고 반응했는지.

박봉준_ 누군가의 사정을 본인 삶의 방식과 기준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생각은 늘 하지만 실천이 참 어렵다. 병수 얘길 해보자면, 그는 남들에겐 죽을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친구는 분명 힘들단 말이지. 병수를 완벽하게 다 알고 연기하지 않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어떤 부분은 이해할 수 있었다. 분명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고, 감정이 발생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보는 사람들도 이유를 따져 묻는 게 아니라, 그냥 따라가며 볼 수 있길 바랐다.

 

병수를 소개하며 ‘재수탱이’라고 쓰기도 했다.

박봉준_ 병수는 죽음에 딱 맞닿아있는 사람인데, 어떻게 보면 그게 병수한테는 삶의 방식일 수 있겠다고 봤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기 위해서 재수탱이처럼 다른 사람들 마음속에 들어가서 살아버리겠다고 마음먹은 건 아닐까? 모퉁이를 돌아서기 전까지 병수는 두 사람에게 10년 동안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였을 거잖나. 그러니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보겠다고 생각한 건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병수가 아니고, 그런 삶의 방식도 있으리라고 짐작해볼 뿐이다.

이택근_ 난 영화를 찍으며 얻게 되는 부담, 주저하게 되는 마음, 친구들과 나누는 고민 같은 것들에 공감을 많이 했다. 주변에도 그런 친구들이 많이 있으니까 더욱. 시나리오 읽으면서도 인물들 각자의 감정이 와 닿았는데, 리허설하고 촬영하면서는 더 그렇게 되더라. 성원의 가장 큰 고민은 아마 창작일 거다. 무엇이 옳은 창작인지 계속해서 고민하고, 그래서 영화 만드는 걸 주저하지. 아마 시나리오는 다 써놨을지도 모르는데….

신선_ 나도 처음엔 다들 우유부단하고, 주저하기만 하는 인물들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결국은 자기 안에 작은 신념 같은 게 있어서 그렇게 불안해하고 주저하는 거 아닐까.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에는 신념이 조금씩 반영된다고 생각한다. <모퉁이>의 인물들도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조심하고, 또 돌려 말하려고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런 점을 좀 더 섬세하게 드러내고 싶었다.

하성국_ <모퉁이>를 직접 쓰고 만든 선이 형한테 사람과 세상을 대하는 조심성이 느껴진다. 그게 캐릭터들한테도 있다. 남을 배려하려는 섬세함 같은 것들이 전반적으로 영화를 약간은 따뜻하게 만드는 것 같다. 사람이 죽고, 간만에 만난 친구들끼리 좋지 않고, 뭐가 잘 안되는 영화인데도 보기에 불편하거나 어색하지 않은 데는 그런 이유가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감독님의 성향과 감정들이 조금씩 잘 묻어나오는 영화라고 할까. 나 같으면 중순처럼은 못 했을 거다. 우리는 이제 인연이 아닌가보다 하고 말았겠지. (웃음) 하지만 중순은 계속 두 형을 화해시키려고 하고, 우리가 잘 지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잖나. 영화에서 그런 지점을 발견하는 게 재밌다.

이택근 ⓒ이영진

중순은 단순히 중간에 끼인 인물이 아니라, 나름의 문제로 힘겨워하는 사람이다.

하성국_ 중순은 조화로움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관계의 밸런스를 맞추려고 무던히 노력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러는 과정에서 자기 마음에 구멍이 난 걸 모르고 있다. 외부적인 게 해결되면 다 괜찮아질 거라고 믿는 거지.

 

<모퉁이>는 창작에 관한 여러 고민을 담고 있기도 하다. 성원은 현실의 이야기를 가져다 창작하는 것이 과연 진실한지 고뇌하고, 그로 인해 남들과 갈등을 빚기도 한다. 영화를 공부하며 하게 된 생각들이 하나씩 담긴 결과인가.

