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결혼식 축가로 불리는 어느 가요는 결혼생활을 오르막길에 비유한다. 오르는 동안 웃음기도, 사랑의 향기도 사라지는 고된 길. 하지만 함께 걷기에 견딜 수 있고, 뚜벅뚜벅 오른 만큼 돌아보면 아름다운 그런 길. 수영(김새벽)과 종구(곽민규)는 그 오르막 중턱 즈음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부부다. 촉촉함은 점차 사라져가지만, 그렇다고 지난날을 고스란히 긍정할 만큼 원숙하진 못하다. 액자 같은 창 너머로 인왕산이 보이는 고즈넉한 집에 둥지를 틀었으나, 종구의 사정 때문에 이사를 결심해야 할 처지가 된 두 사람. 종구는 수영이 그 집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기에 속이 아프고, 수영은 그런 종구 때문에 마음이 무겁다. 이들은 때로 스스로 묻고 답하듯 화를 낸다. ‘우리’가 힘든 이유를 찾기 위해 제 안을 뒤진다. 머리를 쥐어뜯는 제스쳐를 공유하는 이들은, 그러나 결국 ‘나’를 성찰해서 더 나은 우리가 되길 간절히 소망하는 어여쁜 사람들이다. 눈물과 미소, 아픔과 행복이 한데 엉킨 이 시기는 고마운 이를 찾아 서울에 온 여행자 소피(아나 루지에로) 눈에 고스란히 담긴다. 소피는 집 앞 야트막한 언덕을 손잡고 오르내리는 두 사람을 물끄러미 보고, 그들과 함께 저 멀리 보이는 인왕산에도 오른다. 그 모든 풍경을 한껏 껴안아 보는 <소피의 세계>는 주인공들만큼이나 쓰다듬어주고 싶은 영화다. 두 해 전 가을 촬영을 마치고 각자의 오르막을 부지런히 오르고 있는 곽민규와 김새벽을 잠시 불러 세운 뒤 대화를 청했다. 소년 시절을 훌쩍 넘겼지만 예전보다 더 순수하게 빛나는 곽민규의 눈, 자기 체구보다 커다랗고 과녁에 꽂힌 화살처럼 분명한 김새벽의 목소리가 궁금해서였다.
곽민규 배우 헤어스타일이 눈에 띈다. 이전에 보지 못한 모습인데, 새로운 배역과 관련 있나.
곽민규_ 12월 초에 찍은 단편영화에서 악역을 맡았다. 그래서 초록색으로 염색했고, 색이 빠지면서 노랑머리가 됐다. 지금은 머리카락이 좀 자라서 투 톤 헤어. 맘에 든다. 태어나서 탈색을 처음 해봤다. 실은 요새 배우지원사업에 선정돼 미용실에서 지원을 받고 있다. 이전에는 주로 인물의 내면에 집중해서 캐릭터를 만들었는데, 요즘은 비주얼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원장 선생님과 대본을 공유하면서 이것저것 상의하고, 중고장터에서 옷도 많이 본다. (웃음) 열심히 공부 중이다. 최근엔 <은미>(2019)를 함께 한 정지영 감독님과 함께 헬스장 다니며 운동을 꾸준히 하기도 했다. 건강 문제도 있었고, 이미지를 바꿔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김새벽 배우는 드라마 촬영으로 바쁘다고 들었다.
김새벽_ 아직 구체적인 건 말할 수 없지만, 열심히 하고 있다. 해보지 않았던 걸 하는 거라 아주 편안한 상태는 아니다. 그래도 일상을 잘 보내려고 한다.
어느새 봄이다. 연말연시는 어떻게 보냈나. 올해 계획도 세웠는지.
