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똑바로
<드라이브 마이 카> 박유림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Interview / 2021-12-22

발레를 배운지 두 달쯤 됐다. 처음엔 조금이나마 유연해지고 싶어서 시작했는데, 지금은 거울에 제 몸을 비춰보는 시간에 의미를 둔다. 고요하고 우아한 선율을 따라가다 보면, 평소 자주 긴장하는 탓에 말려 들어간 어깨와 굽은 등이 눈에 들어온다. 중심 없이 늘어지는 게 싫어서 박유림은 몸을 곧게 세워본다. “바른 자세로 서면 내면도 정리가 좀 되는 것 같아요. 아직은 부들부들 떨면서 버티고 있지만요.” 그러고 보면 박유림은 올겨울에 여러 가지를 새로 시작했다. 춤을 추고, 운전면허를 취득했다. 데뷔작 <드라이브 마이 카>의 개봉을 앞두고 인터뷰도 처음 해본다. 박유림은 이 모든 경험을 “신기한 일”이라고 말한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드라이브 마이 카> 오디션을 제안받은 순간부터 놀라움은 끊이지 않았다. 평소라면 무섭기만 했을 오디션이 선물처럼 다가왔고, 현장에서 예상치 못한 감정을 느낀 것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무엇보다 박유림은 이상하리만치 용감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솟아났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카메라 앞에서 그렇게 연기할 수 있었다는 게 너무 신기해요.”  

영화에서 박유림은 유나와 소냐, 두 개의 이름으로 불린다. 본래 무용수였으나 임신과 유산을 거치며 춤을 출 수 없게 된 유나는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가 연출하는 연극 <바냐 아저씨>의 오디션에 참여한다. 국적과 언어, 경력이 저마다 다른 배우들 속에서도 유나는 유독 돋보인다. 목소리가 아닌 수어를 통해 소통한다는 점도 그렇지만, 특유의 맑고 단단한 기운이 대사에 힘을 싣는다. 연극에 참여한 소감을 묻는 가후쿠에게 유나는 “용기를 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라고 전하고, 막이 내리기 전 소냐는 괴로움에 지친 바냐 아저씨를 끌어안고 “우리 계속 살아가도록 해요”라고 설득한다. 박유림이 보기에 유나와 소냐는 한 인물처럼 닮아 있었다. 물러서거나 도망치는 대신, 정면을 마주하려 애쓴다는 점에서 두 사람 모두 용감했다. 인터뷰 말미에 박유림은 제 용기의 기원을 찾아냈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유나가 연극에서 재미를 느낀 것처럼 저도 영화를 찍으며 즐거웠어요. 인물들의 감정과 에너지가 제게 옮겨 왔나 봐요.”

 

 

<드라이브 마이 카> 외에는 영화 출연작이 없다.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 오디션을 볼 때, 처음부터 유나 역을 희망했는지도 궁금하다.

우연히 유나 역으로 오디션을 제안받았다. 처음에는 줌을 통해 감독님과 인사했고, 2차 오디션 때는 감독님이 서울로 오셨다. 영화에서 유나가 연극 <바냐 아저씨>의 오디션을 보는데, 실제 오디션에서 그 장면을 연기했다. 감독님이 당장은 수어를 멋대로 만들어도 좋으니 함께 보여달라고 하셨다. 연기를 마친 후에는 시나리오에 관해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라면?

감독님께 하고 싶은 말을 달달 외워서 갔다. 혹시라도 깜박할까 싶어서 대본집 앞장에 해야 할 말을 순서대로 써놓기까지 했다. 내가 시나리오를 어떻게 읽었는지, 얼마나 이 작품에 참여하고 싶은지 말씀드렸다. 나는 유나와 내가 그리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가후쿠라는 인물에는 왠지 감독님의 모습이 담겨 있을 것 같기도 했고. 오디션이 끝날 무렵,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보라고 시간을 주시더라. 속으로 무척 반가웠다. 난 그것도 미리 준비했거든. (웃음) 원래 적극적인 성격이 전혀 아닌데, 그때는 이상하리만치 용기가 났다. ‘감독님이 안 물어보셔도 이 말은 하고 가야겠다’ 마음을 다잡는 중에, 먼저 얘기해주시니 다행이다 싶었다. 수어로 끝인사를 했다. 감독님이 무슨 뜻이냐고 물으시더라. “다음에 만나면 그때 알려드릴게요” 하고 나왔다.