신선_ 난 “영화는 영화잖아.” 하는 중순의 말이 맞다고 본다. 누군가 내 얘기로 영화를 만들어도 큰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영화랑 현실은 분명히 다르니까. <모퉁이>의 대사들은 인물의 관계성을 보여주기 위해 쓴 것들이다. 그런데 너무 내 얘기처럼 비치더라. (웃음) 내 경우엔 창작방식이 하나로 정해져 있진 않다. 그때그때 내가 하고 싶은 도전이 있고, 그걸 위해 공부하고 생각하고 연구할 때 재미를 많이 느낀다. 지금 써둔 시나리오는 <모퉁이>와 아예 다른 형식과 느낌이다. 다양하게 해보고 싶다. <모퉁이>에 드러나는 창작에 대한 고민은, 그때 그 시점에 잠시 들고 있던 것들이다.

 

새로운 과제를 마주하는 게 창작의 동력인 셈인가.

신선_ 그래야 에너지가 더 좋아진다.

 

혹시 새로 쓴 시나리오는 다들 봤나.

신선_ 성국이만 못 봤다.

이택근_ <모퉁이>가 잔잔하다면, 그건 좀 거친 파도 같다.

신선_ 비슷한 부분도 있다. 그 주인공도 일면 주저하고 관전하는 인물이다. 조금씩 변주하면서 새로운 걸 찾는 게 내게 원동력이 된다.

 

새로운 아이디어, 과제는 그럼 어디서 얻는지.

신선_ 혼자서 아무렇게나 생각을 많이 하고, 떠오를 때마다 메모하는 편이다. 한두 페이지씩 구상해놓은 것들을 써놓고, 깊이 들어갈 수 있겠다 싶은 게 보이면 시나리오를 쓴다.

<모퉁이>

배우로 살면서 갖게 되는 질문, 중요하게 여기는 고민은 무엇인지도 궁금하다.

하성국_ 요 몇 년 사이에 갖게 된 화두는, 프레임 안에 존재한다는 게 과연 무엇인가 하는 거다. 카메라 앞에서 뭔가를 하고 찍힌다는 게 굉장히 이상한 일이란 걸 언젠가부터 느끼게 됐다. 그래서 오만가지 방법으로 고민 중이다. 기술적으로 자연스러워 보이는 걸 넘어서는 에너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프레임 안에 존재하지 않는 나의 일상에서 찾아야 하는 거고, 그게 계속 쌓이다 보면 자연스레 보이겠지. 그런 게 신기한 연기 같고, 그럴 때 눈을 뗄 수 없는 무언가가 전해진다고 생각한다.

이택근_ 나 역시 진심이 담긴 연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기술적인 부분에 관한 고민도 함께하게 된다. 그런데 잘하는 배우들을 보면 진심을 담아, 기술적으로 연기하더라. (웃음) 지금의 고민은 나만의 루틴을 알고, 어떤 현장에서든 그걸 적용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거다. 어떤 현장에서는 즐기며 할 수 있지만, 또 어떤 현장에서는 만족스럽지 않게 나오는 경우가 있으니까. <모퉁이>는 워낙 친한 사람들과 했으니 편하고 즐거웠지만, 드라마 현장 같은 경우는 너무 긴박할 때도 있다. 나만의 루틴이 있다면 대비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 걸 고민 중이다.

박봉준_ 나한테는 역시 확신의 문제가 가장 크다. 인물의 감정과 상황을 이해하는 건 백 퍼센트 확실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걸 표현해냈을 때는 그 순간 맞다, 아니다를 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안의 확신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성국이가 말했던 대로 내 평소의 태도와 삶을 바라보는 시선과 연관될 테고. 최대한 좋은 것을 보고, 또 좋게 보려고 노력한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도 중요하다고 본다. 내가 내놓는 것들을 누군가 나쁘게 볼 것이다, 안 좋게 볼 것이다, 하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내 안의 확신을 가질 수 있을 테니까.

 

이택근 배우는 특히 곽민규 배우와 친하다고 들어서, 인터뷰 전에 의견을 구했다. <모퉁이>가 개봉하게 돼 무척 기쁘다는 이야기를 먼저 하더라. 이택근 배우에게는 그간 잘 조명되지 않은 섬세함이 있는데, <모퉁이>에서 그런 부분이 잘 드러나서 좋다는 얘기도 해줬다.

이택근_ 섬세한 면을 보여주고 싶다고 해도 보여줄 기회가 없었다. 내게 그런 모습이 있는 것 같긴 하다. 친구들이랑 술 마시면 자주 울거든. (웃음)

하성국_ 보기보다 여리다.

