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11월 13일, 평화 시장 노동자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청계천 다리에서 제 몸에 불을 붙였다. 열악한 노동 현실을 고발하는 한 청년의 갈급한 호소는 수많은 시민, 그리고 청계피복노동조합원을 포함한 여러 노동자에게 끈질기게 가 닿았다. 7년이 흐른 1977년 9월 9일, “제2의 전태일은 여자가 되어야 한다!”고 외치며 농성에 뛰어든 사람들이 있다. 미싱공이자 청계피복노동조합원이었고, 여성 청소년이었던 이들의 의지는 강력했다. 그들은 법정 모독으로 억울하게 투옥된 이소선의 석방을 요구했으며, 무엇보다 배움의 터전이 돼준 노동 교실을 되찾고자 했다. 다만, ‘구구 투쟁’의 결말은 그리 환하지 않다. 경찰은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고, 농성 참가자는 차례로 구속된다. “영화를 시작할 때, 주변에서 왜 실패한 사건을 다루느냐고 그랬어요. 아직도 그 말이 너무나 생생한데, 사실 성공 여부는 중요하지 않아요. 우리는 여성 노동자들의 마음을 그리고 싶었던 것이지, 성공한 사건을 기록하려던 게 아니거든요. 실패한 사건이라 해도 인간을 위해서라면 다뤄야 한다고 봐요.” 감독의 말대로 <미싱타는 여자들>은 사건의 경로를 추적하는 데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영화가 따라가는 것은 사건을 둘러싼 마음과 세월을 감당하는 인간의 얼굴이다. 김정영, 이혁래 감독은 대화 중에 자주 ‘우리’라는 말을 썼다. 우리 선생님, 우리 주인공, 우리 영화. 2018년에 운명처럼 ‘미싱타는 여자들’을 만나서 꼬박 4년을 함께하는 동안, 눈물겹고 가슴 벅찬 시간이 두껍게 쌓였다. “유신 시대의 풍경”이나 “전태일의 배경”이 아닌, 그 자체로 빛나는 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불러주고 싶었다는 두 감독의 진심은 그렇게 새해를 맞이했다.
두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이다. 혜성 같이 등장한 신인이거나 재야의 고수일 거라 짐작했다.
김정영_ 둘 다 아니다. 아, 이혁래 감독은 재야의 고수 맞지. 난 50살 넘어서 시작하니까 다들 갱년기 감독이라고 놀리더라. (웃음)
알고 보니 ‘영화제작소 청년’에서 함께 활동한 사이더라. 김정영 감독은 기획, 제작, 투자 분야에서 일했고, 일찌감치 네티즌 투자를 시도했던 인츠닷컴에 재직한 경력도 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김정영_ 계속 영화 프로듀서로 일했고, 2014년 무렵부터는 서울문화재단에서 진행하는 삼풍백화점 붕괴 관련 인물들의 생애사 아카이빙 작업에 2년 가까이 참여했다. 피해생존자, 구조대원, 변호사, 백화점 직원, 의료진, 자원봉사자 등을 만났고, 이들의 이야기를 엮어 <1995년 서울, 삼풍 구술집>을 펴냈다. 그때 많이 배웠다. 누구를 어떻게 섭외하는지, 대화를 원활하게 끌어나가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또 인터뷰를 거절하는 사람을 설득하는 방법까지. 알다시피 프로듀서는 기다리는 게 일이지 않나. 마냥 기다리면서 시간을 보내긴 싫어서 그 작업을 열심히 했다. 이후 서울시에서 공장 노동자를 대상으로 진행하는 구술 프로젝트를 제안받았다. 그때 청계피복 출신의 봉제 노동자를 찾는 과정에서 이숙희 선생님과 박태숙 선생님을 만났다. 사실 삼풍백화점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갈증을 느꼈다. 나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인데, 책만 내놓고 마무리하는 게 아쉽더라. 두 분을 인터뷰하는 순간, 영화를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미싱타는 여자들>까지 오게 된 거다.
연출은 그간 경험해온 영화 일과는 사뭇 다른 경험이었을 텐데, 어떻게 결심하게 됐나.
김정영_ 본래 나는 기획과 프로듀서를 맡고, 연출은 다른 감독에게 제안할 생각이었다. 계속 작업을 함께해온 장희선 감독에게 의뢰했는데, “지금까지 사전 인터뷰하고 아카이빙한 사람이 언니잖아. 누구보다 언니가 가장 잘 아는 이야기니 잘 해낼 거야.”라면서 직접 연출해보라고 하더라. 태어나서 처음 듣는 말이었다. 감독이 되겠다고 생각해본 적조차 없는데, 장희선 감독이 독려해준 덕분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때부터는 절실하게 앞만 보고 달렸다. 선생님들께 허락을 구한 뒤, 기획안을 준비해서 영화진흥위원회 제작 지원에 응시했다. 심사 면접에 갔는데, 너무 떨리더라. 내가 나이도 제일 많고. (웃음)
감독의 의지와 노력 없이는 불가능한 프로젝트였다. 영화를 왜 만들고 싶었나. 여성 노동자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에 책임을 느꼈나.
