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연, 모두가 비워졌다
BIFF 2021 <초록밤> 윤서진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Festival / 2021-10-10

<초록밤>을 시작하기 전, 윤서진 감독은 자문했다. 영화를 딱 한 편만 만들 수 있다면, 어떻게 찍을래? 감독은 더하기 대신 빼기를 선택했다. 관객을 자극할 만한 무언가를 인위적으로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덜어내고자 했다. 아파트에서 경비원으로 근무하는 아버지(이태훈), 가족을 뒤치다꺼리하느라 쉴 틈 없는 어머니(김미경), 장애인 활동지원사로 일하며 근근이 사는 아들(강길우). 세 인물은 대개 말이 없고, 서로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을 못본 척 넘긴다. 대사와 표정이 물러난 빈 공간을 채우는 것은 또 다른 영화적 물질이다. 이들 가족에게 몇 차례 죽음이 닥치는 동안, 영화에는 음악이 흐르고 풍경이 자리를 잡는다. 무엇보다 집안에 가득한 초록과 집밖에 무성한 초록이 형형하게 빛을 발한다. 그렇게 정교한 뺄셈을 거듭하며 엔딩에 다다랐을 때, 영화는 저만의 수식으로 고유한 감흥을 빚어낸다.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 비전 부문에서 상영하는 <초록밤>은 윤서진 감독의 첫 장편이며, 40년 동안 연기 생활을 지속한 고 김민경 배우의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다.

 

 

오프닝부터 근사한 디자인을 보여준다.

영화가 무엇인지, 드라마와 영화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거듭 고민했다. 영화와 드라마의 경계가 점차 무너질 뿐만 아니라, 심지어 영화보다 높은 퀄리티를 자랑하는 드라마도 많지 않나. 근데 왜 사람들이 극장에 와야 할까? 영화는 어떻게 영화가 될까? 그런 질문 끝에 정말 극장에서 볼만한 영화를 만들어보자고 결심했다. 시나리오 6고 단계에서 크루를 만났는데, 15고가 나왔을 때야 촬영을 시작했다. 무얼 추가할지가 아니라, 어떻게 빼야 할지 고민하는 과정이었다. 본래 내러티브 중심의 드라마 영화였고, 시나리오도 A4 70장 가까이 됐다. 그걸 30장까지 줄였다. 일종의 실험이었다. 서사로 층위를 구성하지 않고도 감정이 생길지 궁금했다. 우리가 평생 이와 같은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 수는 없겠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새로운 시도를 해보리라 마음먹었다.

 

‘크루’라고 일컫는 사람들은 전체 스태프를 의미하나.

맞다, 내가 자꾸 ‘우리’라고 칭하는 이유와도 연결된다. 작업 직전에 박찬욱 감독님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진행한 토크 영상을 봤다. “영화는 함께하는 즐거움을 알아야 한다”라면서 “내 머리에서 모든 것이 나왔어도 같이 일하는 사람에 의해 수정되기 마련”이라고 하더라. 그 과정을 즐기지 않는다면 영화를 만들 필요가 없다는 말이 너무 와닿았다. 현장에서 내 힘을 분산하며, ‘우리’로서 작업하고자 했다. 우리는 배우도 스태프라고 여긴다. 첫 번째로 크루에 들어온 사람이 강길우 배우다. 그때만 해도 영화의 진행 여부를 확신하기 어려웠는데, 길우 씨가 오랫동안 믿고 기다려줬다.

 

최근 보여준 모습과는 달리, 강길우 배우는 <초록밤>에서 에너지를 많이 걷어냈다.

길우 씨도 안다. 그래선지 영화가 어떻게 완성되었는지 무척이나 궁금해하더라. 말한 것처럼 에너지를 엄청나게 발산하는 역할이 아니고, 대사도 적다. 일부 드라마틱한 요소가 있기는 했는데, 편집 과정에서 대부분 제거했다. 대사를 줄이고, 다른 요소로 빈 공간을 채우려고 했다. 목표했던 바이기에 후회하지는 않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좋은 배우들에게 너무 아무것도 안 시켰나?’ 싶기도 하더라. 특히 길우 씨 목소리가 워낙 좋지 않나. 사운드 기사님과 작업하다가 그걸 깨달았다. 우리가 아무리 잘해도, 최고의 사운드 디자인은 배우 목소리구나. (웃음)

 

영화에는 세 번의 죽음이 등장한다. 죽음의 방식과 이유가 각각 다른데, 나비효과처럼 묘한 연결성을 갖는다. 어떻게 시작한 이야기인가.

