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민은 개봉을 앞두고 어머니와 미용실에 다녀왔다. 감독과 배우의 짧은 나들이였다.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를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에서 본인을 연기한 감독의 어머니, 김혜정의 놀라운 존재감을 말한다. 배우로 카메라 앞에 선 건 난생처음이지만, 그는 말하고, 걷고, 일하고, 잠드는 평범한 행동들만으로 영화에 신묘한 기운을 불어넣는다. 신동민 감독은 가족 이야기로 영화를 만들며 어머니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 여러 방법을 시도했다. 처음엔 배우를 캐스팅했고, 다음엔 어머니에게 연기를 부탁했다. 거듭 영화를 찍는 동안 감독은 ‘상대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듣는 법’을 찬찬히 익혔다. 실존하는 인물을 제대로 담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차츰 완성된 3개의 단편이 하나로 묶여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가 됐다. 오래 떨어져 지내던 감독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게 계기였다.
신정웅은 이 여정의 목격자이자 동행인이다. 감독의 첫 단편부터 최근작 <당신에 대하여>(2020)에 이르기까지, 그는 신동민의 영화 속 ‘동민’을 전부 연기했고, 영화를 찍으며 ‘철들어가는’ 감독을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촬영할 때는 실제 모델인 신동민이 되기 위해 애쓰기보다 주어진 상황에 맞춰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그 상황이란 대개 엄마와 아들의 만남으로 이뤄져 있다. 자주 술을 마시고, 종종 엉뚱한 소리를 하며, 아직도 오래전에 바람나서 헤어진 남편 이야기를 꺼내는 엄마. 아들은 그런 엄마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이들 사이엔 그저 사소한 대화만이 오간다. 영화는 인물의 속마음을 선명하게 드러내지도, 억지로 서사를 꿰맞추지도 않는다. 다만 가족의 소소한 시간을 소중하게 담아내는 데 열중한다. 영화의 잔잔한 표면 아래, 어떤 고민이 넘실댔는지 듣고 싶어 신동민과 신정웅에게 만남을 청했다.
극장 상영 기회가 점차 줄고 있지만, 그간 영화제를 통해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와 <당신에 대하여>를 몇 차례 소개했다. 어떤 경험이었나.
신동민_ 오랜만에 친구와 가족을 만난다는 설렘이 컸다. 영화 찍을 때 말고는 서로 자주 만나지 못했는데, 상영을 계기로 가족이 한 공간에 모이고 거기에 정웅 씨까지 같이 있으니까 정말 가족 모임 같더라.
신정웅_ 나도 늘 명절에 먼 친척 만나는 기분이다. 감독님이랑 몇 년을 같이 했고, 어머니와도 오래 봤으니까. (웃음) 큰 스크린으로 완성물을 볼 때는 늘 긴장된다. 반복될수록 점차 무뎌지는 것 같지만, 그래도 언제나 새로운 감각을 얻는다.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대상 받았을 때, 총괄 프로듀서인 장건재 감독은 그 자리에서 울었다고 하던데.
신동민_ 나 역시 너무 기뻤다. 근데 영화 속 동민이 그렇듯, 내가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편이다. 표출이 안 되는 건지, 감정의 폭이 작은 건지 모르겠지만. (웃음) 드러내지 말고 조심해야 한다는 마음이 늘 있다.
장남이라 그런 게 아닐까.
신동민_ 그럴 수도 있다. (웃음)
몇 년에 걸쳐 각각의 단편을 찍었는데, 장편으로 묶인 걸 봤을 땐 어떤 느낌이었나.
신동민_ 영화제 때 처음 봤던가?
신정웅_ 링크로 먼저 보긴 했는데, 극장에서 다 같이 숨죽이고 보니까 다르더라. 여러 사람과 같이 보는 순간이라 그랬는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전주에서 완성된 영화를 봤을 때 되게 뭉클했다.