 

그런 모습에서 성원을 발견한 게 아닐까.

신선_ 형의 그런 모습은 자주 본다. (웃음) 그렇다고 특별히 약한 측면을 봤다는 뜻은 아니다. 누구나 약한 면은 가지고 있을 거다. 성원은 체격도 크고 건장한 사람인데,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있는 게 영화에 더 잘 맞겠다고 봤다. 전형적이지 않다고 할까. 형 목소리도 어울렸고.

 

목소리도 그렇지만, 후반부에서 성원의 맑고 선한 눈을 마주하게 되어 인상 깊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초반에는 카메라도 인물의 눈을 잘 안 보고, 인물들끼리도 눈을 잘 안 마주친다.

신선_ 관계가 어떤 방향으로 흐르든, 뭔가 꺼내놓고 난 뒤에는 눈을 쳐다볼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고 느낀다. 그렇다고 처음에 눈을 안 보다가 나중에 본다는 걸 의도하진 않았는데, 원래 남자들끼리 얘기할 때 눈을 잘 안 쳐다보기도 하니까. (웃음) 배우들이 자연스럽게 연기하는 과정에서 지금 같은 결과가 나왔을 거다.

하성국_ 지문에 ‘눈을 쳐다본다’, ‘눈을 피한다’는 게 있기도 했다.

박봉준_ 처음 마주쳤을 땐, 성원의 시선이 매우 따가워서 눈을 볼 수가 없었다. 못 보겠더라.

신선_ 예고편들을 보니, 그 장면에서 눈빛만 봐도 관계가 한눈에 들어오더라.

신선 ⓒ이영진

곽민규 배우가 하성국 배우에 대해서는 단단하고 불안해하지 않는 배우라고 이야기하더라. 어쩌면 겉으로 티가 잘 안 나는 편인지도 모르겠다.

하성국_ 예전에는 그게 좀 심했다. 강한 척, 센 척을 했다는 건 아닌데, 불안을 드러내는 걸 싫어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편해졌다. 불안하고 힘들다고 얘기해도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에, 그렇게 어려워했던 게 지금은 좀 옛날 일처럼 느껴진다.

신선_ 성국이는 계속해서 자기 생각을 정리하고, 본인만의 방식으로 연기에 접근하려고 하는 친구다. 그래서 민규가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반대로 누가 박봉준 배우에 관해 물으면, 다른 분들은 어떻게 대답해줄지 궁금하다.

하성국_ 현장에서 천방지축 일곱 살이었다. 에너지가 그만큼 좋고, 본인의 즐거움을 주변에 전할 수 있는 배우다.

신선_ 귀엽고 다정한 친구. 그리고 얼굴선이 참 좋다.

박봉준_ 너무 좋고 즐거우니까, 다들 같이 신나서 잘하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내 역할이 병수더라. 어쩌면 다른 사람들이 연기에 집중하지 못하게 방해한 건 아닌지 걱정도 됐다.

 

카메라 연기는 어땠나. 거의 첫 경험이었는데.

박봉준_ 카메라 앞에서 연기한다는 생각은 거의 안 했고, 앞에 있는 사람에게 집중하려고 했다.

 

익숙한 공간에서 촬영하는 건 생소한 공간에서 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또 다른 에너지를 얻었는지.

하성국_ 공간에 대한 인지를 덜 해도 되니 확실히 좋았다. 다른 걸 크게 신경 안 쓰고 촬영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음식이 무슨 맛인지도 이미 다 아니까. (웃음)

신선_ 카메라 설치하고 모니터를 보는데 마음이 확 편해졌다. 카메라로 담아보니 더욱 공간 선택을 잘했다고 생각하게 됐다. 우리가 촬영하는 동안에는 영업도 안 하셨다. 그 골목을 세트장처럼 썼다.

이택근_ 사실 우리 단골 좌석은 아니었다. 영화에서 대학생들이 생일파티 하는 곳, 그 안쪽이 우리 자리다. (웃음)

 

친한 친구들과 함께 만든 영화인데, 작업하면서 배우들한테 새롭게 느낀 게 있나.