김새벽_ MBTI가 INFP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P가 아니라 J 같다. 계획 세우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서. (웃음) 자기 전에 내일 뭐 할지 써보고, 연말에는 연초에 하고 싶었던 걸 얼마나 지켰나 체크해본다. 이번엔 세모가 많았다. 계획 중에 운전면허 따기가 있었는데 도로 주행을 못하고 기능만 땄다. 솔직한 사람이 되기, 사람들한테 안부 묻기도 잘하진 못해서 세모. 올해 계획은 면허를 마저 따기, 인사 잘하기, 매일 일기 쓰기다. 식물을 잘 죽이는데, 지금 살아남은 친구 중 어느 한 친구는 절대 죽이지 말자는 것도 리스트에 있다.
곽민규_ 연말연시가 되면 갑자기 다이어리를 열심히 쓰게 되는 것 같다. (웃음) 계획대로 되는 인생이 아니라서 대략적인 그림만 그리는 편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주어진 걸 잘하자.’ 정도. 4월부터 드라마를 촬영하게 됐다. 비중 있는 역할로는 처음이라, 누가 되지 않게 열심히 하려고 고민하며 준비 중이다. <썸머 스트라이크>(가제)라고, <커피프린스 1호점>을 연출한 이윤정 감독님 신작이다.


두 사람의 최근 행보는 그야말로 ‘차곡차곡, 폭넓게’다. 여전히 다양한 독립영화를 찍고, 제법 규모가 큰 상업영화와 TV 시리즈에서도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곽민규 배우는 공개 예정작이 여럿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엄태화 연출), <젠틀맨>(김경원 연출), 장건재 감독의 시리즈물 <괴이>까지.
곽민규_ 작년부터 여러 현장에서 찾아주셨는데, 그런 변화가 처음엔 두렵기도 했다. 상업 현장은 피도 눈물도 없는 곳이지 않을까, 나처럼 실수 많은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고민스러웠지. 그런데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가서 많은 걸 배웠다. 현장 분위기, 함께 한 사람들, 모든 게 좋았다. 롤모델로 삼고 있는 장건재 감독님 현장도 잘 다녀왔다. 너무 멋지게 잘하시더라. (웃음)
김새벽 배우도 지난해 공개된 드라마 <홈타운>부터 올해 초 개봉한 <킹메이커>(연출 변성현)까지 출연작이 끊이지 않는다. 괜찮은 속도로 가고 있는 것 같나.
김새벽_ 좀 덜컹거리는 것 같긴 하다. 다른 걸 다 빼고 생각하더라도, 자꾸 내 부족함이 조금씩 보이거든. 그렇다고 그 생각에 마냥 빠져있는 건 아니다. 지금 내가 어떤 노력을 하면 될까 생각하며 지나 보내고 있다. 그게 좋다. 난 지금까지 늘 내 속도대로 왔다고 생각한다. 빠른 적도, 느린 적도 없었고, 언제나 ‘이게 내 속도구나’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까.
그간 의외로 기회가 없었는지, 두 사람이 <소피의 세계>에서 처음으로 호흡을 맞췄더라. 이제한 감독은 애초에 둘을 염두에 뒀다던데, 서로는 잘 알던 사이였나.
곽민규_ 내가 새벽 배우를 처음 본 건 대구단편영화제에서였다. 친하게 지내는 오정민 감독이 소개해줘서 인사도 했는데, 나중에 보니 새벽 배우가 기억을 못하더라. (웃음) 무주산골영화제 때 다시 기회가 있었다. 내가 출연한 <이장>(정승오, 2019), 새벽 배우가 출연한 <벌새>(김보라, 2018)와 <항거>(조민호, 2019)가 상영작이었다. 새벽 배우가 정승오 감독의 <새들이 돌아오는 시간>(2016)에 출연한 적이 있어서 또 자연스레 인사를 나누게 됐다. 그래도 <소피의 세계> 들어갈 때는 긴장되고 설렜다. 워낙 좋아하는 배우였으니까.
김새벽_ 친한 친구인 (공)민정이 민규 배우랑 학교 선후배 사이다. 둘이 약간 남매처럼 가까워서 전에도 얘기는 많이 들었다. 웃긴 에피소드들도 있고 해서 되게 재밌는 친구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이제한 감독님이 종구 역에 민규 씨를 생각하고 있고, 시나리오를 보내놓은 상태라고 얘기하시는 걸 들었다. 그때 난 이미 하겠다고 말씀드린 후였다. 그런데 답을 왜 그렇게 늦게 줬나?
