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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가는 길> 비비안·나비·변규리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Interview / 2021-11-18

<너에게 가는 길> 개봉을 앞두고 변규리 감독과 영화 속 주인공 비비안과 나비를 한 자리에 초대했다. 비비안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성소수자부모모임 운영위원 강선화(비비안)”, 무지개 삼각지붕을 올린 귀여운 집 로고와 함께 점자가 프린트된 명함이었다. 나비는 마침 운영위원 명함이 똑 떨어졌다며, 다른 명함을 내밀었다. “소방공무원 노동조합 위원장 정은애”, 주황색 제복을 입고 환하게 웃는 사진이 눈에 띄었다. 몇 해 전, 두 사람은 아이로부터 귀한 고백을 받았다. 예준은 긴 편지를 써서 비비안에게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알렸고, FTM 트랜스젠더인 한결은 나비에게 트랜지션과 성별 정정 절차를 의논했다. 울음과 정적을 감당하며 정신없는 시간을 통과하는 동안, 두 엄마는 아이들과 함께 ‘성소수자부모모임’에 참석했다. 그곳에서 만난 이들과 가까워지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비슷한 고민을 나누며 힘을 주고받았고, 아이를 이해하고자 거듭 공부했다. 아이의 커밍아웃은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문이었다. 나답게 살아가려는 아이들의 움직임은 지극히 당연하고 아름다웠으나, 그 길에서 마주한 혐오와 차별은 끔찍했다.

내 아이가 간신히 열어젖힌 문 앞에서 나비와 비비안은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이런 세상에서 애들이 살고 있단 말이야? 그때부터는 투사가 되더라고요.” 둘은 성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공포에 떨어야 하는 모든 아이의 손을 붙잡고 함께 행진하기를 선택했다. 모임 첫날, 게이의 ‘게’를 말하다가 펑펑 울었던 비비안은 열혈 활동가로 변신했고, 소방공무원의 노동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고 외쳐온 나비는 인권 활동 영역을 적극적으로 넓혔다. 매년 각지에서 열리는 퀴어문화축제에서 성소수자부모모임은 ‘프리허그’를 진행한다. “너는 부모도 없냐” 혹은 “네 자식이 동성애자여도 가만히 두고 볼 거냐”는 혐오 세력의 비난과 맞닥뜨린 아이들에게 성소수자부모모임은 누구보다 든든하고 강력한 앨라이이자, 마음 놓고 비빌 수 있는 언덕이다. 세 사람을 만나서 영화를 만드는 과정과 낯선 세계를 항해하는 여정에 관해 물었다. 이는 엄마이자 여성, 노동자로서 사회를 겪어낸 나비와 비비안의 이야기이며, “우리 영화는 한 번 보면 퀴어 영화, 두 번 보면 가족 영화, 세 번 보면 여성 영화, 그리고 네 번 보면 인생 영화”라고 자부하는 용기에 관한 기록이다.

 

 

개봉 소식이 반갑다. 영화에 등장한 예준-성준 커플이 아직 건재하구나 싶고. (웃음)

비비안_ 둘은 여전히 사이좋다.

변규리_ 안 그래도 두 사람을 만날 때마다 손 붙잡고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 제발 헤어지지 말아요.” (웃음)

 

비비안은 쿨한 엄마 이미지를 유지하는 중인가.

비비안_ 더 쿨해지는 것 같다. 이제 사람들한테 기대받거든. 덕분에 내 ‘쿨함’도 성장하는 중이다.

나비_ 본래 모습이 더 나오는 거겠지. 행사에서도 정말 적극적이다. 한 번은 요리할 때 이 사람 혼자 애쓰는 걸 보다가 슬쩍 다가갔다. 아무것도 안 하면 욕먹을까 봐 옆에서 같이 하는 척이라도 하려고. (웃음) 내가 음식 솜씨가 없어서 미안하다고 했더니, 그럴 필요 없다면서 “나는 원래 이런 거 좋아해!” 하더라.

비비안_ 난 사람들 챙기는 걸 워낙 좋아하고, 나비가 요리 못하는 건 잘 아니까. “그냥 가만히 있어~ 하는 척도 하지 마!” 그랬지. (웃음) 사실 내 성향이 그렇다고 해도, 그간 자식 문제만큼은 쿨하게 대하기가 어려웠다. 엄마로 살아오는 동안, 타인의 시선을 많이 신경 쓰게 되더라. 애들에게 말한 적은 없지만, 속으로는 다른 집과 비교하면서 ‘우리 애도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예준이에게 커밍아웃을 받고 함께 여러 일을 겪으면서 깨달았다. 그거 다 쓸데없구나. 나는 본래 쿨한 사람인데, 그간 왜 그렇게 남들 눈을 의식하며 살았는지.

나비_ 그래. 비비안은 배려심이 깊은 거지, 눈치를 보지는 않거든. 관계에서 재고 따지는 성격도 아니고. 근데 아이와 관련해서는 온갖 복잡한 생각을 하다 보니, 처음엔 주춤했겠지. 2017년에 <PD수첩> 찍었을 때만 해도 얼굴에 모자이크 처리하고 나왔잖아. (웃음)

비비안_ 그런데도 사람들이 다 알아봤다는 게 진짜 웃기지. 우리 집도 나오고, 심지어 예준이는 얼굴을 공개했거든. 그때가 커밍아웃하고 1년쯤 지나서였다.

