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능이라는 특권
인디그라운드 X 독립영화전용관 기획전 <남매의 집> 조성희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Feature / 2021-10-15

“근데 이렇게 말하면, 기사에 쓸 이야기가 너무 없죠?” 대화 중간에 조성희가 멋쩍게 웃었다. 뚜렷한 원인과 결과로 영화를 설명하기는 어렵다고 다섯 번쯤 말한 참이었다. 조성희는 ‘그냥’이라는 단어를 자주 썼다. 그냥 손이 움직이는 대로 시나리오를 썼고, 그냥 하루가 무사히 지나가기만을 바라며 촬영장에 들어섰다. 무언가를 선택해야 할 때는 직감을 따랐다. 그냥 더 나을 것 같은, 마음이 가는 쪽을 골랐다. 첫 장편영화 <짐승의 끝>(2010)을 시작으로, 조성희는 지난 10년 동안 <늑대소년>(2012),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2016), <승리호>(2021)까지 총 4편의 영화를 선보였다. 그는 늘 정체가 불분명한 미지의 시공간을 탐험했고, 결국 국내 최초 SF블록버스터 <승리호>를 탄생시키며 저 멀리 우주까지 다녀왔다. 신작을 내놓는 속도와 영역을 확장하는 에너지가 대단하기에, 누구보다 계획과 계산에 충실할 사람일 거라 짐작했다. 하지만 조성희의 입에서 나오는 단어는 운명과 본능이었다. 그에게 영화는 “마음을 따라가는 길”이고, 마음은 때때로 그조차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흘러갔다. 덕분에 조성희는 독특한 개성을 지키면서도 거듭 새로운 세계와 만날 수 있었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재학 시절, 처음으로 만든 단편 <남매의 집>(2008)에는 감독이 활용해온 영화적 요소의 원형이 담겨 있다. 조성희는 이때부터 순이와 철수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디스토피아적 세계관과 폭력을 마주하는 존재를 한데 버무렸다. 잔혹한 절망에서 출발해 한동안 희망 속을 유영해온 그는, 최근 다시 한번 증오와 폭력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이유를 묻기보다는 그저 기다리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냥 달라져 버린 마음이 이번에는 어떤 운명을 맞이할지 기대하면서.

 

 

13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지만, 꾸준히 회자되는 작품이다. 최근에도 감독이나 배우에게 좋아하는 단편영화가 뭐냐고 물었을 때, <남매의 집>을 꼽는 사람이 적지 않다.  

감사한 일이다. 이번 인디그라운드 상영 소식을 듣고 놀랐다. 너무 오랜만이기도 하고, 아직도 <남매의 집>을 극장에서 틀 기회가 있구나 싶어서.  

 

최근에 본 적 있나. 

없다. 작업을 마친 후에는 절대로 다시 안 본다. <남매의 집>뿐만 아니라, 모든 영화가 그렇다. 창피해서 못 보겠다. 다른 감독들도 TV 보다가 예전 영화가 나오면, 비명 지르면서 딴 데로 채널을 돌린다고 하더라. (웃음)

 

<남매의 집>을 생각하면, 뭐가 가장 먼저 떠오르나.

한국영화아카데미 재학 시절이 떠오른다. 남들보다 영화를 늦게 시작했다. 영화를 만들고 싶다, 만들어야지, 그렇게 결심했던 나이가 서른 즈음이거든. 본래 대학에서는 시각디자인을 전공했고, 졸업 후에는 회사에서 일했다. 한국영화아카데미에 들어갔을 때, 동기 중에 내가 가장 나이가 많던 것으로 기억한다. 학교 다니는 동안, 되게 재미있게 놀았다. 애들하고 영화 얘기도 많이 하고, 단편영화를 만들면서 서로 치고받기도 하고. 진짜로 주먹다짐을 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만큼 치열하게 의견을 나눴다. (웃음) 영화 규모가 크든 작든, 그 안에 들어가는 정성과 열정은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당시에는 젊기도 하고 학생이다 보니, 모두 패기가 넘쳤다. 며칠간 밤을 새우는 건 일도 아니었지.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결국에는 내가 재밌어서 하는 거니까. 에너지를 쏟아붓는 시간이었고, 여전히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제8회 미쟝센단편영화제 대상과 칸국제영화제 시네파운데이션 부문 3등상을 거머쥐며, 조성희라는 이름을 알린 첫 작품이기도 하다. 당시 주변 반응은 어땠나. 친구들이 많이 부러워했을 것 같은데.

