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려야 그림, 달라야 세상
<니얼굴> 서동일·장차현실(with 정은혜)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Interview / 2022-06-23

부부가 나란히 카메라 앞에 서는 일은 ‘가족식’ 이후 처음인 것 같다고 했다. 티격태격하다가도 서로 돌아보며 옷매무새를 정리해준다. 2008년 만화가 장차현실과 영화감독 서동일은 부부가 됐다. 딸 은혜와 아들 은백까지 네 사람이 가족으로 살겠다고 약속하는 자리이기에, 결혼식 대신 가족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집에서 지지고볶으며 살다 보니, 어느새 십수 년이 흘렀다. 가슴 무너지는 순간이 들이닥치길 반복했지만, 넷이 잡은 손을 놓진 않았다. 가족의 중심에는 딸 은혜가 있다. 장차현실은 만화 곳곳에 힘주어 쓰고 마음껏 그렸다. “세상에 불필요하게 태어난 생명은 없다. 누구나 원하는 공간에서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살아갈 권리가 있다. 그것을 배려할 수 있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다.” 하지만 발달장애인 은혜에게도, 그들 가족에게도 사회는 그리 건강하거나 넉넉한 곳이 아니었다.

먼저 문을 연 것은 사회가 아니라, 은혜였다. 어느 날, 그는 엄마의 미술학원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멋대로 뻗어나가다 이내 제자리를 찾아 돌아오는 선. 은혜는 저만의 독특하고 활기찬 필체로 종이를 한가득 채워냈다. 양평 문호리에서 열리는 리버마켓에 셀러로 참여하면서 작업은 본격화됐다. 엄마는 캐리커처 작가 ‘은혜씨’의 보조를 맡았고, 아빠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카메라를 들었다. 은혜는 심각한 얼굴로 그림에 집중하다가, 파도처럼 밀려드는 손님을 보며 때때로 능청을 떨었다. “골치 아파요, 이놈의 인기가!” 그렇게 은혜는 수천 명을 만났다. 예쁘게 그려달라는 부탁에, 저마다 다르게 생긴 타인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니얼굴>은 한 예술가의 성장을 기록한 결과이자, 은혜가 보내는 초대장이다. 우리 모두 즐겁게 어울릴 수 있다고, 함께 마주 보며 아름다움을 발견해내자고.

감독과 피디로 인터뷰에 참석한 부부 곁에 주인공 정은혜 작가도 동석했다. “그리거나, 뜨개질하거나, 먹거나, 자거나 넷 중 하나"라는 엄마의 말을 증명하듯, 은혜는 대화 내내 뜨개질에 몰두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올려 엄마를 쏘아보거나, 방금 보낸 눈빛은 장난이었다는 듯 빙긋 웃었다.

 

 

정은혜 작가는 얼마 전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를 통해 배우로 데뷔했어요. 인기를 실감하는 중인가요?

정은혜_ 재밌었어요. 제가 좋아하는 배우는요, <기생충> 나오는 이정은. 드라마에서 친해졌어요. 난 영옥이 언니 영희, 쌍둥이 자매예요. 우리 좀 닮았어요.

 

대사량도 상당하더라고요. 힘들지는 않으셨어요?

정은혜_ 아니요. 안 힘들었어요.

서동일_ 마침 찾아보니, 처음 리딩 할 때 찍어놓은 영상이 있던데. 내일 유튜브에 하나 올려야겠다. 아니, 오늘 밤에 올릴까?

장차현실_ 그래, 이상한 가족 이야기 같은 것 좀 올리지 말고. 부산국제영화제 상영 이후, 내가 그 영화 상영 금지했거든요. 근데 어느새 야금야금 올려놨어.

 

<작은 여자 큰 여자 그 사이에 낀 남자-에피소드1>(2006) <작은 여자 큰 여자 그 사이에 낀 남자-에피소드2>(2007) 말씀하시는 거죠? 그래도 영화 덕분에 가족의 옛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잖아요.

서동일_ 사람들이 알아야 해, 우리가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 지금이 그냥 온 시간이 아니라는 걸.

장차현실_ 근데 난 유튜브에서 딱 보는 순간, 갑자기 외출하기가 싫어지더라. 다 보긴 했어요. 빨리빨리 뒤로 넘기면서. 내가 제일 싫어하는 장면을 넣었나 안 넣었나 확인하려고.

정은혜_ 성질! 엄마 성질내면, 나 집에 갈 거야.

