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통한 만유인력
JIFF 2022 <아빠는 외계인> <힘찬이는 자라서> 노재원
글 손시내 사진 이영진 / Festival / 2022-04-29

살짝 신나 보이는 눈, 살짝 수줍어 보이는 입. 노재원에겐 왠지 살짝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싶다. 대놓고 주장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저 뒤로 물러나 있지도 않은 사람. 살짝 눈에 띄는데 어쩐지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노재원은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서 기어코 머릿속 앨범을 뒤적이게 하고, 앞으로도 보게 될 것 같아서 꾸역꾸역 크레딧을 확인하게 하는 배우다. 그는 섬광처럼 폭발하는 게 아니라, 조금씩 주변을 물들인다. 연기의 매력을 솔직함으로 꼽는 배우답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노재원은 세 편의 영화로 관객을 만난다. <아빠는 외계인>(연출 박주희)에서는 아들이다. 운석(노재원)은 오래전 우주로 떠난 외계인 남편이 곧 돌아올 거라 믿는 엄마(박준면)가 걱정스럽기만 한데, 그들의 집에 정말로 웬 남자(문유강)가 찾아온다. <힘찬이는 자라서>(연출 김은희)에서는 남편이다. 한국 사회의 젠더 이슈를 액자 구조로 풀어낸 이 작품에서, 시나리오를 쓰는 정희(손수현)는 오랜 친구 소연(안소요)의 남편 강석(노재원)과 현실의 차별과 불평등을 두고 설전을 벌인다. 그런가 하면 <윤시내가 사라졌다>(연출 김진화)에서는 가수 윤시내의 이미테이션 가수 ‘운시내’로 활동하는 어느 청년이 됐다. 찾아볼수록 자꾸만 궁금해지는 이 배우. 과연 어떤 마음으로 연기하고, 어떤 속도로 살고 있는지 찬찬히 따져보자. 

 

 

지난해 <한비>(이다영, 2021)에 이어 올해는 세 편의 영화로 전주국제영화제를 찾는다.

내가 출연한 영화로 처음 가본 영화제가 작년 전주국제영화제다. 그때는 <한비> 팀과 계속 함께 다녔다. 맛있는 것도 먹고, 우리끼리 또 영화를 찍어보자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어떤 영화를 만들까 머리 싸매고 고민했던 기억이 나는데, 어느새 완성했다. 이다영 감독이 연출하고 나와 김예지 배우가 출연하는 <햇볕을 볼 시간>(가제)이다. 말 그대로 전주에서 시작된 영화다. (웃음)

 

요새 출연작을 만나게 되는 일이 잦다. 눈에 띄는 근황 중 하나는 매니지먼트를 만났다는 점인데, 바쁘게 지내는 중인가.

지금보다는 학창 시절에 더 바빴다. 그때는 학교 공연에 수업, 촬영까지 병행했으니까. 지금은 더 많이 활동한다기보다 그저 꾸준히 살고 있는데, 그게 행복하다. 올해 초에 졸업하고 연극 한 편 올리고 있는 와중에 제안을 받아 회사에 들어가게 됐다. 혼자 할 때보다 오디션 기회가 많이 생겼다는 게 달라진 점이다. 그 외엔 좋은 동료들과 연기 공부를 하고 있고, 더 더워지기 전에 자전거를 열심히 타려고 노력 중이다.

 

단편 <아빠는 외계인>은 웃으며 보다가 눈물 한 방울 맺히게 하는 영화다. 같은 학교 출신인 박주희 감독의 졸업작품인데, 어떻게 합류했나.

감독님이 먼저 시나리오 읽어보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처음엔 못한다고 했다. 해야 할 다른 작품이 있는 상태였고, 감독님을 전혀 모르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다시 연락하더라. 지금은 친한 친구 사이가 됐다. (웃음)

 

결국 참여하게 된 이유는?

우주, 외계인 이런 거 되게 좋아한다. (웃음) 그리고 내 삶에서 가장 큰 의미를 갖는 게 바로 가족이다. 가족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박주희 감독은 진짜 재밌는 사람이다. 자기 작품을 정말 사랑하는 게 보인다. 자기가 쓴 지문 하나를 읽고도 엄청나게 웃는다니까. 그런 애정 덕분에 나도 덩달아 작품을 사랑하게 됐다.