곽민규_ 그때 <비상선언>(연출 한재림) 촬영 중이었는데, 내부에서 코로나 이슈가 터져서 거기 잠시 갇혔다. 인터넷도 안 돼서 죄송하게도 답이 늦어졌다. 집에서 뒤늦게 시나리오를 읽었는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계란 삶다가 냄비를 태웠다니까. 엄마한테 많이 혼났다. (웃음) 내가 어떻게 해야 이 부부가 잘 어울리게 보일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다. 그런데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 만나서 이야기 나누고 리딩 거쳐서 현장까지 가니까 또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되더라. 내가 파트너 복이 많다.
김새벽_ 사실 수영을 연기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민규 씨랑 같이하면 재밌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역시, 내가 조금 어려워할 때면 적극적으로 맞춰주려고 하더라. 민규 배우가 고생을 많이 했다.
영화는 가을의 풍경을 줄곧 담다가 겨울의 모습을 비추며 마무리된다. 그리고 봄에 개봉하게 됐으니, 느슨하게나마 계절의 순환과 함께하는 셈이다. 배우로서 영화를 떠올릴 때도 자연스럽고 편안한 마음이 되지 않을까 짐작해보게 되더라.
곽민규_ 우선 현장이 너무 좋았다. 정말 최고였다. 그 해에 힘들었던 일들을 전부 보상받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래서인지 영화가 잘 나와야 한다는 바람이 강해서 보기 전에 좀 떨리더라. 영화 보면서는 마음이 많이 편해졌다. 찍으면서 좋았던 게 고스란히 나왔고, 감독님을 닮은 영화가 됐다고 생각했다. 영화 속 인물들이 서로를 기억하는 방식, 그들의 마음, 일련의 에피소드에서 보이는 꽤 애쓰고 있는 모습들이 내겐 너무 좋게 느껴졌다. 살다 보면 좀 삐끗할 수도 있고, 서로 투닥거릴 수도 있잖나. 그걸 바라보고 담아내고 표현하는 이 영화만의 방식이 참 좋다. 나는 수영과의 촬영이 거의 다였기 때문에 다른 장면들도 궁금했는데, 생각보다도 훨씬 풍성하게 나왔더라.
김새벽_ 지난해 1월까지 촬영하고 10월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됐으니까, 별로 오래된 건 아니다. 그런데 영화 볼 땐 되게 먼 때처럼 느껴졌다. 정말로 수영이 예전을 더듬더듬 기억하는 것처럼 하나씩 생각나더라. ‘맞다, 저 날 바람이 갑자기 불었지,’, ‘그래, 저 때 촬영하고 회도 먹고 그랬지.’ 하면서. 조금 쓸쓸하지만 그래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들도 괜찮을 거고 나도 괜찮을 거다, 별일 아닐 거다, 하는 생각. 그래서 영화 보며 응원받는 느낌이었다.
곽민규_ 재밌는 에피소드가 생각났다. 영화제 공개 전에 감독님 집에 모여서 모니터링을 했다. 내가 유독 내 영화를 과몰입해서 보는 편인데, 그때도 막 울었다. 새벽 배우가 옆에서 ‘어떻게 이럴 수 있지.’ 하는 눈빛으로 보더라. (웃음)
김새벽_ 게다가 중간에 화장실 간다고 해서 인터미션도 있었다. (웃음)
감독의 전작 <마지막 손님>(2020)에도 김새벽 배우가 출연하고, 그 배역도 이름이 수영이다. 이제한 감독과는 <그 후>(홍상수, 2017)를 촬영하며 만난 건가. (이제한 감독은 <그 후>의 제작사인 전원사에서 2020년 초까지 일했다.)
