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레는 삼칠일을 뜻한다. 칠 일을 세 번 거듭하는 동안, 아이를 낳은 집은 문 앞에 금줄을 쳐서 부정을 막는다. 가족 외에는 타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말과 행동을 각별히 조심해야 하는 기간. 누군가는 미신쯤으로 여기는 민속신앙이지만, 새 식구를 얻은 우진(서현우)과 해미(심은우) 부부는 집안 어른의 말씀을 착실히 따른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느라 지친 탓인지 우진은 자주 악몽을 꾼다. 그 와중에 오래 사귀다 헤어졌던 연인 세영(류아벨)의 부고 소식이 들려온다. 해미는 세이레를 이유로 장례식장 방문을 만류하지만, 우진의 발걸음은 장례식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세영의 쌍둥이 동생 예영(류아벨)과 만나면서 우진의 악몽에 얽힌 비밀이 하나둘 밝혀지고, 그들 가족에게는 기묘한 불행이 연달아 덮쳐든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뉴 커런츠 부문에서 상영하는 <세이레>는 단편 <매몽>(2019) <세이레>(2020) 등으로 그로테스크한 개성을 자랑했던 박강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단편 <세이레>의 얼개를 옮겨 오는 동시에, 다양한 등장인물과 이야기로 살을 덧붙여 전작과는 또 다른 공포를 선사한다. 금기를 통해 인물의 욕망과 죄책감을 들여다보는 한편, 세련된 이미지로 장르 영화의 매력을 보여준 박강 감독을 만났다.
올해 성남문화재단에서 제작지원을 받았다. 영화를 완성하기까지 일정이 빠듯했을 듯한데.
촬영 직전에 제작 지원이 결정됐다. 부족한 예산을 채운 덕분에, 후반 작업에 숨통이 트였다. 촬영을 진행하며 편집자와 중요한 부분을 상의했고, 이후 작업을 빠르게 진행했다.
미술과 촬영에 공을 들였다. 전체 제작비는 어떻게 마련했나.
우선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 장편 프로젝트가 기본이다. 성남문화재단 외에 경기콘텐츠진흥원에서도 제작 투자지원을 받았고,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와 전주국제영화제 피칭에도 참여했다. 어쨌거나 제작비가 넉넉하지는 않았다. 예산에 맞춘 세팅이라기보다는, 스태프들의 참여와 도움으로 완성한 부분이 훨씬 많다고 봐야 한다.
동명 단편을 만들 때부터 장편화를 염두에 뒀나.
그때는 전혀 계획하지 않았다. 근데 단편 작업을 마친 후에 아쉬움이 남더라. 영화가 아쉽다기보다는 ‘조금 더 확장하면 또 다른 느낌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라는 마음이었다. 단편과 장편 모두 결국 관계를 탐구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장편 규모에서는 더 폭넓게 관계를 다룰 수 있을 거라고 봤다. 단편 <세이레>를 마무리하고 곧바로 시나리오를 썼다. 2019년 12월 즈음 시작해서 두세 달 만에 완성했다. 아무래도 기초로 삼을 작품이 있다 보니, 그리 오래 걸리지 않더라.


중심 무대는 집이다. 계단식 아파트의 구조를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자매 부부가 맞은편에 산다는 설정도 흥미롭다.
처음부터 마주보는 형태는 아니었다. 시나리오를 쓸 때는 복도식 아파트를 상상했다. 두 집이 나란히 있는 구조를 활용하며 긴장을 조성하려고 했다. 근데 영화에서 복도식 아파트가 클리셰로 사용되는 면이 있다 보니, 다른 방식을 고민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피디와 제작부에게 마주 보는 두 집을 구해달라고 요구했다. 로케이션부터 미술까지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빈집을 새로 채우는 일도 쉽지 않은데, 심지어 한 집은 거주자가 있는 상태였다. 다행히 동의를 얻긴 했지만, 스태프들 모두 고생했다. 코로나19가 영화에 정말 많은 영향을 미치는데, 공간 섭외와 촬영도 이전보다 힘들어졌다. 특히 아파트를 찍는 일이 만만치 않더라. 지금 상황에서는 외부인이 여러 명 들어오는 걸 꺼릴 수밖에 없으니까. 촬영 전에 제작부가 편지를 썼다. 그걸 들고 아파트를 돌면서 주민들에게 일일이 양해를 구했다. 그런 노력 덕분에 무사히 촬영을 마쳤다.