김정영_ 영화진흥위원회 제작 지원이 결정된 후, 전태일재단을 찾아갔다. 여성 노동자를 주인공으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고 말씀드리니, 다들 역으로 제안을 시작하시는 거다. 감독님이 말한 작업도 필요하지만, 전태일의 친구라든지 관련 사건 등 아직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가 많다고. 근데 내 마음은 그대로였다. 당시 평화시장 노동자가 2만 5천 명 정도였고, 그중 80%는 여성이었다. 절반이 훨씬 넘는 숫자인데, 아무리 찾아봐도 여성 노동자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더라. 그분들의 이야기만 모아도 유의미한 작업이 되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이거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제목도 벌써 정했다고 하니, 재단 분들이 알겠다면서 막 웃으시더라. (웃음) 그렇게 도움받겠다고 인사드리고 나왔다.


이혁래 감독은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다양한 작품을 연출, 조감독, 촬영, 편집했다. 공식 필모그래피에 기재된 마지막 작품은 <각하의 만수무강>(김경만, 2002)이던데, 20여 년간 영화 바깥에서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궁금하다.
이혁래_ 영화 일이라는 게 일종의 투기 아닌가. 리턴이 확실치 않은 상태에서 긴 시간을 배팅하는 일. 그게 나와는 좀 안 맞았던 것 같다. 2006년쯤 현장을 떠났고, 한동안 영화 일을 안 했다. 학교와 미디어센터에서 강의는 조금씩 했지만, 그걸 영화 일이라고 할 수는 없고. 사실 김정영 감독에게 처음 제안받았을 때는 딱히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1년 정도 지나서 다시 연락을 받았는데, 마침 별다른 일 없이 쉬던 때였다. 후딱 해보자 싶더라. 이미 작업해놓은 것도 있다고 하니, 2-3개월이면 완성할 수 있겠다고 봤다. 말하자면 배팅할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고 여겼던 거다. 이렇게 작업에 마음을 쏟을지도, 코로나19가 올지도 모르고서. (웃음)
오랜 친구이고 동료이지만, 이혁래 감독은 현장을 꽤 오랫동안 떠나 있었다. 김정영 감독은 왜 이혁래 감독과 작업을 함께하고 싶었나.
김정영_ 옛날에 영화제작소 청년에서 활동할 때, 장희선 감독의 <고추 말리기>(1999)를 같이 찍었다. 극과 다큐멘터리가 혼합된 영화인데, 특히 이혁래 감독이 촬영한 비디오 부문에 마음이 갔다. 혁래가 인물을 담는 방식, 그때 카메라에 들어온 사람들의 표정이 되게 좋더라. 20년 동안 혁래를 알아오면서 늘 ‘얘는 천재구나’ 했다. 촬영도 촬영이고, 무엇보다 편집 능력이 탁월하다. 일전에 기획 피디를 맡은 작품으로 부산국제영화제 피칭에 참여했을 때, 혁래한테 영상 작업을 의뢰했다. 그런 자리에서는 내용도 중요하지만, 일단 영상이 압도적이지 않나. 영상을 틀었더니 사람들이 다 몰려와서 보더라. 다시 한번 확인한 순간이었다. ‘역시 천재가 맞구나!’ (웃음) 혁래에게 두 번째로 제안했을 때, 흔쾌히 수락해줘서 기뻤다. 2019년 하반기인데, 그때만 해도 나 역시 금세 작업을 마무리할 거라 예상했다. 이미 메인 인터뷰를 완료하고, 주인공의 친구분들까지 섭외해놓은 상태였다. 혁래 말대로 두 달 정도면 가능하겠구나 싶었지.
2개월이 결국 2년이 됐다. 코로나19도 커다란 변수였겠지만, 이혁래 감독이 들어오면서 또다른 고민이 시작됐을 거라 본다.
이혁래_ 2019년 가을, 그러니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피칭에 참여하기 직전에 들어갔다. 피칭 영상을 만들며 그동안 촬영한 인터뷰를 쭉 확인해 보니, 일단 인물들이 굉장히 매력적이더라. 처음에는 여러 갈래의 기획이 존재했는데, 현재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세 분에만 딱 집중하면 이야기가 나오겠구나 싶었다. ‘굳이 장르를 정하자면, 이거는 사회 드라마가 아니라 멜로 드라마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전부터 바라던 작업을 여기서 해볼 수 있을 듯했다. 내가 스티븐 스필버그 팬이거든. (웃음) 흔히 ‘스필버그 페이스’라고 하지 않나. 스필버그 영화에서는 주제와 메시지가 인물의 표정을 타고 흐른다. 그런 식으로 감정적 반응을 일으키는 작업을 줄곧 해보고 싶었는데, 출연자들이 이미 그걸 하고 있더라. 특히 임미경 선생님은 엄청나게 풍부한 표정을 갖고 계신다. 그런 매력을 느끼는 순간,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길어질 수도 있겠는데?’ 했다.
