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대 시절, 원신연은 일기와 시를 썼다. 틈만 나면 공책을 붙잡고 뭔가를 끄적였는데, 빼곡하게 눌러 쓴 문장들은 언젠가부터 이야기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청년이 된 원신연은 영화를 꿈꿨다. 이제 그가 쓰는 글은 시나리오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영화나 연출에 관해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원신연은 열심히 배웠다. 극장과 일터에서, 하루에도 수천수만 개의 발자국이 남는 거리에서 이야기는 줄기차게 태어났다. 스턴트맨과 무술 감독으로 일하며 모은 돈에 빚까지 얹어, 꾸역꾸역 단편영화를 만들던 젊은 날들. <봉오동 전투>(2019) <살인자의 기억법>(2016) <용의자>(2013) 등 선 굵은 작품으로 바쁘게 이력을 채워온 지금의 원신연은 그때를 어떻게, 또 얼마나 기억할까.
기억력을 의심할 겨를도 없이, 대화가 시작됐다. 원신연은 18년 전에 쓴 <빵과 우유>(2003) 제작기를 보여줬다. 기록은 그의 오랜 습관이고, 처음 영화를 만들 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써온 제작일기에는 영화가 준 기쁨과 괴로움 모두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다. “독립영화를 만드는 것은 일종의 전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총과 칼 대신 필름과 카메라를 들고, 고지를 향해서 전진하는 게릴라와 같거든요.” 청년의 글은 비장하다. 하지만 과한 투정이나 자기연민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빛을 보겠다고 만들었지만 빚만 늘어가던” 시기, 그는 매번 주먹을 꽉 쥐고 촬영장으로 향했다. 오늘의 원신연도 그리 다르지 않다.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무게 중심을 맞추려 고심한다는 그는 18년 전과 꼭 닮은 말을 남겼다. “어쩔 수 있나요. 또 만들어야죠.”
바쁘다고 들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나.
고민이 많다. 과연 무엇으로 나의 존재를 드러내고, 삶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모든 감독이 그럴 텐데, 나 역시 지금 상황에서 어떤 작업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하면 복잡하다. 코로나19가 미래를 바꿔 놓았고, 100% 회복하기란 어려울 거다. 애초 극장, 감독, 투자 배급사 등에서는 70%는 돌아온다고 확신을 했거든. 근데 뜻밖에도 코로나19가 장기화되고, 여기에 OTT라는 새로운 복병이 너무 빛을 내기 시작했다. 지금은 70%에 대한 희망마저도 무너졌다. 관객 수를 보며 ‘50%는 지킬 수 있을까? 절반은 돌아올까?’ 걱정하는 단계다.
점차 극장이라는 공간을 잊는 것 같다.
이전에는 그리움이 있었다. 오랜만에 가족과 외출한다거나, 친구를 만나서 노는 시간을 그리워 했지. 하지만 최근에는 집에서도 즐거움을 충분히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OTT를 포함해서 영화 외 콘텐츠 퀄리티가 워낙 높고, 알다시피 이와 같은 현실에는 영화인이 일조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우리는 ‘유전자가 변한다’라고 표현한다. 영화를 극장에서 보고 싶어 하는 욕구는 그대로일 거라고 확신했는데, 지금은 다들 굳이 집 밖으로 나갈 필요가 있냐고 되묻는 것 같다. 앞으로 나올 영화들은 그렇게 변화한 유전자에 맞춰야만 할 거다. 그래야 투자를 받을 수 있고, 관객이 찾아줄 테니까.
영화감독에게는 위기와 기회가 한꺼번에 오는 셈이다.
