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연애 한 번 못하고 30대를 맞이한 여자. 죽어라 일했지만, 회사에서는 “만년대리”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울퉁불퉁한 세상살이를 통과하던 어느 날, 하늘에서 남자가 뚝 내려온다. 영진(이태경)의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새로 온 과장 준설(이한주)은 “네, 저는 낙하산 맞고요”라며 꽤나 뻔뻔한 자기소개를 늘어놓는다. 평등도 평화도 불가능한 둘 사이에 사랑이 피어나고, 애정과 미움은 연신 엎치락뒤치락한다. 3년 전에 촬영한 영화를 떠올리며, 이태경과 이한주는 조금 두렵다고 했다. 지금과는 여러모로 다른 과거의 모습을 다시 마주하기가 쑥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평평남녀>에는 그때만 가능했던 노력과 에너지도 담겨 있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듯 투명한 눈, 겉치레 따위 없는 시원시원한 몸짓. 이태경은 약동하는 젊음을 영진에게 고스란히 내어줬다. 말을 더듬으면서도 대화를 멈추지 않는 고집, 의욕이 넘쳐서 저지르는 실수. 이한주는 초심자의 자세로 준설을 그려 나갔다. 김수정 감독은 두 배우를 각각 아름답고, 남다른 사람이라 표현했다. “모호하게 들리겠지만, 태경 씨는 아름다운 사람이에요. 연기할 때 굉장히 집중하면서, 어떤 가치를 지켜내려 했어요. 넋을 놓고 보게 되는 순간이 많았어요. 한주 씨는 연기를 향한 애정과 에너지가 남다른 사람이고요. 현장에서 놀랄 정도로 준비를 다양하게 해왔어요.” 두 사람 덕분에 <평평남녀>는 그저 기 센 여자와 양심 없는 남자의 대결이 아닌,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자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우리들의 이야기로 완성됐다. 영화에서 건넨 무심한 응원을 손에 쥔 채, 두 배우를 만나 지금은 어디쯤 가 있는지 물었다.
<평평남녀>를 찍은 2019년은 어떤 해였나. 당시엔 몰랐지만, 돌이켜보면 새로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있지 않을까 했다. 이 작품을 왜 선택했고, 어떤 마음으로 준비했는지.
이한주_ 감독님과 전부터 아는 사이다. 시나리오를 읽어보라고 주셨는데, 처음에는 감독님이 쓴 글이 아닌 줄 알았다. 전작과는 여러 면에서 달랐거든. 그래도 시나리오 자체는 재밌게 읽었다. 주연을 제안받았을 때는 솔직히 너무 부담스러웠다. 장편 주연을 맡는다면, 준비가 어느 정도 된 상태에서 들어가고 싶었다. 걱정스러운 부분이 많았지만, 감독님과 태경 씨를 믿고 잘 기대어 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촬영 초반에는 불편함이 컸는데, 점점 현장에 가는 것이 즐겁더라. 끝날 즈음엔 아쉬웠다. 내가 워낙 여유가 없는 탓에 태경 씨랑 이야기를 많이 못 했거든.
이태경_ 나도 마찬가지다. 각자 맡은 바에 집중하다 보니, 대화할 겨를이 없었다. 촬영 후반에 가서야 조금씩 말을 섞었다.
이한주_ 장편영화가 생각보다 체력을 많이 필요로 하더라. 현장에서 줄곧 긴장하다 보니, 휴차 때는 정말 쉬기만 했다. 어쨌거나 나에게 <평평남녀>는 첫 장편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어떻게 하면 연기를 계속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때였는데, 긴 호흡으로 연기할 기회가 선물처럼 왔다. 잘 해내고 싶은 욕심이 컸다. 그래선지 내 연기를 다시 마주하기가 겁도 난다. 지나치게 의욕을 앞세웠나 싶어서. 다만,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기에 크게 후회하진 않는다.
이태경 배우는 어떤가.
이태경_ 끝나고 나면, 늘 아쉬움이 남는다. 그때는 최대한 나를 놓고서 연기에 임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괜히 ‘진짜인가?’ 싶고. 한편으론 그동안 나이를 먹었으니, 지금 연기하면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내가 올해 서른둘인데, 영진이 서른셋이거든. 그러다 최근에 지난 기록을 살펴보고는 ‘어쩌면 딱 그때만 찍을 수 있는 작품이었네’ 했다. <평평남녀> 촬영할 때까지만 해도 생기가 넘쳤는데, 서른 들어서 꺾였거든. 의욕도 없고, 자꾸 지치고.