 

‘궁금하면 합격시켜라!’ (웃음)

연락이 안 오면, 정말로 알려드리지 않으려고 했다. 2차 오디션을 마무리하고 친구랑 밥을 먹다가 전화를 받았다. 내일 아침에 한 번 더 볼 수 있겠냐고. 그렇게 3차 오디션을 봤다. 남편 윤수 역을 맡은 진대연 배우와 함께였다. 연기를 마친 후에 감독님이 어땠는지 물으셨다. 평소 긴장을 많이 하는데, 대연 배우와는 굉장히 편안하게 대화를 나눴다. 항상 웃는 얼굴이거든. 밝고 여유로운 사람이구나 싶었다. 감독님께도 그런 기분을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이전 오디션에서 마지막에 했던 말은 알려 줬나. 

아니, 묻지를 않으시더라. 까먹으신 것 같다. (웃음)

<드라이브 마이 카>
<드라이브 마이 카> 촬영 현장

뭐라고 했나.

“여러분과 꼭 함께하고 싶습니다.”

 

캐스팅 소식 들었을 때, 무척 기뻤겠다. 

그때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중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돌이켜보면 신기할 따름이다. 그전에는 오디션을 힘들게 여겼다. 마음처럼 안 되는 일이 워낙 많다 보니, 제안이 들어와도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근데 이번에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하고 싶다!’ 했다. 오디션을 준비하는 동안, 작품에 푹 빠졌던 것 같다. 친구랑 대화하다가도 종종 딴생각에 잠기는 바람에, 핀잔을 듣기도 했다. 

 

유나를 가깝게 느낀 것 같다. 어떤 사람이라고 봤나. 

몸으로 표현하는 사람. 감독님한테도 그렇게 말씀드렸다. 오토(키리시마 레이카)가 몸으로 뭔가를 쓰는 사람이라면, 유나는 몸으로 말하는 사람 같다고. 유나는 그런 과정을 통해 결핍을 극복하고, 용기를 얻는다고 봤다.

 

유나는 영화의 모티브가 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 소설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다. 소설 <드라이브 마이 카>보다는 <바냐 아저씨>를 공들여 읽었으리라 짐작한다.

맞다, 시나리오와 희곡을 여러 차례 읽었다. 두 작품은 맞닿아 있고, 유나와 소냐 또한 아주 다른 인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바냐 아저씨>를 반복해서 읽다 보니, 유나를 만들어나가는 데도 도움이 됐다.

 

어떤 부분에서 힌트를 얻었나.

소냐 역시 자신이 원하는 사랑을 얻지 못한 채, 늘 비슷한 굴레에 놓이지 않나. 그런데도 끝내 포기하지 않고, 상대에게 같이 살아가자고 말한다. 용감한 모습이 인상 깊게 다가왔다. 유나도 마찬가지다. 소냐가 일상을 유지하며 한계를 극복해 나간다면, 유나는 연극이라는 새로운 장에 도전한다. 임신과 유산으로 인해 춤을 못 추게 됐지만, 좌절하기보다는 다시 밖으로 나오려 하는 거다.

박유림 ⓒ이영진 

강단 있는 인물이다. 맑고 곧은 에너지 덕분에, 천사나 도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근데 거듭 말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겁이 많고, 움츠러드는 편이다. 다만, 내 입으로 “유나는 용감한 사람이에요”라고 했으니, 나도 계속 용기를 내는 수밖에. (웃음) 오디션 볼 때도, 촬영장에서 연기할 때도 평소와는 다르게 임하려고 노력했다.

 

극중에서 수어를 사용한다. 목소리를 들려줄 수 없어서 아쉽지는 않았나.

아쉽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수어를 배우는 일 자체가 새로운 경험이어서 다른 곳에 신경 쓸 여유도 없었고. 다들 애써서 준비해주셨는데, 내가 귀찮거나 힘들다고 넋 놓으면 안 되겠더라. 수어 선생님이 두 분 계셨다. 리딩할 때부터 촬영 마칠 때까지 늘 옆에서 모니터링해주셨고, 그때그때 부족하거나 틀린 부분을 바로잡아주셨다. 대사 준비에도 도움을 많이 받았다. 여러 단어 중에 유나와 가장 어울릴 만한 동작을 찾아서 한 문장 한 문장 정성스레 준비해주셨고, 나는 그걸 습득하기만 하면 됐다. 