하필 4층이더라. 복도 벽에는 금까지 가 있고. (웃음)
4층을 구한 건 우연이다. 한국 문화에서 불길하게 여기는 숫자이긴 한데, 굳이 4층을 고집하진 않았다. 말로는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렵지만, 로케이션에서 가장 중요했던 지점은 무드와 톤이다. 촬영지가 지닌 매력을 찾아내려고 노력하는 동시에, 특이성과 보편성의 정도를 고민했다. 영화에 환상적인 부분이 있더라도 최대한 현실감을 구현해내고 싶었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홍원찬, 2020) <인랑>(김지운, 2018) 등을 작업한 소성현 미술감독이 참여했다. 프리 프로덕션에서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나.
큰 틀에서 기준을 제시하면, 미술감독님이 시나리오를 토대로 방향을 잡고 톤을 만들어주셨다. 다른 영화도 마찬가지겠지만, 결국 무엇을 빼고 넣을 것인지 논의하는 과정이었다. 사과와 꽃을 포함한 여러 오브제의 활용, 집과 장례식장의 대비 등은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명확히 표현했다. 내 생각이지만, 미술감독님도 그런 오브제나 색감을 재밌어하신 것 같다. (웃음)
단편 <세이레> 외에 예시로 든 작품이 있나.
좋아하는 작품이 곧 레퍼런스가 되는 것 같다. <킬링 디어>(요르고스 란티모스, 2017) <유전>(아리 에스터, 2017) <라이트하우스>(로버트 에거스, 2019)처럼 형식미를 강조하는 작품에 관해 많이 이야기했다. 다만 우리 영화에서는 그렇게까지 여건을 갖출 수 없을뿐더러, 현실감이 전혀 없으면 도리어 매력을 잃을 것 같더라. 그런 면에서 참고했던 작품은 <버닝>(이창동, 2018)이다.


단편에 이어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미지 중 하나는 썩은 사과인데, 표현이 훨씬 세밀해졌다. 과육을 피부처럼, 부패한 부분은 혈관에 피가 번지는 것처럼 묘사한다.
우진, 그리고 아이에 관한 이야기이다 보니, 씨앗과 열매 이미지가 떠올랐다. 겉은 멀쩡한데 내부는 썩은 사과. 그걸 제대로 만들어내기 위해 단편 <세이레>를 작업할 때부터 계속 도전했다. 레퍼런스도 많이 보고, 실제로 썩은 사과를 찾기도 했다. 미술감독님 덕분에 이미지를 디테일하게 구현할 수 있었다. 시나리오에는 ‘씨에서 검은 물이 나온다’라고 적었을 뿐인데, 촬영할 때 보니 사과가 살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 사과의 살결을 타고 검은 물이 쓱 올라오는 순간, 피부와 핏줄처럼 보여서 만족했다.
많은 과일 중에 사과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선악과처럼 보이기도 하고, 조직을 망가뜨리는 존재를 일컫는 Bad Apples라는 용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모양이나 색깔 면에서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과일이 사과였다. ‘A는 B다’라는 식으로 명제화 하긴 어렵지만, 나 역시 선악과를 생각하며 썼던 것 같다. 결국 그 사과를 우진, 해미, 세영 모두 먹으니까. 동시에 태몽과 해몽에 관해서도 많이 찾아봤다. 똑같은 꿈이어도 시선에 따라 다른 의미로 풀이하지 않나. 꿈에 얽힌 이야기와 꿈을 해석하는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고, 흔히 말하는 흉몽과 길몽을 영화에 섞어놓고 싶었다. 실제로 시나리오에는 ‘사과를 숨긴다’ 같은 액션도 있었다.
전작에서도 꿈은 주요한 장치였다. 악몽과 주술 등 초월적 현상을 통해 섬뜩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꿈에 관심이 많다.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냐는 질문을 받으면, 언제부턴가 “꿈 같은 영화를 찍고 싶어요”라고 답한다. 그런 마음이 바탕에 깔려 있고, 이번에는 꿈 중에서도 악몽에 집중했던 것 같다. 꿈이 참 재밌다. 일어나서 생각해보면 너무나 비논리적인데, 꿈을 꿀 때는 의심 없이 받아들이지 않나.