나비_ 성소수자부모모임 한 달 나온 나도 얼굴을 깠는데!

비비안_ 사실 그때 나비를 보면서 진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스스럼없이 이야기하는 모습이 참 멋져서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더라.

나비_ 피디님이 이렇게 다 공개해도 괜찮겠냐며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저는 이걸 방영 안 할까 봐 걱정입니다. 설마 방송국 앞에 누가 쫓아온다거나 해서 방송 포기하시는 건 아니겠죠?” 했다. <너에게 가는 길> 찍을 때도 그랬다. 감독님은 우리가 도망갈까 염려하고, 우리는 혹시라도 감독님이 영화를 중간에 엎으면 어쩌나 걱정하고. (웃음)

<너에게 가는 길>
<너에게 가는 길>

한결은 어떻게 지내나.

나비_ 하루는 맑음 하루는 흐림인데, 예전보다는 훨씬 편안해졌다.

비비안_ 그래도 매일 연락하나 보다. 사이 되게 좋네.

나비_ 뭐하냐고 물어보면 답장은 온다. 잔다, 아르바이트하러 간다, 밥 먹는다. 그렇게 서로 생존 신고하는 거지. 보통 내가 먼저 연락한다. 한결이는 돈 필요할 때 먼저 하고. (웃음)

 

촬영할 때도 이렇게 셋이 만나는 자리가 있었나.

변규리_ 촬영을 위해 셋이 만난 적은 없고, 성소수자부모모임 정기 모임이나 행사에 참석할 때 자연스럽게 만났다.

비비안_ 영화에도 같이 나오는 장면이 거의 없지.

나비_ 그러네, 퀴어퍼레이드 빼곤 없구나.

 

나비와 비비안은 언제부터 알고 지냈나.

비비안_ 2017년 4월에 처음 만났다. 성소수자부모모임 활동은 내가 한 해 먼저 시작했다. 최근에 얘기하다가 서열 정리를 했지. 내가 나비의 선배다.

나비_ 무슨 선배가 걸핏하면 우나. (웃음)

비비안_ 처음에는 나랑 정반대인 나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나는 첫 모임에서 엉엉 울었거든. 근데 나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우리 애는 레즈비언이에요”라면서 웃더라. 그때 1차 충격을 받았는데, 다음에 한결이 “나는 트랜스젠더예요” 하고 2차 충격을 줬지. (웃음) 그게 대전 지역 모임이었다. 성소수자부모모임이 일 년에 한 번씩 지역을 돌며 모임을 여는데, 소식을 접한 한결이 엄마를 끌고 온 거다. 엄마가 사는 군산에서 그나마 가까우니까.

나비_ 예전부터 애가 모임에 같이 가길 원했다. 한 번 정도는 갈 수 있는데, 워낙 바빠서 시간을 내기 어려웠다. 게다가 우리 애는 단지 일회성 참여를 권유한 게 아니었다. “엄마가 소방 인권 활동하는 것처럼 부모 모임에서 활동하면 좋겠어” 하더라. 그러다 소방 인권 활동을 잠시 쉬면서 한가해졌을 무렵, 한결이 대전에서 모임이 열린다고 알려줬다.

<너에게 가는 길>
<너에게 가는 길>

소방 인권 활동이라는 건 무얼 뜻하나.

나비_ 소방관 인원이 적다 보니, 현장에서 위험에 노출되는 일이 잦았다. 근무하다가 안타깝게 목숨을 잃는 분 중에는 순직을 인정받지 못하는 분도 계셨고. 2014년에 소방관 국가직 전환 관련해서 운동을 열심히 했다. 총대를 맨 입장이라 인터뷰도 많이 했고, 광화문에서 1인 시위도 했다. 그날 3대 포털사이트에서 실시간 검색어 1위를 기록했다. (웃음) 해임 압박이 컸지만, 그만둘 마음은 없었다. 해고당하면 어떻게 먹고살지 친구랑 얘기했던 게 생각난다. “네가 노가다를 하면, 난 너를 따라다니는 잡부가 돼야겠다” 했더니, 친구가 일도 못 하면서 무슨 잡부냐고 하더라. 그거라도 해야 한다고 받아쳤다. 부엌일은 더 못하니까 식당에서 일할 수도 없다고. 그러다 방송국 취재가 시작됐고, 여론이 형성되자 소방청 분위기도 자연스레 반전됐다.

 

이후 노동조합을 직접 만든 건가.

나비_ 맞다, 올해 7월 5일에 창립총회를 열었다. 아무래도 상명하복에 익숙한 집단이기에 처음에는 대부분 소극적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우리 힘으로 바꿀 수 있구나’라는 믿음이 쌓이자 점차 따라와 주더라. 그래서 요즘 살짝 곤란하다. 갑자기 이렇게 영화를 개봉한다고 해서… 속으로 ‘내가 요즘 노조 일에 너무 소홀한가?’ 싶다니까. (웃음)

비비안_ 원래 개봉 시기를 내년쯤으로 이야기했거든.