얼마 전에 양윤호 감독님한테 전화가 왔는데, 첫 질문이 이랬다. “원 감독은 돈을 벌고 싶어? 아니면 예술을 하고 싶어?” 작품을 의뢰하고 싶어서 내 마음 상태를 확인해보신 거였다. 그때 “제가 한 예술이 돈을 벌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웃음) 사실 OTT 쪽에서 매우 많은 제안이 들어온다. 대부분 같은 이야기를 한다. 냉정한 말이긴 하지만, 자신들은 돈을 벌 목적이라고. 그게 나를 충격에 빠뜨렸다. 물론 그 안에도 좋은 작품이 많고, 장르나 형식 면에서 다양한 시도가 이뤄진다. 다만, OTT에서는 클릭 수를 끌어내지 못하면 플랫폼 자체를 유지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자극적인 소재를 자극적으로 전달하며, 시청을 관두지 못하도록 붙잡아야 한다. 결국 그런 환경에 부합하려면, 나 자신을 많이 놓을 수밖에 없기는 하다. OTT에 도전하기 직전인데, 어떻게 해야 현재 흐름에 마냥 함몰되지 않을지 고민한다. 나만의 스타일과 세계, 이야기의 가치를 지켜나갈 방법에 관해 골똘히 생각하는 때다. 결국 창작자인 우리가 길을 찾아야겠지. 방어할 건 방어하고, 타협할 건 타협하고, 공격할 건 공격하면서.
윤태호 작가의 만화 <야후>를 드라마로 제작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현재 진행 상황은 어떻게 되나.
이제 각색을 시작했다. <야후>는 1998년부터 2002년까지 연재된 만화다. 당시 폭발적인 반응을 얻은 명작인데, 웹툰 시대가 도래하면서 묻히다시피 했다. 아는 사람이 많지 않더라.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 사고를 다루는 작품이고, 너무 아픈 이야기다. 거대한 자본주의 세력과 권력자들, 그들에 의해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사그라지는 세 젊은이가 등장한다.
그간 <용의자> <살인자의 기억법> <봉오동 전투> 등 색깔이 다른 액션영화를 만들어 왔다. 스릴러부터 역사 드라마까지 다양한 장르에 도전했는데, SF와 액션, 시대극을 결합한 <야후>는 또 다른 장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액션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이런 아픔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고민스럽다. 어떻게 하면 지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로 위로를 줄 수 있을까. 해당 시대를 관통하신 분들은 아직 가슴에 상처가 남아 있을 거다. 쉽지 않은 이야기인데, 윤태호 작가는 거기에 SF 요소를 덧붙임으로써 조금은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해두었다. 각색 작업을 제안했던 작가님 중에 몇몇 분은 작업을 거절하셨다. 기술적으로 어려워서가 아니라, 마음이 너무 힘들 것 같다며 포기하시더라. 예산 규모가 클 수밖에 없는 작품이기도 해서 신경 쓸 부분이 많다.
몸도 마음도 바쁜 시기에 오래전 영화를 떠올리게 됐다. <빵과 우유>를 만들던 무렵을 어떻게 기억하나.
영화를 찍겠다는 갈증이 엄청나게 큰 시기였다. 지금 이 이야기를 못 하면 안 될 것 같다는 마음에,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서 영화를 만들곤 했다. 무리하면서도 무리하는 줄 몰랐지.
<빵과 우유>로 제2회 대한민국영화대상 단편영화상, 제21회 부산국제단편영화제 관객상, 제29회 서울독립영화제 최우수작품상을 차지했다. 제26회 클레르몽페랑단편영화제에도 초청받았고. 2003년 영화제를 휩쓸다시피 했는데.
빚이 꽤 쌓인 상태였는데, 그해 상금으로 모든 빚을 청산했다. <빵과 우유> 이전부터 내가 단편을 준비한다고 하면, 다들 연락을 끊을 정도였다. 돈을 빌려달라고 할 테니까, 근데 또 한동안 못 갚으니까. 그러다 작업 시작하면, 다들 와서 도와주기는 하고. (웃음) 대부업이라는 것도 없던 때다. 주로 ‘카드론’을 사용했지. 그래도 부족하면 스턴트 일을 나갔다. 차에 부딪히다가 몸에 불을 붙이고, 다리에서 뛰어내리기도 하고. 온갖 일을 하면서 예산을 모았다.