 

표현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점은 무엇인가.

감정도 감정이지만, 일단 정확하고 자연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선생님과 내 동작을 비교하면서 최대한 똑같이 하려고 했다. 영상을 보면서 계속 따라 했고, 아침에도 눈뜨자마자 수어 연습부터 했다. 툭 치면 바로 나올 정도로 몸에 익히고 싶었다. 감독님이 “중간중간 내가 어떻게 연기하면 좋겠다고 이야기하겠지만, 어쨌거나 내 말보다는 유림 씨에게서 나오는 걸 소중히 여겨야 해요”라고 하셨다. 그 말을 믿으려고 했다. 수어로 대화할 때는 손뿐만 아니라, 표정을 많이 쓴다. 현장에서 내가 느끼는 바에 온전히 집중하려면, 손동작을 완벽하게 숙지한 상태여야겠더라.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영어, 한국 수어까지 5개 언어를 혼용하는 독특한 현장이었다. 배우와 스태프는 어떤 식으로 소통했나. 히로시마에 머무는 동안 즐거운 에피소드가 있다면.

진대연, 안휘태 배우는 일본어를 할 줄 아는데, 나는 일본어와 영어 둘 다 못해서 늘 통역이 필요했다. 하지만 소외감을 느낀 적은 없다. 서로의 언어를 쓰려고 노력하는 현장이었다. 감독님도 간단한 인사말 정도는 한국어로 하셨고, 리딩하러 가면 스태프분들이 먼저 “안녕하세요”라며 말을 걸어주시기도 했다. 수어를 배울 때도 혼자라는 생각은 안 들었다. 옆에서 물어보면 알려주고, 같이 해보고. 그런 순간이 기억에 남는다. 촬영 마치면 “고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같은 인사를 수어로 했다.  

 

<바냐 아저씨> 상연 장면에서는 긴 독백을 해내야 했다. 이때 유나는 가후쿠를 뒤에서 끌어안고 말하는데, 두 배우가 감정을 나누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지더라.

감독님이 아이디어를 내셨다. 감독님은 촬영 전에 시간을 충분히 주면서, 배우가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준비할 수 있게 해주신다. 니시지마 씨와 몇 차례 맞춰본 후에, 혼자서도 오래 연습했다. 그때는 베개를 끌어안고 말했지. (웃음) 내가 불편하지 않아야 니시지마 씨도 편안하게 연기할 수 있겠더라. 그렇게 익숙해지는 과정을 거쳤다. 

박유림 ⓒ이영진 

불편함이 없도록 준비할 수 있게 해준다는 건 구체적으로 뭘 의미하나. 

감독님은 긴장이나 불안이 카메라에 담기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셨다. 촬영하다가 ‘나 지금 좀 불편한데? 이렇게 해도 되나?’ 의문이 들면, 그냥 넘어가는 대신 곧장 물어봤다. 연습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궁금증을 해소하고 방향을 제대로 확인하는 일이 중요했다. 혼자 불안한 채로 준비했다가 현장에서 우왕좌왕하면 안 되니까. 앞서 말한 장면의 경우, 편하게 연기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아무래도 연습 초반에는 쑥스럽더라. 어떻게 끌어안아야 하는지, 어떤 각도로 서야 두 배우의 얼굴이 잘 담길지 천천히 조율해 나갔다.

 

그러고 보면 질문을 한다는 것도 용기를 낸 일이겠구나 싶다. 

사실 내가 질문하기도 전에, 감독님이 벌써 눈치를 채시는 것 같더라. “궁금한 거 있어요?” 하며 늘 질문할 기회를 주셨다. 감독님이 먼저 물어봐 줬기에, 나도 좀 더 수월하게 이야기했던 것 같다. 촬영장에서 만나면 “유림 씨, 오늘 기분은 어때요? 컨디션은 괜찮으세요?” 물어보셨고.

 

연기 디렉팅에서 감독이 특별히 강조한 부분이 있다면. 

