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만 그래봐라
<재춘언니> 임재춘
글 손시내 사진 이영진 / Interview / 2022-03-31

좀처럼 속을 알기 어려운 무표정의 남자가 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그의 수줍음이 보인다. 일부러 눈을 내리깔고 입에 힘을 주고 있다. 부끄러운 걸 들키기 싫어서다. 그는 평생 기타 만드는 노동자로 살았으며, 해고된 뒤 무려 4464일 간 거리에서 복직 투쟁을 한 임재춘이다. 긴 싸움의 시작은 2007년, 기타 회사 콜트·콜텍의 위장폐업과 정리해고였다. 노동자들은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거리로 나섰고, 수출되는 기타를 따라 원정 투쟁도 다녔다. 기타노동자 밴드 ‘콜밴’을 만들었으며, 문화예술인들과 연극 <구일만 햄릿> <법 앞에서>를 만들었다. 노숙 농성과 단식 투쟁도 감행했다. 그렇게 13년이 흐르는 동안 임재춘과 그의 동료들 곁에는 많은 카메라가 다녀갔다. 어떤 것은 영화가 됐고, 어떤 것은 뉴스가 됐다. 이수정 감독의 카메라는 그중에서 그들 곁을 가장 오래 지킨 애틋한 친구다. 그의 카메라엔 투쟁의 절박함뿐만 아니라 투쟁 현장에서 밥 먹고 잠자는 사람들의 사랑스러움이 듬뿍 담겼다. “앞에 나서길 좋아하지 않던” 임재춘의 모습이 특히 많이 찍힌 걸 뒤늦게 깨닫고, 감독은 촬영된 분량으로 <재춘언니>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투쟁의 정당성을 힘주어 알리지 않는다. 다만 투쟁하는 인간의 기쁨과 슬픔을 그러모으려 노력할 뿐인데, 그렇게 그려진 해고자의 시간이 더없이 묵직하다. 영화 속 재춘이 자꾸만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는 것처럼 느껴져 그를 만나고 싶어졌다. 동행을 자청한 이수정 감독이 옆자리에 슬며시 끼어 앉아 행간을 촘촘히 채워줬다.

 

 

최근에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인 김진숙 지도위원께서 오랜 복직 투쟁의 성과를 거두셨죠. 소식 듣고 어떠셨는지 궁금해요.

임재춘_ 우리도 희망버스 타고 부산에 갔었잖아요. 그때 기억도 났고, 결국 이런 날이 오는구나 싶었죠. 싸우면 이기는구나. 일하는 사람의 자존심, 억울한 지난 세월에 관해서 생각했어요.

 

복잡한 심경이셨군요. 13년 동안의 투쟁을 다시금 돌아보는 시간도 됐을 것 같습니다.

임재춘_ 투쟁하면서 자본과 노동자의 관계에 대해 배웠어요. 처음 해고됐을 땐 사장이 아니라 나라를 원망했어요. 사장이 노동조합을 너무 싫어했는데, 그렇다고 이렇게 막 해고할 수 있다는 게 말이 되나 싶었죠. 이게 나라가 맞나 했어요.

이수정_ 노동조합에 어떻게 합류하게 됐는지 그 얘기를 해봐요. 사실 폐업하기 1년 전에 노동조합을 만들었거든요.

 

그럼 2006년이죠?

임재춘_ 원래 회사에 노조가 없었어요. 우리는 그냥 시키는 대로 일만 했지. 새벽에 출근해서 밤까지 일했어요. 휴가비도 없었고, 문제가 많아서 우리도 노동조합을 만들어보자고 했죠. 그리고 1년 만에 회사가 위장폐업을 한 거예요. 그런데 세상이 우리 일을 너무 모르더라고. 우리가 시골에만 있다 보니까 그래요.

이수정_ 그날이 월요일이었대요. 평소처럼 출근 버스 타고 출근했는데 회사 문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회사 앞에서 천막 치고 농성을 시작했는데, 오가는 사람이 없으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죠. 그렇게 서울, 인천 쪽으로 올라온 거예요. 우리 문제를 알려보자고 하면서요. 2009년에 이인근 지회장이 고공농성을 했고, 회사 점거 투쟁을 하는 등 열심히 싸웠어요.