처음에는 30대 중반의 아들이 부모님과 여행을 떠나는 로드무비를 떠올렸고, 아버지와 아들의 다툼이 주된 이야기였다. 그러다 2017년에 큰 이별을 연이어 경험했다. 2월에는 15년 동안 같이 살던 강아지를 하늘로 보냈고, 가을에는 외할머니와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장례식에 참석하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다. 집안마다 분위기가 달랐고, 죽음과 장례를 대하는 가족들의 입장에도 조금씩 차이가 났다. 속물적인 마음과 애도가 뒤엉키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부모님에 관해서도 새롭게 생각하게 됐다. 친할아버지 장례를 마치고 나서, 할아버지가 월세를 내고 살던 집을 정리하러 갔다. 그때 엄마에게 “만약 이 집이 할아버지 재산이었으면, 고모들한테 줄 거야?”라고 물었다. 엄마가 원래 그런 분이 아닌데, 내 말을 듣자마자 딱 잘라서 말씀하시더라. “그걸 왜 줘? 네 집인데.”

 

어머니가 낯설어 보였겠다.

그렇게 단호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당시 시나리오가 잘 풀리지 않는 상태였다. 30대 정도 되면, 굳이 가족과 여행을 가는 일이 없지 않나. 너무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관계가 일반적이다. 근데 영화에서 가족이 왜 여행을 떠날까? 마땅한 이유를 찾지 못해 고민했는데, 내 경험을 갖고 들어가면 되겠더라. 그렇게 2017년부터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해서 틈틈이 발전해 나갔다.

<초록밤>
<초록밤>

3인칭 시점의 소설을 보는 듯하다. 카메라는 관찰자 위치에서 건조한 태도를 유지한다. 영화를 여닫는 인물은 원형의 아버지이지만, 그의 시점으로 서사를 전개하지는 않는다.

처음에는 시점이 명확했는데, 언젠가부터 내가 인물의 모든 감정을 알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객에게 감정을 전달하는 방법을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런 기술을 이용하는 것이 <초록밤>에 맞을지 의문스럽더라. 영화를 만들면서 특정한 감정을 고집하지 않았다. 현장에서도 배우들의 반응을 계속 살폈다. 어떤 감정을 요청했을 때도 있지만, 최대한 배우의 해석을 존중하려고 했다. 촬영감독과 논의할 때, 영화를 집에 비유하곤 했다. 우리는 집을 지어서 관객을 안으로 들여보내는 사람들이다. 다른 영화에서는 대개 집의 구조를 정해놓고, 가구와 소품 등을 배치해놓는다. “여기로 오세요. 이제부터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면 돼요.”라고 말하는 식인데, 어쩌면 그건 진정한 자유가 아닐지도 모른다.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영화는 이미 많다. 우리는 아예 공간을 비우고, 빛만 떨어뜨리기로 했다. 관객마다 다른 인물에 이입하기를, 나아가 주인공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기를 바랐다. 영화를 보고 ‘이제 저 가족은 어떻게 되는 거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생각에 잠길 수 있도록 공간이 충분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덕분에 구도와 리듬이 지닌 매력이 강조된다. 흔히 건강, 젊음, 신비 등을 상징하는 초록을 밤과 죽음의 이미지로 흡수하며, 색조 대비를 통해 멋진 미장센을 만들어내는데.

촬영감독이 콘셉트 색을 무엇으로 하고 싶냐고 묻더라. “영화 내내 ‘초록초록’ 했으면 좋겠어”라고 답했다. 실은 여기서 오해가 발생했다. 나는 희망과 긍정의 색을 떠올렸거든. 뒤에 나무가 서 있고, 햇살이 비치는 풍경을 상상했다. 근데 촬영감독은 그린 라이트로 받아들이며, ‘초록으로 물들여야겠구나’ 한 거다. 본래 의도와는 달랐지만, 촬영 전에 확인해보니 그대로 좋더라. 특히 초록색과 밤이 맞물리면서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어둠 속에서 희망을 찾는 듯한 느낌도 나고.

 

가족이 사는 집은 어떻게 꾸몄나. 여러 개의 화분, 한쪽 벽을 차지하는 호랑이 액자, 손때 묻은 세간 등 온갖 사물로 빽빽하게 들어찬 모습이 인상적이다.