<빵과 우유> 제작비를 마련할 때도 비슷한 상황이었나.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지원금을 받고, 코닥 이스트만에서 필름과 카메라 장비를 지원받았다. 그런데도 현금이 모자라서 빚을 내는 수밖에 없었다. 필름 시대 아닌가. 상당히 많은 예산이 필요했고, 필름 양이 한정적이다 보니 영화를 마음 편히 찍기 어려웠다. 결국 후반 작업할 때, 돈이 떨어져서 작업을 중단했다. 당시 조감독이었던 이성태 감독과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끝나는구나 싶어서 어린 마음에 북받쳤던 것 같다. 근데 다음 날 통장을 확인해보니 500만 원이 있더라. 이성태 감독이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전문사에 합격한 상태였는데, 급한 대로 본인 학비를 보내줬던 거다. 우여곡절 끝에 영화를 완성했다.
그해 독립영화 중에는 비전향 장기수를 다룬 다큐멘터리 <송환>(김동원)이 선댄스영화제에서 수상하며 높은 관심을 받았고, <살인의 추억>(봉준호) <지구를 지켜라>(장준환) <바람난 가족>(임상수) <장화, 홍련>(김지운) 등 현재 확고한 영역을 가진 젊은 감독들의 신작이 연이어 개봉하기도 했다.
나는 좀 무서웠다. 한국영화의 뉴 웨이브라고 부를 만한 움직임이었다. 완전히 새로운 바람. 그렇게 센세이셔널한 소재로 영화를 만드는 시대가 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작품마다 완성도는 말할 것도 없고. 모두 빛나 보였다. 감독도 빛나고, 한국 영화 스태프의 기술력도 입증됐다. 영화에서 빛이 나니, 자연스레 관객이 모였다. 그런 광경을 바라보면서 문득 ‘나는 지금 어디쯤 왔지?’ 싶더라. 두렵기는 했지만, 조급해하지는 않았다.
<빵과 우유> 이후, 상업영화 데뷔 제안도 많이 받았을 텐데.
그때마다 준비가 덜 됐다고 답했다. 말하다 보니 기억나는데, 영화제에서 <빵과 우유>를 상영할 때마다 이경미 감독님의 <잘 돼가? 무엇이든>(2004)을 만났다. 경쟁 부문에서 매번 붙으니 미치겠더라. (웃음) 지금은 워낙 오래된 사이이자 좋은 인연이지만, 당시에는 누가 더 빨리 데뷔할지 은근히 의식하는 부분도 있었을 거다. 어쨌든 그 무렵에 나는 영화계에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누군가에게 고민을 털어놓거나 도움을 요청할 수 없다 보니, 두려운 감정이 앞섰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난 이런 운명이구나 싶었다. 어차피 시나리오든 연출이든 독학으로 배웠으니까. 양파 껍질이 벗겨지듯 운명이 제 모습을 드러내면, 때에 맞게 반응하자고 마음먹었다. <구타유발자들>(2006) 시나리오가 영진위 공모에서 당선되면서 서서히 자신감이 생겼다. 꽤 여러 번 장편 시나리오로 지원했는데 줄곧 탈락했거든. 그때부터 ‘이제 장편을 할 때가 됐나?’ 생각하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뉴웨이브라는 물결이 워낙 거셌기에, 무작정 합류했다면 진작 익사하지 않았을까 싶다.
