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다함은 요즘 오토바이에 푹 빠졌다. 목적지 없이 달리며 바람을 만끽하는 시간, 그에게는 좀처럼 없던 여유다. 배우가 되기로 결심한 다음부터 권다함은 줄곧 목표를 향해 달렸다. 십 대 시절 우연히 관람한 뮤지컬 <루나틱>에 반해서 연기를 시작했고, 대학에서는 연극 무대에 연거푸 올랐다. 졸업 후 본격적으로 영화에 출연하면서 그는 자신에게 더더욱 엄격해졌다.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연기를 해내고 싶어서, 관객의 믿음을 얻고 싶어서 다음 작품을 열심히 찾았다. 서울독립영화제2021에서 상영하는 <그 겨울, 나는>은 긴 기다림 끝에 만난 소중한 작품이다. 첫 주연을 맡은 장편영화에서 권다함은 삶의 무게를 온몸으로 겪는 청년 경학을 연기한다. 돈에 쫓기며 꿈과 사랑에서 재차 밀려나는 경학 또한 오토바이를 탄다. 중고 오토바이에 몸을 싣고 배달 일을 다니는 경학은 한없이 위태로워 보이지만, 한겨울을 뜨겁게 통과한 지금의 권다함은 속도에 연연하지 않는다. “차를 운전하거나 대중교통을 타면 그냥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고 싶잖아요. 오토바이는 운전하는 과정 자체가 재밌어요.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도로가 막히든 말든 상관없어요. 당분간 그렇게 살아보고 싶어요. 내비게이션도 없이, 말 그대로 정처 없이 즐겁게.”
여러 단편에 출연했지만, 장편 주연은 처음이다.
장편 오디션을 세 번쯤 봤나? 장편은 주연으로 참여할 기회가 왔을 때 도전하고 싶어서, 그간 아주 적극적으로 지원하지는 않았다. 장편에 참여한다면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느껴보고 싶었다. 그래야 전 과정을 제대로 흡수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 작년 초부터 입버릇처럼 “올해는 나도 장편을 찍어보고 싶어”라고 주변에 말했는데, 신기하게 연말에 바람이 이뤄졌다.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든 건가?
나는 자극에 민감하고, 생각보다 빨리 싫증낸다. 단편 작업도 즐겁지만, 배우로서 이전과는 다른 호흡을 겪어보고 싶었다. 긴 호흡으로 연기하면 어떨지, 내가 얼마나 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일종의 시험이었던 셈이다. 조연으로 들어간다면 갈증이 남을 테고, 그때 배역을 핑계 삼을 듯했다. 애초에 내가 도망갈 수 없도록,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하고 싶었다. 사실 <그 겨울, 나는> 촬영 초반에는 후회도 했다. 경험이 없다 보니,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뭐라도 겪은 바가 있다면, 좀 더 수월하게 했을 것 같은데. 아쉬움이 남는 부분도 있지만, 아예 모르는 상태에서 부딪혔기에 그만큼 치열하게 작업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뭔가를 보여주고 싶다 혹은 보여줘야 한다는 마음에 불안한 적은 없었나.
영화를 시작하고 1년쯤 지나자, ‘내가 어떤 배우인지 보여줘야 해, 어떻게든 어필해서 상업영화로 빨리 진출해야 해’ 같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그냥 좋은 작품과 매력적인 배역을 만나고 싶었다. <그 겨울, 나는> 촬영 때도 뭘 보여주자는 마음은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 살아남을 수 있을까?’ 했지. (웃음)
뭘 그리 걱정했나.
