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민(정승민)은 과거에 연기를 했지만, 지금은 시나리오를 쓴다. 제작사가 요구하는 “관객을 훅킹할 만한 요소”에는 별 관심이 없고, 작업 속도는 함께 일하는 감독의 기대에 못 미친다. 사흘 내로 글을 완성해야 한다는 감독의 말에, 경민은 “알고 있어”라고 짧게 답한다. 이후 경민은 어느 여자의 집을 찾아간다. 둘은 과거에 연인이었거나 연인이 될 뻔했던 관계처럼 보인다. 경민이 여자에게 현재 준비 중인 시나리오에 관해 들려주기 시작하면서, 영화는 점점 기묘한 미로 속으로 빠져든다. 여기에는 영원이라는 이름을 지닌 세 여자(박가영, 이유하, 전세원)가 등장하고, 경민은 여자의 얼굴이 바뀌는 것에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시나리오 속에 존재하는 안면인식 장애를 가진 남자처럼, 경민은 그저 눈앞에 있는 여자를 영원이라고 믿을 뿐이다.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부문에서 상영하는 <올 겨울에 찍을 영화>는 영화 만들기에 관한 메타 영화이자, ‘영원’ 앞에서 서성이는 쓸쓸한 로맨스다. 단편 <모래>(2019)로 베니스영화제 오리종티 단편경쟁부문에 진출했던 김경래 감독의 신작으로, 간결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구성을 통해 창작과 기억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단편 <김치>(2011)를 시작으로 영화를 여러 편 만들었다.
<올 겨울에 찍을 영화>는 세 번째 장편이다. 첫 영화는 그냥 외장하드에 보관 중이고, 두 번째 장편 <레슨중>(2018)은 제15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상영했다. 장편으로 부산국제영화제에 가는 건 처음이다. 얼떨떨하면서도 기분이 좋다. 특히 <벗어날 탈>을 만든 서보형 감독이나 <그 겨울, 나는>을 만든 오성호 감독처럼 예전에 단편영화를 상영할 때, 같은 섹션에서 만났던 분들과 나란히 이름을 올려서 좋다. 너무 반갑고, 어떤 작품일지 기대된다.
제목이 재밌다. 작품 내에서 영화와 현실을 넘나드는 액자식 구성과도 어울린다.
일 년에 한두 번,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갑자기 누군가에게 명령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작년 6월부터 ‘올 겨울에 영화를 찍어야지’라고 생각했다. 주연 배우이기도 한 정승민 작가랑 글을 같이 쓰는데, 미니멀하면서도 재밌는 멜로 영화를 만들어보자고 뜻을 모았다. 3개월 동안 시나리오를 쓰고, 프리 프로덕션을 한 달간 거쳤다. 시나리오를 작업할 당시, 아이디어를 정리하는 문서 파일에 ‘올 겨울에 찍을 영화’라고 써두었다. 결국 그 문구가 영화 제목이 됐다.
<등에>(2016), <레슨중>(2018), <말투>(2020) 등 정승민 배우와 함께 작업한 작품이 여럿이다. 어떻게 만났나.
오래 함께 작업해 온 손준영 배우에게 소개받았다. 손준영 배우는 이번에 출연뿐만 아니라, 프로듀서를 맡아주기도 했다. 승민 형과는 2015년부터 조금씩 협업했고, 2016년에 첫 장편을 만들 때부터 본격적으로 공동작업을 진행해왔다. 먼저 내가 주제를 설정하고, 굵직한 구조를 짠다. 플롯을 이미지화해서 초안을 만든 후 승민 형에게 넘기면, 형이 살을 채워서 보내준다. 그렇게 계속 글을 주고받으면서 수정하는 방식이다.
공동집필이 쉽지 않을 텐데, 잘 맞나 보다.
좋아하는 책과 영화가 많이 겹친다. 그만큼 정서가 통하다 보니, 작품 이야기를 하면 즐겁다. 혼자 시나리오를 쓸 때는 한계가 명확했는데, 같이 작업하면 확장해나갈 수 있겠다고 봤다. 승민 형도 끊임없이 공부하는 성격이라서 지금까지 함께할 수 있는 것 같다. 한 사람이 이끌고 다른 한 명은 서포트하는 방식이 아니다. 같이 공부하며 의견을 나누고, 서로 피드백을 수용해준다. 어쩌면 더 어려운 일을 하는 거다.


