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전, 63명의 비전향 장기수가 북으로 돌아갔다. 김동원은 그들을 배웅하는 인파 속에 카메라를 들고 울먹이고 있었다. 그로부터 8년 전, 그는 한 신부의 부탁으로 남파공작원 출신의 두 비전향 장기수를 만나러 갔고, 우연히 그들을 카메라에 담게 됐다. <송환>(2003)의 시작이다. <2차 송환>은 오랫동안 소문이 무성했던 <송환>의 속편. <송환>이 ‘송환’으로 매듭지어진 것과 달리, ‘2차 송환’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다. 2000년 6·15 공동선언에 따라 진행된 1차 송환은 ‘비전향’ 장기수가 아닌 이들을 배제한 채 이뤄졌다. 거기엔 <송환>의 ‘세상에서 가장 순박한 얼굴’ 김영식 선생도 포함돼있다. 그는 감옥에서 혹독한 고문을 이기지 못해 전향 신청을 했고, 출감한 이후엔 ‘강제전향 무효 선언’을 했다. 그와 함께 2차 송환을 요구한 이들은 현재까지 총 46명, 하지만 그중 대부분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2차 송환>은 ‘2차 송환 운동’의 기록이자, 어둠 속에서 빛나는 작은 희망에 관한 이야기다. 이 영화는 삐걱댄다. 정권이 바뀌고 남북 관계가 변할 때마다 2차 송환의 가능성이 널뛰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진동 사이에 엉긴 인간의 고뇌와 삶의 생생함이 여지없이 아름답다. <2차 송환>은 올해 초 온라인으로 먼저 공개됐고, 몇몇 영화제 상영과 올가을 개봉을 앞두고 있다. 본격적인 극장 상영에 앞서, 최근 홍대로 자리를 옮긴 인디스페이스에서 3월 24일 ‘집들이 상영회’를 통해 반가운 얼굴들과 미리 만날 계획이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것저것 묻고 싶어 김동원 감독에게 만남을 청했다.
지난 겨울에 ‘푸른영상’ 30주년 기념 온라인 상영회 <1991-2021, 아직 푸른>이 열렸습니다. 14편의 영화를 상영하면서 온라인으로 GV도 진행했고요. 어떠셨어요?
생각보다 알찼어요. 극장 빌려서 하려면 번거로웠을 텐데, 오히려 우리끼리 아주 편하고 재밌게 진행했죠. 다시 보니까 예전과는 또 다른 눈으로 보게 된 작품도 있었고 10년, 20년 만에 본 작품도 있고요. 예전에 극장에서 상영한 것들 말고, 일종의 저주받은 걸작들이 있거든요. (웃음) 완성도를 떠나서 기록 자체가 참 소중했구나, 정말 만들길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감독님은 요새 어떻게 지내세요?
근황이랄 것도 없어요. 30주년 행사 끝나고는 거의 집에 있고, 가끔 푸른영상 사무실에 나가요. 1, 2월에 쓴 교통비가 5천 원이 채 안 돼요. (웃음)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재직하다가 2014년에 안식년을 맞이하셨습니다. 그때 꽤 강하게 <송환>의 속편을 마무리할 의지를 보이셨어요. 속편 작업과 관련해 북한에 가는 계획을 세웠지만, 갈 수 없는 경우를 대비해서 이런저런 아이디어도 있었던 거로 알아요. 당시 영화를 마무리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사실 몇 번이나 포기했어요. 2006년에 포기했고, 2014년에 포기했고, 2018년에도 뭐가 잘 안됐죠. 2013년에 다시 작업을 시작한 건 외국 프로덕션에서 우리에게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에요. 지원하겠다는 얘기에 힘을 받아서 하여튼 끝내보자고 했죠. 2004~5년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고, 에필로그로 2013년 현재를 담는 한 시간 정도의 소품을 만들어보려고 했어요. 만약 북한에 가게 되면 또 달라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고요. 그런데 2013년 말 정도 되니까 북한에는 못 가겠구나 싶었고, 2014년 들어서 영화를 마무리하려고 보니 아무래도 자신이 없었어요. 마무리를 못 하겠어, 작품이 될 것 같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또 포기한 거죠. 나 말고 외국 사람이 북한 가는 거로 영화 만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했고요.