그때는 부럽고 의식하고 그러기보다는, 다들 축하하는 분위기였다. 학교에서 1년 동안 정말 하드 트레이닝을 하거든. 수업과 영화 제작을 병행하다 보면, 사계절이 금세 지나간다. 봄에 준비를 시작해서 여름에 촬영하고, 가을에 후반 작업을 한다. 영화를 완성하면, 어느새 겨울이다. 영화제에 갈 때쯤에는 거의 탈진 상태가 되는 거다. 그렇게 한 작품을 마무리하고 나면, 다들 “드디어 끝났다!” 하며 해방감과 보람을 느낀다. 앞으로 어떤 세계에 진입하게 될지 기대하면서 설레기도 하고. 졸업상영회에서도 서로 어깨를 토닥이며 수고했다는 인사를 주고받았다. 결과도 결과이지만, 과정이 중요했던 것 같다. 작품을 만들며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기에, 서로 손뼉 쳐주고 싶은 마음이 더 크지 않았나 싶다. 

<남매의 집>
<남매의 집>

시나리오 평가는 어땠나. 촬영과 미술, 사운드 등 영화의 중요한 요소가 구현되지 않은 상태에서 텍스트만으로도 지지를 끌어낼 수 있었나.

평가는 나쁘지 않았다. 선생님께 어마어마하게 야단을 맞거나, 친구들이 “형, 이건 진짜 아니야. 다시 써.” 할 정도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대부분 잘하면 재미있겠다는 반응이었다. 근데 수업에서 첫 번째 편집본을 공개하는 순간, 망했구나 싶었지.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라.

 

왜? 어떤 피드백을 받았나.

시나리오를 보면서 각자 상상했던 바가 달랐던 것 같다. 편집을 잘못하기도 했고. 안타깝다는 얘기를 들은 후, 마음을 다잡고 편집실에 들어갔다. 그때부터 정말 망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 편집했다. 어쨌든 기한은 정해져 있는 터라, 다른 친구들보다 시간을 더 할애할 수도 없었다. 주어진 시간을 편집에 전부 썼던 것 같다.

 

러닝타임이 40분 정도로 단편보다는 중편에 가깝다. 짧지 않은 길이인 데다 공간도 한 군데만 사용하는데, 계속해서 섬뜩하고 불쾌한 분위기를 유지한다. 

나도 그냥 무서운 영화 만들자, 그랬던 것 같다. (웃음) 영화다운 영화를 처음 만들다 보니, 연출자로서 크게 의식할 겨를도 없었다. 요령도 없고,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촬영 회차가 10회 정도였는데, 하루하루 ‘오늘만 무사히’라고 되뇌었다. 오늘 찍어야 할 분량만 다 찍자. 무사히 하루를 넘기자. 그런 마음으로 촬영장에 갔다. 어찌 됐든 잘 수습하자는 생각뿐이었다. 

 

첫 영화라면, 이것저것 해보고 싶었을 법도 한데. 

욕심보다는 공포가 컸다. 이러다 촬영이 어그러지면, 진짜 작품을 망쳐버리면 어쩌나 싶더라.

<남매의 집>
<남매의 집>

무서워하며 찍는 무서운 영화였구나. (웃음) <남매의 집>을 두렵게 만드는 중심 인물은 라오우라는 침입자다. 최근 <모가디슈>(류승완, 2021) <반도>(연상호, 2020), 넷플릭스 드라마 <D.P.>(한준희, 2021) 등 여러 작품에서 활약하는 구교환 배우가 기괴한 캐릭터를 그려낸다. 특히 지나치게 정중해서 비굴하기까지 한 말투와 미소가 인상적이다. 

동기였던 윤성현 감독의 전작 <아이들>(2008)에서 처음 봤다. 구교환 배우가 약간 모자란 역할로 나오는데, 연기를 너무 잘하더라. 그때도 참 특이했다. 호흡도 묘하고. 성현이한테 부탁해서 소개받았다. <남매의 집>을 만들면서 무척 친해졌고, 요즘도 자주 만난다. 이제 정말 스타가 돼서 연락하기가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웃음) 당시 출연했던 사람 중에 교환이만 배우였다. 아역도, 또 다른 침입자로 등장하는 조성환, 백승익 배우도 연기를 처음 해보는 상황이었다.

 

침입자를 연기한 세 사람의 합이 돋보인다. 조성환, 백승익 배우와는 어떻게 만났나.

