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의 연인>은 두 남자를 전력으로 사랑하는 여고생 유진(황보운)의 한 시기를 세밀하게 따라가는 영화다. 지방 소도시에 엄마(서영희)와 단둘이 이사한 유진은 또래 무리에 섞이는 대신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아 나서는 아웃사이더다. 그렇다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속 깊은 가장이 되려는 건 아니다. 유진은 이곳저곳 고장 난 집에 딸을 남겨두고 애인 곁에 머무는 엄마가 미워 날카로운 말을 내뱉고, 집 아닌 곳에서 위로와 안식을 찾아 헤맨다. 유진은 일터에서 알게 된 대학생 강우(김민철)와 동갑내기 현욱(홍사빈)을 동시에 사랑하게 된다. 그들도 나름의 방식으로 유진에게 사랑을 준다. 영화는 그들 사이에서 오가는 복합적 감정에 온전히 몰입하는 한편, 얽혀버린 관계가 불러일으키는 파장 또한 가감 없이 담아낸다. 긴 호흡으로 포착해낸 사랑의 시간 속에서 유진은 달리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선다.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 비전 부문에서 상영되는 한인미 감독의 첫 번째 장편 영화다.
한양대학교와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영화를 공부했다. 영화 공부는 어떻게 시작했나.
어릴 때부터 연출을 하고 싶었고, 창작물을 만들고 싶었다. 꼭 영화를 생각했던 건 아니고, 광고나 다큐멘터리, 연극 등 다양한 분야를 꿈꿨다. 한양대는 연극과 영화 수업을 다 들을 수 있고, 이후 진로가 열려있다는 특징이 있었다. 졸업 후 방송국으로 가서 PD가 된 사람도 많았고. 영화 연출의 재미는 학교에서 첫 단편을 찍은 뒤다. 그 이후로 계속 이어서 찍게 됐다.
어떤 재미였나.
단편을 찍기 전에는 상업 영화만 알았기 때문에, 영화는 내가 할 수 없는 어렵고 큰 작업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7분짜리 첫 단편을 찍고 나니, 영화라는 게 내가 살면서 느낀 것들을 작게라도 담아낼 수 있는 매체고 통로라는 걸 알게 됐다. 또 다른 얘기도 계속해보고 싶었다.
공부하면서 주로 좋아했던 영화는.
학교 다닐 때 <하나 그리고 둘>(에드워드 양, 2000)을 되게 좋아했다. 드라마를 기본으로 해서 일상을 다루는 영화, 다 보고 나면 어느 하나의 주제가 딱 와 닿는 이야기가 좋았다. 시간이 좀 흐른 후에는 여성 캐릭터의 일대기 같은 게 좋더라. 주인공과 심하게 친해졌다가 영화가 끝나면 가슴 아프게 보내줘야 하는 그 체험이 참 흥미롭고 재밌었다. <내 책상 위의 천사>(제인 캠피온, 1990)나, 일대기까진 아니어도 <팻 걸>(카트린느 브레야, 2000), <방랑자>(아녜스 바르다, 1985) 같은 영화를 좋아했다. 왜 한국엔 이런 영화가 없나 싶더라. 많이 억제된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이야기가 편하게 나올 수 있으면 좋겠다고 내내 생각했다.


<마침내 날이 샌다>(2013), <토끼의 뿔>(2015), <만년설>(2015) 등 작업한 단편 영화들이 그런 고민의 결과 같다. 주인공인 소녀들이 어른의 세계나 날카로운 현실을 엿보는 이야기를 주로 찍었다.
당시엔 풀리지 않았는데 지금은 조금 알 것 같은 어떤 일들, 그런 감정들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편이다. 그중에서도 그걸 처음 경험했을 때를 포착하는 이야기를 주로 써왔다. 그때의 충격이 가장 크니까, 그리고 그 순간에 어릴 때가 많았으니까, 20대에 첫 영화를 찍으면서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아마 그 시절로부터 거리감이 생겼기 때문에 이야기를 쓸 수 있던 것 같다. 만드는 동안에는 최대한 예민하게 집중해서 영화 안에 이것저것 가득 몰아넣는데, 내게는 그게 어느 한때를 비워내는 방법처럼 느껴진다. 그러고 나면 잘 잊는 것 같다. (웃음)
<만인의 연인>의 유진은 단편에 등장한 소녀들보다 좀 더 나이 든 고등학생이고, 영화는 사랑하고 절망하는 유진의 한 시기에 집중한다. 어떻게 시작한 이야기인가.
