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보다 죽음을 많이 본 여자가 있었다.” 어릴 적 부모에게 버림받은 후, 낯선 이에게 짜장면 세 그릇을 얻어먹고 수락산 아래 ‘뺏벌’로 들어왔다. 월경을 막 시작했을 무렵이다. 기지촌에서 ‘손님’을 받으려면 보건증이 필요하고, 보건증은 주민등록증을 가진 사람에게만 발급됐다. 수양엄마라고 칭하는 포주가 얼마 전 동네에서 죽은 여자 이름을 사 왔다. 박인순, 그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 순간부터 죽음과 함께했던 셈이다. 남들은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다고 했지만, 박인순은 “내가 강해서”라고 주장했다. 사방에서 죽음이 숱하게 덮쳐 올 때도 그의 목소리는 쩌렁쩌렁했고, 두 다리는 성큼성큼 뺏벌을 누볐다.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처럼 기묘한 그림도 곧잘 그렸는데, 어느 날부터 그림에 저승사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박인순을 알고 지낸 김동령, 박경태 감독은 이러한 변화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다만, 죽음을 향한 박인순의 불안과 분노는 들여다볼수록 복잡해졌다. 너무 많은 기억이 불투명한 채로 얽혀들었고, 기지촌에는 기록되지 못한 죽음만큼 살아남지 못한 이야기가 수두룩했다. 두 감독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과거, 즉 기억에 관해 풀어내려면 픽션의 세계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에서 죽은 이는 귀신이 되어 떠돌고, 박인순은 남편의 목을 잘라서 저승길에 끌고 간다. 내레이션은 구전설화를 들려주듯 태연한 어조로 현실과 환상을 이어 붙인다. 박인순을 길잡이 삼아 뺏벌을 돌아다니다 보면, 이야기를 갖지 못한 바람에 죽어서도 이승을 헤매는 여자들과 마주한다. 저승사자들은 그들을 골치 아프다는 눈으로 바라보는데, 박인순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평생 등 뒤에서 바짝 따라오는 죽음을 따돌렸듯, 이번에도 고분고분하게 끄덕이지는 않을 작정이다.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기지촌을 정의하는 전형에서 벗어나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려 한다는 점에서 전작 <거미의 땅>(2012)에 연속하는 작품이자,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경계에서 다양한 실험을 펼친 결과다. 20년 가까이 기지촌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두 감독의 의지뿐만 아니라, 깊이와 너비를 확장해온 그간의 능력을 확인할 기회이기도 하다. 개봉 직전에 김동령, 박경태 감독을 만났다. 영화를 만들고 세상에 내놓기까지 둘을 거쳐 간 수많은 고민은 이제 어떤 이야기로 남을까.
그간 개봉을 경험하며 회의감 내지 아쉬움을 느꼈을 테고, 코로나19 상황을 지켜보며 걱정도 컸으리라 짐작한다. 그런데도 극장에서 관객과 만나기를 선택한 이유는 뭔가.
김동령_ 일단 이 영화는 극장에서 보는 영화로 만들었다. 영화적 경험을 해온 사람들을 위한 영화이고, 그에 따라 촬영부터 사운드까지 다양한 요소를 고려했다. 촬영하는 내내, 관객들이 어두운 공간에서 거인 같은 인순 언니의 얼굴을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엄청나게 큰 화면에 떠오른 언니 얼굴이 사람들을 비춰주길 바랐다. 아무리 극장이 죽어가는 시대라고 해도, 극장에서 상영할 기회가 있다면 해야 한다고 봤다. 다만, 회의감은 여전하다. 현재 서울에는 개봉관이 2개 남짓이다. 이걸 개봉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거미의 땅> 개봉할 때보다 상황이 훨씬 악화됐다. 팬데믹으로 인해, 독립영화와 예술영화를 상영하는 극장 여러 곳이 문을 닫지 않았나. 당장 인디스페이스에서 상영할 수 없다는 것도 큰 아쉬움이다. 인디스페이스가 이전을 앞두고 잠시 운영을 멈춘 상태인데, 우리로서는 집을 잃어버린 느낌이다. 영화진흥위원회에서 받은 지원금으로 개봉 기회를 간신히 얻었지만, 마음이 편하진 않다. ‘과연 우리가 관객에게 정말 가 닿을 수 있는 구조 속에서 개봉을 경험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독립영화 시장이 이렇게 쪼그라든 근본 원인 중 하나는 대기업의 스크린 독점이다. 근데 이제 아무도 그런 얘기를 하지 않는다. 이유가 무엇일까. 올해부터 영화발전기금이 폐지되기는 했지만, 애초 정부는 배급 유통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그렇게 돈을 줘야 했을까.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방식으로 말이다.
박경태 감독도 할 말이 있을 듯하다.
