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어진 날에 빛나던 별
<아치의 노래, 정태춘> 정태춘·고영재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Interview / 2022-05-18

정태춘이 <시인의 마을>(1978)로 데뷔했을 때, 고영재는 아홉 살이었다. “형은 나한테 문화였죠. 특별히 의식했다기보다는 공기처럼 받아들였어요. 지금처럼 즐길 거리가 다양한 시대가 아니었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대중가요를 듣고 자란 세대거든요.” 그로부터 30여 년이 흐른 후, 가수와 팬은 처음으로 악수를 나눴다. 공연장이 아니라, 뒤풀이 자리였다. 정태춘은 고향 평택 대추리로 돌아가서 미군기지 반대투쟁에 참여했고, 고영재는 한국독립영화협회 사무총장으로 재임하며 한미FTA 저지 활동에 부지런히 힘을 싣던 때였다.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여럿 모인 식당에서 술잔을 기울이다가, 헤어지기 전에 전화번호를 주고받았다. 고영재가 “선배님”이라고 부르자, 정태춘은 “선배는 무슨 얼어 죽을. 그냥 형이라고 해.”라고 응했다. 그렇게 호형호제한 세월이 어느덧 십수 년째. 정태춘의 데뷔 40주년이 임박했을 무렵, 둘의 관계엔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오래전부터 정태춘을 영화로 담고 싶어 했던 고영재는 <아치의 노래, 정태춘>을 통해, 첫 연출에 나섰다. 한동안 창작 활동을 중단했던 정태춘은 카메라 앞에서 다시 한번 이야기를 털어놓기로 했다. <아치의 노래, 정태춘>은 사회와의 끈을 줄기차게 붙잡아 온 정태춘의 지난 시간을 향한 존경이자, 멈추고 접어버린 시간 속에서도 어디론가 끊임없이 나아가는 이에게 보내는 감사 인사다. 우정과 신뢰로 나란히 선 두 사람의 어깨를 마주했다.

 

 

감독님은 정태춘 선생님의 오랜 팬인 것으로 압니다. 햇수로 치면 20년 가까이 알고 지낸 사이인데, 두 분이 연이 닿은 시점은 언제인가요.

고영재_ 2006년에 한 뒤풀이 자리에서 처음 뵀어요. 연락처 주고받은 다음, 내가 제작·배급하는 영화 시사회에 형을 초대하기 시작했어요. 첫 번째가 <우리 학교>(김명준, 2006)였고, <워낭소리>(이충렬, 2008)도 보셨을 거예요. 근데 정작 형이 좋아했던 영화는 <똥파리>(양익준, 2008)였어요. 내가 만든 영화는 아니지만, 훌륭한 작품이니까 와서 봐주시면 좋겠다고 했거든요. 영화를 마음에 들어 하셔서 그날 뒤풀이도 같이 갔어요.

정태춘_ 그때가 제일 인상적이었지.

고영재_ 다른 영화는 다 별로라고 했는데, <똥파리>에만 꽂히셨다니까.

 

뭐가 그렇게 좋으셨어요?

정태춘_ 거침없는 면이 좋았어요. 주춤하지 않고 마구 질러대는 거.

고영재_ 그다음에는 형이 김규항 선배와 ‘비상구 프로젝트’라고 콘서트와 전시를 했던 기억도 나요. 언젠가 새해에 형이 붓글을 써서 연하장처럼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내주기도 했고요.

정태춘_ 아니, 그런 것까지 얘기하면 대체 인터뷰를 언제 해?

고영재_ 괜찮아. 지금 몸 푸는 시간이야. (웃음) 그러다 형이 <블랙딜>(이조훈, 2014) 나레이션도 맡으셨고요.

 

영화로 꾸준히 인연을 쌓으셨던 셈이네요.

정태춘_ 영화 인연이라기보다는 영재 씨하고 쭉 관계가 이어진 거죠. 그 과정에서 영화인들과 이따금 만났고요. 깊은 이야기까지 나누지는 못해도, 영화 쪽에 안면을 트고 지내는 사람은 꽤 많아요. 오히려 대중음악 쪽에는 교분을 가진 사람이 별로 없어요. 주로 개인 작업을 했으니까요. 미술이나 문학 쪽 사람들과는 친하죠. 문화운동 진영에서 활동하며 오랫동안, 또 여러 차례 진하게 만났어요.

<아치의 노래, 정태춘>
<아치의 노래, 정태춘>

<아치의 노래, 정태춘>은 정태춘·박은옥의 데뷔 40주년 기념 프로젝트(이하 40프로젝트)와는 ‘따로 또 같이’ 이루어진 작업으로 보입니다. 기념사업추진위원회와는 어떤 이야기를 나누셨나요.

정태춘_ 40프로젝트는 콘서트, 앨범, 출판, 전시, 학술대회 등을 포함하는 방대한 계획이었어요. 영화 또한 처음에는 프로젝트 사업 중 일부라고 여겼고요. 근데 영재 씨가 분리를 원했어요. 영화 제작은 별도 예산과 기획을 마련해서 진행해야 하는 일 같다고. 어쨌거나 시작할 때부터 계속 함께했어요. 프로젝트 스케치 촬영, 아카이브 정리, 콘서트 팔로잉까지 일정이 쭉 이어졌으니까요. 코로나19 때문에 공연이 예상보다 이르게 마무리됐고, 영재 씨는 그때부터 편집과 후속 인터뷰를 병행했어요. 덕분에 40프로젝트에서 시작해 앞뒤를 아우르는 하나의 물건이 나온 거죠.