신동민_ 난 사실 상영 때마다 내가 모르는 실수들이 나올까 봐 조마조마하면서 본다. 소리가 깨지면 어떡하지, 다른 문제가 생기면 어떡하지 하면서. 찍고 편집한다고 끝이 아니더라. 극장마다 컨디션이 다르다 보니 계속 신경 쓸 부분이 생긴다. 한편으론 이제 와서 무언가 바꿀 수 없는 상황이란 걸 알기 때문에, 요즘은 이 영화 다음에 어떤 작업을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을지 생각하곤 한다.
개봉 계획은 이전부터 가지고 있었나. 배우 입장에선 선물 같은 소식이었겠다.
신동민_ 처음엔 상영될 거라는 생각조차 못 했기 때문에, 당연히 개봉도 꿈을 못 꿨다. 이번에 개봉을 경험하면서 돈을 비롯한 현실에 대해 알게 됐다. (웃음) 올해 초 정도에 영화진흥위원회 개봉지원이 결정됐고, 제작사 모쿠슈라 분들과 올해 안에 개봉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신정웅_ 연기를 시작하면서 항상 조금씩 이상을 그렸다. 처음 연극영화과에 들어가 연극을 했을 때 주요 배역을 맡고 싶었는데, 1학년 1학기엔 그러지 못했다. 그러다 1학년 2학기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계속 주요 역할을 맡아 연기했다. 당시엔 그걸 이룬 게 너무 행복했다. 다음엔 대학로에서, 그다음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극장에서 연극을 해보고 싶었고, 점점 욕심이 생기면서 내가 했던 연극이 큰 상을 받으면 어떨까 하는 꿈도 꿨다. 지금껏 그런 바람이 하나씩 이뤄져 왔는데, 영화 쪽은 상상해본 게 전혀 없었다. 그런데 내가 찍은 영화가 큰 영화제에 가서 상 받고 개봉도 한다니까, 차근차근 뭔가 이루어지는 느낌이라 그것만으로도 뿌듯하다.
신정웅 배우는 서울시극단 출신으로 그간 다수의 연극무대에 섰다. 연기는 어떻게 시작했나.
신정웅_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 직장을 따라 가족이 함께 중국에 갔다. 중국에서 지내는 동안 친구들이랑 어울리는 게 어려웠고, 영화를 다운 받아서 보는 게 유일한 취미였다. 그렇게 장르 가리지 않고 1년쯤 보다 보니까, 왠지 내가 저것보다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싶더라. 이제 와 보면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 (웃음) 아무튼 그러다가 배우가 되기 위해 연극영화과 입시를 준비했다.
한창 영화를 찾아볼 때 특히 좋아했던 배우가 있다면.
신정웅_ 잭 니콜슨이 그렇게 멋있었다. 그 느낌과 분위기가 참 좋았다. 중국에 있을 때 <샤이닝>(스탠리 큐브릭, 1980)을 여러 번 봤던 기억이 난다.
신동민 감독은 재수하면서 하고 싶은 걸 찾다가 영화 연출까지 흘러갔다고. 영화는 이전부터 좋아했나.
신동민_ 고등학교 때까지는 영화를 킬링타임용으로만 생각했다. 시골에 살아서 극장에 별로 가본 적이 없었는데, 엄마가 영화를 굉장히 좋아해서 비디오로 이것저것 봤다. 그땐 비디오 가게에서 19금 공포 영화 같은 것도 그냥 다 빌려주고 그랬다. 영화를 보면서도 감독이라는 역할이 있는 줄 몰랐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다. (웃음)
동아방송예술대학교에서 각각 연극과 영화를 공부했고, 2015년부터 함께 단편을 찍기 시작했다.
신정웅_ 당시 영화과에서는 ‘대신 전해드립니다’라는 페이스북 익명 페이지를 통해 배우를 구하곤 했다. 신동민 감독도 그렇게 배우를 찾았고, 연극과 동기가 게시글에 날 태그하면서 연결됐다. 만나서 이야기해보니 서로 잘 맞겠더라. 그때는 졸업을 앞두고 그동안 안 해봤던 영화를 경험해보려던 시기였다.
신동민_ 우선 얼굴에 너무 많은 게 드러나는 사람은 좀 부담스러웠다. 살가움이나 유머러스함이 먼저 보이지 않았으면 했는데, 정웅 씨를 처음 보고 무뚝뚝한 동민 역에 잘 어울리겠다고 생각했다. 정웅 씨가 실제로도 말이 많은 스타일이 아니다. 그런 점이 동민의 모습과 닮아있다고 느꼈다.