<송환>의 경우 2000년에 성사된 송환이라는 사건이 영화 안팎으로 매듭 역할을 했습니다. 오랜 촬영 끝에 편집을 시작하고, 영화를 마무리하게 됐으니까요. 속편 소식은 앞서 말한 2014년에 이어 2018년에 다시 찾아볼 수 있게 되는데요, 영화엔 담기지 않았지만 그즈음 김영식 선생께서 이산가족 상봉 대상자였다가 최종 명단에서 빠진 일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이것을 <2차 송환> 완성의 한 계기라고 볼 수 있을까요?
그때 내가 남미 여행을 6개월 정도 다녀왔어요. 평창올림픽도 열리고 남북관계에 있어 중요한 시기였는데, 난 일단 여행을 다녀온 거죠. 당시 김영식 선생이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했어요. 1차에는 됐는데, 2차에 선정이 안 됐어요. 굉장히 낙담하셨죠. 그걸 보고 어떻게든 영화를 완성해야겠다 싶었어요. 내가 정말 무심했다, 그런 생각도 들고. 김영식 선생 몸도 안 좋았어요. 선생이 굉장히 늙어 보이더라고.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에, 어떻게든 끝내고 말리라 하면서 다시 시작한 거죠.
그때 설정한 방향은요?
결정하고 나서도 어떻게 끝내야 할지 자신이 없었어요. 막연했죠. 굉장히 절망적인 이야기가 될 것 같았어요. 밝음과 어두움의 조화가 좀 있어야 하는데, 도무지 밝은 구석을 찾기 어려웠어요. 나는 되도록 밝게 끝내고 싶었고, 희망적인 엔딩을 원했는데 그게 안 보이니까 끝까지 고생했죠. 결국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도 움직임을 쉬지 않는 김영식 선생, 선생이 가진 그런 막무가내의 희망, 누구도 꺾을 수 없는 희망에 포커스를 맞춰서 내가 인위적으로 엔딩을 짓는 수밖에 없었어요. 억지로 강조한 거죠. 아주 주관적인 내레이션을 쓰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해야 했어요. 다른 방법이 없었던 거지.
결국 2022년에 이 영화를 만나게 됐습니다. <송환> 때는 편집을 자꾸 다시 하셔서 버전이 여러 개 있었다고 들었는데, 혹시 지금도 <2차 송환> 편집을 계속하고 계세요?
아니에요. 이제 안 할 거예요. (웃음) 처음엔 안학섭 선생과 김영식 선생을 투톱으로 하려고 했어요. 그러다가 안학섭 선생을 찍는 친구가 나타났거든요. 그 친구 믿고 안학섭 선생을 별로 안 찍었는데, 그 친구가 중간에 사라져버렸어요. 결국 안학섭 선생 비중이 많이 줄었죠.
김영식 선생은 <송환> 포스터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당시 포스터 디자인에 관여하셨거나, 관련해서 기억하는 바가 있으세요?
포스터는 배급사인 인디스토리에서 알아서 만들었어요. 좋더라고요. 김영식 선생이 <송환>에서는 조연이었죠. 주인공은 조창손 선생이고요. 그런데 내가 김영식 선생 얼굴을 되게 좋아했어요. 푸근하면서도 처절한 느낌이 있는데, 포스터에 그게 잘 드러난 것 같아서 아주 좋다고 했던 기억이 나네요.


<송환>에서 처음 등장할 땐 김영식 선생이 굉장히 어두운 얼굴을 하고 계세요. 나중에 송환 기념식 할 때는 대상자가 아니라서 객석에 앉아계시는데, 그 모습이 무척 쓸쓸해 보이기도 하고요. 당시 감독님과 김영식 선생의 관계는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친해지기까지 꽤 오래 걸렸을 것 같은데요.
그렇죠. 김영식 선생이 전주에 계셨으니까. 전주에는 아주 가끔 갔어요. 1993년에 한 번 가고 7년 동안 못 갔어요. 그러니까 그때는 좀 서먹서먹했죠. 그러다 선생이 서울에 올라오면서 본격적으로 친해졌어요. 그것도 우리 동네, 봉천동으로 오셨거든. (웃음)
<송환> GV를 두 분이 같이 다니셨다면서요.
