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동의 비명
<봉명주공> 김기성
글 손시내 사진 이영진 / Interview / 2022-05-21

아파트. “각 가구가 하나의 건축물 안에서 각각 독립된 주거생활을 할 수 있는 구조로 된 공동주택”을 일컫는 단어다. 한편, 포털사이트에 ‘아파트’를 검색하면 온갖 부동산 이슈와 시세를 분석한 게시글을 무더기로 마주하게 된다. 한쪽에는 따로 또 함께하는 삶의 양식이 있고, 또 한쪽에는 오직 돈으로만 환원되는 세속적 가치가 있다. 부동산 정책과 집값을 둘러싼 비판과 별개로, 이제 아파트에서 ‘공동’의 의미를 찾는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봉명주공>엔 한때 하나의 마을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끈끈한 공동체를 이뤄 살았던 어느 주공아파트의 마지막 1년이 담겨 있다. 5층, 2층, 단층 짜리 주택들이 모여 있는 단지 곳곳에서 여전히 싱그러운 나무가 쑥쑥 자라고, 집 앞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하나에도 수십 년의 추억이 서려 있는 곳. 1980년대에 지어져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질 일만 남은 청주시 흥덕구 봉명동의 이 주공아파트에 운명처럼 발을 들여놓은 이는 청주에서 나고 자란 김기성 감독이다. 그는 “주공아파트에 대해 흔히 아는 것과 전혀 다른 풍경”을 조심스레 탐사하며 카메라를 들었고, 아파트 철거와 함께 쓰러져버린 나무를 다시 세우고 싶은 마음으로 영화의 구조를 지었다. 그가 사람과 식물, 그리고 아파트의 삶을 관찰하려 내민 돋보기에 한번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독일 쾰른 미디어예술대학에서 공부하고 고향 청주로 돌아와 미술작업을 시작했다고. 언제 귀국했나.

졸업하고 2년 뒤니까, 2015년 정도다.

 

처음부터 고향으로 갈 생각이었나.

유학 다녀오면 마치 코스처럼 서울에 있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많이들 거치곤 하는데, 내게는 그것 또한 경쟁처럼 느껴졌다. 독일에서도 경쟁하며 살았는데 그걸 또 해야 하나 싶더라. 타지 생활을 오래 했으니 나고 자란 곳으로 가고 싶었다.

 

돌아와서 본 청주는 어땠나. 어떤 변화를 느꼈는지.

지방 도시 대부분이 비슷할 텐데, 구도심 상권이 비활성화되고 외곽에 높은 아파트들이 생겨났다. 어렸을 때는 가로등도 없는 시골에 살았다. 그런 곳에도 조금씩 공장과 창고가 들어서고, 전원주택이 생기면서 동네가 변했다. 내가 살던 곳의 변화 역시 도시 변화 과정의 하나라고 느꼈다.

<봉명주공>
<봉명주공>

어린 시절의 동네 이야기도 궁금하다.

시골에 살면서도 시골이 무서웠다. 가로등이 없어 밤이 되면 깜깜했고, 갑자기 야생동물이 튀어나오기도 했으니까. 잠 못 드는 새벽이면 마루에 나갔다. 거기서 고속도로가 보였는데, 도로를 지나는 차를 보면서 위안을 얻었던 기억이 난다. 나만 깨어있는 게 아니구나, 지금도 계속 이동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하는 마음이었다. (웃음)

 

<봉명주공>이 첫 영화지만, 그간 영상 작업을 꾸준히 해 온 거로 안다.

의뢰를 받아 미술관, 박물관에서 작가들을 인터뷰하는 영상 작업을 해왔다. 미술을 전공했기 때문에 작가들의 언어나 작업의 프로세스에 대한 기본적 이해가 있어서 비교적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작고 작가전’이라는 프로젝트에 영상으로 참여하게 됐고, 고인 주변 분들을 인터뷰하거나 과거 자료를 조명하는 등 작업의 다큐멘터리적인 요소를 통해 조금씩 영화에 관심을 두게 됐다. 한편으론 지역의 사라져가는 것들을 기록했다. 옛 국정원 건물이 철거되는 과정을 푸티지처럼 담거나, 청주 연초 제조공장의 동부 창고가 문화시설로 바뀌는 과정을 1년 가까이 찍는 등의 작업이었다.