박경태_ 독립영화에는 독립영화만의 사업 규모가 있는데, 공공 지원의 맥락과 방식은 상업영화와 다를 바가 없다. 상상력 없이 상업영화의 배급 유통 시스템을 그대로 흉내 낸다는 점에서, 나는 현재 정책을 굉장히 비판하는 입장이다. 독립영화 지원 목적이 무엇인가. 상업영화와 같은 양적 팽창인가. 마케팅 비용을 예로 들어보자. 우리는 지원금에 100퍼센트 의존해야 하는 상황인데, 그럼 최대 3~4천만 원이란 말이다. 근데 상업영화는 몇십억 단위 아닌가. 마케팅 비용이 100배 이상 차이 난다면, 이건 양적 차이라고 볼 수 없다. 질적 차이가 발생한다. 독립영화는 상업영화와는 전혀 다른 개념으로 접근해야 하는 영역인 거다. 근데 우리는 점점 좁아지는 길을 택했다. 제작지원을 받아서 영화를 만들고, 영화제 가서 상영하고, 개봉지원금으로 개봉한다. 물론 이 또한 누군가에게는 가진 자의 횡포처럼 들리겠지. 근데 중요한 건,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와 무관하게 10년 이상 우리가 관행처럼 같은 일을 반복했다는 사실이다. <거미의 땅> 때는 솔직히 잘 몰랐다. ‘이게 뭐지?’ 하며 아리송한 상태로 넘어갔는데, 지금은 아니다. 개봉 목표 역시 달라졌다. 단순히 양적 기준에서 많은 사람에게 선보이는 것? 어차피 관객이 많을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나는 개봉 과정에서 우리가 경험한 바를 아카이브하며, 시스템의 맥락을 좀 더 깊이 읽어내고 싶다. 그럼 대안이 될 만한 새로운 시각을 제안할 수 있지 않을까.
개봉 사흘 전인데 “관객이 많을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씁쓸한 말이다.
박경태_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극장이 없는데 어쩌겠나. 현재 개봉은 사기에 가까운 짓이라고 본다. 독립영화란 무엇인지, 독립영화 생산과 소비는 어떤 방식으로 이뤄져야 하는지 근본적 질문을 던져야 할 때다. 제작만을 생산으로 볼 게 아니라, 극장을 많이 소유해나가는 방향을 고민해야 한다. 도서관의 경우, 권위주의 국가 시절 국립중앙도서관을 필두로 피라미드식 운영 구조를 지속했다. 전국 도서관이 텅텅 비어 있었다. 자율권이랄 게 없는 관료 체계에서 어느 도서관이 책을 사겠나. 위에선 금지 도서 목록만 내려 오는데. 김대중 정부에 들어와서 이 구조가 깨졌다. 중앙에서 기획 관리하던 곳을 없앤 것이다. 이후 사단법인 도서관협회가 만들어졌고, 인구에 대비해서 지역마다 도서관이 설립됐다. 극장도 그렇게 가야 하지 않나 싶다. 법이라는 강제성을 띠고서라도. 인구 50만 명당 극장 하나라고 하면, 수도권에만 50여 개가 필요하더라. 각 지역에 골고루 거점을 만들어내고, 그러한 토대에서 다양한 영화가 나오면 좋겠다.


긴 시간에 걸쳐 고민해왔다는 게 느껴진다. 특히 극장에 관한 아이디어가 흥미롭다.
박경태_ 지금 총력을 기울여야 할 곳은 극장이다. 적은 돈을 쪼개서 유통에 쓸 것이 아니라, 극장을 독립영화의 생산 기지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비평도 담론을 생산할 수 있다. 영화를 자꾸 유통 시스템에만 한정해서 바라보니, 비평도 점점 결혼식 주례사처럼 되지 않나. 극장이라는 기반이 풍성하게 마련되면, 생산자는 영화를 열심히 만들어낼 거다. 지금처럼 영화제나 개봉에 매달릴 필요도 없어진다. 각 지역 극장 프로그래머와 소통하면서 “내 영화는 동두천을 배경으로 하니, 경기 북부에서 프리미어 상영을 하고 싶다” 같은 구체적 목표도 세울 수 있겠지. 그렇게 영화를 공개하고, 담론을 만들고, 전국 극장을 돌며 상영하고 싶다. 한 달 개봉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1년 동안 장기 상영하는 거다. 왜 우리는 이런 고민을 안 할까. 따지고 보면 굉장히 큰돈이 유입되는데, 제대로 쓰지를 못한다. 상업 영화의 진행 방식을 그대로 따르니, 사업 방향이 전부 유통 서비스에 쏠려 있다. 근데 기반이 존재하고 시장이 굴러가야, 서비스 산업이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겠나. 간단하게 말하면, 우리는 2차 산업도 없으면서 3차 산업에 집중하는 셈이다. 오랫동안 이런 문제를 직접 겪다 보니, 하고 싶은 말이 많다. 글로 정리해서 어딘가에 공유하든, 관련 기관에 찾아가서 제안하든 할 생각이다.
앞선 질문을 했던 이유는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를 만든 계기, 정확히 말하면 ‘이렇게’ 만들고자 했던 의도를 유추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정책에 관한 고민과는 별개로, 이 영화는 제작 단계부터 극장이라는 공간을 상상했던 것 같다. 김동령 감독은 “영화적 경험을 해온 사람들을 위한 영화”라고 표현했는데, 질 좋은 상영 환경 외에 중요했던 것이 또 있나.
김동령_ 인순 언니가 영화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이해하려 했다. 작업하며 계속 자문했다. ‘이 영화를 왜 시작했지? 어떻게 만들어야 하지? 무슨 내용을 보여줘야 하지?’ 그러다 보면 결국 ‘언니는 왜 우리에게 오케이를 했을까?’라는 질문으로 되돌아오더라. 언니는 영화를 찍자고 한 다음, “이번에는 내가 남편 목을 잘라서 끌고 가고 싶어. 그게 내 조건이야.”라고 하셨다. 언니에게 영화란 무엇인지 궁금했다. 도대체 영화를 어떻게 생각하며, 이 작업을 즐거워하는 이유는 또 무엇인지도. 대화를 주고받으며 깨달았다. 언니는 영화를 너무 좋아했던 사람이더라. 누구나 싼값에 표를 사서 극장에 가던 시절, 언니에게 영화는 큰 위안이었다. 손님을 너무 많이 받아서 걷기도 힘든 날이 있는데, 그때 들어가서 쉴 곳이라고는 극장밖에 없었다고 하더라. 슬픈 이야기지. 지금도 언니는 그때 봤던 영화를 줄줄 읊는다. 옛날 신파극부터 해외 영화까지 참 다양하다. 문득 머릿속에 ‘그 많은 영화관이 전부 사라졌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사실 이건 극장을 즐겨 찾던 인순 언니를 위해 만드는 영화인데, 어느새 그 극장들이 사라지고 없는 거다. 기지촌이 그러하듯 말이다. 그렇게 인순 언니의 이야기가 영화와 극장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박인순 씨에게 극장은 익명성을 보장받는다는 점에서 특별한 공간이었구나 싶다.