이혁래 감독이 합류하기 전에는 어떤 일을 진행했나.
김정영_ 처음 1년 동안은 사람들 만나려고 쫓아다니는 게 일이었다. 신순애 선생님은 출판사에 부탁해서 연락처를 구했다. 뒤늦게 성공회대에 입학하신 후, <열세 살 여공의 삶>이라는 책을 쓰셨거든. 서울시에서 의뢰받은 프로젝트를 준비할 당시, 그 책을 인상 깊게 읽었다. 이숙희 선생님은 박태숙 선생님께 소개를 받아서 2018년 1월경에 처음 뵀다. 노동조합 선전국장까지 맡으셨던 분이기에, 자연스레 선생님을 통해 청계상가에 얽힌 역사를 들을 수 있었다. 시기도 잘 맞았다. 선생님은 본인 인생을 정리하며 책을 쓰고 싶어 하셨는데, 때마침 내가 나타났던 거다. 영화를 찍겠다고 하니 적극적으로 도와주셨다. 임미경 선생님은 그해 12월이 돼서야 만났다. 오래 조르면서 설득했다. 2019년 4월부터 3개월에 걸쳐서 주인공들의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다. 노동조합에 입문하고 노동교실에 다니던 시절부터 수감 생활, 그 이후의 삶까지 천천히 들었다. 사실 ‘구구 사건’은 그분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은 기억이고, 80년대에도 계속 경찰에 쫓겨 다니거나 블랙리스트에 올라 취업이 막히는 등 무척 힘들게 사셨다. 고민하다가 영화에서는 80년 전까지만 이야기하기로 결정했다. 가장 드라마틱한 내용이기도 하고, 그분들이 자랑스러워하는 기억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미술과 음악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한 편의 아카이브 영상 전시를 보는 듯하고, 공원에서 미싱을 돌리는 오프닝 역시 일종의 퍼포먼스처럼 다가온다.
김정영_ 우리 둘이 가장 먼저 같이 찍은 장면이 바로 오프닝이다. DMZ인더스트리는 피칭에 앞서 튜터링 프로그램을 제공하는데, 그때 김일권 피디가 멘토 역할을 했다. 두 가지 조언에 굉장히 도움을 받았다. 하나는 너무 분석하려고 들지 말라는 거였다. 출연자들의 이야기만 잘 모아도 충분히 감동적이라고. 그리고 이런 말을 덧붙이더라. “이분들 모셔 놓고 그냥 인터뷰만 하는 게 아니라, 뭔가 다른 걸 해야 한다. 실제로 이분들이 ‘미싱타는’ 장면이 나오면 어떻겠냐.” 피칭 학교를 마치고 이혁래 감독이 연출자로 들어왔을 때, 그 말을 전달했다.
이혁래_ 처음에는 이미 찍은 영상으로 뚝딱 만들어내려 했는데, 피칭을 겪으면서 생각이 좀 달라졌다. 소재의 진정성에는 다들 공감했지만, 어딘가 부족하다고 여기는 듯했다. 이를테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현재에, 2022년의 관객에게도 통할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었다. 피칭 끝나고 미팅을 기다리는데, 우리 테이블에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관심을 너무 못 받으니 오기가 생기더라. 좀 더 공을 들여서 만들어보자고 결심했다. 그때 답답한 마음에 기분 전환이라도 할 겸 임진각 평화누리공원에 갔다. 집이 화곡동이라 종종 놀러 가거든. 나중에 ‘미싱타는’ 장면을 찍기로 한 순간, 그곳이 딱 떠올랐다. 4-50년 전에 출연자들은 굉장히 어둡고 좁은, 공기도 안 좋은 데서 일하지 않았나. 이분들이 한 번쯤은 확 트이고 밝은 곳에서, 쾌청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미싱을 돌리면 좋겠다 싶더라.