변규리_ 내가 활동하는 단체이자 <너에게 가는 길>의 제작사인 연분홍치마 내부에서는 올해 개봉하면 좋겠다고 의견을 모았다. 차별금지법 연내 제정 이슈가 있으니, 영화도 그 길에 함께 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다행히 배급사에서 빠르게 움직여줬다.

 

엔딩 크레디트를 보니, 성소수자부모모임이 협력 단체로 나오더라. 부모모임에서 영화를 제작하자고 먼저 제안했나.

변규리_ 연분홍치마에서는 <3xFTM>(김일란, 2008) <레즈비언 정치도전기>(홍지유, 한영희, 2009) <종로의 기적>(이혁상, 2010) 등 성소수자에 관한 영화를 꾸준히 만들어왔다. 당시 다음 작품을 기획하는 자리에서 성소수자 이야기를 해보자는 의견이 나왔고, 때마침 성소수자부모모임에서 홍보 영상 제작을 제안받았다. 부모님들을 직접 뵙고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사하게도 다들 흔쾌히 수락해주셨고, 함께 해보자며 독려해주셨다. 편집할 때, 크레디트 타이틀을 한참 고민했다. 감독으로서 딱히 해드린 것이 없는데, 두 분을 포함해서 여러 부모님이 촬영부터 개봉까지 적극적으로 참여해주고 계신다. 영화를 완성해서 선보일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들이기에, 제작 협력이라는 타이틀이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나비_ 우리가 볼 때도 대단하다는 말이 저절로 나올 만큼 다들 열심히 지원해줬다. 시작할 때도 활동가 중 한 명인 지인 님이 터키 성소수자부모모임을 다룬 영화 <마이 차일드>(캔 칸단, 2013)를 언급하며, 한국에도 이런 다큐멘터리가 필요하다고 설득했다. <너에게 가는 길>에 비비안과 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는 하지만, 감독님도 긴 시간 동안 여러 부모를 인터뷰했다. 그들이 없었다면 영화를 진행하기가 쉽지 않았을 거다. 지금도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많은 도움을 받는다. 사실 자녀가 만류해서 활동을 포기하는 부모도 있다. “엄마, 방송이나 영화에는 출연하지 마. 나 아웃팅 당할까 봐 무서워.” 그럼 부모 입장에서는 굉장히 고통스럽고 힘들거든. 자신이 하고 싶어도 아이가 말리면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데, 이분들은 그걸 한 번 더 뛰어넘어서 우리를 진심으로 응원해준다. 더 좋은 세상을 위해서, 더 큰 애정으로 바라보는 거다. 그게 진짜 감동이지.

나비 ⓒ이영진

감독 입장에서 성소수자부모모임과 두 인물이 매력적으로 다가온 이유는 뭐였나.

변규리_ 내가 자라온 환경과 맞닿은 이야기에 관심이 간다. 우리 주변에는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존재하고, 나도 살면서 그런 이를 많이 만나 왔다. 부모님을 지켜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분들은 성소수자 부모인 동시에,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지닌 활동가구나.’ 단순히 자식의 조력자로만 보이지는 않았다. 사회에서 부당하게 받는 질문에 답하고 싶어 하는, 대답하는 과정을 열심히 밟는 사람들.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 내가 본 부모님들은 그런 분들이었고, 이 여정을 잘 기록해서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부모님들은 다양성에 관해 새로운 질문을 던지며, 우리가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영역에서 사고할 것을 제안한다. 영화를 만드는 나에게든 관객에게든 그러한 상상력과 호기심이 유의미하리라 봤다.

 

영화를 보면, 부모님도 자녀 못지않게 ‘퀴어하다’는 생각이 든다.

변규리_ 그건 맞다. 우리는 성소수자 부모라는 위치를 일종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였는데, 최근에는 ‘퀴어성’이라는 말을 사용하더라.

비비안_ 일단 퀴어라는 말 자체가 별종을 의미하지 않나. 밖에서 보면, 참 별나다고 하겠지.

나비_ 퀴어 부모라는 사실을 가만히 숨기고 살지 못했다. (웃음)

비비안_ 나비는 튀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나비_ 나는 두려워하지 않고, 비비안은 튀는 걸 좋아한다. 대놓고 자기는 ‘관종’이라고 하더라.

비비안_ 관객과의 대화에 참석하는 일이 즐겁다. 내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공감해주는 사람을 보면, 신기하게 기운이 차오른다. 감독님은 걱정스레 “피곤하시죠?” 묻는데, 빈말이 아니라 정말 하나도 안 피곤하다. (웃음) 승무원으로 일하면서도 에너지가 좋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여러 명의 승객을 상대하는 일이라 지치기 쉬운데, 나처럼 오래 일하는 사람들은 남의 기를 뺏어 온다고 표현한다. 내가 그런 사람이라면, 관객과 만났을 때도 극장에 가득한 좋은 기를 잘 빨아들이는 능력이 있는 거지. 어제도 밤늦게 개봉 관련해서 일정이 추가됐는데,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앗싸! 빨리빨리 움직여야지!’ 했다. 그러게, 나는 원래 이렇게 살고 싶었나 보다. (웃음)

변규리_ 비비안 님을 보면 어떻게 저토록 타인을 다정하고 섬세하게 대할 수 있나 싶다.

