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문학을 연구하는 대학 교수 레다(올리비아 콜맨)는 휴가를 맞이해 그리스로 떠난다. 드나드는 사람이 빤한 소도시, 볼거리라고는 눈부신 햇빛과 바다뿐인 곳에서 일상은 얼마간 단순하게 흘러간다. 레다는 매일 같은 해변으로 나가서 일광욕하고, 밀린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 챙겨야 할 가족도, 가르쳐야 할 학생도 없다.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은 레다에게 자유를 뜻하지만, 얼마간 위험과 불쾌를 감수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방인을 향한 시선에는 호기심과 배척감이 공존하고, 혼자 다니는 여자는 특히 눈에 띈다. 레다는 거의 모든 요구에 완고하게 대응하며, 누구와도 섞일 마음이 없음을 드러낸다. 남편 성을 따르는 “카루소 부인”이라는 호칭을 거부하고, “가족끼리 좀 뭉치겠다”며 레다에게 선베드를 옮겨 달라는 이들의 부탁도 들어주지 않는다. 다만, 레다 또한 누군가를 관찰한다.
어린 딸과 해변을 찾은 니나(다코타 존슨)는 젊고 매력적이다. 레다는 니나의 탄력 넘치는 몸을 응시하고, 그와는 대조적으로 피로가 한가득 묻어나는 표정에도 주목한다. 동류끼리 알아보듯, 두 여자는 조용히 눈빛을 주고받는다. 니나는 겉돈다. 결혼 후 남편 가족과 함께 살지만, 새로운 공동체에 완벽히 속하지 못한 모습이다. 오히려 그들의 소란과 참견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딸과 둘만의 세계에 몰두한다. 영화 속 클로즈업 화면에 담긴 모녀는 극도로 친밀해서 은밀하기까지 하다. 아이는 엄마의 몸 구석구석에 물을 붓고, 엄마는 아이를 수시로 끌어안는다. 니나는 딸의 장난감이자 운동장이며, 담요다. 둘은 언제든 접촉할 수 있고, 육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최소한의 경계마저 허물어버린 사이다. 니나와 딸을 지켜보던 레다는 왈칵 눈물을 쏟는다. 그때부터 영화는 광범위하고 집요한 플래시백을 통해, 레다의 과거로 재차 접속한다.
퍼즐 맞추듯 레다는 봉인된 기억을 한 조각씩 건져 올린다. 어느 날, 니나는 딸을 잃어버린다. 젊은 시절 레다는 딸을 잃은 적이 있고, 버린 적도 있다. 올리비아 콜맨이 맡은 중년 레다와 제시 버클리가 연기한 청년 레다는 인상과 성격 면에서 사뭇 달라 보이지만, 두 인물은 불안을 공유하며 하나로 이어진다. 레다는 늘 형언하기 어려운 혼란에 처한다. 예나 지금이나 “자식들이란 끔찍한 부담”이지만, 어린 두 딸을 양육해야 했을 때는 스트레스를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다. 애정과 관심을 갈구하는 자식들에게 레다는 언제나 기대에 못 미치는 엄마였고, 아이들의 호출은 끈질긴 침입이나 마찬가지였다. 학업을 이어갈 길은 요원했으며, 성적 욕구의 발산 또한 번번이 유보당했다. 레다에게 자식은 축복과 재앙을 동시에 가져온 존재였다. 결국 레다는 두 딸을 떠났고, 남편의 애원과 협박에도 3년간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훌륭한 선택이 아니란 것쯤은 누구보다 잘 알지만, 그때 레다에게는 당장 변화가 필요했다. 새로운 관계, 새로운 환경, 새로운 생활 방식. 그것은 두 아이의 엄마로서가 아니라, 전도유망한 학자이자 여전히 매력 넘치는 여성으로 자리할 수 있는 영역을 의미했다.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니나 앞에서 레다는 죄책감과 해방감이 공존했던 행복에 관해, “비뚤어진 엄마”이며 “이기적”인 사람으로서 어떤 배반을 자처했는지 고백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줄곧 물기를 머금고 있다. 바다에서 수영하는 레다의 모습은 양수에서 헤엄치는 태아와 유사하고, 엄마와 딸은 눈물, 침, 땀, 피, 진물과 같은 끈적이고 비릿한 체액으로 엉겨 붙은 관계로 묘사된다. 침수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엄마는 막대한 책임을 떠안는다. 한 인간을 태어나게 하고, 그를 인간답게 길러내는 일. 개인이 감당하기엔 지나친 무게이기에, 엄마는 자신을 무너뜨려야 겨우 엄마로 버틴다.
영화는 모성 신화에 저항하는 페미니즘의 시도와 긴밀하게 맞닿아 있다. 임신, 출산, 양육은 오랜 시간 여성의 소명으로 취급되며, 여성이라면 으레 거쳐야 하는 일반적 경험으로 간주했다. 동시에 여성을 ‘약한 여자’와 ‘위대한 어머니’로 이분하는 동안, 모성은 완전무결한 사랑과 희생을 강요받는 위치에 놓였다. 어머니와 모성을 둘러싼 왜곡에서 벗어나기 위해, 영화는 레다의 감각에 집중한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인물이 느끼는 바를 낱낱이 파헤쳐 감으로써, 레다를 약한 여자도 위대한 어머니도 아닌 모순 가득한 인간으로 그려낸다. 레다와 니나가 최초로 만난 이후 그들 사이에는 다양한 사건이 발생하지만, <로스트 도터>는 기본적으로 레다의 내부적 모험이다. 레다는 진흙 구덩이 같은 기억 속에서 허우적대며,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는 경험과 감정을 발굴해낸다. 그중에는 적어도 레다의 진실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다. 엄마와 자식은 결코 분리할 수 없는 존재이지만, 완전한 통합도 불가능한 타인이다. 그러한 사실로 인해 엄마로 사는 일은 시시때때로 곤란하고, 고통은 부지불식간에 기습한다.
<로스트 도터>는 <나의 작은 시인에게>(사라 코랑켈로, 2019) <프랭크>(레니 에이브 러햄슨, 2014) <다크 나이트>(크리스토퍼 놀란, 2008) 등에 출연한 매기 질렌할이 배우로 경력을 쌓은 지 20여 년 만에 선보이는 감독 데뷔작이다. 소설 <나의 눈부신 친구>(2011)로 평단과 독자의 지지를 고루 얻은 작가 엘레나 페란테의 동명 소설이 원작. 주연을 맡은 올리비아 콜맨은 인터뷰에서 원작을 “우리가 사회적으로 어떤 특정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기로 한 합의를 깨버린” 작품이라 평했다. 어머니 역할에 헌신하기를 거부하거나 부여된 목표를 달성하는 데 실패해버린 여성을 다룬다는 점에서, 사회가 금기시하는 이면을 들추어낸다는 점에서 영화 또한 암묵적 합의에 동조하지 않는 일종의 ‘위반’을 저지른다. 클로즈업과 플래시백을 반복 활용하며 주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대담하고, 서로 다른 시대와 세대의 여성을 연기하는 세 배우는 저마다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낸다.


로스트 도터 The Lost Daughter 감독 매기 질렌할 출연 올리비아 콜맨, 다코타 존슨, 제시 버클리 수입·공동배급 그린나래미디어 배급 영화특별시 SMC 제공 인터파크스 제작연도 2021년 상영시간 121분 등급 15세이상관람가 개봉 2022년 7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