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한 시골 마을에 작업실을 둔 조각가 윤철(박종환). 그는 언뜻 자유로운 영혼처럼 보인다. 인습에 얽매이지 않고, 세속의 가치에도 제법 초연한 모습이다. 하지만 결국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그는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을 한꺼번에 맞이하며 크게 휘청거린다. 미술을 공부하던 딸 지나(이연)는 미대 입시를 그만두고 절에 들어가겠다고 한다. 동료의 소개로 만나 연인이 된 영지(강경헌)와의 사이에도 균열이 인다. 여기엔 병과 죽음의 얼룩이 내내 일렁이지만, <절해고도>의 초점은 사건의 비극적인 내용에 맞춰지지 않는다. 영화는 ‘삶은 계속된다.’는 태도로 인생의 위기와 변화를 맞이한 인물들의 시간을 차분히 담아낸다. 그 과정에서 멀어졌던 사람들은 다시 만나고, 구겨졌던 마음엔 한 줄기 빛이 깃든다.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 비전 부문 상영작이며, <일어서는 인간>(2015),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2018)에 이어 세 번째 장편을 선보이는 김미영 감독의 신작이다.
인물과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낸 느낌이 드는 영화다. 2018년에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를 완성하고 오랜만의 작품인데, 출발은 뭐였나.
기존에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관계 맺게 된다면, 우리는 자신에 대해 무엇을 더 알게 될까. 이게 완전한 출발점까지는 아니어도, 초반에 떠올린 여러 생각 중 큰 줄기였다.
전작에 이어 이번에도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를 다뤘다.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의 예술가 아버지는 어느 시점에 자신을 의심하면서 멈춰 선다. 그리고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는 카메라를 든 딸이 그를 흔드는 존재로 등장한다. 사람들은 종종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사랑한다고 해서 꼭 잘 아는 건 아니잖나. 그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 전작에서는 아예 두 사람이 서로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하도록 설정해봤다. 그런데 작업을 마치고 나니 그 인물들과 함께 이야기를 더 해보고 싶더라. 그래서 이번에는 함께 생활은 했어도 여전히 서로 잘 알지 못하는 부녀 사이를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남을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이 결국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는 것과 겹치는 게 아닌가 싶더라. 그런 생각들이 발전해나가면서 <절해고도>가 됐다.
‘절해고도’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의 외딴 섬을 의미한다. 관계를 다루면서도 인물의 고독과 어려움을 있는 그대로 조명하는 영화의 태도를 닮은 제목이다.
시나리오 쓰기 시작했을 때 이미 제목을 정했다. 좀 어렵다는 얘기도 있었고, 바꿔보지 않겠냐는 제안도 들었는데, 시간이 흘러도 더 적절한 제목이 나오지 않았다. ‘절해고도’라는 제목이 제일 좋았다. (웃음) ‘백척간두’라는 표현이 있잖나. 이 영화의 인물들은 그렇게 높은 낭떠러지 위에, 절벽 위에 서 있는 게 아닌가 한다. 백척간두가 들어간 문장을 더 찾아보면 ‘백척간두 진일보’인데, 그 백척간두 상태에서 한 발 내딛는 걸 긍정적으로 보는 표현이다. 그러면 물론 바다로 떨어지겠지만, 그렇게 발을 내딛는 것 자체를 앞으로 나아가는 진일보의 의미로 보는 거다. 그런데 이미 어떤 판단이 들어있다는 점에서, ‘절해고도’가 그보다는 좀 더 자유로운 표현이다. 나는 인물들이 진일보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절해고도 같은 삶의 조건을 딱히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 제목이면 좋겠더라.


작업을 시작하면서 창작자로서 목표했던 게 있나.
시나리오를 포함한 모든 단계에서 주변 분들한테 모니터링을 많이 받았다. 시나리오를 보신 한 선생님께서, 이 영화는 우연이 모여서 새로운 게 창조되는 작업이 될 것 같다고 말씀해주셨다. 거기 공감이 많이 갔다. 콘티도 다 짜고 배우, 스태프들과 의논하며 모든 걸 다 준비한 상태에서 시작하지만, 촬영이 시작되면 계속 우연한 일들이 발생한다. 작업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이 영화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 다를 수 있고, 그렇게 표현된 것들이 하나씩 쌓여서 영화가 완성된다. 어차피 배우와 스태프 그리고 나까지 우리 모두 서로에게 절해고도 아닌가. (웃음) 그런 게 적극적으로 들어오는 작업이 되길 바랐다. 또 그렇게 됐다고 생각하고.
윤철, 지나, 영지는 각각 조금씩 다른 의미로 세상과 잘 맞지 않는 사람들 같다. 어떤 인물들을 그려보고 싶었나.