고영재_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잖아요. 40프로젝트와는 별개로 진행해야 할 일이라고 판단했어요. 눈치를 봤을 때, 40프로젝트 차원에서 영화 예산을 책정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고요. 근데 제작이 성사된 핵심 요인은 형의 마음이에요. 형 마음의 변화요. 자기를 마음껏 쓰라고 하셨거든요. 네가 그렇게 나를 원한다면, 하고 싶은 대로 해봐라. 모든 일이 마무리되면, 난 다시 조용히 살겠다. 영화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40프로젝트 자체가 그렇게 진행됐어요. 옆에 이렇게 애써주는 사람들이 있으니, 모른 척할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겠다. 그렇게 마음을 바꾸고 밖으로 나오셨죠.

정태춘_ 나는 활동을 대략 정리했고, 이제 남은 시간 동안 조용히 소진되어 가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난 시장에서 완전히 나온 사람이죠. 퇴출당했거나, 내가 거부했거나. 뭐, 퇴출당한 면이 더 크겠지만요. (웃음) 아무튼 시장 밖에 있는 사람으로서 ‘마케팅이 필요한 프로젝트를 받아들일 것인가?’ 고민했어요. 근데 그때는 우리에게 애정을 가진 사람들이 여럿 달라붙어서 큰일을 벌였던 상황이거든요. 내가 손 놓을 수는 없잖아요. 그들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고, 나를 내놓기로 했어요. 그럼 영화도 찍어야지, 방송 출연도 해야지. 뭐 그렇게 된 거죠.

 

감독님은 ‘정태춘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는 바람을 오래전부터 언급하셨어요. 왜 그토록 정태춘을 영화로 담고 싶으셨나요.

고영재_ 형이 사회 변화에 관해 지속적으로 말씀하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나 역시 <아, 대한민국…>에 충격을 받았지만, 실은 그 이후에 발표한 노래들을 더 좋아해요. 나이를 어느 정도 먹은 후에도 계속해서 사회를 탐구하고, 본인을 성찰하시잖아요. 이런 분의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꽤 오랫동안 형을 찍고 싶다고 말했어요. 아마 형은 기억도 못 하실 거예요. 마음이 동하지 않았을 때니까요. 그러다 프로젝트 준비가 시작됐고, 기획사 대표님과 미팅을 했어요. “고영재 씨 외에도 여러 사람을 만날 예정이다.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라.” 하시더라고요. 얼마 후에 다시 연락이 왔어요. “영화계 인사를 쭉 만나봤는데, 다들 고영재 씨를 추천하더라. 아무래도 다큐멘터리다 보니, 당신이 결합하는 것이 좋겠다.”

 

본래 연출을 다른 이에게 맡기려다가 정태춘 선생님의 말씀에 직접 나섰다고요.

고영재_ 애초 연출할 마음이 없었어요. 당시 나도 심경에 변화가 생겨서 주변을 좀 정리하고, 극영화 시나리오를 준비하는 중이었어요. 물론 이 작품은 형 영화니까 기쁜 마음으로 시작했죠. 근데 내 능력이 모자란 탓이겠지만, 감독 선임이 자꾸 어그러지는 거예요. 그 와중에 느낌은 딱 와요. ‘이건 찍어야 해!’ (웃음) 강헌 선생과의 인터뷰, 공연 연습 등 중요한 소스를 그때 촬영했어요. 친한 촬영감독에게 도와 달라고 부탁했죠. 엄밀히 따지면, 그때까지는 연출이 아니었어요. 형은 “내가 돈벌이가 안 되니, 감독이 안 붙을 거야” 썰렁한 농담 하시고, 나는 나대로 골치 아프고. 어느 날, 형이 불쑥 말씀하시더라고요. “뭘 멀리서 찾아. 그냥 네가 해.” 그렇게 내가 연출까지 맡게 된 거예요. 기획사 대표님은 속으로 실망하셨을 거야. 유명 감독이 붙어야 하는데, 결국 온 사람이 나라서. (웃음)

 

2018년부터 준비하셨으니, 제작 기간이 꽤 길어요. 연출자로서 가장 고민스럽고 힘들었던 점은 뭐였나요.

고영재_ 힘들다기보다는 부담스러웠어요. 개인적으로 영화를 만드는 과정 자체는 좋았어요. 행복했고,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했죠. 다만, 영화는 연출자의 시각으로 구성되잖아요. 형과는 해석이 다를 수 있고, 형이 좋아하는 것만 몽땅 담을 수도 없어요. 내 딴에는 꾸준히 공부하며 고민했지만, 형은 ‘그 맥락으로 만든 노래가 아닌데, 왜 저기에 썼지?’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거죠. 사실 살아계신 분을 다큐멘터리 주인공으로 삼는다는 건, 부담을 감당할 수밖에 없는 작업이에요. 태춘 형이 아니라, 다른 아티스트를 다뤘더라도 비슷한 어려움이 있었을 거라고 봐요. 그 사람의 현재성을 간과할 수 없고, 한편으로는 가족과 팬 등 주변 사람들의 의견도 각자 다를 테니까요. 부담이 컸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어쩔 수 없는 부분임을 인정했어요. 연출이 결정해야만 하는 영역이 있고, 그에 대한 비판은 달게 받아야죠.

<아치의 노래, 정태춘>
<아치의 노래, 정태춘>

선생님 역시 부담스럽지 않으셨을까 해요. 상경의 순간부터 시작해서 40년 음악 여정을 한 영화에 갈무리하겠다는 기획이 반갑기도, 걱정스럽기도 했을 텐데요.