신선_ 간단히 말하자면, 없다. 이 배우들과 같이하기로 했을 때 생각했던 걸 고스란히 다 느꼈다. 남들이 보기엔 특별한 시간일 수도 있지만, 난 우리가 늘 함께하던 시간 중의 일부라고 느낀다. 모두가 자기 영화 찍는 것처럼 작업했고, 불편하게 뭔가를 부탁할 일도 없었다. 영화와 일상이 나눠지는 느낌도 별로 없었다. 몇 년 전에 찍었어도, 혹은 더 늦게 찍었어도 아마 똑같았을 거다.

<모퉁이>

<모퉁이>는 유독 동료들에게 남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영화처럼 보인다. 영화의 완성과 개봉을 기뻐하는 분들이 많고, 영화가 다루는 시기나 감정에도 크게 공감하더라.

신선_ 처음에 이 영화를 시작했을 땐 우리끼리 해도 된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뭔가를 과시하려던 게 아니라, 우리끼리 늘 말하던 걸 한번 해보자는 거였다. 실제로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주변 친구들이 되게 기뻐해 주고 좋아해 줬다. 모두 오래된, 내가 오랫동안 영화를 못 찍고 있는 것도 다 본 친구들이다. 부산에도 굉장히 많이 갔다. 우리 팀만 왜 이렇게 많이 가나 싶을 정도로. (웃음) 우리 작업 방식이 참 행복한 것 같다고 말해주고, 자기 일처럼 기뻐해 줘서 뭉클하고 고마웠다.

하성국_ 형이 결국 해냈구나, 싶어서 벅차기도 했다.

 

어두운 감정과 힘겨운 상태를 다루는데도 영화에 맑고 깨끗한 기운이 서려 있다. 이 또한 <모퉁이>의 신비다.

박봉준_ 촬영하면서, 내가 이 팀에 소속돼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결과물을 내서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을 수 있고 또 그들과 교류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무척 행복했다. 그런 시간이 고스란히 쌓여있고, 그걸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따뜻한 기운을 받는 거 아닐까.

하성국_ 영화 만들면서 감독님의 솔직한 모습을 많이 봤다. 뭔가 보태거나 빼려고 하지 않는 태도 덕분에 말간 느낌이 남은 게 아닐까. 욕심이 더해지면 이야기가 부풀려지고, 더 복잡해질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지 않고 계속 솔직해지려는 과정에서 맑은 것들만 남은 느낌이다.

신선_ 원래 답을 내리는 데 별 관심이 없다. 좋은 질문이 있으면 그걸 에너지로 삼아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퉁이>는 답이라기보다 질문에 가까운 영화라고 본다. 죽음이나 관계에 대해 답을 내리지 않기 때문에, 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생각이 떠오르는 게 아닐까, 그래서 맑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게 아닐까 싶다.

이택근_ 어쩌면 중순이 성원에게 마지막에 해준 말 때문에 맑은 느낌이 전해지는지도 모르겠다. 감독님 성향도 반영됐을 테고. 그나저나 처음 엔딩은 지금과 달랐다.

 

원래 콜라 캔을 차는 게 엔딩이었고, 네 친구의 친밀한 시간을 추가한 버전이 있다. 지금은 거기서 한 번 더 바뀌었다. 성원과 중순이 원래 만나기로 했던 친구, 규정의 얼굴이 안 나온다.

신선_ 그 생각을 계속하고 있다가, 부산에서 돌아오고 바로 바꿨다. 딱 끊었는데 지금처럼 끊겼다. 그걸 보고 형이랑 둘 다 좀….

이택근_ 울컥했다.

신선_ 그게 딱 좋은 조화로움이라고 봤다. 반가운 순간에 끝내는 게 좋더라.

 

<모퉁이>가 각자에게 남긴 질문은 무엇인가.

이택근_ 촬영할 때마다 집에 가면서 “나 잘하고 있나?” 했다. (웃음)

신선_ 이 멤버 그래도, 그 환경 그대로 다시 또 찍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 어려울 것 같기도 하고, 반대로 쉬울 것 같기도 하다.

박봉준_ 마냥 친구들끼리 노는 자리는 아니었고, 각자의 역할을 가지고 만난 거잖나. 그 역할을 더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하성국_ 처음에 말했듯이, 관계에 대한 질문이 가장 크게 남는다. 잘해 나갈 수 있을까, 중순, 성원, 병수가 아닌 현실의 내가 세상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까, 그런 질문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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