활기찬 스물아홉의 이태경이 담긴 작품이구나.
이태경_ 현장도 의기투합하는 분위기였다. 아무리 되돌아봐도 힘들고 괴로웠던 기억이 없더라. 정말 행복하게 찍었다. 나 역시 장편에 많이 참여하진 않았다. 주연으로만 따지면 세 번째 작품인데, 개봉은 처음이다. 소식 듣고 나서 반갑고 놀랐는데, 갑자기 부담감이 커지기도 했다. 촬영할 때도 고민을 거듭했다. 어쨌든 2시간 동안 내 얼굴이 화면에 계속 나오지 않나. 영진의 호감도를 유지할 방법을 고심했는데, 개봉한다고 하니 ‘이거 정말 두렵구나. 엄청난 압박이구나.’ 싶더라. 역시 주연 배우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웃음)


분량 전체를 부산에서 촬영했다고. 서울에서 찍을 때와는 느낌이 또 달랐을 것 같다.
이태경_ 맞다, 감독님이 한 달 치 숙소를 예약해주셨다. 난 부모님이랑 같이 사는데, 항상 독립을 꿈꾼다. 촬영하는 동안, 혼자 지내서 좋았다. 멀리 여행을 온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자유롭고 홀가분했다. 촬영 끝나고 숙소 돌아오면, 그냥 말없이 쉴 수 있고.
시나리오를 받고 고민했던 부분이 있을 듯하다. 이태경 배우는 <평평남녀>를 일종의 캐릭터 무비로 봤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이태경_ 시나리오를 보자마자 재고 따질 것도 없었다. 그만큼 재밌게 읽었고, 여전히 <평평남녀>를 캐릭터 무비라고 생각한다. 근데 가편집본을 보고 충격받았다. 나만 캐릭터 연기를 하는 것 같았거든. 처음 미팅했을 때, 감독님은 새로운 걸 해보고 싶다고 하셨다. 그동안 안 해본 것에 도전하는 마음으로 시나리오를 썼다고 하시더라. 나도 비슷한 마음이었다. 영진 같은 인물은 처음이라서 끌렸고, 당시 내 욕구와도 맞아떨어졌다. 장르적 연기라고 해야 할까, 쉽게 말하면 확실한 연기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영진으로 그걸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감독님과 함께 또 다른 시작점에 선다는 느낌으로 준비했다.
혼자서만 캐릭터 연기를 하는 것 같았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태경_ 중반부로 접어들며 드라마적 요소가 강해질지언정, 초반에 캐릭터를 세게 잡아야 한다고 봤다. 다만, 완성본을 보니 걱정스러운 마음이 확 올라오더라. 감독님과 좀 더 세부 사항까지 논의했어야 했나? 다른 배우들과 협의하며 연기를 맞췄어야 했나? 사실 현장에서도 조금씩 느꼈거든. ‘나만 이상한 연기를 하는 것 같은데, 멈출 수가 없어!’ (웃음) 내가 그린 영진이가 너무나 확고해서 밀어붙일 수밖에 없었던 거다. 근데 감독님한테 여쭤보니, 괜찮다고 하시더라. 본인이 봤을 때는 좋다고. 그때부터는 마음을 좀 가라앉힌 것 같다.
영진과 준설의 첫 키스가 떠오른다. “어떻게 하면 더 좋아요? 혀를 넣고 돌려야 해요? 저 잠깐 검색 좀 해볼게요.” 영진은 키스하다 말고 쉴 새 없이 말을 내뱉는데, 어처구니없으면서도 마냥 우습게 보이진 않았다.
이한주_ 나는 옆에서 애인이 아니라, 선생님처럼 가르쳐주고.
이태경_ 와, 그때 솔직히 오빠 미웠다. 내심 리드해주길 바랐는데, 오빠가 팔을 몸에 딱 붙이고 가로막는 거다. ‘이 오빠는 안 오겠구나, 내가 달려들어야 하는 상황이구나.’ (웃음) 진짜 큰 용기를 내서 찍은 기억이 난다.