임재춘_ 이렇게 오래 투쟁하게 될 거라고 상상도 못 했어요. 금방 끝날 줄 알았지. 원래 사장은 대전 콜텍 공장을 좋아했어요. 인천 콜트 공장이랑 다르게 노조가 없었으니까.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니까 좋았겠죠. 그나저나 우리는 기타가 그렇게 비싼 줄 꿈에도 몰랐어, 사람보다 비쌌어요.

이수정_ 노동자들은 오히려 기타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다는 거죠. 조금만 지각해도 바로 해고됐대요. 그런데도 아무 말 못 한 거예요. 공장에 여성 노동자들도 많았는데 생리휴가 없는 건 고사하고, 남성 관리자들의 성희롱도 빈번했다고 해요. 그런데 노동조합이 생기고 나서 제일 처음 한 게 바로 남녀임금 동일화를 쟁취한 거예요. 승리의 경험이죠. 엄청난 기쁨이고요.

임재춘_ 그걸로 투쟁한 사업장이 많았지만, 최초로 이긴 게 우리였어요. 우리 사례에는 늘 최초 아니면 최고가 들어가요. 우리가 또 최장기 투쟁 사업장이잖아요. 나중에는 10년 넘게 싸우고 있는 게 부끄럽기도 하더라고요. 사장이랑 대화하고 합의하면 끝나는 건데, 그걸 못 하고 있으니. 하여튼 일하면서 부당한 대우 받은 건 얘기하다 보면 한이 없어요. 다친 사람도 막 해고했으니까.

 

2019년에 잠정합의안 도출로 13년 복직 투쟁에 마침표를 찍고 대전 집으로 돌아가셨어요. 영화는 공사 현장의 재춘 님을 비추며 마무리되는데,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임재춘_ 지금은 경비 일하고 있어요. 영화에 나온 건 학교 건물을 리모델링하는 현장이에요. 그런데 나이 들고 힘이 달리니까 오래 못하죠. 그래서 경비 일 시작한 지 6개월 됐어요. 오늘은 낮에 쉬는 날이에요. 밤새 근무하고 왔어요.

<재춘언니>
<재춘언니>

영화 개봉하는데 소감은 어떠세요?

임재춘_ 감회가 새롭죠. 영화제에서 보고 1년 넘었으니까. 그런데 비관적인 게 있어요. 우리는 그 시골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일만 하다가 해고되고 나서 사회 경험을 새로 배웠잖아요. 투쟁 끝나고 다시 돌아가면 거기도 우리처럼 많이 변해있을 줄 알았는데, 안 그렇더라고요. 젊은 사람들 처지가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어요.

 

기타만 30년을 만들었다고 하셨어요. 이건 동료들과도 또 다른 이력인 것 같아요.

이수정_ 다른 분들은 보통 IMF 이후에 콜텍에 입사했어요. 김경봉 씨는 그전에 다니던 회사가 문을 닫아서 일자리를 옮겼다고 하더라고요. 대부분의 노동자가 그랬을 때죠. 그런데 임재춘 씨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계속 기타 공장에서만 일했어요. 원래는 다른 곳에 있다가 콜텍에 입사한 거죠?

임재춘_ 1988년 즈음에 부모님을 모셔야 해서 고향으로 내려갔어요. 내가 장남이거든요. 기타 공장에 다시 안 들어가려고 했는데, 고향인 공주 근처 계룡에 기타 공장이 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거길 다니게 됐어요.

 

기타를 연구하러 미국 애틀랜타에도 6개월 정도 연수를 다녀오셨다고 들었어요.

임재춘_ 그 시기에 연수를 다녀온 거예요. 거기서 악기를 제대로 배웠어요. 통기타는 한국이 최고라고 하더라고요. 사계절이 뚜렷해서 그렇대요. 그전까지만 해도 뭔가 연구하기보다는 그냥 시키는 대로 만들었는데, 그때부터는 내가 기타를 연구하기 시작했죠.

이수정_ 임재춘 씨는 완성 라인에서 기타의 최종 완성을 책임지는 장인이었어요. 회사에서 중국과 인도네시아에 설립한 공장에 기술도 전수해줬죠. 결국 회사가 노동자들 뒤통수를 쳤지만요.

임재춘_ 사람들은 우리가 기타 노동자니까 기타를 잘 칠 거라고 생각하는데, 보통은 기타 소리도 못 들어보고 일해요. 난 마지막 과정을 책임지니까 그나마 소리라도 들었죠. 그런데 신기한 일도 있어요. 똑같은 재료, 똑같은 공정으로 기타 10대를 만들면 딱 한 대 돌연변이가 나와요. 독특한 소리가 나는 돌연변이 기타죠. 그게 유명 가수들한테 가요. 다른 것보다 비싸고요. 재밌죠?