둘 다 친구다. 대머리로 나온 조성환 배우는 과거 직장 동료였다. 지금은 스토리보드 작가가 됐다. 미국에 유학을 다녀온 후, <옥자>(봉준호, 2017) <남산의 부장들>(우민호, 2019) 등 여러 작품에 참여하면서 아주 바쁘게 지낸다. 백승익 배우는 대학교 동아리 후배다. 지금도 <인랑>(김지운, 2018) <군도>(윤종빈, 2017) 등에 출연하며, 연기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재미있고 착한 친구들이어서 죽이 잘 맞았다. 촬영하면서 다들 ‘베프’가 됐지. 배우들끼리도 아주 친해졌고.

 

대학 시절에 들어간 동아리는 어떤 곳이었나.

연극 동아리였다. 연기, 조명, 소품 등 여러 역할을 돌아가면서 맡았다. 뭐 연극을 열심히 했다기보다는, 그냥 동아리방에 오래 앉아 있었다. (웃음) 학교에 영화 제작 동아리도 있기는 했는데, 회원으로 가입할 생각은 없었다. 그때는 영화를 보는 걸 좋아했다. 미술 전공하는 학생들은 워낙 이것저것 많이 보니까.

 

말이 나온 김에 미술 얘기를 해보자. ‘남매의 집’에서 모든 촬영이 이뤄졌다. 세트 같은 느낌도 나는데, 당시 공간은 어떻게 꾸몄나.

세트에서 찍었다. 한국영화아카데미에 스튜디오가 있다. 그리 크지는 않은데, 거기에 공간을 마련했다. 운 좋게도 이병준, 이병덕 두 분이 미술감독을 맡아줬다. 두 분 모두 드라마나 방송 경험이 많았다. 세트 시공이며 소품 수급까지 여러모로 도움을 받았다. 당시 제작비로 그만한 세트를 짓는다는 건 사실 불가능했는데, 미술팀이 방법을 찾아준 덕분에 아주 편하게 촬영했다. 촬영 들어가기 전에는 고민을 많이 했다. 그때 내가 반지하에 살았다. 아니지, 반지하가 뭐람. 완전히 지하였다. (웃음) 아무튼 그 집에서 시나리오를 쓰다 보니, 은연중에 이미지나 동선을 내가 사는 곳에 맞추게 됐다. 실제로 영화를 찍으려면 뭐가 필요한지 전혀 몰랐으니까. 오죽하면 처음에는 양근영 촬영감독에게 “그냥 우리 집에서 찍으면 안 돼?”라고 물었다. 촬영감독이 집에 와서 보더니, 카메라와 조명 설치 등 기술적 문제로 인해 여기서는 찍을 수 없다고 하더라. 그럼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미술감독님을 만났다. 정말 구원자처럼 나타나서 매력적인 공간을 완성해 줬다.

조성희 ⓒ이영진 

의상도 눈에 들어온다. 남매 중 오빠 철수(박세종)는 슈퍼맨 티셔츠를 입는데, 이는 폭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현실과 극명하게 대비를 이룬다. 의상에 아이디어를 많이 내는 편인가.

아이디어를 낼 때도 있고, 뭐가 필요하다고 부탁할 때도 있다. 대화를 많이 하려고 노력한다. 다 같이 고민해야 할 일이니까. 지금도 의상 실장님에게 “알아서 해주세요”라고 하지는 않는다. 함께 의논하고 토론하는 것을 내 의무라고 여기기도 하고, 그렇게 해야 동료 창작자들 또한 좀 더 즐겁게 작업에 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아무래도 나는 확실히 텍스트보다는 이미지에 쉽게 반응하는 사람인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작업하면서도 의상과 미술에 신경을 많이 쓴다.

 

그런가 하면, 동생 순이(이다인)는 갑자기 한복을 꺼내 입는다. <늑대소년>(2012)에도 철수(송중기)가 알록달록한 한복을 입는 장면이 나오고, <승리호>(2021)에서 꽃님(박예린)이 입은 티셔츠는 색동저고리를 떠올리게 한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남매의 집>에서는 그냥 한복을 입으면, 재밌을 것 같더라. 혼자 장롱에서 한복을 꺼내 입는 애들 본 적 없나? 그럼 옆에서 어른들이 예쁘다고 해주고. <늑대소년>도 마찬가지다. 일단 한복 자체가 평소에는 입을 일이 없는 의상이지 않나. 한복을 입는다는 게 어떤 놀이 같기도 하다. 소꿉장난하듯 보여서 마음에 들었다. 근데 <승리호> 의상은 오로지 의상 실장님의 선택이었다. 그렇게 준비하겠다고 알려줘서 “네, 좋습니다”라고 했다. 