휩쓸리지 않고 시간을 갖는 것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요즘 들어 그때를 자주 돌아보게 된다. 동료 감독이나 영화 관계자를 만나면, “그러한 변화가 다시 올 때 아닌가? 누군가에 의해 새로운 파도가 일어나야 하지 않나?”라는 말을 주고받는다. 과거의 물결이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여전히 가시지 않은 느낌도 있거든. 정답을 알 수는 없지만, 이제야 그런 고민을 해본다. 여러 생각이 태풍처럼 휘몰아치다 보니, 영화와 드라마 등 현재 준비하는 프로젝트도 많다. 실은 <빵과 우유>도 오랫동안 생각하며, 장편 시나리오로 확장해놓은 이야기가 있다.
<빵과 우유>는 해직 통보를 받은 후 자살을 결심한 선로보수 노동자 원 씨를 다룬다. 철길에 누운 원 씨 앞에 돌연 커다란 바위가 떨어지면서 원 씨는 낙석과 사투를 벌인다. 이 이야기가 오래 마음에 남았나 보다.
풀지 못한 질문이 있거든. 원 씨는 왜 낙석을 치우기로 선택했을까. 정말 죽을 생각이라면, 그냥 낙석 앞 철길에 누워 있으면 될 일 아닌가. 순간 직업의식이 발동했나, 아니면 보험금을 타지 못할까 봐 불안했나. 사람에 따라 다양한 대답이 나올 텐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딱 정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더라. 케빈 카터의 사진 <수단의 굶주린 소녀>(1994)를 두고 터져 나온 질문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위기에 처한 어린이를 눈앞에 마주했을 때, 사진을 찍을 것인가 혹은 카메라를 내려놓고 아이를 구할 것인가. 원 씨라는 인물을 그러한 맥락에서 봐야 하지 않나 싶다. 그가 처한 상황과 시대 자체가 원망스럽고 안타까우니까.
형제이기도 한 원풍연 배우가 주연을 맡았다.
캐스팅에만 다섯 달이 걸렸다. 어느 날, 영등포역에서 전철을 타고 가다가 철도 보수원을 봤다. 일단 너무 말랐고, 옷도 원 씨가 입은 것처럼 해져 있었다. 열차가 신도림으로 넘어갈 때, 상당히 느리게 가거든. 그 사람이 눈앞에서 천천히 지나가는데, 왠지 당장이라도 열차에 뛰어들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IMF 여파로 구조조정이 빈번했을 때다. 철도 노동자도 본래 2인 1조로 일해야 하는데, 갑자기 혼자서 모든 일을 감당하게 됐지. 보수원을 보며 노동자인 아버지를 떠올렸고, 그 모습 그대로 영화에 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배우를 한참 찾아다녔는데, 이렇다 할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 하루는 대학로 술집에 갔다. 지금도 운영하는지 모르겠는데, 그곳 간판에 탄광 노동자가 그려져 있었다. 간판 속 얼굴을 보는 순간, ‘저 사람이다!’ 싶더라. 근데 분명히 어디서 본 얼굴이거든. 긴가민가한 상태로 귀가했는데, 집안에 그 얼굴이 있더라. (웃음) 동생이 얼굴부터 성격까지 아버지와 여러모로 닮기도 했고.
처음 등장할 때부터 캐릭터로서 완벽하게 준비를 마친 모습이다. 검게 그을린 피부, 노동으로 다져진 근육, 몸 군데군데 붙인 파스, 익숙하게 해머질하는 동작, 약간 쉰 듯한 목소리 등 디테일하게 인물을 완성해냈는데.
연극을 하는 동생에게 개런티는 못 주지만, 밥은 배 터지게 먹이겠다고 약속했다. 근데 밥조차 제대로 먹인 적이 없다. 살이 찌면 안 되니까. 동생은 거의 10kg를 감량했고, 영화 찍는 동안 계속 같은 몸무게를 유지했다. 엄청나게 고생했지. 동생은 촬영하기 전에 선로 작업하는 노동자들과 일하며, 얼마간 함께 살기도 했다. 인물을 표현하기 위해 그들과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고 동생에게 요구했거든. 그러다 보니 제스처나 움직임이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고, 의상이나 소품도 실제 현장에서 사용하는 것을 가져왔다. 취재 과정에서 그분들의 특징이 눈에 들어왔다. 이분들은 정이 많은데, 짜증도 많구나. (웃음) 오래 관찰하다 보니, 캐릭터를 디테일하게 구현할 수 있더라.