 

그나저나 두 분은 얼마 만에 보시는 거예요?

이수정_ 이란희 감독 <휴가> 개봉할 때 VIP 시사회에서 봤어요. 식사도 같이했고요. 벌써 작년 가을이네요.

 

<재춘언니> 개봉 소식 전하면서 따로 나눈 이야기는 없으세요?

이수정_ 오히려 찍을 때 얘기를 많이 했죠. 멋있게 잘 좀 만들어보라고. (웃음) 임재춘 씨는 영화제 기간도 다 알고 있어요. “이번에 전주영화제에는 안 내? 부산은 언제 가?” 하면서 마치 매니저처럼 재촉하더라고요. “이렇게 찍어봐라, 저렇게 해봐라.” 그런 말도 많이 했고.

임재춘_ 연극을 처음 할 때 엄청나게 고생했는데, 하고 나니까 자신감이 생겼거든요. 영화도 비슷하겠다고 생각한 거지. 얼른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영화가 나오면 기자들도 관심을 가질 것 같았고.

이수정_ 근데 영화가 그렇게 금방 만들어지는 게 아니니까. 찍고 있으면 옆에서 많이들 물어보셨어요. 이거 언제 나오느냐고.

임재춘 ©이영진

감독님은 언제까지로 생각하셨어요?

이수정_ 언제 끝날지 불투명한 투쟁 과정에서 영화가 도움이 되길 바랐어요. 그래서 2014년쯤에 나오게 하고 싶었는데, 그때는 제작비 마련 등 여건이 어려웠죠.

 

극장에서 본인 얼굴을 보는 건 어떤 느낌인가요?

임재춘_ 신기하죠. 저기 우리 얼굴이 나오네, 하는 거예요. 이렇게 작은 카메라로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것도 신기하고.

 

<재춘언니>는 촬영 기간이 길어서 세월의 변화도 느끼셨을 것 같습니다.

임재춘_ 저렇게 젊을 때 시작해서 우리가 투쟁을 참 오래 했구나, 참 질리도록 했다 싶죠. 짠해요. 아무것도 모르던 사람들이잖아요. 옛날에는 고공 농성하는 거 보면서 왜 올라가나 싶었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안 하면 아무것도 못 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걸 알아 온 세월이 다 느껴지죠. 눈물 나고요.

이수정_ 어떤 장면이 제일 눈물 났어요?

임재춘_ 마지막에 2009년. 잊어버리고 있었던 시간이에요.

이수정_ 나도 그 장면 편집할 때 눈물 났어요. 영화 전체는 투쟁이 전개되는 순서대로 쭉 편집했는데, 거기서 갑자기 10년 전으로 돌아가잖아요. 그게 대전 공장에서 막 투쟁 시작했던 모습이에요. 사람들이 모여 있고, 뒤에는 2009년 1월 달력이 붙어있죠. 이인근 지회장이 “올해는 꼭 승리해서 공장으로 돌아갑시다. 승리합시다.” 하고 외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얼굴이 너무 앳돼요. 그 해 끝나리라고 생각했겠죠, 모두.

임재춘_ 그때만 해도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마지막에 네 명밖에 안 남았죠. 그동안 가족을 너무 힘들게 했어요.

 

감독님은 영화 완성하고 나서 재춘 님께 소감 물어보셨어요?

이수정_ 딱히 안 물어봤어요. 임재춘 씨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영화를 봤고, 바로 GV를 같이 했거든요. “언제 저런 걸 찍었대?” 그런 얘기 하고 그랬죠.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다 아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웃음)

임재춘_ 마지막에 일하는 장면이 감초예요. (웃음) 그건 안 쓸 줄 알았어.

 

이수정 감독의 카메라가 처음 눈에 띄었던 때를 기억하세요?

임재춘_ 감독님이 좀 늦게 합류했어요. <기타(其他/Guitar) 이야기>(김성균, 2009)하고 <꿈의 공장>(김성균, 2010) 찍은 다음이었잖아. 카메라도 작아서, 저게 영화가 되나 그 생각만 했어요.