신정웅_ 난 감독님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물론 미화된 기억일 수도 있다. (웃음) 처음 만나서 어떤 영화를 어떻게 찍을 거라는 얘기를 막 하는데, 본인만의 색깔이 있는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다. 재밌었고, 계속 같이하고 싶었다.

둘이 처음 찍은 영화가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의 2부 ‘태평 산부인과’다. 원래는 2015년에 <가야 스탠드바>라는 제목으로 촬영한 단편인데, 동민을 연기하며 중요하게 생각했던 게 있다면 무엇인가.
신정웅_ 당시에는 <킹스 스피치>(톰 후퍼, 2010)처럼 실존 인물을 똑같이 따라 하는 연기가 계속 나오는 때였고, 감독님과 그에 대해 많이 상의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저 똑같이 따라 하는 건 흉내 내기나 성대모사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더라. 배우가 상상력을 기반으로 무언가 표현하는 게 연기 예술이잖나. 완벽하게 신동민 감독이 되려 하지 않고, 나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까 생각하고 나와 감독님의 비슷한 부분을 상상하며 연기하려고 했다.
<가야 스탠드바>는 동아방송예술대학교 졸업 영화고, 전문 배우들을 캐스팅해서 찍은 극영화다.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했지만, 세세한 재현보다는 서사에 얽매이지 않는 편집과 사운드 활용 등 실험적 시도가 엿보인다. 처음 완성해본 단편인데,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었나.
신동민_ 그때도 이야기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집착으로부터 나를 풀어주고 싶었다. 그 대신 시간과 공간의 유기적 배치를 통해 ‘닮음’을 보여주는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 낮에 보이는 절의 모습과 밤에 보이는 절의 모습처럼, 각기 다른 시간에 같은 공간을 같은 앵글에 담아보면 어떤 효과가 날까 질문을 던져보는 거다. 그게 결국은 가족이 서로 닮아있다는 생각과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사운드를 통해서는 무의식을 점점 쌓아가는 방법을 고민해보고 싶었다. 아빠가 엄마한테 꽃 꽂아주는 장면에서 공사장 소리를 집어넣는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다 보니 모호한 부분도 상당히 많아졌고, 그냥 점프하는 부분도 생겼던 게 아닐까 싶다.
당시엔 어떤 피드백을 받았나.
신동민_ 그때도 그렇고 그 이후에도, 일기는 일기장에 쓰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웃음) 개인적인 이야기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는 지금도 고민하게 되는 주제다.
여러 고민과 시도를 했는데, 결국 내용에 관한 평가를 주로 들었던 셈이다.
신동민_ 맞다. 너무 개인적이라 공감이 안 된다는 얘길 많이 들었다. 다양한 걸 표현하고 싶었는데, 결국은 내용에 초점이 맞춰지더라.
2부도 1, 3부와 마찬가지로 시나리오대로 찍은 건 아니라고 들었다.
신동민_ 아마 정웅 씨가 동의를 안 할 수도 있겠지만, 2부는 시나리오대로 찍었다고 생각한다. (웃음) 그리고 1부 역시 인물들의 감정 흐름은 시나리오대로였다. 물론 그게 시나리오를 그대로 따라서 찍으려고 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신정웅_ 첫날 오전에는 어떻게 맞춰가야 하나 약간 혼동이 있었다. 그런데 오후부터는 서로 만족하면서 잘 찍었다. 학교 다닐 때 즉흥 수업을 좋아했다. <가야 스탠드바> 찍을 때도, 주어진 상황 속에서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순간이 재밌었고 그 덕에 영화가 더 살아있게 보이지 않나 싶다.
