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로이드 다이어리
<애프터 양>
손시내 / Choice / 2022-06-02

<애프터 양>을 관람하는 건 중고 장터에서 구입한 오래된 카메라를 열어보는 경험과 비슷하다. 이 우연한 조우를 카메라의 편에서 설명해보면 아마도 이럴 것이다. 현상되지 않은 필름 혹은 낡은 메모리 카드가 들어있는 무심한 광학 장치는 여러 소유자를 거치고 무수한 여행을 하며 인간 삶의 편린을 담는다. 사진이나 영상엔 셔터를 누른 이들의 시선이 반영돼있지만, 동시에 인간이 미처 알지 못하고 통제하지 못한 수많은 요소 또한 들어있다. 기계는 그렇게 제 안에 누군가의 시간을 간직한 채로 세상을 떠돌다 또 다른 이를 만난다. 새 주인은 그 만남을 통해 자신이 결코 알지 못했던 타인의 기억을 마주한다. 이 매혹적 마주침은 종종 파운드 푸티지 형식의 영화가 되어 우리를 찾아오기도 한다. 그뿐인가. 순간을 포착하고 새기기 위해 셔터를 눌렀을 인간이 그 시절을 까맣게 잊거나 세상을 떠난 뒤에도, 어떤 시간은 카메라가 찍었기 때문에 세상에 오래도록 잔존한다. 이와 같은 아이디어를 바탕에 깔아두는 <애프터 양>은 로맨틱하고도 가슴 저미는 SF 드라마다.

영화의 배경은 기후 재앙 이후의 근미래, 인간의 외양을 한 테크노 사피엔스와 유전자 복제를 통해 태어난 클론이 보편화된 세상이다. 제이크(콜린 패럴)와 키라(조디 터너 스미스) 부부의 집에도 안드로이드 인간 양(저스틴 H.민)이 거주하고 있다. 중국계 입양아인 딸 미카(말레아 엠마 찬드로위자야)에게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알려주기 위해 부부가 일찌감치 구입한 것이다. 소유관계로 맺어졌으나 이들은 가족을 이뤄 살고 있다. 양은 회사 일로 바쁜 엄마와 자기만의 시간에 몰두하는 아빠를 대신해 미카를 돌보고, 미카는 양을 오빠라 부르며 따른다. 부부에게도 양은 아들이나 다름없다. 이들은 한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고, ‘월간 댄스 경연’에 4인 가족으로 참여한다. 그러다 갑자기 양이 작동을 멈춘다. 제이크는 본사와 지하 수리업체를 돌아다녀 보지만 양을 되살릴 방법을 찾는 건 요원하다. 게다가 이웃의 소개로 찾아간 수리업자는 거대 기업이 안드로이드에 스파이웨어를 심어놨다는 음모론을 설파한다. 키라는 차라리 잘된 일일 수 있다며 이제부터 미카에게 더 열심히 부모 역할을 하자고 말하지만, 제이크는 포기하고 싶지 않다.

<애프터 양>
<애프터 양>

제이크가 양의 몸에 숨겨진 메모리 뱅크를 알게 되면서, <애프터 양>은 느슨한 탐정 영화의 모양새를 띤다. 수리업자가 스파이웨어로 지목했던 작은 부품은 안드로이드가 보고 듣는 매일의 몇 초를 자동으로 저장하는 기록 장치. 옛 모델인 양에게는 남아있으나, 사생활 보호 문제로 이후 접근이 금지된 기기다. 테크노 사피엔스를 연구하는 박물관의 도움으로 특수 리더기를 얻은 제이크는 양의 기록을 들여다본다. 거기엔 미카의 눈부신 성장, 부부의 행복한 모습, 가족의 즐거운 시간이 담겨있는 한편, 제이크가 알지 못하는 낯선 이의 얼굴과 목소리 또한 들어있다. “혹시 이 사람을 아시나요? 제 아들이 알고 지내던 친구입니다.” 양의 이야기를 알고 싶은 제이크는 몇 초짜리 기록을 단서로 그의 흔적을 더듬어나간다. 그런 제이크 앞에 양의 친구인 에이다(헤일리 루 리차드슨)가 나타난다. 하지만 둘의 대화로도 짐작하기 어려운 시간이 양에게 있다. 제이크는 리퍼 제품인 양의 메모리 뱅크에 담긴 길고 긴 세월의 조각에 차츰 다가서며, 또 다른 얼굴과 목소리를,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양의 시선을 마주한다.