이수정_ 혼자 들고 다녀야 하니까, 저는 경량 카메라를 썼거든요. 그전에 김성균 감독은 큰 캠코더를 썼을 테니까, 내 카메라 보고서 속으로 이게 영화가 되나 생각했다는 거잖아. 이런 얘기는 진짜 재밌다. (웃음)

임재춘_ 카메라가 작아서 안 찍히는 줄 알았다니까. (웃음)

이수정_ 내 입장에서도 카메라가 크면 부담스러웠을 거예요. 그냥 자연스럽게 옆에 가서 얘기했고, 그렇게 현장의 모습을 담게 된 거죠. 제가 처음부터 임재춘 씨를 주인공으로 생각한 건 아닌데, 나중에 보니까 임재춘 씨를 많이 찍었더라고요. 매력적이고 웃음을 자아내는 캐릭터였어요. 처음엔 콜트·콜텍 사람들 여러 명을 주인공으로 생각했는데, 편집 과정에서 발상의 전환을 하게 됐어요.

<재춘언니>
<재춘언니>

농성장에 카메라가 꽤 많았을 텐데, 카메라가 어렵진 않으셨어요?

임재춘_ 처음엔 두려웠죠. 겁나서 도망 다녔어요. 우리 말고 지회장이랑 인터뷰하라고 했어요. (웃음)

이수정_ 저도 처음에 임재춘 씨랑 인터뷰하고 싶다니까, “나 같이 말도 못 하는 사람이랑 무슨 인터뷰냐.” 하더라고요.

 

<재춘언니>는 감독님의 선하고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는 영화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재춘 님이 더 하고 싶은 말은 없었는지 궁금해지기도 했어요.

임재춘_ 그런 거 없어요. 내가 원래 말을 못 하기도 하고요. 묻는 말에만 대답하는 거예요.

이수정_ 한국의 중년 남자들이 특히 더 그렇잖아요. 그래서 임재춘 씨 속에 있는 말을 끄집어내려고 애썼어요. 나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그랬고요. 그냥 묻어놓고 싶어 했던 것 같아요.

 

그래도 감독님의 카메라는 조금 달랐던 것 같은데요? 이 카메라 앞에서는 그래도 속에 있는 말을 많이 하신 것 같거든요.

임재춘_ 처음에 낯가리다가 점점 편해진 거지 뭐.

이수정_ 내가 어떤 사람으로 느껴졌을까 궁금하네.

임재춘_ 다 까먹었지. 그러고 보니까 부산에서 우리 찍던 게 생각나요. 한진중공업 갔을 때.

이수정_ 그때 벌써 내 카메라를 봤어? 2차 희망버스 때거든요. 잠깐 찍은 건데, 그때 이미 봤다고?

임재춘_ 우리는 다 보여.

이수정_ 그걸 기억하네. (웃음)

 

두 분은 언제부터 좀 친해진 것 같으세요? (웃음)

임재춘_ <시 읽는 시간> 찍었을 무렵부터 좀 친해졌죠. 여의도에 있을 때.

이수정_ 2015년 여의도 천막 시절이에요. 그때 제가 <시 읽는 시간> 만들면서 임재춘을 따로 찍었는데, 남자 카메라맨을 대동했거든요. (웃음) 그게 왕민철 감독(<동물, 원>)이에요. 카메라도 큰 걸 가져갔어요. 그게 기억에 많이 남았구나. 난 그전부터 이미 친했는데. (웃음)

 

지금 재춘 님께서 머쓱해 하시는 것 같은데요?

임재춘_ 그래요, 뭐. 하여튼 그때 읽은 시가 ‘자유’라는 시예요. 그게 내 처지랑 똑같았어요.

이수정_ 2013년에 천막에서 ‘시 읽어주는 남자’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어요. 그때 김남주 시인의 ‘자유’를 읽는 걸 제가 봤거든요. 그걸 다시 읽어달라고 부탁한 거죠. 저도 워낙 좋아하는 시였고, 임재춘에게 자유라는 게 뭘까 궁금했거든요. 농성일기에도 자유에 관한 내용이 있고요.

임재춘 ©이영진

콜트·콜텍 불매운동이 한창이던 2013년, 촛불문화제 연출을 담당한 최문선 씨가 ‘시 읽어주는 남자, 임재춘’이라는 코너를 만들어 재춘 님을 계속 무대에 오르게 했습니다. 이 코너는 곧 ‘임재춘의 농성일기’로 바뀌고요. 당시 최문선 씨는 “유난히 말수가 적고 자기표현이 서툴렀던” 재춘 님께 계속 관심이 갔고 위로가 되고 싶었다고 했어요. 처음 해보는 투쟁 현장에서 실수도 잦았고 속앓이도 좀 하셨던 것 같아요.