장차현실_ 네가 그때 내 성질을 망쳐놨어. (웃음)

<니얼굴>
<니얼굴>

어쨌든 드라마 종영 후에도 반응이 뜨거워요. 은혜 작가님이 나서서 영화 홍보를 확실히 해준 셈이에요.

서동일_ 2020년에 영화를 완성하고, 그해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됐어요. 배급사와 계약한 다음, 본래 곧장 개봉할 생각이었죠. 그러다 갑자기 노희경 작가님한테 연락이 와서 <우리들의 블루스> 출연을 제안받았어요. 드라마 속 설정이 ‘숨겨진 인물’이잖아요. 은혜가 외부에 노출되면 안 되니까 부득이하게 영화 개봉을 드라마 이후로 미룰 수밖에 없었어요. 코로나19가 심해지는 것도 한몫했고요. 결과적으로 너무 잘 됐죠. 우리도 드라마 대본을 같이 읽고, 촬영 현장에서도 계속 함께했어요. 그런데도 방송을 보면서 ‘은혜가 주야장천 등장하다니!’ 하며 놀랐어요. 사람들이 이토록 큰 관심이나 사랑을 보낼 줄도 몰랐고요. 이 흐름이 영화로, 극장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장차현실_ <니얼굴>은 은혜가 아티스트로 성장하는 과정을 기록한 작품이에요. 영화에는 참 아름다운 은혜가 담겨 있어요. 제 만화에 자주 등장했던 은혜처럼요. 생각해보면 영화든 만화든, 은혜의 의지 없이는 불가능했으리라 봐요. 은혜 곁에서 가장 먼저 감동한 우리가, 부모가 이 애를 세상에 알리자고 나섰던 거죠. 요즘 그런 생각해요. 또 다른 은혜의 부모들이 아이들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들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알고, 힘을 냈으면 좋겠다.

서동일_ 그래서 그 영상을 올린 거야. 갑자기 하늘에서 뚝 내려온 아름다움이 아니잖아.

장차현실_ 맞아. 우리가 거쳐온 과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간혹 쉽게 말하기도 해요. “이 정도 장애는 문제라고 할 수 없는데, 뭐가 걱정이냐.” 근데 장애가 경하든 중하든, 부모들은 다 똑같아요. 사회에 처한 우리 상황이 그래요. 돈이 많아도 소용없어요. 처음에는 부모도 착각하죠. 내 자식 한 명의 행복쯤이야, 내 능력으로 만들어 줄 수 있다고 믿어요. 저 역시 그랬지만, 살면서 그게 아니란 걸 거듭 깨달았죠.

 

영화는 리버마켓에 참여한 은혜 씨를 중심으로, 2016년부터 4년여에 걸친 시간을 담아요. 처음부터 영화 제작을 목표로 촬영을 시작하셨나요?

장차현실_ 처음에는 촬영은커녕, 아예 리버마켓 나가는 일을 반대했어요. 돈 몇 푼 벌자고 거기까지 가서 고생하냐고요.

서동일_ 은혜가 5천 원 받고 시작했거든요.

장차현실_ 종일 그려 봤자, 수입이 최대 2만 5천 원. 우리끼리 밥을 사 먹고 나면, 남는 게 없죠. 어느 날엔 내가 미쳐서 옷을 한 벌 산다? 그럼 그날 장사 완전히 공치는 거예요. 아무튼 다들 고생했어요. 시간이 좀 지난 다음에는 한 달에 한 번 나갔는데, 초반에는 주말마다 갔어요.

서동일_ 은혜가 그림 하나를 완성하기까지 2시간이 걸렸어요.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돈은 오히려 더 나가고. 그러다 보니 제가 많이 반대했죠. 짜증도 내고, 좀 비협조적이었지.

장차현실_ 이혼하려고 그랬다니까.

정은혜_ 엄마, 살살해.

장차현실_ 알았어. (웃음)

서동일_ 근데 은혜가 계속하더라고요. 야외에서 추위와 더위, 비와 바람을 견디며, 어떻게든 본인이 주문받은 그림을 그려내려 애쓰는 거예요. 여러 셀러나 손님들과 소통하면서 좀 더 당당해지기도 했고요. 은혜가 자기를 증명하고 싶구나, 제 삶을 살고 싶어 하는구나. 지금 그런 의지를 그림으로 그려내고 있구나. 문득 깨닫고 나니, 응원하고 싶어졌어요. 근데 나한테 응원할 방법이 뭐 따로 있나. 카메라 들고 기록하기 시작했죠.