하나부터 열까지 디렉팅하는 방식은 아니었다. 인물이 여러 명 등장할 때 동선을 맞추는 정도이고, 그 외에 감정 표현이나 개인적 움직임은 배우들에게 맡기셨다. 촬영 전에는 항상 이렇게 말씀하셨다. “느끼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만약 느껴지는 바가 없다면, 아무것도 안 해도 됩니다.” 

 

영화에서 가후쿠가 요구하는 리딩 방식, 즉 감정을 배제하고 전화번호부 읽듯 대본을 반복해서 외우는 것은 실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사용하는 방식과 동일하다. 이런 과정은 연기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처음에는 내가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기대가 되더라. 실제 촬영에서 내가 어떻게 할지, 상대는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리딩하다가 문득 ‘이건 뭔가를 미리 설정하지 않도록 준비하는 시간이구나’ 깨달았다. 생선 살 바르듯 생각을 하나씩 벗겨나가는 거다. 어떤 감정으로 이 대사를 해야겠다거나 여기서 울어야겠다거나 하는 식으로 먼저 계획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걸 비워내는 작업인 셈이다. 내게는 연기뿐만 아니라,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데도 도움을 주는 과정이었다. 나는 뭔가를 바로바로 해내라고 하면 당황하거든. 이번 작업 덕분에 영화와 천천히 친해질 수 있었다. 처음 촬영했던 날이 떠오른다. 유나가 오디션을 보는 장면이었다. 긴장했지만 설렘이 더 컸다. 이전까지는 전화번호부 읽듯 말했다면, 이제 처음으로 감정을 느낄 테니까. 끝나고 나서 감독님과 상대 배우에게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을 느끼고 또 주고받으면서 연기한다는 게 참 재미있구나 싶더라. 

 

원하는 대로 하라는 말이 부담스럽지는 않았나. 

감독님을 향한 믿음이 무척 컸다. 내 걱정으로 인해, 함께 리딩했던 시간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감독님은 나를 유나로 선택했고, 그럼 나도 나를 믿어야 했다. 혼자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 중얼거리며 나를 세뇌했다. (웃음) 무엇보다 나는 그곳에 뭔가를 하려고 가지 않았나. 내가 움츠러들어서 할 일을 제대로 못 하면, 그 자리에 설 이유도 의미도 없어지는 거다. 할 수 있다고 되뇌었고, 해내야만 했다. 감독님이 자신감을 가져도 된다고 재차 격려해주셨다. 평소라면 뭔가를 느껴도 가만히 있었을 텐데, 그때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진짜 느끼는 대로 움직였다. 

박유림 ⓒ이영진 

연기할 때, 감독을 의식했나. 

그렇지는 않다. 상대방에게 엄청나게 집중해야 하는 현장이거든. 지금 여기에서, 두 사람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뭔가에 열중하다 보니, “컷!” 소리가 나기 전까지는 감독님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다른 배우들도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바냐 아저씨> 상연 장면의 경우, 보통의 나라면 그렇게 집중하기 어려웠을 거다. 큰 극장이고, 지켜보는 이도 워낙 많았다. 그때도 주눅 들지 않으려고 계속 혼잣말을 했다. “집중해야 해, 집중해.” 신기하게도 촬영이 다가올수록 생각이 없어지더라. 촬영 전에는 해당 장면의 의미라든지 중요성에 관해 곱씹기도 했지만, 무대에 섰을 때는 딱 눈앞의 상대만 보였다.  

 

니시지마 히데토시와의 호흡은 어땠나.

편했다. 곁에 있으면 분위기가 부드러워진다고 해야 하나. 계속 촬영하는 중이라 바쁠 텐데도 이것저것 챙겨주려고 하는 게 느껴졌다. 먼저 말도 걸어주시고. 다른 배우들과는 촬영 없는 시간에 같이 밥 먹고 산책하면서 많이 가까워졌다. 

 

그렇게 촬영하고 나면, 완성된 영화를 볼 때까지 불안하기도 할 것 같다. 그 순간 내가 어떤 모습인지, 어떻게 연기했는지 나도 모르니까. 