평소에 잠을 못 자는 편인가?
되게 잘 잔다. (웃음) 영화를 만들면서 사주팔자 믿느냐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사전 조사를 위해 방문한 것 빼고는 실제로 점집에 가본 적도 없다. 심지어 내 태몽도 모른다. 분명히 예전에 어머니한테 들었을 텐데, 어째선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내 운명이 궁금한 것이 아니라, 영화적 관점에서만 관심이 가는 거다. 영화에 민간신앙 요소가 들어왔을 때, 인간적이고 매력적이라고 느낀다.


서현우, 류아벨, 심은우 배우와는 어떻게 만났나. 장르 색채가 진한 작품인데도, 배우마다 개성이 묻히지 않을 정도로 집중력 있는 모습을 보여줬다.
단편 <이주선>(오유빈, 2020)에서 서현우 배우를 보고 놀랐다. 이전까지 서현우 배우라고 하면 <병구>(형슬우, 2015) 등에서 보여준 익살스러운 이미지가 떠올랐는데, <이주선>에서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확 다가왔다. 류아벨 배우는 이전부터 워낙 매력적인 배우라고 생각했고, 프리 초반부터 염두에 뒀다. 해미를 연기한 심은우 배우와도 첫 작업이었다. 영화에서는 해미의 엄마가 초반에만 짧게 등장하는데, 원래 해미 엄마의 역할이 좀 더 컸다. 시나리오를 수정하는 과정에서 해미와 해미 엄마, 두 캐릭터를 합쳤다. 자연스레 심은우 배우가 소화해야 할 대사나 액션이 늘어났는데, 어려운 상황에서 중심을 잘 잡아줬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에 선 듯한 류아벨 배우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촬영할 때 배우에게 요구 사항을 세세하게 말하는 편은 아니다. 그보다는 촬영 전에 영화와 인물에 관해 열심히 설명하려고 한다. 어느 정도 캐릭터를 구체화하고 나면, 현장에서는 배우의 액션과 리액션에 집중한다. 이번에도 대체로 비슷했는데, 류아벨 배우와는 평소와 다른 방식으로 대화를 많이 했다. “이때 세영은 인간인가, 아니면 유령인가?”부터 시작해서 어느 정도로 현실성을 가져갈지 계속 논의했다. 애매모호한 중간선을 찾아내야 했는데, 다행히 영화가 매력적인 선에 도달한 것 같다.
평소에는 어떤 영화를 즐겨 보나.
사실 전통적인 의미에서 공포 영화라고 부르는 작품은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 깜짝 놀라게 하는 영화보다는 공포심을 자극하는 영화가 재미있다. 오컬트적 요소에 매력을 느끼는 것 같다. 멜로 영화도 잘 못 보는 편이다. 아, 근데 좋아하는 작품을 말하려니 <이터널 선샤인>(미셸 공드리, 2004)가 떠오르네. (웃음)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영화에 늘 마음이 간다.
“꿈 같은 영화”니까. (웃음)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기대하는 작품은?
영화를 최대한 많이 볼 생각이다. 개막작으로 상영하는 <행복의 나라로>(임상수, 2021)를 포함해서 여러 작품이 기대된다. <세이레>를 만드는 동안, 따로 영화를 챙겨볼 겨를이 없었다. 물론 상영이라는 큰 일을 앞두고 있지만, 부산에 머물며 다른 작품도 보고 바람도 쐬고 싶다. 프리 프로덕션부터 쭉 쉬지 않고 달려왔다. 이번 기회에 바다 구경하면서 그간 쌓인 피로를 털어냈으면 좋겠다.

세이레 Seire
감독 박강 출연 서현우, 류아벨, 심은우, 고은민, 김우겸 제작연도 2021년 상영시간 102분 등급 15세 이상
241 10-10 15:30 영화의전당 중극장 GV
401 10-11 20:0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4관
431 10-12 12:30 CGV센텀시티 4관 G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