 

봉명주공 터는 지금도 지나다니며 자주 보나.

예전에도 건물이 낮아서 밖에서는 확인을 잘 못 했다. 지금 역시 골목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터가 보이진 않는다. 대신 크레인이 올라가 있어서 밖에서도 공사 중이라는 걸 알 수 있지.

 

<봉명주공> 제작에는 프로듀서이자 촬영을 담당한 왕민철 감독의 역할이 컸다고.

왕민철 감독님과는 독일에서 같은 학교에 다녔고, 같이 집을 빌려 몇 년 동안 함께 지내기도 했다. 이후 왕 감독님이 <동물, 원>(2018) 촬영으로 청주에 오가게 되면서 종종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봉명주공’은 왕 감독님이 그렇게 청주에 오가는 길에 발견한 장소다. 우연히 길을 잃었다가 신기한 동네를 찾았다고 하시더라. 곧 재개발된다고 하니 기록하면 좋을 것 같다고 하셨다. 그렇게 이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봉명주공>
<봉명주공>

인간이 건설한 공간의 변화와 쇠락, 그 안에 거주하는 다양한 개체들에 관심을 두고 작업했다는 데에 <봉명주공>과 <동물, 원>의 접점이 있어 보인다.

<봉명주공>을 만들면서 내가 관심을 둔 독특한 건축적 요소, 조경, 식물 등을 떠올려보면 왕 감독님과 공통점이 꽤 있었던 것 같다. 감독님이 <동물, 원> 연출하시면서 전달하려고 했던 메시지를 나 역시 익히 알고 있었고, 서로 공감대가 잘 맞았다고 생각한다. 이번 작업을 하며 어떤 것을 강조하고, 이야기를 어떻게 이끌어 가면 좋을지에 관해 대화를 많이 나눴다. 나로서는 영화적 표현 방식이나 문법을 배운다는 마음으로 임했다. (웃음)

 

촬영의 경우 두 사람이 함께 맡았는데, 어떤 논의를 거쳤는지 궁금하다. 계절의 질감을 풍부하게 담았고 대체로 밝게 찍었다. 섣불리 슬픔이나 향수를 자아내는 촬영은 아니다. 대상과 거리를 두려는 태도도 느껴지고.

아무래도 왕 감독님은 서울에 계시다 보니, 계절의 변화로 인한 봉명주공의 다양한 풍경은 주로 내가 촬영했다. 주민분들을 만나고 섭외하는 것 역시 내가 진행했고. 주민분들은 초반에 경계를 좀 하셨다. 카메라 없이 다가가면 말씀을 잘해주시다가도 카메라 들고 다가가면 휙 지나가시곤 하시더라. (웃음) 그 간격을 좁혀나가는 과정이 있었고, 어느 정도는 계속 그분들 언저리에서 촬영하게 됐다. 그게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했다. 어떻게 하면 더 적극적으로, 더 깊게 들어갈 수 있을지 고민스러웠다. 그런데 결국은 그렇게 거리가 유지돼서 더 좋은 점도 있었다. 감나무 아저씨와 대화할 땐 카메라는 멀리 세워두고 내가 마이크만 들고 들어갔는데, 그랬기 때문에 아저씨의 좀 더 자연스러운 말씀과 행동을 담을 수 있었다. 영화에 사진하시는 분들, 식물 관련 활동하시는 분들이 들어오시면서, 왕 감독님이 내가 그 안에 직접 들어가 보면 어떻겠냐고 하셨다. 감독님이 촬영하시고 내가 그룹 내에 들어가서 직접 질문하며 따라가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봉명주공의 모습 자체가 무척 인상적이다. 건축물의 구조도 그렇고, 주민들이 공동체를 형성해 삶을 꾸려온 역사도 흥미롭다.