신동민_ 시나리오대로 대화 장면을 찍었는데 그게 맘에 안 들어서 “둘이서 그냥 대화를 한번 해주시겠어요?” 한다거나, “어떤 얘기를 하고 싶으세요?” 하며 시나리오에 없던 장면을 만들었던 적이 꽤 있었다. 그래서 즉흥적인 장면이 많았다고 기억할 수 있을 거다. 결과적으로는 한 절반 정도의 비율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즉흥이라는 표현에 대해 정리를 한번 하면 좋을 것 같다. 갑작스럽게 자유 연기를 시키는 게 아니라, 배우들과의 의논을 통해 애초에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장면을 만들었다는 뜻으로 들린다. 그게 전체 흐름과 맞닿아있다면, 감독 입장에선 ‘시나리오대로’라고 표현할 수 있을 테고.
신동민_ 배우들보고 무작정 알아서 하라는 게 아니었으니까, 말한 게 맞다. 그렇지만 부마다 태도가 계속 달라져 온 건 사실이다. 2부 ‘태평 산부인과’를 찍던 당시만 해도 내가 바라는 게 많았던 것 같다. 영화에 대한 환상도 있었고, 원하는 연기가 있어서 요구사항도 많았을 거다. 정웅 씨한테 죽은 연기를 해달라고 부탁했던 적이 있다. 당시엔 무척 절제된 연기를 원했고, 그게 어떤 효과를 만드는 것 같았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건 감독으로서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더라. 그래서 작년엔가, 미안하다고 그 말을 잊어달라고 했다. 1부 ‘군산행’ 찍으면서부터 인물들의 이야기를 훨씬 많이 듣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나온다는 특수성 때문에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고, 진심으로 들어야 소중한 장면이 나온다는 걸 알게 되기도 했다. 그때부터 사람으로서 좀 철이 들지 않았나 싶다. (웃음) 그러다 3부 ‘희망을 찾아서’에 이르러서는 사실상 감독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잘 듣는 거라고 생각하게 됐다. 인물들에게 뭔가를 요구하지 않았고, 그들의 생각과 내 생각이 딱히 다르다고 여기지도 않았다. ‘내가 하고 싶은 건, 당신이 하고 싶은 걸 찍는’ 거였으니까. 어쨌든 내가 보기엔 이런 식으로 배우들과 소통하는 방법이 달라져 온 것 같은데, 실제로 그랬는지 들어보자. (웃음)
신정웅_ 확실히 변화가 있었다. ‘군산행’ 찍을 땐 정말 둘이 소풍 다니듯이 찍었다. 너무 재밌었다. ‘태평 산부인과’ 때는 연습 기간이 길었는데도, 초반에 견해차가 있었다. 감독님 디렉팅에 맞춰서 좀 더 절제된 모습을 연기하려고 했던 게 기억난다. 그래도 서로 도와가면서 우리가 함께 뭔가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여겼던 건 분명하다. 아무래도 ‘태평 산부인과’ 때보다는 ‘군산행’ 때 서로 더 편해지고 익숙해졌으니까,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바로 알아듣는 현장이 됐다. 근데 요즘은 어떤가? 어떤 변화가 있는지 궁금하다.
신동민_ 아마 <당신에 대하여> 얘기를 하고 싶으신 것 같다. (웃음) 그 영화는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와 표현 방법이 달랐기 때문에 디렉팅에도 차이가 있었다. 여태껏 수많은 사람이 시도한 스타일이라 그게 실험 영화로 분류될 수 있을지, 새로운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하고 싶은 건 확고했다.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에서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했다면, <당신에 대하여>에서는 그렇게 들었던 걸 내가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 찾는 게 중요했다. 영화의 내레이션을 정웅 씨한테 부탁했고, 샹탈 애커만의 <집에서 온 소식>처럼 남의 편지를 읽는 것 같은 톤을 원했다. 그게 힘없게 들리지만, 엄청난 에너지를 갖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논 끝에 결국 내가 녹음한 내레이션을 쓰게 됐다.