임재춘_ 처음엔 자존심 때문에 꼰대처럼 굴었어요. 여기 아니어도 나는 충분히 먹고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래서 한 7년간은 앞에 나서질 않은 거예요. 그러다 이제는 좀 나가야 할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나보고 글을 써보라고 하더라고. 한두 번 쓰고 나서 못쓴다고 했어요. 그런데 뭐 할 게 없으니까, 계속 써지더라고요. 그러다 보니까 책이 나왔어요.

 

그전에는 글을 써본 적이 없다고 하셨어요. 글 쓰는 게 재춘 님께 어떤 의미였나요?

임재춘_ 재판이 끝나가니까 뭔가 하긴 해야 하는 시기였어요. 급박했으니까 쓴 거죠. 투쟁 사업장에도 사람들이 관심을 두는 시기라는 게 있잖아요. 계속 뉴스가 나오고, 페이스북에 올릴 게 있어야 했어요. 뭐라도 하자는 마음이 제일 컸어요.

 

감정을 정리하는 계기도 됐을까요?

임재춘_ 아무래도 그렇죠. 우리가 되게 많은 걸 했는데도 결과가 없었잖아요. 되는 게 없었어요. 그때부터 사회에 대한 반항심이 더 커졌어요. 우리가 왜 물대포를 맞아야 하고, 왜 조사받으러 불려 다녀야 하는지 모르겠더라고요. 되게 착잡했을 때죠.

 

영화 속 모습만 접해서 그런지, 짜증을 내고 화내는 얼굴을 거의 못 봤습니다. 분출할 때가 있으세요?

임재춘_ 남들이 힘들어할까 봐 안 하는 스타일이죠. 나는 그냥 몰래 술 마시고 풀어버리는 사람이에요. 원래 오래된 투쟁 사업장들은 다 속병, 화병이 있어요. 우리 지회장은 표현력이 좋으니까 말로 푸는 편이었고, 난 술 먹고 삭였죠.

 

지금도 글을 쓰세요?

임재춘_ 집에서 혼자 써요. 생활일기 쓰는 거죠.

이수정_ 그게 습관이 됐구나. 인터넷에서 좋은 글귀 보면 막 보내주고 그러더라고요. (웃음)

 

촛불문화제 얘기로 잠깐 돌아가 보겠습니다. 무대 오르기 전에 다리를 덜덜 떨 정도로 긴장하곤 했지만, 올라가서는 아주 진지하게 낭독해서 관객의 집중도가 높았다고요. 낭독하고, 연기하고, 연주하면서 무대에 오르는 경험을 투쟁 과정에서 계속하셨어요. 재춘 님께 어떤 의미가 됐을까요?

임재춘_ ‘콜밴’ 하면서 무대에 처음 섰어요. 그때는 한 곡밖에 준비 안 했고, 앵콜은 생각도 안 해봤는데 앵콜이 나온 거예요. 땀을 질질 흘렸어요. 조명은 마구 쏴대지, 사람은 잔뜩 있지, 너무 떨려서 어쩔 줄을 몰랐죠.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다 그랬더라고. 게다가 나는 카혼을 치잖아요. 내가 틀리면 다 틀리는 거예요. 그렇게 중요한지도 몰랐어요. 그냥 기타 보기 싫어서 카혼을 잡은 건데. (웃음) 고생 많이 했어요. 그러고는 혼자서 맨날 연습했어요. 남들 잘 때도 연습하고. 연극을 할 때 오필리어를 맡은 것도 똑같아요. 대사 제일 적은 거 달라고 한 거예요.

<재춘언니>
<재춘언니>

익숙해진 뒤에는요? 무대 위에서 느끼는 후련함이나 자유로움 같은 건 없었어요?

임재춘_ 반항심? 반항심을 느꼈어요.

 

반항심?

임재춘_ 너희들이 암만 우리를 조여봐라, 우리는 이렇게 멋있게 놀 수 있다, 그런 마음이었으니까. 반항심이지.

이수정_ 우리는 이렇게 재밌게 저항한다, 우리는 살아있다, 이런 거네요?

임재춘_ 그런데 우리는 좀 특수한 경우죠.

이수정_ 온갖 연대 단위가 몰려와서 범사회적 투쟁을 전개했으니까요. 그러니까 회사 입장에서는 무서웠겠죠.