김동령_ 맞다, 언니는 익명성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불 꺼진 극장은 자신을 남과 평등한 존재라고 인식하는 드문 공간이기도 했다. 언니는 늘 타인의 시선에 노출됐고, 쉽게 희롱의 대상이 됐다. 근데 극장에서는 아니었거든. 사람들 틈에 섞여서 영화를 보다 보면 ‘나도 이들과 비슷한가? 평등한가?’ 생각했다고 하더라. 남들이 웃고 울 때, 자기도 같이 웃고 웃으니까. 그럼 긴장이 풀려서 잠도 잘 왔다고 했다. 언니가 극장에 갖는 감정이 있다. 향수라고 해야 할까. 지금 언니는 극장에 갈 수가 없거든. 혼자서는 표를 구매하기도 어렵고, 표 값도 너무 비싸다. 상영시간표 찾아보는 것도 언니에겐 벅찬 일이다.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선보였을 때와 비교하면, 개봉 버전에 몇 가지 변화가 생겼다. 내레이션에는 김상현 성우가 새로 참여했다. 덕분에 오프닝이 ‘전설의 고향’ 도입부처럼 다가오면서 좀 더 픽션에 가까워진 느낌이다.
박경태_ 내래이션 맥락은 유지하되, 내용도 약간 정제했다. 엔딩도 바뀌었다. 본래 잠든 인순 아주머니를 보여줬는데, 지금은 걸어가는 모습을 비추며 끝난다.
김동령_ 이 영화는 이야기마다 다른 화자가 등장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처음과 끝, 그러니까 영화를 여닫는 목소리는 중간과 달라야 했는데, 부산국제영화제 상영 당시에는 시간이 부족해서 신윤숙 배우에게 그 부분까지 내레이션을 부탁했다. 함께 내레이션에 참여한 김아해 배우와 목소리 톤이 비슷하다는 의견이 많더라. 개봉 준비하는 과정에서 김상현 성우를 섭외했다. 김상현 씨 목소리가 들어오니, 확실히 우화다운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프롤로그에서는 “여러분, 이제 한 편의 우화가 시작됩니다” 하는 느낌이지. 그럼 관객 입장에서는 이게 대체 뭔가, 다큐멘터리가 맞나 싶고. (웃음)
고 윤금이 씨 사진을 삽입한 장면의 경우, 개봉할 때는 편집할 수도 있겠다고 봤다. 다시 봐도 힘들지만, 한편으로는 그 장면을 삭제하지 않고 보여준다는 점에서 안도감이 들기도 한다. 해당 이미지가 사용된 기존 맥락과 방식을 무시할 수는 없기에, 감독들 또한 고심했을 듯한데.
김동령_ 경태 씨는 처음에 반대했다. 아예 사진을 넣지 말자고.
박경태_ 윤금이 사진이 세상에 다시 호출된 건 2002년 ‘효순·미선 사건’ 때다. 한 통일운동단체가 지하철 역사에서 미군범죄 사진전을 개최했는데, 나는 그와 같은 방식에 굉장히 비판하는 입장이었다. 그때 기억의 여파인지, 처음에는 우리 영화에서 윤금이 사진을 사용한다는 것에 동의할 수 없었다. 동령 씨와 엄청나게 논쟁했다. 그러다 사진을 프로파간다의 수단으로 삼는 것도 문제이지만, 사진을 금지하는 것 또한 권력이라는 말에 납득했다. 그 사진이 기지촌을 둘러싼 담론을 보여주는 이미지라면, 영화에 넣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효순·미선 사건’ 당시, 기지촌이 굉장히 뜨거웠다. 이야기가 반미 운동으로 흘러가기 시작하자, 누님들 입장에서는 존재를 부정당하는 것처럼 들렸던 거다. 하루는 다들 모여서 얘기를 하던 중에 윤금이 사진까지 말이 나왔다. 한 누님이 아주 같잖다는 듯 “이게 뭐가 잔인해? 그동안 우리한테는 더한 일도 많았어”라며 역정을 내셨다. 위선적이라고 느끼셨던 거다.
김동령_ 이런 사진 한 장도 똑바로 못 보는데, 너희가 우리를 어떻게 이해하겠냐고 하시더라.
