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세상을 버리면
<축복의 집> 안소요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Interview / 2022-02-18

‘축복의 집’엔 좀처럼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햇빛이 사납게 내리꽂히는 한여름, 해수는 컴컴한 집을 나와 분주히 걷는다. 엄마는 떠났고, 이제 해수는 그 죽음을 처리해야 한다. 엄마를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드는 과정은 고단하고 조용한 노동처럼 그려진다. 어마어마한 빈곤과 책임의 무게를 어깨에 짊어진 채, 해수는 주어진 과제를 묵묵히 수행한다. 감정을 내보이는 순간은 거의 없지만, 눈앞에 닥친 비극에 휩쓸리거나 휘둘리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안소요는 해수를 자기만의 기준과 원칙을 갖춘 인물로 만들었다. 설령 불행에 다다른다고 해도, 해수는 제 몫의 선택을 내리길 고집한다. 스크린 속에서 바삐 걷던 안소요를 불러 세웠다. 죽음과 가난이 사방에 번졌던 ‘축복의 집’과는 달리, 안소요의 눈에는 자주 불이 들어왔다. 그는 기억과 결과의 간극을 좁히고자 했고, 오차 없이 생각을 전달하려 애썼다. 적확한 표현을 고심할 때마다 두 눈동자가 다른 곳을 응시하며 반짝거렸다. 붙잡고 마주 앉긴 했지만, 안소요가 정말 멈춰 섰는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도리어 그는 말하면서도 계속해서 어디론가 나아가는 듯했다. 직접 이름 붙인 ‘소요’라는 뜻대로 슬슬 거닐며 마음속을, 영화 안과 밖을 자유롭게 오갔다.

 

 

“4년 전에 정말 열심히 촬영한 영화”라고 소개했어요.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작품을 마주하는 기분은 어때요.

영화를 찍고 나서 뜨문뜨문 소식을 들었어요. 어느 영화제에서 <축복의 집>을 상영한다든지, 같이 출연한 이강지 배우가 드라마에 캐스팅됐다든지, 그렇게 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전화가 왔거든요. 이번에도 감독님께 연락이 왔을 때 좋은 일이겠구나 했어요. 개봉한다는 얘기를 듣고서 감사한 마음이 컸죠. 이렇게까지 인연이 길게 이어질 줄은 몰랐어요. 감독님이나 저나 둘 다 조심스러운 성격이어서 처음 만났을 때는 조금 서먹했거든요. 영화가 끝난 후에 감사함을 더 많이 느껴요. 촬영 당시 저는 제 것을 하느라 다른 부분은 미처 신경 쓰지 못했는데, 감독님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함께했던 모든 이에게 마음을 써주시는구나 싶어요.  

 

영화를 찍었던 2018년을 어떤 해로 기억하나요?

최근 몇 년을 되짚어볼 때, 가장 다사다난한 해였어요.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힘든 일이 꽤 많았거든요. 촬영 직전에 출연이 무산된 적도 있고, 현장에서 어려운 일을 겪기도 했어요. 심적으로 고단했다기보다는 다사다난하다는 표현 그대로 정말 많은 일이 벌어진 해였어요. 그 와중에 <축복의 집>을 만난 거예요. 뭐라고 해야 할까요, 그냥 무척 힘차게 시작했던 기억이 나요. 관객분들은 어떻게 느끼실지 모르겠지만, 작품에 임하는 제 자세는 씩씩했어요. 두 주먹 불끈 쥐고 들어갔죠. (웃음)

 

캐스팅은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오디션을 봤던 건가요?

감독님이 <인 허 플레이스>(알버트 신, 2015)를 인상 깊게 보셨다면서 먼저 연락을 주셨어요. 시나리오를 읽어 보니, 일단 만나야 할 것 같더라고요. 어떤 부분은 마음에 들었고, 어떤 부분은 조금 망설여졌거든요. 