신정웅_ 아예 감정이 없는 것처럼 하려니 좀 어렵더라. ‘군산행’ 때는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고 풀어줬는데, 디렉팅 방식이 다시 바뀐 <당신에 대하여> 때는 약간 어색했다. (웃음) 영화 자체의 스타일이 달라서라는 걸 얘기하면서 알게 됐다. 감독님이 계속 변하는 모습이 재밌다. 관객 입장에서는 앞으로 어떤 영화를 찍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신동민_ 결국 어떤 영화를 누구와 찍느냐에 따라 배우들과 소통하는 방식은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2부 ‘태평 산부인과’에 유일하게 아버지가 등장한다. 물론 배우가 연기한 모습을 통해서이지만, 어떤 애잔함이 묻어나는 장면이다.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동민이 결국 아버지와 비슷한 면모를 보이는 대목도 흥미롭다. 아버지라는 인물을 어떻게 담고 싶었나.
신동민_ 그때만 해도 아버지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이 있었고, 정웅 씨가 연기하는 동민과 아버지를 현실 세계에서 만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2부는 복수를 꿈꾸는 영화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나오는 장면에서 프레임 밖에 있는 엄마가 중국어로 욕을 하잖나. 하지만 가족이기 때문에 둘을 다른 방법으로 보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긴 했다. 그게 꿈이었으면,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이 아닌 다른 관계였으면 해서 지금의 탈춤 장면으로 표현됐다.
신정웅_ 영화에선 삭제됐지만, ‘태평 산부인과’ 마지막 장면에 동민이 쓴 시를 읽는 장면이 있다. 그중에 뇌리에 박힌 시구가 있다. 엄마가 나를 낳을 동안, 아버지는 병원 갈 돈을 갖고 다른 여자를 만났다고. 복수라고 하니 그게 떠오른다.
신동민_ 시 제목이 ‘가야 스탠드바’다. 그 독백 영상 공개됐는데, 봤나?
신정웅_ 나는 많이 봤지.
신동민_ 다르게 편집된 버전이다. (웃음)
1부와 3부에선 감독의 실제 어머니인 김혜정 님이 등장해 본인을 연기한다. 이미 많은 이가 연기력에 감탄했다는 말도 덧붙여주었는데, 신정웅 배우는 촬영에 앞서 어머니와 어떻게 관계를 쌓았나.
신정웅_ 어머니가 하시는 노래방에서 같이 맥주 한잔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했던 게 기억난다. 자연스럽게 서로 편해졌고, 촬영도 이어서 편하게 진행됐다. 감독님 집에서 자고 다음 날 어머니랑 같이 연기하고, 진짜 소풍 같았다.
본인을 연기하는 인물과 상호작용하며 연기했던 경험은 어떻게 남았나.
신정웅_ 아무래도 어머니가 전문 연기자가 아니다 보니, 감독님이 상황을 줬을 때 그 안에서 조금씩 방향이 달라지곤 했다. 다른 대사를 하거나, 물어봐야 하는 걸 안 물어보는 식으로 어머니가 어디로 튈지 몰라서, 더 많이 들으려고 했다. 그래야 내가 거기 맞춰 반응하고 이야기를 끌고 나갈 수 있었으니까. 내가 어떻게 보이겠다거나 어떤 연기를 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오로지 어머니를 잘 보고 잘 듣자는 마음이었다.
배우로서는 연기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도 됐겠다.
신정웅_ 연기할 때 믿음이 정말 중요하다는 점에 대해 생각했다. 본인 역할이었기 때문에, 어머니에겐 강력한 동기와 믿음이 있었던 거잖나. 그러니까 정말 살아있는 말이 나오더라. 또 비전공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생동감과 충동, 즉흥적인 모습을 보면서, 이게 정말 살아있는 순간이구나 싶었다. 아침에 어머니가 일어나서 오는데 진짜 술 냄새가 나더라. 그럼 촬영하면서 술 많이 먹었냐고 물어보는 거다. (웃음)
신동민_ 나로서는 촬영 당시에 불안감도 컸다. 난 이걸 완성해야 하고, 이 영화에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이니까. 그와 동시에 욕심을 내기보다는 최대한 인물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걸 내가 원하는 방향과 어떻게 일치시킬 수 있을지를 많이 생각했다. 또 일기장 같다고 하는 이 이야기가 어떻게 하면 소중한 무언가로 바뀔 수 있을지 거듭 고민했고. 그런데 이제 와 돌이켜보면 결과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느낀다. 엄마와 영화를 찍으면서 함께하는 시간이 늘었다. 만약 영화를 안 찍었다면 아마 지금도 1년에 한 번 정도 봤을 거다. 그런데 저번 주에도 만나고 이번 주에도 만났다. (웃음) 영화를 통해 우리 관계가 많이 변했다.