철산 주공아파트에서 찍었다. 재개발로 주민들이 이주하기 시작해서, 말 그대로 텅 비어 있었다. 소품뿐만 아니라, 싱크대며 장판까지 우리가 새로 채워 넣었다. 자주 등장하지는 않지만, 집은 굉장히 중요한 공간이라고 봤다. 다만 예산이 넉넉하지 않다고 신우정 미술감독에게 솔직히 말했더니 “서진아, 그럼 시간을 좀 줘. 한 달 동안 집을 빌려주면, 완벽하게 채워 놓을게.”라고 하더라.

 

신우정 미술감독과는 이전에도 함께 작업을 해봤나.

단편 <미스터 쿠퍼>(오정미, 2015)에서 처음 만났다. 나는 조감독이었고, 우정이 미술을 맡았다. 이후 내가 넷플릭스 시리즈 <센스8>의 프로덕션에서 근무할 때, 우정이 미술팀으로 오면서 다시 만났다. 우정의 작업을 좋아했기에, 그때부터 같이 영화를 만들자고 약속했다. 우정은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임대형, 2017)로 먼저 데뷔를 했고, 나는 계속 글을 썼다. 그러다 2020년이 되기 직전에 우정에게 시나리오를 보냈다. 감독과 미술감독으로 만나서 작업한 것은 처음이지만, 호흡이 잘 맞았다. 오랜 시간 교류하면서 내 취향을 우정에게 계속 알려줬던 것 같다. 굳이 요청하지 않아도, 내가 상상한 그림을 만들어주더라. 촬영감독도 고맙다고 할 정도였다. 기본적으로 공간을 잘 세팅해둔 덕분에, 촬영과 조명이 가능했다고.

 

촬영에도 공을 들였다. 컷이 적은 편인데.

100컷 정도 된다. 색보정 기사님이 역대 맡은 작품 중에 두 번째로 컷이 적다고 하더라. 첫 번째가 뭐냐고 물어보니, 장우진 감독의 <겨울밤에>(2018)가 50컷쯤 됐다고. (웃음) 영화에 쓸 것만 디자인해서 찍었다. 덕분에 시간에 쫓긴 적이 없다. 중간중간 커피도 마시러 가고, 조명 세팅도 오래 했다. 추경엽 촬영감독이 촬영과 조명을 동시에 담당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큰 영화를 찍는 줄 알았을 거다. 조명을 워낙 많이 쳤거든. 이미지 컨트롤에 집착하는 분이다. (웃음) 애초 불필요한 부분에 에너지를 쏟지 않기로 했고, 어느 순간부터 촬영에 관해서는 나도 전혀 터치하지 않았다. 색보정 실에도 두 번만 갔다. 중간에 가서 피드백하고, 최종 확인한 다음 끝. 그렇게 크루를 믿고 각자 영역을 존중할 때,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 같다.

<초록밤>
<초록밤>

공간 전체를 담아내는 전경 샷을 많이 사용한다. 널찍한 화면에서 사람은 유난히 작아 보인다. 인물 개개인의 초라하고 가여운 면모뿐만 아니라, 그들 간의 좁혀지지 않는 거리 또한 자연스레 드러난다.

공간이나 색깔, 앵글에서 한국적인 것을 찾아내려 했다. 요즘 ‘K-신파’라는 말도 하던데, 나는 오히려 신파를 서구적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부모와 자식이 함께하는 장면에서는 일부러 대화를 줄였다. 실제로 가족과 그리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지는 않으니까. 길우 씨한테도 물어봤다. “어머니랑 대화하세요?” “절대 안 하죠.” (웃음) 오히려 친밀감보다는 거리감이 드러날 때, 가족이 자연스러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야말로 가족다운 모습이지만, 무언가 유의미한 말을 집어넣고 싶은 욕심도 생기지 않았을까 싶다.