이한주_ 걱정도, 긴장도 많았던 장면이다. 테이크를 여러 번 가진 않았는데, 첫 번째 테이크가 끝나니 마음이 조금 편해지더라. 모니터 보면서 ‘어떻게 하면 내가 더 예쁘게 잘 나올까?’ 생각했다. (웃음) 그러다 보니 팔도 올리고, 덕분에 준설이 좀 귀여워 보이기도 하고. 준설은 센 척하지만, 실은 꽤 소심하고 서툰 사람이다. 반면, 영진은 훨씬 적극적이고 대찬 면이 있다. 그 장면에서 둘의 성격이 드러나더라.
이태경_ 맞다, 영진은 참지 않지. (웃음)
영진과 준설은 요즘 사람 같지 않다. 속내를 감출 줄 모르고, 남몰래 딴마음을 품지도 않는다. 여러 면에서 다른 캐릭터이지만, 묘하게 순수하다고 해야 할까. 때 묻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통하는 부분이 있다. 영진의 눈치 없음이나 준설의 뻔뻔함이 미워 보이지 않는다.
이태경_ 시나리오를 읽는 순간, 확 그려지는 인물이 있다. 영진이 그랬다. 촬영 전에 준비하면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만들어봤다. 하지만 결국에는 첫인상으로 다시 돌아오더라. 영진은 나와 엄청나게 다른데, 내가 좋아하는 인간상이다. 영진이가 ‘개그캐’처럼 보일까 봐 내심 걱정했다. 나한테 영진이는 진짜 멋있는, 내가 닮고 싶은 사람이거든. 순수하고 솔직한 데다, 자기가 맡은 일은 프로페셔널하게 해낸다. 주변에서는 눈치가 없다는 둥, 사회성이 없다는 둥 핀잔을 늘어놓지만, 영진은 뒤에서 남을 깎아내리지 않는다. 행동에 앞서 계산하지 않는 면모가 근사하게 느껴졌다. 현장에서 끊임없이 나를 통제해야 했다. 영진은 나와는 다른 사람이니, 연기하는 중에 내가 튀어나오지 않도록 막아야 했다. 더불어, 난 어느 작품에서나 인물의 호감도를 중요하게 여긴다. 장치적으로 필요한 인물이 아닌 이상, 관객들이 호감을 가져야 쭉 따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 영진의 호감도를 어떻게 배치할지 고민했고, 동시에 영화 흐름도 신경 썼다. 전체적으로 밸런스를 맞추려고 했던 것 같다. 인물의 개연성이 좀 떨어지더라도 흐름에 더 맞겠다 싶으면, 그걸 택하는 식이었다.
이한주_ 나도 비슷하다. 감독님이 가장 자주 하셨던 말이 “준설이 미워 보이지 않으면 좋겠어”였거든. (웃음) 처음에는 막막했는데, 가만히 보니 나와 준설이 좀 닮았더라. 새 직장에 출근한 준설은 한껏 의욕을 드러내지 않나. 잘 해내고 싶은, 뭔가를 더 보여주고 싶어 하는 상태가 나와 겹쳤다. 더군다나 나는 감독님과 이미 친분이 있다 보니, 부담이 계속 밀려오더라.
<평평남녀>의 ‘낙하산’이 된 기분이었나. (웃음)
이한주_ 그거다, 진짜. (웃음) 실은 감독님이 맨 처음 제안했던 역할은 준설이 아니었다. 그러다 리딩을 하러 갔는데, 왠지 감독님이 다른 생각에 잠긴 듯했다. 끝나고 여쭤보니, 캐스팅에 문제가 약간 생겼다고 하더라. 출연하기로 한 배우에게 사정이 생겨서 준설 역을 연기할 배우가 없다고. 촬영이 임박했을 때였다. 준비가 안 됐으니, 당연히 거절했다. 게다가 본래 시나리오에서는 준설을 영진보다 연하라고 설정했다. 외모상 내가 태경 씨보다 어려 보인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않나. (웃음) 감독님께 배우를 다시 찾아보자고 말씀드렸는데, 결국 감독님 설득에 마음을 돌렸다. 대신 부탁드렸다. “촬영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완벽하게 준비한 상태로 들어갈 자신이 없어요. 제가 현장에서 주춤해도, 믿고 기다려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출연을 확정하고, 다음 날 곧장 태경 씨를 만났다. 아직도 기억난다. 너무 걱정돼서 급하게 리딩 약속을 잡았거든. 정말 촬영 중반까지도 잠을 제대로 못 잘 정도였다.
