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아의 딸’은 엄마가 밉다. 두렵고 원망스럽다.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가 된 자신을 보듬어주기는커녕 비난부터 쏟아냈기 때문이다. 아빠의 폭력에 그토록 힘든 세월을 보냈으면서, 엄마는 왜 딸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어려운 질문을 던지는 <경아의 딸>은 연수(하윤경)의 헤어진 남자친구가 둘의 사적 영상을 유포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그걸 가장 처음 받는 건 연수의 엄마 경아(김정영)다. 자나 깨나 딸의 ‘몸조심’을 걱정해온 엄마에겐 청천벽력 같은 일. 급기야 해서는 안 될 말까지 내뱉고 만다. 연수는 일상을 추스를 방도를 찾으려 애쓰지만, 주변은 온통 걸림돌투성이다. 모녀는 상처를 치유하고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까? 분명한 건 이 문제가 결코 연수와 경아 둘만의 갈등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경아의 딸>은 여성을 통제하고 손쉽게 비난하는 사회적 인식을 반영한다. 동시에 그 어둠을 밝힐 빛의 가능성 또한 모색한다. 돈 벌려고 한국에 온 린과 어떻게든 한국을 떠나고 싶은 연희의 짧은 우정을 그린 <야간근무>(2017)에 이은 김정은 감독의 첫 장편영화로,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부문에서 상영한다.
<야간근무>를 끝내고 나서 장편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런 말을 했구나. (웃음) 학교에서 단편 작업을 많이 했고, 졸업하고도 찍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야간근무>와 다큐멘터리 <막달레나 기도>(2018)를 만들었다. 단편을 찍은 후 장편을 준비하는 게 마치 수순처럼 느껴져서 그랬을 거다. 그러다 보니 한동안 의욕이 넘쳐서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적극적으로 찾는 시간을 보냈다.
바람을 이룬 셈이다.
소재를 떠올리고 기획을 시작한 게 거의 4년 전이다. 긴 시간처럼 느껴지지만, 그동안 쉬지 않고 바쁘게 준비하고 작업했다. 시나리오부터 제작까지 숨 돌릴 새 없이 흘러갔다고 해야 할까. 마침내 완성하고는 속이 후련했지만, 영화를 선보인다고 생각하니 긴장되고 설렌다.
어디서 시작되고 어떻게 발전된 이야기인가.
‘N번방 사건’이 큰 파장을 일으키기 전에도 ‘웹하드 카르텔 문제’가 있었고, 나 역시 디지털 성범죄에 관심이 있었다. 디지털 성범죄가 피해자를 고통스럽게 하는 건 순결 주의나 전통적 정조 관념 때문인데, 그 고통에 크게 공감했다. 나 또한 어렸을 때부터 그런 것들을 강요받았던 기억이 있으니까. 처음엔 피해자인 주인공이 겪는 일들에 초점을 맞추는 이야기를 썼다. 그런데 그게 너무 단순하고 진부하더라. 이 소재를 선택한 이유를 다시 떠올리며, 내가 피해자라면 가장 두려워할 대상이 누굴까 생각해봤다. 엄마였다. 친구도 아니고, 아빠나 오빠처럼 성별이 다른 가족도 아니었다. 나를 가장 이해해주고 가까운 존재인데 왜 그랬을까? <경아의 딸>은 그 질문에서 출발한 이야기다.

딸을 걱정하는 엄마는 <야간근무>에도 나온다. <막달레나 기도> 역시 엄마와 할머니의 모습이 담긴 작품이다. 재학시절 만든 <주말의 집>도 엄마와 딸의 이야기고. 계속 모녀 관계를 다루는 이유가 있나.
3학년 때 장건재 교수님 수업을 들었는데, 자전적 경험을 모티브로 영화 만드는 걸 강조하셨다. 그때 처음 나라는 사람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작업해봤다. <주말의 집>은 독립해서 자취를 시작한 딸이 주말을 맞아 엄마 집에 방문하는 이야기다. 지금까지는 나와 엄마의 관계를 좀 단순하게 영화로 표현했다. <경아의 딸>을 준비하면서는 그 관계에 더해 엄마 세대가 여전히 구시대적 가치관에 갇혀있고, 그걸 딸에게 대물림하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봤다.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뭘까, 이런 대물림을 끊을 수 있는 방법이 뭘까 좀 더 내밀하게 고민했다. 오프닝에서 경아가 연수와 영상 통화하며 방에 다른 사람 없는지 보여 달라고 하잖나. 우리 엄마가 그랬다. 그 저변에 깔린 건 딸에 대한 걱정과 사랑일 텐데, 한편으론 무슨 일이 생기면 마치 내가 조심하지 않아서라는 죄책감이 들 것 같더라. 실제로 엄마가 걱정돼서 안 되겠다며 자취방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악몽을 꾸기도 했다. (웃음) 내 답답한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는 점에서, 이번 영화가 예전 작업과 다르다고 느낀다.