박경태_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정치적 올바름에 관해 말할 때, 누님들은 완전히 다른 해석을 내놓는 거다. 실제로 옛날에는 뺏벌에서 죽은 사람이 나와도 경찰이 수사를 안 했다. 그리 오래된 이야기도 아니다. 1995년에는 수락산에서 나이 든 ‘양색시’ 한 명이 발가벗겨진 채로 발견됐다. 여자 몸 위에 커다란 바위를 얹어 놨는데, 그걸 들어 올리려면 성인 남성 2~3명은 필요했다. 누가 봐도 자살은 아니잖나. 마을에서 신고하고 아가씨들이 난리를 쳤는데도 경찰이 안 왔다. 결국 동네 남자들 동원해서 시신을 수습했다. 그런 사건이 한두 개가 아니다. 1980년대까지 거슬러 가면, 누님들 기억 속에 그렇게 죽어간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고. 근데 이제 와서 윤금이만 놓고 민족의 순결이니 뭐니 떠들어대는데, 기분이 좋겠나. 대부분 화를 내셨다. 당신들이 언제 우리에게 관심이나 가졌냐면서.
김동령_ 당시 여성단체도 크게 반발했다. 지나치게 폭력적이니 사진을 게재해서는 안 된다고. 근데 언니들 입장에서 보면, 특별히 두렵거나 선정적 이미지가 아니다. 그냥 현실인 거다. 사람들의 원한과 분노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며 반미 운동의 수단으로 삼았던 단체를 두둔할 마음은 없다. 그런 태도는 비판받아야 마땅하지. 다만, 이제 질문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이건 잔인하니까 보면 안 돼”라고 말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가? 오히려 이 이미지를 피하지 않고, 제대로 봐야 하지 않나 싶다.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박인순 씨의 목욕 장면과 느슨하게 연결된다고 봤다. ‘기지촌 여성의 벌거벗은 몸’이라는 공통점을 지닌 채, 산 자와 죽은 자, 삶의 장소와 폭력의 현장, 몸에 대한 통제권 여부 등 다양한 차이를 갖는다. 특히 박인순 씨가 제 몸을 살뜰히 만지고 닦아내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박경태_ 동령 씨가 그 장면을 무척 공들여 찍었다.
김동령_ 남들이 봤을 때, 특히 성 구매자 눈에는 선정적으로 비칠 수도 있다. 근데 우리가 그런 눈에 맞출 이유는 없다고 봤다. 언니에게 몸은 유일한 생계 수단이고, 평생 지속한 노동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언니는 제 몸을 학대하거나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목욕을 좋아하고, 몸을 뽀득뽀득 씻는 행위를 즐긴다. 몸도 예쁘다, 내가 봤을 때는. (웃음) 여러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목욕은 언니에게 일종의 의식이거든. 몸을 팔기 전에 씻고, 몸을 팔고 나서 씻는다. 죽임당하지 않음을 확인하는 일이자, 온전히 자기 육체로 돌아오는 시간이다. 언니 집에 가보면 비누가 종류별로 쌓여 있다. 매일 다른 비누로 몸을 씻는다고 하더라.


영화에 삽입한 아카이브 영상을 통해서 알 수 있듯 박인순 씨는 그간 카메라에 여러 차례 노출됐다. 촬영에 익숙한 사람이고, 영화나 영상이 가져오는 효과 또한 파악하고 있으리라 본다. 박인순 씨가 이번 작품에서 원한 것, 본인을 위해 얻고자 한 것은 뭐였나.
박경태_ <나와 부엉이>(2003)를 찍으며 처음 만났을 때는 영화에 출연하겠다는 아주머니의 의지가 확고했다. 사실 성매매 지역에서 카메라를 든다는 건 매우 힘든 과제다. 촬영 당시, 아무도 나를 반기지 않았다. 미군이 좋다고 하겠나, 포주가 환영하겠나. 누님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일단 외부인이 들어가는 순간, 모든 이가 주시하는 게 느껴진다. 동령 씨처럼 여성이 가면 더했다. 시민단체 여성 활동가들이 찾아오는 날에는 시선을 넘어, 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다들 카메라를 꺼렸는데, 인순 아주머니는 달랐다. “날 찌겨, 찌겨!” 하면서 계속 따라왔다.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자신을 찍으라는 뜻이었다. 그때만 해도 인순 아주머니는 무척 과격했다. 심각한 고통에 시달렸고, 늘 술에 취한 상태였다. 한 번씩 식칼을 들고 나타나면, 다들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피했다. 나도 처음에는 되게 무서워했다. 그러다 아주머니가 두레방의 미술 심리 치료에 참여하면서 자연스럽게 촬영할 기회가 생겼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아주머니가 왜 그토록 카메라를 원했는지. 나중에 알고 보니, 미국에 두고 온 아이들에게 ‘내가 여기 있다’고 알릴 수단으로 여겼더라.
김동령_ 영화든 방송이든, 언니에게는 그 의미가 컸던 것 같다. 우리가 실제로 언니 딸을 찾으러 미국에 가기 전까지, 항상 입버릇처럼 딸 이름을 불렀거든.