영진과 준설을 이루는 핵심 키워드를 3개씩 꼽아본다면.
이태경_ 빠글빠글한 헤어 스타일이 바로 떠올랐다. 말투나 제스처도 명확했다. 나는 말끝을 어눌하게 떨어뜨리는 편이고, 평소 연기할 때 손을 이용하는 제스처가 잦다. 그런 것들을 <평평남녀>에서는 절대 사용하지 않겠다고 원칙을 세웠다. 내게 영진은 빨간 망토 앞에 선 소처럼 느껴졌다. 하나만 보고 달리는, 아주 열정적이고 솔직한 사람.
이한주_ 일단 인정 욕구와 열등감을 꼽을 수 있다. 결핍이 많은 사람이니까. 스스로 낙하산이라고 인정하는 것 또한 당당해서가 아니라, 일종의 방어기제라고 봤다. 그간 얼마나 패배감을 느껴 왔겠나. 근데 준설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순수함이다. 규범에 어긋나게 행동하거나 잘못된 선택을 할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악의가 없는 인물이다. 준설은 회사에 들어왔을 때도 “내가 열심히 해서 팀을 잘 키워보겠다”고 한다. 자신보다 팀을 우선에 둔다는 뜻이고, 전부 진심이다. 사랑도 일도 잘하고 싶은데, 방식이 어긋났던 거다. 어쩌면 그런 유아적 면모 덕분에, 준설이 밉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감독은 오랜 시간 친구로서 지켜본 모습이 있기에, 이한주 배우라면 준설을 마냥 나쁜 사람으로 그려내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더라.
이한주_ 그동안 작품에서 주로 거친 역할을 맡았고, 감독님이 처음 접한 내 출연작도 마찬가지였다. 실제 모습은 생각보다 마초적이지 않아서 의외라고 하시더라. (웃음) 신기하게도 <평평남녀> 이후에 만난 감독님들은 비슷한 요구를 하셨다. 글만 놓고 보면 못된 역할인데, 밉지 않게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최근 작업에서는 애인이 있는 여자와 만나는 역할이었다.
<그 겨울, 나는>(오성호, 2021) 말하는 건가?
이한주_ 맞다. 성호 씨도 계속 그랬다. 어떻게 보면 남자친구가 있는 여자에게 접근하는 상황인데, 이때 나도 상대도 미워 보이지 않았으면 한다고. <평평남녀>와 <그 겨울, 나는>을 촬영하는 내내 생각했다. 미워 보인다는 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안 미울지.


둘 다 비슷한 고민을 했던 셈이다. 그런가 하면 이태경 배우의 캐스팅에 관해 감독에게 물었을 때는 “정적이고 응축된 연기 외에, 또 다른 모습을 보고 싶었다”고 하던데.
이한주_ 감독님은 본능적으로 다름을 지향하는 것 같다. 보편이라고 일컫는 무언가를 새롭게 바꾸고 싶어 하고, 배우에게서도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꺼내려 애쓴다.
이태경_ 배우에게 참 귀한 감독이다. 어떤 역할을 한번 잘 해내면, 대부분은 그 이미지를 계속 사용하고 싶어 한다. 그럼 배우 입장에서는 다른 걸 시도하기가 어렵다. “나는 너의 이때 모습을 원한다”는 말을 들으면, 기존의 것을 반복해서 쓸 수밖에 없거든. 내게서 다른 무언가를 기대하는 감독과 만난다는 건, 드물고 좋은 일이다.
감독은 “믿고 의지할 만큼 완벽하게 준비된 상태”였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영진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어땠나.