당연히 욕심났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크루 앞에서 공표했다. 나는 이런 방향으로 갈 거다. 혹시라도 내가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하면, 당신들이 잡아줘야 한다. 누가 그러더라. 영화에서는 돈이나 시간이 아니라, 두려움이 가장 큰 문제라고.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를 가르는 기준은 명백하다. 일관성 없이 스타일이 섞여버리는 순간, 영화는 방향을 잃고 만다. 나라고 무서운 순간이 왜 없었겠나. 기존 문법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촬영하다 보니, 초반에는 배우들도 많이 걱정했다. 이렇게 찍어도 되냐면서, 왜 앞뒤에 쓸 컷을 안 찍고 그냥 넘어 가느냐고. (웃음) 그때 다른 스태프들이 “감독님 잘하고 있으니 믿어주세요”라며 나서더라. 현장에서 불안할 때마다 솔직히 말했다. 그럼 촬영감독부터 사운드 기사까지 다들 와서 이야기를 들어줬다. 혼자서 전부 책임지려고 하는 게 아니라, 의지해야 할 때는 의지했다. 그러다 보니 배우들도 현장에 곧 적응하더라. 시간이 갈수록 협업이 잘 이뤄졌다. 오죽하면 조감독에게 “내가 출근하지 않아도 영화는 찍힐 것 같아.”라고 했겠나. (웃음)

 

아버지와 아들 등 영화 속 남성은 생기를 잃은 인물로 그려진다. 엄마와 아내, 여자친구 등 여성 파트너에게 책임을 미룬 채, 중요한 순간마다 뒤로 물러난다. 시들어가는 식물 같다고 해야 할까.

처음에는 여성 영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어머니가 중심인물이었다. 시나리오를 고치면서 아버지에게 무게가 많이 옮겨졌지만, 기본적인 맥락은 이어진다.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유지하려고 과연 남자들이 무슨 노력을 하는가. 가족 내에서 여성이 감당하는 역할이 있다고 봤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힘이다. 가정의 행복이 곧 모든 가족 구성원의 행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누군가 한 명은 싫은 일도 참고 해내야 하는데, 대개 어머니가 중재자 역할을 맡는다고 봤다. 엄마와 은혜, 고모를 통해 여성들이 남성을 먹여 살린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무기력과 열패감을 간직한 인물들이다. 삶에 전력을 다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냥 나태하다고 볼 수만도 없다. 배우들은 존재감을 유지하면서도 지나치게 도드라지지 않는, 적절한 경계에 서야 했다.

김민경, 강길우 배우는 매체 연기에 익숙하다 보니, 큰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이태훈 배우는 본래 연극을 하시던 분이라서 상황이 달랐다. 무대에서 100퍼센트를 쓰는 배우 아닌가. 항상 비워달라고 부탁드렸다. 선생님이 연기로 100을 전부 채우면, 음악을 포함해서 다른 영화적 물질이 들어갈 공간이 부족하다고. 배우들에게 미리 준비해올 필요 없다고 재차 말했다. 대신 매일 아침, 현장에서 한 시간 반 정도 대화를 나눴다. 촬영을 시작하기 전에 오늘은 각자 어떤 감정인지 살펴보는 게 중요했다. 영화를 찍다 보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보통 현장에서는 하나가 바뀌어도, 나머지를 정해진 대로 진행한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가 바뀌면, 전부 달라져야 한다고 봤다. 어제 감정은 분명히 오늘 영향을 줄 테니까. 영화는 결국 감정이다. 촬영과 편집, 음악의 궁극적인 이유는 감정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다. 연기 또한 마찬가지다. 정보는 숨기고 감정만 남겨두어야 했는데, 특히 강길우 배우가 영리하게 연기해줬다. 김민경 배우와 오민애 배우도 능숙하게 따라줬다.

 

오래 무대에 선 배우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거다. 제 몫을 다하지 못하는 느낌도 들 테고.

사실 작품에 충실하게 임한다는 건, 굉장히 훌륭한 자세다. 다만, 초점을 어디에 맞출 것인지가 중요하다. 연기, 촬영, 사운드 등 각 요소마다 포커스가 있거든. 촬영을 마친 후, 이태훈 선생님이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 이걸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하시더라. 오랫동안 연기과 교수로 재직하시다가 최근 퇴임하셨다. 그간 배우가 무대를 꽉 채우지 못하면, ‘에러’라고 받아들이셨다고 한다. 영화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배웠다면서 고마움을 표현하셨다.

<초록밤>
<매미>

음악 작업에 관해서도 듣고 싶다. 현악기를 사용했고, 서늘하고 비장한 분위기가 돋보인다.