박경태_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보니, 처음부터 카메라에 거부감도 별로 없었고. 근데 무엇보다 중요한 건, 아주머니가 카메라를 대하는 방식이 점차 변화했다는 거다. 한동안 아주머니에게 과거 이야기를 듣는 일은 불가능해 보였다. 온갖 기억에 사로잡힌 상태였고, 오죽하면 자식을 미국에 두고 왔다는 말조차 다들 거짓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다. 근데 전부 사실이더라. 가족의 존재부터 그간 행적까지 실제로 검증이 됐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과거, 즉 기억에 관해 풀어내려면 픽션의 세계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김동령_ 물론 언니는 ‘픽션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말을 이해하실 수가 없다. 대신 그림을 그리셨다. <거미의 땅> 촬영할 때 쉬는 시간에 그렸던 그림이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였다. 사실 언니는 <거미의 땅>을 만들 때, 나름 큰 기대를 품었다. 많은 사람이 영화를 볼 거라고, 자기도 되게 유명해질 거라고. 근데 개봉 첫날 인디스페이스를 갔는데, 관객이 한 명이었다. (웃음) 몇 차례 비슷한 상황을 경험하면서 언니 스스로 납득을 하셨던 것 같다. 사실 처음에는 돈도 좀 벌 거라고 기대하셨다. 우리는 계속 얘기했거든. 이건 돈이 안 되는 영화라고, 언니가 실망하실 수도 있다고. 다음 영화를 찍자고 했을 때, 조금 튕기기는 하셨다. 아무도 안 보는 영화를 뭐하러 만드냐고 하더라. (웃음) 수락한 다음에는 “나는 이번에 세게 가고 싶다”고 했다. 듣는 입장에서는 너무 좋지. 미군의 머리를 잘라서 끌고 가고 싶다니, 상상만 해도 너무 멋지지 않나. 사실 인순 언니는 어떤 장면과 이야기를 원하기는 했지만, 디테일에 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다. 다음은 우리 차례였다. 언니가 바라는 장면을 만들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어떤 이야기가 더 필요한지 말그대로 뼛골 빠지게 고민했다.
‘남편의 목을 잘라서 끌고 가고 싶다’는 박인순 씨의 말은 영화에서 실행됐고, 이는 “반복되는 지루한 이야기”에 반대하며 극에 전환을 불러오는 중요한 장면으로 등장한다. ‘새로운 이야기’를 쓰겠다는 박인순 씨의 요구를 껴안는 동시에, 연출자로서 목표를 설계하고 방향을 잡아나가는 과정은 어땠나.
김동령_ 일단 이 작품은 시나리오가 없다. 영화를 만들기 전, 우여곡절을 좀 겪었다. 시나리오를 한 편 쓰기도 했는데, 다큐멘터리 제작 펀딩에서 하도 떨어져서였다. 우리가 자꾸 꿈 얘기를 하고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집어넣으니, 이건 다큐멘터리가 아니라면서 탈락시키더라. 화가 나서 그냥 시나리오를 써보자 했다. 이 영화와는 전혀 상관없는, 언니가 미국에 가서 딸과 만난다는 내용이었다. 근데 그 시나리오도 떨어졌다. (웃음) 결국 다큐멘터리인 척하는 기획서를 써서 펀드를 받게 됐다. 이후 언니와 대화를 주고받으며 내용을 조금씩 만들어갔다. 처음에는 언니가 남편의 머리를 잘라서 끌고 간다는 설정만 존재했고, 그 공간이 저승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언니에게 집주인이 찾아와서 방을 빼라고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 무렵, 죽음에 대한 압박감이 커지면서 언니 그림에는 저승사자가 계속 나왔고. 그렇게 자석 달라붙듯 이야기가 하나둘씩 탁탁 들어오기 시작했다.
박경태_ 기본적으로 인순 아주머니의 말과 그림에서 영화적 장치를 가져왔다. 동시에 죽음에 관해 조사하며 뺏벌 일대를 여러 차례 돌아다녔다. 그 과정에서 아이디어를 많이 얻었다. 하루는 재개발로 사라지는 무연고 묘에 갔다가 우연히 묘지기를 만났다. 그들과 대화하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식이었다. 촬영할 때마다 주변 상황에 맞춰 유연하게 움직였던 것 같다. 처음에는 인순 아주머니가 마을 당산 앞을 지나가는 장면을 찍으려고 했다. 본래 한 할머니가 작게 당집을 지어 놓고 치성을 올렸던 곳인데, 어느 날 외지에서 무당들이 몰려와서는 장사한다고 진을 쳤더라. 나무에 오방띠까지 걸고, 그곳을 아주 비주얼하게 만들어 놨다. 그 풍경을 찍어보자 했는데, 무당들이 영화 촬영이라는 얘기를 듣더니 자꾸 돈을 요구했다. 굳이 그런 거래를 하면서까지 찍을 이유는 없다고 판단했고, 차라리 수락산 계곡에 더 집중하자 싶었다. 그곳에서 워낙 많이들 돌아가셨으니까. 매일 그런 식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처하고, 다음 이야기를 생각하고, 그 속에서 새로운 게 나오고. 인순 아주머니와 같이 저승을 갈 사람을 고를 때도 그랬다. 누구로 할까? 클럽에서 일하는 꽃분이는 ‘지박령’ 같은 존재이니, 좀 더 운동성 있는 꽃분이가 가면 좋겠다. 그때 저승사자 셋이 한꺼번에 그들을 쫓아다니기보다는 따로 나오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럼 배우 성향을 고려해서 저승사자마다 성격을 부여하자. 이렇게 아이디어를 하나씩 이어나가는 과정이었다.
일전에 인터뷰에서 “박인순의 컨디션에 따라 그때그때 진행이 달라”졌다고 했다. 김아해, 신승태, 신윤숙, 조은경 배우 또한 작업 특성으로 즉흥성을 꼽았다. 배우들이 말한 “즉흥적 작업 스타일”이 뭘 의미하는지 궁금하더라.
김동령_ 애초 역할이 없는 상태에서 배우를 섭외했다. “죄송하지만 아직 역할을 정하지는 못했어요. 아마도 인순 언니의 그림에 등장하는 누군가가 될 것 같습니다.” 오디션 때도 연기를 보여달라고 하지는 않았다. 인순 언니와 상호 작용할 수 있는지, 우리 스타일을 이해하고 같이 즐기면서 갈 수 있는지 봤다.