화면만 봐도 더위와 피로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원풍연 배우가 감독의 동생이 아니라, 형이었다면 절대 출연하지 않았을 것 같다. (웃음)
그렇지, 다시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이 있다. 원풍연 배우와 스태프 두 명이 장비를 운반하는 트롤에 올라탔는데, 이게 내리막길에서 가속도가 붙어버린 거다. 그때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애들 주려고 읍내 오일장에 가서 수박을 사 오는 길이었다. 급격한 경사를 지나면, 바로 아래가 철교였다. 거기서 떨어졌다가는 죽을 테니, 그 전에 트롤에서 뛰어내려야 했다. 터널에서부터 비명을 지르며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데, 애들 얼굴은 이미 창백하게 질렸고. 어휴. 실은 배우를 교체해야 할 정도로 부상이 심각했다. 근데 동생이 끝까지 연기하겠다고 하더라. 나나 아버지를 향한 애정보다는 배우로서 그 인물을 제대로 표현해내고 싶은 의지가 강했다. 결국 다친 상태로 출연했다. 지금도 영화를 보면, 아파하는 게 느껴진다.
상업영화 데뷔작 <가발>(2005)과 <구타유발자들>(2006)을 함께 작업한 김동은 촬영감독이 이때부터 카메라를 들었다.
그때 단편 제작은 말 그대로 전쟁이었다. 예산을 확보하는 방법 중 하나는 할인인데, 필름 인화며 편집이며 전부 학생이어야 할인해준다고 하는 거다. 학교에 기반을 두지 않은 내가 떠올린 해결책은 ‘학생과 작업하자’였다. (웃음) 본래 이모개 촬영감독을 섭외하려고 했다. 그분이 촬영한 단편 <사춘기>(제창규, 2002)를 보고, 한국에도 이렇게 촬영하는 사람이 있구나 하며 깜짝 놀랐거든. 작품의 밀도도 굉장한데, 무엇보다 비주얼적 완성도에 감탄했다. 데뷔작을 준비하신다고 해서 결국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그때 받은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러다 내 레이더망에 들어온 사람이 김동은 촬영감독님이다. 영상원에서 가장 잘 찍는 촬영감독이었고, 그분이 참여한 작품은 항상 해외 영화제에 초청이 됐다. 시나리오를 보여드렸더니, 흔쾌히 작업을 수락하시더라.
철로라는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촬영뿐만 아니라, 콘티를 만들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콘티를 영상으로 만들었다. 배우를 현장에 데려가서 일일이 촬영했다. 코닥 이스트만 제작지원을 꼭 받고 싶었다. 당시 기준으로도 혜택이 어마어마했다. 일단 카메라를 무상으로 대여해줬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한국코닥에서 제공하는 35mm 필름이 영화 한 편을 찍을 만큼이었고. 두 가지만 해도 금액으로 치면 2천만 원이 좀 넘거든. 게다가 ‘씨네21’에 기사가 실리고,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앵글 부문에 출품 자격이 주어진다. 당시 부산국제영화제에선 폴란드 같은 유럽 국가에서 수학한 감독이나, 국내 대학 중에서도 굉장히 선별된 학교 출신의 감독의 영화를 상영했다. 누구나 존경해마지 않는 사람들이었고, 작품도 무척 심오했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 꿈이 생겼던 것 같다. 예선을 통과해서 그들과 나란히 경쟁해보고 싶은 마음. (웃음)
엔딩 크레디트를 보니 조재형, 임오정 감독 등 반가운 이름이 많다. 이때 스태프는 어떻게 꾸렸나.