영화에서 경민은 “머릿속에 단어나 문장은 떠오르는데, 항상 구체적 이미지가 안 떠오르”기에 연출이 어렵다고 말한다. 감독은 어느 쪽인가. 역시 이미지인가.
맞다. 나는 이미지에서, 승민 형은 텍스트에서 시작하는 편이다. 실은 그런 지점에서 종종 간극이 발생한다. 형이 지문을 써서 줬는데, 편집이 안 맞는 거다. 나는 프리 단계부터 머릿속으로 계속 편집을 돌려보거든. 그때 동선이라든지 쇼트 이동을 고민하다 보면, 결국에는 더 좋은 이미지가 떠오른다. 예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이미지에 집중했다. 초기 단편에는 대사가 거의 없고, 이미지가 90퍼센트를 차지할 정도다. <밀양>(이창동, 2007)이 전환점이었다. 이렇게 영화를 만들 수가 있구나, 싶어서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 이후 다르덴 형제, 미카엘 하네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등 여러 감독의 작품을 보면서 조금씩 텍스트와 이미지를 절충해가는 스타일로 변화했다.
서사뿐만 아니라 촬영에서도 구조를 강조한다. 경민은 입장과 퇴장을 반복하는 인물이며, 이때 카메라는 건물 구조와 내부 공간을 비춘다. 창문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점도 눈에 띈다.
촬영 감독님에게 영화 전체적으로 마스터숏을 사용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그 안에서 단조로움을 피할 방법을 찾다가, 창문이 여러 면에 존재하는 공간에서 촬영하게 됐다.
왜 마스터숏을 고집했나.
컷에 관해 굉장히 오랫동안 고민했다. 왜 컷을 나눌까? 그런 질문을 거듭하며, 여러 영화를 비교해서 봤다. 본래 나는 효율을 중시하는 입장이었다. 컷을 나누면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나. 제한된 예산과 시간 내에 촬영을 진행하려면, 컷을 줄여야 했다. 그러다 뚜렷한 이유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된 말로 홍상수 감독님을 따라 했다는 이야기를 듣기 싫었다. 그때부터 컷을 압축하려고 엄청나게 노력했다. 내게 기본에 가장 충실한 영화는, 마스터숏으로만 이루어진 영화다. 미카엘 하네케 감독 작품에 큰 영향을 받았다. 특히 <피아니스트>(2001)의 압축률에 감탄했다. 원작 소설도 읽고, 영화도 10번 가까이 봤다. 에리카(이자벨 위페르)가 포르노 비디오방에 들어가서 타인이 배출한 정액 냄새를 맡는 장면이 있다. 원작에는 없는 신인데, 하네케 감독은 그 장면 하나로 에리카의 욕망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내가 했던 압축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싶더라.
그렇게 영화를 비교 분석하며 공부하기를 즐기는 것 같다.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는 과정이기도 하고.
너무 재미있다. 장편을 처음 만들 때부터 신 리스트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무작정 시나리오를 쓰면, 이도 저도 안 되겠다 싶더라. 실은 그때 교재로 삼은 작품이 <피아니스트>다. 신 리스트를 만들다 보니 구조가 보였다. 정확히 25분에 맞춰서 구역을 나누어 놓더라. 수학적으로 딱 떨어지는 구조가 흥미롭게 느껴졌고, 나도 비슷한 방식으로 영화에 접근해보려고 했다. <올 겨울에 찍을 영화>에서도 25분마다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세 여성은 한 사람일 수도 있고, 다른 이들의 파편을 모아 놓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어떻게 하면 이를 매력적으로 제시할지, 연결 지점을 만들어내기가 어려웠다.
박가영, 이유하, 전세원 배우가 각자 다른 톤으로 영원을 연기한다. 배우들에게 특별히 요청한 바가 있나.
