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에 앉아 물안경을 쓰는 춘희(강진아)의 얼굴이 자못 비장하다. 양손에 니트릴 장갑까지 야무지게 끼고 나면, 작업 준비 완료. 두 눈을 부릅뜨고 쉼 없이 손을 움직이며, 춘희는 마늘을 깐다. 군더더기 없는 몸짓으로 커다란 자루 하나를 비운 다음엔, 사촌 오빠가 운영하는 식당으로 씩씩하게 걸어간다. 어깨에 짊어졌던 마늘을 내려놓자, 삼만 원이 돌아온다. 춘희는 그제야 살며시 웃어 보인다. 마늘을 까서 번 돈은 통장에 차곡차곡 모아두고 있다. 춘희는 조만간 다한증을 수술할 계획이다. 손과 발에서 줄기차게 흘러내리는 땀은 춘희를 오래도록 괴롭혀온 문제다. 부모님을 잃고 외삼촌 댁에 들어갔던 날에도 눈물은 한 방울조차 안 나왔지만, 손바닥은 금세 축축해졌다. 땀 흘리는 춘희를 누군가는 구박했고, 누군가는 놀려댔다. 사람들이 찝찝하게 바라볼까 두려워서 시선을 피하다 보니, 춘희는 자연스레 혼자가 됐다.
그런 춘희 앞에 춘희(박혜진)가 나타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세상에 혼자 남았다고 느낀 1998년 겨울, 그때 그 중학생 소녀의 모습으로.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 춘희와 달리, 어린 춘희는 태연하게 집안 곳곳을 돌아다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춘희들은 식탁에 마주 앉아 서로 물끄러미 쳐다본다. 20년이라는 긴 세월 탓인지, 생김만 놓고 보면 영 다른 사람이다. 하지만 어린 춘희가 끄집어놓는 기억은 여전히 춘희의 일부여서, 소녀와 어른은 종종 비슷한 표정을 짓는다. 고요하게 그늘진 옆얼굴에선 쓸쓸한 기운이 감돌지만, 신기하게도 춘희는 불쌍하지 않다. 조마조마하기보다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지켜보게 한다. 춘희는 춘희를 만나며 인생의 맛과 색을 비로소 깨우쳐 간다. 삶이란 마늘처럼 알싸하고, 때때로 울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얼얼하다. 하지만 껍질을 벗겨내면, 하얗고 뽀얀 알맹이가 나온다. 이제 춘희는 그것을 마음껏 칠해보려 한다. 이번에야말로 땀을 뻘뻘 흘리면서, 태어난 기쁨을 만끽할 작정이다.
봄에 어울리는 영화다. 강진아 배우는 시나리오 초고 단계부터 합류했다고 들었다. 영화가 자라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봤으니 감회가 새롭겠다.
강진아_ 초고는 훨씬 ‘다크’했다. 시나리오가 여러 번 변화하면서 감독님과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우리가 함께하는 첫 작업이니 서로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했다. 어떤 사람인지, 어떤 방식으로 작업하는지. 감독님이 날 만나러 매번 전주에서 서울로 왔다. 만남 자체야 반갑지만, 멀리까지 오가는 일은 번거롭지 않나. 그래도 힘들다는 기색 없이 항상 웃는 얼굴로 인사해주더라. 실은 우리 나름대로 위기도 꽤 겪었다. 춘희는 계속해서 과거의 경험과 기억을 제 안으로 불러들이는 인물이고, 그를 통해 지난 시간을 마주하는 과정이 나뿐만 아니라 감독님에게도 영향을 깊게 준 것 같다. 그때 나는 물러서기보다는 감독님과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촬영을 시작하고 나서는 감독, 배우, 스태프 모두 한 마음이 됐던 것 같다. 손에 꼽는 현장이라고 자부한다. 누구 하나 열심히 안 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각자 최선을 다했다.
애정이 느껴진다. 어떻게 “한마음”이 됐을까.
강진아_ 이런 말도 이제 좀 진부하지만, 우리 영화는 아주 적은 예산으로 출발했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지가 통했던 것 같다. 게다가 지역 영화라는 의미도 있어서 좋은 기운이 모였다.
말한 대로 <태어나길 잘했어>는 전주를 기반으로 한 지역 영화다. 오래된 목조가옥부터 식당, 놀이공원, 유적지 등 여러 장소를 정성스레 보여준다. 두 배우는 전주에서 어떤 인상을 받았나.