김정영_ 한편, 기획 단계부터 ‘평화시장 옥상에서 뭔가를 해야 해’라고 생각했다. 2018년에 이숙희 선생님과 만났을 때부터 그곳을 주기적으로 방문했다. 아주 매력적인 공간이다. 아래에는 청계천이 흐르고, 앞에는 동대문과 산이 보인다. 옛날 평화시장 노동자도 옥상에 올라오면 그 풍경을 봤을 것 아닌가. 주변 환경이 변하고 마천루가 들어섰다 해도, 하늘과 개천은 그대로다. 그곳에 서서 북쪽 하늘을 바라볼 때면, ‘그들도 이런 풍경을 봤겠지’ 싶었다. 줄곧 옥상에서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뭔가’는 물음표로 남아 있었다. 이혁래 감독을 만난 후, 계속 아이디어를 주고받다가 엔딩 장면을 구상하게 됐다.
노석미 화가가 주요 출연자인 신순애, 이숙희, 임미경을 인터뷰하고 초상을 그린다. 노석미는 주로 풍경과 정물, 고양이 등을 그리는 작가인데, 어떤 인연으로 작업을 함께했는지 궁금하다.
김정영_ 내 절친이다. 작업실에도 노석미의 <노를 젓자!>라는 그림을 걸어놓았다. 영화 만드는 동안, 매일 그림을 봤다. 노를 젓지 않으면, 여기서 중단하면 죽는다는 심정으로. (웃음) 나 혼자였다면, 석미에게 같이 하자고 못 했을 거다. 가장 친한 친구, 그것도 다른 분야의 창작자와 함께 일한다는 게 어렵지 않나. ‘석미를 끌어들일 만큼 내가 영화를 잘 만들 수 있나?’ 생각도 들고. 근데 이혁래 감독이 뭘 고민하냐는 듯 단번에 석미를 지목하더라. 갑작스러우면서도 왠지 모르게 힘이 났다. 혁래 감독이 들어오면서 자신감이 생겼거든. 그저 인터뷰만 붙여 놓은 기록 영상이 아니라, 관객들이 흥미롭게 볼만한 영화를 만들 수 있겠구나 했지. 스필버그 좋아한다고 하잖아. (웃음) 용기가 나서 “그럼 내가 노석미를 꼬셔 볼게!” 했다.


이혁래 감독이 노석미 화가를 고집한 이유는 뭐였나.
이혁래_ 오래 생각했는데, 확신을 얻은 건 DMZ인더스트리에 참가했을 때다. 카페테리아에서 아침 식사를 하다가 우연히 핫독스 수석 프로그래머 앤지 드리스콜을 발견했다. 사실 누군지 몰랐는데, 옆에 있던 김영덕 프로듀서가 가장 ‘핫’한 분이라고 일러주더라. (웃음) 영문 번역한 기획서를 들고 가서 무작정 말을 붙였다. 내 영어 실력이 바닥날 즈음, 김영덕 프로듀서가 대신 전달하고. 내가 느끼기엔 거의 봉준호와 샤론 최처럼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웃음) 그때 앤지 드리스콜이 “좋은 소재이긴 하나, 다른 전략이 필요하다”고 했다. 제3세계 아동의 노동이 최근 프로그래머들의 관심을 끌 만한 주제는 아니라고. 그러면서 “예를 들면 애니메이션을 활용한다든지?”라고 덧붙였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노석미 작가가 떠올랐다.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지만, 이미 작가를 섭외했다면서 노석미 작가의 그림을 보여줬다. 그랬더니 앤지 드리스콜이 정말 흥미로워하는 거다.
김정영_ 혁래가 이런 사람이 아닌데, 영어를 쓸 때만 무대포가 되는 것 같다. (웃음)
이혁래_ 정영이 항상 하던 얘기가 있다. “이 영화는 평화시장 여성 노동자들의 10대 시절을 그리는 영화가 될 거야.” 실은 이전까지 그 말이 뭘 뜻하는지 잘 안 들어왔다. 근데 앤지 드리스콜이 노석미 작가의 그림을 보다가 “이분들은 어쩌면 자신이 틴에이저인지도 모르고 틴에이저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네요?”라고 말하는 순간, 이거구나 싶더라. 나는 두 차례에 걸쳐 영화의 방향을 깨달은 셈이다. 처음에는 ‘이 영화는 멜로가 될 거야’라고 생각했고, 다음에는 ‘이 영화의 주인공은 청소년이구나’라고 받아들였다. 이를 구현해내는 과정에서 노석미 작가의 그림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해줬다. 사실 처음 제안했을 때는 노석미 작가도 거절했다.
김정영_ 완강했지. 나중에 전화 와서는 “언니니까 한다”고 하더라. 그날은 진짜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이혁래_ 노석미 작가를 설득하기 위해 사진과 글을 모아서 자료를 만들었다.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레 영화의 톤 앤 매너를 정리했던 것 같다. 노석미 작가의 인터뷰 질문 중 몇 가지는 사전에 따로 부탁드린 것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무슨 색이 떠오르세요?”라는 첫 질문이 그중 하나였다. 정영 감독이 좀 뜬금없다 싶은 질문으로 시작하면 좋겠다고 의견을 냈거든.
