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操縱)과 조종(弔鐘)
인디그라운드 X 독립영화전용관 기획전 <철의 여인> 김곡·김선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Feature / 2021-10-19

찰떡 호흡이란 이런 걸 말하는구나 싶었다. 쌍둥이 형제는 태어난 후로 평생 붙어 다녔고, ‘비타협 영화집단 곡사’라는 팀을 이뤄 20년 넘는 세월 동안 견고한 파트너십을 발휘했다. 김곡이 ‘어’ 하면 김선이 ‘아’ 했기에, 대화는 쉴 틈 없이 이어졌다. 서로 취향과 역사를 속속들이 알다 보니, 상대가 절반만 말해도 금세 이해하며 뒷말을 더 하는 식이었다. “일과 생활이 섞여서 좋은 점은 일하기가 편하다는 거예요. 나쁜 점은 생활하기가 힘들다는 거고. (웃음)” 두 사람은 2001년 <이 사람을 보라> <반변증법>을 시작으로, 2000년대에 단편만 12작품을 만들었다. 그 와중에 장편 <뇌절개술>(2005) <고갈>(2008) <방독피>(2010) 등 장편 작업도 왕성히 진행했다. 영화 만드는 일에 거의 미쳐 있던 것처럼 보인다고 하자, “집에서 노느니 영화라도 만들어야 했다”고 응수한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순 없지만, 다행히(?) 세상이 그들을 도왔다. 단편 <철의 여인>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2008년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탄생했다. 주인공은 골방에서 옷을 지어 입느라 분주한 마네킹 여인이고, 지하 감방에 갇힌 누군가가 그녀의 작업을 자꾸만 방해한다. 영화는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근혜의 피습 사건을 다루는가 하면, 광우병 파동으로 촉발된 한미 FTA 반대 시위 행렬을 따라가기도 한다. 두 감독의 말에 따르면, <철의 여인>은 시대를 한참이나 앞선 곡사의 마스터피스다. 애초 “미래의 관객”을 상상하며 만들었고,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의미가 자명해졌다. 13년이 흐른 지금, 오늘날 관객에게 <철의 여인>은 어떤 충격을 줄지 설렌다는 김곡, 김선 감독을 만났다.

 

 

<보이스>(2021) 개봉으로 한동안 분주했을 텐데, 오래전에 만든 단편을 다시 선보이게 됐다.

김선_ 오늘 아침에 <철의 여인>을 다시 봤다. 너무 웃기더라. 영화 마지막에 퍼포먼스 하는 분이 정아영 씨라고, 촬영 당시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무용과에 다녔다. 지금도 친하게 지낸다. 영화 보고 나서 “너무 훌륭한 퍼포먼스야”라고 문자를 보냈다. 아영 씨도 요즘 심심했는지 계속 문자가 오네. (웃음)

 

배우 대부분 친구나 지인이었나 보다. 함께 퍼포먼스를 했던 아이는 누구였나.

김곡_ 아내의 고모의 아들. 소규모로 찍는 작품이다 보니, 전문 아역 배우를 섭외하기 어려웠다. 사실 대단한 연기가 필요한 영화도 아니고.

김선_ 북어에 꽂은 딜도로 아이 손바닥을 치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 현장에서 아이한테 설명했던 기억이 난다. 아이가 “이게 뭐야?”라고 물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야, 장난감이야.” 그랬다.

 

딜도를 보면서도 시간을 느꼈다. 정말 오래된 딜도여서 유물처럼 보이더라.

김곡_ 유물들의 총집합이지. 사실 영화 전체가 유물처럼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찍었다. 우리 그러지 않았나? 일부러 16mm 필름을 바닥에 풀어서 긁고, 그 위에 먼지가 내려앉도록 분무기로 물도 좀 뿌리고.

김선_ 맞다, <철의 여인>을 2008년에 찍었다. 한창 만들 때, 광우병 사태가 터졌다. 그것도 타이밍이 참 기막혔는데, 어쨌거나 미래의 관객들이 유물을 발견하듯 영화와 2008년을 보길 바랐다. 본격 미래 영화인 셈이다.