김새벽_ 처음 만난 건 다른 현장에서였다. 이광국 감독님(<로맨스 조> <말로는 힘들어>)과 찍었던 영화에 스태프로 참여했던 분이랑 단편영화를 찍었는데, 그때 제한 감독님이 음향팀으로 오셨다. 그리고 <그 후>에서 오랜만에 다시 만났다. 본인 영화를 찍어보고 싶은데, 나랑 같이 작업하고 싶다며 시나리오를 주셨다. 그게 <마지막 손님>이다. 그때도 현장이 참 좋았다. 단출하지만 다정했고, 그 기억이 좋아서 두 번째 작업도 함께 하게 됐다. 역시 배려가 넘치는 따뜻한 현장이었다. 밤에 민규 배우랑 PD님이랑 셋이서 언덕길을 내려가며, “이런 현장에서만 촬영하면 고민 없이 오랫동안 연기하고 영화 찍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얘기를 나눴던 게 아직도 기억난다. 그만큼 행복했다.
이제한 감독이 <마지막 손님>을 본인 작품 중에 가장 좋아한다고 했더라. 밑도 끝도 없이 순수하고, 영화 자체에만 진심이었던 그때의 본인 모습이 좋아서라고. 연기하다 보면 누군가의 첫 번째 영화를 같이 하게 되는 일이 종종 생기지 않나. 곽민규 배우는 <마지막 손님>을 함께 하진 않았지만, <소피의 세계>가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니 또 다른 시작으로 볼 수 있을 거다. 그럴 때 배우로서 어떤 마음이 드는지 궁금하다.
김새벽_ 이때까지 누군가의 장편 데뷔작에 참여한 경우가 몇 번 있었다. 대개 연출하시는 분이 시나리오를 쓰는데, 그 내용을 쓰고 그 영화를 찍어야지만 그분의 인생이 다음 챕터로 넘어간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그런 마음에서 나온 시나리오가 가진 힘은 참 크다고 느낀다. 무조건 좋은 영화가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기 보다는 그 힘에 끌리는 일이 많았다. 또 처음이라는 건 한번 넘어가면 끝나는 거잖나. 귀한 작업이고 값진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곽민규_ 나도 꽤 많았는데, 그런 현장에서는 유독 영화를 대하는 태도가 좀 더 순수한 것 같다. <소피의 세계>도 마찬가지였고, 감독님이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와 영화를 대하는 태도가 일치했다. 그런 모습이 멋지고 예뻐 보일 때 무한한 믿음이 생긴다. 프리 단계 때부터 이 사람을 믿고 가도 되겠다고 생각했고, 궁금한 것들도 가감 없이 물어볼 수 있었다. 감독님은 이제 그만하셔도 될 정도로 매번 고맙다고 얘기하신다.
김새벽_ 아까 오는 길에도 문자가 왔다. (웃음)


냄비를 태울 정도로 재밌는 시나리오라고 했다. 어떤 점이 그렇게 흥미로웠나.
곽민규_ 다른 자리에서 새벽 배우가 한 말을 빌리자면, 유독 수영과 종구가 디테일하게 쓰여 있었다. 인물을 표현하는 게 재밌을 것 같더라. 어디서 본 듯한 시나리오도 아니었고. 이제한의 유니크함이 있었다.
김새벽_ 시나리오를 받으면 어쨌든 피드백을 하게 되는데, 어떤 얘기를 해도 감독님이 잘 들어주셨다. 동시에 본인이 하고 싶은 것, 그리고자 하는 것에 대한 확신도 느껴졌다. 내 역할을 잘 이해하면서 감독님이 원하는 걸 구현해보고 싶었다.
인물의 전사나 직업이 세세하게 표현되지 않는데도 인물을 굉장히 가깝게 느끼게 되는 영화다. 배역을 만나고 이해할 때 어떤 점을 중요하게 여기는 편인가. 종구와 수영의 경우는 어땠나.