영화에 출연하기로 마음먹기까지 힘들었겠다는 노석미 작가의 말에 임미경 씨는 “억울하고 아픈 기억”이자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고 답하며 눈시울을 붉힌다. 다시 돌아보고 말하기까지 출연자마다 용기가 필요했으리라 본다.
김정영_ 사실은 이야기를 정말, 정말 많이 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인터뷰를 쉽게 허락하시는 분이 거의 없었다. “우리 아들도 모르고, 시댁도 모른다. 내가 평화시장에서 일한 것조차 모른다.”라며 피하시는 분들이 다수였다. 근데 대화의 물꼬를 트면, 그때부터는 말이 쏟아졌다. 말하고 싶은데 말하지 못한 것, 그게 한으로 남았던 것 같다. 이순자 선생님은 심지어 이런 비유도 하셨다. 위안부 피해 생존자가 증언했던 것처럼 우리도 직접 말해야 하는구나 싶다고. 사안은 다르지만, 그만큼 기록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달았다는 뜻이었다. 한편, 어떤 분은 인터뷰를 마친 후에 두려움을 고백하시기도 했다. 지나치게 많은 이야기를 한 것 같다며, 영화에는 안 나왔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
그런 말을 들을 때는 마음이 복잡했을 것 같다.
김정영_ 나는 그분들의 집을 다 찾아가지 않았나. 어떻게 사시는지 보고 나면, 숙연한 마음이 든다. 사실 주인공 세 분은 비교적 안정적인 삶을 꾸리셨다. 지금은 다른 일을 하시고, 뒤늦게 대학도 나오셨다. 근데 여전히 미싱을 타시는 분들도 많다. 그럼 시사회나 영화제 같은 행사에 참석하기가 어려우니, 같이 영화를 볼 수가 없는 거다. 아직도 늦게까지 일하고, 주말에도 출근하시니까. 그럴 때는 가슴이 정말 아프다.


출연자의 증언은 전부 새롭고 저마다 특별했을 텐데, 이를 수집하고 선별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방향은 뭐였나.
김정영_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해외에 알렸다는 이유로 추방당한 조지 오글 목사가 말했다. “80년대 중반 남성 노동자들의 대투쟁은 70년대 정의로운 여성 노동자들의 어깨 위에서 가능했다.” 조지 오글은 산업화 시대의 한국에서 선교 활동하며, 여성 노동자가 어떻게 권리를 주장하고 투쟁했는지 지켜봤으니까. 근데 대투쟁의 근간이 된 여성 노동자 이야기가 없어도 너무 없는 거다. 물론 동일방직이라든지 YH 사건에 관한 영화가 있지. 다만, 나는 좀 더 폭넓게 다가갈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누구나 접근 가능한 대중 영화. 그렇게만 완성하면 소원 성취라고 여겼다.
이혁래_ 한편으로는 사건의 성격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했다. 동일방직과 YH는 사건 자체가 매우 크다. 사회적인 파장도 엄청났고. 근데 우리 영화에서 다루는 ‘구구 사건’은 그렇게 유명하거나 영향력을 지닌 사건이 아니다. 사실 ‘구구 사건’이 없어도 70년대 한국 노동사는 쓰일 수 있다. 근데 그 사건을 빼놓으면, 우리 영화에 나오는 한 분 한 분의 인생은 설명이 안 되거든. 바로 그 지점이 중요했다. ‘구구 사건’의 사회적 의미를 떠나서, 그날의 일이 이분들에게 어떤 감정을 가져왔는지 들여다보기로 했다. 77년이면 벌써 45년 전 아닌가. 근데 영화를 찍기 전까지는 이분들이 사건에 관해 대화를 나눈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하시더라. 말도 꺼내지 못할 만큼 상처가 컸던 거다. 우리가 정답을 찾았다거나 기록에 100% 성공했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사건의 성격을 고려하며 기존과는 다른 길을 찾아내려 노력했다.
인터뷰 세팅이 흥미롭다. 단독 인터뷰도 있지만, 둘이 주고받는 대화가 풍부하게 나온다. 그때 인물들은 서로 조각난 기억을 맞추며, 과거의 시절과 순간을 떠올린다. 말하는 얼굴뿐만 아니라, 듣는 얼굴이 나란히 등장하니 여운이 진하더라.