정태춘_ 부담스럽지는 않았어요. 아카이브를 토대로 만든 영화잖아요. 사람마다 자료를 선별하는 데 차이는 있겠지만, 누가 다루든 자료 자체는 그대로죠. 감독이 중심을 잘 잡았다고 생각해요.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가지도 않고, ‘이 사람이 뭘 고민하느냐. 거기엔 어떤 의미가 있느냐.’ 따져 물으면서 아주 진지하게 접근하지도 않았어요. 그 중간 지대에서 적절하게 이야기를 풀어갔어요.

 

정태춘에 관해 잘 모르는 10~20대 관객은 깜짝 놀라지 않을까요. ‘한 사람이 저 많은 일을 했나’ 싶거든요. (웃음)

정태춘_ 우리 때는 격동기잖아요. 전쟁 이후에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을 빠르게 거쳤어요. 최종적으로는 자본이 인간을 장악하는, 그런 구조적 변화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이루어진 시기였어요. 나뿐만 아니라, 내 세대의 삶이 그래요.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사회와의 수많은 갈등이 보여요.

 

영화 보고 나선 어떠셨나요. 그저 짐작이지만,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는 일을 그리 좋아하시진 않을 것 같은데요.

정태춘_ 나이 먹고서 젊은 시절의 치기 어린 모습을 보는 건, 사실 좀 불편하죠. 딱히 멋있지도 않잖아요. 그래서 나는 빼자, 빼자, 했어요. 10대 가수상을 받는 장면이라든지 뭐 그런 거요. 정 필요하면 자막으로 넣을 일이지, 굳이 영상까지 들어가야 하냐고. 근데 다들 그 장면이 좋다는데, 어떻게 해요. 내가 뭐라고 할 수 없는 영역이죠.

 

<아, 대한민국…> <92년 장마, 종로에서> 등을 발표하며 가요 사전심의 철폐 운동을 전개했던 1990년대의 경우, 다시 마주하기가 고단하지는 않으셨나요.

정태춘_ 힘들지는 않았어요. 그냥 자료니까. 영화가 끝나서 그런지, 더 확연히 느껴요. 나는 그 시간을 이미 지나온 사람이에요. 내게 <아치의 노래, 정태춘>은 내 노래의 일대기를 훑는 영화에요. 그러면서 한 시기 또는 어떤 고비를 마무리하는 것이고, 나 또한 그때를 객관적으로 지켜볼 수 있는 상황에 접어들었어요.

정태춘 ⓒ이영진

인터뷰이 선정 과정에서도 두 분이 여러 차례 의논하셨던 것 같아요. 평론가나 뮤지션뿐만 아니라, 선생님의 오랜 친구들이 출연하잖아요.

정태춘_ 나한테 많이 문의했어요. 얘기해줄 사람이 누구인지, 그들과 내 활동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줄 수 있는 자료를 줬고, 내 생각도 전달했어요. 이들과 인터뷰하면, 아마 어떤 이야기가 나올 것이다. 그 정도요.

고영재_ 형은 좀 의아하셨을 거예요. 60여 명을 말씀해주셨는데, 그중 아주 유명한 분들은 제외했거든요. 내레이션은 없지만, 정태춘의 1인칭 나레이션처럼 흘러가는 영화라고 생각했어요. 이영미 평론가의 경우, 형에 대한 평가보다는 객관적 사실을 말하는 데 중심을 뒀고요. 유명한 사람이 형을 다각도로 평가해주는 것도 좋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형이 주인공이길 바랐거든요. 말하고 보니, 형이 서운하셨으려나 싶기도 하네요.

정태춘_ 그렇진 않아. 방금 말한 것처럼 이영미 평론가를 포함해서 여러 인터뷰이가 등장하지만, “정태춘은 이런 의미를 지닌 사람이다”라는 식의 평가는 거의 안 들어갔죠. 그건 한 인물을 다루는 과정에서 감독이 내린 선택이자, 중요한 기준이라고 생각해요.

 

스스로 말하는, 여전히 할 말이 많은 듯한 느낌이 좋았어요. 살아있는 이를 전설로 만들면서 박제하는 게 아니라요.

정태춘_ 외부에는 이런 말 안 하려고 하는데, 사실 <아치의 노래, 정태춘>도 박제이긴 하죠. (웃음) ‘이렇게 한 사람이 박제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소소한 삶이 남아 있다.’ 난 그런 생각을 해요.

 

영화 자체가 하나의 콘서트 같아요. 정태춘·박은옥의 노래 28곡에 ‘광주천’을 더해 총 29곡을 들려줍니다. 어떤 노래를 어느 위치에 놓을지 고민하는 시간이 길었을 듯해요.

고영재_ 40년을 다루겠다고 결심하며, 영화의 시간 축은 일찌감치 정해진 셈이었어요. 노래만큼 정태춘을 정확히 설명할 무기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당연히 노래를 많이 쓸 예정이었고요. 말한 대로 문제는 ‘어떤 노래를 언제 들려줄 것인가’ 였죠.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노래가 들어가야 했어요. 인터뷰의 맥락과 시대 흐름을 고려하며, 노래와 함께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데 신경을 썼어요. 지난한 과정이었죠. 순전히 내 의도라기보다는 우연이 작용한 순간도 많았고요. 어쨌거나 형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없지는 않을 거예요. 그래도 믿음은 있었어요. “감독이 그렇게 했다는데, 내가 뭘 어떡하겠어?” 할 성격이거든요. 맞죠? (웃음)

정태춘_ 내가 의견을 내거나 고집을 부려야 할 부분은 따로 있고, 전반적으로는 감독 의도대로 흘러가는 거죠. 곡 선정이나 배치는 참 좋다고 생각해요.