장차현실_ 그렇다고 제가 칭찬을 해줬겠어요? 우리는 일하느라 허덕이는데, 자기는 도와줄 생각 없다는 듯 저쪽에서 카메라만 들여다봐요.

 

고생할수록 오히려 좀 즐기는 것 같고. (웃음)

장차현실_ 그렇지, 카메라가 원하는 순간은 그런 거야.

서동일_ 처음에는 아빠의 마음으로 기록했는데, 점차 은혜가 가진 매력이 보이더라고요. 감독 입장에서 봐도 은혜는 참 괜찮은 캐릭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영화화를 결심했고, 영화진흥위원회 제작 지원에도 응모했죠. 2018년도 하반기로 기억해요.

장차현실_ 제작지원 받은 순간부터 촬영을 굉장히 지지했어요. (웃음) 사실 그림이나 사진도 훌륭하지만, 영상에는 큰 힘이 있잖아요. 작업하면서 힘들긴 했지만, 서로 격려하고 응원했어요.

정은혜 ©이영진

긴 시간 촬영했고, 사건이 아닌 인물을 따라가는 작품이에요. 세세한 계획보다는 큰 틀에서 원칙과 방향을 세우는 과정이 필요했을 듯해요.

서동일_ 그전에 해온 작업과는 전혀 달랐어요. <두물머리>(2013)와 <명령불복종 교사>(2016)는 각각 4대강 사업 현장에서 유기 농지를 지켜내려는 농부들과 일제고사가 시행되면서 해임 파면된 교사들을 다루는 현장 다큐멘터리예요. 일단 사건이 발생하고, 이후 전개 과정에서 자연스레 흐름이 생겨요. 상황이 긴박해지기도 하고, 나름의 결론도 나오고. 근데 이번에는 은혜의 일상과 그림 그리는 행위를 찍었거든요. 촬영할 때는 괜찮았는데, 편집에 들어가니 고민스럽더라고요. 편집 방향을 잡기가 쉽지 않았어요. 사실 초기 버전에서는 엄마가 훨씬 많이 등장했어요.

장차현실_ 늘 같이 있으니까.

서동일_ 그러다 보니 은혜가 엄마에게 붙어 다니는, 매사 의존하는 존재로 비춰지는 듯했어요. 은혜에게 좀 더 집중해야겠다 싶었죠. 결국 이 사람과 대화하며, 엄마를 최대한 걷어 내자는 데 합의했어요. 은혜를 주체적으로 보여주자, 은혜의 매력과 의지를 드러내는 방향으로 가자.

장차현실_ 처음에는 살짝 기분 나빴는데, 새로 편집한 버전을 보니 무슨 뜻인지 알겠더라고요. 내가 없는 편이 낫구나. 실제로도 그랬어요. 리버마켓에 항상 같이 나가다가 한 번은 제가 마감이 겹쳐서 못 따라갔어요. 집에 돌아온 남편에게 어땠냐고 물으니, “당신 없으니까 더 잘해”라는 거예요. 솔직히 그때 콧방귀 꼈거든요. 근데 나중에 영상을 보니, 그 말이 사실이더라고요. 나랑 있으면, 은혜는 그림만 그려요. 손님 응대, 사진 촬영, 계산, 포장 등 나머지 일은 전부 나한테 시키는 거예요. 다른 일은 아예 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근데 내가 없는 날, 얘 혼자서 그걸 다 해내더라고요.

 

장차현실 작가님은 프로듀서로 합류하셨어요.

장차현실_ 은혜와의 소통을 고려했을 때, 제가 가장 적합했던 것 아닐까요. 생활, 그림 작업, 전시 등 은혜의 모든 영역에 관여하기도 하고요. 선택의 여지가 달리 없었어요. 제가 중간에서 흐트러지지만 않으면, 그럭저럭 가능했던 역할이어서 했던 거죠.

 

흐트러지지 않는다는 건 무슨 뜻인가요.

장차현실_ 은혜를 내 딸이 아닌, 하나의 독립된 존재로 바라보는 일. 객관적 시선을 갖추는 게 중요했어요. 그 외에 제작 관련해서는 감독님 말을 따랐죠. 사장님처럼 이것저것 시키더라고요. (웃음)

 

제작 과정에서 은혜 씨와는 주로 어떤 대화를 나누셨나요? 여느 현장처럼 동의를 구하고, 타협하고, 단념하는 과정이 계속됐을까요?