신정웅_ 둘이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게 느껴진다. 처음에 봤던 동민 감독님은 살갑지 않고 퉁명스러운 아들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영화를 찍는 동안에, 그리고 우리가 어떤 계기로 모이는 순간에 계속 둘의 관계가 변하는 게 보였다. 그게 참 예쁘더라. 나도 저렇게 해야지, 엄마한테 사랑한다고 얘기해야지 싶은데, 막상 잘 안 된다. (웃음)
신동민_ 정웅 씨 어머니를 어머니 역으로 캐스팅해서 둘이 껴안는 장면을 한번 연출해보겠다. (웃음)
어머니와는 무슨 대화를 하며 영화를 찍어나갔나.
신동민_ 전부 기억나진 않는데…, 아빠에 대한 생각을 많이 물어보긴 했다. 그전에는 아빠 얘길 한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 그렇게 전에는 몰랐던 엄마의 생각을 들었고, 앞으로 찍을 장면에 관해 설명하고 그걸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기도 했다. 엄마가 부담스럽지 않게 연기할 수 있는 선, 그 경계를 찾기 위해 계속 대화를 이어나간 거다. 속으로는 싫은데 연기하는 자리라서 뭔가 더 말해야 한다고 여길 수 있지 않나. 그게 상처로 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은 어머니가 어디까지 얘기할 수 있고, 또 얘기하고 싶은지 알아가는 과정이었다고 본다.

‘군산행’이라는 제목은 어떻게 지었나. 영화에서 군산은 동생이 군 복무를 하는 곳으로 짧게 언급되고, 그 근처에 아버지가 있다는 소식만 전해진다. 영화가 그리지 않는 미래를 생각해보게 하는 제목이다.
신동민_ 군산에 올해 처음 가봤는데, 좋더라. (웃음) ‘군산행’은 일종의 환상으로 시작됐다. 부모님이 이혼하고 아버지가 계속 성남에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차 타고 1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에 살았다. 물론 교류는 전혀 없었지만. 한편 군산은 영화과 동기가 실제로 의경 생활을 한 곳인데, 그곳에 관한 이런저런 얘기를 들으며 그 공간에 대한 환상을 품었다. 군산에서는 배가 산보다 크고, 그 배에서 나온 쓰레기가 산처럼 쌓여있다고 하더라. 내게는 미지의 세계 같았다. 아버지와 나 사이의 물리적 거리는 가까웠지만, 심리적 거리는 어마어마하게 멀지 않을까 싶었고, 자연히 군산이 떠올랐다. 제목이 ‘군산’이 아니라 ‘군산행’이 된 이유는, 언젠가 동민의 마음이 한 번쯤은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향할 거란 생각이 들어서다. 마지막에 버스를 탄 동민이 어디로 갈지는 모르겠으나, 어머니와 대화하고 난 동민의 마음은 이미 그쪽을 향해있지 않았을까.
3부 ‘희망을 찾아서’에 이르러서는 어머니가 카메라 앞에서 한결 편안해 보이더라. 한편으론 일하는 모습이 참 고단해 보이기도 했고. 3부에 등장하지 않는 신정웅 배우는 어떻게 봤나.
신동민_ 서운하진 않았나. (웃음)
신정웅_ 전혀. (웃음) 너무 좋았다. 어머니가 너무 멋있었고, 삼촌도 진짜 잘하시더라. 아마 3부 때문에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뭉클했던 것 같다.
장편으로 묶일 것을 예상하지 않고 찍었는데도 모아놓고 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1부에서 보일러 고치는 것도 잘 모르겠다고 했던 어머니가 3부에서 수도를 척척 고치는 장면이나, 2부에서 어머니를 연기한 노윤정 배우와 어머니가 함께 등장해 도란도란 얘기하는 장면이 묘한 느낌을 준다.