<축복의 집>
<축복의 집>

시나리오가 궁금하네요. 워낙 대사가 없는 작품이다 보니, 소설 같은 형태이지 않을까 짐작했어요. 

영화도 그렇지만, 시나리오가 정말 미니멀해요. 단정하고 조심스럽게 쓴 글이라는 게 느껴졌어요. 소설보다는 시에 가까웠죠. 행간을 넉넉히 두고, 짧은 문장을 띄엄띄엄 배치해둔 글이었어요. 오히려 인물의 감정이라든지 표정 묘사가 거의 없고, 행동마저 대부분 비워 놓은 상태였어요. 단편영화 시나리오라고 할 정도로 책이 얇았어요. 영화를 어떻게 찍으려고 하시는지,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파악해야겠다 싶었죠. 캐스팅 결정하기 전까지 세 번 정도 만나서 길게 얘기를 나눴어요.

 

대화 후에는 망설임이 잦아들었나 봐요.

꼬치꼬치 캐물었던 것 같아요. 이 글을 왜 쓰셨는지, 영화의 톤을 어떻게 만들어내실 예정인지. 전체적인 그림부터 각 장면까지, 의아했던 부분에 관해 여쭤봤어요. 감독님은 반반이었어요. 작품을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이나 연출 방식은 확고해 보였는데, 어떤 부분은 굉장히 비워두고 계셨죠. 특히 인물만큼은, 해수의 행동과 심리에 관해서는 제게 완전히 맡기고 싶으신 듯했어요. 그런 점에 저는 마음이 갔고요.

 

두 분 모두 배짱이 좋은데요. 연출자에게 고정된 인물상이 없다면, 배우 입장에서는 막막하지 않나요?

물론 답답했던 면도 있죠. 그래서 계속 물어봤던 거예요. (웃음) 감독님이 뭘 원하시는지 확인하고 싶었어요. 시나리오에 ‘해수는 무표정이다’라는 문장이 많았거든요. 나를 아무것도 못 하도록 만들려는 의도인지, 아니면 그 안에서 어떻게든 자유를 주실 예정인지 궁금했어요. ‘무표정’이라고 부르긴 했지만, 그건 결국 감독님이 바라는 온도와 뉘앙스를 갖춘 특정한 표정을 의미할 수도 있잖아요. 

안소요 ©이영진

중요한 부분이네요. 같은 단어를 놓고도 서로 다르게 해석할 수 있으니까요.

네, 사실 똑같은 표정이란 없기도 하고요. 다행히 감독님은 후자였어요. 한 가지 색으로 여러 표현을 시도하는 화가처럼 보였다고 해야 할까요. 감독님의 말이 제게는 ‘검정 물감을 사용하되 자유롭게 칠하세요’라는 뜻으로 들렸어요.

 

자유를 원했던 이유는요? 

그전에 다양한 현장을 경험하면서 자유가 주는 시너지를 경험했어요. 어느 정도 자유를 제공하는 환경에서 제가 잘할 수 있고, 서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요. <축복의 집>을 시작할 때도 그런 기대를 품었어요. 여기서 내가 열심히만 한다면,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겠다. 사실 우리 목표는 시나리오 이상이잖아요. 이 감독님과 이런 제작 환경이라면, 시나리오 이상으로 잘 구현해낼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

 

이야기를 듣다 보니, 공동 각본 역할을 했다는 생각도 드네요. 

과분한 표현이에요. 어쨌든 제 역할은 배우로서 할 수 있는 영역에 한정되었으니까요. 실은 감독님도 공동 연출 혹은 공동 제작자로 생각할 만큼 저를 신뢰한다고 말씀해주셨는데, 지나친 칭찬이라고 생각해요. 인물에 관해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내기는 했지만, 최종적으로 ‘오케이’ 선택을 내린 것도 감독님이고요. 

 

촬영 중에도 감독과 대화를 많이 나눴나요? 