봉명주공은 청주의 1세대 아파트다. 주공아파트의 역사를 공부해보니, 그게 원래는 70년대쯤 서울에서 유행하던 건축 형태라고 하더라. 이후 서울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고, 아파트 문화가 별로 없던 청주에는 봉명주공이 지어졌다. 그런데 막상 분양이 잘 안됐던 것 같다. 그래서 초기엔 공무원들을 위한 임대아파트로 사용됐고, 이후엔 막 자녀를 낳은 신혼부부들이 들어가서 살게 됐다고. 내가 봉명주공을 방문했을 땐 그렇게 쌓인 삶의 흔적을 가득 마주할 수 있었다. 전원적이었다고 할까. 시골 마을의 한 동네 같은 느낌이었다. 주민분들께서 과거에 야유회를 함께 가고 김장도 같이했다는 얘기를 많이 들려주셨다. 공동체를 이뤄 살아오신 거다. 그런데 그게 처음부터 의도된 건 아니다. 서울에서 유행이 조금 지난 건축 형태가 청주에 들어오게 됐고, 지역 주민들이 그 안에서 30년 넘게 삶을 꾸려온 거니까. 어쩌면 우연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 모습 자체가 지금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여겼다. 지금의 아파트 문화는 너무나 천편일률적이잖나. 풍경도 거의 비슷하고, 아파트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비슷하니 말이다.

 

단층 아파트가 있다는 게 생소하고 신기하더라. 주민들이 각자 알고 있는 설을 알려주시는 게 재밌다. 국내 다른 지역에서도 발견되는 양식인가?

일단 주민분들이 공통으로 들려주신 말씀은 그게 프랑스에서 설계한 집이라는 거였다. 한국의 자재들로 만든 조립식 건물이고, 원래는 프랑스 어느 지역으로 수출하려던 거라고. 그런데 수출이 안 되어 국내에 세 군데 정도 그런 단지가 조성됐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봉명동에만 남았다는 얘기다. 정확한 사실은 아니다. 심지어 프랑스 사람이 와서 지어줬다는 말도 있다. 그런 게 흥미로웠다. 정확한 사실보다는 그런 식으로 구전되는 이야기를 영화에 담고 싶었다. 7살 때 단양에 1년 정도 살았는데, 그때 거주했던 곳이 봉명주공 형태의 빌라촌이었다. 시멘트 회사의 사택이었고, 또래 아이들끼리 동네를 누비며 놀러 다녔다. (웃음) 그때 기억이 많이 떠올랐다.

김기성 ⓒ이영진

봉명주공은 지역에서도 잘 알려진 곳이 아니라고 하던데, 작업을 시작하면서 주변 어른들에게 물어본 적은 없나.

안타깝게도 내 주변에는 그곳에 관해 알고 계신 분이 없었다. 촬영하면서 관련된 기사나 자료를 찾으려 여러 방면으로 노력했다. 시와 도에 문의하고, LH 한국토지주택공사에도 자료가 남아있는지 물어봤는데, 아직 디지털 작업이 안 된 채로 테이프가 가득 쌓여있다는 걸 알게 됐다. 분류도 되어있지 않은 상태였다. 내가 찾아서 변환하는 것도 행정상 어려웠다. 결국 주민분들의 사진을 직접 받기로 했고, 영화에 등장하는 분들의 사진을 모아 영화에 쓰게 됐다.

 

영화에 등장하는 여러 그룹 중, 식물을 채집하고 나무에 관해 토론하는 이들이 있다. 지역에서 라이프 가드닝을 하는 ‘모두의 정원’ 활동가들이라고. 어떻게 만난 분들인가.

멤버들 대부분이 청주에서 작가, 문화기획자들과 함께 협동조합을 만들어 활동하는 분들이다. 단지 안의 다양한 식물과 나무에 관해 여쭤보고 싶어 함께 봉명주공을 방문하게 됐다. 나무에 관해 설명하시는 분은 소셜 가드닝을 하는 홍덕은 씨인데, 그분 역시 아파트 단지에 그런 풍경이 조성돼있다는 걸 신기해하셨다. 그분들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봉명주공의 식물 중 일부를 다른 곳에 옮기는 작업을 하게 됐고, 그게 영화에도 담겼다.