군대 갔다 와서 본격적으로 연출을 준비했다. 습작 삼아 혼자 단편을 여러 개 만들었는데,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객관적인 평가를 받아보고 싶더라. 그때 단편 <세탁기>(2001) 시나리오를 썼다. 필름으로 영화를 찍고 싶은데,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필름은 전혀 다른 영역이고,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세계이니까.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영화 제작 집단이 무척 많았다. 그중 M16에 들어가면서 조재형, 손재곤, 고영준 등 여러 사람을 만났다. M16은 신입 회원을 받을 때, 만장일치 제도를 고집했다. 작품과 이력을 살펴보고, 모두 동의해야 회원으로 인정해주는 거다. 너무 엄격하지? 나중에 내가 대표를 맡았을 때, 전부 바꿨다. (웃음) 어쨌거나 나는 2000년에 ‘코리아닷컴’이 주최한 ‘와와필름페스티벌’에서 상영했던 장편 <적>으로 심사를 통과했다. 당시 M16에서는 “원신연이 누구냐? 미친놈 아니야?” 하는 반응이 나왔다고 하더라. 이후 거기서 만난 사람들과 품앗이하며 영화를 찍었다. 누구 한 명이 영화를 만든다고 하면, 직업이 있는 사람도 일을 내려놓고 도와주러 갔다. 다 같이 시나리오 합평하고, 매주 모여서 작품 스터디도 하고.
안 그래도 ‘영화제작집단M16 식구들’이 고마운 사람 목록에 첫 번째로 이름을 올렸더라. 말을 들어보니, 애증의 공동체였을 듯하다.
맞다. 덕분에 내 위치를 가늠할 수 있었고, 조금 더 성숙해졌다. 이전까지는 홀로 분투했는데, M16에서 활동하면서부터 서서히 확신을 가졌다. 이제 관객과 만나서 소통할 때가 됐구나. M16 사람들이 내 작품 세계의 밀알이 되어준 셈이다. 그나저나 말하다 보니, 요즘 관객에게 <빵과 우유>는 너무 촌스러워 보일 텐데 어쩌나 싶다.
현재 비정규직 문제라든지 무인화 시스템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재난과도 맞물리는 내용이다.
이야기의 힘이 전달됐으면 좋겠다. 시대가 변하기는 했지만, 무엇이 그리 달라졌을까 싶기도 하거든. 최근에도 이동하다 보면, 선로를 외롭게 걷는 순회보수원을 자주 발견한다. 말한 것처럼 실제로 작업 현장에서 혼자 일하다가 돌아가시는 분도 많다. 그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 내 역할이지 않나 싶다. 아직도 털어내지 못한 채, 가슴 속에 품은 욕망 같기도 하고.
감독에게 가슴을 뛰게 하는 이야기란 무엇인가.
글쎄. 영화가 뭐냐고 물어보면, 삶이라고 답하겠다. 나는 영화 같은 삶을 살고, 영화 속에서 사는 듯하다. 그러다 보니 항상 유혹과 마주한다. 상업이나 산업 차원으로만 말하기에는 부족하다. 영화에는 의미와 의무도 있지만, 누군가를 즐겁게 하는 것 또한 크나큰 축이거든. 주제와 형태를 넓게 열어두고, 어디로 갈지 고민하는 중이다. 새로운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다는 욕구가 가장 크다. 나 역시 환경에 속한 사람이기에, 차기작에서는 나를 많이 내려놓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많이 내려놓는다고 해도, 감독을 전부 지우지는 못할 것 같은데. (웃음)
주변에서 그런 얘기를 정말 많이 한다. 당신은 자기 이야기를 안 해도, 당신을 아예 버리지는 못한다. 그러니까 제발 좀 내려놓아라. (웃음) 현재 캐스팅을 시작한 작품이 있다. 곧 다른 이야기로 인사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