처음에는 ‘내게 너무 안 맞는 캐릭터인가?’ 했다. 시나리오 속 경학은 지금처럼 살짝 반항적이거나 치기 어린 이미지는 아니었거든. 근데 단순하게 불쌍한 인물로 연기하면, 내가 흥미를 느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울퉁불퉁한 면이 있는 애가 무너지고 쓰러져야 좀 더 현실적으로 가닿지 않을까. 결국 감독님이 내 의견을 수용하며 다듬어준 덕분에 인물을 완성해낼 수 있었다. 다만 감독님에게도, 나에게도 경학이 익숙한 인물은 아니었다. 둘 다 이전과는 다른 방식을 시도했는데, 우리만 좋으면 어쩌나 싶어 무서웠다. 생각해보면 시작할 때부터 불안을 공유했다. 3차까지 오디션을 봤는데, 늘 마지막 대화에서는 ‘우려’라는 단어가 나왔다. 권다함이라는 배우가 연기했을 때, 관객들이 호감 어린 시선으로 바라볼지 우려된다고. 오디션에서 그런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은 감독은 처음이었다. 근데 묘하게 믿음이 생기더라. 3차 오디션까지 거치는 동안, 내 해석을 유지했다. 감독이 걱정하면서도 나를 계속해서 부른다는 건, 1퍼센트라도 가능성을 봤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부산국제영화제 인터뷰 때 오성호 감독이 배우를 향해 큰 애정을 표현했다. 인터뷰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사랑해요, 권다함.” (웃음)
나도 놀랐다. 성호 형이나 나나 그렇게 마음을 표현하는 사람이 아니다. 따뜻한 말을 낯간지러워하거든.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감독조합-메가박스상과 왓챠상을 받았을 때, 무척 감격했다. 배우상도 감사했지만, 작품으로 상을 받는다는 소식이 무엇보다 기쁘더라. 형의 얼굴을 보니 감정에 북받쳐서 갑자기 눈물이 났다. 그러자 성호 형이 “울지 마. 다함아, 그거 하지 마” 하며 손을 내젓더라. (웃음) 둘 다 무뚝뚝한데, 애정이 느껴진다. 나를 되게 챙겨주는구나 싶었다. 인터뷰로 내게 못다 한 말을 전하려고 했을 수도 있고.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올해의 배우상을 받기도 했다. 요즘은 어떤 기분으로 지내나.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희한하게도 머리가 맑아졌다. 사념이 사라졌다고 해야 하나. 그동안 알게 모르게 서러움, 억울함, 분노 같은 것이 쌓였나 보다. 누군가가 머릿속에 들어와서 그런 감정을 깔끔하게 치워준 느낌이다. 대청소를 마친 듯 한결 시원하다. 수상 소감을 얘기할 때, 계획에 없던 말이 나왔다. 다른 영화를 보니 다들 우리와 마찬가지로 참 치열하고 간절하게 찍었구나 싶다고, 이 자리에 온 모두에게 박수를 보내주시면 좋겠다고 했다. 내 솔직한 마음이 그랬다. 참석하신 분들이 손뼉 치는 모습을 보며, 무척 행복했다. 내가 우리 영역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뭔가를 부탁할 수 있는 짧은 시간이,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게 다가왔다. <같은 속옷을 입는 여자>(김세인, 2021)로 함께 배우상을 받은 임지호 배우가 그러더라. 자기도 그 말을 하고 싶었는데, 내가 먼저 하는 바람에 머리가 하얘졌다고. (웃음) 그때도 기분이 좋았다.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는구나 싶어서. 성호 형도 진심으로 기뻐해줬다. 수상 소식을 듣기 전부터 모든 상을 통틀어 자기한테는 배우상이 가장 영광스럽게 느껴질 거라고 말했거든.
주변에서도 많이 기뻐했겠다.
자기 일처럼 축하해주는 사람이 많아서 정말 고마웠다. 어떤 계산도 없이, 깨끗하게 축하해주는 느낌이 바로 전해지더라. 어릴 때부터 나를 지켜본 동료들, 특히 ‘형님들’ 반응이 기억에 남는다. “축하해, 근데 너 상 받았다고 어깨 올라가면 혼날 줄 알아!” (웃음) 지켜볼 테니 변하지 말라는 조언을 들었다. 모든 축하 인사에 애정이 느껴져서 한 명 한 명 기억하려고 한다. 살면서 이런 감정을 느껴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 옛날에는 상을 받으면 ‘자, 내가 보여줬지!’ 할 거라 상상했는데, 전혀 아니더라. 그냥 사람들이 너무 보고 싶고, 만나서 함께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오성호 감독은 “내가 갈피를 못 잡고 초조해할 때도 다함 배우는 자신감을 잃지 않더라. 오히려 날 다독여줬다.”라고 전했다. 어떻게 그토록 자신할 수 있었나.