박경태_ 너무 바쁘셔도 안 됐다. 왜냐면 우리가 준비를 마쳤다고 해도, 그날 아주머니 컨디션이 안 좋으면 촬영할 수 없으니까. 늘 “근데 오늘 못 찍을지도 몰라요”라고 말씀드렸다. (웃음) 촬영 전에 다들 아주머니 집에 와서 같이 밥 먹고, 뜨개질하고, 산책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들이 박인순이라는 사람과 어떻게 교감하는지 관찰하는 과정이 중요했다. 처음에는 나이가 제일 많은 변중희 배우에게 대장 저승사자 역할을 맡길까 했는데, 아주머니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니 그 느낌이 아니더라. 변중희 배우는 오랫동안 교직생활을 하신 분이고, 몸에 선생님의 태도가 자연스레 배어 있다. 인순 아주머니를 만나자마자 바로 상담가 같은 모습이 나왔다. ‘오케이, 그럼 새로운 캐릭터를 하나 만들자.’ 본래 외부인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김아해 배우가 맡은 작가 하나뿐이었는데, 변중희 배우를 보며 교수 캐릭터를 떠올리게 됐다.


저승사자가 셋이나 등장하고 이들끼리도 좀처럼 의견 일치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이 재미있다. 영화 속 저승사자는 인간의 “이야기”를 판단하는 권력을 쥔 자들이다. 말하자면 박인순 씨가 대적하는 상대인데, 엔딩에 다다를수록 ‘셋이서 하나를 못 당해 내는구나’ 싶더라.
박경태_ 윤금이만 어떻게 기적처럼 알려졌지, 그 외에 수많은 기지촌 여성은 기록도 없이 사라지지 않았나. 죽음에 의미를 부여받지도 못하고, 제사도 못 지낸다. 그런 맥락에서 이들에게는 찾아갈 저승이 없다고 설정했다. 저승사자는 그 논리를 대변하는 역할이다. 본래 두 명을 생각했다가 승태 씨를 섭외하면서 셋으로 늘었다. 저승사자는 기지촌 여성의 죽음을 대하는 다양한 입장과 태도를 바탕으로 만들어낸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공무원과 활동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들여다보는 구경꾼, 원리 원칙을 중시하는 지식인 등을 모티브로 삼았다. 대장 저승사자는 그 모든 시각을 아우르며 판단하는 역할인데, 김미숙 배우의 성격을 고려해서 활동가 같은 모습을 더했다. 현장에서 활동하듯 이들에게 이야기를 만들어주고, 저승으로 데려가보자 했지. 근데 저승사자 마음대로 안 되는 거다. 결국 외부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건 이름 아닌가. 성노예 생존자냐 성노동자냐, 성매매냐 매춘이냐. 그런 식으로 이름을 앞세우는데, 정작 당사자는 테두리에 갇히기를 거부하는 거다.
클럽 ‘NEW WAVE’에서 촬영한 장면에 관해 듣고 싶다. 영화에서 죽은 자와 산 자가 동시에 머무는 환상적 공간으로 나오는데, 이때 카메라를 수평으로 이동하며 박인순과 저승사자를 비추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한쪽에서는 저승사자들이 ‘이야기’의 진위를 둘러싼 논의를 거듭하는가 하면, 다른 쪽에 앉은 박인순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거울을 들여다보며 가발을 쓰고 화장하는 등 치장에 열중한다.
김동령_ 그날은 한 마디로 난장판이었다. (웃음) 골이 빠개지겠다 싶을 만큼 힘들게 촬영했다. 처음에는 클럽 주인이 돈을 안 받는다고 했다. 오래 머물면서 장면을 차근차근 만들어나갈 생각이었는데, 촬영 전에 주인이 갑자기 돈을 요구했다. 시간에 제약이 생기니 마음이 급해지더라. 바쁘게 움직이며 동선까지 미리 정했는데, 결국 현장에서 많은 것이 달라졌다.
박경태_ 본래 인순 아주머니가 등장하는 장면이 아니다. 외부인의 토론 장소처럼 세팅했거든.
김동령_ 귀신 한 명이 서빙하는 가운데, 저승사자끼리 모여서 대화한다는 설정이었다. 근데 당일에 인순 언니가 클럽으로 들어오겠다고 우기는 거다. 고민하다가 언니가 입장하는 장면을 찍고, 한쪽에 잠깐 앉아 계시라 했다. 하지만 언니는 말을 안 들으셨지. 계속 카메라 앵글 안으로 왔다 갔다 했고, 급기야 촬영 도중에 갑자기 밖에 나갔다. 그러더니 옷을 갈아입고 나타나더라. 처음엔 언니를 말렸는데, 점점 나도 포기하게 됐다. 화장도 마찬가지다. 저승사자들이 분장하는 모습을 보더니, 인순 언니가 다시 클럽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화장품을 잔뜩 갖고 돌아오셨다. 자기가 더 세게 할 수 있다면서. (웃음)
박경태_ “잠깐만, 지금 말고!” 외치면서 레일을 깔았다. 카메라 움직이면서 “이제 화장하세요!” 하고.
김동령_ 거기에 다른 언니들까지 구경을 오시면서 클럽은 거의 무슨… 페데리코 펠리니의 <8과 1/2>(1963) 촬영하는 줄 알았다.
박경태_ 그런 상황에서 승태 씨가 노래하는 장면이 나왔다. 누나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는데, 통제가 안 됐다. 미안하지만 노래 좀 해줄 수 있냐고 승태 씨에게 부탁했다. 민요는 물론이고, 트로트도 너무 잘 부르거든. 누나들이 되게 좋아했다.