내가 좋아했던 <하나 그리고 둘>도 마찬가지고 유명한 작품이나 고전 영화들은 대개 남자 감독에 주인공도 남자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영화에 꼭 주인공이 10대 시절에 만나는 만인의 연인 같은 첫사랑 상대가 나온다. (웃음) 되게 신비롭고 순수한데, 또 남자의 순정을 배신하는 그런 정도의 역할로 말이다. 어릴 땐 몰랐는데 커서 보니까 그 시선이 너무 편협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남자 주인공 시점에서만 보니까 그 인물의 복잡한 상황은 보이지 않는 게 아쉬웠다. 내가 알고 있고, 들어왔던 10대 여자의 사랑 이야기는 그런 게 아닌데. 또 매체에선 소녀의 성 경험이나 욕망이 잘 언급이 안 되잖나. 연애하면 손잡는 정도로만 표현되고, 그 선을 넘어가면 안 되는 것처럼 묘사된다. 그게 누군가에겐 10대 시절을 잘못 보냈다는 죄책감을 심어주기도 하는데, 그걸 조금은 깨고 싶었다. 내가 10대, 20대 시절에 연애하며 느꼈던 감정도 녹여 넣고.
유진이 겪는 일과 그때의 감정이 세밀하게 담기지만, 이 인물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인지 알기 어려운 순간도 있다. 인물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중요했던 건 무엇인가.
찍으면서 배우랑은 훨씬 깊은 얘기를 하지만, 완성됐을 때는 전부 이해받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론 줄타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유진이 정말 만인의 연인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은 이 아이가 만인의 연인이 되길 꿈꿨던 것도 아니고 결국 되지도 못하잖나. 유진은 그저 모든 일에 진심이고, 순수하고, 열정적인 아이다. 영화를 보면서 인물에 대해 내린 판단이 전복되고, 헷갈리는 경험을 할 수 있으면 좋겠더라. 주인공으로서 이 아이를 온전히 긍정해 달라, 편이 돼 봐달라는 마음은 아니었다. 다만 각자가 겪어온 비슷한 시기를 떠올리고 용기를 가질 수 있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영화의 중심인 유진은 황보운 배우가 연기했다. 전작을 찾아보기 어려운데, 인물의 순수하고 열정적인 측면과 감정의 요동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유진 역을 캐스팅하면서 가장 처음 만난 배우가 황보운 배우였다. 이제 막 필모를 시작하는 단계였는데, 이미지가 좋았다. 순수함을 굳이 연기하지 않아도 순수해 보이는 얼굴이라고 할까. (웃음) 유진의 순수함이 연기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배우 본연의 것이길 원했다. 그렇지 않으면 영화의 톤이 달라지겠더라. 다른 배우들도 만나긴 했는데, 결국 처음으로 돌아가게 됐다. 배우가 유진을 많이 좋아해 줬다.


장편영화 촬영이 익숙지 않았을 텐데, 편안하고 자유로워 보이더라.
첫 촬영 때 놀랐던 게 기억난다. 물론 그 이후로도 놀란 적은 많지만, 그게 처음 놀랐던 거니까. (웃음) 처음에 카페 씬을 몰아서 찍었다. 강우랑 호신술 연습하다가 뽀뽀하는 장면 등을 촬영했는데, 황보운 배우가 정말 많이 열어두고 연기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풀샷으로 한 장면 찍는 건데도 그걸 지루하지 않게 만들고, 유진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이 참 신기했다. 첫 촬영이라 걱정을 많이 했는데, 처음 찍는 게 맞나 싶더라.
유진의 엄마도 인상적인 배역이다. 유진과 엄마는 서로에게 냉담한 듯하지만, 각자의 방법으로 세상을 헤쳐나가는 동료처럼 보이기도 한다.
무심해 보이지만, 표현하는 것에 비해 서로를 굉장히 아끼는 사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쨌든 본인을 잘 돌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고, 각자가 원하는 삶의 모습이 있기 때문에 자꾸 삐걱거리며 서로 상처 주게 되는 게 아닐까. 그래도 여러 일을 겪고 난 후의 유진은 그걸 반복하지 않길 바라게 되고, 엄마를 사랑하는 자기만의 방식을 찾게 된다.
서영희 배우가 현실적이면서도 아이 같은 엄마의 모습을 연기하며 온도를 적절하게 맞춰줬다.