곽민규_ 최근 내 고민과 맞닿은 질문이다. 예전에 연기를 가르쳐주셨던 선생님이 연극 대본을 나눠주면서 하신 말씀이 있다. 대본 속 인물이 어떤 인물인 것 같은지 물어보시더니, 내가 입을 떼려는 순간 “말하지 마. 지금 말하려는 것 빼고 다 하면 돼.”라고 하시더라. 요새는 내가 그 함정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인물의 성격이나 이미지 말고, 더 디테일한 것, 전형적이지 않은 무언가를 찾는 게 중요한 것 같다. 거기에 이 내용과 캐릭터가 지금 시대에 등장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자연인 곽민규도 대입해보면서 인물을 만들어가려고 한다. 집 얘길 하다가 “수영 씨가 떠나버릴 것 같았다.”라고 하는 종구의 대사를 좋아한다. <소피의 세계>에서 집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그리고 종구가 집 문제로 얼마나 힘들어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장면이잖나.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본다.
김새벽_ 시나리오를 구현하는 게 영화 현장이니까, <소피의 세계>를 할 때도 시나리오에 있는 인물의 대사와 행동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기본적인 과정은 당연히 거쳤다. 그리고 거기 더해서 사랑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이야기 나누려고 했다. 며칠 동안 벌어지는 이야기고, 영화에 이 사람들의 전사가 다 안 나오잖나. 추측하게 되는 부분도 있고, 상황이 완전히 납득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봤다. 그럴 때 우리가 가져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보니, 종구와 수영이 여전히 사랑하는 사이라는 걸 생각하는 일이더라. 그러므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견뎌줄 수 있는 것일 테니까. 과거에는 종구가 수영을 견뎌줬을 거고, 그 시간이 지난 뒤 마지막 겨울엔 그래서 좋은 상태가 될 수 있었을 거다. 실제 부부인 이제한 감독님과 김수민 촬영 감독님을 많이 참고했다. 그분들은 보고만 있어도 사랑하는 게 느껴진다. 그건 어디서 어떻게 보이는 걸까 고민하며 영화에 사소한 것 하나하나 담아보려고 했다. 원래 작은 디테일에서 관계나 사랑이 보이는 법이니까. 지금은 저렇게 싸우고 있지만 분명 저 사람들만의 뭔가가 있겠지, 할 수 있도록 이 관계를 납득시키고 싶었다.
곽민규_ 싸우는 장면 찍을 때가 생각난다. 수영은 책상을 바라보며 앉아있고, 종구가 그 뒤에 서서 수영을 들볶는다. 굉장히 긴 장면인데, 중간에 종구가 “아니야, 그거 아니야.” 하며 대사를 이어가는 대목이 있다. 난 그게 이해가 잘 안 됐다. 감독님한테 물어보니, 싸움이 힘들어서 쉬고 싶고 외면하려는 수영을 종구가 두려운 마음으로 다시 잡아당기는 느낌이라고 하시더라. 그렇지 않으면 정말 끝나버릴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아직 경험으로는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을 상의해가면서 연기에 반영했고, 리딩 때와는 또 다른 리듬과 호흡이 담긴 생동감 있는 장면이 많이 만들어졌다.
둘의 싸움은 이미 여러 차례 언급됐을 만큼 인상적인 장면이다. 카메라 움직임이 적은 롱테이크로 찍혔는데, 싸우고, 흐느끼고, 사과하고, 부둥켜안는 일련의 흐름이 매우 설득력 있게 담겨있다. 찍기 전에 고민 많았다는 얘긴 들었는데, 촬영하면서 확신도 생겼나.
곽민규_ 굉장히 두려웠다. 일단 대사가 많았고, 비슷한 말도 여러 번 나와서 쉽지 않겠다는 생각은 이미 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연습도 많이 했고, 새벽 배우랑 대화도 계속 나눴다. 컷했을 때도 감정이 계속 남아있어서, 또 눈물 닦으면서 모니터링했던 기억이 난다. (웃음) 연습했을 때랑 실제로 촬영할 때가 되게 달랐다는 걸 언급하고 싶다. 연습을 오래 하다 보면 갔던 길을 계속 반복해서 가게 되기도 하는데, 새벽 배우가 나를 자꾸 새롭게 만들어줬다.
그나저나 많이 우는 편인가보다.