 

말씀하셨다시피 연극 <구일만 햄릿>에서 오필리어와 레어티스를 연기하셨어요. <내가 처한 연극>(김성균, 2015)이라는 영화에 이 과정이 담겨있기도 한데요. 첫 공연 올리고 다 같이 일주일 넘게 앓아누웠다고요.

임재춘_ 원래 일주일 하기로 했던 게 9일로 연장된 거였어요. 그래서 제목이 ‘구일만 햄릿’이에요. 근데 그러다 보니까 다들 ‘멘붕’이 온 거예요. 못할 줄 알았어요. 처음 이틀까지는 실수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삼 일째 되니까 여유가 생겨요. 객석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무대 공포증도 점점 사라졌어요. 그렇게 끝내고 나니까 자부심이 생겼죠. 근데 다 아파 죽으려고 했어요. 또 하자는 얘기가 있었는데 전부 반대했어요. 그런데 결국 앵콜 공연을 하게 됐죠. (웃음)

이수정_ 이분들이 거의 햄릿의 원 대본 그대로 한 거예요. 그 어려운 대사를 다 외워서 한 거죠. 정말 놀랐어요. 제가 영문과 출신이라 그런지 더 반갑기도 했죠. 카프카의 책으로 한 연극 <법 앞에서>의 공연도 꼭 쓰고 싶었던 장면이고요. 건물 옥상에서 퍼포먼스 그룹 ‘진동젤리’의 연출가 죠스와 대화하는 장면에서는 임재춘 씨가 딸 얘기를 많이 하잖아요. 그게 이 사람을 보여줄 수 있는 장면이라고 생각해서 넣었어요.

 

천막에서 요리 담당이셨어요. 떠밀려서 하는 느낌은 아니고, 자부심 있는 주방장의 모습이던데요.

임재춘_ 어렸을 때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내가 장남이고 동생들 키워야 하니까 밥을 하기 시작했지. 근데 맨날 같은 걸 먹을 순 없잖아요.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봤는데, 해보니까 또 다 됐어요. 그러다 군대 가서는 취사병을 했어요.

 

자신 있는 메뉴는요?

임재춘_ 한식은 거의 다 잘해요. 중국집에서 알바도 했어요. 그때 남들 하는 걸 또 유심히 봐서 써먹고 그랬어요.

이수정_ 농성하면서 ‘희망식당’을 했거든요. 노동자들 생계를 위해서, 점심 식사를 판매한 거죠.

임재춘_ 맨 처음에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이 만들었고, 우리도 했고, 나중엔 유성기업 해고노동자들도 했죠. 우리가 제일 오래 했어요.

<재춘언니>
<재춘언니>

영화에 담긴 투쟁 기간에 여러 활동을 하셨어요. 본인에 대해 새롭게 알아가는 시간이기도 했나요?

임재춘_ 그보다는 내가 변한 것 같아요. 남들한테 다 맡겨두고 살면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야겠다, 내가 변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어떤 꿈을 꾸시나요?

임재춘_ 여느 아버지들이랑 같을 텐데, 딸들이 잘사는 걸 보는 거죠. 사춘기 때 애들을 너무 힘들게 해서 마음이 아파요. 우리는 고생했지만, 조카들이나 딸들은 좀 더 평등하고 좋은 세상에서 살아야죠.

 

감독님은 <재춘언니> 개봉이 어떤 계기가 되길 바라세요?

이수정_ 콜트·콜텍의 13년 투쟁을 통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을 것 같아요. 대통령이 몇 번씩 바뀌어도 노동자들의 현실은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걸 본 거잖아요. 우리가 노동에 대해 더 많이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분들은 제조업, 정규직이었지만 지금은 훨씬 다양한 형태의 노동이 있어요. 그런데 처지는 다 같잖아요. 우리는 다 노동자고 또 같이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이죠. 그러니까 이 영화를 남들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로 받아들였으면 해요. 해고 노동자뿐만 아니라, 주변의 어려운 이들에게 곁을 내어주는 사람이 돼주어야겠다는 생각도 하고요.

임재춘_ 공동체가 점점 없어지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너무 자기한테 갇혀있어요. 각박해지는 거죠. 너무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재춘언니>가 어떤 영화냐고 물으면 어떻게 소개하고 싶으세요?

임재춘_ 이건 노동 영화이면서도, 앞을 보고 살게 하는 재밌는 영화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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