용인대학교에서 공부하며 필름 작업을 했다고. 요새는 흔치 않은 경험이다.
비용도 많이 들고 까다로운 과정이었지만, 돌이켜보면 귀한 경험이다. 그냥 찍을 수 없고 한 번 더 생각하게 되니까, 영화 만드는 태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앞서 말했듯 학교에서 만든 영화들은 나를 들여다보는 작업이기도 해서, 그걸 보면 당시 내 생각이나 모습이 보인다.
<경아의 딸>은 “몸조심해”, “너도 걔 좋아했잖아” 같은 말들로 대표되는 여성에 대한 억압을 다룬다. 이런 경험을 보여줄 때는 표현의 정도를 조율하는 일이 중요한데.
문제의 영상을 어디까지 보여줄 것인가 등 우려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인물이 영상을 확인하는 장면은 여러 번이지만, 내용은 최대한 보여주지 않으려고 주의를 기울였다. 처음에만 소리로 맥락을 전달한다. 주인공이 겪는 고통은 일상적인 2차 가해 발언으로 전하고자 했다. 엄마나 친구들이 그냥 지나가면서 하는 말들이 피해자에게는 굉장히 큰 아픔이 된다. 그런 것들이 쌓여서 결국은 연수처럼 주체적인 인물도 경아처럼 자기 탓을 하는 순간이 온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정확하게 설명되진 않지만 경아 역시 과거에 가정폭력을 겪었고 가까운 지인에게 2차 가해의 말을 들었다는 게 은연중에 드러나는데, 그것이 연수에게 되풀이된다. 폭력이 폭력을 낳고 혐오가 혐오를 낳는 거다.
타임라인 내 주요 사건에는 재판이 포함돼있다. 이전 세대에는 정확히 이름 붙이기 어려웠던 피해 경험을 명확하게 호명하는 과정처럼 보인다. 다만, 영화는 재판 절차를 세세히 따르진 않는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처단하기 위해 싸우는 과정을 다루고, 사회적으로 우리가 함께 참여하기를 독려하는 영화가 많다. 그런데 그러한 재판 과정을 가깝게 다루면 이야기가 처음 목적과 다르게 흘러갈 것 같더라. 영화가 재판에 집중되고, 왠지 가해자가 나와야 할 것 같고. 그래서 아예 재판이 끝난 뒤의 상황을 다루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피해자가 이 일을 어떻게 헤쳐 나가는지도 중요하다. 그 과정을 소거하면 공감이 어려울 거로 봤다. 결과적으로 처음 피해 사실을 알고 3, 4개월이 지난 후, 법정 공방을 어느 정도 벌이면서도 피해자가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을 보여주게 됐다. 그러는 동안 엄마도 딸의 고통을 이해해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제목은 언제 어떻게 지었나.
이 이야기를 모녀 이야기로 풀기로 했을 때, 엄마 이름을 지으면서 바로 떠올렸다. ‘경아’는 7~80년대 한국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다. 그 시대 한국 영화 속 여성상은 순종적이고 남성에게 의존하는, 남성의 판타지로서 순수의 대상 같은 측면이 있다. 경아 역시 남편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폭력 속에서 오히려 자신을 탓하던 인물이고, 의식적으로 그 이름을 썼다. 한편으론 경아와 연수를 다 드러내는 제목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연수가 본인의 이름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계속 누군가의 딸로 불리는 게 영화가 말하려는 바와 일맥상통한다고 봤다.
김정영, 하윤경 배우가 모녀의 복잡한 감정을 과하지 않게 표현했다. 두 사람이 간혹 보여주는 서늘한 얼굴도 무척 인상적이다.
김정영 선배님은 워낙 단단한 연기 내공이 있는 분이다. 또 편안한 어머니 같으면서도 강인한 느낌이 있다. 선배님은 경아가 사과하는 어른이라 좋았다고 하시더라. 기성세대 중에는 사과하지 않고 절대 변하지 않는 인간이 많은데, 경아가 결국 딸에게 속죄하는 게 굉장히 와 닿았다고. 하윤경 배우도 여린 모습과 단단하고 강인한 분위기가 공존한다. 두 배우가 묘하게 닮았다.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오디션 영상이 무척 마음에 들어 연락했고, 연수의 상황에 많이 공감했다. 정영 선배님은 담소 나누는 것도 좋아하시고 소녀 같은 모습이 있는데, 촬영 시작하면 마치 빙의되는 것 같다. (웃음) 집중력이 좋고 몰입하는 순간 딱 그 인물이 된다. 하윤경은 촬영 전부터 스스로 통제하고 감정을 쌓아 올리다가 촬영하면 그걸 터뜨리는 배우다. 캐스팅이 늦게 된 편이라 촬영 전에 서로 이야기 나눌 시간이 많지 않았지만, 두 분 다 내가 원하는 톤을 훌륭하게 표현해주셨다.