2001년에 서울 올라오셨고, 개봉을 2004년에 했죠. 그 사이에는 저도 편집하느라 바빠서 한 달에 한 번 정도나 찾아뵌 것 같아. 그때는 우리 조연출이 가서 컴퓨터도 가르쳐드리고 촬영도 하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개봉하고 나서 둘이 유람하면서 얘기를 많이 했어요. 아, 그리고 2004년 이후로 정동진독립영화제를 매년 같이 갔어요. 안학섭 선생하고 다 같이 가서 며칠씩 있다 오고 그러면서 많이 친해졌지. 김영식 선생은 금강산에 있다가 내려온 분이니까, 가면 훈련 받은 얘기도 하고 하여튼 옛날 얘기를 많이 하셨어요.
김영식 선생은 정말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속에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게 보이는데, 그걸 숨겨두지 않죠. 자기감정에 굉장히 솔직하세요. 그걸 표현하느라 글쓰기 공부나 간이 피아노 연주도 하시는 것 같아요. 또 주변 사람들한테 계속 마음을 쓰는 분이기도 하고요.
내가 운동권 출신이 아니라서 그런지, <송환>에서도 김석형 선생보다 조창손 선생한테 더 마음이 갔어요. 김석형 선생은 엘리트 출신이고 훨씬 더 똑똑하죠. 누구나 그 분 얘기를 듣고 싶어 할 거예요. 조창손 선생은 그냥 옆에 가만히 있는 분이었고, 뒤에서 묵묵히 궂은일을 했어요. 애초에 내가 남북정세나 북한에 대한 관심보다 사람에 대한 관심이 더 컸기 때문에 조창손 선생이 주인공이 된 거겠죠. 김영식 선생에게 집중한 이유도 같아요. <송환>에서 이보다 더 순박한 얼굴을 본 적이 없다고 내레이션하잖아요. 정말 그래요. 못난 건 못난 대로 그대로 다 내놓는 분인데, 그게 예뻐 보이죠. 글 쓰는 건 약간 의무적으로 하는데, 피아노는 정말 취미생활이에요. 20년을 그렇게 쳤어요. 그런데 하나도 안 늘었어. (웃음)
김영식 선생의 친필 메모를 중간중간 삽입하셨어요. 후반부에는, 젊었을 때 영화감독을 꿈꿨다는 박희성 선생이 캠코더로 찍은 영상도 넣으셨고요. 단순히 촬영만 하는 게 아니라 이분들의 흔적을 영화에 남기고 싶다는 마음 같은 게 보였어요.
박희성 선생은 꽃을 정말 열심히 가꾸고 찍는 분이에요. 캠코더 손에 들고 제일 처음 찍으신 게 꽃이에요. 꽃을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지죠. 그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내가 학교에 있을 때 우리 학생 중 하나가 <달과 닻>(방아란, 2018)이라고 박희성 선생 다큐를 찍었어요. 그 영화의 한 장면을 가져온 거예요. 박희성 선생을 더 많이 찍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해 아쉬워요. 김영식 선생 메모는 아주 많은데, 2020년에 『화목하게 삽시다』라는 책을 내면서 노트 정리하는 걸 제가 도와드렸어요. 그때 내용을 다 봤는데 재밌었어요. 친필을 영화에 넣으면 좋겠다 싶어서 골라 넣은 거죠.
안학섭 선생은 <송환> 후반부에 등장하는 결혼식 장면의 주인공이시죠. <2차 송환>에도 그 장면이 들어갔고요. 남한에서 비전향 장기수의 삶이라든지, 송환 자체에 대해 생각해볼 여지를 만들어주는 장면입니다. 안학섭 선생은 기본적으로 고집 세고 딱딱한 분이라는 인상이 있는데, 영화 후반부에 감독님이랑 다 같이 바닷가 놀러 가는 장면에서 느껴지는 편안한 분위기가 무척 인상적이에요. “내가 보기에 (김동원 감독이) 빨갱이는 아닌데”라고 하시면서 이런 영화를 어떻게 이렇게 오래 찍고 있냐고 물어보시기도 하잖아요.