신동민_ 원래는 ‘군산행’을 2부 구성으로 만들고 싶었다. 1부에서 어머니가 “네 아빠, 너만 한 딸이 있는 여자랑 결혼했다더라.”라는 얘길 하는데, 2부에선 그 딸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했다. 현실적으로 어려워서 1부로 끝냈지만, 그 연장 선상에서 재밌는 작업이 뭐가 있을지 고민해봤다. 2부에서 동일한 공간을 두 번 보여준 경우가 많았는데, 그런 공간의 배치를 한 편이 아니라 서로 다른 영화에서 사용해보면 어떨지 궁금했다. 이전에 각각의 영화에 나온 배우들이 만날 때 어떤 재밌는 장면이 나올지 보고 싶기도 했고. 그런 것들을 조금씩 넣어봤다. 다 찍고 나서는 3부가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 느꼈다. 어머니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도, 삼촌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것도 다 사랑이구나. 내가 이들과 작업하면서 얻은 게 바로 그런 사랑의 교훈이라는 걸, 다 끝나고 나서 배웠다.
신정웅_ 사랑!
신동민_ 2부는 복수, 3부는 사랑이다. (웃음)
이후 완성한 <당신에 대하여>는 좀 더 아버지에게 초점이 맞춰진 작품이다. 가족이 살아온 공간과 가족의 기억을 한데 모은 일종의 에세이 영화인데.
신동민_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를 마무리할 무렵, 영화 맨 마지막에 나오는 캠코더 영상을 들여다볼 생각을 처음 해봤다. 아버지가 남긴 거의 유일한 유품인데, 8mm 테이프로 찍힌 그 영상으로 영화를 만들어봐야겠더라. 그 안에 들어 있는 게 아버지가 나한테 보낸 편지라면, 내가 그걸로 만드는 영화는 아버지한테 보내는 편지가 될 것 같았다. 평소에 편지와 영화가 맞닿아있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다.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 사이에 시차가 있다는 점이 비슷하잖나. 그런 생각과 함께 내가 태어나 자란 성남이라는 곳, 또 그 공간의 내가 모르는 기억을 담아보려고 했다. 어머니의 말을 나의 육체를 통해 발화시키고 싶다는 욕망도 있었고.
영화 말미엔 신정웅 배우가 동민 역으로 등장한다. 원래는 계획에 없었던 촬영이라고.
신정웅_ 원래 카메오로 출연해서 동민을 연기하는 신동민 감독과 만나는 장면을 찍기로 돼 있었다.
신동민_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 3부에서 어머니와 노윤정 배우님이 만나는 장면처럼 말이다.
신정웅_ 그래서 아침 촬영을 끝내고, 점심으로 피자 먹고 가라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감독님이 갑자기 동민 역을 해달라고하더라. 조금 고민했는데, 그래도 우리가 지금까지 해온 게 있으니까 어렵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촬영하게 됐다.
신동민_ 내 동생과 대화하는 장면인데, 둘이 너무 잘 어울리더라. 그때는 내가 들어가서 찍었을 때 그리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겠다고 판단했다. 내가 하려면 좀 다른 시스템이 필요할 것 같았고, 정웅 씨가 들어가니까 확실히 안정감이 느껴졌다. 정웅 씨라면 내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면서 동생과 대화해줄 수 있겠다는 확신도 들었고.
신정웅_ 그래서 내레이션을 부탁받게 된 거다. 원래는 감독님이 녹음한 버전이 다 완성된 상태였다. 내가 갑자기 출연하게 됐으니 목소리도 바뀌면 좋겠다고 했던 건데, 감독님이 워낙 잘해놨으니 그대로 가는 게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신동민_ 내가 욕심이 많았다. (웃음)
두 사람의 가까운 혹은 먼 계획을 들으며 마무리하자.
신동민_ 최근에 카메라를 하나 샀다. 좋은 모델은 아니지만, 그걸로 혼자서 영화 한 편을 찍고 싶다.
신정웅_ 앞으로 계속 배우로 살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내 가족, 또 미래에 내 가족이 될 이들에게, 내가 항상 멋있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랑스러운 가족이 되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