박혜진_ 영화제를 통해 전주에 처음 가봤고, 두 번째 방문했을 때는 촬영을 했다. 춘희가 사는 ‘철봉집’에 들어서자마자 ‘여기서 찍으면 재밌겠다!’ 했다. 옛스러운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동물원과 놀이공원도 좋았다. 방문객이 정말 드물어서 조용했는데, 덕분에 춘희와 잘 어울리는 공간이 된 것 같다. 미아보호소 팻말 아래에 혼자 앉아 김밥을 먹는 장면에서는 좀 먹먹해졌다.
강진아_ 정말 추워 보이지. 김밥도 차가울 것 같고.
박혜진_ 한벽터널도 떠오른다. 사실 난 가보지 못했지만, 영화에서 그곳이 참 예쁘게 나오더라. <스물다섯 스물하나>(tvN, 2022) 보면서 되게 아쉬웠다. 나도 가볼걸! 어쨌든 촬영을 마치고 나니, 전주가 친숙하게 느껴진다.
강진아_ 그러게, 우리가 거기서 같이 뭔가를 찍어도 좋았을 텐데. 이제 한벽터널은 너무 유명한 장소가 됐다. 최근에 잠시 들렀다가 인파에 깜짝 놀랐다. 밤인데도 관광객이 끊임없이 오더라. 나도 대체로 혜진 배우와 비슷하다. 그동안 전주는 영화제 때나 가봤지, 이렇게 진하게 머물러보기는 처음이었다. 촬영하면서 거의 2주 가량 전주에서 살았다. 시골도 대도시도 아닌, 적당한 규모의 도시가 주는 안정감이 좋더라. 동네에서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고,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자주 만난 전주 시민이라고 하면 우리 스태프들인데, 다들 너무 착하고 성실하다. 촬영 중에 주변 시민들로부터 배려도 많이 받았다. 덕분에 한 번도 언성을 높이거나 불쾌한 일 없이 촬영을 마쳤다. ‘철봉집’은 이제 영화에만 남은 공간이 돼서 좀 더 마음이 간다. 그 동네에 아파트가 들어선다더라. ‘철봉집’도 철거되고. 감독님도 소식 듣고 많이 아쉬워했다. 애초 감독님이 애정을 갖고 지켜봤던 공간들을 촬영지로 섭외했다고 들었다.


홍상표, 김금순, 임호준 등 함께한 배우들의 면면도 다채롭다. 특히 노숙자 황 씨 역을 맡은 황미영 배우와 나란히 등장할 때, 강진아 배우가 참 사랑스럽고 편안해보이더라. 영화에서 노숙자는 춘희에게 두려움을 자극하는 동시에, 동병상련을 느끼게 하는 존재 아닐까 싶은데.
강진아_ 처음 듣는 리뷰인데, 되게 기쁘다. 미영 언니와 <소공녀>(전고운, 2018)에 함께 출연하기는 했지만, 호흡을 맞춰 연기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미영 언니는 특유의 에너지를 내뿜는 사람이다. 사랑을 참 많이 받는 사람이구나 싶지. 촬영할 때도 언니를 응원하러 멀리서 찾아온 동료들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설레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내가 잘 맞출 수 있을까? 해낼 수 있을까?’ 하며 겁도 났다. 근데 언니가 워낙 따뜻한 사람인 데다, 일할 때도 무척 열정적이다. 터널 신을 찍던 날, 굉장히 추웠다. 감독님은 언니에게 신발을 신으라고 했는데, 언니가 괜찮다며 벗겠다고 하더라. 상대가 열심히 하면, 나도 더 의욕이 생기지 않나. 그렇게 서로 으쌰으쌰 하는 분위기였다. 주황과 함께하는 장면도 좋아한다. (홍)상표 오빠가 처음에는 말을 너무 심하게 더듬는 인물을 준비해왔다. 좀 과하지 않나 싶어서 얘기를 꺼냈다. 평소 오빠대로 해도 충분히 멋있을 것 같다고. 그러고 나서 얼마간 사이가 살짝 예민해졌는데, 오빠가 GV에서 그때 이야기를 하며 “우리 싸웠어요”라고 하더라. 너무 상처받았다! (웃음) 근데, 그런데도 나는 오빠를 주황으로 바라보며 사랑하려고 했다. 영화 볼 때도 느껴진다. ‘우리 꽤 몽글몽글하네’ 싶고. (웃음)
박혜진 배우의 캐스팅 과정은 어땠나.
박혜진_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컨테이너>(김세인, 2018)를 상영했을 당시, 최진영 감독님과 함께 GV를 했다. 감독님은 <연희동>(2018)으로 영화제에 오셨다. 그때 작품에서 본 내가 인상적이었는지 이번에 엄마를 통해 바로 연락을 주셨다. 감독님은 단편 <미명>(김대철, 2019)도 봤다고 하더라. 거기 나온 배우가 나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저 배우도 괜찮겠다’ 했다고. (웃음) 나중에 “<미명>에 나온 사람도 너였어?” 하며 무척 놀라셨다.