그전에도 안학섭 선생이 나를 좀 얕보는 듯한 눈치를 보이신 적이 있어요. (웃음) 사실 나도 선생님들 앞에서 말을 막 하고요. 나는 처음부터 안학섭 선생이 불편하지 않았어요. <송환>에 보면 복역 기간이 1년 적다고 화환을 좀 작은 걸 받았다는 얘기가 있잖아요. 그때 기분 어떠셨냐고 막 물어보기도 했어요. 안학섭 선생은 그런 질문을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는 분이었고요. 오히려 김영식 선생보다 안학섭 선생과 더 시간을 많이 보낸 것 같아요. 부산에서 잠깐 사셨는데, 부산국제영화제 갈 때마다 찾아가서 하룻밤 같이 보내고 그랬어요. 선생이 집을 뺏겨 고생하실 땐 의논도 많이 했고요. 제 카메라를 한 번도 거부한 적 없으시기도 하고.
영화에는 감독님의 개인사도 들어가 있습니다. 부모님 두 분 다 평안북도 강계 출신이시라고요. 그뿐만 아니라 아버님은 형제들과 켈로부대에 소속되어 일종의 대북 공작 활동을 하셨고, 어머님은 북에 자식을 두고 내려오셨다는 놀라운 이야기도 들려주셨죠. <송환> 편집하던 시기에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거로 알고 있는데, 당시엔 영화에 그 이야기는 넣지 않으셨잖아요.
처음에 자막으로만 넣었죠. 돌아가신 아버지와 북으로 송환된 장기수 선생님들께 이 영화를 바친다고.
그렇지만 가족사나 아버님 출신에 대해서는 언급을 전혀 안 하셨어요. 이번에는 좀 깊은 이야기까지 다 넣으셔서, 그 차이가 궁금했습니다.
아버지 돌아가신 게 2002년인데, <송환> 편집 거의 막바지 무렵이었어요. 영화에 끼어 들어갈 여지가 없었던 거죠. 사실 집안 얘길 별로 하고 싶지도 않았고요. 그런데 한편으로 내가 왜 장기수 문제에 관심을 두고 촬영할 수밖에 없었는지 스스로 물어보면, 아마 그런 사실들이 관련이 있는 것 같긴 해요. 아버지가 켈로부대 출신이라는 건 <송환> 촬영 시작한 다음에 알긴 했지만. 말하자면 북파 간첩이었죠, 우리 아버지는. 북에 간 적 없는 간첩. 하여튼 지금 시점에서 간첩이라고 하면 정말 이상하게 생각하는데, 실제로 그렇게 먼 얘기가 아니에요.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 일 없이 오갈 수 있던 땅에 하루아침에 못 가게 된 거잖아요. 김영식 선생이 “같은 나라 사람들끼리 간첩이 뭐야!” 라고도 하시잖아.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남북문제가 그리 먼일이 아니라고 봐요. 어느 날 생각해보니까, 해방이라는 게 내가 태어나기 10년 전 일이었더라고. 그 생각을 하니까 남북이 이어져 있다는 게 피부로 느껴졌어요. 아버지 이야기를 하면 그런 식으로 연결점이 생기지 않을까 했죠. 엄마 얘기는 따로 한번 하고 싶었어요. 할 얘기가 정말 많은 분이에요. 월남해서 의대에 다녔는데, 그 학교의 좌우대립이 굉장히 심했다고 해요. 뭐 그런 얘기들을 하고 싶었는데 계속 못 했어요. 어머니는 2010년부터 편찮으셨고, 2016년에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북에 내 누이가 있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충격이 정말 컸죠. 삼촌들은 다 알고 계셨더라고. 하여튼 분단의 아픔은 누구에게나 다 있어요. 뒤져보면 다 연결돼있거든요. 김영식 선생만의 상황이 아니라는 거예요. 내 부모님 이야기는 그걸 좀 넓히는 장치였다고 생각해요. 나부터 넓혀보자 하는 마음이었어요.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고향을 궁금해하셨어요?