나비_ 다른 사람은 몰라도 비비안이랑 있으면 안 불편하다. 새벽부터 밤까지 종일 함께 붙어 있어도 피곤하다고 느낀 적이 없다.

 

두 분 궁합이 좋다.

비비안_ 우리가 참 다른데, 그걸 인정한다. 서로에게 없는 면을 조금씩 옮겨 갖기도 하고.

나비_ 비비안이 우는 모습을 처음 봤던 날, 무척 의아했다. 영화에서 예준이와 ‘프라이드 토론토’에 참가했을 때, 비비안이 “I LOVE MY GAY SON”이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하지 않나. 그게 그냥 나온 장면이 아니거든. 에너지가 충분한 사람인데, 왜 모임에서 그렇게 우는가 싶었지.

비비안_ 나는 공감을 잘한다. 남이 울면 따라 우는 스타일.

나비_ 처음에는 우리 앞에서 엄살을 부리나 했다. (웃음) 지금 모습이 훨씬 비비안답다.

변규리_ 어제 ‘차별금지법 연내 제정을 위한 평등길 행진’에 같이 갔는데, 비비안 님이 깃발을 들었다. 보통 상근활동가가 깃발을 들고 가는데, 비비안 님은 그걸 뺏어서 직접 들더라.

나비_ 확실히 행동력이 좋다니까. 늘 먼저 앞장서고.

<너에게 가는 길>
<너에게 가는 길>

얼마 전 국회는 차별금지법안 심사를 21대 국회 임기가 만료되는 2024년 5월까지로 연장해버렸다. 장혜영 정의당 의원이 차별금지법을 대표 발의한 것이 작년 6월이고, 애초 법안 자체는 2007년부터 논의되어 왔다. 심사 기한 연장 소식을 듣고 실망이 컸을 텐데.

나비_ 그러니 <너에게 가는 길>이 개봉해서 다행이다. 시기적으로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다.

비비안_ 우리를 지치게 하려는 계산인 것 같다.

나비_ 하지만 우리는 고분고분하게 안 넘어가지. 국회에 대고 순순히 “네, 2024년까지 기다리겠습니다.” 할 사람들이 아니니까.

 

성소수자부모모임이라는 공동체에 기반해서 인권 활동가로 나섰다. 각자 시점과 계기가 다를 듯한데.

비비안_ 2016년 7월에 처음 성소수자부모모임에 갔다. 반년쯤 지났을 때, 인권포럼 프로그램 참여를 제안받았다. 처음에는 거절했는데, 운영위원인 하늘 님의 끈질긴 설득에 넘어갔다. ‘포토 보이스’라고 각자 사진을 찍어 와서 이야기하는 워크숍을 함께했고, 이후 그 활동을 바탕으로 인권 포럼에 패널로 참가했다. 그날 포럼에서 무척 놀랐다. 서른 명 넘는 학생들이 내 얘기를 들으며 울더라. 말하자면 ‘관종’으로서의 첫 경험이었다. 이렇게 내 말에 집중해주는 사람들이 있구나, 나를 드러내는 일이 누군가한테 힘이 될 수 있구나, 내가 그들을 위해 뭔가를 해볼 수도 있겠구나. 앨라이로서 첫걸음을 뗀 순간이다. 그때 강의실에서 학생들과 같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하늘 님이 나를 덥석 잡더니 “3월부터 운영위원회에 들어와요”라고 하더라. 그렇게 시작했다.

나비_ 나는 모임에 가자마자 운영위원이 됐다.

비비안_ 우리가 나비를 발굴했지. 얼굴을 딱 보는 순간, 준비된 활동가라는 걸 알아차렸다. (웃음)

나비_ 모임 마치고 나서 밥을 먹는데, 옆에 와서 말을 걸더라. 나는 지방에 살아서 어려울 것 같다고 했더니, 정기모임 하는 날 1시간만 일찍 오면 된다고 했다. 처음 온 나한테까지 부탁하는 걸 보면, 여기도 참 손이 부족하구나 싶었다. 한 사람이 아쉬운 곳이니 한 사람이라도 채워주자는 마음으로 알겠다고 했다. 그때는 새로 오는 사람마다 다 붙들고 얘기하나 보다 했지.

비비안_ 초창기 멤버인 하늘과 지인 님에 따르면, 2017년이 노다지의 해였다. 나비를 포함해서 현재 활발하게 활동하는 분들 대부분 그때 들어오셨고, <너에게 가는 길>도 2017년부터 촬영을 시작했다.

나비_ 서울에서 열리는 정기모임에 처음 갔던 날이 떠오른다. 방문객이 꽤 많았다. 감독님도 와 있고, ‘PD수첩’에서도 나오고. 공부하는 학생들도 몇몇 찾아온 상태였다. 속으로 ‘여기 생각보다 핫하구나?’ 했다. (웃음)

 

<너에게 가는 길>
<너에게 가는 길>

 

처음 영화를 봤을 때는 어땠는지, 아이들과는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궁금하다.