맞다, 현장에서 배우들은 따로 모니터링을 안 했다. 사실 촬영을 마쳤을 때, 후회가 남는 부분은 없었다. 최대한 열심히 하자는 마음이었고, 매 순간 최선을 다했다. 다만,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얼떨떨했다. 내가 저렇게 걸었구나, 저런 표정을 지었구나, 저런 식으로 밥을 먹었구나. 그렇게 하나하나 확인하다 보니, 영화를 영화로 감상하기가 어렵더라. 게다가 스크린은 또 얼마나 큰가. 적나라하게 보여서 놀랐다. (웃음) 

 

유나가 가후쿠에게 “배우들도 그렇게 좀 칭찬해주세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혹시 감독에게 칭찬을 받은 적이 있다면.

가후쿠와 달리, 감독님은 칭찬을 많이 해주신다. (웃음) 누구 한 사람만 편애하는 것도 아니다. 가급적 모든 배우를 평등하게 대하려고 노력하시는 듯했다.

 

가장 기분 좋았던 칭찬은 뭔가. 

“素晴らしい(대단해요)” 첫 촬영 마치고 나서였다. 일어를 모르지만, ‘스바라시’는 곧장 알아들었지. (웃음) 

박유림 ⓒ이영진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전작도 좋아했나.

솔직히 <아사코>(2018)를 처음 봤을 때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단번에 이해하지 못했고, 리뷰와 인터뷰 등을 찾아 읽으면서 조금씩 내용을 파악했다. 본래 영화를 반복해서 보는 편이다. 시나리오도 정말 여러 번 읽고. 그래야 이해가 되고, 거기에서 재미를 느낀다. 근데 <드라이브 마이 카>를 준비할 때는 감독님이 어떤 분인지, <아사코>가 어떤 영화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오디션에 관해 듣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머릿속에 스위치가 켜진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생일 이틀 전에 연락을 받았는데, 나도 모르게 ‘이건 운명이야! 생일 선물이야!’ 했다. 너무 신기하지. 이전까지 오디션은 두렵고 힘든 일이었는데, 갑자기 선물이 된 거다. 

 

첫 영화인 데다, 심지어 해외 작품이었다. 촬영 전에 새로운 경험이나 변화를 기대하지 않았을까 싶다. 무얼 바라고 또 얻었는지 말해 본다면.

<드라이브 마이 카> 오디션을 보기 전에는 반쯤 죽은 듯했다. 살아 있지만, 죽은 상태나 다름없는 거다. 사람이 어떤 즐거움도 못 느끼거나 나태해지면, 눈에서 빛이 사라지지 않나. 동태 눈처럼. 내 눈이 그랬다. 내가 뭘 하고 사는지, 이걸 왜 하는지 모르겠더라. 오디션을 많이 봤는데 계속 결과가 안 좋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더라. 배우가 아니라, ‘오디션 보는 사람’이 내 직업인가 싶기도 했다. 그러다 <드라이브 마이 카>를 만났다. 오랜만에 새삼 살아 있다고 느꼈다. ‘그렇지, 나는 박유림이지. 지금 내가 이 세상에 서 있구나.’ 

 

연기는 어떻게 시작했나.

부모님께 연기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을 때가 수능 직전이었다. 타이밍이 정말 뜬금없었지. 수능을 치르고 나서 급하게 연기 학원에 다녔는데, 당연히 한 번에 붙을 리가 없잖나. 몇 년 동안 입시를 준비한 사람이 수두룩하니까. 결국 삼수해서 연극영화과에 갔다. 

 

혼자서 오래 고민하다가 수능 직전에 가서야 결정한 건가, 아니면 그때 갑자기 연기에 끌린 건가. 

어릴 적부터 직업적으로는 딱히 꿈이랄 게 없었다. 누가 물어보면, 때마다 유행하는 직업을 말하는 식이었다. 그러다 수능을 앞두고 여러 생각이 들었다. 주변 친구들을 살펴보니, 학과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이나 좋아하는 일을 찾더라. 나는 뭘 좋아하지? 그때 영화가 떠올랐다. 영화 보는 건 예나 지금이나 무척 좋아하거든. 서점에서 대본집을 한 권 사서는 무작정 읽기 시작했다. 연기가 궁금했지만, 한동안 혼자 마음에만 담아뒀다. 집에 놀러 온 친구가 그 대본집을 발견한 적이 있는데, 깜짝 놀라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우겼다. 뭐가 그리 부끄러웠는지 “비밀로 해줘” 부탁까지 하고. (웃음) 근데 시간이 지날수록 호기심이 커지더라. 어차피 연기 외에는 달리 하고 싶은 일도 없으니, 지금 가장 궁금한 분야를 경험해보자고 마음먹었다.

