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원향라)와 영태(박송열)는 가난한 부부다. 정희는 간간히 초등학교에서 특별활동 강사로 일하고, 영태는 영상 만드는 일을 할 줄 알지만 변변한 직업이 없다. 돈 문제는 언제나 이들을 괴롭게 한다. 그래도 둘은 어둑한 밤 소주 한 잔 기울이며 서로를 다독이는 다정한 연인이다.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는 두 사람의 일상을 가만히 따라가며 경제적 곤란과 삶의 불안을 희극적 시선으로 담아낸다. 정희는 급하게 쓴 사채 때문에 위기에 직면하고, 영태는 아는 형에게 카메라를 빌려줬다가 뒤통수를 맞는다. 자연스레 부부 사이에도 갈등이 발생하며, 위태롭고 서글픈 상황이 이어진다. 이때 영화는 사건을 급격히 전개하거나 인물을 더 큰 궁지로 몰아넣는 대신, 문제 상황을 감당하는 인물들의 반응에 집중한다. 그렇게 이 조용한 영화엔 예상치 못한 유머와 허탈한 웃음이 드리우고, 인간의 존엄과 최소한의 품위에 관한 질문이 던져진다. <가끔 구름>(2018)에서 가난한 연인의 이야기를 통해 꿈과 사랑의 현실을 다뤘던 박송열 감독의 신작으로,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 비전 부문에서 상영한다.
<가끔 구름>이 연인의 영화였다면,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는 부부의 영화다. 인물의 직업과 이름은 다르지만, 경제적 곤란을 겪는 커플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 감독이 직접 주인공을 연기한다는 점에서 연속성이 있다.
<가끔 구름> 이후 금방 다음 영화를 찍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여의치가 않았다. 전작이 원향라 배우랑 둘이 만든 작은 영화였기 때문에, 이후엔 규모가 좀 더 큰 영화를 계속 시도해봤다. 마음처럼 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수는 없겠더라. 내심 이전에 했던 방식으로 다시 한번 제작해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뭐라도 찍어보자면서 작년 12월 즈음 이 영화를 기획하게 됐다. 제작환경을 먼저 정한 다음, 이야기를 구성했다. 촬영은 카메라를 세팅해두고 그 안에 나랑 원향라 배우가 들어가서 연기하는 일종의 셀프카메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 방식엔 일상을 다루는 미니멀한 이야기가 적합했고, 자연스레 부부가 겪는 현재의 어려운 이야기들을 담게 됐다. 올 한 해 동안 느긋하게 완성해보기로 했는데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하게 돼 부지런히 후반 작업을 했다.
각본과 촬영, 연기까지 직접 도맡는 제작방식을 다시 시도해 봐도 괜찮겠다고 느꼈다는 건, 이 방식만의 매력이 있다는 뜻이기도 한가.
당연히. 일단 창작에 어떤 간섭과 방해도 없는 시스템 아닌가. 내가 결정하면 되는 거니까, 내가 주인이 되는 제작 방식인 셈이다. 그 자유로움이 정말 큰 매력이다. 카메라를 세워두고 그 안에서 연기를 해야 한다는 게 제한 사항이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그 픽스된 화면에서 베스트 장면을 뽑아내는 묘미가 있다. 좁혀진 시험 범위 안에서 최적의 답을 찾아내는 느낌이라고 할까. <가끔 구름> 때는 육체적, 물리적으로 힘들었는데, 지금은 그래도 경험치가 쌓인 것 같다. (웃음)
연기는 계속해볼 생각인가.
연기는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더라. (웃음) 다음번엔 연기하지 않고 연출만 하고 싶다. 내가 알 수 없는 배우들만의 세계, 그들이 그리는 세계가 있는 것 같다. 배우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좀 더 배우고 싶다. 또 촬영 감독님과 같이 작업해보고 싶기도 하고.


주연배우인 아내 원향라 배우가 프로듀서를 맡았다. 각본과 편집에도 공동으로 이름을 올렸는데, 분담은 어떻게 이뤄졌나.
