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필요한 것들을 모두 거두고 지금, 자기 얼굴 앞의 실체만을 제대로 보려는 영화는 어떤 형태로 존립할 수 있을까. 영화를 성립시키는 수많은 장치들을 최소화하고, 영화의 전제인 환영의 기교와 싸우며, 빈약한 사각의 틀 위에 ‘존재’ 자체만을 전면화해 남겨둘 수 있을까. 한 발자국만 더 떼면 ‘영화’의 영토가 아닐 벼랑 끝에서 영화 바깥이 아닌, 영화 안을 다시 새롭게 응시할 수도 있을까. 최근 홍상수 영화를 지탱하는 단출함과 투명함은 이 절박한 물음들에 닿아있다. 그 세계의 속성은 하던 것들을 더 이상 하지 않고 있던 것들의 일부를 그저 제거한 결과가 아니라, ‘영화의 평면은 ‘존재’만을 어떻게 다시 살려낼 수 있는가’에 대한 실험적 시도의 산물이다.
전작인 <인트로덕션>에서 홍상수는 두 육체의 기울기, 시선, 거리, 접속이, 그러니까 오직 두 사람의 형상이 프레임을 세우며 숏을 지탱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구조를 통해 시간의 미로를 탐색하지 않고도, 숏의 배열에 힘을 기울이지 않고도 영화가 부서지지 않고 버틸 수 있음을 증명했다. <당신 얼굴 앞에서>는 한발 더 나아간다. 이 영화는 <인트로덕션>의 옴니버스 구조 같은 최소의 형식적 분절도 감행하지 않고 오직 배우의 육체적 지속성만으로 앞의 질문과 대면해보려 한다. 그 대면의 태도가 <인트로덕션> 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 더 과격한데, 그 과격함이 존재의 세부에 빛을 비춘다.


상옥(이혜영)은 얼마 전 미국에서 귀국해서 동생 정옥(조윤희)의 아파트에 머무는 중이다. 둘은 반갑게 재회한 정다운 자매처럼 행동하고 대화하지만, 종종 둘 사이에는 어색한 기운도 감돈다. 그들은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내서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게 많고, 과거에 대한 기억도 다르다. 상옥이 귀국한 이유를 정옥은 알지 못한다. 상옥은 정옥과 산책도 하고 그리워하던 조카도 만나고 어린 시절 살았던 집에도 찾아가 본다. 그리고 자신에게 만남을 요청한 영화감독 송재원(권해효)을 술집 ‘소설’에서 만난다. 그날 오후 비가 쏟아진다.
홍상수의 지난 영화들에서 인물들은 일상의 시간으로부터 분리된 여행지의 자연과 술집, 주택가 골목과 카페, 혹은 극장을 맴돌았고 끝내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일상적 시간의 진공상태에서 그 세계의 모험은 가능했다. <당신 얼굴 앞에서>도 상옥이 동생의 집을 방문한 설정에서 시작하지만, 이 세계는 자본의 시간과 과거의 흔적이 병존하는 장소라는 점에서 좀 다르게 다가온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본 적 없는 신도시 고층 아파트 단지의 풍경만이 아니라, 입주한 지 일 년 만에 2억 원이 올랐다는 정옥의 언급도 낯설다.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 한참 전부터 그곳에 뿌리내렸을 녹음은 신도시 주변에 조성된 공원의 인공적인 인상과 섞인다. 조금 전까지 신축 아파트 단지에 있던 상옥이 갑자기 방향을 돌려 찾은 곳에는 그의 어린 날 추억이 켜켜이 깃든 오래된 주택이 등장한다. 이 영화는 형식으로 시간을 흔들거나 공간에서 시간을 증발시키는 대신, 이미 이 도시에 기이하게 공존하는 시간의 물리적인 겹을 응시하는 길을 택한다. 그 중심에는 상옥의 행로, 아니, 이혜영이라는 배우의 육체가 있다.

어쩌면 그 존재가 이 영화의 모든 것인지 모른다. 그의 얼굴과 음성, 시선과 제스처, 걸음걸이와 자세가 그가 만난 인물들은 물론, 그의 눈길과 손길이 닿은 풍경과 사물에 시간을 불어넣는다. 그의 육체가 지나가고 머무는 곳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동시에 일렁인다. 그는 때때로 황야에서 고향으로 말없이 돌아왔다가 다시 훌쩍 떠나버릴 서부의 여인 같고, 종종 배우 이혜영의 지난 궤적을 모두 응축한 신묘한 ‘영화 유령’ 같다. ‘소설’에서 상옥과 송재원이 함께 하는 긴 호흡의 장면이 그런 인상의 절정을 이룬다. 생과 죽음, 취기와 음악, 호기심, 유혹, 미련, 다짐, 의지, 슬픔, 두려움, 사랑, 연민, 기억,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바로 한순간. 영화가 숱한 설정과 서사로 닿고자 애써온 인간의 감정과 공기가 작은 술집 구석의 단 두 사람만으로, 무엇보다 이혜영의 육체성으로 한꺼번에 깨어난다. “이제는 제 얼굴 앞을 보게 하소서.” <당신 얼굴 앞에서>가 상옥의 목소리로 거듭 외는 이 기도가 바로 이 장면에서 아름답게 현현하고 강렬하게 이뤄지는 것이다.
당신 얼굴 앞에서 IN FRONT OF YOUR FACE 감독 홍상수 출연 이혜영, 조윤희, 권해효 제작 영화제작전원사 배급 영화제작전원사, 콘텐츠판다 제작연도 2021년 상영시간 85분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개봉 2021년 10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