비비안_ 처음에는 시종일관 울면서 봤다. 어떻게 전개되는지 내용은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 한 시간 반 동안 울었다. 슬픔의 눈물만은 아니었다. 그냥 화면을 바라보는 동안, 마음이 계속 먹먹해지더라. 근데 나는 평소에도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잘 울어선지 우리 애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더라. 우리는 당시에도 그랬고, 여전히 이 영화에 관해 이야기를 많이 한다. 과할 정도로. (웃음)

나비_ 한결이와 나는 영화를 주제로 대화한 적이 따로 없다. 아들 입장에서는 새삼스럽다고 느끼지 않을까. 딱히 대화를 많이 하는 사이도 아닌데, 영화가 나왔다고 해서 갑자기 자리를 만드는 것도 쑥스러운 일이고. 음, 어쩌면 ‘엄마는 나랑 얘기하고 싶겠지만, 지금 나는 그래 주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내가 우리 엄마한테 그런 마음을 가졌거든. 물론 한결이는 나랑 다를 수 있지. 다만, 현재 우리는 영화에 관해 같이 얘기해보자고 할 만큼 친하지가 않아서. 내 성격도 한몫한다. 밖에 나와서는 말을 많이 하지만, 집에 들어가면 안 하거든.

비비안_ 와, 진짜 가부장이다. (웃음)

나비_ 트위터에 누가 써두었더라. 나비는 헤테로 부치인데, 사실상 가부장에 가깝다고.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웃음)

변규리_ 근데 나도 궁금한 게 하나 있다. 한결의 이야기를 듣고 나비 님은 어땠나.

나비_ 몰랐던 이야기는 없었다. 한결이는 나한테 그간 여러 번 자기 상황을 설명했다. 그걸 머리로 아는 걸 넘어서 ‘얘가 참 힘들겠구나’ 하고 마음으로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지금도 그 부분이 가장 미안하다. 시간을 돌이킬 수 있다면, 아이와 좀 더 많이 대화하며 살고 싶다. 한결이는 나보다 훨씬 자상하고 예민한 사람이다. 어렸을 때도 나에게 이것저것을 말하고 싶어 했는데, 나는 종종 피곤하다며 대화를 거절했다. 아이에게는 오랜 시간 거부 당한 기억이 있는데, 지금 와서 나하고 얼마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겠나. 영화를 보면서 다시금 생각했다. 부모가 되는 일은 정말 무거운 책임을 동반하는구나.

비비안_ 나비한테도 참 힘든 시절이었으니까. 혼자 일과 양육을 동시에 해내야 했으니 얼마나 고단했겠나.

나비_ 결국 뿌린 대로 거둔다고 생각한다. 아이에게 정서적으로 충분한 유대감을 제공하지 못했는데, 이제 와서 ‘나는 괜찮아졌으니 우리 예전처럼 얘기해보자’ 하는 건 뻔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 마음 편하자고, 나 덜 외롭게 살자고 애한테 그러면 안 되지.

비비안_ 부모와 자식을 종속 관계로 여기지 않기에 가능한 태도라고 본다. 부모가 자신을 아이보다 위에 놓으면, 어느 순간 아주 당연하다는 듯 “넌 나한테 잘해야지”라고 생각하지 않나.

 

영화 내내 아이와의 관계에서 적당한 거리와 공간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부모 됨에 관해 끊임없이 고민하며, 어머니들 역시 자신의 기준에 따라 선택하려고 한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식으로 희생하고 포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더라.

비비안_ 우리 부모 세대가 자식과 그런 식으로 관계를 맺었다. 그러다 보니 독립한 후에도, 경제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부모에게 늘 매여 있는 느낌이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나를 이만큼 키워줬으니, 나는 그들에게 응당 효도해야 할 것만 같고. 멀리 사는 탓에 자주 찾아가기 어려운데, 만나지 않을 때도 마음 한구석에 그들의 존재가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다. 내가 느끼는 부담이 싫었고, 내 아이는 나를 부담스러워하지 않았으면 했다. 특히 엄마와 시어머니처럼 윗세대 여성을 보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자식만 바라보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 아이들도 나와 별개로, 제 삶을 온전히 누리며 행복하기를 바라고. 그러다 보니 자녀와의 관계에서 적정한 거리를 찾으려고 노력해온 것 같다.

 

영화를 통해 발견한 나의 새로운 모습이 있다면.

비비안_ 생각보다 내가 예준이한테 잔소리를 많이 하더라. 잔소리를 워낙 싫어한다. 내가 듣는 것도, 남한테 하는 것도. 진짜 잔소리 안 하면서 애들을 키웠다고 자부했는데, 영화를 보고 아차 싶었다. 우리 딸 예원이가 엄마 마음의 소리라면서 늘 하는 말이 있다. “어디에 내놓아도 걱정스러운 내 아들 예준” (웃음) 어릴 적부터 예원이는 눈치도 빠르고, 제 것을 야무지게 챙겼다. 반면, 예준이는 항상 뭔가를 흘리고 잃어버렸지. 머릿속에 입력된 바가 있어선지, 예준이한테는 자꾸 말을 덧붙이더라.

나비_ 그래도 예원이는 확실히 ‘엄마가 아들만 챙긴다’ 생각하지는 않는구나.