고영재_ 내러티브, 캐릭터, 음악적 역량, 역사적 사실… 다양한 변수를 고려하는 과정이었어요. 처음부터 전부 계획했던 것이 아니라, 부딪히면서 ‘이것도 해야겠다, 저것도 해야겠다’ 했어요. 그걸 미리 알고 준비했으면, 난 천재겠죠. (웃음) 아마 1년 후에 작업한다면, 노래 구성에 변화가 생길지도 몰라요. 그사이에 새로운 인터뷰가 쌓이고, 또 다른 자료를 찾는다면요.

 

공연 실황을 공들여 촬영했고, 한편으로는 연출적 기교를 최대한 절제하려 애쓰신 듯해요. ‘들 가운데서’ ‘사람들 2019’ 등 영화에서 노래가 울려 퍼질 때, 화면에 노랫말을 그대로 옮겨 놓잖아요. “그 외딴집 굴뚝 위로 흰 연기 오르니” 하면, 정말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풍경을 보여주는 식이죠. 사실 노래를 만들고 부른 입장에서는 조금 민망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어요.

정태춘_ 민망하기보다는 아쉽죠. 내가 봤던 근사한 풍경이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욕심까지 채우기엔 어려웠던 것 같아요. 가사와 풍경을 대비하는 건, 사실 좀 위험한 방식이에요. 영화적으로 둘을 연결하는 면에서는 아주 만족했다고는 할 수 없어요.

고영재_ 나도 아쉬워요. 가장 스트레스를 받았던 장면이에요. 마지막까지 재촬영을 거듭했고, 별별 생각을 다 했어요. 재연할까, CG로 뭔가를 만들어볼까. 예를 들어 가사에서 정태춘이 연을 날리며 뜀박질한다고 하면, 내가 연을 들고 뛰어보기도 했어요. 근데 그게 붙을 리가 없잖아요. 지금의 정태춘이 연을 날리는 것도 아니고, 유년 시절에 간직했던 어떤 정서에서 기인하는 가사일 텐데. 들판도 엄청나게 찾아다녔지만, 어딜 가도 그 느낌이 안 나오더라고요. 싱크를 딱 맞추고 싶지는 않았고, 대부분 가사가 나오기 전에 영상을 툭 던져놓는 식으로 구성했어요. 아예 가사와 무관한 영상도 넣어봤는데, 더 이상해져서 어쩔 수 없었죠. 개봉을 앞둔 지금도 아쉬워요. 다만, 감수할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뮤직비디오 전문 감독도 아니고, 이전까지는 콘서트를 찍어본 경험도 전무하거든요. 결국 현실적으로 판단하며, 나에게 영감을 주는 요소에 집중했어요.

<아치의 노래, 정태춘>
<아치의 노래, 정태춘>

제목에 관해서도 여쭤보고 싶어요. ‘아치의 노래’는 정태춘·박은옥 10집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2002)에 수록된 곡입니다. 아치는 “때때로 양아치라고 불리우기도 하는” 새이자, 선생님 본인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지요. 발표한 지 20년이 지난 노래인데, 이 곡이 정태춘을 가장 잘 드러낸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뭐였나요.

고영재_ 정태춘의 절망이 영화의 중간 지점, 즉 피크라고 봤어요. 한 아티스트가 지독하게 절망하고, 끝내 창작을 접는다. 저로서는 그 이야기를 당연히 넣을 수밖에 없었어요. 어디에 배치해서 어떻게 영화적 호흡으로 끌고 갈 것인가. 그 문제가 남아 있을 뿐이었죠. 리스크를 감수해야 했어요. 일단 ‘아치의 노래’가 대중적으로 알려진 곡이 아닌 데다, 영상 자료도 마땅치 않았거든요. 근데 당시 은옥 누나가 찍은 형의 사진을 보니, 느낌이 왔어요. 특히 형이 거실에 쭈그리고 앉아서 신문 보는 사진이요. 꼭 영상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그런 사진들과 형이 직접 쓴 붓글이면 충분하겠다 싶더라고요. 그렇게 중간에 클라이맥스를 만들고, 다음으로 넘어가면…

정태춘_ 또 깨지고. (웃음)

고영재_ 네, 넘어가서 또 깨지고. (웃음) 이후에는 정태춘의 현재를 조명하는 흐름이죠. 본래 ‘그의 노래는’이라는 가제로 출발했어요. 이것도 형 노래예요. 애초 형에게 드린 기획서에는 ‘그의 노래는, 나의 노래는’이라고 썼으니, 형도 그렇게만 알고 계셨을 거예요. 어느 날, 형이 “근데 언제까지 가제로 부를 거냐?” 하시더라고요. 조심스럽게 ‘아치의 노래’를 말씀드렸어요. 그때 형이 특유의 표정을 내비치셨죠. ‘백 퍼센트 만족하지는 않지만, 무슨 맥락인지는 알겠어.’ 말하는 듯한 표정이요. (웃음) 정태춘이라는 이름을 제목에 넣은 건 형의 아이디어였어요. ‘아치의 노래’라고 하면, 주인공이 누군지도 모를 거라면서요.