윤철은 어느 순간 자기 삶에서 길을 잃었지만, 멈춰서 그걸 정리할 마음의 여유가 없는 상태였던 것 같다. 지나는 그보다는 더 직면하려는 사람이니까, 그런 면에서 윤철이 지나보다 좀 더 관념적인 인물일 수 있겠다. 영지는 자유로운 사람이다. 세상을 자기 방식대로 받아들이고 수용할 수 있는 사람. 이때 세상이란 삶의 흐름, 그러니까 생로병사까지 포함한다. 영지는 그런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봤다. 난 세 사람 다 너무나 좋아하고 존중한다. 그들의 삶을 지켜보며 내 삶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해보게 됐다. 물론 그렇다고 나라는 사람이 쉽게 변하는 건 아니겠지만. (웃음) 그들과 함께 생각하고 살았던 순간들이 언젠가 내 삶의 어떤 순간들에 불현듯 나타나지 않을까 한다.
박종환 배우는 언젠가 아버지 역할을 꼭 맡아보고 싶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맞다. 아마도 윤철이 새로운 역할, 특히 아버지 역할이어서 해보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박종환 배우가 나온 <뎀프시롤: 참회록>(정혁기, 2014)을 너무 좋아한다. 영화의 상황은 슬픈데, 한편으론 인생이 농담처럼 느껴진다. 거기 나오는 모든 배우가 그런 느낌을 주는데, 특히 수염을 기른 박종환 배우가 교회에서 성경책 보며 권투 얘기를 하는 순간이 정말 좋았다. 서글프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다. 한없이 진지한 것도 끝없이 웃긴 것도 아닌 미묘함이 느껴져서 같이 작업해보고 싶었다.
이연 배우가 연기한 지나는 전반부와 후반부의 모습이 완전히 다르다. 조금은 전형적인 역할이 아닐까 싶었는데, 예상을 뒤집더라. 강경헌 배우의 부드러운 카리스마도 무척 인상적이다.
이연 배우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담쟁이>(한제이, 2020)로 씨네토크를 진행한 영상을 보고 같이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너무 해맑게 웃고 있는 그 모습을 꼭 영화로 찍고 싶더라. 배우가 이전에 출연했던 작품들에선 잘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이 사람이 아직 보여주지 못한 모습이 많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지나는 머리를 깎아야 하는 역할이잖나. 배우가 시나리오를 보고 그걸 너무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여서 좀 놀라기도 했다. (웃음) 강경헌 배우는 송일곤 감독님 영화를 포함해 많은 작품에 출연한 분이다. 특히 <마법사들>(송일곤, 2005)과 <거미숲>(송일곤, 2004)에서 보여주신 모습이 인상적이고, 온화하지만 쉽게 물러설 것 같지 않은 느낌을 받아서 캐스팅하게 됐다.


박종환 배우와 이연 배우는 생각보다 더 많이 닮았더라. 후반부 어느 장면에서 나란히 있는 둘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런 얘기 많이 들었다. (웃음) 우리도 찍다가 발견한 거다. 두 분이 워낙 친하고 또 서로를 존중하는 사이다.
윤철과 지나는 중반부를 넘어서면서 이전과는 다른 관계의 장으로 접어든다. 지나가 수행을 시작하며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고, 두 사람은 이제 서로를 아버지와 딸로 부르지 않는다. 이렇게 관계를 새로 쓰는 과정을 통해 무엇을 포착해보고 싶었나.
사회적 관계 내에서, 특히 가족이라는 틀 내에서 개인을 규정하는 역할들이 있지 않나. 아버지와 딸도 마찬가지다. 물론 그런 위상으로도 서로를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어쨌든 우린 남 아닌가. 그런 관점으로 관계에 접근해보고 싶었고, 그래서 오히려 가족관계라는 밀접한 틀이 필요했던 것 같다. 우리가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정해진 역할을 다 수행했다고 해서, 그걸로 모든 게 끝나는 건 아니다. 틀을 벗어난 뒤에도 관계가 지속한다면, 그게 남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 또 자기 자신에 대한 새로운 이해로 가는 길이 되지 않을까.
한편으론 관계뿐만 아니라 개인의 갱신, 일종의 다시 살기라는 테마도 반복된다. 심지어 차 안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도 있고.
일신우일신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실 우리는 매일 다시 산다고도 생각할 수 있을 거다. 그렇지만 결국 급격한, 그리고 완전한 리셋은 없다고 본다. 그걸 시도하더라도 결국 머릿속에 생각한 새로운 자신은 되지 못할 테고. 이 영화는 그런 부분에 좀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 차 안에서의 장면은 죽음도 죽음이지만, 결국 잘 모르는 사람한테 구해진다는 점도 중요한 맥락이다. 지나도 중국에서 모르는 사람들한테 도움을 받고, 영지도 오지 여행을 하다가 모르는 사람들한테 구해졌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나. 그렇게 돌봄이 순환되고, 선의를 나누며 살아가는 게 세상의 한 모습인 것 같다. 내 삶이 내 것만은 아닌 거다.