<가끔 구름> 때는 배우와 감독이라는 포지션 내에서 영화를 완성했다면, 이번에는 내가 쓴 초안을 바탕으로 장면 하나하나 같이 수정 작업을 거치며 영화를 준비했다. 또 촬영 때는 원향라 배우가 프로듀서로 배우 캐스팅 등에서 큰 역할을 해줬기 때문에, 나는 좀 더 연출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일상의 이야기로 영화를 채웠는데, 내용을 구성하며 어려웠던 점은 무엇인가.
완전히 피할 수는 없지만, 우리 둘의 실제 이야기와 되도록 분리하고 싶었다. 찍는 사람 입장에서 객관적인 영화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계속 그 부분을 떼어내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이야기를 구성하다 보니 어떤 에피소드나 소스는 실제 삶에서 가져오게 되더라. 그 과정에서 연민에 빠지면 안 된다고 여겨서 그러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했다.
각각의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주제를 생각해본다면.
어떤 메시지를 생각하고 시작하진 않았다. 그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부부의 단순하고 일상적인 이야기를 떠올렸고, 시나리오를 쓰면서도 중간에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를 다 완성하고 나니까, 그제야 내가 어떤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건지 고민하게 되더라. 결국은 이들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가를 말해보려고 했던 것 같다. 부부가 각자 사채와 사기 등으로 위태로워졌을 때, 정희는 엄마에게 도움을 받고, 영태는 어떤 선택 앞에서 돌아서며 피하는 방식으로 괴로움에서 벗어난다. 그게 이들에겐 구원이고, 이 영화는 어떤 면에서 구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는 또한 돈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데 아까 말했듯이 영화의 태도는 자기연민과 거리가 있다. 영태와 정희는 나름의 방식으로 자존심을 지키는 선한 사람들이다. 경제적 어려움이라는 소재에 어떻게 접근해보려고 했나.
사실 진부한 소재인 건 맞다. 그래서 이 소재를 다루는 흔하지 않은 방식, 나만의 방식을 고민했다. <가끔 구름> 때도 비슷했는데, 위트와 유머가 담긴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 내용은 분명히 슬프지만, 그 슬픔에만 머물러있고 싶지는 않더라. 대책 없이 연민에 빠져드는 건 위험하게 느껴졌다. 거기서 벗어나서 영화를 안전하게 지키는 방법을 생각했고, 그게 유머였다. 물론 그건 시나리오에는 담기지 않고, 미리 계획할 수도 없는 영역이다. 촬영하면서 그때그때 찾아 나갔다. 사건이 벌어지고, 대화가 오가는 동안, 어떤 리액션이 발생하는가에 주로 집중하면서 리듬을 만들어갔다. 편집할 때도 말하는 인물보다 그 말을 듣고 있는 인물을 담아내려고 노력했다. 이유를 명확히 설명하긴 어려운데 내 성격이 많이 반영된 것 같다. (웃음)
좋아하는 유머 코드가 궁금하다.
코엔 형제 영화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파고>처럼 유혈이 낭자한 살인극에서도 유머러스함이 느껴지잖나. 임권택 감독님 영화도 좋아한다.
정희와 영태는 이런저런 갈등도 겪지만, 꽤 좋은 팀처럼 보인다.
결국 부부의 이야기고, 주인공도 그 둘이기 때문에, 갈등이 일어나도 둘 사이에서 일어나고 회복될 거로 봤다. 극단적인 사건으로 사이가 완전히 벌어지는 것보다는 되도록 화목함과 갈등의 균형을 맞추려고 했다. 정희는 좀 의존적인 캐릭터고 영태는 소심하고 정 많은 캐릭터다. 그 이상으로 깊게 인물을 파고들진 않았지만,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인물들의 성격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데 중점을 뒀다.