이태경_ 시나리오에서는 ‘남녀 대결’ 느낌이 강했다. 영진이 준설의 속내를 즉각 눈치채고, 맞받아치는 식이었다. 근데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준설이 아무리 옆에서 싸움을 걸어도, 영진은 모르고 넘어가기를 바랐거든. ‘뭐야, 왜 저래~’ 하며 흘려보내다가, 나중에 자식 같은 디자인을 위협받으면서 각성하는 거다. 나름대로 감독님을 설득하는 과정을 거쳤다. 내가 밀고 나갈 수 있는 힘은 성실함밖에 없다고 생각하기에, 언제나 준비는 철저하게 한다. 사람들은 내가 현장에서 마음 가는 대로 자유롭게 움직일 거라고 예상하지만, 실은 다 정해진 바다. 애드리브 역시 계획한 범위 내에서 시도한다. 하나부터 열까지 미리 준비하고, 본래 감독님에게는 촬영 들어갈 때까지 그걸 내놓지 않는다. 사전에 공유했다가 감독님이 아니라고 하면, 계획이 전부 어그러지니까. 차라리 현장에서 보여주고 연기로 설득하는 편인데, 이번에는 처음부터 깠다. (웃음) 내가 봐도 감독님이 생각한 영진과 내가 만든 영진이 너무 달랐거든. 감독님께 영진의 매력은 무엇인지, 어떻게 감정이 변화하는지 일일이 말씀드렸다. 그때 감독님이 내 의견을 대부분 받아들여 주셨다. 통제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 다시 생각해도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근데 감독님은 내 선택을 지지하며, 현장에서도 계속 용기를 줬다. 덕분에 회차가 쌓일수록 탄력을 받았다. 그렇다고 감독님이 무조건 좋다고만 하신 것도 아니다. 가끔 내가 집중을 못하면, 기가 막히게 알아채시더라. 솔직히 조금 불안했거든. 나에게는 워낙 말씀이 없으셔서 ‘감독님은 한주 오빠한테만 관심이 많네’ 생각한 적도 있다. 나는 오빠만큼 안 봐주는 것 같아서.
이한주_ 감독님 눈에 내가 얼마나 불안했겠나. (웃음)
이태경_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왜 나는 내버려 두지? 날 포기하셨나?’ 했다. 근데 내가 평소보다 준비를 덜 해간 장면에서 감독님이 딱 말씀하시더라. 대사에서 준설을 생각하는 마음이 안 느껴지니, 이건 몇 번 다시 찍어봐야 할 것 같다고. 새삼 안도했다. 감독님이 나도 잘 봐주고 계시는구나. (웃음)
적절한 감정선을 찾기까지 가장 오래 고민한 대사는 뭐였나.
이태경_ 준설과 대판 싸우고 나서 언니와 대화하는 장면. 준설을 향한 마음이 불확실한 채로, “나는 그 사람이 밉지 않아”라고 말하면 안 되겠더라. ‘준설이 밉게 보이면 안 된다’는 말을 나도 옆에서 계속 듣지 않았나. 거기에는 영진 또한 책임을 나눠 갖는다고 봤다. 영화에서 2시간 내내 준설을 바라보고, 준설에 관해 언급하는 사람이 영진이니까. 준설을 보듬어주고 싶은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상현 오빠뿐만 아니라, 내 역할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대사를 잘 치고 싶어서 일부러 준비를 덜었다. 현장에서 마음을 크게 먹고 해보리라 다짐했던 장면이고, 감독님도 많이 도와주셨다.
상현은 이한주 배우의 본명이다. 활동 중에 이름을 바꿨더라.
이한주_ 상현이라는 이름이 흔해서 고민 끝에 바꿨다. 실은 아버지 성함을 활동명으로 쓰고 싶었다. 길우. 근데 (강)길우 형이 있으니, 쓸 수 없는 이름이 됐다. (웃음)
이태경_ 길우라는 이름도 잘 어울리는데, 상대가 막강하다. (웃음)
이상환 감독과 형제이고, 동생이 연출한 단편 <파테르>(2019) <아무도 없는>(2019)에 출연하기도 했다. 어릴 적부터 형제가 영화에 관심이 많았나.