비비안_ 자기 눈에도 오빠가 부실하거든. (웃음) 내 걱정을 이해해주는 거지.

나비_ 나는 프리허그 장면을 보며 놀랐다. 한 친구를 안아주고 나면, 내가 너무 빠르게 다음 친구를 향해 팔을 벌리고 있더라. 먼저 안아준 애는 아직 감정에서 빠져나오지 않은 상태인데, 나는 그 마음에 100퍼센트 집중하기보다는 다음 사람을 생각하는 거다.

비비안_ 여러 명을 안아주고 싶으니까. 그게 나비 스타일이지.

나비_ 다음부터는 조금 오래 걸리더라도 앞에 있는 사람을 잘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람마다 감정에 머무는 시간이 다를 테니까.

비비안 ⓒ이영진

나비와 비비안의 첫 번째 커밍아웃 경험담을 듣고 싶다. 아이가 커밍아웃한 후로, 두 사람 또한 계속해서 무언가를 설명하는 입장에 놓였을 텐데.

비비안_ 처음 말한 상대는 평소 가깝게 지내던 시누이다. 그해 여름이 정말 빠르게 지나갔다. 예준이가 6월 초에 커밍아웃했고, 7월 중순에 부모모임에 다녀왔다. 7월 말에는 시누이 가족과 1박 2일 휴가를 갔다. 나와 시누이, 예원이가 한 차를 탔는데, 대화 중에 시누이가 불쑥 그런 말을 하더라. “우리 아들이 여자 말고 남자를 데려와도 뭐 어쩌겠어.” 시누이한테도 예준이와 비슷한 또래의 아들이 있거든. 맥락상 애들도 이제 다 컸으니 부모 마음대로 이래라저래라할 수 없다는 뜻이었는데, 갑자기 내가 울음을 터뜨린 거다.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채, 예준이가 커밍아웃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다행히 시누이는 성소수자에 관해 어느 정도 공부를 한 상태였다. “예준이가 선택한 것도 아니고 바꿀 수도 없어. 힘들겠지만 받아들이고, 언니가 예준이를 지지해줘야 해.”라며 차분하게 얘기해주더라.

 

첫 커밍아웃이 성공적이었다.

비비안_ 덕분에 위로를 받았고, 계속해서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나는 사람에게 애정을 쏟는 편이고, 친한 동료나 친구들에게 굳이 비밀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알면 서운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한편으로는 내가 마치 아들을 떳떳하지 못한 존재로 여기며 숨기는 것처럼 보일까 봐 걱정스럽기도 했고. 물론 말하기 전에 예준이한테 물어봤다. 엄마가 원하면 말해도 된다고 하더라. 사실 부정적 반응이 돌아온 건 한두 번 정도에 불과하다. 당시에는 너무 화가 나고 속상했다. 부모모임에 가서 나비를 붙들고 하소연했더니, “이참에 인간관계를 정리해! 그냥 잊어!” 라고 하더라. (웃음)

나비_ 괜찮은 방법이지. 나는 예전부터 한결을 레즈비언이라고 생각했다. 집에 여자친구를 데려오기도 했고. 주변에도 우리 애는 레즈비언인 것 같다고 말했는데, 대부분 “그래?” 하는 정도였다. 사실 사람들은 남의 일에 그다지 관심이 없거든. 어쩌면 애가 더 커봐야 아는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근데 트랜스젠더라고 하니 “아이고, 힘들어서 어떡해” 하며 안타깝게 보더라. “특별히 힘든 건 없는데?” (웃음) 물론 복잡한 부분은 있지. 근데 배려해주는 건 좋지만, 거기서 생각을 그치면 안 되거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소수자의 존재를 인식하고, 제도적 변화의 필요성에 공감해주길 바란다. 나는 아이 덕분에 사회에 관해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됐다고 말한다. 진짜 힘들고 아픈 사람은 내가 아니고, 고통의 정확한 이유가 무엇인지도 살펴봐야 한다고. 어떻게 얘기하면 이걸 알아들을까. 이해할 사람은 이해하는데, 간혹 “일부러 밝은 척하는구나. 네가 힘들어서 자기합리화하는 거야.”라며 제멋대로 생각하는 ‘똥멍청이’도 만난다.

비비안_ 그럼 뭐라고 하나.

나비_ 너 같은 것들 때문에 힘들다고 하지. (웃음) 똥멍청이들한테 설명하려니 한숨이 나오는 것이지, 커밍아웃 자체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텔레비전에 출연한 후로는 나를 알아보는 사람도 많아졌다. 잘 봤다면서 힘내라고 하더라. “뭐 힘이 빠진 적은 없지만, 많이 응원해주세요~” 한다.

 

직장에서는 어떤가.