정태춘_ 앞에서도 감독이 중심을 잘 잡았다고 말했는데, 타이틀도 마찬가지였어요. 이를테면 제목을 ‘시인의 마을’이나 ‘떠나가는 배’로 정할 수도 있어요. 많이 알려진 노래이고, 그 자체가 정태춘을 포괄하는 이미지잖아요. 그럼 과거지향적이지만, 나를 서정적인 창작자로 그려내는 영화가 되겠죠. 아니면 우리 콘서트 제목이기도 한 ‘날자, 오리배’라든지 ‘정동진 3’을 가져와서 최근 내 관심사 위주로 이야기를 풀어갈 수도 있고요. 근데 영재 씨는 굳이 중간을 짚더라고요. 아주 힘들고 고립됐던 시기에 만든, 자기 연민의 독백 같은 그 노래를 골라낸 안목이… 대단하지. (웃음)

고영재_ 대신 엔딩에서는 반팔 티셔츠 입고 열창하시잖아요! (웃음) 형이 노래하는 모습으로 영화를 마무리하고 싶었고, 형이 계속 노래하길 바랐어요. 진짜 꿈을 이뤘죠. 뭐 영화 때문에 이루어진 건 아닌데, 최근에 형이 다시 노래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 저에게는 힘이 돼요.

 

선생님이 각별히 아끼는 노래도 영화에 들어갔나요.

정태춘_ 각별히 아끼는 노래가 있느냐. 그걸 골라내기는 어려울 것 같고요. 들려드릴 만한 노래는 다 들어갔어요. 100여 곡 중에 28곡이면 꽤 많은 숫자잖아요. 몇몇 곡은 좀 아쉽기도 하지만, 전체를 보면 무난하게 선곡이 됐죠.

 

“들려드릴 만하다”는 것은 어떤 기준인가요?

정태춘_ 정태춘 하면, 사람들이 떠올릴 만한 곡들이라는 뜻이에요. 영화 전반부든 후반부든, 그 기준으로 보면 잘 골랐어요.

 

광주 전일빌딩에 올라가서 옛 도청을 바라보며, ‘광주천’을 부르는 장면도 인상적이에요. 감독님이 노래를 불러달라고 요청하신 건가요?

고영재_ 전혀 아녜요. 형에게 제안했던 건 따로 있어요. 광주 공연이 있는데, 우리가 먼저 내려가면 좋겠다. 그때 전일빌딩과 망월동 묘역에 들르자. 딱 거기까지였는데, 갑자기 노래를 부르시더라고요. 하모니카 연주도 사전에 얘기됐던 게 아니에요. 나도, 촬영 팀도 당황했어요. 근데 또 그게 형의 본래 모습이거든요. 망월동 묘역에 방문했을 때, 학생들이 한 무리 보였어요. 교사가 여기가 어떤 의미를 지닌 곳인지, 안치된 분들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 설명하더라고요. 형이 그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가 하모니카를 딱 꺼내시더니, ‘봉숭아’를 연주하셨어요. 형 나름대로 뭔가를 느꼈던 거겠죠.

정태춘_ 망월동 묘역이 신묘역과 구묘역으로 나뉘어요. 실은 ‘5.18’을 구묘역에서 처음 불렀어요. 당시 시내에서는 제1회 광주비엔날레가 열렸고, 거기에 반대하는 쪽에서는 별도로 다양한 행사를 진행했어요. 그때 나한테 초청이 와서 ‘그럼 노래를 하나 만들어야겠다’ 했어요. 이전까지는 광주 노래를 만든 적이 없었거든요. 제1회 광주비엔날레 대상작이 쿠바 작가의 <잊어버리기 위하여>라는 작품이었어요. 제목을 듣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죠. ‘잊지 않기 위하여’ 노래를 만들겠다고 마음먹고, ‘5.18’을 완성했어요. 그걸 구묘역에서 행사했을 때, 들고 간 거예요.

고영재_ 이 얘기는 나도 처음 듣네요.

정태춘_ 영화에 ‘일어나라, 열사여’도 일부 나오는데, 그 곡은 이철규 열사의 조가(弔歌)로 만든 노래예요. 그건 광주 시내에서 행진하며 불렀어요. 근데 이철규 열사가 구묘역에 있어요. 여러모로 난 신묘역보다는 구묘역에 연고를 강하게 둔 셈이죠. 한편, 전일빌딩에 갈 때는 처음엔 별 느낌이 없었어요. 당시 공사 중이라 건물을 봉쇄한 상태였어요. 기관총 탄환이 발견되면서 아예 출입을 금지했더라고요. 근데 책임자가 우리에게 선뜻 문을 열어줬어요. 덕분에 옥상까지 올라갔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옛 도청을 바라볼 수 있었죠. 그때 내 안에서 자연스레 ‘광주천’이 흘러나왔어요. 작위적이지 않으면서도 우리 영화의 정체성과 정서에 맞닿는 장면이 담긴 것 같아요.

고영재 ⓒ이영진

광주 콘서트에서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를 부르기 전, 한 관객이 “난 노래 들으러 왔지, 당신 이념을 들으러 온 게 아니에요!” 외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갑니다. 이 장면이 오래 생각나더라고요. 그는 왜 그렇게나 화가 났는지, 무엇보다 선생님이 어떤 마음으로 노래를 부르셨을지 궁금했어요.