내레이션에 그 표현이 나온다.
너무 직접적으로 말했지. (웃음) 영화를 만드는 동안에도 도움을 주신 분들이 참 많았다. 그래서 나 역시 이 영화가 나만의 것이 아니란 생각을 많이 했다. 2007년에 영화를 만들기 시작해서 벌써 10년이 넘었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그동안 아주 천천히 알게 된 것 같다. 단순히 ‘정말 고맙다’는 차원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굴러가는 한 방식을 인지하게 됐다고 할까.


널찍한 프레임에 마산, 밀양, 창원 등의 풍광을 넉넉하게 담아냈다. 계절감이 도드라져 아름답지만, 한편으론 쓸쓸하기도 한 풍경이다.
밀양의 수행처는 내가 원래 잘 알던 곳이다. 한 해에 한두 번씩 방문한 지 벌써 5년이 넘었다. 촬영 준비하면서 새로운 장소를 발견하는 즐거움도 있었다. 미술감독이 창원에 살고 있어서 영화에 나오는 작업실 같은 장소를 찾는 데 도움을 많이 받았다. 전반부 도심에서 찍을 때는 계절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후반부에는 드라마틱한 측면이 드러날 수 있는 시공간을 많이 찾았다. 여러 계절을 생각했고, 사정상 가을에 촬영하게 됐는데, 그게 너무 잘 맞았다. (웃음) 촬영은 배우들의 연기를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하려고 했다. 배우가 화면 안에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고, 인물들이 서로의 말을 경청할 수 있는 화면 구성을 주로 고민했다.
관현악 연주로 영화 음악을 채웠다. 특히 엔딩에 흐르는 트럼펫 선율이 인상적이다. 흔한 선택은 아닌데, 영화의 정서와 매우 잘 어울리더라.
맞다. 엔딩 곡 받고 너무 좋았다. (웃음) 영화는 끝나지만, 윤철의 인생은 계속되는 느낌이 들지 않나. 믹싱 기사님도 그 곡을 참 좋아하셨다. 조광호 음악감독은 이전에 <증발>(김성민, 2019)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음악 작업을 하셨다. 그 음악이 너무 인상적이라 소개 받게 됐다. 실제로 작곡을 전공하셨고, 영화음악에 관심이 많은 분이다. 감독님 만나기 전에는 영화에 개빈 브라이어스라는 미국 현대음악 작곡가의 앨범 「타이타닉 호의 침몰」 트랙을 깔아놨었다. 죽은 사람들을 위한 일종의 송가다. 그걸 들으면 삶과 죽음이 굉장히 가까이 붙어있다는 느낌과 함께, 그렇기 때문에 외려 좀 떨어져서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훌륭한 예술이 대개 그렇듯이 말이다. 그 음악들을 감독님께 들려드렸고, 정서는 수용하되 새롭게 작업했다.
영화잡지 기자부터, 미학과 대학원생, 임권택 감독 영화의 연출부 등을 거치며 계속해서 영화 가까이에 있었다. 결국은 영화 찍는 자리가 본인과 가장 잘 맞는 것 같나.
일단 영화를 너무 좋아한다. 관객의 자리도 정말 좋다. 그런데 만들 때의 기쁨은 또 다르다. 맨 처음 영화를 공부했을 때부터 영화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러다가 기자 생활도 하고 다시 공부도 했는데, 역시 현장에서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자꾸 생기더라. 그래서 늦게 연출부 생활도 시작하고 결국에는 만드는 일을 하게 됐다.
4편의 단편과 3편의 장편을 완성했다. 어떤 과정이었는지, 또 다음 작업은 무엇이 될지 궁금하다.
나를 좀 더 이해하려고 계속해서 시도했던 과정인 것 같다. 지금은 다시 시나리오 쓰려고 준비하고 있다. 가까이서 보면 희극인데, 영화가 끝나고 나면 비극일 수도 있는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보려고 한다.
절해고도 A Lonely Island in the Distant Sea
감독 김미영 출연 박종환, 이연, 강경헌, 박현숙, 정수빈, 장준휘 제작연도 2021년 상영시간 116분 등급 15세 이상
106 10-08 19:30 CGV센텀시티 4관 GV
184 10-09 15:30 CGV센텀시티 7관 GV
250 10-10 09:30 CGV센텀시티 스타리움관 GV
378 10-11 09:0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10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