박혜진 배우에겐 첫 장편영화다. 단편 <컨테이너>를 시작으로, 매해 영화제에서 꾸준히 얼굴을 보여줬다. 영화 작업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박혜진_ 이전에도 단편영화를 많이 찍었는데, <컨테이너>로 처음 영화제에 갔다. 그때 경험을 많이 쌓은 것 같다. 연기를 시작했던 건 초등학교 2학년 때다. 엄마랑 대공원에 놀러 갔다가, 연기 학원 관계자를 만났다. 연기를 배워볼 생각 없냐고 하더라. 당시만 해도 취미로 여겼는데, 점점 연기가 좋아졌다. 성격과도 잘 맞는다. 낯을 가리는 편이지만, 친해지면 확 바뀐다. 옆에서 말릴 정도로 활발하다. (웃음)
촬영 전에 대본을 읽는 것만으로도 이미 둘만의 공감대가 생겼을 것 같다. 서로 첫인상은 어땠나.
강진아_ 혜진 배우 집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처음 만났다. 감독님과 셋이 보는 자리였는데, 실은 혜진 배우를 만나기 전에 감독님도 나도 좀 긴장했다. 워낙 나이 차가 많이 나다 보니, 우리가 되게 재미없고 고루한 사람으로 보일까 봐 걱정되더라.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이것저것 물어봤던 기억이 난다.
박혜진_ 학교 생활은 어떤지, 요즘 뭘 좋아하는지.
강진아_ 그런 질문을 했나? 재미없네. (웃음)
박혜진_ 나한테 기준을 맞춰준 덕분에, 이야기를 많이 했다. 진아 배우의 첫인상은 ‘영화스럽다’고 해야 하나. 옷도 춘희처럼 입고 왔다. 겨울이었고, 비 내리는 날이었다. 진아 배우가 손으로 뜬 수세미를 꺼내서 보여주는데, 정말 춘희 같더라.
강진아_ 내가 직접 만든 수세미는 아니고, 친구로부터 공수해 온 것이었다. <태어나길 잘했어>에 뜨개질 소품이 다양하게 등장하는데, 대부분 그 친구 작품이다.
온색과 꽃무늬를 활용한 레이어드 룩, 핸드메이드 소품이 눈에 띈다. 조금 촌스러운 듯하면서도 따뜻하고, 춘희의 살뜰한 성격도 잘 드러난다. 의상과 소품에 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눴을 텐데.
강진아_ 난 일단 영화 전체 톤이 너무 우울하지 않아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시나리오 읽고 감독님과 대화할 때, 춘희가 손재주 많은 사람이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감독님도 좋아했고, 아이디어를 나누다 춘희가 마늘을 깐다는 설정까지 자연스레 나왔다. 의상에 관해서도 의견을 냈다. 춘희가 좋아하는 색깔이 분명히 있을 테니, 그런 색깔로 채워보자고. 독립영화 현장에서는 배우에게 집에 있는 옷을 갖고 오라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그걸 되게 싫어한다. 어쨌든 영화에서는 하나의 인물로 존재하는 것 아닌가. 내가 평소 입는 대로 입는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오래 고민하다가 결국 촬영 직전에 지지연 의상 실장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소공녀> 의상을 담당했던 분이고, 내가 참 좋아하는 동료이자 친구다. 언니는 미리 말하지, 왜 이제야 연락했냐고 하더라. 내 딴에는 상황이 열악하다 보니, 도와달라는 말이 쉽게 안 나왔거든. 촬영 앞두고 언니랑 동묘시장을 샅샅이 뒤졌다. 언니가 가진 옷도 좀 받고. 현장까지 와줄 수는 없는 상황이라, 나머지는 내가 전주 구제시장을 다니며 직접 구했다. 촬영 당시, 언니와 매일 연락을 주고받았다. 내가 옷 사진을 찍어서 보내면, 언니가 디테일을 잡아주는 식이었다. 이 옷과 저 옷을 레이어드해서 입으라든지, 여기서는 끈을 묶으라든지. 춘희는 주로 붉은색 옷을 입는다. 영화에서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지만, 춘희는 부모님의 극단적 선택에서 살아남은 친구다. 언니가 말하길, 삶과 죽음을 모두 내포하는 색은 빨강일 거라고 하더라. 그렇게 춘희의 키 컬러가 정해졌다.
철학적 관점에서 접근했구나.
강진아_ 맞다, 실은 언니가 연출자였거든. (웃음) 영화를 잘 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춘희의 의상 색깔이 옅어진다. 빨강에서 핑크로, 그러다 엔딩에서는 노랑으로. 주변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서 춘희에게 따뜻한 변화가 생긴다는 걸 보여주려고 했다.