어렸을 때는 오히려 몰랐어요. 그런데 그런 게 있었어요. 예를 들어 우리 할머니 생신이다, 그러면 강계 출신 사람들이 다 집에 와서 북에서 먹던 음식을 하는 거예요. 옥수수묵이라고, 메밀이랑 옥수수를 맷돌로 갈아서 묵을 만들어요. 뜨끈뜨끈한 채로 큰 접시에 담아서 아주 맛있게 드셨죠. 근데 난 그게 맛이 없었어요. (웃음)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 맛을 알겠더라고. 그래서 ‘강계’ 하면 그 옥수수묵이 먼저 생각나요. 나이 먹으면 먹을수록 그때 더 자세히 들어둘 걸 싶죠. 옛날엔 흘려들었으니까.
강계에 가게 되면 뭘 하고 싶으세요?
인풍루 앞에서 뱃놀이 한번 하고 싶어요. 돛단배 같은 거 띄워놓고. (웃음)
노무현 정권에서 추진하던 2차 송환이 무산되던 2005년 즈음까지 공은주 감독이 <송환> 속편의 연출을 맡고 있었습니다. 당시 촬영한 분량을 보면, “(애틋한 가족을 두고) 왜 오셨어요?”, “(2차 송환이 성사되면) 북에 가실 거예요?” 하는 질문을 되게 살갑게 또 아무렇지 않게 던지세요. 감독님은 카메라 앞에서 질문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시죠?
난 그렇게 못 했을 것 같아요. 물어볼 수 있는 관계이지만, 좀 머쓱했겠죠. 오글거리고. (웃음) 내가 확실히 그런 부드러운 결에는 약해요. 대신 상황의 일부가 되는 걸 선호하죠. 꼭 인터뷰이와 인터뷰어 관계로 대화하는 게 아니라 그 안에 내가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면 실패할 가능성이 커지지만 의외로 재밌는 장면이 나와요. 난 그런 인터뷰가 좋더라고. 선생들이랑 미국 대선 결과 볼 때나 후원회원들이랑 이야기 나눌 때가 그랬어요.
남북관계의 변화에 따라서 장기수 선생들은 짐을 다 싸둘 정도로 기대하기도 하고, 또 그 짐을 전부 풀어둘 정도로 실망하기도 하세요. 어쩌면 이제는 그렇게 희망과 절망을 오가는 일 정도만 남아있는 것 같아 서글프기도 하죠. 이런 반복만이 쭉 이어지는 상황에서 편집 방향을 찾는 게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분량이 너무 많아서 골라내는 것부터 문제였어요. 지금은 연대기 순인데, 다른 방향으로 가야 하나 고민도 했고요. 공은주 감독이 찍은 분량에는 내가 안 묻어있기 때문에 또 어려웠죠. 결국 전체적인 스토리를 내 시점으로 엮어야 하니까, 거기 나를 개입시켜야 하잖아요. 부모님 이야기가 들어간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는 거죠. 좀 아슬아슬한 것들, 이해될 듯 말 듯 한 지점이 더 있었으면 했는데 별로 없었어요. 그나마 2차 송환의 기미가 보이면서 김영식 선생이 북에 갈까 말까 고민하는 부분에 떨림이 있죠. 그런 게 더 있길 바랐어요.
<2차 송환>은 굴곡이나 논쟁보다, 삶은 계속된다는 명제와 더 가까운 작품이긴 하죠. 김영식 선생과 안학섭 선생 외에 다른 장기수 선생들의 모습을 되도록 많이 보여주고 싶으신 것 같았어요. 그중엔 남한 출신 장기수나 빨치산 선생도 꽤 많으세요. 여성분들도 계시고요.
<잊혀진 여전사>(김진열, 2005)에 여성 빨치산, 여성 장기수들 얘기가 나와요. <송환> 때 제일 많이 받은 질문 중 하나가 왜 여성들이 없느냐는 거였어요. 당시 여성들은 다 전향했거든요. 감옥 안에서 출산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버틸 수가 없었대요. 그중엔 되게 중요하고 재밌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 분들을 놓쳐서 아쉬운 마음이 큰데, 하여튼 이번에 그분들 얼굴이라도 넣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한편 무척 독특한 인물로 마영주 선생이 있습니다. 심지어 남파된 것도 자기 의지가 아니었다고 말씀하신 분인데, 한국 근현대사 문제에서 무척 중요한 인물군이라고 생각해요. 특정한 관념이나 이미지를 벗어나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걸 상기하게 되니까요. 아마 이 이야기를 더 하고 싶으셨을 거라고 짐작해봤습니다.