 

그러한 활동을 떼놓더라도, <봉명주공>은 식물에 관한 영화로 보인다. 인간이 다양한 이유로 삶의 터전을 떠나고, 동물 역시 이동해도, 한 곳에 뿌리 내린 식물은 결코 스스로 움직일 수 없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이다. 특히 남아있는 나무들이 몽땅 잘려 쓰러지는 장면들은 감정적으로 큰 파장을 남긴다.

1년 동안 봉명주공을 촬영하면서 계절이 변하는 걸 지켜봤다. 전에는 보이지 않던 식물이 계속 새로 눈에 들어오더라. 또 한여름에는 나무가 그늘이 돼줬고, 시간이 지날수록 단지 안에 애정을 갖게 되는 식물이 많이 생겨났다. 결국 그 나무들이 잘리게 될 거라는 게 참 씁쓸했다. 상상이 잘 안됐다. 이렇게 울창하게 잘 자라있는데, 쓰러지면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내 감정은 도대체 어떨까.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그날은 계속 다가왔다. 결국 어느 자리에서 나무가 쓰러지는 걸 찍어야 할지 고민하기도 했는데, 실제로는 아주 정신없는 현장이었다. 카메라를 들고 계속 뛰어다녀야 했다. 몸이 녹초가 되는 건 물론이고, 심적으로도 되게 힘들었다. 사람이 너무 잔인하더라. 다행히 지금 사회에서는 동물권 논의가 점차 활발하게 되고 있지만, 말 없는 식물에 대해서는 여전히 아무렇게나 대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 부당함을 많이 느끼는 현장이었다.

 

아파트를 철거할 때 나무뿌리를 대강 죽을 정도로만 훼손한다는 이야기가 충격적이더라.

과거에는 동네에서 나무 하나 베는 것도 굉장히 조심하지 않았나.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 있었다. 현대사회에서는 그런 게 많이 없어진 것 같다. 그걸 결국 기후변화나 환경 이슈로 다 돌려받는 게 아닌가 싶다.

<봉명주공>
<봉명주공>

후반부 나무 베는 장면들은 어떻게 배치하려고 했나. 지금보다 더 드라마틱한 구성이었다면, 무언가 더 강하게 주장하는 영화가 됐을 수도 있다.

그게 영화의 엔딩이 될 거란 건 촬영하는 내내 예상하고 있었다. 실제로 촬영을 마치고 스토리를 구상하며 편집할 때는 그 장면이 지금보다 더 볼륨감이 있었다. 그런데 가편집 된 버전을 쭉 보고 있으니, 앞부분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묻히는 느낌이더라. 볼륨을 계속 줄여나가며 지금에 이르렀다. 오프닝에 버드나무 쓰러지는 장면이 워낙 임팩트가 있으니, 뒷부분은 조금씩 덜어내며 전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가려고 했다. 결과적으로는 메시지를 더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방향이 됐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도 나무와 관련된 작업을 했더라. 전시 ‘침묵의 서책들’은 질료인 종이의 관점에서 책에 접근하고, 그것을 나무에 대한 생각으로까지 확장하는 프로젝트였다.

헌책방을 기록한 작업이다. 그 작업을 하면서 책과 관련된 소설이나 에세이를 많이 찾아봤는데, 리처드 부스라고 유럽의 유명한 헌책방 마을을 만든 분이 “인간은 나무를 베어서 활용하는 게 문명이라는 믿음으로 살아왔는데, 인생을 마감하면서 보니 나무는 나무로 남는 게 좋다고 생각하게 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색이 바랜 책에서 나무 이미지를 떠올렸다. 색 바랜 책을 전부 뒤집어 꽂아 놓으면 마치 나무처럼 보인다. 책이 나무로 되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할까. 그런 아이디어에서 출발해 구상한 작업이다. 당시 국내 헌책방을 열심히 돌아다녔고, 주인 분들과 인터뷰도 많이 했다. 소재와 공간을 고려해 아날로그 대형 카메라로 촬영했다.