 

<남매의 집> 이후에 만든 장편영화에서도 늘 아이가 등장한다. 이에 관해 아이들은 영화 내 도덕적 균형을 이뤄내는 무결한 존재이자, 인물들이 새로운 가족을 형성하는 계기가 된다고 설명한 적도 있다. 근데 <남매의 집>에는 구원자 역할을 하는 선한 어른이 한 명도 없다. 이때 유난히 냉소적이었던 걸까?

어떤 철학에 기반해서 혹은 나만의 원칙을 세워놓고 작업했던 건 아니다. 그때는 그냥 손이 가는 대로 시나리오를 썼다. ‘다음 줄에는 뭘 쓰지?’ 하면서 별생각 없이 쭉 적어 내려갔다. 아무 생각이 없다기보다는 그냥 그런 인물이 나오고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재미있을 것 같더라. 아이들이 영화에 나오는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다. 초등학생, 유치원생 정도 되는 아이들이 참 예쁘게 보였다. 아우라라고 해야 하나,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포스’가 느껴지기도 했고. 당시에는 그런 매력에 빠졌던 것 같다.

 

아이와 어른을 선과 악으로 뚜렷하게 구분하기도 어렵다. <남매의 집>에 등장하는 괴한들도 비도덕적이라기보다는, 일반적이지 않은 도덕 체계로 움직이는 인물처럼 보인다. 

당시에는 나쁜 사람도 좋은 사람도 아닌, 애매한 인물에 끌렸다. 단정할 수 없는 캐릭터를 근사하다고 여겼던 것 같다. 특히 단편영화를 만들 때는 상대적으로 살펴야 할 것이 적지 않나. 지금보다 훨씬 무지하기도 했고. 덕분에 주제나 소재 면에서 좀 더 자유롭게 도전해봤던 것 같다. 한편, 최근 작품에서는 주인공의 도덕적 기준 자체가 별 의미를 획득하지 못한다.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오징어 게임>(황동혁, 2021)을 보면, 정의의 사도라고 칭할 이가 하나도 없지 않나. 도덕적으로 흠결 없는 인물을 찾아보기가 더 어려운데, 그런 작품이 전 세계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점점 더 그렇게 될 거라고 본다.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
<짐승의 끝>

그동안 많은 어린이 배우와 작업했다. 성인 배우와는 다른, 어린이 배우를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이 있나. <남매의 집>에서 박세종 배우를 봤을 때는 <아무도 모른다>(고레에다 히로카즈, 2004)의 야기라 유야가 떠오르기도 했다.

기준은 없다. 나는 운명론자라서 인연을 믿는다. 배우를 만나면, 이 사람과 같이 갈 운명이었구나 한다. 아이들의 경우, 무조건 첫눈에 반한 사람을 선택했다. 그 친구들이 함께하겠다고 해줘서 정말 다행이었지. 성인 배우를 캐스팅할 때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알다시피 고려해야 할 조건은 훨씬 많다. 단순한 과정은 아닌데, 캐스팅을 확정한 후에는 그 역시 운명이라고 받아들인다. 어떤 과정을 거치든, 결국 같이 할 사람과는 어떻게든 만나게 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직감을 중요하게 여기나 보다.

영화도 예술이니까. 개념 미술처럼 역사적 맥락과 이론을 알아야 하는 분야와 달리, 영화는 대중 예술로서 지향하는 바가 명확하다. 머리를 굴려서 만들어내야 하는 부분도 있지만, 선택의 갈림길에 섰을 때는 종종 직감을 따른다. 예컨대 소품으로 컵을 고른다고 해보자. 종이컵이냐 아니면 유리컵이냐 할 때, 그냥 더 나은 게 있다. 마음을 따라가는 길이다. 직관적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런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시나리오를 쓸 때도 마찬가지다. 내가 진심으로 좋아하고 관심 있는 이야기라면, 어떻게든 관객에게 전달할 수 있다. 오히려 작전이나 기획의 측면에서 접근하는 게 위험하다. 나는 이성과 감정을 놓고 봤을 때, 감정이 훨씬 똑똑하다고 본다.

 

똑똑하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더 강력하고 빠르게 전달된다. 그 순간에는 감정을 따라가지만, 결국 거기서 맥락이 만들어지고 의미가 발생한다. 그래서 작업할 때는 최대한 마음을 다하려고 한다.

 

본능을 따를 때, 불안하지는 않나.