김곡_ 현재의 관객조차 미래로 가길 바라면서 만들었다. 요즘 제작한 것이 아니라, 이제 막 발굴한 것처럼 보이는 영화. 그래서 필름을 선택했고, 다시 훼손하면서 몽타주를 얼기설기 이어 붙였다. 내가 볼 때는 곡사의 마스터피스다. <자가당착: 시대정신과 현실참여>(김선, 2011)도 너무 좋은데, <철의 여인>을 보면 설렌다. <자가당착: 시대정신과 현실참여>의 핵심 요소가 전부 응축된 프로토타입이라고 할 수 있다.

<철의 여인>
<철의 여인>

근데 <자가당착: 시대정신과 현실참여>는 왜 김선 감독 혼자 연출했나.

김선_ 어떻게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는데, 실은 같이 만든 거나 다름없다.

김곡_ 김선이 주도했고, 나는 필요하다고 할 때 손을 보태는 식이었다. 시나리오를 봐달라고 해서 보니, 덧붙일 게 없더라. 되게 좋았다. 영화도 잘 만들었고. 그러다 법정 소송 들어가면서 김선이 고생을 했지.

 

<보이스>를 보며 뉴스와 각종 신문 기사를 콜라주 하듯 이어 붙인 오프닝에 감탄했다. 근데 <철의 여인>을 보니 ‘이때부터 편집은 현란했구나’ 싶더라. (웃음)

김곡_ 우리가 그렇게 붙이는 걸 좋아하니까. 실은 <보이스>도 좀 더 현란하기를 원했다. 자투리 컷이 훨씬 많은데, 러닝타임을 줄이는 과정에서 많이 편집됐다. 보이스피싱 ‘총력전’ 장면도 2-3분 가까이 줄었다. 원래 팬티 안에 돈 숨기는 것부터 해서 별별 컷이 다 있었다. 보이스피싱 범죄 현장을 총괄하는 곽 프로(김무열)의 연설도 좀 더 길었다. 중간중간 경극 배우처럼 대사를 치는 장면도 있었고.

 

더 재수 없어 보였겠다.

김곡_ 그렇지, 몇몇 장면은 시나리오 단계에서 너무 잔인하다는 이유로 빠졌다. 저열함의 끝을 보여주면서 아예 바닥을 치려 했는데, 마음에 걸리더라. 보이스피싱 자체가 진행형 범죄이고, 여전히 피해자가 나오는 상황이지 않나. 의도와 달리, 위악이 아닌 악의가 드러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삭제했다.

김선_ 그런 부분은 김무열 배우가 먼저 우려를 표해주기도 했다. 지나치게 선을 넘어버리면, 오히려 주제가 흐려질 수 있으니까.

김곡_ 고민을 많이 하는 배우다. 대사도 본인 입에 맞춰서 조금씩 바꿨다. “팩트 체크는 구라의 기본이다”라는 대사가 그런 경우였다. 기본 내용은 동일한데, 김무열 배우가 완성한 문장이 재미있게 들리더라.

<철의 여인>
<자가당착: 시대정신과 현실참여>

<철의 여인>과 <보이스>를 나란히 놓고 보면, 감독 눈에는 무엇이 가장 먼저 들어오나.

김곡_ 의식적으로 생각하면서 영화를 만들지는 않는데, 작품 안에서 계속 돌아가는 이미지가 있긴 하다. 퍼펫과 퍼펫티어, 그러니까 꼭두각시처럼 조종당하는 인물에 관한 이미지는 늘 포함하게 된다. <보이스>에서는 그 퍼펫이 피해자였던 거다. 보이스피싱은 곧 상황 연출이다. 거기 범죄자들 보면, 진짜 영화감독 저리 가라 할 정도다. 예를 들어 통화 가로채기 앱을 써서 전화를 받으면, 한 사람은 금융감독원인 척하고 다른 사람은 뒤에서 배경 소음을 만들어준다. 말 그대로 대본 쓰고, 연기하는 거다. 보이스피싱 피해자가 자책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더라. 순간적으로 꼭두각시처럼 타인에게 영혼을 조종당했다는 사실이 너무 모멸적이니까. 돌이켜보니 그렇게 영화를 시작할 때 우리를 움직였던 이미지가 신기하게도 계속 남아 있더라. 사실 어느 감독이나 마찬가지일 거라고 본다. 아무리 들고 날뛰어도, 심지어 흥행에 참패했다가 몇 년 후에 다른 작품으로 돌아온다고 해도, 거기에는 뭔가가 있다. 딱 그 사람다운 뭔가가. (웃음)