나비_ 상사들이 프라이드 뱅글을 보면, 꼭 한마디씩 한다. 그중에는 “엄마가 매일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애가 그렇게 된 거 아니야?”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여기가 선진국이었으면 당신 경찰한테 잡혀간다고 했다. 그때는 더 길게 설명하고 싶지도 않더라. 직원들한테는 프라이드 뱅글 보여주면서 얘기한다. “지금 퀴어문화축제 기간이라 이렇게 표시를 내봤어. 우리 아들이 트랜스젠더인 거 알지? 어디 가서 성소수자 혐오하고 그런 무식한 짓하면 안 돼~” (웃음)

<너에게 가는 길>
<너에게 가는 길>

변규리 감독에게 부모 중에서도 엄마에게 초점을 맞춘 이유를 물어본 적이 있다. 당시 감독은 “엄마들은 여성으로 살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아이가 겪는 차별을 좀 더 빠르게 이해하더라. 어떤 면에서 여성은 살아가는 동안, 연대하는 경험을 더 많이 가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비비안_ 지금은 나이를 먹어서 사회적 약자라는 느낌이 덜한데, 과거에는 늘 불안이 뒤따랐던 것 같다. 사회에서 젊은 여성은 일상적으로 공포와 맞닥뜨리지 않나. 나는 대중교통에서 성추행을 당했고, 밤에 길을 걷다가 누가 쫓아와서 집까지 미친 듯이 뛰어간 적도 있다. 아들이 게이라는 걸 들었을 때, 내가 여성으로서 경험한 크고 작은 위기가 떠올랐다. 남성 집단에서 예준이는 무시하기 쉬운 존재로 낙인찍힐 수도 있겠구나 싶었고, 그런 면에서 예준이가 느끼는 불안과 공포에도 공감했다. 오랫동안 예준이를 외모 가꾸기에는 영 관심이 없는 애라고 여겼는데, 커밍아웃 후에는 180도로 달라졌다. 화장을 해보고 싶어 했고, 옷을 사러 나가자고 하더라. 근데 한국 사회에서는 남성의 꾸밈을 어색하게 바라보지 않나. 아이가 자신을 마음껏 드러내기가 힘들겠구나 싶었다. 낯선 이에게 눈총을 받는다든지 공격의 대상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면서 내 경험을 바탕으로 아이의 삶을 다시 곱씹게 됐다. 한국 사회에 차별이 어디 있냐고 하지만, 여전히 존재하거든. 나도 승무원으로 일하며, 일터에서 승객으로부터 종종 폭언을 들었다. 문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최고 책임자로서 해결하려고 갔더니 “당신 말고 높은 사람 불러와”라고 하더라. 나를 그 높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거다. 근데 똑같은 상황에서 남성, 특히 나이 든 남성에게는 그런 식으로 말하지 못하더라.

 

비비안과 나비는 각각 승무원과 소방관으로 30년 넘게 일했다. 언뜻 멀어 보이는 직업이지만, 생사를 예민하게 감각한다는 점에서 공유하는 바가 있다고 봤다. 본래 꿈이었나.

비비안_ 대학을 1992년에 졸업했다. 그때만 해도 대학을 나와서 직업을 갖는 여성이 흔치 않았다. 집안 사정이 풍족하지 못했기에, 나는 어떻게든 일을 해야만 했다. 어느 날, 선배 언니가 신문에서 승무원 모집 공고를 찾아왔다. 자격 요건 중 하나가 “키 165cm 이상”이었다. 우리 과에서 지원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며, 시험을 보라고 하더라. 신기하게도 단번에 합격했다. 승무원을 꿈꾼 적은 없지만, 막상 일을 시작해보니 잘 맞았다. 성격이 독립적인 데다, 체력도 좋은 편이거든. 입사 당시에는 휴직 제도가 없어서 선배들은 대부분 임신을 기점으로 일을 관두어야 했다. 다행히 예준이를 임신한 해에 휴직 제도가 생겼다. 퇴사하기가 너무 아쉬워서 일단 휴직을 신청했다. 그때 알았다. 전업주부의 삶은 나와 정말 안 맞는구나, 나는 집에서만 살 수는 없구나. (웃음)

 

영화에서도 두 분의 일터를 찾아간다. 전문성이 뚜렷한 분야에서 일하는 모습이 멋져 보이는 동시에, 아주 자연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주변 여자들, 엄마들은 항상 돈을 벌었으니까.

나비_ 산업혁명 이후로 여성의 노동력은 경제 상황에 따라 이용되어 왔다. 인력이 필요할 때는 ‘커리어우먼’이라며 여성 노동자를 치켜세우지 않았나. 그러다 경기 흐름이 기울고 일자리가 부족해지면 여자들부터 잘랐다. 가정으로 돌아가라고 하고.

변규리_ 미디어에서 여성을 전업주부로 많이 묘사하는데, 사실 내가 지금껏 만난 엄마들은 집 밖에서도 늘 일했다. 노동하는 여성이 훨씬 많고, 부모모임만 봐도 어머님들 대부분 직업이 따로 있다. 이들에게 자신만의 영역이 확고하게 존재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성소수자의 엄마인 동시에, 주체적으로 삶을 일구며 확장해온 한 사람으로서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가 많다고 봤다. 영화를 편집하면서 시작점을 고민했다. 자녀에게 커밍아웃을 받는 장면 혹은 그때를 회상하는 장면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근데 두 분에게 커밍아웃은 단지 엄마와 자식 관계에서 일어난 사건으로만 머무르지 않더라. 나비와 비비안은 한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이자 여성, 노동자 등 다양한 정체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계와 만났다.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세계로 나가기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결국 두 분의 일상과 고민을, 두 분이 사회와 관계 맺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변규리 ⓒ이영진

나비는 어땠나. 소방공무원으로 일하며, 인권 활동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나비_ 나 역시 소방관이 꿈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직장을 구하는 과정에서 시험 공고를 봤다. 합격하고 들어가서 보니, 마초적인 분위기가 엄청나더라. 게다가 당시에는 ‘봉투’ 문화가 만연했다. 매관매직을 일삼는 구한말 탐관오리가 따로 없구나 싶었다. 나 혼자 깨끗하게 산다고 해결될 상황이 아니어서 자괴감이 컸다. 한동안 되게 힘들었는데, 1998년에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모든 부정행위가 싹 사라졌다.