서동일_ 은혜는 그림을 그렸고, 저는 찍었어요. 그게 다예요. 서로 합의하고 의논하는 과정을 굳이 거칠 필요가 없었어요. 오히려 내가 힘들어서 쉬고 있으면, 은혜가 못마땅하다는 듯 쳐다봤죠.

 

‘난 일하는데, 넌 안 하니?’

서동일_ 그렇죠. 자기는 계속 그림을 그리는 중이니까.

장차현실_ 전부터 남편이 카메라를 집안 곳곳에 놓고 찍었어요. 덕분에 우리는 카메라에 익숙해요. 촬영하거나 말거나 싸우고, 웃고, 울고 그래요. 어느 때 보면, 둘이 진짜 웃겨요. 그림 그리는 은혜 옆으로 카메라가 점점 가까이 내려오는 거예요. 그럼 얘는 그걸 피해서 악착같이 그리고, 남편은 질세라 악착같이 그 모습을 찍고. 둘을 지켜보다가 “엔간히 좀 해라” 그랬어요. (웃음)

서동일_ 기본적으로 은혜는 어떤 상황에서든 크게 긴장하거나 동요하지 않아요. 타고난 성향이 그래요.

장차현실_ 게다가 우리는 대화하면, 도리어 피곤한 일이 늘어나거든요. 은혜에게 뭔가를 요구하는 순간, 짜증을 내니까.

정은혜_ 도저히 안 돼요. 제가 엄마를 닮아서.

장차현실_ 어머, 너무하다. 너 정말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마.

정은혜_ 내가 스트레스받아서 흰머리 나는 거잖아.

장차현실_ 내 머리는 까만 거 같아? 야, 이거 다 염색한 거야! (웃음)

<니얼굴>
<니얼굴>

감독님과 은혜 씨가 부녀라는 사실을 모른 채 영화를 봐도, 누구나 ‘한집에 사는 사이구나’ 할 것 같아요. 카메라가 대상에 아주 가깝고, 은혜 씨의 얼굴, 손, 발 등을 클로즈업하는 장면도 많아요.

서동일_ 그림을 그리는 손, 대상을 바라보는 눈동자, 조금씩 완성해가는 그림. 이 모든 게 은혜의 의지를 가리킨다고 봐요. 발달장애인이 사회적 관계를 맺기 힘든 이유는 분명해요. 우리 사회는 언어적 소통 중심으로 가잖아요. 발달장애인은 다양한 비언어적 소통 방법을 사용해요. 그중 하나가 그림이죠. 비록 언어적 소통은 원활하지 않지만, 은혜는 그림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어 해요. 영화에서 그런 의지를 표현하고자, 클로즈업을 많이 썼어요.

 

앞서 편집에서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씀해주셨어요. 기승전결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뭐였나요.

서동일_ 핵심은 리버마켓이었어요. 거긴 완전히 라이브예요. 날씨부터 오가는 사람까지 온갖 외부 요인과 맞닥뜨린 채, 실시간으로 그림을 주문받고 그려내는 현장이죠.

장차현실_ 처음 갔을 때가 8월이었지? 한여름이었어요.

서동일_ 좀 기다렸다가 가을에 시작하자고 했는데, 내 말을 안 듣더라고요. 당장 가야 한다고.

장차현실_ 거기는 진짜 혹독한 곳이에요. 바람 살랑살랑 불 때 시작해서는 오래 버텨낼 수가 없어요. 차라리 고비를 먼저 만나자 싶었어요. 그러고 나면, 다음은 그나마 수월하게 받아들일 테니까.

서동일_ 그렇게 작업을 시작했기에, 은혜가 단단하게 버티는 힘을 쌓지 않았나 싶어요. 공력이 생긴 거죠. 작가이자 셀러로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중심으로, 영화에 은혜의 사계절을 담으려 했어요. 사실 발달장애인 입장에서 볼 때, 리버마켓은 유토피아나 다름없어요. 모든 셀러가 동등하니까요. 다 같이 오전 10시에 부스를 열고, 저녁 8시에 닫아요. 예외란 게 없어요. 은혜 역시 차별도 배려도 받지 않고, 그냥 남들과 똑같이 자기 부스를 운영했어요. 손님들은 은혜와 눈을 맞추고 대화했어요. “예쁘게 그려주세요. 잘 부탁드려요.” 그림을 건네면, 다들 좋아하면서 고마워했고요. 이전까지 은혜는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죠. 자기 존재를 인정받는 경험이 극히 드물었던 거예요. 자연스레 상처를 치유하는 시간이 됐어요. 은혜는 자신을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는 시선에 거듭 상처받았어요. 그러고 나면 혼자 방구석에 앉아 상상 속 친구를 불러내요. 걔한테 쏟아내면서 화풀이하는 거예요. 은혜가 리버마켓에서 인기 셀러로 성장하는 여정은 곧 자존감을 회복하는 과정이기도 했어요.