 

의도하지 않기에, 알아채지 못하는 경우도 많은 듯하다. 만들 때는 몰랐는데, 나중에야 ‘비슷한 게 자꾸 나오네?’ 한다고.

김곡_ 오히려 매번 다른 것을 만드는 감독이 흔치 않지. 예를 들어…

김선_ 조엘 슈마허!

김곡_ 맞다, 낯선 이미지를 갖고서 왔다 갔다 너무 잘하신다.

김선_ <로스트 보이>(1987) <다잉 영>(1991) <폰 부스>(2003) <오페라의 유령>(2004) 등 전부 다르고 너무 재밌지. 작년에 돌아가셨다.

김곡_ 돌아가셨다고? 너무 일찍 가셨네.

 

그간 비타협 영화집단 ‘곡사’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공동 연출을 지속해왔다. 어느 인터뷰에서는 ‘곡사’를 아무 뜻 없이 떠오른 단어라고 말하는가 하면, 다른 기사에서는 ‘곡할 곡, 죽을 사’를 결합한 단어라고 설명하기도 하던데.

김곡_ 뒷이야기는 와전됐다. 뭐 농담으로 그렇게 말했을 수도 있는데, 세상에 누가 팀 이름에 죽을 사 자를 넣겠나. 데스메탈 그룹도 아니고. (웃음) 진짜 별 뜻 없다. 저번에 <보이스> 인터뷰를 할 때는 그런 질문을 받았다. ‘비타협 영화집단’이라면서 상업영화는 어떻게 하느냐, 이제 타협하는 거냐. 그때 타협이라기보다는 안정적인 포맷에 신체를 맡긴 상태에서 우리의 정신을 이어가고자 한다고 답했다. 대답을 약간 뭉갰는데, 결과적으로는 잘 포장이 됐다. (웃음) 뭐라고 해야 할까, 우리의 정신을 좀 더 많이 보여주려고 체위 변형을 꾀했다고 해야 하나.

김선_ 책임의 변형?

김곡_ 아니, 체위의 변형. 근데 듣고 보니, 책임을 변형하는 게 더 재밌네.

김선_ 어쨌거나 지나고 보면, 결국 캐릭터든 이야기든 우리다운 걸 고르게 된다. 그게 우리 본새이기도 하고, 팔자라고 말해도 되고. 만약 <보이스>와 같은 날에 개봉한 <기적>(이장훈, 2021) 시나리오가 온다? 그럼 우리는 못 하지.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니까. <정직한 후보>(장유정, 2020) 각본 작업이 좀 예외였다. 둘 다 코미디에 약하다고 생각하거든. 근데 정치인을 다루는 이야기라는 점에 끌렸다.

김곡_ 게다가 정치인이 본인의 입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지 않나. 앞서 얘기했던 꼭두각시 혹은 좀비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 한참 시나리오를 쓰는 와중에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이 시작됐다. 내 인생에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이야. 국회 청문회 방송을 틀어 놓고 시나리오를 쓰는데, 이걸 쓰는 나조차 영화보다 현실 세계가 더 재밌더라. (웃음)

김곡 ⓒ이영진

<철의 여인>도 찍는 와중에 여러 일이 일어났다. 2000년대에 만든 단편 중에 하필 <철의 여인>을 상영하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나.