원래 너무 좋아하던 선배님이다. 카메라에 담기 좋은 얼굴을 갖고 계신다. 되게 고운데, 어두운 모습이 공존하는 얼굴이라고 할까. 실제로 만나보니 유진이랑 되게 닮았더라. 선배님이 10대 때는 유진 같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정말 순수하게 열심히 살아온 분이란 게 느껴졌다. 유진과 함께 보면 정말 모녀 같았다. 극 중에서 모녀의 역할이 바뀐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엄마가 딸 같고, 딸이 엄마 같을 때가 있으니까. 선배님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런 관계의 모녀 역할에도 무척 잘 맞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유진이 강우, 현욱과 함께하며 만나는 연애의 순간들은 그 자체로 흥미롭다. 당시의 설렘과 재미가 세밀하게 표현돼있고, 이 순간이 유진에게 얼마나 새롭고 신기한지도 느껴진다. 그런데 그 관계가 결국 안 좋은 일들을 초래한다.
우선 유진이 사랑에 빠지는 모습은 다 중요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유진 스스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니까. 유진은 양쪽 다 사랑이라고 느끼고, 또 그런 사실을 인정하면서 두 사람에게 오픈한다. 그런데 그걸 처음 겪어보기 때문에, 유진 또한 그 상황이 제대로 설명도 안 되고 이해도 안 되는 거다. 바람피우는 게 나쁘다는 말은 우리가 자라면서 들어 알긴 하지만, 실제로 두 사람을 사랑하게 될 수도 있다는 걸 누가 알려주진 않잖나. 그런 일이 자기한테 일어났을 때 당황하고, 대처하지 못해 혼란스러운 감정이 유진에게 정말 크게 다가왔을 거다. 한편으로 유진에게 강우, 현욱과의 만남은 자기 자체로서 존중받지 못하는 연애의 경험이기도 하다. 이 관계를 통해서 유진이 그런 경험들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로워지고, 다시 자기 자신에서부터 시작하는 과정을 담아보고 싶었다.


영화엔 유진뿐만 아니라 사랑을 하는 다양한 여성이 등장한다. 그들의 사랑은 마냥 아름답거나 낭만적인 게 아니라 현실의 쓰라림과 관계의 불균형을 느끼게 한다. 얼핏 수동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후반부에 이르러 무언가 선택하고 행동하는 건 결국 유진을 포함한 여성 캐릭터들이다.
응원하고 위로하고 싶은 마음, 용기 내길 바라는 마음이 영화에 많이 남길 원해서 여성 캐릭터들에 여러 씬을 할애했던 것 같다. 물론 어리석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맥락을 생략하지 않고, 이후의 삶을 응원할 수 있도록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아마 혜선은 유진이 겪은 일을 이전에 한 번쯤은 겪었을 수도 있겠다. 유진보다 한발 앞에 서서 이야기도 해주고 응원해줄 수 있는, 작가에 가까운 인물로도 볼 수 있다.
이 영화를 성장담으로 볼 수 있을까.
눈에 띄는 성장 같은 걸 생각한 건 아니다. 감정의 소용돌이를 거쳐, 자기를 돌아보고 자신을 관찰할 수 있게 되는 정도가 아닐까. 앞으로의 연애는 아마 달라질 거다. (웃음) 엄마와의 관계도 마찬가지고. 이제는 적당한 거리와 나쁘지 않은 관계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겠지.
첫 장편을 마무리한 소감은.
단편 만들 때랑은 좀 다른 경험이었다. 처음에 글 쓰며 상상했던 것과 다른 영화가 됐다는 점에서 그렇다. 영화가 과정을 통해 계속 새로 만들어진다는 걸 배웠다. 후반 작업 때는 영화 만들기가 애를 낳는 게 아니라 키우면서 정을 붙이는 과정인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육아가 이런 건가 싶었다. (웃음) 내가 만든 애가 맞나 싶었다. 생각보다 낯설더라. 영화 만들기는 계속 소통하는 과정인 것 같다. 그래서 스태프, 배우들에게 너무 고맙다. 이후 어떤 평가를 받든, 솔직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은 영화가 나왔다고 생각한다.

만인의 연인 Nobody′s Lover
감독 한인미 출연 황보운, 서영희, 전석호, 홍사빈, 우지현, 김민철, 박정연, 이유지 제작연도 2021년 상영시간 137분 등급 15세 이상
171 10-09 13:00 CGV센텀시티 4관 GV
288 10-10 09:3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3관 GV
459 10-12 15:3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4관 GV
517 10-13 16:3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6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