박혜진 배우가 영화에 처음 등장할 때 쓰고 나온 검정 베레모도 인상적이다. 교복 역시 예스럽다. 요즘엔 흔히 볼 수 없는 일본식 세라복을 입었는데.
강진아_ 베레모가 너무 잘 어울렸지. 그건 감독님 아이디어였다.
박혜진_ 세라복을 처음 입어본 탓에 어색했지만, 예뻐서 마음에 들더라. 특히 학교 장면에서 여러 명이 함께 입으니, 더 예뻐 보였다. 근데 내가 그때만 해도 오다리였거든. 처음 영화를 볼 때는 다리에 자꾸 눈이 갔다. 연기에도 아쉬움이 남지만, 다리 모양은 진짜 바꿔주고 싶다. (웃음)
수학여행을 못 간 춘희는 학교를 빠져나와 홀로 놀이공원으로 향한다. 노래방에서 태사자의 ‘도’ W.H.I.T.E.의 ‘네모의 꿈’ 등을 부를 때 깜짝 놀랐다. 배우 입장에서는 모두 낯선 노래였을 텐데 잘 소화하더라.
박혜진_ 감독님이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줬다. 익숙해지려고 노래를 반복해서 들었다. 후보곡이 꽤 많았는데, ‘도’는 불러야지 싶었다. 감독님이 태사자를 좋아한다. (웃음)
영화는 춘희의 옆모습을 자주 비추는데, 그때마다 두 배우가 닮은 데가 있구나 싶더라. 쓸쓸하면서도 쉽게 눈물을 터뜨릴 것 같지는 않은, 정적이면서도 단단한 분위기가 비슷하다.
강진아_ 감독님 덕분에 잘 만난 것 같다. 우리를 만나기 전에 전작을 눈여겨봤다고 하더라. 혜진 배우가 <컨테이너>였다면, 나는 <한강에게>(박근영, 2018)였다. 각각 다른 작품을 보고 캐스팅했지만, 슬픔이라는 공통된 결을 공유한다는 생각이 든다. 난 우리 팀에서 영화를 가장 많이 본 사람 중 한 명이다. 최근에도 집에서 몇 번 다시 봤다. 처음에는 ‘어린 춘희와 어른 춘희가 마주 볼 때, 관객이 동일 인물로 받아들일까?’ 했는데, 요즘에는 비슷한 느낌으로 다가갈 수 있겠다 싶더라.
박혜진_ 그동안 내가 출연했던 작품은 대부분 우울하다. 춘희 역시 슬픔을 지닌 인물이지만, 마음속 어딘가에는 단단한 부분이 있다고 봤다. 그런 면에서 우리도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강진아_ 내가 미안하지. 예전에 영화제 GV에서 “두 배우가 별로 안 닮은 것 같은데요?”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때 솔직하게 말했다. 열다섯 춘희가 이십 년간 고생하고 나면, 내 얼굴이 되지 않겠냐고. 객석에서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웃음)
어른들 일이니까 신경 쓰지 말라는 할머니(변중희)게 “그럼 뭐가 중요한 건데?”라고 반문할 때, 어린 춘희는 반항적이지 않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 동시에 꼭 알아야겠다는 단호함이 밴 말투에 가깝다. 주황에게 “말을 너무 잘하시는 것 같아요”라든지 사촌 오빠(임호준)에게 “저 안 불쌍해요”라고 말하는 어른 춘희 역시 마찬가지다. 비아냥대거나 공격하려는 의도 전혀 없이, 그저 바른 것은 바르다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확실히 일러줄 뿐이다. 어느 때보다 서로 한 사람을 그려냈다는 확신을 주는 순간이었다.
강진아_ 그게 캐스팅의 힘 아닐까. 연기를 맞춘 적은 없다. 말투나 표정을 서로 따라 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혜진 배우는 나에게 아주 낯선 기운의 사람은 아니다. 그저 내 판타지일 수도 있는데, 혜진 배우는 또래에 비해서도 순수성을 지닌 편인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혜진 배우처럼 착하다는 뜻은 아니고. (웃음) 뭐랄까, 어떻게 표현할지 예상이 좀 가능하다고 해야 하나. 익숙한 느낌이 들었고, 함께 연기할 때도 그 느낌을 타고 갔던 것 같다. 한편, 질문에 나온 대사들은 나 역시 연기하면서 신경을 많이 썼다. 예민할 수 있는 부분이기에 어떻게 조절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다 보니 말에도 조심스러운 태도가 섞이지 않았나 싶다. 게다가 춘희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기도 하고.
