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의 말하기’는 숨겨진 폭력을 드러내고 그것에 맞서는 강력한 저항 수단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부터 미투 운동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겪은 다양한 피해가 가시화되고 공론화될 수 있던 것도 모두 그러한 증언 덕분이었다. 생존자들의 목소리에는 역사가 배제하고 누락한 세부를 살려내는 힘이 있다. 하지만 말하기에 집중하는 방식은 자칫하면 피해자 개인에게만 지나치게 의지하며 그들에게 과도한 짐을 부과하는 일이 되기 쉽다. 말을 검증하고 사실 여부를 밝혀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인 것처럼 부각될 위험도 있다. “내 이야기해가지고 ‘아이고, 그랬구나, 참 애 묵었다’ 이렇게 보드랍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어”라는 김순악의 말은 그 발화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한 필요조건을 상기하게 한다. 우리는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우리는 알맞게 응답할 자세를 갖췄는가?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의 의뢰로 제작된 박문칠 감독의 <보드랍게>는 김순악의 말을 부드럽게 감싸 안으면서 그러한 질문을 함께 던지는 다큐멘터리다.
1928년 경북 경산에서 태어난 김순악은 마을에서 제일 가난한 집 딸이었다. 대구의 실 푸는 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말만 믿고 난생처음 기차를 탔지만, 그 길로 만주의 일본군 ‘위안부’가 됐다. 열여섯이었다. 여기까지는 ‘위안부’ 피해자에 관한 일반적 설명과 다르지 않다. <보드랍게>는 그 시절 혹은 그러한 사실에 머물지 않고 김순악의 생애 전반을 아우른다. 소녀 시절엔 들판을 거침없이 뛰어다녔고, 전쟁이 끝난 후엔 달리할 줄 아는 게 없어 유곽으로 흘러 들어갔다. 요릿집에서 술장사를 하다 아들을 낳았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려고 상경해 기지촌에서 색시 장사하는 ‘마마상’이 됐다. 두 아들만 바라보고 살았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 식모살이도 꽤 오래 했다. 2000년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공식 인정받은 후에는 새로 만난 친구들과 어울려 집회에 나갔고, 2010년 세상을 떠날 땐 대구 경북지역의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건립을 위한 기금을 남겼다. 나열하기만 해도 놀랍고 무거운 인생이다. 73분은 그를 알기에 너무 짧은 시간이다.


생전 김순악은 입버릇처럼 “내 속은 아무도 모른다카이” 하며 말했다고 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한 이후 활동가들과 구술 기록을 남겼지만,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누구에게도 온전히 이해받지 못하리라는 서글픔이 자리하고 있었던 셈이다. 인터뷰이들도 그의 고집과 강단, 무뚝뚝한 면모, 적대감 같은 것에 관해 말한다. 게다가 영화가 제작될 시점에는 이미 그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없었으니, 그에게 이르는 길은 참으로 멀고도 멀다고 해야 할 것이다. <보드랍게>의 놀라운 점은 그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인물이 외롭지 않게 느껴진다는 데 있다. 김순악과 가족처럼 가까이 지냈던 활동가들의 애정 어린 인터뷰나 곡선의 친밀함이 살아있는 애니메이션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가 시작할 때 쏟아지는 목소리들은 ‘김순악’ 이름 세 글자를 힘들게 쓰는 주름진 손 위로, “왈패, 위안부, 식모, 깡패 할매, 순악 씨.” 등 그가 일평생 들었을 다양한 호칭을 읊는다. 이 목소리들은 이후에도 영화 속을 맴돌며 김순악이 남긴 과거의 증언을 낭독한다.
목소리의 주인공들이 카메라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그리고 그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미투 운동을 해온 이들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은 잊기 힘든 감흥을 안긴다. “고정된 테두리 안에 갇혀있는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하면 그 너머로 확장시킬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오늘날 우리의 현실과 마주하게 할 것인가.” 고민한 결과이자, “새로운 마주침, 새로운 깨달음, 새로운 감각”이 생성되는 대목이다. 김순악의 육성과 낭독자들의 목소리는 “나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라는 문장에서 크게 공명한다. 나와 상관없는 특수한 경험, 혹은 남들은 알지 못하는 나만의 사연을 넘어서는 공동의 발화다. 진정 말과 목소리의 영화다. 박문칠 감독은 가족사를 깊이 탐구하는 과정에서 사회에 대한 이해에 이르는 <마이 플레이스>(2013), 사드 배치 반대 투쟁 속 여성들에 주목한 <파란나비효과>(2017), 대구퀴어문화축제를 다룬 <퀴어 053>(2019) 등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왔다. <보드랍게>는 사적 경험의 생생함을 고스란히 지키면서 그것을 사회적 문제와 단단히 엮어내는 솜씨가 더욱 무르익은 결과물이자, 지역 운동을 세심하게 조명한다는 점에서 전작들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다.


보드랍게 Comfort 제작 (사)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배급 인디플러그 감독 박문칠 출연 김순악, 안이정선, 이인순, 송현주 제작연도 2020년 상영시간 73분 등급 전체 관람가 개봉 2022년 2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