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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리스 게임>
이후경 / Choice / 2018-09-06

4분 30초. 몰리 블룸(제시카 채스테인)이 어떤 인물인지 알기 위해서는 4분 30초짜리 오프닝 씬만으로 충분하다. 몰리는 미국 상류층 인사들이 주 고객인 포커 게임을 운영하다 국가 상대 소송에 휘말려 가십 지 단골이 된 실존 인물. 하지만 오프닝 씬에서 그는 아직 앞날이 창창한 스무 살이다. 8년 전 아버지에게 혹독한 훈련을 받던 중 척추가 파열돼 큰 수술과 선수 활동 금지 권고를 받았으나 보란 듯이 재기에 성공해 올림픽 국가대표 스키팀 선발전까지 진출한 그는 톱3 자리를 눈앞에 둔 상황에서 지독히 운 없게도 손톱만 한 나뭇가지에 스키가 걸려 낙상 사고를 당하고 그길로 은퇴까지 하게 된다. 그가 불굴의 의지의 소유자임을, 불가능에 가까운 확률에도 자신의 원칙과 가치를 증명해내고야 말 강인한 여성임을 단박에 인지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 화면에는 타이틀조차 뜨지 않은 시점. 과연 <어 퓨 굿 맨>(1992), <웨스트 윙>(1999~2006), <스튜디오 60>(2006-2007), <소셜 네트워크>(2010), <머니볼>(2011), <뉴스룸>(2012~2014)을 통해 캐릭터 설정과 대사 완급 조절에 할리우드 최고 실력자 중 하나로 인정받아온 각본가 에런 소킨답다. 그의 감독 데뷔작 <몰리스 게임>(2017)은 그 명성에 걸맞는 출발처럼 보인다.

소킨의 장기는 도입부만 아니라 영화 전반에 걸쳐 확인할 수 있다. 이제까지 그의 각본이 지닌 얼마간의 유려한 리듬과 윤리적 견고함을 완성된 영화의 감독의 자질로 착각하게 될 때가 많았는데, 이 영화를 통해 우리는 소킨만의 미덕을 충분히 가늠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전문직 주인공과 그의 직업적 환경에 내재한 리듬, 그 프로페셔널리즘 드라마를 떠받치는 주인공만의 윤리가 그것이다.

소킨이 다뤄온 다른 주인공들과 마찬가지로 몰리도 자기 분야에서 일인자가 되고자 노력하는 인물이다. 언뜻 어떤 분야인지는 덜 중요해 보인다. 더 중요해 보이는 건 일인자가 되기 위해 그가 지녀야 하는 리듬이다. 돈 좀 있다는 놈들과 포커 좀 친다는 놈들에게 판을 깔아주고 그 대가를 챙겨 자신만의 작은 왕국을 건설하려는 몰리는, 누구보다 판을 빠르고 정확하게 읽되 늘 판 위에 군림하고 있는 듯 여유를 부려야 한다. 판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셈의 속도전을 촘촘히 기록해나가는 이 영화에서, 그는 단지 포커판 내 플레이어들만이 아니라 자신이 구축한 포커판 자체를 앞지르기 위해 사력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예로 언급할 만한 한 장면. 몰리는 판돈 대 부채 비율이 통제 불가능한 수준으로 급격히 치솟자 길게 고민할 겨를도 없이 딜러에게 판돈 일부를 몰래 빼돌리라고 지시함으로써 법만은 어기지 않겠다던 원칙을 저버리고 만다. 그렇게 이 소킨적 드라마는 주인공이 다른 등장인물들과 벌이는 경주의 드라마를 넘어 주인공이 자신이 속한 직업적 환경과 벌이는 경합의 드라마가 된다.

하지만 몰리가 선택한 일이 도박업이라고 해서 거기에 아무 원리나 원칙도 없으리라 짐작하면 오산이다. 겉으로 보기에 이 영화는 포커라는 확률 게임이 지닌 매혹을 앞세운 듯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사적 분기점마다 몰리라는 단독자의 윤리적 선택을 강조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몰리가 "왜 고객들의 부채가 기록된 장부를 팔지 않았냐"는 변호사의 질문에 "어떤 사람들이 어떤 (폭력적인) 방법으로 수금할지 알 수 없어서"라고 솔직히 답하여 그로 하여금 소송을 맡지 않을 수 없게 만들 때, 스스로 포커판에 러시아 부호들을 끌어들여 놓고 러시아 마피아 돈세탁에 이용당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고 하면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기에 대신 자신의 역할을 “칵테일 웨이트리스”쯤으로 축소해 진술하려는 변호사의 얄팍한 전략을 한사코 거부할 때, 혼자 살려고 자신의 하드드라이브를 증거로 제출해 아무 관계 없는 사람들까지 다치게 할 수는 없다고 변호사에게 강변할 때, 자신의 고객 명단과 실명 거론에 집착하는 국가 측 검사가 가십 지와 다를 게 뭐냐고 일침을 가할 때, 영화는 세상의 모호한 잣대와 몰리의 명료한 태도를 대비시키며 서사적 명분과 추진력을 획득한다. 그 대목들이 종종 빤하고 딱딱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런대로 존중할 만한 순간들이다.

특히 판결 장면이 인상적이다. 긴 갑론을박 끝에 모든 걸 운에 맡긴 듯 피의자석에 앉아 있는 몰리에게, 판사는 그의 도박업에 비하면 월스트리트 경제가 세상에 훨씬 백해무익하다며 사회봉사 정도의 형량만 선고한다. 어찌 보면 이제까지의 영화적 전술을 허무하게 만들어버리는 결말이지만, 달리 보면 어느 이야기에서든 각 인간이 짊어져야 할 윤리적 판단과 책임의 무게를 새삼 상기시키는 결말이기도 하다. 너무나 단순하고 명쾌해서 더 덧붙일 말조차 없어지는 이 장면을 위해, 2시간에 걸친 소킨과 몰리의 게임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몰리스 게임 Molly's Game 감독 에런 소킨 출연 제시카 채스테인, 이드리스 엘바, 케빈 코스트너, 마이클 세라 배급 영화사 빅 제공 인터파크 제작연도 2017년 상영시간 140분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개봉 9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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