영화를 찍을 때마다 느끼는데, 다 같이 한배를 타야 좋은 작품이 나온다. 성호 형과 나는 성격부터 언어 습관, 자라온 환경까지 전부 다르다. 다만, 작업할 때 집요한 점만큼은 닮았다. 성호 형은 모니터를 볼 때 바로 옆에서 폭탄이 터져도 모를 것만 같다. 지금 눈앞에 놓인 컷, 이 순간 배우가 보여주는 모습을 너무나도 중요하게 여겨서 다른 것에는 신경을 못 쓴다. 그래선지 촬영하는 동안에는 성호 형이 흔들린다고 느끼지 못했다. 그저 살짝 의심이 드는 순간이 찾아오면, 나와 공유하기를 원했다. 나는 이런 게 무서워 혹은 잘 모르겠어, 근데 넌 어때? 그렇게 형이 질문했을 때, 내가 느끼는 바를 전달했다. “우리 잘 가고 있어. 경학이 안 나빠 보여. 조금 모난 부분이 있어야 관객도 볼 재미가 있지. 형도 그런 거 좋아하잖아.”


경학은 다양한 면모를 지녔다. 노래방에서 여자친구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모습은 아주 사랑스럽다.
본래 엄청나게 긴 장면이다. 내 생각에는 우리 영화에서 가장 시네마틱한 신이고, 배우와 감독 모두 그 신을 무척 좋아했다. 성호 형이 고민 끝에 많이 줄였는데, 시퀀스를 참 훌륭하게 짰다. 결국 영화를 찍는 동안, 시나리오와 감독을 믿고 가는 게 중요했다. 거기서 내가 흔들리면, 영화가 산으로 갈 듯했다. 처음에 그렸던 상을 놓쳐버리는 순간, 영화 전체가 뒤죽박죽으로 엉켜버릴 테니까. 형과 촬영 내내 대화를 꾸준히 나눴다. 어쩌면 서로 기분 나쁘다고 할 정도까지 솔직하게 말했다.
크로스 체크가 잘 됐구나.
맞다, 디렉팅을 감상으로 할 때도 잦았다. 예를 들어 경학과 영민(김신비)이 싸우는 장면은 테이크를 꽤 여러 번 갔다. 성호 형이 “흠잡을 데 없이 좋기는 한데, 뭔가 재미가 없네”라고 하더라. 충환(계영호)에게 소주 한 잔 하자고 말할 때는 “유리창처럼 살짝만 건드려도 깨질 것 같은 얼굴이야”라고 표현하기도 했고. 그렇게 본인이 느끼는 바를 가감 없이 말해줬고, 나도 거기에서 힌트를 많이 얻었다. 내가 현장에서 지나치게 들뜨면, “배우님 들뜨지 마세요”라고 잔소리도 해주고. (웃음) 기억에 남는 순간이 많다. 촬영 끝나면 항상 둘이 남아서 반성했다. 두 시간 동안 서로 ‘내 탓이오’ 하는 거다. 그럼 연출팀이었던 오세호 감독이 와서 “내일도 촬영 있으니까 제발 좀 집에 갑시다!” 하면서 우리를 일으켜 세웠지. (웃음)
경학은 거듭 변화하는 인물이다. 사회적 신분이 달라질 때마다 감정이 흔들리고, 이를 표정과 말투에서 예민하게 드러냈다. 불안과 공포가 삐죽 튀어나오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극 진행 순서대로 촬영하기는 어려웠을 텐데, 감정 조절에 애를 먹지는 않았나.