 

리버마켓은 은혜 씨만의 네트워크를 구축한 공간이라는 점에서 특히 뭉클하게 다가와요. 이전까지는 엄마의 친구와 친구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면, 리버마켓에서는 스스로 친구를 사귀죠.

장차현실_ 맞아요, 저는 그곳에서 은혜 보조였거든요. 관계의 주체도 은혜였어요. 양평에 예술가가 꽤 많은데, 크게 두 부류로 나뉘어요. 유명하고 부유한 작가들은 각자 멋진 작업실 짓고 살죠. 그런가 하면 서울 집값을 견디지 못해 이곳으로 온 작가들도 있어요. 꾸준히 작품 활동하지만, 형편이 아주 넉넉하지는 않아요. 마켓에는 대개 그런 분들이 나와요. 다들 예술가다 보니, 일단 사고가 열려 있어요. 편견 없이 은혜를 받아들이는 거예요. 마켓을 총괄하는 감독님도 은혜를 지지해줬어요. 하루는 회의 중에 셀러들을 향해 묻더라고요. “아직도 은혜 씨 찾아가서 그림 안 그리신 분 있나요? 손 들어 보세요.” (웃음)

장차현실 ©이영진

그럼 촬영을 마무리할 시점은 어떻게 인지하셨어요?

서동일_ 엔딩에 들어간 폐공장 전시를 실제로 마지막에 촬영했어요. 공간 자체가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발달장애인의 모습과 일맥상통한다고 느꼈어요. 폐공장은 방치된 공간이잖아요. 가까이 들여다보지 않으면, 저 안에 어떤 보석 같은 아름다움이 숨어 있는지 알 수가 없죠. 발달장애인의 삶도 그래요. 저 사람이 뭘 할 수 있겠어? 무슨 쓰임이 있겠어? 그들의 욕구와 잠재력을 살펴보지 않고, 그냥 무시하는 거예요. 은혜와 동료 작가의 작품을 모아서 폐공장에 걸기로 했어요. 상상조차 못 했던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 공간이 재탄생하지 않을까 기대하면서요. 그랬더니 다들 너무너무 좋아하더라고요. 은혜는 자기 그림에 둘러싸인 채, 신들린 것처럼 광란의 춤까지 췄고요. 세상에 태어났지만,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했던 사람들. 늘 경계인의 삶을 살 수밖에 없던 존재들. 그들이 그림을 매개로, 제 경계를 확장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어요. “당신들이 날 초대하지 않아? 그럼 내가 당신들을 초대할게. 내가 환영해줄게.” 그렇게 관객을 불러 모으면서 본인 스스로 중앙에 우뚝 서는 이미지를 표현하고 싶었어요.

 

영화에 담기는 모녀 관계가 흥미로워요. 서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답하는 장면 없이, 그저 나란히 있는 모습만으로도 관계의 밀도가 느껴지거든요.

장차현실_ 인터뷰도 찍긴 했을 거예요. 얘기하고, 싸우고, 화해하고, 그러다 술도 한 잔 마시고. 그게 우리 일상이니까.

서동일_ 당연히 있어요. 엄마가 은혜에 관해 말하는 장면도 있고, 폐공장 전시회에 방문했던 정혜신 박사님을 인터뷰하기도 했어요. 그때 박사님이 은혜를 아주 정확하게 설명하셨어요. 참 좋은 멘트여서 고민했는데, 결국 전부 들어냈어요. 물론 그런 내용이 들어가면, 관객들은 좀 더 편안하게 영화를 보겠죠. 의미를 확실히 전달해주니까. 보통 사람들은 친절하게 설명해주기를 바라고, 답을 듣고 싶어 해요.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한 방식을 택하지 않고서도 은혜를 보여줄 수 있다면? 누군가의 평가나 판단과는 무관하게 은혜 자체로 다가간다면, 그거야말로 100% 성공 아닐까?