자기 의지로 남파된 게 아니었다, 그게 논쟁지점이죠. 그걸 조금 더 키워볼까 싶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런 얘기를 안 했어요. 그 이야기를 들려줄 다른 분을 못 찾은 거예요. 하지만 그게 바로 떨림이 있는 부분이거든요. 나 자신도 의문을 품게 되고, 관객들도 생각해볼 수 있을 만한 지점인데 놓친 거죠. 전향에 대해서도 더 많은 얘길 하고 싶었어요. 전향 공작이라든지, 전향한 다음의 심정 같은 거요. 그런데 이미지 없이 계속 인터뷰로만 채워야 했어요. 결국 영화적 흐름으로 보면 조금밖에 넣을 수 없었어요. 상당한 분량을 버릴 수밖에 없어 안타까웠죠. 사실 전향 장기수들이 비전향 장기수들보다 복잡해요. 비전향은 어쨌든 전향 안 했다는 거잖아요. 영웅이고, 빤한 얘기이기도 하죠. 그래서 <송환>에서는 당과 수령 때문이 아니라 오기 때문이었다고 내 나름의 이유를 찾은 거고요. 근데 전향한 사람들을 보면, 전향한 동기도 여러 가지고, 계속 왔다 갔다 하는 사람도 있고 경우가 정말 많아요. 또 남북에 전부 가족이 있는 분들도 있죠. 북에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분들도 있고요. 그런데 그 얘기를 거의 못 했죠.
영화진흥위원회 지원금을 받기 위해 지원서 쓰는 장면까지 넣은 이유는요?
그 얘기도 좀 더 키우고 싶었어요. 한편으론 나도 그 순간 전향한 거잖아요. 내 신념을 배반한 거니까. 전향이라는 개념을 좀 확산시키고 싶었어요. 우리 모두 하루에 12번씩 전향한다는 내레이션도 넣고 싶었고. 뭐가 옳은지 그른지 우리가 다 알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잖아요. ‘내로남불’하는 게 얼마나 많아요. 또 한편으론 지원제도 자체에 관해 얘기를 좀 하고 싶기도 했어요. 분명 문제가 있거든요. 자기도 빤히 아는 거짓말을 쓰게 만들죠. 학교에서까지 기획안을 그럴듯하게 쓰는 걸 가르쳐야 하고. 또 누구는 많이 받는데 누구는 하나도 못 받아요. 그게 작품성의 차이 때문은 아니거든요. 민감한 문제인데, 슬쩍 띄워보려고 한 거죠.
<2차 송환>을 보면 타인을 아는 게 참 어렵다고 생각하게 돼요. 감독님께는 그런 것들이 ‘부끄러움’이나 ‘부러움’ 같은 표현들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남을 이해하기 위해 영화를 찍는다고 생각해보신 적이 있나요?
좀 더 알고 싶고 친해지고 싶어서 찍는 건 맞아요. 그런데 사실은 이해하는 만큼밖에 못 찍지. (웃음) 사람을 만나다 보면 재밌는 지점이 있잖아요. 예측을 빗나가는 지점들. “이렇게 행동할 줄 알았는데, 저렇게 행동하네?” 하는 것들이요. 그런 순간을 기다리는 것 같아요. 나도 그렇고 김영식 선생도 체제에 짓눌려 살고 있지만, 그 안에서 꿈틀꿈틀하는 게 있잖아요. 결코 시스템이나 이념으로 정의될 수 없는 여백이 있어요. 다큐멘터리는 그런 걸 보여줄 수 있어야 하고, 편견을 부수는 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끝이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일전에 <송환>을 벽에 관한 영화로 생각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2차 송환>은 무엇에 관한 영화인가요?