작품 전체를 놓고, 1부터 100까지 계획해서 연기하지는 않는다. 나는 신 하나를 영화로 본다. 실제 우리도 그렇게 살지 않나. 사람은 한결같지 않고, 만나는 상대와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달라진다. 자연스러운 흐름을 만들어내려 애쓴다기보다는, 큰 틀만 정해놓고 나서 현재 마주한 신 자체를 표현하는 데 열중했다. 상황에 빠져 있다 보면, 자연스레 변화가 드러나지 않을까 싶더라. 시나리오를 볼 때부터 이미 결론을 내렸던 장면도 물론 있다. 후반부의 공장 시퀀스는 미리 계획을 짜고, 촬영 전까지 매일 강아솔 음악감독의 노래 ‘사라오름’을 들으면서 준비했다. 경학이 공장에서 작업반장에게 혼나는 장면이 있다. 힘든 와중에도 ‘난 절대 지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표정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다행히 원했던 대로 담긴 것 같다. 우는 장면에서는 정말 아이처럼 엉엉 울기를 바랐고.
공장 신에서는 삭발까지 감행했다.
그것도 엄청나게 고민했다. 일부러 불쌍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면 어떡하지? 관객이 비웃는 건 아닐까? 촬영 직전까지 계속 고민했는데, 감독님이 딱 결정을 해줬다. 나는 공장에 들어가자마자 기분이 좋았다. 상상했던 바와 아주 흡사했고, 마침내 이곳에 당도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머리를 밀어야 했기에, 공장 신은 마지막에 찍을 수밖에 없었다. 엔딩을 순서대로 찍은 덕분에, 연기도 편안하게 했다. 공장 시퀀스는 재촬영을 거의 하지 않았다. ‘우리가 그동안 시간을 보내면서 결이 비슷해졌구나. 같은 걸 보고 느끼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뿌듯했고, 훨씬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감독과는 서울예술대학교 재학시절에 처음 만났다고.
성호 형이 “첫인상은 되게 별로였어!” 하더라. (웃음) 사실 이전에도 형과 작품을 함께할 뻔한 적이 있다. 우리도 최근에 확인했는데, 형이 단편 <연애경험>(2016) 찍을 때 내게 오디션을 제의했더라. 그때 내가 메일에 답장을 안 했다. 연기를 하고 싶지 않은 상태였거든. 그러다 이제야 작품으로 만난 거다.
대학에 들어갈 때 꿈은 뭐였나. 스무 살 무렵에 상상했던 미래는 어떤 모습인지.
원래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었다. 중학교 3학년 때, <루나틱>을 보고 표현의 아름다움에 매료됐다. 무대에서 웃고, 울고, 화를 내는 배우들이 멋져 보였다. 집안 분위기가 굉장히 보수적이다. 장남이고, 어릴 적부터 “남자는 뭐든 잘해야 해. 남자는 울면 안 돼.”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어딜 가든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며 의젓하게 행동해야 했는데, 그러다 보니 정서적 표현은 뒷전이었다. 뮤지컬은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었다. 숨기는 것보다 표현하는 게 훨씬 멋지다는 걸 깨달았다. 뮤지컬 특기 전형으로 예대에 진학했는데, 막상 입학한 후에는 3년 내내 연극을 했다. 내가 무대를 참 좋아하더라. 무대만 올라가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보통 예술가는 재능을 고민하다가 무너진다고 하는데, 나는 연기를 시작할 때부터 칭찬을 많이 들었다. 은연중에 재능을 믿고 노력을 게을리했던 것 같다. 그러다 스무 살 마지막에 사건이 벌어졌다. 연극 합평회 자리에서 교수님이 내 칭찬을 많이 해주셨다. 다함이는 다른 학생보다 월등하다고, 타고난 것 같다고. 기분 좋게 듣는데, 갑자기 교수님이 이러시더라. “그래도 얘들아, 걱정하지 마. 다함이는 (팔을 벌리며) 이만한 인물을 만들 수 있는데, 요만큼밖에 안 했어. 저렇게 연기하면 3년밖에 못하고 그만둘 거야. 그러니까 너희가 더 열심히 하면 돼.” 와, 그때 친구들을 봤거든? 다들 눈이 반짝반짝 빛나더라. 절대 잊을 수 없는, 정말 중요한 순간이다. 이후로 나 자신에게 무척 냉정해졌고, 내 연기를 누구보다 엄격하게 바라보려고 노력했다.