의외로 그때는 조용했어요. 감독님도 현장에서 디렉팅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고, 저도 어떻게 하겠다고 알리기보다는 일단 뛰어들고 보는 성격이에요. 무엇보다 프리 프로덕션 과정에서 워낙 대화를 길게 했던 터라, 촬영 시작했을 즈음에는 관계가 무르익은 상태였어요. 

안소요 ©이영진

건조하면서도 공포스러운 분위기, 엄마와 딸의 뒤틀린 관계, 침묵을 지키는 인물 등 <축복의 집>은 배우가 출연한 전작 <인 허 플레이스>와 몇 가지 교점을 가져요. 전작의 경험이 작품을 선택하고 연기하는 데 영향을 미치기도 했을까요?

알게 모르게 미쳤겠죠. 감독님은 <인 허 플레이스>에서 뭔가를 보셨을 테니, 연락을 주셨을 거고요. 근데 저는 준비할 때는 물론이고, 촬영할 때도 전작이 떠오르지는 않았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인물의 성격 또는 리얼리즘이라는 측면에서 극을 이끌어가는 방식이 유사한 것 같아요. 다만, 제게는 별개의 캐릭터와 작품으로 다가왔기에 연기할 때 크게 염두에 두지는 않았어요.

 

보통 연기할 때, 관련 인물을 취재하는 등 사전 조사를 많이 하는 편이라고 들었어요. 해수를 준비하는 과정은 어땠어요?

인물과 똑같은 상황에 놓인 사람을 리서치한다는 뜻은 아니예요. 그냥 저한테 영감을 주는 것들을 많이 보고, 수집하고, 생각해요. 그 과정에는 순서도 딱히 없어요. 이랬다가 저랬다가 뒤죽박죽으로 해요. <축복의 집>도 마찬가지였어요. 특별하다고 할만한 건 없어요. 그저 <축복의 집>을 몇 달 동안 제 안에 담아뒀던 것 같아요. 촬영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삶이 시나리오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요.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을 살더라도, 똑같은 풍경을 마주한다고 해도 새로운 자극을 얻는 거죠. 머릿속에 시나리오가 들어차 있으니까요. 그러다 보면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작은 것에 갑자기 눈길이 가기도 해요. 

 

해수가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고, 또 스스로 만들어내기가 쉽지는 않았을 듯해요. 대사는 없다시피 하지만, 영화 내내 얼굴과 몸에 수많은 감정이 담겨요.

연출 의도에 부합하는 표현을 고민하는 동시에, 전형성을 경계했어요. 흔히 떠올리는 소녀 가장의 이미지로 해수를 그리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무척 답답해 보일 수 있는 캐릭터잖아요. 말도 없고, 표정 변화도 극적이지 않고요. 하지만 고통에 갇혀서 아무것도 못한 채, 그저 짓눌려 있는 인물은 아니라고 봤어요. 그렇게 전형적 이미지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제가 스스로 이끌어 가길 원했죠. 감독님께 마스크를 쓰고 싶다고 말씀드렸어요. 감독님은 영화 중반부까지 제 얼굴을 최대한 보여주고 싶지 않다고 하셨어요. 뒷모습이나 옆모습, 또는 해수의 움직임이나 손 정도만 담겠다고요. 마스크를 쓰는 행동은 그런 계획에 어긋나지 않을뿐더러, 인물의 성격 또한 자연스레 드러낼 제스처라고 봤어요. 해수는 누구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인물이잖아요. 유일한 가족으로 남은 동생조차 해수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하고요. 마스크를 쓰는 건 외부를 밀어내는, 자신을 적극적으로 방어하는 행동이에요. 말하자면 무작정 당하지만은 않겠다는 뜻이죠. 세상이 나를 소외시킨다면, 나도 세상을 따돌리겠다. (웃음)

<인 허 플레이스>
<인 허 플레이스>

이끌어 간다는 표현이 와 닿아요. 걸음걸이가 눈에 띄거든요. 일말의 낭비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주저하지 않고 성큼성큼, 하지만 늘 고개를 살짝 숙인 채로 걷죠. 그러다 새로운 위기에 맞닥뜨렸을 때, 해수의 걸음걸이에도 변화가 생기고요. 