곽민규_ 자기 영화, 자기 연기 보고 잘 우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웃음) 말하니까 창피하네. 아, 또 하나 생각났다. 엔딩 포즈를 따로 정한 게 아니었는데, 너무 예쁘게 나왔다. 내가 또 상대 배우 덕을 봤구나, 했다. 그 장면 얘기만 하면 당시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모두에게 활력이 됐던 장면이다.
김새벽_ 난 반대로, 촬영 들어갔는데 갑자기 민규 배우가 엄청 화를 내서 나도 너무 화가 났던 게 기억난다. 진짜 너무 서럽고 억울했다. 최선을 다해서 견디고 있는데, 이렇게까지 나를 끄집어 당기다니. (웃음) 그렇게 해줬으니까 지금 이런 장면이 나온 게 아닌가 싶다. 사실 시나리오만 볼 때는 반복되는 표현이나, 상대 배우와 대사를 주고받는 부분 등을 걱정하며 집중해서 읽었다. 그런데 막상 촬영할 때는 내가 기본적인 걸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더라. 이 사람이 왜 이런 말을 하고 이런 행동을 하는지에 대해 이해하는 거 말이다. 그 상황이 돼보니까 수영의 말이 정말 자연스러웠거든. 그게 다 시나리오에 그대로 있던 대사들이다. 감독님이 이런 감정을 생각하고 대사를 쓰셨구나, 그게 다 자연스럽게 나오네, 하는 걸 촬영하면서 느꼈다.
종구가 수영을 업어주는 장면에선 말 그대로 사랑이 느껴진다. 수영은 아이처럼 다리를 쭉 펼치고 있고, 종구도 수영을 업은 채로 무척 편안해 보인다.
곽민규_ 그게 아마 새벽 배우 생각이었을 거다. 원래는 업고 들어가는 게 아니었는데, 그런 아이디어를 주셔서, ‘그래, 그나마 종구가 덩치가 커서 쓸모가 있구나. 잘 업어야겠다.’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웃음)
김새벽_ 후반부를 제외하고 종구가 영화 속에서 그리 좋은 상태는 아니다. 하지만 모든 관계가 그렇잖나.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다. 그렇다고 폭력이 허용된다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아까도 말했듯 둘 사이에 사랑이 있다는 게 반드시 표현되길 바랐다. 종구에게도 수영을 굉장히 아끼는 마음과 액션이 있고, 수영도 그걸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에 견디고 있다는 걸 드러낼 수 있는 디테일을 고민했다. 난 누가 날 업어줄 때 되게 기분이 좋다. (웃음) 그래서 종구가 수영을 업어줬으면 했고, 수영도 거기서 고마움과 사랑을 느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시나리오가 자세하고 좋았다는 얘길 여러 차례 했다. 한편, 이제한 감독은 시나리오를 고집하기보다는 배우의 의견을 존중하며 따라가 보는 게 좋다고 말하기도 했다. 언뜻 상반되는 의견 같지만, 결국 서로에 대한 신뢰가 두텁고 대화가 풍부하게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감독이 ‘배우에게 맡긴다’고 표현한 것을 배우들 입장에서 말해본다면 어떤가.
곽민규_ 아무래도 롱테이크가 많아서 그렇게 얘기하신 것 같고, 겸손의 말씀이다. 아까 감독님 부부를 관찰했다는 얘기도 했는데, 그런 일상적인 모습이나 감독님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 등에 많은 힌트가 숨어있었다고 생각한다. 자꾸 미담만 얘기하게 되는 것 같지만, 어쨌든 케미가 잘 맞았다고 할까. 그리고 감독님이 무조건 다 좋다고 하시는 분은 아니다. 아닌 건 아니라고 솔직하고 명확하게 말씀해주시고, 다 찍고 나서도 본인이 아니라고 판단하는 장면은 영화에 안 쓰신다. 그런 점 때문에 오히려 감독님을 믿을 수 있었다. 그래서 더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었고.