 

운석은 통통 튀는 영화 속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예민한 인물이다. 살짝 인상을 쓰고 엄마를 쳐다보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어떻게 접근했나.

영화 속 엄마는 아빠가 외계인이라고 믿고 자꾸 상식에 어긋난 행동을 하잖나. 그걸 아들로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고민하면서, 나와 할머니의 관계를 떠올렸다. 할머니는 내 가장 친한 친구이자,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가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보여주실 때가 있다. 그런 할머니와 있었던 일들을 주로 생각했다. 한편으론 할머니를 사랑한다면서 가끔 너무나 무관심하게 굴고, 또 후회하는 내 모습도 영화에 담긴 것 같다. 운석의 어떤 점이 나와 닮았는지 많이 찾아보려고 했다.

<아빠는 외계인>
<아빠는 외계인>

시나리오 수정 단계에서 감독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고 들었다. 존댓말로 써있던 운석의 말투를 반말로 바꾸는 등 여러 의견을 냈다고.

처음엔 운석의 직업이 불명확해서 그것부터 생각해봤다. 평범한 회사원이면서 컴퓨터를 만지는 사람이었으면 했다. 그런 운석이 가족을 소홀하게 대하는 모습과 나의 접점을 찾아보는 데서 시작했다. 또 처음엔 남자가 집에 찾아왔을 때 벌어지는 일이 더 부각돼있었는데, 결국 이 영화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걸 보여줄 수 있는 장면을 같이 고민했다. 작업할 때 아이디어를 종종 내는 편이다.

 

박준면, 문유강 배우가 개성적이면서도 설득력 있는 연기를 보여줬다. 운석은 시종 그들을 걱정 섞인 시선으로 보지만, 특이한 소품이 가득한 현장은 훨씬 즐거웠을 것 같더라.

편한 현장이었다. 문유강 배우와는 친한 동료 사이다. 재밌게 웃으면서 촬영했지만, 유강이의 감정을 위해 계속 차분함을 유지하려고 했다. 나 역시 운석의 마음을 유지하려 노력했고. 박준면 선배님은 정말 재밌는 분이다. 내게 큰 힘이 되는 말을 해주시기도 했다. 첫 씬을 찍고 나서, 칭찬을 많이 해주셨다. 내가 연기도 못 하는 것 같고 많이 흔들리던 시기였는데, 선배님 말씀을 듣고 다시 해보자고 생각하게 됐다. 엄마와 남자가 춤추는 장면에서 박준면 선배님이 처음으로 사랑 어린 얼굴을 보여주신다. 그걸 보면서 짠한 마음이 들더라. 촬영하기 전에는 예상하지 못했던 감정이다.

 

단편 <힘찬이는 자라서>의 강석은 “나도 남녀평등 좋아해. 남자 여자 똑같아야지.” 같은 말을 하는 남자다. 여성이 겪는 사회적 차별이 없다고 주장하며, 현실의 불평등과 편견을 몸소 보여주는 인물인데.

우연히 감독님 연락을 받고 함께 하게 됐다. 나도 이런 문제를 담은 영화, 이 사회에 대해 얘기해줄 수 있는 영화에서 연기를 할 수 있겠다는 마음에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이런 기회가 생겼구나 하고 생각했다.

 

강석은 너무 익살스럽게 표현돼서도, 그렇다고 악인으로 그려져서도 안 되는 인물이다. 적절한 선을 찾아가야 했을 것이다.

처음엔 겁나기도 했다. 평소에 강석이 하는 말들을 해본 적이 없었고, 최대한 이런 문제에 부딪히지 않으려 회피하며 살아왔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제 직면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어렵더라. 부끄럽지만 페미니즘 책을 그때 처음 사서 읽어봤다. <힘찬이는 자라서>를 촬영할 땐, 내가 이 영화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가장 많이 했다. 선과 악으로 나눠서 생각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정희(손수현)라는 인물과 가장 크게 대립할 수 있을지 계속 생각했다. 그래야 솔직하게 연기할 수 있겠더라.