김선_ 애초 2000년대 정치 사회 이미지를 모아서 신문 보는 듯한 느낌을 내보자고 기획했다. <철의 여인>을 보면, 당대 풍경을 확인할 수 있기에 선택하지 않았을까?

김곡_ 맞다, 플립 북처럼 만들고 싶었다. 2000년대 신문 기사를 빠르게 넘기면, 어떤 몽타주가 나올지 궁금했다. 거짓말과 가짜 뉴스가 판을 치는 왜곡된 몽타주라고 해도, 그 자체가 시대정신이라고 봤다.

김선_ 한국 정치 사회는 일종의 카오스 상태였는데, 자기모순과 자가당착이라는 본질은 명확하게 보이더라. 그걸 마네킹 여인으로 형상화했다. 정신적 분열, 욕망의 충돌, 모순에 부딪히는 상황 등을 그려내고자 했다.

김곡_ 그래서 탄핵이 시작됐을 때, 엄청나게 놀랐다. <철의 여인>이 모든 걸 예지했구나. (웃음) 시기를 맞춰서 나왔으면, 굉장히 이슈가 됐을 것 같다. 근데 영화가 10년 전쯤 먼저 나와버렸지. 사실 시나리오를 썼던 김선 또한 뭔가를 예측하지는 않았을 테고. 어떤 직관 같은 것이었겠지. 아마도 작가는 꼭두각시 조종사를 특정 개인이 아니라, 추상적 집단으로 생각했을 게 분명하다. 박정희 신화?

김선_ 그렇지, 최순실의 존재에 관해서는 전혀 몰랐을 때니까. 다만, 박정희 신화가 전부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그때 내 눈에 우리나라는 펄펄 끓는 탕처럼 보였거든. 단순한 카오스가 아니라, 굉장히 다이내믹한 열기를 띠고 있었다. 그 냄비 앞에서 불을 지피는 사람이 많을 텐데, 그중에서 얼굴이 그나마 잘 보이는 사람이 박정희였다.

김곡_ 퍼펫과 퍼펫티어로 나눠서 이야기해본다면, 퍼펫티어는 고착된 기억이라고 생각했다. 먼 과거에서부터 미화되고 굳어진 안개 같은 신화. 박정희든 1970년대든 군사 정권이든, 뭐라고 불러도 상관없다. 하여간 퍼펫은 그걸 따라잡고 복구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보니 옷도 지어 입고 분장도 하는 거다. 기억에 조종당한 채, 거짓말로 치장하는 모습. 바로 그게 현재 정치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마음대로 안 되면 남 탓으로 돌리며 혐오하고, 스스로 분열하고. 퍼펫티어와 퍼펫 모두 드러나는 영화이고, 필연적으로 자기 조롱일 수밖에 없는 요소를 지닌다. 한국사회뿐만 아니라, 그 사회의 구성원인 우리 역시 등장하니까. 그래서인지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다고 말한 사람도 더러 있었다.

 

실제로 <철의 여인>은 촛불집회로 끝난다. 엔딩 크레디트를 보다가 웃었다. ‘고맙소’에는 고마운 사람의 이름을, ‘안고맙소’에는 ‘집권배후세력’이라고 적었더라. 그래도 ‘집권배후세력’ 덕분에 영화를 만들 에너지와 아이디어를 많이 얻지 않았나. (웃음)

김곡_ 그러니까 예지적이라고 말하는 것도 불충분한 것 같다. 이와 같은 구도는 지금까지 계속됐고, 앞으로도 계속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그렇지 않나. 골방에 갇힌 몇몇 사람끼리는 내부 분열을 앓는데, 밖에서는 군중이 우르르 몰려 나와 함성을 지른다. 건전하다고 할 수 없는 상태인데, 어쩌다 보니 우리 영화는 그걸 담아냈다. 아니, 담아냈다거나 만들었다고 말하는 건 지나치게 능동적인 느낌이다. 그냥 세상을 모사했다고, 차라리 모사됐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하지 않을까 싶다. <철의 여인> 촬영 중간에 촛불 시위가 시작됐다. 영화에 손가락이 방바닥을 기어가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 나오는데, 그걸 찍다가 라디오에서 소식을 들었다.