맞아요, 그렇게 걷고 싶었어요. 덕분에 영화가 끝나고도 큰 어려움 없이 제 삶을 이어갔던 것 같아요. 해수가 그렇게 걸었다는 사실이 저한테 힘을 줬어요. 관객들도 조금은 그랬으면 좋겠어요. 마지막에도 해수와 해준이 걸어가는 모습으로 영화가 끝나잖아요. 결국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관객의 몫이긴 한데, 저는 그때도 힘차게 걸었어요. 

 

동생 해준 역을 맡은 이강지 배우와 장례식장에서 싸우는 장면이 떠올라요. 우격다짐하는 모습에서 억울함이나 원망도 느껴지지만, 무엇보다 주어진 벌을 달게 받는 사람처럼 묘한 체념이 깃든 표정이 인상적이에요. 컷하고 나서도 펑펑 울었을 것 같아요.

그때 테이크를 꽤 길게 갔어요. 편집된 장면에서는 더 울었는데, 그와 동시에 말도 더 세게 했던 것 같아요.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할 일을 하라는 식으로 동생을 다그쳤어요. 해수는 효율을 중시하잖아요. 아까 짚어주신 대로 행동에 낭비가 없는 사람이고, 그래선지 눈물은 쓸데없다고 여겼는지도 모르겠어요. 반면 남들 눈에 쓸데없어 보여도, 해수에게만큼은 매우 중요한 일도 있어요. 동생과 상복을 챙겨 입고 아무도 찾지 않는 빈소에서 끝까지 제 자리를 지키는 것, 그게 바로 해수가 유일하게 지켜내려는 무엇이죠.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주네요. “정말 열심히 촬영”했다는 게 빈말이 아니구나 싶어요.

촬영하는 동안에는 잘 깨닫지 못하는데, 제가 역할에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인가 봐요. 돌이켜보니 <축복의 집>을 할 때, 저만의 감상에 빠졌던 순간이 거의 없어요. 해수처럼 목표 지향적으로 움직이며, 그저 이 작품을 어떻게든 잘 만들어보자는 생각뿐이었죠. 부산에서 찍었는데, 감독님을 포함해서 모두 한 달 정도 같은 숙소에 살았어요. 매일 모여서 대화하고 토론하면서 고민을 거듭했어요. 누가 뭘 잘했다거나 못했다는 생각조차 할 겨를 없이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만 집중했던 것 같아요. 감독님, 피디님, 이강지 배우 등 함께한 이들에게 고맙죠. 다들 진짜 고생했구나 싶어요.

안소요 ©이영진

사실 대화하기 전까지는 한동안 후유증을 겪지 않았을까 했어요. 해수는 죄책감과 불안 등 온갖 부정적 감정에 휩싸인 인물이잖아요. 그래서인지 다음 해 출연한 단편영화 중에는 비교적 편안하고 밝은 작품이 많더라고요. <임랑>(김소영, 2019)에서는 퉁명스럽지만 따뜻한 딸을 연기했고, <교환학생>(조현준, 2019)에서는 현실적이면서도 익살스러운 청춘의 얼굴을 보여줬어요. 