 

김은희 감독과는 어떤 이야기를 주로 나눴나.

강도에 대한 것이었다. 강석이 얼마나 예민하게 굴 것인가, 어떤 식으로 그처럼 논리로 무장한 남자를 보여줄 것인가에 대해 서로 고민을 많이 나눴다. 새로운 경험이었다. <아빠는 외계인>에서는 나를 어떻게 솔직하게 담아낼 수 있을까 고민했다면, <힘찬이는 자라서>에서는 최선을 다해 내 역할을 해내는 것에 대해 고민했다.

<힘찬이는 자라서>
<힘찬이는 자라서>

장편 <윤시내가 사라졌다>에도 출연했다. 어떤 인물을 연기했나.

준옥이라고, 윤시내 선생님의 이미테이션 가수 운시내로 활동하는 인물이다. 분장하고 무대에 서는 밤무대 가수다. 화장도 하고 노래도 부른다. 노래를 잘하지는 못하는데, 촬영에 앞서 영상을 보내달라고 하셔서 코인노래방에서 혼자 찍었다. (웃음) 강산에의 ‘라구요’, 정말 열심히 불렀다. 연습 많이 했다. 주변에서 도움도 많이 받았고. 내 첫 장편영화다. 떨리고 설레는 경험이었다.

 

중앙대 공연영상창작학부에서 공부했고, 이전에는 연극무대에 더 많이 섰다. 연기는 어떻게 시작했나.

학부 안에 있는 연극학과에서 연기전공으로 졸업했다. 학교생활을 정말 재밌게 했다. 마음 맞는 선생님, 동료들과 공연을 많이 했다. 연출과 배우를 나누기 이전에 다 함께 작품에 대해 고민하고 같이 만들어가는 방식으로 주로 작업했다. 또 의무적으로 부서 활동을 해야 했는데, 난 조명부서였다. 연출에도 관심이 있어서 글도 써보고, 짧은 극도 올려봤다. 연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했던 건 중학교 2학년 때다. 차태현 배우가 나오는 드라마 <꽃 찾으러 왔단다>를 봤는데, 드라마 끝나고 NG 영상을 틀어주더라. 그게 너무 재밌어 보였다. ‘배우들이 저렇게 하는구나, 저게 다 연기였구나!’ 하고 깨닫는 순간이었다. 순수한 마음에 연기를 하고 싶었는데, 부모님이 반대하셨다. 그런데 담임선생님이 내가 예고에 가는 게 좋겠다며 아버지를 설득하셨다.

 

선생님이 도와주신 건가?

아니다. 말씀드린 적 없는데, 선생님께서 성대모사도 하고 장난기 많은 나를 예뻐해 주셨다. 그렇게 연기학원에 다녔고, 안양예고에 진학했다. 학교 다니면서는 너무 재밌었는데, 입시가 힘들었다. 그때 실패를 많이 맛봤다. 결국 삼수까지 했다. 입시 연기가 힘들었다. 시키는 대로 해야 하고, 보여줘야 하는 연기였으니까. 합격하려면 어떻게 좋은 목소리, 올바른 자세로 내 연기의 장점을 보여줘야 하나를 고민해야 한다. 그게 싫었다.

 

연기의 어떤 점을 좋아했는지 돌이켜보면 어떤가. 변천사가 있을 것 같다.

학교 다닐 때는 공연의 역동성을 좋아했고, 무대 위의 내가 평소보다 더 매력적이고 다채롭고 재밌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뭔가 보여주고 싶고, 뽐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지금은 연기하는 방식이 바뀌고 있는 시점인 것 같다. 요새는 내 생각, 마음, 성격을 연기에 담아낼 수 있다는 게 좋다. 그러니까, 연기하는 걸 솔직해지는 과정으로 받아들인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고, 꾸밈없이 내가 할 수 있는 걸 연기에 담아낼 수 있다는 게 너무 매력적이다.

 

인터넷에서 10년 전에 촬영한 <라면을 맛있게 끓이는 방법>(연출 임태호)이라는 단편을 찾았다. 친구들과 만든 영화 같은데, 처음 찍어본 영화인가?