정태춘_ 사실 그건 영화에 너무나 딱 맞게 들어온 비연출의 장면인데. (웃음) 그런 일이 이따금 생겨요. 그냥 중간에 나가버리는 사람도 있고, 환불을 요구하기도 해요. 내 입장에서는 좀 놀라기는 했어도, 아주 황당한 상황은 아니었죠. 그런가 하면 수습하기가 어려울 때도 있어요. 일전에 ‘얘기노래마당’을 다시 열었을 때인데요, 80년대에 했던 것처럼 소규모 공연이었어요. 2부로 나눠서 박은옥 씨와 따로따로 했어요. 우리가 곡 레퍼토리로 갈등이 좀 있어서. (웃음) 노래든 얘기든 각자 하고 싶은 걸 해보자 했죠. 그러다 하루는 객석에서 충돌이 일어났어요.

 

관객끼리요?

정태춘_ 네, 어떤 관객이 불쑥 “나는 당신 노래를 들으러 왔는데, 무슨 얘기를 그렇게 많이 해요?” 하는 거예요. 황당했죠. ‘얘기노래마당’이잖아요. 우리는 노래만큼이나 얘기를 하고 싶어서 그 자리를 열었고요. 그때 다른 분이 “난 노래와 얘기, 둘 다 들으러 왔어요. 무슨 생각하는지 궁금한데, 얘기도 좀 들읍시다.” 했어요. 순식간에 객석에 긴장이 감도는데,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라고요. 그대로 굳어버렸죠. 박은옥 씨가 적당히 수습해서 넘어가기는 했는데, 결국 그 이후로 ‘얘기노래마당’은 더 지속되지 않고 끝났어요. 이번에 전국 순회공연을 준비하면서는 어느 정도 마음을 먹었어요. 나의 변화한 생각들, 조금이나마 발전한 생각들을 다시 한번 공유해보자고. 그러니까 영화에 나온 장면만 놓고 말하면, 내 딴에는 감당하기가 아주 힘든 상황은 아니었어요. 덕분에 객석에선 집중력이 높아졌죠. 내 노래도 더 비장하게 만들어줬고요. (웃음) 한편으로는 정태춘이라는 캐릭터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대중의 시각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장면이기도 해요. 일부에서는 찬사를 보내기도 하지만, 거부감을 내비치는 사람도 많잖아요. 사회 문제를 노래하고 발언하는 자들을 향한 응원과 불편함, 그러한 갈등 구조가 보이는 장면이죠.

 

감독님은 현장에서 어떻게 지켜보셨어요?

고영재_ 영화적 순간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전까지는 객석을 거의 안 찍었어요. 방송에서 워낙 객석을 자주 비추잖아요. 난 그게 싫더라고요. 대신 관객이 앵콜을 요청하거나, 무대와 객석 사이에 감정이 켜켜이 쌓였을 때는 조금씩 찍었어요. 근데 그날은 처음부터 객석을 찍기로 했어요. 그래도 광주 공연인데, ‘5.18’을 듣는 광주 시민들의 반응은 어떤지 기록해두자는 마음이었어요. 촬영 팀을 따로 배치해서 관객만 찍으라고 했는데, 신기했죠. 안 그랬으면, 영화에 절대 못 담았을 장면이니까요.

정태춘_ 멘트도 참 탁월했어요. 그분한테 실례가 안 되기를 바라는데, 아주 압축적인 멘트잖아요. 이념과 노래를 딱 분리하면서, 반감을 드러내죠.

 

한편, ‘포크의 전설’, ‘민중가수’, ‘싱어송라이터’ 등의 수식에만 익숙했던 입장에서 <아치의 노래, 정태춘>은 충격이기도 했어요. 록, 오케스트라, 국악, 힙합 등을 자유자재로 넘나드시잖아요. 장르에 경계가 없다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한 듯해요. 특히 ‘정동진3’을 열창하는 엔딩은 짜릿하기까지 하고요.

고영재_ 형은 모르셨겠지만, 나는 엔딩을 형 얼굴로 가득 채우고 싶었어요. 원래 클로즈업 샷으로 촬영한 장면이 아닌데, 색보정 기사님한테 계속 확대해달라고 했어요. 그럼 4K로 찍었어도 화질에 문제가 생기거든요. 기사님이 “진짜요? 여기서 더요?” 걱정스럽게 묻더라고요. “제가 다 책임질 테니, 할 수 있는 데까지 해주세요” 그랬죠. (웃음) 그래야 인상이 강렬하게 남을 듯했어요. 정태춘은 여전히 말하고 있다, 그걸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정태춘의 과거사를 듣고 나가는 느낌이 아니라, 정태춘의 미래가 궁금해지는 느낌. 게다가 “열차가 들어오니 모두 바다로 내려가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노랫말과 화면이 묘하게 어울리면서 재밌기도 해요.

정태춘_ 음, 뉘앙스가 그렇게 연결될 수도 있겠구나. ‘영화는 끝났으니, 이제 밖으로 나가주세요.’

<아치의 노래, 정태춘>
<아치의 노래, 정태춘>

“미래가 궁금해지는 느낌” 덕분에, 영화에서 젊은 세대와의 접점을 만들어내는 흐름이 어색하지 않아요. 고등학교 근현대사 수업에서 정태춘의 노래를 처음 들었다는 이수경 청소년인권활동가, ‘5.18’이라는 노래에 맞춰 경기를 준비한 유나미 수영선수와의 만남은 어떻게 이뤄졌나요.

정태춘_ 이수경 씨는 당시 고등학생이었어요. 내 노래를 무척 좋아하는 선생님이 계시는데, 퇴임식 때 기억에 남을 선물을 드리고 싶다면서요. 그때 연락이 어디로 온 거였어?

고영재_ 페이스북. 정새난슬 씨가 받았지. 형 페이스북을 딸인 난슬 씨가 관리하거든요.