이한주_ 그렇진 않다. 난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연기를 전공했지만, 그때만 해도 연기에 큰 욕심이 없었다. 애초 연기를 하고 싶어서 예고에 진학했던 것도 아니다. 어릴 적부터 운동을 했고, 그러다 보니 인문계든 실업계든 갈 성적이 안 됐다. 예고는 성적보다 실기 시험을 우선시한다는 말을 듣고, 급하게 준비했다. 연기 경력은 없지만, 중학교에서 밴드부를 했거든. 운 좋게 합격했는데, 학교 다니면서도 연기가 재미있는 줄은 몰랐다. 다만, 노래 부르는 건 워낙 좋아했다. 대학교에서도 뮤지컬을 전공했고, 데뷔작도 뮤지컬이다. 그렇게 대극장 공연을 3년 정도 했는데, 문득 연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대 뒤에서 계속 노래와 춤만 하다 보니, ‘이대로라면 영영 연기를 못 하겠구나’ 싶더라. 그때가 스물아홉이었다. ‘서른 전까지 딱 1년만 영화에 도전해보자!’ 하며 뛰어들었다. 동생도 영화에 전혀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유학 갔다 와서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하더라. 이미 써놓은 글도 몇 편 있었다. 그때부터 같이 아르바이트해서 카메라를 사고,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작품이 부산독립영화제에서 상영됐을 때, 김수정 감독님과 처음 만났다.
운동은 뭘 했나.
이한주_ 축구.


축구와 밴드부에 연기까지, 화려한 이력이다.
이태경_ 만능 엔터테이너라니까. 노래도 잘한다.
안 그래도 노래방 신에 관해 물어보려고 했다. 만나서 연신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이 술에 취해 노래방에 간다. 준설은 BTS와 폴킴 노래를 열창하고, 영진은 조용히 노고지리의 ‘찻잔’을 부른다.
이한주_ 동생이랑 <평평남녀>를 같이 봤는데, 내가 노래하는 장면에서 “더는 못 보겠다”며 꺼버리더라. (웃음) 감독님께 멋지게 불러보겠다고 약속했다. 잘 모르는 노래라서 혼자 외우고, 또 외우며 연습했다. 근데 촬영할 때보다 크랭크업하고 회식할 때 훨씬 잘 불렀던 것 같다.
이태경_ 뒤풀이 끝난 후에도 한 3일간 화제였지. (웃음) 근데 노래방 신 촬영할 때도 너무 잘했다. 영진이 왜 반하는지 알겠다 할 정도로.
노래방에서 부르는 노래는 모두 감독이 골랐다고. 둘의 실제 애창곡이 궁금하다.
이한주_ 나는 김동률 노래 많이 부른다. ‘오래된 노래’
이태경_ 산울림을 좋아한다. ‘내게 사랑은 너무 써’
그야말로 영진과 준설인데? (웃음)
이한주_ 어쩐지! 태경 씨가 ‘찻잔’ 부를 때도 전혀 어색하지 않더라.
이태경_ 좋아하는 노래다. 근데 난 노래를 워낙 못해서.
이한주_ 이런 게 재미있더라. 영진과 준설은 취향도, 생각도 참 다르지 않나. 하지만 마음이 동하면, 보고 싶고 그리워한다. 공통점에 환호하는 게 아니라, 다르면 다른 대로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는 순간. 노래방 신에 그 순간이 담겨서 좋다.
연인이나 호감을 가진 상대 앞에서 부르는 노래가 따로 있나.
이태경_ 일단 노래방을 안 간다. 노래로 꼬실 수 없다는 걸 알거든. 나한테는 마이너스다.
이한주_ 난 무조건 가지. 성시경 노래 부른다. (웃음)
영진과 준설 모두 연애하면서 또 다른 사람이 된다. 그로 인해 예상치 못한 순간에 상처를 주고받기도 하고, 평소에는 드러내지 않던 귀여운 모습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어쩌면 연애를 통해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나다워지는지도 모르겠다.
이한주_ 중반부 이후엔 서로 치열하게 싸우며 사이가 벌어진다. 그러다 보니 초반에 감정을 잘 쌓아야 한다고 봤다. 상대가 정말 밉고 싫으면 “더는 못하겠다!” 하고 끝내면 되는데, 영진이나 준설이나 지지부진하게 관계를 끌고 간다. 여전히 마음이 있다는 뜻이다. 관객들이 영진과 준설의 연애를 너무 급하다거나 억지스럽다고 느끼지 않도록 감정을 유연하게 배분하려고 노력했다. 근데 사랑이라는 건, 시간을 정해놓고 진행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않나. 언제까지 이 사람을 알아보겠다, 언제부터 사랑하겠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 어느 때는 사랑에 빠지기까지 아주 오래 걸리는가 하면, 시간이 확 줄어들기도 한다. 결국 준설이 영진에게 마음을 여는 포인트가 무엇인지 찾아내는 게 중요했다. 나는 그때인 것 같다. 영진이 술집에서 “과장님이 제 자리 뺏었잖아요!”라고 했던 순간. 준설에게는 이제껏 그런 말을 솔직하게 해준 사람이 없었는데, 갑자기 눈앞에 영진이 나타난 거다. 그때 준설은 일종의 책임감도 느끼고, 영진 덕분에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을 용기도 생기지 않았을까.