절망적 상황에서도 뭔가 꿈틀거리는 것에 관한 영화죠.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웃음) 적당한 표현은 아니지만, 가끔 돈키호테 같다고 생각했어요.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아무리 부서져도 아무리 얻어맞아도 다시 일어나는 오뚝이 같은 그런 거.
마음을 울리는 내레이션의 비결에 관한 질문에 늘 겸손하게 답하시곤 하지만, ‘다큐매거진 DOCKING’에 연재했던 남미 여행기도 그렇고 확실히 글을 재밌게 쓰세요. 어렸을 때부터 글쓰기를 좋아하고 꾸준히 하셨나요?
지금도 싫어하고 옛날에도 싫어했어요. (웃음) 내가 잘 쓴다고 생각하진 않는데, 그냥 스스로 씹을만한 게 있어야 하고 간결해야 한다는 원칙은 있어요. 글재주는 없죠. 다만 단문 형식의 낙서 같은 건 많이 했어요. 집에 중학교 때부터 쓴 노트가 있어요. 보면 재밌는 표현을 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시도 써보려고 했고. 근데 다 실패했지.
대학 시절 연극동아리를 하셨을 땐 주로 배우로 무대에 오르신 거죠? 극작에 대한 열망은 없으셨어요?
있었는데 실패했죠. (웃음) 단막극도 써봤고, 그러고 보니까 중학교 때 무협지도 써봤네. 그런데 뒷심이 약한 건지 완성해도 별로 거들떠보는 사람이 없었어요. 나부터가 그랬으니까. 그걸 가지고 계속 발전시켜야 하는데, 그냥 쉽게 버렸어요. 별로 소중히 못 여겼죠. 대신 뭘 써야 한다고 하면 잘 쓰려고 엄청 노력하죠. 남들 두 세배로 노력하면서 써요.
<내 친구 정일우>(2017)를 완성하고 나서, 배낭 하나 메고 남미에 반년 정도 다녀오셨어요. 버킷리스트 1번이라고 했던 이 여행이 감독님께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심각한 영향은 없었지만, 뭔가 후련해진 걸 느꼈어요. 우리나라가 얼마나 좁은가도 다시 한번 느끼고요. 정말 광활하고 멋있더라고요. 파타고니아, 우유니, 안데스 쪽에서는 말을 잊을 정도였어요. 그거면 성공이죠 뭐. (웃음)
다음 버킷리스트는요?
중미에 가야죠. 원래 <2차 송환>을 3, 4월에 개봉하고 5월에 가려고 했어요. 근데 가을이나 돼야 개봉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사이에 영화제에서 상영도 좀 해야 하고요. 그래서 길게 가진 못하고, 5월에 한 달 반 정도 일단 다녀오려고 해요. 개봉하고 나면 다시 가야죠.
남미 여행기에서 존경하는 다섯 인물 중 하나로 체 게바라를 쓰셨어요. 또 다른 인물이 궁금한데요.
‘나한테 영향을 끼친 사람들’ 하면서 100명 정도 쭉 쓰는 게 내 취미에요. (웃음) 옛날 생각 하다가 ‘아, 이 사람도 써야 하는데.’ 하면서 쓰고 그러죠. 좋은 영향이든 나쁜 영향이든 내가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언제나 생각나는 사람 중 하나가 체 게바라예요. 거기엔 정일우 신부님도 있고 서준식 씨도 있어요. 다른 사람은 아마 내가 얘기해도 모를 거예요.
가톨릭 신자이십니다. 신앙, 종교, 믿음 같은 것들에 어떤 영향을 받았다고 여기시나요?
종교보다는 ‘천도빈’(천주교도시빈민위원회)에 영향을 받았죠. 정일우 신부 같은 경우엔 가톨릭 안에서도 굉장히 소수파에요. ‘예수는 인간이다.’라고 하시잖아요. 보통은 그러면 큰일 나거든. 신부님은 예수님이 비록 하느님의 아들로 오셨지만, 우리하고 똑같이 밥 먹고 똥 싸는 인간이라고 하시죠. 난 오히려 그런 것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어요. 사실 가톨릭은 잘 몰라요. 인격적인 신은 안 믿기도 하고요. <2차 송환>에서 김영식 선생이 내 평생 한 번도 옷을 안 샀다고 말씀하시는데, 그게 천도빈의 태도거든요. 그런 면에서 김영식 선생이 천도빈과 되게 연결돼있다고 봐요.