세상에. (웃음) 고등학교 2학년 때 정말 친한 친구랑 찍은 영화다. 처음 찍은 영화 맞다. 그때 그 친구랑 상황극을 자주 하며 놀았다. 세 보이고 싶지만 실제로는 겁이 많은 설정이라고 할까. 친구가 그걸 영화에 담고 싶어 했다. 그 친구의 동생과 부모님이 나오는, 내 인생 첫 영화다. 근데 연기를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야 일루 와. 밥 먹었어?”라는 그 짧은 대사가 너무나 어색하더라. (웃음) 처음으로 좌절감을 맛봤다. 쉬운 줄 알았던 연기가 실은 되게 어렵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그래서 가끔 그 영화를 꾸역꾸역 본다. 불량배를 주먹으로 때리고 손을 달달 떠는 장면이 있는데, 그마저도 어색하지만 예뻐 보인다. 그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윤시내가 사라졌다>
<윤시내가 사라졌다>

작업의 매뉴얼이 있나. 배역을 만날 때 어디서부터 시작하는지 궁금하다.

그 인물이 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나를 탐구하는 과정을 거친다. 작품을 할 때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한두 개씩 더 찾아가는 것 같다. 나와 아주 다르고 낯선 인물을 만날 때도 가장 공감되는 키워드를 먼저 찾는다. 복수에 불타고 헛것을 보는 그리스 시대의 극을 할 때, 내가 일상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게 뭔지 생각하는 식이다. 내 경우엔 말벌이었다. (웃음) 말벌을 생각하니 바로 움츠러들더라. 그렇게 아주 사소한 순간부터 확장해나간다. 앞으로 또 어떻게 스타일이 바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저것 찾아가는 과정이 무척 재밌다.

 

지난해 서울독립영화제 ‘배우프로젝트– 60초 독백 페스티벌’에서 1등을 했다. 수상소감을 말하며 울먹였는데, 어떤 마음이었는지.

거기 나갈 때 내 연기를 보여주기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해야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때 스물아홉이었거든. 예선에 합격한 것만으로도 너무 좋아서 땀이 났다. (웃음) 그때가 일종의 전환점이었다. 본선 때는 걱정이 좀 됐다. 그때까지 실패도 많이 경험했고, 연기하면서 상처받은 순간도 많았다. 못한다는 소리를 들으며 나를 미워하기도 했는데, 수상자를 발표하는 순간에도 그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더라. ‘재원아, 무너지지 말자, 너를 칭찬하자.’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 이름이 불렸다. 믿을 수가 없었다. 눈물 꾹 참고 상을 받았다. 내게는 너무 큰 상이었고, 내가 정말 특별했던 순간이다. 뒤풀이 때는 상이 중요한 게 아니란 걸 절실히 느꼈다. 거기 있는 배우들 모두가 하나하나 특별한 사람,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들이었으니까.

 

60초짜리 구성인데, 그 짧은 시간에 상황과 감정을 전부 설득해내는 게 놀랍더라.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의 나에게 가는 설정, 맞나?

정확하다. (웃음) 이유를 모르겠는데, 군대 전역하고 피부가 너무 안 좋아졌다. 그때 너무 힘들어서 미래의 나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과연 피부가 좋아졌는지,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묻고 싶었다. 그때 일이 문득 떠올라서 그렇게 구성하게 됐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할머니였다. 할머니가 등산을 정말 좋아하시는데, 이제는 설악산 공룡능선처럼 열 시간 넘는 코스는 못 가신다. 거길 할머니랑 같이 가지 못한 게 내가 가장 후회하는 일이다. 그렇게 내가 후회하는 것들을 빨리 얘기해주자는 마음이었다. 과거의 노재원에게 꼭 해주고 싶은 얘기였다.

 

어떤 미래를 기대하나.

앞으로 연기를 얼마나 못할지, 또 얼마나 잘할지 모르겠지만, 여러 경험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해나가려고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어떤 삶을 살게 될지 모르겠지만 다 경험해봐야 하는 거고, 그것이 미래의 나를 만들어줄 거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좋은 일들이 많이 생기고 있는데, 너무 기분이 좋아서 종종 마음이 소란스러워질 때가 있다. 소란스럽지 않은 배우가 되고 싶다.

노재원 ⓒ이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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