이태경_ 생각해보면, 영진과 준설은 만난 지 하루도 안 돼서 스파크가 튀는 상황 아닌가. 몰래 오빠를 관찰하며 ‘이 사람의 어디에 한 번 반해볼까?’ 했다. (웃음) 나에게도 술집 장면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난 연민이 사랑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런 경험도 있고. 준설이 술집에서 속마음을 말할 때, 마음이 가더라. 준설은 혼자서 뭔가를 해보려고 하지만 우왕좌왕하고, 팀원들은 은근히 준설을 얕본다. 준설을 향한 안쓰러움에서 관심이 싹튼다고 봤다. 뭐, 가끔은 이유 없이도 자연스럽게 ‘사랑이구나’ 받아들이기도 하지 않나. 우주적 사랑 같은 느낌? 어느 순간부터는 주어진 흐름에 영진을 맡겼던 것 같다. 근데 촬영하면서 좀 힘들었다. 영화 순서대로 찍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촬영 막바지에 연애 초기의 설렘을 표현하려니, 마음이 되게 아프더라. 난생처음 겪는 감정이었다. ‘나는 결과를 아는데, 얘는 지금 아무것도 모르고 좋아하네.’ 오그라드는 말처럼 들리겠지만, 그때 영진이에게 미안해지더라. 내가 영진을 순수하고 솔직한 인물로 만들어내는 바람에, 영진이가 상처를 정통으로 들이박는 듯했다. 정작 나는 눈치 빠르게 피할 건 피하는 사람이면서, 영진이는 정반대로 만든 거다. 몸싸움하는 장면을 찍고 나서도 슬펐다.
영진은 태어나서 처음 싸워보는 사람처럼 온 힘을 다해 싸운다. 실제로는 어떤가. 연애할 때, 잘 싸우나.
이태경_ 화를 잘 못 낸다. 화낼만한 일인지, 그래도 되는 타이밍인지 긴가민가한다. 그러다가 집에 가서 혼자 분노하고. (웃음) 타인에게 실망하거나 화가 나면,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다. ‘두 번 반복하고 싶지 않다. 너 말고도 상처 받을 일이 수두룩하다.’ 그렇게 말도 안 섞고 혼자 끝내버리는 스타일이다. 폐쇄적인 성향이고, 나 역시 안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요즘 들어 조금씩 바뀌고 있다. 올해 초부터 화를 주체할 수가 없더라. 나이 들어서 그런가. (웃음)
엔딩에 흐르는 영진의 내레이션이 인상적이다. “지금부터는 나를 위해 모두 해보려 한다”며 ‘나를 위한 열정’을 찾겠다고 말한다. 문장 자체는 선언적인데, 영진답게 담백한 말투로 소화했다. 두 배우에게 ‘나를 위한 열정’은 뭘 의미하나. 오직 나만을 위해 열중하는 것이 있다면.
이한주_ 말하기 창피하지만, 연기 아닐까. 좋은 배우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지는 얼마 안 됐다. 예고, 연극영화과, 뮤지컬… 오랜 시간 연기 언저리에 머물렀다. ‘이 일을 하고 있으니, 그럼 나도 배우인가 보다’ 하고 막연히 생각했지, 좋은 연기를 하고 싶은 마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요즘엔 설렌다. 연기하면서 몰랐던 나를 많이 알게 됐다. 배역을 가만히 살펴보면, 내가 가진 어떤 면이 조금씩 보이더라. 깊게 파고들수록 나와 맞닿는 지점이 나온다. ‘맞아, 나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지. 근데 계속 아닌 척, 없는 척 포장했구나.’ 연기하면서 내 위에 덮은 포장지를 하나씩 벗겨내는 재미가 있다. 작년에 동생과 스튜디오를 열었다. 아무래도 경제적 이유가 가장 컸고, 사람들과 편안하게 만날 공간도 갖고 싶었다. 물론 동생이나 나나 작업실이 필요하기도 했고. 1년 정도 운영하면서 많이 반성했다. 생각만큼 연습도 열심히 안 하고, 이곳을 잘 활용하지 못하는구나 싶었거든. 스튜디오에 연기 연습하러 오는 분들 보면, 엄청나게 자극받는다. 열정에 기름을 붓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계속 노력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이태경 배우는 생각에 잠긴 얼굴이다.