하남규 사운드 디자이너에게 나가시마 히로유키 선생님을 소개받았다. 도쿄국립예술대학 영화과 교수이고, 아오야마 신지라든지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등과 꾸준히 작업해오신 분이다. 남규 씨가 동시녹음과 믹싱을 함께했고, 공간을 파악하기 위해 로케이션 헌팅할 때부터 현장에 동행했다. 사운드와 음악에 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장영규 음악감독을 좋아한다고 했더니, 딱 어울리는 분이 있다고 하더라. 그분이 히로유키 선생님이었다. 남규 씨가 도쿄국립예술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거든. 말하자면 은사를 소개해준 거다. 히로유키 선생님께 편집본을 보여 드렸더니, 무척 마음에 들어 하셨다. 작업 속도도 굉장히 빨랐다. 거의 60곡을 보내주신 다음, 내 반응을 지켜보시더라. 그러다 2월에 최종 음악을 받았다. 당시에는 현악기를 사용한 클래시컬한 음악이 아니라, 엠비언트 계열에 가까웠다. 이렇게 되면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 영화가 될 듯했다. <초록밤>은 독특한 드라마지, 실험영화는 아니거든. 새 음악을 부탁드렸더니, 엄청나게 화를 내셨다. “너 나한테 폴 토마스 앤더슨 얘기했잖아. 라디오헤드 좋아한다며!” (웃음)

 

한 차례 폭풍이 지나 갔구나.

시간이 지난 후에, 왜 음악을 그렇게 만들어주셨는지 이해했다. 혹시 예고편 봤나? 처음에 최종곡이라고 보내주신 음악을 예고편에 썼는데, 너무 잘 어울리더라. 본인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신 셈이다. 작업 내내 감탄했다. 대단한 경력을 쌓은 분인데, 나 같은 신인에게도 벽을 세우지 않으셨다. 감독이 원하는 대로 다 해주겠다는 태도였고, 무엇보다 제자와 한 작품에 이름을 올린다는 것에 진심으로 기뻐하셨다.

 

<초록밤>을 만드는 과정에서 자극을 얻은 다른 작품이 있다면.

레퍼런스 작품은 딱히 없는데, 기본적으로 폭력을 다루는 영화에 관심이 많다. 미카엘 하네케,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을 좋아하고, 어느 순간에는 <초록밤>을 아키 카우리스마키 영화처럼 찍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서 다른 이야기이지만, 이번 상영작 중에 <밤에는 춥고 낮에는 덥고>(박송열, 2021)가 굉장히 궁금하다. 예고편을 보니, 비슷한 느낌이 나더라.

 

다음 작품도 구상하는 중인가.

<더스트맨>(김나경, 2020)에 참여했던 김연지 피디와 차기작을 논의하는 중이다. 엄마와 딸의 이야기이고, 글을 써놓은 지는 꽤 됐다. 올해 연말까지는 사전 작업을 마무리해서 내년에 촬영하는 것이 목표다. 어쨌거나 앞으로는 안 해본 걸 하고 싶다. 너무 진지한 영화 말고, 블랙코미디처럼 예상치 못한 재미가 튀어나오는 영화에 끌린다.

 

고민하다가 결국 마지막에 묻는다. 주연을 맡은 김민경 배우가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감독 또한 힘든 시간을 보냈을 텐데.

옆에서 지켜보는 동안,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에게 주목받아야 할 배우라고 생각했다. 우리 영화를 계기로 단편 작업도 많이 하시길 바랐다. 현장에서 늘 행복해하셨다. 40년 동안 연기를 했는데, 촬영장에서 사람대접을 받아본 건 처음이라고 하시더라. 돌아가시기 며칠 전까지도 통화하면서 안부를 주고받았다. 큰고모로 출연한 변은영 선생님과 친하신데, 두 분끼리 “부산에 드레스를 입고 가야 하나?” 그런 이야기도 나누셨다고 들었다. 솔직히 아직도 믿기가 어렵다. 아쉽고 속상한 마음에 괜한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는데, 오민애 배우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더라. “선생님은 좋은 데로 이사하신 거야. 윤 감독 너무 아파하지 마.” 보통 영화제에는 키 크루만 참석하는데, 우리 스태프 모두 부산에 오기로 했다. 함께 영화를 보면서 민경 선생님을 추억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선생님 이름으로 영화제 배지도 신청했다. 상영을 마치면, 선생님 계신 곳에 걸어 놓을 생각이다.

윤서진 ⓒ이영진

초록밤 Chorokbam

감독 윤서진 출연 이태훈, 김민경, 강길우, 변은영, 오민애, 원미원, 김국희 제작연도 2021년 상영시간 89분 등급 15세 이상 

 

218 10-09 19:3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3관 GV

294 10-10 12:0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4관 GV

349 10-11 10:00 CGV센텀시티 4관 GV

454 10-12 14:0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5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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