일부러 그런 작품을 고른 것은 아니예요. 사실 출연 제안이 들어오면, 대부분 거절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제가 선택한다기보다는, 작품들이 선택해주는 길로 제가 왔던 거죠. 저는 더 다양하게 하고 싶어요. 최근에 김서형 선배님이 주연을 맡은 <비닐하우스>(연출 이솔희)라는 작품에 출연했어요. 지금까지 보여드렸던 모습과는 다른 캐릭터라, 기대해 주시면 좋겠어요. <인 허 플레이스>에 나온 모습으로 저를 기억해 주시는 분들이 많은데, 저로서는 그 이미지를 좀 깨고 싶기도 해요. 예전에 학교에서 연극 할 때는 오히려 코미디를 많이 했어요. 외향적이고 역동적인, 에너지를 저장하기보다는 발산하는 인물을 주로 맡았죠. 사실 그런 걸 하고 싶어요. 잘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장편영화만 놓고 보면 고정된 이미지가 있다고 여길 법하지만, 단편영화나 드라마까지 합치면 그렇지만도 않아요. 최근 <특별장학금>(양윤정, 2021)에서는 교내 장학금을 둘러싸고 친구와 긴장 관계를 이루는 사진과 대학생으로 나왔죠. 

맞아요. 이미지가 고정됐다고 하기에는, 그리 많은 모습을 보여드리지도 못했고요. 단일화된 이미지를 걱정하지는 않아요. 계속해서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싶은 욕심에 가까워요. 그럴 때 연기하는 게 정말 재미있거든요. <축복의 집>을 찍으면서 전형성을 경계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우선 작품의 결과 맞닿는 연기를 해야겠지만, 그 안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접근 방식을 고민하는 편이에요. 연기하다 보면 ‘혹시 나도 모르게 누군가를 따라 했나? 내가 게을렀던 것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어요. 의도적으로 전형에서 벗어나 조금이라도 다른 걸 택하려고 해요. 다름을 위한 다름이 아니라, 더욱 알맞다고 할 법한…  

 

방금 눈이 반짝거렸어요. 전형적 연기는 정답이 아니라, 손쉬운 선택지에 불과할 수 있다고 보는 거죠?

네, 정확하게 표현하고 싶은데 단어가 떠오르지 않네요. 어쨌든 작품과 인물에 좀 더 들어맞는 뭔가가 있다면 찾고 싶어요. 그걸 찾아가는 과정에서 큰 즐거움을 느끼고요. 저는 물웅덩이에 뛰어든다고 생각해요. 처음으로 몸을 던져서 물에 첨벙 뛰어드는 거예요. 그럼 어떨까? 과연 지금과 같은 표정과 행동이 나올까? 그렇게 뻔한 그림과 멀어지면서 머릿속을 싹 갈아엎죠. 이미 들어찬 물을 빼내고, 새 물을 넣어준다는 느낌으로요.  

<축복의 집>
<축복의 집>

조용한 전쟁을 치르고 있네요. 

겉으로는 침착해 보인다고 하는데, 알고 보면 내면에 충돌이 많아요. 감정 기복도 큰 편이에요. 어릴 때는 더했어요. 감정이 들쑥날쑥해서 힘들었고, 친구를 사귀기도 어려웠어요. 스스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지금처럼 차분해 보이는 사람이 된 것 같아요.

 

코미디를 많이 했다던 대학 시절이 궁금해요. 연기과에 진학한 거죠?

아니요, 신문방송학과에 갔다가 나중에 연기를 복수 전공했어요. 고등학생 때부터 배우를 꿈꾸기는 했는데, 부모님이 크게 반대하셨어요. 그때는 ‘그래, 내가 배우는 무슨 배우야’ 하며 좌절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진학 후, 연극 동아리에 가입하면서 연기에 푹 빠졌어요. 

 

기억나는 작품 있어요? 

전부 기억하죠. 영화 <마법사들>(송일곤, 2005)을 동아리에서 연극으로 올렸어요. 그때 저는 자은이라는 인물을 맡았는데, 이미 죽은 사람이에요. 유령으로 존재하는 동시에, 플래시백 장면에서는 살아 있는 사람으로 나와요. 그 작품을 준비하는 동안, 너무 힘들었어요.

 

왜요?