개봉까지는 멀었지만, <2차 송환>은 롯데시네마 홍대입구에서 재개관하는 인디스페이스에서 한 차례 상영합니다. 서울극장이 없어지면서 독립영화전용관이 또다시 이삿짐을 꾸리게 됐죠.
원래 계획은 서울시에서 짓고 있는 멀티플렉스(복합영상문화공간 시네마테크)에 들어가는 거였는데, 완공이 지연되고 있죠. 홍대에서 한 2년 버텨야 하지 않을까? 그다음에 어떻게 될지 또 모르죠. 하여튼 나는 이름만 이사장이지 하는 게 하나도 없어요. (웃음)
전용관 설립은 독립영화계의 오랜 숙원사업이었고, 그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도 하셨습니다. 2012년에 민간 독립영화전용관 설립을 추진하면서 추진위원회의 공동위원장을, 또 인디스페이스의 법인인 '독립영화전용관 확대를 위한 시민모임'의 이사장을 맡으셨는데요. 전용관 설립이라는 큰 과제 안에서 개인적으로 의미를 좀 더 두고 싶었던 부분도 있었나요?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전용관을 뺏긴 거였잖아요. 그래서 정말 이 갈면서 민간 전용관을 설립했어요. 그때는 그런 민간 전용관이 서울에 네 군데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야심이 있었죠. 하나 더 만들자고 그랬는데, 결국 못 만들고 말았어요. 그때랑 지금이랑 독립영화에 대한 대중적 인식이 달라졌다는 걸 느껴요. 개념이 확산됐다고 볼 수도 있겠죠. 미국처럼 산업적 독립영화가 자리를 잡아간다고 할까. 그러다 보면 내가 만드는 영화는 소수 중의 소수가 될 텐데, 뭐 그래도 괜찮아요. 오히려 자연스러운 진화라고 볼 수 있을 거예요. 물론 한편으론 좀 더 독립영화다운 독립영화가 더 많이 나오고 자리를 잡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좀 어려운 것 같죠. 우리는 이제 정말 마이너한 독립영화가 되겠지. 섭섭하지만 괜찮아요. (웃음)
전용관이라는 질문이 결국 그런 고민과 관련되는군요.
그렇죠.
몇 해 전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소책자를 하나 냈는데, <송환> 속편 작업 소식을 전하는 감독님의 원고가 함께 실렸습니다. “전편처럼 운이 좋을 것 같지도 않고 대작이 될 것 같지도 않습니다. 눈이 침침해져 촬영도 점점 힘들고 새로운 편집 툴에 익숙하지도 않지만 그래도 아직 제게 관객들과 나누고 싶은 체험들, 이야기들이 남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새 작품으로 여러분과 만날 수 있기를 고대하겠습니다.”라고 하셨어요. 창작자에게 할 이야기가 있고 찍어야 할 영화가 있다는 게 그 자체로 얼마나 큰 동력인지 생각해봤습니다. <상계동 올림픽>(1988) 다음 이야기는 <내 친구 정일우>로 했다고 하셨고, <2차 송환>도 세상에 나왔습니다. 봉천동이나 행당동 이야기를 계속 더 해보고 싶으셨던 거로 아는데, 그와 관련해서는 어떤 계획이 있으신지요?
나중에 보면 말이 씨가 돼서 다 하게 되더라고. (웃음) 글쎄,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지금 당장 해야 하는 건 ‘천도빈’에 관한 거예요. 작품이라기보다는 자료집에 더 가까울 수도 있겠어요. 내가 이런 사람들과 같이 살았다는 걸 좀 남기고 싶어요. 봉천동 이야기는 다시 하게 될 확률이 50퍼센트는 넘어요. 한 51퍼센트 정도? 이번에 30주년 기념 상영회 때 <봉천동 이야기>(서명진, 1997)를 상영했고, 봉천동 분들이 GV에도 오셨어요. 작업 이야기를 했더니 좋다고 하시더라고. 옛날에 찍어놓은 게 많기도 하고요. 그걸 쭉 다시 보면서 고민을 해봐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