 

사라져가는 것에 관심을 두고 기록하는 작업을 꾸준히 이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렸을 때 시골에서 자랐던 게 많은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동네의 옛 모습이 사라지는 걸 보면서, 사라지는 좋은 것들을 찾고 싶은 생각을 나도 모르게 하지 않았나 싶다. 예술가는 구체적으로 답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좋은 질문을 던질 뿐이지. 그런 고민을 계속하는 중이다. 미술을 할 때도 그랬고, 영화도 마찬가지다.

 

비슷한 작업을 하는 분들이 영화에 등장한다. 사진작가 지은숙, 지명환 님이다. 5년간 봉명주공의 모습을 담았고 전시회도 열었다고.

촬영할 때 주민분들께서 제보를 해주셨다. 어제도 사진 찍어가더니 또 왔네, 하시더라. (웃음) 같은 그룹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여쭤봤더니, 매주 정해진 시간에 와서 사진을 찍어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알려주셨다.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에 그 시간에 가서 촬영을 했다. 봉명주공 외에 구도심 다른 곳에서도 사진 촬영을 한다고 하시더라. 내가 하는 작업과 유사하다고 느껴서 출연을 부탁하게 됐다.

김기성 ⓒ이영진

영화 속엔 다양한 삶의 이야기가 차곡차곡 담기는데, 객관적 정보나 자료를 찾아 맥락을 보충하지 않았다. 주민들이 생각하고 느끼는 공간성에 초점을 맞춘 구성이다.

<봉명주공>은 결국 집에 대한 이야기다. 집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다. 집이라는 건 결국 개인이 각자의 사연과 추억을 쌓으며 자기만의 세상을 만드는 공간이다. 그렇다면 그게 획일화된 모습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또 봉명주공이 가진 공동체적인 문화를 유지하며 살아갈 방법은 무엇일까, 이런 고민을 영화를 통해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줄기를 계속 유지해나가려고 했다.

 

후반부의 이사 장면이 그처럼 집에 관한 고민을 묵직하게 던진다. 이사 가려고 자세히 들여다본 집은 그야말로 삶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소우주다.

30년 넘게 산 곳에서 이사 가는 건 어떤 감정일지 궁금했다. 나라면 화가 났을 수도 있을 텐데, 그걸 또 담담하게 받아들이시더라. 잠시 언급되지만 그전에 10년간 재건축 사업이 지지부진하면서 많은 일이 있었다. 그 시간을 보내며 초연해진 부분도 있을 거다. 이삿날 주민들이 다 나와 보시잖나. 실은 그 전날 이사하시는 분을 찾아가서 일정을 체크하고 어떤 마음인지 여쭤봤다. 잠을 못 잘 것 같다고, 발길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다고 걱정을 많이 하셨다. 그런데 막상 이삿날이 되니까 남아계신 주민분들이 다 오셔서 떠들썩하고 화기애애하게 시간을 보내시더라. 침울한 느낌이겠거니 예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예전에는 집안에 경조사가 있을 때 동네에서 다 함께 떠들썩하게 보내는 공동체 문화가 있었잖나. 그런 느낌이 들었다. 슬픔은 잊고, 섭섭한 마음은 떨쳐버릴 수 있도록, 사려 깊게 배웅한 게 아닌가 싶었다.

 

커다란 버드나무가 쓰러지는 장면을 앞에 두고, 시간을 역순으로 배치했다. 2020년 봄, 2019년 여름으로 거슬러 가다가 다시 아파트가 철거되는 시점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화면에 담기는 사람 수가 점점 늘어나기도 하고, 독특한 변화를 감지하게 되는데, 이런 구성을 취한 이유는 무엇인가.

버드나무가 쓰러지는 건 마을의 상징이 쓰러지는 거라고 생각했다. 마을의 수호신 같은 나무가 쓰러지는 장면을 보면서, 재건축 사업이나 관련 이슈를 중심에 두기보다 미시적 관점에서 영화를 만들어보자고 생각하게 됐다. 첫 장면 이후에는 기억하고 회상하면서 그 나무가 다시 서는 구조를 만들고 싶었다. 봄부터 이듬해 봄까지 촬영했는데, 그렇게 마지막 봄을 맨 앞에 두고 역순으로 구성하게 됐다.