이태경_ 최근에 깊이 고민했다. 여태 내가 해온 연기가 나를 위한 것은 아니었구나 싶더라. 처음에는 방향이 분명했다. 내가 원하는 이미지, 내 취향에 맞는 연기 스타일, 내가 되고 싶은 배우의 모습. 근데 시간이 갈수록 그것만 고집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상반된 욕구가 충돌했다. 내가 바라는 대로 하고 싶으면서도, 남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을 놓기 어려웠다. 그들의 기준에 맞춰서, 그들이 원하는 배우가 되어주고 싶은 거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타인에게 치우친 상태로 연기를 계속했던 것 같다. 가령 머리를 짧게 잘랐던 이유도 배우로서 경쟁력을 위해서였다. 한 마디로 전략이었다. ‘어떻게 하면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을까?’ 자문했을 때, 외모를 포기하고 개성으로 가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거든. 연기도 그랬다. 어디에서나 쓰기 좋은 연기를 했고, 보편적이고 무난한 이미지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얼핏 나를 위한 선택처럼 보이는데, 곰곰이 되짚어보니 그렇지만은 않더라. 결국 내가 바라는 대로 못 했으니까. 항상 남을, 역할을 위해 머리를 잘라 왔다. 나는 예쁘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화장도 일부러 안 했다. 어중간하게 꾸며서 어중간하게 예뻐지면, 설 자리가 더 줄어들 거라 여겼다. 근데 이제 마음 가는 대로 하려 한다. 사소한 것부터 하나씩 시도해보자는 생각으로 최근에는 머리를 기르고 있다. 어쩌면 영진이랑 비슷한 시기를 통과하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정확한 길은 모르겠지만 ‘일단 해보자, 아니면 다시 돌아가도 된다.’ 마음먹었다.
1년 전에 “동력이 새롭게 필요한 상태”라고 말했는데, 지금은 어떤가. 새로운 동력을 찾았나?
이태경_ 사실 찾지는 못했다. 어떻게든 연기와 직업을 향한 애정이 다시 살아나도록 애썼는데, 올해 초까지도 회복이 쉽지 않더라. 지금은 기한을 정해놨다. 이때까지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면, 더는 상처받지 말고 연기를 관두자고. “원하는 바”가 대체 무엇인지는 모르겠는데, 당장은 굳이 안 찾으려고 한다. 목표를 세우기보다는 일단 오늘 하루를 잘 보내자는 마음이다. 그러고 나니, 오히려 열심히 살게 된다. 스케줄이 있든 없든, 경제적으로 여유롭든 아니든, 눈앞에 놓인 일에 충실하게 임하는 상태다. 이전보다 쉴 때도 잘 쉬고, 한결 여유가 생겼다.
이한주_ 나도 인정 욕구가 센 편이다. 잘 해내고 싶고, 노력한 만큼 인정받기를 원한다. 다만, 최근에는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좀 버리려고 한다. 어쩌면 잘 해내는 건, 가장 중요한 일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왜 연기를 계속하는지 생각해보면, 결국 재미라는 답이 나오더라. 아직은 재미있다. 연기가 재미있고, 영화 만드는 게 재미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타인으로부터 얻는 믿음과 사랑이 큰 동력이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어쨌든 남이 봐줘야 의미가 생기는 직업이지 않나. 누군가의 인정 없이 스스로 만족할 수 있다면, 혼자 연기 영상 찍고 만족하면 될 일이다. 결국 우리는 대중에게 평가받는 입장이기에, 인정 욕구를 완전히 벗어던지기에는 어렵다고 본다.
이태경_ 우리가 보통인 거 맞지? 역시 이 문제를 피해 갈 수는 없나 보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