박혜진_ 본래 대사로 감정을 엄청나게 꺼내 놓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때도 ‘화를 내는 게 맞나?’ 의문이 들었다. 화를 낼 수야 있겠지만, 춘희라면 그러지 않을 것 같더라. 주변 상황이나 춘희의 주눅 든 모습을 떠올릴 때, 그 정도 톤으로 가는 것이 알맞겠다 싶었다.
강진아_ 영화를 볼수록, 혜진 배우에게 감탄한다. 보통 배우들은 ‘연기자가 돼야지, 연기를 해야지’라고 생각하면, 애써 뭔가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거치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는 현장에서 그냥 인물로 오롯이 존재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 그게 가장 깨끗하고 순수한 순간이고, 흉내가 아닌 연기라고 본다. 혜진 배우에게서는 그런 모습을 발견할 때가 많다. 예를 들면, 내가 어린 춘희에게 “왜 너 혼자 살아남아서 지금까지 이렇게 만들어. 그때 같이 죽었어야지”라고 말하는 장면. 그때 어린 춘희의 표정을 보면, 정말 마음이 아리다.
최진영 감독이 인터뷰에서 “(춘희가) 사촌오빠에게 그동안의 설움을 토해내는 장면은 지금도 미안한 촬영이다. 원래 테이크를 많이 안 가는 편인데 그땐 14번 정도 갔다.”고 말한 적이 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법한 장면인데, 이날 촬영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나.
강진아_ 나는 테이크를 얼마나 가든, 우리가 원하는 오케이 컷만 나온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쨌든 장편을 찍는 부담이 어마어마하지 않나. 우리 영화는 텀블벅까지 했고. 감독님은 더 그랬을 테지만, 나도 매 순간 기도하는 마음이었다.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전주에 가서 그 장면에 관한 얘기를 나눴다. PD님은 “춘희가 사촌 오빠 가스라이팅 하는 거 아니야?” 했다더라. (웃음) 감독님 의도는 분명했다. 춘희는 어릴 적부터 사촌 오빠를 비롯한 다른 가족에게 끊임없이 이야기를 듣는 입장에 놓여 왔다. 평생 듣고 듣다가 드디어 제 속내를 털어놓기로 한 거다. 감독님 말을 그대로 옮기면 “한다대기를 하는 장면”이다. 한풀이라는 뜻이지. 누구나 친한 이에게 약간 더 치대고 못되게 굴 때가 있지 않나. 춘희에게는 사촌 오빠가 그나마 제일 가까운 사람이고.


영화를 보고 나면, ‘춘희는 춘희를 어떻게 지켜냈을까?’ 하는 감탄이 남는다. 분노보다 체념에 익숙하고, 누구를 원망하기보다는 자신을 책망하는 사람이다. 동시에 “정말 잘못한 사람은 따로 있”다고 단호히 말하는가 하면, 좁고 어둔 다락을 손수 꾸밀 줄 아는 사람이기도 하다.
강진아_ 난 춘희를 어떤 면에서는 피해자라고 본다. 부모님의 선택으로 인해 원치 않은 결과를 받아들여야만 했으니까. 근데 우리는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알지 않나. 춘희 또한 누군가로부터 강요받는 전형성에서 빗겨 난 인물이길 바랐다. 실은 내 주변에도 춘희와 비슷한 일을 겪은 이가 있다.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예전부터 그런 이야기를 작품에서 해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에, <태어나길 잘했어>를 만났을 때 운명처럼 느껴졌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아주 빠르게 기회가 찾아왔구나 싶었다. 앞서 말했던 친구의 경우, 나보다 훨씬 어른스럽다. 어엿한 직장에 아니고, 벌써 집도 마련했다. 주변에서는 그 친구한테 참 잘 컸다고 말하는데, 나는 한편으로는 겁이 났다. 쉽게 건드릴 수 없는 부분이 있거든. 워낙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 적다 보니, 사람들은 그 친구를 마냥 착하게만 보고.
촬영하면서도 친구를 자주 생각했겠다.
