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지와 미지
<소설가의 영화>
손시내 / Choice / 2022-04-23

<소설가의 영화>는 소설 쓰기를 멈춘 소설가의 시간과 그가 만든 영화로 이뤄져 있다. 홍상수의 근작들이 그런 것처럼, 이 영화의 생김새 역시 단출하다. 눈에 띄는 시공간의 뒤틀림이나 구조의 복잡함은 여기 없다. 영화는 인물과 대화만으로 구성된다. 하지만 한없이 투명해 보이는 이 간단한 형식에도 어김없이 틈이 있다. 뭔가 궁금해지고 어딘지 이상한 게 있다고 느끼게 된다는 뜻이다. 불일치, 어긋남, 변화, 자리바꿈, 우리가 뭐라고 부르든 간에, 세계의 낯선 모습을 감각하게 하는 일련의 원리는 홍상수 영화의 확연한 특징이다. <인트로덕션>(2020)과 <당신 얼굴 앞에서>(2021), <소설가의 영화>에 이르는 최근의 작품들에서 이는 간혹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묘하게, 또한 단일한 장면 안에서 은밀하게 작동해왔다. 그 중심에는 단연 배우가 있다. 이 작품들 속의 배우는 거기 있으면서 발화하는 것만으로도 예의 이상함을 영화에 도입하고, 때로는 그 이상함에 맞서며 영화를 지탱하는 존재다.

<당신 얼굴 앞에서>의 도입부, 미국에서 귀국해 잠시 동생 집에 머물기로 한 상옥(이혜영)에게 동생 정옥(조윤희)이 오랜만이라며 말을 건넨다. 상옥은 어제도 봤는데 뭐가 오랜만이냐고 대답한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이는 ‘잠이 덜 깨서 하는 농담’일 뿐이지만, 한편으론 시간의 축을 무너뜨리려는 시도와 그에 대항해 현재를 지켜내려는 제스처로 보이기도 한다. 상옥에게 병이 있고 그에게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지는 대목에 이르면 이러한 감상에 더욱 확신이 생긴다. 상옥은 소멸을 앞두고 현재를 온전히 살고자 하며, 자기 얼굴 앞의 세상을 제대로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영화가 구축하는 현재라는 시공간은 얼마나 연약한 것인가. 그건 단지 누군가의 말 한마디로도 비틀려버려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길을 잃고 고립되기 일쑤다. <당신 얼굴 앞에서>는 인물의 존재와 상황을 통해 이러한 영화의 근본적 곤란을 인식하고 마주해나가는 작품이다. <소설가의 영화>는 여기서 좀 더 나아간다.

<소설가의 영화>
<소설가의 영화>

준희(이혜영)는 한때 왕성하게 활동했으나, 어느 순간 소설 쓰는 게 어려워진 소설가다. 그녀는 어느 날 서울 근교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후배 세원(서영화)을 찾아간다. 오랜만에 재회한 두 사람은 반가워 보이지만, 어딘지 어색한 것 같기도 하다. 세원의 책방에서 잠시 머문 준희는 곧 혼자서 인근 타워에 방문해본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연히 영화감독 효진(권해효)과 그의 부인 양주(조윤희)를 만난다. 역시 조금 불편한 기운이 흐르지만, 이들은 곧 함께 강변 산책로에 나가보기로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연히 영화배우 길수(김민희)를 만난다. 더는 연기하지 않는 길수에게 효진이 아깝다고 말한 것을 두고 잠시 설전이 벌어진다. “자기들 인생이나 아끼며 살지.”하고 소리치는 준희. 이내 부부가 떠나고 공원엔 준희와 길수만 남는다. 여기에 길수 남편의 조카 경우(하성국)가 합류하는데, 그는 영화학교 학생이다. 준희는 이들과 함께 단편영화를 만들고 싶다. 오래 생각한 일이다. 한편, 준희와 길수는 우연히 세원, 시인 만수(기주봉), 책방 직원 현우(박미소)와 함께 술을 마시게 된다.