<연애경험> 오디션을 제안받았던 2016년에는 왜 연기에 흥미가 식었나.
상업영화 단역으로 영화를 시작했는데, 자꾸 상처를 받았다. 현장이 아니라, 내 마음이 문제였다. 나는 계속 다른 걸 실험해보고 싶었거든. 너무 조급했지. 단역은 치고 빠져야 하는 역할인데, 거기서 뭔가를 실험해본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지 않나. 그걸 알면서도 마음을 다스리기가 쉽지 않더라. 계속 이런 식으로 연기하다가는 남을 탓할 것 같았다. 나한테 상처를 주거나 무시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괜히 나 혼자 피해자가 된 것처럼 여기면 어쩌나 싶었다. 그때 친한 형들의 추천으로 단편 작업을 시작했다. 거기서 네가 원하는 대로 실험해보라고 하더라. 근데 내가 또 욕심이 많다. 잘하는 배우들은 한 해에 스무 편도 찍는다는 말을 듣고, 그걸 목표로 삼았다. 결국 달성하기는 했는데, 연말에 영화를 보면서 후회했다. 한 작품의 캐릭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봐요, 나 잘하죠?” 같은 느낌이었다. 나한테 정이 떨어졌다. 크게 착각했구나 싶었고, 화면 속 내 모습이 너무 싫어서 반년 정도 연기를 아예 안 했다.
어떻게 그 시기에서 빠져 나왔나.
빠져나오려고 애쓰기보다는 일단 아르바이트하며 돈을 벌었다. 웬만한 일은 다 해본 것 같다. 물류 창고 용역이나 대리운전처럼 주로 일당을 주는 곳에서 일했고, 지게차 운전도 했다. 그러다 연애에 문제가 생겼다. 음, 연애를 하다 보면 벽에 부딪힐 때가 있지 않나.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누구한테 털어놓아도 해소가 안 되고. 머릿속이 복잡한데, 이 감정을 들여다보고 싶기는 하더라. 그때 오랜만에 필름메이커스에 들어가서 제작 준비중인 작품을 둘러봤다. 다른 조건 필요 없이, 그냥 연애 이야기를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촬영을 시작했는데, 내 마인드가 이전과는 다르더라. 혼자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이야기를 하는 느낌이었다. 첫 테이크를 찍고 모니터링을 하는데, 무척 마음에 들었다. 화면 속 권다함이 나 같지 않고, 그 인물처럼 보였다. 작품을 대하는 마음가짐과 방향성에 관해 깨닫게 해준 계기였다. 그때부터는 나를 덜어내려고 노력했다. 나 말고, 내가 만나는 캐릭터를 사랑하며 아껴주려고.
골치 아픈 연애가 연기에 도움을 준 셈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과정은 많은 일에 동력이 되어주는 것 같다. 사실 연애만큼 감정의 상하 고저를 전부 겪게 하는 일도 흔치 않고. 대학 다닐 때, 교수님들도 늘 “연애 열심히 해라” 조언 하셨다. (웃음)


집안 분위기가 엄했다면, 연기 시작할 때 부모님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을 듯한데.