강진아_ 그 친구는 힘든 기억을 전부 세세하게 털어놓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과거에만 빠져 있지도 않다. 그냥 살아가더라. 바로 그런 점이 어른스럽게 느껴졌고, 연기할 때도 중요한 기준이 됐다. 춘희라는 인물을 지나치게 동정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한 사람을 구성하는 데 있어, 어릴 적 환경이 꼭 지배적 요인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다. 아이에게는 나름의 생존 능력과 회복력이 있다고 하더라. 나는 그 말을 신뢰하고, 춘희 역시 자기만의 힘을 갖춘 인물이라고 봤다. 마주하기 어려운 과거가 이따금 떠오르지만, 괴로운 순간을 맞닥뜨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간다는 것. 어찌 보면 참 평범한 일이다. 무척이나 많은 사람이 그렇게 삶을 지속하지 않나. 감독님께도 이 영화가 누군가를 애써 위로하려 들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전했다. 엔딩 내레이션처럼 우리는 각자 다른 색깔을 지녔을 뿐이다. 그런 면에서 연기는 조심스럽게 접근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내가 ‘얘는 이렇게 할 거야’라고 선택한 결과이지 않나. 쉽게 판단하고 싶지 않기에, 직전까지도 ‘맞나? 아닌가?’ 고민한다. 하지만 판단이라는 과정 자체를 피할 수는 없다. 그래선지 작품을 개봉할 때는 기쁘지만, 한편으로는 죄책감도 느낀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수많은 길이 있다는 걸 아니까. 박혜진 배우는 무엇에 집중하며 연기했나.
박혜진_ 어린 춘희는 외삼촌에게 타박을 듣고, 사촌 유라에게는 머리채가 잡히기도 한다. 힘들게 자랐겠구나 싶었고, 연기할 때도 그런 부분에 신경을 썼다. 진아 배우가 말했던 친구와 춘희는 비슷한 면이 있다. 어릴 적에 크게 상처받은 인물이고, 감정 표현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다. 그러다 보니, 늘 착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춘희가 할머니한테 투정하는 장면을 찍으면서 고민했다. 화를 내야 하나? 화를 내면, 자연스러워 보일까? 나 역시 연기하기가 조심스러운 순간을 더러 마주했던 것 같다.
강진아_ 오늘 혜진 배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계속 감탄한다. 우리가 연기를 주제로 대화를 나눠본 적은 없거든.
대화를 많이 했을 거라 짐작했는데, 오히려 말을 좀 아낀 모양이다.
강진아_ 일부러 피한 면도 있다. 첫 만남 때 꼰대로 비칠까 봐 걱정했다는 마음과 이어지는 얘기다. 일전에 무척 좋아했던 선배님과 함께 일한 적이 있는데, 내 연기에 어떤 가이드를 정해주시더라. 그때 갑자기 탁 막히는 기분이 들면서, 선배님이 순간 꼰대처럼 보였다. (웃음) 나이와 경력을 떠나서 어쨌든 혜진과 나는 배우라는 동등한 위치에서 만난 것 아닌가. 각자 느끼는 대로 표현하고, 자유롭게 움직여야 한다고 본다. 연기에 관해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감독 아닐까 싶다.
어린 춘희는 수수깡으로 집을 쌓아 올리고, 어른 춘희는 모두가 떠난 후에도 홀로 남아 집을 지킨다. 배우 각자 생각하는 집의 의미는 무엇인가. 어떤 집에 살고 싶은지, 집다운 집이란 어떤 공간이라고 여기는지.
박혜진_ 춘희는 그 집에서 따뜻함을 느끼지는 못했을 것 같다. 부모님도 안 계시고, 삼촌 가족들에게는 늘 꾸지람을 듣고. 아마 혼자서 외로운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까. 이제 자기 편이라고는 할머니밖에 없으니, ‘할머니마저 떠나면 어떡하지?’라는 걱정도 내심 컸을 듯하다. 그런 생각하면, 춘희에게 집은 슬픔이겠구나 싶다. 내가 생각하는 집은 평범하다. 문을 열면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이는, 불 켜진 공간.
강진아_ 집 때문에 많이 울고 웃었다. 여전히 어떤 환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누구에게나 집은 가장 마음 편안하게 두 다리를 뻗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하지 않나. 춘희가 사는 다락방은 참 좁다. 세로 너비가 우리 키에 딱 맞는 정도이고, 몸을 옆으로 틀면 자세가 불편해진다. 나는 물리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안정을 누릴 만한 집에서 살고 싶다. 규모도 좀 널찍하고, 혜진 배우가 말한 대로 따뜻함을 지닌 공간이면 좋겠다. 다만, 요즘 나는 혼자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쌓이면서 함께 사는 이유를 점차 알아가는 중이긴 한데, 현재로서는 나만의 고요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더 자주 한다. 그래서 환상이라고 했다. 현실은 그렇지 않거든. (웃음)
인간 만사가 벌어지는 곳이지. (웃음) 한편, <태어나길 잘했어>는 춘희가 춘희를 부르고, 찾고, 껴안는 순간들로 요약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두 배우도 이따금 “진아야, 혜진아” 하며 자신에게 말을 거나?