영화는 이처럼 낯선 도시에서 사람들을 잔뜩 만나는 준희의 행로를 따른다. 영화가 보여주는 하루는 준희의 말처럼 “아는 사람을 다 만난 이상한 날”이다. 그런데 준희가 어디서 왔는지는 정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그와 관련해 그나마 들을 수 있는 거라곤 이렇게 먼 곳까지 어떻게 왔냐며 놀라는 세원의 반응뿐이다. 준희는 얼마나 멀리서 왔을까. 그리고 그녀가 도착한 이곳은 과연 어떤 곳일까. 여기서부터 이미 뭔가 이상하다. 준희가 사람들을 만나서 하는 이야기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 그들이 오랜만에 만났기 때문에 대화엔 자연스레 과거가 섞인다. 그런데 후배, 영화감독, 시인은 각각 과거에 준희와 어떤 식으로든 마찰을 겪었던 것 같다. 한때 준희에게 정말 잘했던 후배는 어느 순간 연락을 끊은 채 자취를 감췄다. 영화감독은 준희의 소설과 관련된 영화 제작 건으로 신뢰를 잃은 지 오래다. 예전엔 준희와 잘 어울려 다녔던 시인은 어떤 사건 이후로 준희를 줄곧 불편하게 했다. 준희를 오랜만에 만난 이들은 마치 예전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거나, 과거를 엉성하게 변명하려 든다. 준희는 외형의 변화를 말하고 인간의 욕망을 지적하면서, 현재란 언제나 과거의 흔적 위에 세워지는 것임을 날카롭게 일깨운다. 그녀는 시간 축을 조정한다. 그리고 그런 준희만이 현재의 새로운 일, 수화를 배우고 영화를 만드는 생경한 일들을 통해 이 세계에 활력을 부여할 수 있다.

<소설가의 영화>

그렇다 해도 <소설가의 영화>는 여전히 영화의 허약함이라는 곤란에 직면해있고, 이는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형태로 도처에 기입돼있다. 말 사이의 어긋남, 기억의 불일치, 뜬금없는 존재의 출현이 군데군데 궁금증을 남긴다. 준희는 분명 소설을 안 쓴 지 오래 됐다고 했는데, 누군가는 얼마 전에 쓰신 책을 읽었다며 인사를 건넨다. 준희도 딱히 부인하지 않는다.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하지만, 카메라는 인물들의 진짜 과거를 결코 알 수 없고, 그들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도 없다. 그뿐인가. 공원의 계단을 오르는 인물은 흑백화면과 과도한 빛의 노출 때문에 마치 영화가 인식하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로 사라지는 것만 같다. 카메라는 그 광경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영화는 무능하다. 분식집에서 마주 앉아 식사하는 준희와 길수 너머, 창밖에 불현듯 모습을 드러내는 여자아이도 기묘하다. 아이는 갑자기 창문에 달라붙어 한창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길 가던 행인이 영화 현장에 기웃거리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이 장면은, 영화가 구축하는 단일한 세계를 어디까지 의심 없이 믿을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남긴다. 영화를 찍고 싶다던 준희는 과연 그에 대한 나름의 답을 가지고 있을까? 하나 분명한 건, 그녀에게는 배우가 있다는 사실이다.

‘소설가의 영화’는 초심자의 영화다. 준희가 길수와 경우에게 자기가 찍고 싶은 영화에 관해 설명하는 장면이 있다. 그것은 연출자가 배우를 진심으로 좋아하는지가 가장 우선시되는 영화다. 그런 이후에 배우를 가장 편한 상태에 두고, 그에게서 진짜로 발생하는 어떤 것을 카메라로 찍는 그런 영화다. 이는 물론 홍상수의 영화 만들기 방법을 떠올리게 하는 진술이다. 최근 홍상수의 필모그래피는 다양한 촬영과 편집 기술, 구조적 미로, 존재의 변주를 전부 걷어낸 후에도 영화가 성립할 수 있는가를 탐구해보는 작품들로 채워져 있다. 많은 것들이 벗겨진 그 자리에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배우가 있다. 마치 배우의 육체에 그 모든 효과가 응축된 것만 같다. 그런데 후반부에 마침내 등장하는 준희의 영화, 길수가 출연하는 ‘소설가의 영화’는 우리가 익히 보아온 홍상수의 영화와 다르다. 이 영화 속 영화는 최소한의 구성적 욕망도 없는 맑고 투명한 홈비디오처럼 보인다. 준희의 말처럼 진짜를 담아낸 것만 같다. 이것이 곧 영화의 궁극적 꿈이라는 뜻일까? 하지만 천연덕스럽게 이어지는 마지막 장면은 화면 속 존재를 맨눈으로 마주했다는 감흥마저 얼마간 의문에 부치게 만든다. 이제 즐겁고도 쓸쓸한 관객의 시간이 찾아온다.

<소설가의 영화>
<소설가의 영화>

 

소설가의 영화 The Novelist’s Film 제작 영화제작 전원사 감독·각본·촬영·편집·음악 홍상수 출연 이혜영, 김민희, 서영화, 권해효, 조윤희, 기주봉, 박미소, 하성국, 이은미 배급 영화제작 전원사, 콘텐츠판다 해외 배급 화인컷 제작연도 2022년 상영시간 92분 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개봉 2022년 4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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