장차현실_ 잘 선택했다고 봐요. 처음 편집했을 때, 러닝타임이 지금의 두 배였어요. 출연 분량을 따지고 보면, 저랑 은혜가 반반이었죠. 제가 떠드는 장면을 빼고 나니, 훨씬 좋더라고요. 제가 등장하는 순간, 영화가 신파로 흘러가거든요. 자식에게 헌신하는 엄마 한 명 떡하니 있고. (웃음)

 

그래도 영화 보는 내내 ‘어떻게 저 많은 일을 다 할까?’ 싶었어요. 은혜 씨 곁에서 엄마, 동료, 조력자, 매니저, 친구 등 수많은 역할을 소화하시잖아요.

장차현실_ 은혜가 마켓에 나갔던 건, 그냥 벌어진 일 같지는 않아요. 한동안 우리 가족 모두 힘들었어요. 저는 뇌졸중이 오면서 몸이 안 좋아졌고, 만화 연재를 그만둬야 했어요. 생계를 유지해야 하니, 대신 화실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죠. 그때 은혜가 갑자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은혜는 은혜대로 힘든 시기를 통과하는 중이었어요. 컨디션이 나빠졌고, 조현 증세도 보였어요. 그때 제가 정말 엄청나게 울었어요. 은혜도 나름대로 이유를 갖고서 이 세상에 나왔을 텐데. 애가 저 상태로 죽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너무 아팠어요. 그래서 저를 좀 내려놓게 된 것 같아요.

<니얼굴>
<니얼굴>

커리어를요?

장차현실_ 전부요. 작가로서의 성공, 아내나 여자로서의 욕심, 내 행복을 향한 욕구. 다 내려놓고 은혜에게 ‘올인’하자는 마음이었어요. 어떤 날에는 미친 듯이 기도했어요. ‘알았어요. 욕심부리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은혜 좀 제발 가만히 놔두세요. 여기서 더 나쁜 일만 일어나지 않게 해주세요.’ 실은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여전히 기도하는데, 그와 동시에 다른 형태의 노력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죠. 처음에는 은혜가 그림을 만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여겼어요. 그림을 그리면서 점차 건강을 회복했으니까요. 근데 은혜의 사회적 관계를 고민하다 보니, 자연스레 시스템에 눈길이 가더라고요. 발달장애인을 대하는 국가의 태도가 어떤지, 정부가 내놓은 정책과 제도가 과연 합당한지. 지금은 모든 책임을 부모 혹은 가족에게 전가하는 셈이에요. 면사무소에 가서 은혜가 이용할 수 있는 지원 제도를 물어봤어요. 가족과 같이 살기에, 아무것도 받을 수 없대요. 주소를 옮겨서 혼자 사는 사람이 되면, 한 달에 4만 원을 주고요. 세상에, 말이 안 되잖아요. 젊을 때는 이런 걸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어요. ‘내 자식은 내가 알아서 할 거야’ 생각했고, 한편으로는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말하기가 너무 비참했어요. “저는 이혼하고 혼자 살아요. 우리 애는 장애인이에요.” 그렇게 힘들다고 말해봤자, 누구 하나 나서서 도와주지도 않고요.

 

근데 변화가 생겼군요.

장차현실_ 저도 나이를 먹잖아요. 몸에 아픈 곳도 생기고. 내가 언제까지 은혜를 돌볼 수 있을까? 그 질문을 던지고 나니, 상황이 참혹하더라고요. 그때부터 장애부모 운동을 시작했어요. 양평에서 부모 연대를 만들고, 발달장애인이 데이케어를 이용할 수 있도록 공간을 꾸린 지는 5년 정도 됐어요. 돈 버는 사업이 아니라, 돈 쓰는 사업이에요. 국가 지원을 통해, 장애인 문화예술 활동을 꾸준히 진행 중이에요. 예술적 재능을 지닌 이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요. 부모가 희생하지 않아도, 작품 활동을 지속할 수 있어야 하잖아요. 각종 지원 사업과 공모를 준비할 때, 서 감독이 큰 도움을 줬죠. 그런 일에 워낙 해박한 데다, 서류 작업도 잘하거든요.