김선_ 빛이 들어오기에 TV는 못 켜고, 라디오 방송만 들었거든. 골방에 앉아서 손가락을 옮겨 가며 한 땀 한 땀 찍었다. 원래 그날 촬영을 끝내기로 했는데, 뉴스 듣자마자 그대로 놓고 나갔다.

김곡_ 그랬나? 뛰어갔던 건 기억 나는데.

김선_ 어차피 들어올 사람도 없으니까 그대로 놓고 갔지. 내일 여기서부터 다시 찍자고 한 다음, 곧장 나가서 시위에 참여했다.

김선 ⓒ이영진 

한미 FTA 반대 시위 행렬 속에서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당시 현장 반응은 어땠나.

김곡_ 처음에는 오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근데 정아영 씨가 워낙 당당한 자세로 응하다 보니, 나중에는 다들 손뼉 치면서 재밌어했다. 심지어 단상 위에 올라가서 춤까지 추지 않나. 모든 게 즉흥이었다.

김선_ 지금 생각해도 아영 씨가 정말 대단했다. “저기서 춤춰도 괜찮겠다”라고 하니까 “오케이!” 하며 거리낌 없이 단상으로 올라가더라.

김곡_ 다들 정상은 아니다. (웃음) 막판에 급하게 붙은 장면인데, 위대한 퍼포먼스 덕분에 영화가 완벽하게 완성됐다. 아, 한나라당 당원으로 등장하는 송연수 배우도 진짜 멋졌다. <휴가>(2021)를 연출한 이란희 감독에게 소개받았다. 시나리오를 들고 집으로 찾아갔다. 송연수 배우가 대본을 읽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왜 감독들한테는 그런 거 있지 않나. 이 배우를 만나다니, ‘살았다!’ 하는 느낌.

 

제작비는 어떻게 마련했나. 따로 작업실이 있었나.

김곡_ 영화에 나온 골방이 우리 작업실이다. 마네킹은 청계천을 돌아다니면서 주웠고, 필름도 비싸게 사지는 않았다. 우리한테는 품질이 중요하지 않았거든. 그냥 상만 맺히면 되니까.

김선_ 현상도 우리가 했나?

김곡_ 스크래치를 내야 해서 일부는 우리가 직접 하고, 너무 흐릿하게 찍혀서 불안한 부분은 영화진흥위원회 현상소에 맡기기도 했다.

 

개인 암실도 있었나.

김곡_ 화장실에서 대충 빛만 막고 했지. (웃음) 한참 현상에 재미를 붙였던 때다. 습기가 차는 문제가 있기는 했는데, 그거 빼면 뭐 나름대로 괜찮았다. 카메라는 이베이에서 싸구려로 샀다.

김선_ Krasnogorsk-3라고 소련제 카메라인데, 진짜 20만 원도 안 됐다.

김곡_ 와, 왜 이렇게 기억을 잘하나. (웃음)

김선_ 내가 샀으니까. 태엽식 카메라라 오래 쓰면 고장이 난다. 그래도 구조 자체가 간단하고 튼튼해서 잘 썼다. 기본적으로 줌 렌즈가 좋고.

김곡_ 태엽이 좀 빡빡해서 그렇지, 찍히기는 잘 찍히더라.

김선_ 세 번 정도 샀을 텐데, 다 합쳐서 50만 원도 안 했으니 진짜 쌌다. 지금도 나오려나 모르겠다. 생산이 중단되기는 했는데, 당시만 해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김곡_ 조명팀도 따로 없이 우리끼리 대충 노출계로 맞춰보면서 촬영했다. 어차피 유물인데, 톤이 좀 튀면 어떠냐면서. (웃음)

김선_ 당시 우리가 즐겨보던 작품에 영향을 받기도 했다. 존 랜디스 초기작, 가이 매딘의 단편들, 그리고 그 체코 감독이 누구였더라?

김곡_ 얀 스바크마이어?