정태춘_ 그래서 내가 붓글을 써서 보내드렸어요. 학생들이 이렇게나 따르고 아끼는 걸 보면, 분명 좋은 선생님이겠지 싶어서요. 아마 그때 수경 씨가 다큐멘터리를 찍는다는 이야기도 잠깐 했고요. 그러다가 영화 팀에서 한번 만나보면 좋겠다고 말이 나왔어요. 유나미 씨 역시 이전에는 만난 적이 없어요. 본인이 수영대회에 출전하는데, 내 노래를 쓰고 싶다며 연락이 왔죠. ‘5.18’을 말하기에 나도 좀 의외라고 생각했어요. 당시에도 그랬지만, 지나고 보니 그냥 자연스러워요. 이 모든 만남이 영화를 찍는 중에 이루어진 일이라, 영화로 쑥 들어왔어요. 그분들이 인터뷰도 워낙 잘해줬고요.

고영재_ 맞아요, 인터뷰가 별로였으면 안 썼을 거예요. 수경 씨를 만났는데, 아주 당돌했어요. 나쁜 뜻이 아니라, 에너지가 좋았어요. 통통 튀는 매력이 있었죠.

정태춘_ 자기 의견을 거침없이 얘기하니까.

고영재_ 유나미 선수도 처음에는 의심했어요. 정태춘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데, 그냥 어쩌다 한번 만나게 된 거면 영화에 안 쓰려고 했어요. 근데 인터뷰해보니, 본인만의 이유와 과정이 있더라고요. 정태춘의 노래를 계속 들어온 사람은 아니지만, ‘5.18’에 영감을 얻어서 뭔가를 표현해보고 싶은 것도 맞고요. 유나미 선수가 연기도 하거든요. 노래를 들으며, 예술적 자극도 많이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김미현 씨 또한 출연자 중 빼놓을 수 없는 분이에요.

고영재_ 김미현 씨 친구인 고창영 씨에게 연락이 왔어요. 얼마 전에 원주 공연을 봤는데, 루게릭병을 앓는 친구가 생각났다고요. 원주에서 앵콜 곡을 준비할 때, 어떤 여성분이 갑자기 무대로 달려왔어요. 자기가 살날이 얼마 안 남았는데, 오늘 ‘애고 도솔천아’를 꼭 듣고 싶다면서요. 형은 부산하게 곡을 준비하고, 누나는 객석에 상황을 설명했죠. 고창영 씨가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김미현 씨를 떠올린 거예요. 미현 씨가 루게릭병에 걸린 다음부터 두 분의 노래를 자주 듣는다고 하더라고요. 계속 생각이 난대요. 당시 다음 공연을 춘천에서 열 예정이었어요. 원주하고 춘천은 그나마 가까우니, 춘천 공연에 초대하자 싶었죠. 일단 박채은 피디에게 이분들을 만나서 사연을 들어보자고 했어요. 정말 정태춘과 박은옥의 노래를 좋아하는지, 아니면 그저 립서비스로 하는 말인지 알아야 하니까요. 만약 후자라면, 찍지 않을 생각이었어요. 근데 진심이었죠. 영화 완성한 것도 무척 기뻐했어요.

정태춘_ 개봉 전에 그분을 위해 특별 상영회를 했어요.

고영재_ 상영회도 했고, 영화 편집과는 무관하게 김미현 씨가 나온 분량만 따로 2~30분 정도 추려서 영상을 보내드렸어요. 그걸 보면서 아주 환하게 웃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울었다고 하면 마음이 좀 그랬을 텐데, 기뻐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나도 너무 좋았어요.

정태춘_ 영재 씨랑 박채은 피디가 애를 썼어요. 그분 댁까지 찾아가기도 하고, 여러모로 관심을 쏟았기에 촬영이 가능했다고 봐요. 덕분에 관객에게 큰 부담을 주지 않는 선에서 좋은 장면이 영화에 들어왔고요.

<아치의 노래, 정태춘>
<아치의 노래, 정태춘>

영화를 보고 나니, 선생님은 들판과 바다를 왕래하는 분이구나 싶어요. 너른 곳을 품고, 꿈꾸고, 쏘다니는 사람이요. 자연스레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을 수밖에 없겠구나 했어요. 최근에 작업을 재개하셨다고요. “정태춘이 70대에 만든 창작곡을 듣고 싶다”고 말했던 감독님께도 무척 기쁜 소식이겠어요.

고영재_ 평소에도 계속 얘기했으니까요. 저랑 박채은 피디는 틈날 때마다 “다시 하시면 안 돼요?” 했어요. 그때는 형 귀에 안 들렸을 거야.

정태춘_ 안 들렸어. 아예 기억이 안 나는데?

고영재_ 이런 분이십니다. (웃음)

정태춘_ 곡을 다시 쓰게 된 일에 관해서는 따로 얘기해야 해요. 내 현재 상황은 물론이고, 그간의 사정도 배경으로 설명이 좀 되어야 하거든요. 워낙 긴 이야기라, 가능하면 충실하게 기사화가 됐으면 했어요. 어쩌 보니 기사가 먼저 나와버렸는데. 아무튼 영화에 집중해서 말하면, <아치의 노래, 정태춘>은 나에게 변곡점이랄까요. 일단락 같은 의미가 있어요. 한편으로는 나를 보여주는 영화가 완성되면서, 약간 어수선한 분위기에 놓이기도 했죠. 나는 이미 정리했다고 말했던 사람이잖아요. 나머지 삶, 사적인 삶에 집중하고 싶다고요. 그러다 다시 이렇게 시장에 등장해버린, 좀 이상한 상황이잖아요. 그래도 크게 흔들리지는 않아요. 소소한 이야기를 하겠다, 노래로 내 이야기를 해야겠다. 그리고 정말 좋은 노래를 만들고 싶다. 이렇게밖에는 설명을 못 하겠는데, 그런 욕심들 속에서 계기와 자극이 주어지면서 그냥 휙 하고 기타를 잡게 됐어요.