이혁래_ 흔히 다큐멘터리는 진실을 기록하는 매체라고 하지 않나. 이제 인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웃음) 어쨌거나 진실이라고 믿는 것, 진실이라고 믿게 할 수 있는 것에 접근해야 한다고 봤다. 내용의 진실성도 중요하지만, 우리 영화에서 그보다 중요했던 건 반응이다. 진실한 반응을 잡아낼 방법을 재차 궁리했다. 기본적으로 세 종류의 반응을 담고 싶었다. 화자의 반응, 청자의 반응, 그리고 후면에 설치한 스크린을 통해 과거 자료를 마주한 두 사람의 반응까지. 보통 다큐멘터리에서 사용하는 AB 롤 편집과는 다르게 가고 싶었다. 연출자가 제3자적 관점으로 중간에 자료화면을 끼워 넣는 방식이 아니라, 실제 현장에서 출연자가 그것을 직접 보고 반응하길 바랐다. 기억을 떠올리며 말하고 들을 때, 서로 추억을 공유할 때 얼굴에 스치는 표정에 주목했다. 그러다 보면 사건이 아니라, 사건으로 인해 생겨난 마음의 흔적을 담을 수 있지 않을까 했거든.
스크린 앞에서 임미경과 임경숙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떠오른다. 두 사람이 오래된 앨범을 같이 펼쳐보는 듯한, 앞서 말한 대로 “멜로 드라마”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김정영_ 두 분이 정말 특별한 사람이다. 연예인 하셨으면 잘 어울렸겠다 싶을 정도로 매력이 넘치거든. 날카로운 말도 되게 부드럽게 하시고, 어떤 주제로 대화하든 참 재미있다. 임경숙 선생님 일화가 하나 떠오른다. 아드님이 둘인데, 그중 한 분이 어느 날 “엄마, 저 노동조합에 들어가야겠어요” 했다더라. 그때 선생님이 놀라지도 않고 “그래, 네 권리는 스스로 찾아야지” 하면서 노동 3권을 쭉 읊으신 거다. 갑자기 무당처럼 말이 마구 터져 나오니 아드님은 당황하지. “엄마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 “내가 왜 몰라?” (웃음) 이전까지 아드님은 임경숙 선생님이 과거에 어떤 활동을 했는지 전혀 모르셨다고 하더라. 시사회에 두 분이 함께 오신다고 해서 기대하는 중이다.
임미경이 수감 생활할 때 받았던 편지를 낭독하는 장면이 있다. 당시 현장 분위기가 궁금하다.
김정영_ 굉장히 밀도 높고 긴장감이 팽팽하게 흘렀던 현장으로 기억한다. 다 울었지. 스태프 대부분은 그날 처음 온 분들이었다. 정재은 감독에게 연락해서 촬영 스태프를 수소문했고, 소준문 감독도 촬영하러 와줬다. 그런데도 두 분이 대화를 시작하자, 다들 숨죽이고 집중했다.
이혁래_ 두 분이 말하는 순간, 공기가 확 달라졌다. 현장에서는 영화에 나온 것보다 감정의 강도가 훨씬 셌다. 거의 통곡하다시피 했고, 편집에서 들어내야 할 정도로 감정이 컸다.
김정영_ 임미경 선생님께 그 편지를 미리 받던 날, 당시 친구들이 보낸 크리스마스 카드를 함께 건네주셨다. 일일이 손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그것만 봐도 눈물이 나더라. 거대한 십자가 아래 사람들이 개미처럼 모여 있는데, 십자가에는 ‘근로조건 개선’이라고 쓰여 있다. 카드를 여니 미안하다는 문구가 바로 보였다. 당시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싸움에 임했는지 느껴지더라. 동시에 소녀 시절의 감성도 딱 드러나고. 그때 속으로 ‘나중에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옛 친구에게 편지를 쓰거나 그들과 다시 만나면 좋겠다’ 생각했다.
그처럼 증언뿐만 아니라, 편지, 사진, 공소장, 문집, 푸티지 영상 등 과거를 담은 다양한 자료가 등장한다. 이것들을 취합하고 배치하는 과정은 어땠나.
이혁래_ 출연자들이 우리를 믿고, 소장하고 계신 자료를 흔쾌히 넘겨 주셨다. 처음부터 일반적인 사진이나 영상은 쓰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이분들이 유신 시대의 한 풍경처럼 보이지는 않길 바랐거든. 김정영 감독도 여성 노동자들이 항상 전태일의 배경으로 남는 것에 아쉬움을 표했고. 공적인 기록이 아니라, 집단적이면서도 사적인 기억을 담은 영화로 완성하고 싶었다.
김정영_ 선생님들께 사진을 받자마자 놀랐다. 머리는 딱 숏컷으로 자르고 여의도에서 자전거를 타는 모습, 얼마나 멋진가. 당시 사람들이 여공이니 뭐니 하며 미싱공을 멸시했다 한들, 이들은 사실 기술자로서 자부심이 굉장했거든. 임미경 선생님은 그때를 이렇게 회고하셨다. “우리는 멋쟁이잖아. 친구들하고 동대문에서 종로 1가까지 쭉 걸어가면, 바보 같은 대학생들이 자꾸 말을 붙여.” 선생님의 표현이 참 당당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선생님은 일찌감치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니, 대학생이라는 이들의 말이 얼마나 어리고 또 공허하게 들렸겠나. 그런 기억들, 장롱에서 꺼내 주시는 사진들 하나하나가 숨겨진 역사였다.