김새벽_ 감독님 진짜 솔직한 분이다. 첫 촬영 마치고, “이것은 저의 잘못입니다. 실수였습니다.” 하면서 그 장면을 바꿔서 찍어야겠다고 얘기하셨다. 그러면, 아무 문제 없다고 말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믿음이 간다. 그리고 “잘했다, 못했다”가 아니라, “그 방향이 아니고 이 방향이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듣는 사람이 움츠러들지 않는다. 우리가 길을 같이 찾아가는 중이라고 생각하게 해주는 그런 말들이 되게 좋았다. 영화를 만들면서 서로 같은 방향을 보게 만드는 얘기를 많이 나눴다. 나로서는 되게 존중받는, 다정한 방식의 디렉션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마 감독님은 그걸 디렉션으로 여기지는 않으셨던 것 같다. “이런 톤을 정확히 연기해주세요.” 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아나 루지에로 배우와 호흡을 맞추고 영어로 연기한 건 어땠나. 외국어 대사를 하게 되면 문장을 매우 공들여서 말하게 되는 것 같다. 타인과 대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유난히 정답게 담겼고, 그것이 <소피의 세계>만의 리듬과 속도를 만드는 장치가 돼주기도 한다.
김새벽_ 수영만큼 영어를 잘하진 못해서 부담스러웠지만, 아나가 정말 상대를 편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이라 도움을 많이 받으며 편하게 촬영했다. 영화의 큰 덩어리를 거의 순서대로 찍었다. 그래서 영화 속 소피와 수영이 점점 가까워지듯, 우리도 날이 갈수록 더 반가워지고 가까워졌다. 순서대로 찍은 덕을 봤다. 한편으론 수영과 있는 소피가 친구인 조(문혜인)와 함께 있을 때만큼 편해 보이지 않는 게 눈에 띄기도 했다. 문혜인 배우님이 실제로도 굉장히 영어를 잘하시는데, 그래서 아나가 그 현장에서 더 편했을 거라는 생각도 들더라.
곽민규_ 종구가 영어를 너무 못해 아쉽다. 난 그래도 그것보단 잘하는데 말이다. (웃음) 외국인 배우와 처음 연기해봤는데, 아주 자연스럽고 편하게 하시더라. 이질적인 느낌이 전혀 없었다.
소피가 집주인을 얄밉게 보는 대목에서 이상하게 울컥했다. 조금 서툴지만 선한 사람들을 알아보고 그들에게 마음을 쓰는 게 좋아 보이더라. 혹시 지금 문득 떠오르는, 각자의 마음을 울리는 장면을 말해줄 수 있나.
곽민규_ 너무 많은데…. 알다시피 난 잘 우니까. (웃음) 유독 기억에 많이 남고 좋았던 건, 좀 나중에 촬영했던 강릉 분량이다. 혹시 이사를 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 집을 보러 간 건데, 묘하게 편안했다. 앞쪽에 모질게 굴었던 시간이 있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해가 지는 그 무렵의 시간이 담긴 것도 참 좋았다.
김새벽_ 난 맨 마지막에 꽃을 들고 걸어오는 종구의 얼굴. (웃음) 우리가 그 사람의 힘든 순간, 솔직한 모습을 다 본 다음에 보게 되는 얼굴인데, 정말 달라 보이지 않나. 언젠가는 괜찮아지는 순간이 온다고 말하는 희망 같은 얼굴처럼 느껴져서 그 장면을 좋아한다.
<소피의 세계>를 보며 생각한 것 중 하나는 창문 밖에서 이름을 부르는 게 매우 로맨틱하고 정다운 행동이라는 거였다. 실제로 이제한 감독이 사는 집에서 촬영했는데, 액자 같은 창 너머로 인왕산이 보이는 그 공간에서 어떤 영향 혹은 기운을 받았는지.
김새벽_ 동네가 주는 정서가 있었다. 높은 건물이 많은 도시의 정서와는 다른 따뜻함이 있었다고 할까. 언덕을 쭉 따라 내려가는 느낌이나, 둘이서 맥주 마시러 가고 누군가 데리러 가는 모습이 그런 정서와 잘 어우러졌던 것 같다. 나도 창밖에서 부르는 게 좋았다. 어릴 때 “누구야~ 학교 가자~” 하고 부르던 게 떠올라 기분 좋더라.