 

봉명주공은 청주의 1세대 아파트이기 때문에 같은 재개발, 재건축 문제도 서울과 다르게 전개되는 것 같다. 주민들이 미분양 세대 문제를 반복해서 얘기하는데, 이런 부분을 더 파고들거나 부각해볼 생각은 없었나.

처음엔 그런 것들도 다 염두에 뒀는데, 자칫하면 내가 컨트롤할 수 없을 만큼 주제가 넓어지겠더라. 수도권과는 다른 지방의 공통적 현상이 있고, 사회적 문제들이 분명히 있지만, 그걸 다 담아내는 건 부담스러웠다. 영화 촬영하는 중간에 변곡점이 있기도 했다. 오창에 큰 사업이 유치되면서 갑자기 투자자들이 몰리고, 집값도 큰 폭으로 오르내렸다. 하지만 봉명주공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봉명주공 안에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싶었다.

<봉명주공>
<봉명주공>

아파트라는 단어의 뜻에 ‘공동 주택 양식’이 명시돼있더라. <봉명주공>을 보고나면 특히나 ‘공동’의 의미를 오래 곱씹게 된다. 하지만 방금 이야기처럼 지금은 사실상 ‘가격’과 떼어놓을 수 없는 단어가 됐다. ‘아파트’에서 어떤 것을 느끼나.

어렸을 때는 물론 아파트에 사는 친구들이 부러웠고, 거기 살아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유학에서 돌아와 아파트에 살게 되니 별 감흥이 없더라. 지금은 다른 선택지가 별로 없어서 아파트에 살지만, 내 집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잠깐 거쳐 가는 주거 공간이라고 생각하게 된다고 할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벗어나고 싶기도 하고. 집은 자기만의 세상을 만들어가는 곳이고, 내가 뿌리 내리고 쉴 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부동산의 관점에서만 집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옮기거나 떠돌게 되는 일이 잦은데, 그것과는 다르게 인식할 수 있게 된다면 좋겠다.

 

유학 시절에 경험한 주거 형태는 어떤 것이었나.

아무래도 독일은 2차 세계대전을 겪고 다 허물어진 곳에 급하게 집을 지었으니, 한국과는 제법 다른 것 같다. 난 돈 없는 유학생 신분으로 다른 국적의 학생들과 집 하나 빌려서 방 한 칸씩 나눠 쓰고 부엌 같은 공간을 공동으로 사용하며 살았다. 한국인 유학생들과는 함께 김치도 담가 먹었다. 왕민철 감독님이 요리를 매우 잘했다. (웃음)

 

서울시립대학교에서 환경조각을 공부했고, 독일에서는 미디어아트를 공부했다. 각각 어떤 이유로 진로를 선택했는지.

본래 미술을 하고 싶어 했고, 예고에 들어가서 조각 작업을 했다. 환경조각은 당시 만들어진 ‘1퍼센트 법’과 관련 있는 전공이다. 건물을 지으면 그중 1퍼센트는 조형이나 미술에 써야 한다는 법이었다. 학교에서는 건물을 설계하고 그 건물과 어울리는 조형물을 만드는 공부를 했다. 그런데 재료와 기자재를 다루는 데 신체적인 무리가 따랐다. 또 굳이 내 아이디어를 돌이나 철 같은 재료들로 표현할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개념미술에 관심이 커져서 독일 유학을 결정하고, 미디어아트를 선택하게 됐다.

 

또 어떤 작업을 하고 싶나.

일단 <봉명주공>을 작업하면서 감독으로서 책임감을 갖게 됐다. 다음 작업을 진행할 때 생태나 환경을 계속 주제로 삼아 작업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첫 작업은 다큐멘터리였지만, 어렸을 때부터 시나리오 쓰는 걸 좋아했다. 기회가 되면 다큐멘터리와 다른 방향으로 풀 수 있는 이야기를 구상해서 극영화를 해보고 싶다.

김기성 ⓒ이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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