강진아_ 돌이켜보면, 주로 다그치려고 이름을 부르는 것 같다. 뭔가를 잘했거나 좋은 일이 생겼을 때가 아니라, “강진아, 정신 차려!” 하며 단호하게 말할 때. 내 이름을 달콤하게 부르면서 스스로 껴안아 주는 일은 거의 없다. 뭐, 애써 그래본 적이야 있다. 양팔을 교차해서 어깨를 두드리는 ‘나비 포옹’이 한창 유행했을 때, 몇 번 따라 해봤다. 진짜 위로가 될까 싶었는데, 기분이 좀 나아지기는 하더라. (웃음) 실은 이번 작품을 찍는 동안, 정신 똑바로 차리자는 생각을 참 많이 했다. 자칫 삐끗하는 바람에, 영 이상한 데로 가버릴까 봐 불안했거든. 나 자신과 거듭 대화하는 시간이었고, 생각해보니 춘희 역시 그랬겠구나 싶다. ‘어느새 묘하게 닮아버렸네’ 싶어서 재미있더라.
박혜진_ 지금 고등학교 3학년이다. 연극영화과 진학을 위해 입시를 준비하고 있다. 연기 공부도 해야 하고, 살도 열심히 빼야 한다. 뭔가 먹고 싶어지면, 거울 보면서 말한다. “박혜진, 너 살 빼야 해.” (웃음)
사랑에도 혁명에도 실패한 오빠가 술에 취해 어린 춘희에게 묻는다. “너는 요새 뭐가 좋냐. 뭐가 너를 행복하게 하냐?” 그때 춘희는 이렇다 할 대꾸를 하지 않고 넘어가는데, 두 배우라면 뭐라고 답하겠나.
박혜진_ 최근에 오빠가 외국으로 유학 갔다. 오빠와 그리 친하지도 않은데, 막상 오빠가 떠난 후에 빈방을 보니 슬프더라. 요즘 밤마다 가족들이 모여서 영상통화를 한다. 엄마, 아빠, 오빠, 나. 넷이서 얼굴 보며 대화할 때 행복하다. 입시 준비하면서 미래를 상상하는 것도 나름 즐겁다. ‘11월에는 합격 소식이 들리겠지?’ 생각하면, 기운이 난다.
입시라고 하니 무척 고단하게 들리는데, 그래도 여전히 연기가 재미있나.
박혜진_ 배우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부터 연기를 했으니, 나름 내공이 쌓였을 거라 자부했다. 근데 막상 입시를 시작하고 보니,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구나 싶더라. 초반에는 자존감이 떨어지기도 했지만, 그만큼 많이 배우는 것 같다.
강진아 배우는 어떤가. 요새 잘 지내나.
강진아_ 얼마 전까지 무기력한 시간이 꽤 길게 이어졌다. 한동안 쉬지 않고 일하다 보니, 번아웃 같은 상태가 됐다. 일부러 휴식기를 가졌는데, 그게 무기력으로 돌아오더라. 자연스레 일은 줄어들고, 나는 에너지를 못 쓰니까. 그러다 최근 작업을 시작하면서 한결 편안해졌다. 공장이 다시 돌아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계속해서 고민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연기를 내 삶의 일부가 아닌 전부라고 여기면, 굉장히 허무해지지 않겠나. 머리로는 ‘일상에서 소소한 행복을 얻어야 해. 그렇게 나를 채워놓아야 배우 강진아를 유지할 수 있어.’라고 생각하지만, 실천으로 옮기긴 쉽지 않더라. 노력하는 중이다. 가장 최근의 즐거움이라면, 게임 포켓몬고. 운동 다녀오는 길에 포켓몬을 발견하면, 같이 사진 찍으면서 논다. (웃음) 한편으로는 무기력한 시간을 거치면서, 내게 역할이 주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일인지 새삼 깨닫기도 했다. 작업에 충실히 임하면서, 이런저런 오디션에도 지원하고 있다.
어른 춘희는 과거의 나를 만나고, 어린 춘희는 미래의 나를 만난다. 문득 강진아 배우는 어떤 중학생이었는지, 박혜진 배우는 어떤 어른이 되길 바라는지 궁금해진다.
박혜진_ 10년 후라고 상상하면, 커리어에 굉장히 집중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난 연기를 잘하고 싶고, 많은 작품에 출연하고 싶다. <오징어 게임>(넷플릭스, 2021)의 정호연 배우를 보면서 참 부러웠다. 저 나이에 미국 시상식까지 가서 여우주연상을 받다니. 그런 행보가 부럽고, 나도 저렇게 다양한 장르를 경험해보고 싶다. <헝거게임> 시리즈를 재밌게 봤다. SF와 액션에 관심이 많고, 한편으로는 <아무도 모른다>(고레에다 히로카즈, 2004) 같은 작품도 좋아한다. 10년, 20년 후에는 감독님들에게 ‘잘하는 배우’로 인식되고 싶다.