잔잔한 유머가 영화를 채우지만, 가슴 아픈 장면도 종종 등장한다. 정희가 “돈 버는 게 너무 무서워.”라고 말할 때는 이 인물의 성격이 단번에 드러나면서, 돈이 얼마나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언제였는지 기억은 안 나는데, 갑자기 돈 버는 게 참 무섭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극 중에서 정희가 겪었던 일도 사실 제삼자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마땅히 일이 없는 상태에서 친구가 일당을 받을 수 있는 일을 소개해줬고, 잘해보고 싶었는데 의도치 않게 지각하게 되면서 소개해준 친구에게 미안해진 상황이잖나.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본의 아니게 누군가에게 피해를 줬고, 정희 성격이라면 그럴 때 돈 버는 게 무섭다는 말을 내뱉을 거로 생각했다. 그래서 일부러 정희가 벌어온 돈의 액수를 명시했다. 하루 일당으로 8만 원 버는 것조차 무섭고 숨고 싶은데, 앞으로 계속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게 정희에겐 무겁고 두려운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을까. 초반에 영태가 서울역에서 쫓겨난 노숙인의 기사를 보는 장면이 있다. 현재 둘 다 일자리가 없기 때문에 본인들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거다. 아마 비슷한 두려움 아닐까.


전작에서 계절감이 중요한 요소였던 것처럼, 이번 영화에서는 기후가 눈에 띈다. 우중충한 날씨, 갑자기 내리는 비, 인물들이 들고 다니는 우산 등이 전반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처음엔 이번 작업도 길게 이어질 거로 봤기 때문에 계절의 변화를 충분히 겪을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촬영이 빨리 끝났다. (웃음) 신기하게도 촬영하는 동안 날씨가 많이 바뀌었다. 올 3~4월에 촬영했는데, 어떤 날은 반팔을 입었다가 또 어떤 날은 외투를 입게 되는 상황이 반복됐다.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다’는 제목도 날씨가 사람의 의지와 상관없이 바뀌고, 또 그게 마음에 영향을 끼친다는 생각에 짓게 됐다.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인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비 오는 날을 되게 좋아한다. 비 올 때 실내나 처마 밑에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 걸 좋아한다. 대지를 적시는 느낌이 좋다. 외려 해가 쨍쨍한 날엔 별 감흥이 없다. (웃음) 제목을 지을 때 날씨 표현을 자주 쓰는 편이다.
첫 장편을 만들었던 방식으로 두 번째 장편까지 뚝딱 만들었다. 후련하고 뿌듯하지 않나.
학교에서 영화를 공부했는데, 그때부터 영화감독은 배고픈 직업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두 편 만들고 나니까, 자신감이 좀 붙은 느낌이다.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놓은 영화가 없었다면, 지금쯤 아마 다른 일을 찾았을 거다. 그런데 이제는 더 가 봐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는 작은 영화, 미니어처 같은 영화다. 왜 그런 예술작품이 있잖나. 그냥 보면 연필심인데 세밀하게 조각돼있어서 현미경으로 봐야 즐길 수 있는 작품. 이 영화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냥 경제적 궁핍을 다룬 흔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좀 더 들여다보면서 그 안에 있는 것들을 즐길 수 있는 영화이니, 유심히 봐주셨으면 한다.
계획돼있는 다음 작품도 있나.
일단은 지금 이 영화를 즐기자는 마음이다. 그리고 내년에 다시 새로운 작업을 조금은 빠른 속도로 해보려고 한다. 자영업자를 소재로 한 글을 써둔 게 있다. 최종 완성하는 게 목표다. 인간의 노동과 인간성에 대한 존중에 지속적인 관심이 있다.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 Hot in Day, Cold at Night
감독 박송열 출연 원향라, 박송열 제작연도 2021년 상영시간 90분 등급 15세 이상
272 10-10 16:30 CGV센텀시티 4관 GV
361 10-11 16:30 CGV센텀시티 7관 GV
456 10-12 13:0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6관 GV
560 10-14 17:30 CGV센텀시티 7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