김동령_ 그날 촬영 끝나고, 승태 씨에게 따로 연락이 왔다. “감독님, 근데 뭘 찍는지 모르겠어요. 영화가 원래 이런 거예요?” (웃음)
클럽 신에서 박인순 씨는 무척 다양한 표정을 보여준다. 대장 저승사자가 옆을 지나갈 때, 그의 옷자락을 만지는 모습이 떠오른다. 어린아이 같기도 하고, 삶에 미련 한 줌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김동령_ 인순 언니에게 설명했다. 저승사자들이 언니의 과거에 관해 말할 때, 유심히 듣는 언니 얼굴을 찍겠다고. 근데 언니는 심각하지가 않은 거다. 옷을 세 번이나 갈아입을 정도로 들뜬 상태였으니까.
박경태_ 그래도 양색시 사이에서 내려오는 이야기가 나올 때는 꽤 집중했지.
김동령_ 대장 저승사자가 “옛날 옛날에” 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놓지 않나. 인순 언니와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데, 그때도 옆에서 “그렇지, 맞아!” 하며 추임새를 넣더라.
박경태_ 아가씨들은 늘 ‘포주의 끝은 안 좋다’는 서사를 만든다. 근데 돈을 번 포주 대부분은 지금 미국에서 잘 살거든. 목사부터 별의별 사업가가 다 됐다. 물론 기지촌을 못 떠나고 끝까지 남은 포주들의 말로는 안 좋다. 마을도 쇠락하고, 애들은 깡패가 되고. 그러다 한 포주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면, 아가씨들이 거기에 귀신이라든지 복수 서사를 덧붙인다. 근데 들여다보면, 아가씨들을 정말 못살게 군 사람은 따로 있다. 가족. 우리 생각에는 고아가 위험할 것 같지만, 사실 생존 여성 중에는 고아 출신이 많다. 오히려 가족 있는 분들이 일찌감치 목숨을 끊으셨다. 다들 자기 딸, 여동생이 양색시 됐다는 걸 어떻게 알고 찾아와서는 돈을 뜯어 가더라. 포주가 돈 떼어가고 나면, 다음에는 오빠가 들어와서 술값 내놓으라고 때리는 식이다. 그런 고통을 당하는데,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나.
김동령_ 언니들한테는 미군보다 가족이 힘겨웠을 거다.
짧게 등장하지만, 궁금한 인물이 둘 있다. 귀신 꽃분이(신윤숙)가 동네를 헤매며 저승사자에게 쫓길 때, 한 여인이 문을 열고 들어오라며 손짓한다. 저승사자가 코앞까지 오지만, 결국 여인은 문을 닫고 꽃분이를 데려가지 못하게 막는다. 영화에서는 “살아 있는 동료”라고 여인을 가리키는데.
박경태_ (김)경순 누나라고, ‘마마상’으로 오래 일하셨다. 애초 <나와 부엉이>의 주인공으로 생각했던 분이다. 통솔력 있고, 똑똑하고, 유머 감각도 풍부하다. 박정희 정부 시절, 가출 청소년이 되면서 근로재건대에 갔는데, 거기서 ‘왕초’였다고 하더라. 재건대든 기지촌이든 둘 다 위계질서 뚜렷하고, 서열을 중시하는 곳이다. 누나는 어릴 적부터 아랫사람 다루는 법을 익혔던 거다. 그 안에서 자기 ‘가족’도 만들고. 한번 언니, 동생 하고 나면 죽을 때까지 인연이 이어지거든.
김동령_ 경순 언니가 경태 씨와 나를 대하는 태도가 좀 다르다. 경태 씨에게는 확실히 “얘는 내 패밀리” 같은 느낌이라면, 나는 여전히 약간…
박경태_ 차가운 데가 있지. (웃음) 난 워낙 어릴 적부터 봤으니까. 기지촌에서 살던 시절을 떠올려보면, 밤에 소주 한 잔 먹는 순간 꼭 싸움이 벌어졌다. 그때 싸움을 중단시킬 수 있는 유일한 이가 경순 누나였다. 힘을 써서 제압하는 게 아니라, 유머로 긴장을 탁 꺾어버리는 거다.
김동령_ 지금도 경순 언니 카리스마는 대단하지.
박경태_ 누나 모시고 서울에 와서 같이 영화도 보고 밥도 먹고 싶은데, 그러지를 못해 아쉽다. 젊었을 적에 마약을 하셨거든. 후유증으로 어지럼증이 심해서 이동을 어려워하신다.
다른 한 사람은 엔딩 크레디트에 ‘죽음’으로 등장하는 김명선 씨다. 박인순이 저승에 갈 때 입는 옷을 짓고 또 입혀주는 인물이다. 김명선 씨는 실제 옷 만드는 일을 오래 해온 분이고, 단편 <실>(이나연, 조민재, 2020)에서도 봉제 노동자로 출연했다. 섭외 과정에서는 어떤 대화를 나눴나.
김동령_ 우리와 만났을 때는 연기 경험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 안선경 감독님이 진행하는 연기 워크샵을 통해 배우 공고를 냈는데, 소식을 접한 이나연 감독님이 김명선 씨를 촬영해서 보내줬다. 영상에서 본인 꿈에 관해 이야기하셨다. 뭐랄까, 그냥 사람이 참 예쁘더라. 실제로 만나서 대화하며, 오랫동안 옷을 만들어오셨다는 걸 알게 됐다. 문득 인순 언니를 위한 옷을 한 벌 지어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명선 씨가 인순 언니 집으로 와서 직접 치수를 쟀는데, 둘을 지켜보니 궁합이 재미있더라. (웃음) 어떻게든 출연시켜야겠다고 생각했지. 이후 옷 만드는 과정을 구경하러 김명선 씨 일터에 찾아갔다. 그 공간도 굉장히 흥미로웠다. 영화를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과정’이라고 본다면, 이 또한 하나의 과정이니 찍어 두자 싶더라. 완성한 옷을 언니에게 입혀주는 장면까지 촬영했을 때도 이게 죽음인지 뭔지 몰랐다. 편집하면서 이름을 붙였다, 죽음이라고.