십 대에는 나름대로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노력했다. 중학교 때 전교 6등을 한 적이 있다. 뿌듯한 마음에 어머니께 성적표를 보여드렸는데, “다음엔 1등 해”라고 하시더라. 그날, 공부는 더 안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의 기대를 충족하려고 애쓰는 것이 내 목표여서는 안 되겠구나 싶더라. 다만,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연기하고 싶다고는 말하지 못했다. 부모님은 엄하시기도 하지만, 누구 못지않게 치열한 삶을 꾸려오셨다. 그분들의 삶을 가장 가까이에서 겪었기에, 선뜻 내 꿈을 말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에,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크게 당하셨다. 다리를 못 쓰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까지 들으니 엄청나게 불안하더라. 일단은 아버지가 안쓰러워서 속상했고, 다음에는 스무 살이 되자마자 공장에서 일하며 생활비를 버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이제 연기하고 싶다는 말조차 못 하겠구나’ 싶더라. 며칠을 끙끙대다가 충동적으로 집을 나왔다. 지금도 참 대단하다고 생각하는데, 가출 첫날에 어머니가 내 핸드폰을 정지시켜버렸다. (웃음) 친구들한테 연락할 수도 없고, 완전히 고립됐지. 결국 며칠 지나서 새벽에 아버지가 계신 병원으로 갔다. 로비에서 대충 밤을 보낼 작정이었다. 근데 아버지가 휠체어를 탄 채, 병원 앞에 나와서 기다리고 계신 거다. 죄송하기도 하고, 서럽기도 했다. 펑펑 울면서 고백했다. 그때 아버지가 예상외로 아무렇지도 않게 말씀하시더라. 그냥 연기하고 싶다고 말하면 되지, 뭐가 어려워서 혼자 앓고 그랬냐고.
아버지도 속으로는 철렁하셨을 거다.
그때 또 한 번 표현에 관해 생각했다. 그냥 하면 되는구나, 아주 어렵지는 않구나. 어머니는 처음에 지나가는 바람이라고 생각하셨을 거다. 뮤지컬 학원에 보내주셨는데, 모든 과목을 전부 등록하셨다. ‘더는 못 하겠다는 소리 나올 때까지 어디 한 번 원 없이 해봐라’ 같은 마음 아니었을까. (웃음) 근데 나는 아침부터 밤까지 학원에 머물면서 너무 행복했다. 내가 지치지 않는 걸 보신 후에는 믿고 지켜봐 주시더라.
학창 시절에 특별히 좋아했던 작품이나 선망했던 배우가 있다면.
어릴 적에 <쥬라기 공원>(스티븐 스필버그, 1993)을 보고, 처음으로 영화에 강렬한 매력을 느꼈다. 나는 아직도 그 세계를 믿는다. 언젠가는 쥬라기 공원이 만들어질 것만 같다. 사람을 홀리는 것, 현실이라고 믿도록 설득하는 것. 그게 바로 영화의 목적이자 출발 지점 아닐까. 극장에서 <트랜스포머>(마이클 베이, 2007)를 본 날에는, 거리에 주차된 차를 한 번씩 만지면서 집에 갔다. (웃음) 지금도 그렇게 관객을 몰입하게 만드는 영화와 배우가 좋다.
배우 중에는 누가 그런 걸 잘한다고 생각하나.
최근에 <듄>(드니 빌뇌브, 2021)을 보고, 오랜만에 두근두근하면서 극장을 나왔다. 티모시 샬라메도 대단했고, 하비에르 바르뎀은 아예 알아보지도 못했다. 하비에르 바르뎀이 아니라, 그냥 사막에서 모래바람을 뚫고 나온 그 남자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또 찍을수록 ‘이건 배우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야’라는 생각이 든다. 연출, 스태프, 동료 배우 등 작품에 참여한 모든 이가 마음을 맞춰야 가능하다. 그때 피어나는 짜릿함이 엄청나고.
어쩌면 그런 순간을 기억하기에 계속 연기하나 보다.
그만큼 강렬한 자극이 없거든. 대단한 배우가 인생의 목표는 아니다. 나는 행복하게 살고 싶다. 연기보다 더 행복한 일이 생기면, 당장 그만둘지 모르겠다. 사실 이보다 가슴 뛰는 일이 내 인생에 또 나타난다면, 어마어마한 축복이지. 하지만 아마 없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