조명 세팅을 세심하게 한 것 같다. 인물에게 계속 빛을 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보인다고 할까.
촬영 전 미팅에서 조명 감독님이 경아는 빛에서 어둠으로, 연수는 어둠에서 빛으로 가는 컨셉을 구상해오셨다. 그 말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그걸 염두에 두고 조명을 세팅했고, 항상 빛과 어둠의 공존을 신경 쓰려고 했다. 피해를 겪은 연수가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모습을 공개하는 장면도 그리 어둡지 않다. 오히려 더 밝게 찍고 싶었다. 트라우마는 마음속에 있겠지만, 그렇다고 우리 일상이 늘 어두운 건 아니잖나. 시답잖은 걸 보며 웃기도 하고, 어떤 날은 괜찮아져서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그러다가 또 얼굴에 그늘이 지기도 하고. 그런 것들을 계속 의식하며 작업했다.
영화엔 행복한 연애의 순간을 담은 영상도 등장한다. 무엇을 고려했나.
시나리오 쓰면서 피해자 지원 단체 활동가분들과 인터뷰를 했다. 그분들은 삭제를 위해 불법으로 업로드된 영상물을 봐야 한다. 그런데 그중에 여자친구가 남자친구를 위해 파티를 열어주는 영상이 있었다고 하더라. 그걸 보고 굉장히 가슴이 아팠다고. 그저 특별한 것 없는 일상의 한 부분이잖나. 그 이야기가 내게도 인상 깊었다. 아마 연수도 그런 맥락의 연장선에서 사적 영상을 찍었을 거다. 그런데 그게 공개되는 순간 여성은 비난받는다. 취재하면서 들었던 기억에 남는 문장이 “나의 일상은 너의 포르노가 아니다.”였다. 그러한 문제를 제시할 수 있는 영상을 관객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다.

도입부의 영상통화나 연수가 재택근무를 시작하며 쓰는 화상채팅처럼 다양한 디지털 화면이 곳곳에 쓰였다. <막달레나 기도>에도 홈 CCTV가 등장한다. 편리하지만, 알 수 없는 불안을 느끼게 하는 도구다.
공통적으로 타인을 쉽게 볼 수 있고, 감시 역할을 하는 장치들이다. 우리가 개인이 온전하게 자유로울 수 없고, 내가 누군가에게 노출되는 게 자연스러워진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고 자란 인천에서 계속 영화를 찍고 있다. <야간근무>에는 자전거 타고 갈 수 있는 거리에 바다가 있다는 점이 주요하게 사용되기도 했다.
인천이 되게 흥미로운 공간이다. 옛날의 모습이 그대로 있는데, 한편으론 첨단 도시 같은 느낌도 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한다는 점에서 재밌는 도시다. 3~40분 거리에 바다가 있다는 것도 특징이고. 그걸 영화에서 활용하고 싶었다. <야간근무>의 바다는 떠나고 싶은 곳, 혹은 그리워하는 고향을 드러내는 공간이다. <경아의 딸>은 공장 지대의 부둣가에서 촬영했다. 바다 색깔도 탁하고, 공장 굴뚝에선 검은 연기가 난다. 남편이 일했던 그 공간에 경아가 여전히 매여있다는 걸 표현하려고 했다.
영화 만들면서 자신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이 있나.
포기하지 말자, 타협하지 말자. 촬영하면서 힘든 순간도 있었지만, 주변에 동료들도 있고 당장 스케줄이 있으니 뭔가를 계속 되새기지는 않았다. 그런데 편집할 때는 결과물을 마주해야 하잖나. 생각할 시간이 많다 보니, 이 정도에서 마무리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할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럴 때마다 포기하지 말자고 되뇌곤 했다.
첫 장편을 마무리하면서 연출자로서 새로 하게 된 고민이 있다면.
우선은 앞으로 어떤 작품을 만들어야 할지 고민이다. 그동안 무겁고 진지한 이야기를 주로 다뤘는데, 다음에는 코미디 영화를 찍어보고 싶다. 아버지 얘기도 하고 싶고. 예전에는 멋모르고 영화를 찍었다. 그런데 점점 어렵다. 좋은 이야기, 좋은 연출이 무엇인지 고민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