이혁래_ 사진을 보며 한참 놀라다가 아차 했다. 전태일 사후 50년 동안, 우리가 평화시장 노동자에 관해 오해한 부분이 있구나 싶더라. 옷을 만들던 분들이지 않나. 패션업계 종사자에게 패션 감각이 뛰어나다며 감탄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 (웃음) 물론 그 외에도 굉장히 많은 자료가 필요했는데, 뜻밖에 기회가 생겼다. 당시 주인공을 포함해서 청계피복 노조원 55인이 국가 폭력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 중이었다. 2심 재판에서 쟁점은 손해 사실 여부가 아니었다. 손해 사실은 인정하지만, 이들이 해당 노조원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할 자료가 부족하다는 거였다. 평화시장은 소규모 사업장이 운집한 형태이고, 당시 고용도 불안정했기에 제대로 된 직업 명부가 없었다. 담당 변호사의 표현이 인상적이었다. “존재 증명이 안 되는 존재”라고 하더라. 결국 누군가 증거 자료를 만들어야 했는데, 그때 원고측 대표였던 이숙희 선생님이 우리에게 SOS를 치셨다. 덕분에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수장고에 들어가서 청계피복 관련 문서 자료를 열람할 수 있었다. 전태일 기념관에서도 노조원이 기증한 사진을 살펴 봤다. 문서에 등장하는 이름을 정리하고, 단체 사진 속 얼굴을 대조하며 증거 자료를 만들었다. 호적상 이름과 노조 활동 당시 이름이 상이한 분들의 경우, 결혼식 사진을 받아서 동일 인물임을 확인했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영화에 필요한 자료를 모았다. 더불어 인물들을 식별할 수 있게 됐고, 출연자의 신뢰까지 얻었으니 정말 운이 좋았다.
엔딩에서는 11명의 청계피복노동조합원이 과거 일터였던 상가에 들어선다. 복도에서 본인의 젊은 시절 사진을 마주하고 나면, 옥상으로 올라가 노동교실에서 불렀던 ‘흔들리지 않게’를 합창한다. 출연자를 위한 선물처럼 보이는 장면인데, 어떤 마음으로 준비했는지 듣고 싶다.
이혁래_ 선물일 수밖에 없지. 굉장히 어렵게 모신 분들이거든. 계속 고사하다가 그날만 딱 오신 분들도 계셨고, 그게 아니더라도 다들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주신 것 아닌가. 선물 같은 시간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정말 열심히 준비했다. 문집도 제본해서 한 권씩 드렸고, 옥상에 내건 현수막에도 얼굴과 성함을 전부 넣었다. 합창할 때 표정이 좋았으면 해서 악보에도 신경을 썼다. 한쪽에는 악보를, 다른 쪽에는 선생님들의 젊은 시절 사진을 크게 붙여 놓았다. 일종의 깜짝 선물이었던 셈이다. 악보를 딱 펼쳤을 때, 사진을 발견하시고는 다들 무척 좋아하시더라.
김정영_ 통일상가에 헌팅을 하러 가서 복도에 들어서는 순간,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우리가 더 꾸미지 않아도, 여기에 빔프로젝터만 놓으면 설치 미술 같은 효과가 나겠더라. 한 분씩 어두운 미로를 걷다가 밝게 빛나는 자기 사진을 발견하는 걸 상상하니, 정말 ‘와따!’겠구나 싶었지. 같은 동네에 사는 박종혁 작가에게 연락해서 도와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박종혁 작가는 물론이고, 부인까지 함께 설계부터 설치까지 너무 정성스럽게 도와주셨다. 촬영장에 와서 옥상 세팅까지 봐주고. 사실상 1일 미술감독을 해주신 거나 다름없었다. 모든 게 생각했던 대로 흘러가는, 기적 같은 날이었다. 2018년부터 옥상에서 뭔가를 하겠다고 생각했지만, 꿈에 가까웠다. 옥상을 빌리기가 워낙 어려우니까. 감사하게도 당시 전태일재단 사무총장이었던 박계현 총장님이 나서서 허락을 맡아주셨다. 힘든 일도 더러 있었지만, 그렇게 좋은 일도 계속 벌어졌던 것 같다. 제목 따라간다는 말, 난 일리 있다고 생각한다. ‘미싱타는 여자들’답게 어떻게든 굴러갔다. (웃음)


출연자를 포함해서 함께 마음을 더해준 동료가 많다.