연기를 더 잘하고 싶어서요. 자은을 더 완벽하게 이해하고 싶고, 자은에 더 가까운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정말 무식하게 돌진했던 것 같아요. 별별 방법을 다 써봤어요. 산에도 올라가고, 노래도 불러보고. (웃음) 당시에는 그게 마지막 작품처럼 느껴졌거든요. 너무 연기를 못한다는 생각에 ‘여기까지가 내 한계인가 보다’ 했죠. 그냥 이거 하고 죽어야겠다는 마음마저 들 정도였어요. 근데 지금은 그 모든 시간이 멋진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함께 준비했던 동아리 친구들과 연극을 봐준 관객들 덕분에요. 친구들이 아직도 그 작품을 얘기하거든요. “네 인생작이라고 해도 될 만큼 좋은 작품이었어.” 그런 말을 들으면 힘이 나죠. 연기하길 잘했다 싶고. 

안소요 ©이영진

죽기 살기로 해보겠다는 결심이 평범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최선을 다하는 자세와는 별개로, 모든 작품에 그럴 수는 없으니까요. 당시 왜 그토록 절박했을까요? 

스스로 벼랑 끝에 서 있다고 느꼈어요. 그때는 재능에 골몰했어요. 재능이 대단히 중요한 기준처럼 보였던 거죠. 나에게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이 작품으로 판가름나리라 여겼는데, 연기가 뜻대로 안 되니 절망했죠. ‘역시 난 재능이 없나 봐’ 하면서 너무 쉽게요. 저에게 없는 능력을 지닌 사람을 보면, 그의 노력은 덮어둔 채 쉽게 부러워하고요. 나이를 먹으면서 그런 감정이 차차 옅어지기는 해요. 여전히 미래는 불확실하지만, 지금은 재능에 무게를 덜 두거든요. 연기에는 재능 외에도 수많은 미덕이 존재한다는 걸 배웠어요. 배우마다 색깔이 다르잖아요. 나의 연기이고 너의 연기인 것이지, 재능이 있고 없음으로 판단할 수는 없어요. 누군가는 꾸준함으로, 또 누군가는 순수함으로, 그렇게 각기 다른 방식으로 빛나니까요.

 

그럼 안소요의 미덕은 무엇인가요.

어려운 질문이에요. (웃음) 음… 집착? 뭔가 하나에 마음이 가면, 끝까지 파고드는 면이 있어요. 집요한 태도가 제 강점인 것 같아요.

 

본명은 안지혜예요. 언제부터 안소요라는 이름을 썼어요?

스무 살 무렵, 책을 읽다가 소요라는 단어를 발견했어요. 지혜라는 이름은 좀 흔하잖아요. 저뿐만 아니라, 평범한 이름을 가진 사람은 다들 그럴걸요. 특별한 이름을 갖고 싶다고 생각하던 와중에, 소요라는 단어를 딱 보자마자 ‘이거다!’ 했어요. 옛날 사람들은 성년에 접어들면, 이름을 직접 짓기도 했다더라고요. 나중에 개명이든 뭐든 하자는 생각으로 한동안 그 단어를 마음속에 간직해뒀어요. 그러다 배우로 활동하면서 다시 가져왔고요.

 

소요도 뜻이 여러 개잖아요. ‘자유롭게 이리저리 슬슬 거닐며 돌아다니다’는 의미로 쓴 거죠?

네, 근데 실은 두 번째 뜻도 좋아해요. ‘여럿이 떠들썩하게 들고 일어나다.’

안소요 ©이영진

십 대 시절에 꿈꿨던 배우는 어떤 모습인가요. 지금과 비슷해요?