서동일_ 우리는 이제 이혼할 수가 없어요. (웃음)

장차현실_ 이혼을 왜 해. 그럼 돈 주고 사람 써야 하는데. (웃음)

 

딸을 돌보고, 정은혜 작가를 ‘보조’하고,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목소리를 내도록 돕는 일.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충돌하는 부분이 있으리라 봤어요. 작가님 역시 그림을 그리며 소통해온 창작자잖아요. 누군가를 뒷받침하는 역할이 버거울 때는 없나요?

서동일_ 이 사람, 무지 버거워해요.

장차현실_ 근데 은혜의 그 참혹한 모습을 보면, 다른 욕심을 낼 수가 없어요. 애가 어릴 때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고 했죠. 은혜도 잘 키우고, 나도 일하면서 인정받고. 시간이 흐르면서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내가 성공한다고 해도, 은혜가 망가져 있으면? 그게 무슨 성공이고 행복이겠어요. 은혜에게 힘든 일이 연거푸 발생할 때, 저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가 괴로워했어요. 가장 마음에 걸렸던 게 둘째 은백이에요. 부모야 어떻게 견딘다 쳐도, 아이에게는 트라우마가 될 텐데 걱정이 컸죠. 그래서 은혜의 삶에 가능성이라는 빛 한 줄기가 딱 보였을 때, 그냥 매달릴 수밖에 없었어요. 우리 가족이 살려면, 은혜가 살아야 하는구나. 은혜에게 달려 있구나. 자연스레 제 개인적 욕망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나죠. 그래서인지 요즘 팍 늙었어요. 내 일을 안 하니까, 자꾸 늙는 것 같아요. 며칠 전에 누가 왜 이렇게 얼굴이 달라졌냐면서 놀라더라고요. 집에 와서도 속상해서 남편을 괴롭혔어요. 근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래요. 나를 있는 그대로 두지 않고, 계속 외부에 맞추거든요. 부모 연대에서는 회장을 맡았는데, 사실 저는 학교에서 반장도 해본 적 없는 사람이에요. 사람들을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스트레스 받는 거죠. 은혜의 미래와 연결되는 일이기에, 활동 자체는 열심히 하지만요. 뭐, 은혜의 보조 정도는 기뻐요. 은혜가 훌륭한 작품을 보여주고, 심지어 돈도 갖다주잖아요. (웃음) 근데 공무원과 만난다거나, 투쟁 현장에 간다거나 할 때는 딱 내 옷을 입은 기분은 아니거든요. 조금씩 내려놓을 생각이에요. 일단 젊은 엄마를 키워서 회장 자리를 물려줘야 해요. 제 올해 목표! (웃음) 그다음엔 발달장애 예술가들과 새로운 일을 벌이고 싶어요.

서동일 ©이영진

작가로서 바라보는 은혜 씨는 어떤가요. 기존 관계를 떠나서 작가 대 작가로 인식한 순간이 있다면요.

장차현실_ 매순간 그래요. 은혜와 비교하면, 저는 하층의 예술가인 것 같아요. 그동안 생각으로 그림을 그렸어요. 머리를 굴려서 그림을 내놓는 거예요. 반면, 은혜는 온몸으로 그려요. 이성과 직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죠. 딱 보면 알아요. 저는 입시 출신이잖아요. 절대 안 틀려요. 은혜는 다 틀려요. 틀려야 그림이 되는 사람이니까요.

 

전혀 다른 영역이네요.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서동일 감독님은 관계의 변화를 어떻게 느끼셨나요. <작은여자 큰여자 그 사이에 낀 남자>를 만들 때와 비교하면, 새로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 있었을 듯해요.

서동일_ 그 영화는 가족 내 갈등이 치열하던 시기에 찍었어요. 가사 노동, 육아, 교육, 거기에 우리 부부의 나이 차이에서 불거진 콤플렉스까지 온갖 문제가 뒤얽혀서 정신없었죠. 촬영도 만만치 않았지만, 편집이 특히 힘들었어요. 싸우는 걸 계속 다시 봐야 하잖아요.

 

기억을 미화할 틈이 없겠네요.

서동일_ 그렇게 애쓰며 만들었더니 틀지 말라 하고. (웃음) 그때 결심했어요. 우리 가족의 삶에 두 번 다시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겠다. 그러고 나서 밖으로 나갔죠.

 

결국에는 돌아오셨어요.