이혁래_ 우리끼리는 우스갯소리로 “이거 김정영 고독사 프로젝트 아니야?”라고 했다. 정말 이 영화에 모든 인맥을 끌어왔거든. (웃음) 사실 우리 프로덕션 규모로는 만들어낼 수가 없는 엔딩이었다. 평화의 나무 합창단과 작업하기로 이야기는 됐는데, 막상 편곡한 음악을 받아 보니 걱정이 앞섰다. 음악 스케일이 너무 큰 거다. 이걸 무엇으로 채워야 하나 싶어서 머리가 아프더라. 차라리 작업이 중단되길 바랄 정도였는데, 음악 녹음까지 마쳤다는 연락을 받았다. 합창으로 도달하기까지 필요한 장면을 계속 구상했다. 출연자들의 반응을 끌어내려면, 통제할 요소가 너무 많았다. 하나라도 삐끗하는 순간, 감정이 무너지기에 보안도 잘 유지해야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영상 콘티를 만들었다. 미리 시각화해놓고 촬영에 들어간 거다. 근데 첫 촬영을 시작하니까, 조미자 선생님이 사진 앞에 딱 서니까 말이 안 나오더라. 인터뷰해야 하는데, 한 5분 정도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마법 같은 시간이었고, 진이 다 빠지는 경험이었다.
다들 한자리에 모이는 날이라 더 긴장했겠다.
김정영_ 근데 진행 자체는 순조로웠다. 선생님들께 “이게 중요한 장면 연출이라서 비밀을 꼭 지켜주셔야 해요”라고 부탁드렸더니 “감독님, 우리 조직 활동했던 사람들이에요” 하시더라. (웃음)
이혁래_ 이야기가 전혀 새어 나가지 않았지.
김정영_ 다들 보안 의식 투철하고, 시간 약속도 칼 같이 지키시고. 옥상에서 선생님들의 내공을 다시금 느꼈다. 구호를 외쳐야 할 순간에 구호를 외치듯, 그렇게 노래를 부르시더라.
이혁래_ 앞서 말한 박종혁 작가님을 포함해서 많은 분이 도움을 주셨다. 그날 안해룡 감독님이 사진을 찍어주러 왔다. 그냥 사진만 찍어준 게 아니라, 1일 매니저 역할을 하고 가셨다. 출연자들이 평화시장 내부에 있는 명동 다방에서 대기했다. 11명을 인터뷰해야 하는데, 말이 터지면 한 분당 30분을 훌쩍 넘겼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어서 걱정이 컸다. 그때 안해룡 감독님이 출연자들 지루하지 않도록 계속 사진을 찍어주고 분위기를 만들어줬다. 돌이켜보면 그동안 쌓아온 인연이 거기에 다 모였던 것 같다. 합창할 때는 박성도 음악감독이 앞에서 지휘를 해줬다. 큰 촬영마다 와준 청년필름의 조윤진 피디, 김경진 감독, 송현준 촬영감독에게도 고맙다. 그분들 없었다면, 영화를 이렇게 완성하지는 못했을 거다.
김정영_ 엔딩을 찍고서 무척 벅차올랐다. 개봉이라는 큰 산이 남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참 뿌듯하더라. 우리가 해냈구나, 꿈에만 그리던 장면을 정말 해냈구나 싶어서.
그 힘을 받아 개봉까지 잘 달려왔다.
김정영_ 근데 코로나19 때문에 걱정이다. 아카이빙 작업을 할 때, 인터넷에만 영상이 올라가서 아쉬웠다. ‘이럴 게 아니라, 영화를 만들어야겠다. 인물의 표정과 모습을 커다란 스크린으로 보여주고 싶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영화를 만드는 동안 상황이 완전히 바뀐 거다. 요즘에는 다들 OTT 콘텐츠에 집중하지 않나. 극장에서 영화를 보기가 어려운 세상에, 꼭 극장에서 봐야 할 영화를 내놓았으니… 내심 ‘우리 뭐 했지?’ 싶다. 세상을 거슬러 가면서 만들었다. (웃음)
<미싱타는 여자들>이 오랜만에 극장을 찾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두 감독의 다음 행보는 어떻게 되나. 영화를 바탕으로 전시나 공연 등을 열 계획도 있는지 궁금하다.
이혁래_ 하고 싶은 건 많다. 노석미 작가의 그림뿐만 아니라, 영화에 등장하는 여러 사진과 문서 등도 전시하면 좋겠다. 완성본에 들어가지 않은 아웃테이크들도 함께 상영하고. 사실 편집하면서 이 영화가 10부작 드라마의 파일럿 같은 느낌을 받기는 했다. 여건이 마련된다면, 전시나 공연 등을 통해 이야기를 폭넓게 풀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