김선_ 맞다, 그렇게 필름으로 만들어서 유물 같은 룩을 만들어내는 작품을 열심히 봤다.

김곡_ 근데 <철의 여인> 딸랑 하나 만들어놓고, 거장 이름을 줄줄이 대니까 좀 민망하다. (웃음)

<방독피>
<보이스>

<자본당 선언: 만국의 노동자여, 축적하라!>(2003)를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상영했을 당시, 한 인터뷰에서 영화와 혁명의 결합을 꿈꾼다고 말한 적이 있다. 김곡 감독은 영화의 전복성을 증명하고 싶어 했고, 김선 감독은 “더 이상 노숙자 안 봤으면 좋겠고, 착취당하는 장애인을 보는 것도 싫다. 남아도는 자본을 뚝 떼어다가 어딘가에 확 기부해주고 싶다. TV 토론회를 봐도 짜증이 안 나는 세상. 그게 내 관심사다.”라고 했더라.

김곡_ 에이, 김선이 훨씬 더 멋있네! 나는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고.

김선_ 골방 철학자처럼 말했다. (웃음)

김곡_ 그러게, 책 읽다가 나온 느낌이다. 어쨌거나 처음 시작할 때의 마음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 쉽지는 않다. 가끔은 ‘잘 가고 있나?’ 하며 불안에 휩싸이곤 한다. 초심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지 의심하기도 하고, 사실 눈앞에 닥친 상황을 넘기기 바빠서 의심조차 못 할 때도 있다. 그래도 앞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든지 곡사가 맨 처음에 품었던 마음을 지켜나가고 싶다. 그게 커다란 배너에 대문짝만하게 쓰여 있지는 않더라도, 어느 한 귀퉁이에서 중얼대기는 했으면 좋겠다. 그럼 시간이 흘렀을 때, 연출자로서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요즘은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나.

김곡_ 시나리오를 쓰는 중인데, 하다 보니 또 꼭두각시 이야기더라. 생긴 게 어디 안 가는구나 싶다. (웃음) 작가로서의 일관성은 면면이 유지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프로젝트 두세 개 정도를 굴리는 상황인데, 오늘 김선과 인터뷰에 오면서 잠깐 그런 얘기를 나눴다. <철의 여인> 같은 영화 만들고 싶다고. ‘또라이’ 짓을 못 하니 늘 아쉽다. 상업영화에서는 ‘누가 미쳤나?’가 아니라, ‘누가 정답에 가까운가?’라는 기준으로 경쟁하니까.

김선_ 영화판에서 또라이 짓을 환영해주던 시대는 지났지. 이제 코로나19로 인해, 어느 부분에서는 더욱 더 빠르게 획일화될 수밖에 없고.

김곡_ 정답 맞히기에 가까워지리라 본다. 관객 역시 그러한 방식에 이미 익숙해진 듯하다. 사실 나는 영화에 별점을 매기는 제도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별점의 가장 나쁜 점은 정답을 가정한다는 것이다. 100점 만점이라는 정답을 정해 놓은 상태에서 영화를 판단한다는 것이 내게는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별점을 매기는 분들에게는 죄송하지만, 좀 구리다. 유용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유용성이 곧 진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

 

별점, 조회 수, 좋아요… 그런 기준에서 자유롭기가 어려운 시대이기도 하다.

김곡_ 맞다, 셋 다 결국 같은 말이다. SNS에 본인의 고유성을 자랑하고자 ‘셀카’를 올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반대다. 누가 더 많은 ‘좋아요’를 받는지 경쟁하는 거다. 그러다 보면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이 좋아하는 걸 올리게 되고, 결국 내가 좋아하는 건 서서히 없어진다.

김선_ 최근 n번방이라든지 인플루언서 계정 도용 사건 등을 지켜보며, 온라인 공간에서 정체성을 숨긴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생겼다. 아직 아이디어를 적어두는 단계다. 근데 말하다 보니, 이렇게 또 자연스레 꼭두각시 이야기로 가는구나 싶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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