걱정할 때도 있다. 하지만 감정이 중요하지 않다면, 왜 사람이 영화를 만들겠나. AI가 만들면 되지. 영화는 사칙연산 같은 논리를 넘어서는 영역이다. 아무리 뛰어난 AI가 나온다고 해도, 인간의 감수성까지 쫓아가지는 못하지 않을까.

 

인터뷰나 GV처럼 의미와 해석을 요구하는 이와 만나는 자리에서는 곤란할 때도 있겠다.

그렇지는 않다. 창작과 비평으로 영역이 나뉘지 않나. ‘창작자가 어디까지 장악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둘러싸고 다양한 입장이 있는데, 결국 비평과 해석은 내 몫이 아니라고 본다. 창작이 끝나는 순간, 창작자는 어떤 권위나 권한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 거다. 감독은 저만의 고민을 거쳐 작품을 설계하지만, 누군가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다면 그것대로 인정해야 하는 것 같다. 알프레드 히치콕도 그랬다고 하잖아. 영화과에 다니는 손녀의 과제를 도와줬는데, 할아버지 작품을 분석해간 손녀의 리포트 점수가 C였다고. 손녀가 점수를 알려줬더니, 히치콕이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미안한데 나도 최선을 다한 거란다” 특별히 웃기거나 이상한 사건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다. 봉준호 감독도 어느 인터뷰에서 밝힌 적이 있다. 작품에 관해 이런저런 해석이 많은데, 어떤 건 자신도 모르는 이야기라고 하더라. 틀린 해석은 없다. 설령 내 의도와 다르다고 해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거다.

<늑대소년>
<승리호>

배우들과는 어떤 식으로 대화하는지 궁금하다. 그때도 감정을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나. 

그렇지. 배우뿐만 아니라, 스태프와 대화할 때도 비슷하다. 영화감독의 주요 업무 중 하나는 대화인데, 실은 내가 대화에 능숙하지 못하다. 머리가 나쁘거든. (웃음)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소통하려는 의지라고 생각한다. 서로 알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대화의 기술은 두 번째 문제인 것 같다. 의지를 확인한 다음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딱 떨어지는 논리로 말할 수 있다면 다행인데, 아니라고 하면 여러 가지를 시도해본다. 레퍼런스를 제시하기도 하고, 추상적인 느낌만 전달할 때도 있다. 배우에게 당신이라면 어땠을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의견을 묻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무작정 부탁한 적도 있다. 나도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는데, 그냥 이렇게 한번 해주면 안 되겠냐고. 물론 상대에 따라 다르다. 일례로 <승리호>를 작업할 당시, 송중기 배우와는 대화하기가 비교적 편했다. 이미 한 작품을 같이 했던 터라, 서로 많은 부분을 이해하는 상태였다. 그를 설득하려고 엄청나게 노력하지 않아도, 곧바로 무슨 뜻인지 알아채더라. 송중기 배우가 워낙 타인을 살피는 사람이기도 하고. 결국 협동심이 중요하다. 생각을 섞으려는 의지만 있다면, 어떻게든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소통해야 할 사람뿐만 아니라, 플랫폼도 점차 늘어나는 상황이다. 현재 감독이라는 직업과 역할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나.

글쎄, 감독은 계속해서 작품을 만드는 사람 아닐까. 극장이 됐든 OTT가 됐든, 창구를 결정하는 건 창작 밖의 영역이다. 몇몇 사람에 의해서만 정해지는 것도 아니다. 관객층, 전 지구적 흐름, 유행 질병 등 여러 요인이 맞물려서 나온 결과이니까.

 

10여 년 동안 <짐승의 끝> <늑대소년>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 <승리호> 네 편의 영화를 부지런히 만들었다. 속도를 생각하면 이미 다음 작품을 시작했을 듯한데.

3-4년마다 겨우 한 작품씩 나왔는데, 부지런하다고 할 수 있나. 더 자주 해야지. 영화를 띄엄띄엄 만들면 안 되겠더라. 내년에 찍고 싶은데,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겠다. 이 작품에서 저 작품으로 이어지는 테마 같은 것은 없다. 그저 때마다 내가 좋아하는 것,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일단 차기작에서는 증오와 폭력을 다룰 예정이다.

 

첫 장편 <짐승의 끝> 개봉 당시 “이제 이런 폭력적인 영화 말고, 희망적인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라고 말했던 게 떠오른다. 다시 폭력으로 돌아가려는 건가. (웃음)

그때는, 그때는 그냥 그랬다. (웃음) 얼마간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지금은 또 마음이 바뀌었나 보다. 

조성희 ⓒ이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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