그때 제가 뭘 꿈꿨는지 잘 모르겠어요. 연기하는 순간순간을 좋아했을 뿐, 먼 미래의 모습을 상상하거나 청사진을 그려본 적은 없어요. 그저 눈앞에 놓인 작품에 푹 빠졌고, 끝나면 또 하고 싶어졌어요. 그런 바람이 여기까지 이어진 것 같아요.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아요. 물론 망상은 하죠. 로또에 당첨된다거나, 배우로서 성공한다거나. 하지만 그런 행운이나 성취에 실제로 목표는 두지는 않아요. 어릴 적부터 장래 희망을 말하기 어려워했는데, 커서도 비슷해요. 예전에 겨우 고민해서 내놓은 답은 이거였어요. “마지막 순간에 눈 감을 때, ‘이만하면 잘 살았다’ 하며 인생을 긍정할 수 있다면 좋겠다.” 

 

장래 희망을 말하려면, 죽기 직전까지 가야 하는군요. (웃음) 

너무 극단적이죠? 중간을 모르겠어요. (웃음) 다만, 매순간 주어진 일에 충실히 임하면서 조금이라도 더 저다운 선택을 하려고 노력했어요. 덕분에 스스로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었고요. 도리어 지나치게 큰 목표를 세우다 보면, 발도 좀 헛디디고 그랬던 것 같아요. 

 

계획한다고 해서 그대로 흘러가리란 법도 없고요. 

맞아요. 잘하는 분들도 있을 텐데, 전 계획형 인간은 아닌가 봐요.

 

정말 행복하다고 느낄 때는 언제예요? 

연기할 때요. 컷 하고 나서, 현장에 있는 모두가 같은 걸 느끼는 순간이 아주 드물게 있어요. 상대 배우와 감독, 그리고 저까지 똑같은 감각을 공유해요. 어떤 말도 필요 없는 순간이죠. 그때 굉장히 행복해요.

<임랑>
<교환학생>

일전에 한 인터뷰에서 “연기란 최선을 다해 그 순간을 사는 것”이라 했어요. 2022년에는 어떤 순간을 살아보려고 하나요?

앞서 말한 것처럼 물을 계속 갈아주고 싶어요. 새 물을 긷는 마음으로 매일 새롭게 보고, 듣고, 느끼고. 그래야만 할 것 같아요. 저는 제 어리석음을 알거든요. 기억력이 좋은 편도 아니고요. 최근에도 안주하지 말자고 다짐했어요. 한번 배웠다고 절대 제 것이 되지는 않더라고요.

 

다짐한 계기가?

특별한 사건은 없어요. 노상 그렇게 느껴요. 아마 제 생긴 모양이 그런가 봐요. 다들 생긴 대로 살 때 편안하잖아요. 나답게 사는 것이 중요하구나 싶어요. 무리해서 다른 누군가가 되려고 하는 게 아니라요. 

 

어려운 목표네요. 사실 자신을 모른 척하기가 쉽잖아요. 나는 날 속이기도, 나한테 속아 넘어가 주기도 잘하니까요. 

연기할 때면 그 지점에서 늘 부딪히는 것 같아요. 욕심과 사심, 허세나 긴장처럼 불필요한 것이 올라오면, 나를 속이게 되거든요. 근데 결국 연기에서 티가 나버려요. 아, 최근에 책을 읽다가 “최대한의 나”라는 문구를 봤어요. 저도 “최대한의 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책 좋아하나 봐요. 이름으로 삼은 소요라는 단어도 책에서 발견했다고 했어요. 

“최대한의 나”는 이슬아 작가의  『부지런한 사랑』에 나오는 표현이에요. 작가가 글쓰기 교사로서 겪은 일들에 관한 이야기이자 글방에서 만난 아이들의 글을 모아놓은 책이에요. 작가는 아이들에게 “너는 커서 네가 될 거야. 아마도 최대한의 너일 거야.”라고 말해요. 책에서 제가 담고 싶은 문장을 발견하는 순간이 좋아요. 나는 이런 데에 감동하는구나, 내게는 여기에 공감하는 마음이 있구나. 책은 그렇게 제가 지닌 좋은 면을 되새기게끔 도와주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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