소피가 여행자고 수영과 종구가 호스트지만, 실은 소피의 세계에 부부가 초대받았다고 볼 수도 있다. 결국 우리는 다 여행자라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 곽민규 배우는 워낙 여행을 좋아하는 거로 아는데, 물리적 이동이 자유롭지 않은 요즘 상황에선 어떤 식의 새로운 여행을 하고 있나.
곽민규_ 지금 외국은 못 나가고, 지방 촬영 갈 때마다 그 옆 동네에 들르는 식으로 여행하고 있다. 그나저나 여행하니까 우크라이나가 너무 걱정된다. 상황이 좀 나아졌으면 좋겠다.
김새벽 배우는 여행을 좀 멀게 느끼는 편인가.
김새벽_ 예전엔 좋아했는데, 이제는 굳이 찾지 않는다. 함께 사는 고양이가 요새 건강하지 못해서, 현실적으로도 좀 어려운 상황이다. 대신 1월 1일부터 매일 감사한 것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여행 가면 모든 게 새롭게 보이듯, 방에서 조용히 그런 시간을 가지면 많은 것들이 새롭고 고맙게 느껴진다.
두 사람 모두 부지런히 넓어지는 시기 같다. 김새벽 배우는 2년 전 어느 인터뷰에서 <벌새> 이후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해녀가 될 생각도 해봤다고 말한 적이 있다. 직업에 관해 고민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어떤 시기에 진입했다고 느끼나.
김새벽_ 연기라는 게 나한테 맞는지 아닌지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하는 중이다. 다만 지금은 그건 잠시 눌러두고, 어떻게 하면 연기를 더 잘할 수 있을지 고민해보기로 마음을 잡았다.


‘잘하는 연기’에 대해 각자 정의해본 바가 있나.
곽민규_ 다른 데서 보지 못한 새로운 걸 좋아하고, 그걸 유심히 보는 편이다. 단순히 기존과 다른 캐릭터를 봤다는 차원이 아니라, 예상하지 못했던 연기를 마주했을 때 좀 뜨거워진다. (웃음)
김새벽_ 난 용감한 사람이 하는 적확한 연기가 좋다. 표현하는데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않고, 영화 안에서 자기 몫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게 좋은 연기 같다.
곽민규 배우는 여전히 눈에 띄게 다작 중이다. 다만 지난해 한 인터뷰에서, 몇 년 전부터 비슷한 캐릭터를 중복해서 맡았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고 말했더라.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 중인 게 보인다.
곽민규_ 사실 비슷한 유형의 캐릭터가 아닐 수도 있는데, 그걸 비슷하게 표현하고 있는 내가 싫어서 그런 얘기를 부러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새벽 배우가 말한 것처럼 용감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미리 다 안다고 생각하거나, 다양한 가능성을 뭉뚱그리면 안 되는데, 요 몇 년간 내가 그랬던 것 같다. 작업하기 전에 태도를 돌아보는 게 그래서 중요하다고 느낀다.
한국인에겐 3월 초가 ‘새해 최종의 최종’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더라. 세 번째 시작이라고. (웃음) 끝으로 올 한 해 바라는 바가 있다면 듣고 싶다.
곽민규_ 가끔 뉴스에서 동료들이 안 좋은 선택을 한다는 소식을 접할 때가 있다. 거기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다. 그러다 보면 숨고 싶어지기도 하는데, 서로 잘 체크하고 다들 건강하게 지내는 올해가 됐으면 좋겠다. 사실 다른 건 다 필요 없다. 계획대로 되는 게 뭐가 있겠나. 모두 건강하길!
김새벽_ 1월 1일에도 소원을 빌었고, 설에도 소원을 빌었다. (웃음) 같은 소원이었다. 눈을 감았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내가 아는 그 얼굴들이 모두 다 건강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