서동일_ 그렇게 됐네요. 이번 촬영은 좀 다르긴 해요. 은혜의 삶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카메라를 들었고, 평소보다 심적 부담이 적었어요. 은혜가 이렇게까지 잘 해내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죠. 한 명에서 시작해 결국 2천 명을 그려냈잖아요. 자신이 번 돈으로 개인전을 열고, 동료 작가들과 같이 전시회도 개최했어요. 그렇게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보람을 느꼈어요. 한편, 처음부터 영화에 큰 기대를 걸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두물머리>나 <명령불복종 교사>를 기대했죠. 워낙 치열하게 만들다 보니, 좀 더 반응이 있기를 바랐어요. 근데 어렵더라고요. 세월호에 메르스에, 그렇게 때마다 힘든 상황이 벌어졌어요. ‘블랙리스트’에 오르면서는 극장도 잘 안 잡히고. <니얼굴>은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어느 때보다 기대하게 만드는 분위기네요. 노희경 작가님이 큰 선물을 주셨죠. 드라마에서 대놓고 장애인에 관해 말하잖아요. 독립영화에서나 나올법한 대사를 날리면서요. 가장 놀라운 변화는 사람들의 시선이에요. 은혜의 외모, 말투, 목소리. 예전에는 그걸 이유로 은혜를 굉장히 이상하고 낯설게 봤단 말이에요. 근데 지금은 재밌고 귀엽다고 해요. 목소리가 좋아서 밤에 틀어놓고 잔다는 분도 봤어요. 은혜는 똑같은데, 사람들 마음이 이렇게 바뀌는구나. 문화예술의 마법 같은 힘이 작용한 것 같아요.

<작은 여자 큰 여자 그 사이에 낀 남자-에피소드2>
<두물머리>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만날 기회가 아주 드물다는 사실을 실감하기도 했어요. 알면 좋아하는데, 몰라서 두려워했구나 싶거든요.

장차현실_ 마음의 스펙트럼은 넓어요. <우리들의 블루스>와 <니얼굴>은 그 마음에서 아주 착한 부분을 끄집어내는 것 같아요. 리버마켓에 은혜를 만나러 왔던 수천 명은 은혜에게 마음을 열었어요. 은혜가 이상하거나 무서워서 온 게 아니라, 은혜에게 그림을 의뢰하려고 찾아온 거예요. 저는 그런 힘을 믿어요. 우리가 망하지 않고 살아가는 이유, 우리가 극한까지 치닫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긍정의 힘을 눈앞에서 본 것 같아요. 최근 힘든 소식이 연달아 들려 왔잖아요. 모쪼록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여러 사람이 밝은 마음을 쭉 이어 나가면 좋겠어요. 어제 국회 앞 농성장에 갔다가 분향소에 들렀어요. 그곳에서 발달장애인 당사자의 발언을 들으면서 정말 감동했어요. 제 입에서 갑자기 이런 말이 나오더라고요. “여러분, 열심히 살아요. 열심히 살아서 부모들이 당신들 포기하지 않게 합시다.” 말하고 나니, 눈물이 막 쏟아졌어요.

 

발달장애인 자녀와 그들 부모가 생을 포기하는 안타까운 사건이 잇따랐죠. 영화 역시 은혜 씨의 일상을 담는 과정에서 장애인의 자립을 가로막는 사회 시스템의 문제를 간접적으로 드러내요.

장차현실_ 성인이 된 후, 은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복지관 청소뿐이었어요. 그마저도 요령 피우지 않고, 너무 성실하게 했어요. 대걸레질을 하도 해서 손바닥에 쇳물이 들었을 정도예요. 2년 지나고 나니, 복지관에서 1년 더 일하게 해주겠대요. 은혜한테 하겠느냐고 물어봤어요. 그때 은혜가 “나 그냥 그림만 그리면 안 돼?” 하더라고요. 곧장 알겠다고 했어요. 이후 잠실창작스튜디오 입주작가에 도전했어요. 기왕 시작한 거 제대로 하자는 생각이었어요. 장애인 작가를 대상으로 하는 사업인데, 전국에서 12명 뽑아요.

 

은혜 작가님은 영화 어떻게 보셨어요? 마음에 드세요?

정은혜_ 네.

 

어떤 점이 좋았나요?

정은혜_ 다요.

서동일_ 근데 영화만 보면 자? 가족끼리 상영회를 여러 번 했거든요. 영화 틀면, 금세 잠들어요.

장차현실_ 아빠가 다큐멘터리 감독이니까 시사회라든지 상영회에 참석할 일이 종종 생겨요. 은혜한테 같이 갈 거냐고 물어보면, 안 간대요. 다큐멘터리는 재미없다고. (웃음)

©이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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