 

해보니 어땠나. 기대한 만큼 재미있던가.

어려웠고, 여전히 어렵다. 재미는 가끔 찾아온다. 대부분 시간에는 내가 뭘 하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나는 점점 표현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것 같다. 나를 보여주기 싫고, 여럿과 어울리기보다는 혼자 시간을 보내고 싶다. 근데 사람인 이상, 표현을 아예 안 하고 살 수는 없지 않나. 그때 연기는 내게 통로가 되어주는 것 같다. 연기하면서 속에 쌓인 에너지와 감정을 표출하고 나면, 다시 집으로 돌아가서 조용히 지내는 거다. 

박유림 ⓒ이영진 

혼자 있는 시간이 중요한가 보다. 그래야 체력과 마음을 회복하는 것 같고.

맞다, 언젠가 제주도에서 살아보고 싶다. <드라이브 마이 카> 오디션을 보기 전에는 해외에서 살아보는 게 꿈이었다. 2015년에 혼자 유럽을 여행했는데, 불현듯 ‘나 여기서 살고 싶다’ 생각했다. 가장 좋았던 점은 아무도 나를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무슨 행동을 하든 신경 쓰는 사람이 없다는 게 짜릿하더라. 코로나19로 해외여행이 불가능해지면서 어디 또 없을까 하다가 제주도에 갔다.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지내는 친구가 있거든. 친구 집에 놀러 가서 보니 굉장히 부럽더라. 비행기로 이동하니, 오히려 다른 지역보다 훨씬 빠르게 오갈 수 있고. 촬영이라든지 일이 생기면 서울에서 바쁘게 지내다가, 할 일을 마치면 제주도로 돌아가서 조용히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 마당에 고구마를 키워서 틈틈이 오일장에 내다 팔기도 하고. (웃음) 

 

단지 혼자 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외부 자극을 차단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건데.

서울에는 자극이 넘치고, 나는 거기에 취약한 편이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긴장도가 높아서 평소에도 깜짝깜짝 놀라고, 한창 예민할 때는 가족에게 미안해지는 순간이 생기기도 한다. 제주도에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면, 연기든 생활이든 좀 더 편안하게 소화하지 않을까 싶다. 

 

성격만 놓고 보면, 영화 작업을 힘들어하지 않을까 싶다. 촬영은 아주 많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을 반복하는 일 아닌가.

맞다, 내 성격과 잘 맞는 일은 아니다. 실은 되게 무섭다. 내가 이걸 왜 하지? 어떻게 하고 있지? 어쩌면 그런 두려움과 괴로움을 이겨 내고자, 혼자 편하게 머물 공간을 찾으려는 건지도 모르겠다. 연기를 그만두고 싶지는 않거든. 영화를 좋아하고 또 영화에 속하고 싶은 마음, 아직 그게 내 안에 남아 있나 보다. 처음에는 단순히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영화가 궁금했고, 함께 일하며 나도 뭔가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근데 이번에 <드라이브 마이 카>를 찍으며 무척 놀랐다. 한 편의 영화를 만들고 또 세상에 내보내기까지 이렇게 많은 사람과 노력이 필요한 줄 미처 몰랐거든. 소중하고 감사한 경험이다. 이번 작업을 통해 처음으로 작품에 소속감이란 걸 느껴봤다.

 

앞으로 작품을 선택할 때, <드라이브 마이 카>가 하나의 기준이 되겠다. 어떤 캐릭터를 맡고 싶은지가 아니라, 어떤 사람들과 어떤 분위기에서 작업하고 싶은지가 궁금해진다. 

나는 무척 느린 사람이다. 어릴 적부터 느리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지금은 단점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인정하려고 한다. 나는 관계든 일이든 편해지기까지 남들보다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그런 시간을 충분히 배려해주는 현장이었다. 앞으로도 내 속도에 맞춰서 천천히 갈 수 있는 작품을 만난다면 참 좋겠다. 근데 내가 이런 마음을 가져도 될까. 너무 욕심 같다. 

 

욕심 좀 부리면 어떤가. 실망하면 되지. (웃음)

아, 그럼 편하게 말할 수 있겠다. 저를 좀 기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웃음)

박유림 ⓒ이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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