사실 배우는 저마다 다른 개성을 지니기에, 아무리 디렉팅을 한다고 해도 완전히 동일한 톤을 만들 수는 없다. 결국 내가 의도하는 바와 배우가 해석한 바가 맞물리는 선에서 현재의 흐름이 만들어진 것 같다. 현장에서는 최대한 건조하게 연기해달라고 부탁드렸다. 배우가 연기 스킬을 보여주는 순간, 본능적으로 어색하다고 느낀다. 너무 튀지 않게, 힘을 빼고 편안히 연기하는 게 중요했다. 박가영 배우는 첫 장편을 찍을 때, 오디션에서 만났다. 당시에는 캐스팅하지 못했는데, 배우 특유의 안정감이 기억에 남았다. 박가영 배우가 첫 인물로 등장하면, 분위기를 충분히 잡아줄 거라 믿었다. 이유하 배우는 이번에 오디션을 통해 처음 만났다. 테크닉이 뛰어나서 허리 부분을 담당하기에 적합했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인물의 경우, 다른 인물보다 어리고 미숙한 느낌이길 바랐다. 연기에서도 날 것의 느낌이 나면 좋겠다는 생각에, 광고 일을 할 때 모델로 만난 전세원 배우에게 연락했다.


인터뷰 초반에 “갑자기 누군가에게 명령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영화를 만들고 싶어진다고 했다. 왜 그런지 생각해본 적 있나.
스무 살 무렵부터 혼자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하지 않았거든. 미디어학부라고 해서 컴퓨터공학과 예술을 접목한 과를 나왔는데, 교내 인터넷 방송국에서 편집과 촬영 기술을 배우며 습작을 시작했다. 늘 스스로 출발하고 결정했기에, 어느새 습관으로 굳어졌나 보다.
영화를 시작할 때는 외로웠을 것 같다.
처음에는 그랬는데, 외동이라 그런지 금세 익숙해졌다. 아직도 소규모 작업이 편하다. 다만, 광고 일을 하면서부터 동료의 소중함을 많이 느꼈다. 올해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에 입학했다. 학교에서 공부하고 작업하며, 협업을 배워나가고 있다. 학교가 너무 재밌다. 예전에는 영화제에서만 다른 감독을 만났는데, 지금은 동기가 20명 정도 된다. 매주 새로운 영화를 보면서 자극을 많이 받는다. 내가 만학도 아닌가. 세대 차이라고 해야 하나? 다른 학생의 작품을 보면, 주제부터 조명 스타일까지 나와는 여러모로 다른 점이 눈에 띈다. 몰랐던 부분을 공부하고, 새로운 감독을 소개받는 시간이 행복하다.
광고와 영화 제작, 거기에 학교 수업까지 병행하려면 쉴 틈이 없겠다. 어떻게 균형을 맞추나.
스위치가 따로 있는 것 같다. 광고를 만들 때는 영화 스위치를 꺼야 한다. 어쨌거나 내가 아니라, 클라이언트의 요구가 최우선이니까. 대학 졸업 후, 7년 동안 직장에 다니면서 영화를 찍었다. 일과 작업을 병행하며, 스위치를 끄고 켜는 일에도 익숙해진 것 같다. 영화 스위치를 켜면, 즐거움과 괴로움이 반복한다. 괴로움이 있어야 성취가 크더라. 첫 컷을 찍는 순간, 그간의 괴로움을 전부 보상받는 기분이다. 내가 생각한 대로 마스터숏이 나왔을 때, 고진감래라는 사자성어를 실감한다. (웃음) 낚시에 비유하면 될 것 같다. 내가 낚시를 참 좋아하는데, 결코 내 마음대로 대상어종이 올라오지 않는다. 찌를 던지기는 했지만, 뭐가 나올지는 모르는 일이다. 원하는 것이 나오면 주머니에 넣고, 아니라면 풀어준다. 결국 원하는 것이 나올 때까지 노력해가는 과정, 그게 곧 영화 아닐까 싶다.
평소에는 어떤 작품을 즐겨 보나.
최근에는 책이든 영화든 예전에 봤던 작품을 다시 보는 편이다. 작업에 여러모로 도움을 준다. 고등학교 선배이기도 한 이근후 기타리스트의 권유로, 2년 동안 팟캐스트 ‘영화와 음악 사이’를 함께 진행해왔다. 일주일마다 한 편의 영화를 이야기하는 방송이고, 개봉작과 더불어 <택시 드라이버>(마티 스콜세지, 1976) <체리 향기>(압바스 키아로스타미, 1997) 등 오래된 작품도 소개한다. 꾸준히 방송을 준비하다 보니, 어느새 영화를 볼 때 분석과 감상을 동시에 할 수 있게 되더라.
차기작도 정승민 작가와 진행할 예정인가.