비비안_ 이래서 정부가 중요하다니까.

나비_ 정말 그렇다.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권 교체 후에 일어난 변화를 보고 놀랐다. 1호봉이 약 8만 원이던 시절이다. 쌀 한 가마니가 10만 원 정도였으니, 월급만 가지고선 생활이 풍족할 리 없었다. 사람들은 부조리를 당연하게 여겼다. 공무원 월급이 적으니까 그렇게 뒷돈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돈도 돈인데, 사람 상대로 갑질하는 걸 두고 보기가 힘들더라.

비비안_ 나비 성향이랑 진짜 안 맞지.

나비_ 당시 공무원 조직에서는 선이 명확했다. 무능한 건 용서해도, 개기는 건 용서 안 한다는 식이었다. 승진에도 별 뜻이 없어서 그냥 버텼는데, 어느 날 일도 잔소리도 안 하는 상사를 만나고 생각이 바뀌었다. (웃음) 상사의 괴롭힘만 없어도 직원들이 행복하구나. 다들 기본적으로 책임감이 있으니, 딱히 잔소리를 안 해도 일은 잘 굴러가는구나. 그때 센터장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적어도 내 밑에서 일하는 직원 20명은 행복하게, 편안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출근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애초 상급자들은 내 업무지휘 방식을 못마땅하게 봤다. 나도 평가에 큰 기대는 없었다. 그저 우리 직원들이 스트레스 덜 받기를 원했고, 그 목표를 이뤘으니 평가에서는 꼴등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근데 우리 센터가 너무 좋은 성과를 낸 거다.

비비안_ 일하는 사람이 행복하면, 일을 잘할 수밖에 없지. 일터에서 인권 활동을 꾸준히 해온 것도 같은 맥락 아닌가.

나비_ 돌이켜보면 같이 일하던 동료의 죽음이 내게 많은 질문을 던진 것 같다. 그가 잘못해서 죽음을 피하지 못한 것이 아니거든. 이런 구조에서는 언제라도 비슷한 일이 다시 벌어지겠구나 싶었다. 당시에는 무력감이 컸고, 나도 따라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니 1인 시위든 단식 투쟁이든 전부 하게 되더라. 성공과 실패를 가늠할 겨를이 없었다. 싸우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으니, 그냥 했던 거다.

 

세 사람 모두 각자의 방식대로 싸워 왔다. 영화를 만들고 개봉하기까지도 녹록지 않은 과정을 거쳤으리라 짐작하는데, 영화를 통해 이루고 싶은 것이 있다면.

변규리_ <너에게 가는 길>은 성소수자 부모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마주한 엄마, 그리고 여성의 성장기다. 기존에 나는 부모를 수동적 존재로 인식했다. 아이를 보살피고, 아이에게 반응하는 사람 정도로 여겼던 셈이다. 하지만 두 분을 포함해서 성소수자부모모임에서 만난 분들을 보며 생각이 바뀌었다. 이들은 성소수자 당사자가 겪는 혐오와 차별을 함께 경험하고, 본인의 위치에서 나름대로 질문과 답을 이어 나가고자 한다. 성소수자부모모임이 활동을 지속하는 이유는, 단지 내 아이를 위해서만은 아님을 생각해주시면 좋겠다. 더불어 이 영화가 차별금지법 제정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말로 표현한 적은 없지만, 우리 셋 모두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요 며칠 뉴스를 보며 굉장히 답답한데, 어쨌든 우리는 끝까지 함께할 거니까.

비비안_ 나는 중도파를 끌어들이고 싶다. (웃음) 차별금지법은 동성애 조장법이라며 우리를 극렬하게 반대하는 사람들 혹은 정치인들에게는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슈에 무관심한 분들이 영화를 본다면, ‘다 같이 행복하게 살 방법이 여기 있구나!’ 하지 않을까. 무지로 인해 타인에게 상처를 준 경험이 있다면, 우리 영화를 보며 새롭게 깨닫는 부분이 있으리라 본다. 영화에 등장하는 이들과 연대하며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지, 나도 좀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지, 그렇게 생각해주시면 참 좋겠다.

나비_ 장자에 이런 말이 있더라. 배는 물 위를 떠가지만, 그 물은 배를 뒤집기도 한다고. 국민이 마음을 모으면, 정치나 정부를 뒤집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국민 중 90퍼센트가 차별금지법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상황이다. 일부 개신교 신자의 목소리에만 주목하며 국민의 뜻을 거스르면, 결국 정부는 그에 걸맞은 결과를 맞이하리라 본다.

ⓒ이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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