보통 죽은 자에게 입히는 수의와는 전혀 다른, 검은색과 붉은색을 사용한 화려한 의상이 눈에 띈다. 디자인은 누가 했나. 박인순 씨가 사전에 요구했던 부분도 있나.
김동령_ 의상은 김명선 씨와 박인순 씨, 둘의 ‘콜라보’ 작품이다. 인순 언니는 어릴 적에, 그러니까 처음 뺏벌에서 몸을 팔 때부터 옷에 엄청나게 집착했다. 언니 눈에 예뻐 보이는 옷이 딱 있는 거다. 한복을 입고 다녔는데, 일일이 주문 제작했다고 하더라. 긴 소매는 싫으니 줄여 달라거나, 한복에도 주머니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김명선 씨가 처음 언니 집에 방문했을 때, 옷감 샘플을 여러 개 들고 왔다. 인순 언니가 그중 마음에 드는 천을 골랐고, 상의 길이라든지 주머니 위치 등 세부사항도 전달했다. 원래 옷만 부탁드렸는데, 김명선 씨가 모자까지 만들어주셨다.


엔딩 크레디트에 최승자의 시와 리앙의 소설을 ‘부분인용’으로 기재했더라. 어떤 장면에 사용했는지 말해줄 수 있나.
박경태_ 내레이션 시작과 끝, 두 군데 정도 들어갔다. 사실 인용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변형했는데, 영화를 보는 분들께 레퍼런스를 알려드리자는 의도로 적었다.
김동령_ 최승자 시인은 시에서 죽음을 많이 다룬다. 죽음에 관한 묘사나 태도가 이 영화의 내레이션 톤과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만 작가 리앙의 소설 『눈에 보이는 귀신』에도 영향을 많이 받았다. 글에 등장하는 표현과 개념을 각색해서 사용했다. 다음 영화에서는 엔딩 크레디트를 논문 참고문헌처럼 만들지 않을까 싶다. 레퍼런스가 어마어마하게 들어갈 예정이다.
박경태_ 지금 세상에 순수 창작이라고 할 만한 것이 어디 있나. 영화도 순수 창작이라고 볼 수는 없고, 우리처럼 독립영화 만드는 사람들은 어차피 엔딩 크레디트에 쓸 것도 적다. ‘어벤져스’ 시리즈 보면, 5분 지나도 엔딩 크레디트가 계속 올라가는데. (웃음)
김동령_ 우리는 스태프라고 해봤자 두 명뿐이니까.
박경태_ 엔딩 크레디트가 길어야 할 이유는 없지만, 그 역시 하나의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에는 관련 도서를 포함한 모든 레퍼런스를 엔딩 크레디트에 정리해보려고 한다.
20년 가까이 기지촌이라는 공간과 그 안에 존재하는 인물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말그대로 “이야기”가 몸에 덕지덕지 달라붙는 느낌 아닐까. 그런 맥락에서 보면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또 다른 길을 열어주는 출구 같기도 하다.
김동령_ 출구가 맞다. <거미의 땅>까지만 해도 ‘기지촌이란 무엇인가?’ 또는 ‘기지촌 여성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나름대로 답하고자 노력했던 것 같다. 상대의 고통과 비참한 현실을 계속해서 봐야 했고, 매번 정면으로 마주하려 애썼다. 과거 작업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그 모든 과정이 실은 참 힘들었다. 출연자들이 우리에게 의존하는 일도 종종 벌어졌다. 관계를 감당하기가 벅찰 때면, 내가 곧 모래알처럼 산화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근데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에서는 질문이 ‘기지촌에 관한 이야기들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로 바뀌었다. 이야기 안에만 머물지 않고, 바깥으로 나갔던 거다. 기지촌을 둘러싼 담론을 살펴보며 외부와 내부를 오가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인순 언니의 ‘쿨한’ 태도에 힘입어서 우리도 경쾌하게 작업했던 것 같다. 물론 <거미의 땅>도 즐거웠지만, 이번과 비교하면 확실히 무거웠거든. 제목도 ‘땅’ 아닌가. 중력이 엄청나게 강한 곳. 그러다 ‘나무와 도깨비’로 오면서 공중에 살짝 뜬 것 같다. 이런 기운이 이어져서 다음 영화는 어딘가로 좀 더 날아가지 않을까 싶다.
앞으로 두 감독의 작품에 어떤 변화가 찾아올지 기대된다.
김동령_ 현장과 현실에 기반하지만, 추상적 개념에 관해 이야기하게 될 듯하다. <거미의 땅>에 나오는 박묘연 할머니를 통해 1969~1970년에 기지촌을 촬영한 8mm 필름을 소개받았다. 미국에서 필름을 입수했고, 현재 기증받은 상태다. 그 필름을 바탕으로 사랑에 관한 이야기, 사랑이 노동의 형태를 띤다는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특정 대상 혹은 역사가 아니라, 한 시공간을 지배하던 개념을 파헤치는 작업이다. 지금 편집하는 중이고, 올해 6월까지는 완성하는 게 목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