양은 ‘중고 장터의 카메라’를 떠올리게 하는 존재다.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줄곧 우리를 지켜봐 준 광학 기계. 양의 메모리 뱅크에 무작위로 자동 저장된 기록들은 비의지의 산물이자, 인간을 닮은 시선이 깃든 이미지의 다발이다. 이것을 양의 기억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여기엔 어여쁜 얼굴뿐 아니라 벽에 비치는 햇살과 울창하고 푸른 나무 같은 것들도 포함돼있다. 그저 흔한 홈비디오를 떠올리게 하는 형식이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을 먹먹하게 울린다. 영화가 그리는 양은 인간을 좋아하고 궁금해하며, 프로그래밍이 된 정보와 상식이 아닌 실제 기억을 갖고 싶어 했던 안드로이드다. 그는 종종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골똘히 바라보고, 인간과 대화하다 생각에 빠져 말문을 잃기도 하는, 정체성에 관해 고민하고 인간처럼 행동하는 테크노 사피엔스다. 하지만 영화는 “혹시 양은 인간이 되고 싶어 했나요?”라는 제이크의 질문에는 에이다의 입을 빌려 단호히 선을 긋는다. 양이 무엇을 진정으로 원했는지는 영화에서 명료히 제시되지 않는다. 양과 에이다의 관계도, 다른 안드로이드와 구별되는 양의 결함이나 개성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알 수 없다. 양은 인간이 되고 싶었던 안드로이드가 아니라, 고유한 비밀과 미스터리를 품은 미지의 타자다.

<애프터 양>
<애프터 양>

<애프터 양>은 『신세계의 아이들』에 실린 알렉산더 와인스타인의 단편 「양과의 작별」을 원작으로 삼는다. 입양한 딸을 위해 구입한 안드로이드 양이 어느 날 작동을 멈춘다는 뼈대는 동일하지만, 감독은 자유롭고 독창적인 각색을 통해 원작의 여러 부분을 변형하고 새로운 설정을 부여했다. 가족 구성원의 인종, 구체적 세계관, 후반부 가족의 결정 등은 영화와 원작이 차이를 보이는 지점이다. 한편, 주인공 가족이 양의 새로운 모습을 알아가고 양에 대해 숙고하면서, 세계의 무한한 가능성을 잠시 체감하고 상실의 감정에 잠긴다는 점은 영화와 원작이 세부를 뛰어넘어 가장 크게 공명하는 부분이다. 기본적으로 SF의 외피를 두른 만큼, <애프터 양>은 인간 생활과 기술 발전 사이의 어두운 구석, 인간과 기계의 공통점과 차이점 등 굵직한 주제에 관한 언급을 포함한다. 하지만 정색하고 다루기보다, 영화 곳곳에 부드럽게 흩뜨려두는 쪽이다.

<애프터 양>은 애플TV 시리즈 <파친코>의 공동 연출자로 널리 이름을 알린 한국계 미국인 코고나다의 두 번째 장편 영화다. 코고나다는 일찍이 오즈 야스지로, 로베르 브레송, 웨스 앤더슨, 리차드 링클레이터 등 유수의 감독들에 관한 비디오 에세이로 주목받았던 비디오 아티스트이기도 하다. 오즈 야스지로의 공간성에 대한 깊은 동경을 바탕으로 완성된 그의 첫 장편 <콜럼버스>(2017)에 이어, <애프터 양>에서도 인물이 거주하는 영화적 공간을 주의 깊게 구성했다. 창문과 문, 거울 등의 소품을 이용하고, 카메라를 정면으로 마주하거나 등지는 인물의 배치와 동선을 통해 화면 속 공간의 입체감을 표현하는 코고나다의 방식은 영화를 하나의 직방체 모양으로 느끼게 한다. 양의 메모리 뱅크를 시각적으로 구현한 장면은 기억이 거하는 우주와도 같은 공간을 보여준다. 여기에 사카모토 류이치가 작곡한 테마 선율, 그것을 바탕으로 변주된 물 먹은 듯 먹먹한 스코어, 가수 미츠키 버전으로 재탄생한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이와이 슌지, 2001)의 삽입곡 ‘글라이더’가 깊이를 더해 생의 공간을 완성한다.

 

애프터 양 AFTER YANG 감독 코고나다 출연 콜린 패럴, 조디 터너 스미스, 저스틴 H.민, 말레아 엠마 찬드로위자야 수입 왓챠 배급 영화특별시SMC, 왓챠 제작연도 2021년 상영시간 96분 등급 전체 관람가 개봉 2022년 6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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