작년에 승민 형이랑 장편 시나리오를 썼다. 영어 과외 선생님과 피아노 선생님의 로맨스를 다룬 멜로 영화다. 물론 달콤하기보다는 씁쓸한 멜로. (웃음) 이번만큼 형식이 두드러지는 작품은 아니다. 시나리오 초고를 완성해놓은 상태인데, 플롯 구조를 다듬기 위해 도움이 될 만한 영화를 찾다가 <오아시스>(이창동, 2002)로 정했다. 내용은 전혀 다르지만, 구조가 적합하다. 지금 세 번 정도 돌려보는 중이다.


감독이 공부했던 작품만 말해도 한참 이야기할 수 있겠다. <피아니스트>와 <오아시스> 외에, 언급하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
여태 본 영화 중에 효율 끝판왕은 단연 <아무르>(미카엘 하네케, 2012)다. 오프닝을 제외하면, 모든 사건이 한 장소에서 벌어진다. 그런데도 끝까지 지루하지 않게 끌고 간다. 신 리스트를 분석해보니, 구조적으로 기승전결을 다 짜두었더라. 공간도 로케이션인 줄 알았는데, 전부 영화를 위해 새로 지은 세트이고. 그때 깨달았다. 정확한 셋업과 그림이 있다면, 이렇게도 제작비를 아끼는구나. 메인 세트 3개만으로도 멋지게 표현할 수 있구나. 이 또한 ‘쇼킹한’ 경험이었다. 감독이 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눈에 <아무르>는 『비둘기』(파트리크 쥐스킨트, 1987)에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메시지가 동일하다는 뜻이 아니라, 비둘기라는 오브제를 사용하는 방식에서 아이디어를 얻지 않았나 싶다. 워낙 소설을 좋아하다 보니, 이처럼 영화와 소설이 만나는 지점에 흥미를 느낀다.
소설을 영화화할 계획도 있나.
관심은 있다. 다만 내공이 필요한 일이다. 기본 실력을 충분히 쌓지 않으면, 그저 텍스트를 영상으로 옮기는 것밖에 안 되니까. 앞으로 5년 정도는 더 공부한 후에 시도해볼 생각이다.
좋아하는 소설이 뭔가.
『슬픈 짐승』(모니카 마론, 1996) 『단순한 열정』(아니 에르노, 1991) 『연애소설을 읽는 노인』(루이스 세풀베다, 1989). 한때 재능이 없다는 생각에 영화를 그만두려고 했다. 소설을 써볼까 해서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열리는 정용준 작가의 강의를 들었는데, 그때 추천받은 책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을린 사랑>(드니 빌뇌브, 2010)도 수업에서 소개받았다. 신파극에 가까운 서사로 그토록 신선한 충격을 주다니. 텍스트의 힘이라는 게 정말 엄청나더라.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유언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세상을 등지고 싶다며, 몸을 엎어서 묻어달라고 당부하는 대목에서 소름이 돋았다.
결국 소설을 쓰는 대신, 영화를 만들기로 한 이유는 뭐였나.
영화를 관둘지 말지 한참 고민하던 시기에 정용준 선생님을 찾아갔다. 단편 <등에>(2016)를 보여드렸더니 “넌 소설 말고, 영화를 계속해야겠다”라고 하시더라.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3년 동안 영화를 아예 안 만들었는데, 재밌게도 창작 욕구는 그대로 이어졌다. 당시 소설을 쓰면서 만화까지 그렸다. 최현주 만화가의 수업을 통해 크레이그 톰슨, 바스티앙 비베스 등 여러 그래픽 노블 작가를 접했다. 그때도 신선한 자극을 얻었다. 특히 『내 눈 안의 너』(바스티앙 비베스, 2009)는 책 전체를 1인칭 숏으로 진행하는데, 읽으면서도 어떻게 가능한가 싶어 신기했다. 그렇게 단편소설을 쓰면서 텍스트를 강화하고, 만화를 그리며 컷 개념을 익혔다. 지금 돌이켜보니, 그 모든 경험이 영화로 회귀할 토대를 마련해준 것 같다.

올 겨울에 찍을 영화 Film for the Coming Winter
감독 김경래 출연 정승민, 박가영, 이유하, 전세원, 이수정, 전승희, 강정웅, 이승준, 손준영, 백재호, 이용범 제작연도 2021년 상영시간 73분 등급 15세 이상
259 10-10 13:30 CGV센텀시티 4관 GV
395 10-11 15:0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10관 GV
518 10-13 13:3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4관 GV
575 10-14 15:0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5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