연기를 향한 욕심이 엄청나구나.
박혜진_ 학원에서 친구들이 연기하는 걸 매일같이 본다. 의기소침해질 때도 있지만, 언젠가부터 경쟁심이 생기더라. 선생님께 점점 연기력이 늘고 있다는 칭찬을 들으면, ‘더 잘해야지!’ 한다. <태어나길 잘했어>를 보면서도 내 연기가 부족하게 느껴졌다. 다음 영화에서는 좀 더 잘하고 싶다.
강진아 배우는 어떻게 청소년기를 보냈나.
강진아_ 아주 건강한 중학생이었다. 낙엽만 굴러가도 웃는다고 하지 않나. 그 말이 떠올랐을 정도로, 작은 일에도 깔깔거리며 활기차게 지냈다.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무척 내성적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선택적 함구증 아니었나 싶다. 학교에 가면, 일절 말을 안 했거든. 담임 선생님이 엄마에게 알린 적도 있다. “우리 반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무 말도 안 하는 애가 있는데, 그게 진아예요.” 엄마는 그런 내가 귀여웠는지 웃었는데, 나는 그때 속으로 되게 미안했다. 내가 활발하고 발표도 잘하는 딸이면, 엄마가 좀 더 좋아했을까 싶고. 그러다 중학교 들어가면서 확 달라졌다. 인생을 바꿔보겠다는 결심으로, 객기를 부렸다. 모든 일에 손을 들고 나섰다. “청소할 사람?” 하면 “저요!”, “반장 할 사람?” 하면 “저요!” (웃음) 내 안에 닫혀 있던 부분이 한꺼번에 열리는 시기였다. 나도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되면서 즐거움을 만끽했다. 잘 먹고, 잘 자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다. 근데 어느 날, 길을 걷다가 전혀 모르는 애한테 욕을 들었다. 너무 충격이었지. 말 그대로 욕이었거든.


심지어 아는 사람도 아니고.
강진아_ 나중에 듣고 보니, 이유가 없진 않더라. 자기 친구가 어디에 후보로 나왔는데, 내가 출마하면서 일종의 라이벌 구도가 형성됐던 거다. 어쨌든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장면이다. 그날 집에 가서 언니를 붙잡고 엉엉 울면서 말했다. “세상에 날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 줄 몰랐어.” 조용하게 지낼 때는 아예 남들 눈에 띄지 않으니 그런 일이 없었다. 그러다 내가 나를 표현하고 에너지를 발산하니, 상황이 달라졌다. 누군가는 날 좋아해 줬지만,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이도 생겨났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부터 본래 내 모습으로, 내성적이고 겁도 많은 성격으로 차츰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때 연기가 마음에 들어왔다. 일단 참 멋져 보였고, 두 명의 나를 섞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타고난 나와 만들어낸 나.
엔딩 내레이션이 떠오른다. 춘희가 자신을 긍정하며 “태어나길 잘했어”라는 결론으로 나아가는 순간이다. 녹음하며 어땠나. 혹시 그때 떠올랐던 장면이나 사람이 있나.
강진아_ 개봉 준비하며 내레이션을 새로 녹음했다. 감독님이 내게 대본을 직접 써보면 좋겠다고 하더라. 자유롭게 쓰되, ‘쓸모’와 ‘이유’라는 단어를 포함하라는 미션을 받았다. 어린 춘희에게 편지를 쓰자고 마음먹었고, 자연스레 영화에서 우리가 나눈 시간을 떠올렸다. 어른이 된 춘희가 어릴 적 춘희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무엇일지 생각하는 과정이었다.
완연한 봄이다. 짧은 계절을 어떻게 보낼 계획인가. 박혜진 배우는 입시 준비까지 병행하려면 바쁘겠다.
강진아_ 즐거운 마음으로 개봉을 기다리는 중이다. 관객과 만나는 순간이 기대된다. 말한 대로 혜진 배우가 고생이지. 내가 아무리 바쁘다고 한들, 입시 준비하는 사람만 하겠나.
박혜진_ 그래도 스트레스는 딱히 없다. 재밌게 연기 연습하는 봄이 되지 않을까.
강진아_ ‘라떼는~’이 될까 봐 계속 참았는데, 실은 나도 입시 준비할 때 행복했다. (웃음) 물론 진학에 압박을 느꼈지만, 그보다는 좋아하는 연기에 집중할 수 있다는 사실이 더 크게 다가왔다. 게다가 학원에서는 아무도 어색해하지 않고 자신을 표현하는 일에 몰두하지 않나. 거기서 오는 자유로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