 

두 분은 세상과의 연결감을 중요하게 여기시는 듯해요. 그걸 어디에서 찾고, 또 어떻게 유지하세요?

정태춘_ 이건 또 처음 받아보는 질문인데. 딱히 찾으려 하지 않아도, 나는 늘 세상하고 연결돼 있어요. 나를 계속 불편하게 하니, 의식할 수밖에 없죠. 기본적으로는 문명의 윤리성에 동의하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내 삶 역시 그러한 비윤리와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어요. 갈등 속에서 내가 어디까지 얘기해야 하는지 많이 고민합니다. 예전처럼 분노를 담아서 폭발적으로 말할 것이냐?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 커졌고, 이제 격한 노래를 부르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다는 생각도 들어요. 다만, 세상과 끝까지 불화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소소한 말로 풀어내려 해요. 그렇게 곡을 쓸 때, 재미와 성취감도 더 느끼고요. 그러네요. 세상과 나는 떼고 싶어도 뗄 수 없는 관계에요. 털어내고 싶지만, 방법이 없잖아요. 혼자 무인도로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지만 마음에 안 드는 것들을 얘기하려 해요. 문명이나 윤리처럼 거대한 이야기만이 아니라, 일상에서 우리가 만나는 수많은 모순과 고통에 관해서요. 동시에 음악 스타일과 화법을 조금 바꿔서 경쾌하게 가자. 지나치게 진지하지 말자. 마음에서 이런 변화가 일어나는 중이에요.

 

감독님은요?

고영재_ 애초 이성적으로, 어떤 철학을 가지고서 사회와 관계 맺기를 시도했던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어요. 그냥 본성이었죠. 예컨대 빈민 활동에 참여했을 때, 내 동기는 측은지심이 아니었어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누군가가 불쌍해서 지나칠 수 없다는 마음이 아니라, ‘성실한 사람들이 왜 이렇게 살아야 하지? 대체 왜 이렇게까지 고통받아야 하지?’ 하는 의문이 강했어요. 그게 저한테는 핵심이었다고 봐요. 남들보다 착해서도 아니었고, 건방지게 노동계급이 어쩌고 하며 떠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요. 다만,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던 거예요. 요즘 들어 더 깨닫게 돼요. 내 밑바탕을 이루는 마음이 뭐였는지. 어떻게 보면 나르시시즘도 있죠. 사회 참여하면서 뭔가 돋보이고 싶은 마음도 진짜 있었구나 싶어요.

정태춘_ 그렇게 말하면 안 돼. 그건 나르시시즘이 아니라, 자기 안의 분노를 해소하는 거지. 미안해, 내가 말 끊어서. (웃음) 근데 어떤 상황을 목격했을 때,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건 분노를 해소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이를테면 서울역에서 노동자들 합동 제사할 때, 노래하러 갔어요. 내 마음엔 죽은 이에 대한 연민도 있지만, 그보다 ‘왜 이렇게 됐지?’라는 분노가 크단 말이죠. 주변에서는 내게 분노를 감춰야 한다고 말해요. 착한 사람들은 오히려 분노하지 않아요. 그들은 “나는 착한 사람이니까 당신의 연민보다 내 연민이 훨씬 강해”라고 말할지도 몰라요. 근데 우리는 그 자리에서 분노한단 말이죠. 고 감독과 나는 비슷한 형질을 가졌다고 생각해요.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거예요. 정직하고 우직한, 잔머리 굴릴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살아야 해? 왜 이런 곤경에 처해야 해? 사실 그러한 사회적 분노가 곧 진보의 힘이잖아요. 그 화가 불같이 들끓었을 때, 나는 <아, 대한민국…>을 냈던 거죠.

고영재_ 뭐, 아무튼 나는 인정해. 내가 말한 것, 형이 말한 것 모두 인정하고 사는데. 형이 그랬잖아요. 이 영화를 통해 일단락을 짓고, 이제 새로운 노래를 하신다고요. 나 역시 마찬가지예요. 영화를 만들면서 나도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어요. 나는 어떤 사람 때문에, 누군가를 위해 일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같이 일했던 사람에게 실망했다고 해서 좌절할 이유도 없어요. 한국독립영화협회 이사장직을 맡으며, 어쩔 수 없이 그간 여러 일을 감당해야 했어요. 정치권력에서 이슈가 뭐고, 운동 진영이 어떻게 흘러가고. 이제 그런 것들로부터 스트레스받고 싶지 않아요. 내 형질과 의지는 소위 말하는 공중전과는 무관한 곳에 있더라고요. 이제 다르게 살아보려 해요. 내 마음이 동하는 일과 사람을 만나면, 아무 생각 없이 가자. 너무 의식하지 말고, 그냥 해보고 싶은 걸 하자. 요즘 꿈은 소박해요. 함께 일하는 박채은 피디와 한지수 씨, 이 친구들과 가능한 한 오래 보고 싶어요. 영화가 대박 나고, 돈을 얼마나 벌고… 그런 걸 다 떠나서요. 이들과 사무실 유지하며 더불어 일할 수 있는 정도로만 바탕을 마련하면, 나는 행복하게 살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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