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대로 할 수 없는
BIFF 2021 <그 겨울, 나는> 오성호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Festival / 2021-10-06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하는 <그 겨울, 나는>은 오래 사귄 연인을 중심으로 청년 세대의 풍경을 그리는 작품이다. 경학(권다함)은 경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혜진(권소현)은 취업 시장에 뛰어든다.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팍팍한 일상이지만, 두 사람은 서로 의지하며 온기를 나눈다. 견고해 보이던 둘 사이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경학이 은행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으면서부터다. 경학은 난데없이 부모의 대출금을 갚아야 하는 상황에 놓이고, 이내 공부를 중단한 채 배달업을 시작한다. 그사이 혜진은 지망하던 회사에 지원했다가 탈락한 후, 어느 중소기업에 입사한다. 경학과 혜진이 각자 다른 세계에서 분투하는 동안, 둘이 동거하는 작은 집에는 웃음 대신 정적이 자리 잡는다. 서로를 맘껏 응원할 수 없게 된 연인 앞에는 어떤 겨울이 기다리고 있을까. <소나기>(2014) <연애경험>(2016) <눈물>(2018) 등 다수 단편을 통해 진솔한 연출로 호평받은 오성호 감독은 첫 장편 <그 겨울, 나는>에서 한층 깊어진 눈으로 인물을 바라본다. 극의 중심에서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균형을 맞춘 배우 권다함의 연기도 주목할 만하다. <굿타임>(강동인, 2020) <아쿠아마린>(유종석, 2019) 등에서 강렬한 연기를 선보인 권다함은 제 자리를 잃고 주변으로 밀려나는 경학의 불안과 조바심을 섬세하게 표현하며 ‘그 겨울, 나는’이라는 제목 뒤에 따라올 수많은 문장을 완성해낸다.

 

 

 

언제부터 준비한 작품인가.

작년 1월부터 트리트먼트를 쓰기 시작했다. 완성하기까지 꼬박 1년 8개월 정도 걸렸다. 부산국제영화제 선정 소식을 듣고 얼떨떨했다. 실제로 관객을 만나서 반응을 살펴야겠지만, 현재로서는 안도감이 크다. 주변 평가가 워낙 안 좋아서 기대를 내려놓은 상태였다. 학교(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는 계속 꼴찌였거든. 시나리오도 꼴찌, 편집본도 꼴찌. (웃음) 정말 운 좋게 기회를 얻었구나 싶다.

 

주로 지적받은 문제점은 뭐였나.

내 살 깎아 먹는 이야기가 될까 봐 조심스러운데, 캐릭터를 고민하라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 경학이 호감형 인물이 아니라는 거다. 응원하거나 지지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관객이 공감하기에 힘들 것 같다, 경학이 왜 혜진과 사귀는지 모르겠다⋯ 그런 피드백을 검토하면서 캐릭터를 계속 고쳐나갔다.

 

아이돌 그룹 ‘포미닛’에서 활동한 권소현 배우가 혜진 역을 맡았다. 취업과 연애로 고민하는 이십 대 후반 여성을 매력적으로 표현하더라.

필름메이커스에 공고를 냈고, 권소현 배우가 오디션에 지원해줬다. 3차 오디션까지 보고 캐스팅을 확정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아이돌 출신 배우에게 선입견을 품었구나 싶다. 결정을 유보하면서 오래 지켜봤다. 연기를 잘하는 배우들이 많았지만, 그중에서 혜진과 가장 어울리는 사람은 권소현 배우였다. 현장에서도 안정적으로 연기해줬다.

 

혜진이 회사 동료인 욱현(이한주)과 길을 걷다가 일본어로 대화하는 장면은 무척이나 로맨틱하다. 두 사람만의 비밀이 생기는 순간이고, 경학이 주지 못하는 설렘으로 가득하다.

욱현은 경학과 거리가 멀어야 한다고 봤다. 혜진이 경학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걸 가진, 경학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 둘만의 언어를 사용하면, 그런 거리감이 뚜렷해지겠더라. 낯선 두 인물이 공통 관심사를 발견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평소에 사용하지 않는 외국어로 대화하는 동안, 혜진의 또 다른 면모가 자연스레 튀어나온다고 생각했다. 롱테이크로 찍었고, 별도 자막 없이 상영하려고 한다. 대화 내용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지는 않으니까.

<그 겨울, 나는>
<그 겨울, 나는>

권다함 배우와는 원래 친분이 있나.

작업 전에는 얼굴만 아는 정도였다. 한국영화아카데미에 진학하기 전, 서울예술대학교에서 학부를 전공했다. 다함 배우도 같은 학교에 다녀서 오며 가며 본 적이 몇 번 있다. 그러다 <그 겨울, 나는>을 함께 찍게 됐고, 지금은 가까운 사이가 됐다. 사실 다함 배우에게 첫눈에 반했다. (웃음)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운데, 내가 볼 때는 그냥 멋있고 예쁜 사람이다. 권다함이라는 사람이 지닌 매력에 끌렸고, 연기도 잘 해낼 거라 믿었다. 하지만 시나리오 크리틱 과정에서 지적받은 부분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안 그래도 호감형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다함 배우에게는 특유의 뺀질뺀질한 느낌이 있거든. 영화에서 그런 부분을 어떻게 활용할지, 결을 잘 맞춰낼 수 있을지 고민을 거듭했다.

 

결국 권다함 배우를 선택했던 가장 큰 이유는 뭔가.

매력적이니까. (웃음) 거칠면서도 보호 본능을 자극하고, 섹시한 분위기도 풍긴다. 투박한가 싶으면, 어딘지 세련된 구석도 있고. 지금까지 내가 보여줬던 인물과는 또 다른 인물이 나올 거라고 기대했다. <연애경험>과 <눈물> 등 내 전작을 보면, 주인공들이 전부 착하고 수동적이다. 권다함 배우가 연기하면, 경학이 좀 더 입체적인 인물이 되지 않을까 했다.

 

편안하면서도 정확한 연기를 보여준다. 특히 경찰공무원 준비생에서 배달 기사로, 다시 공장 노동자로 신분이 변해가는 와중에 느낄 법한 불안과 공포를 예민하게 표현한다.

영화 후반부에 다다를수록 경학이 못된 모습을 보이지 않나. 다함 배우가 소위 말하는 ‘나쁜 놈’ 역할을 되게 잘 살린다. 다만 초반에 인물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에 관해서는 꽤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눴다. 이견을 조율하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경학의 변화를 잘 드러내 줬다.

 

의견이 부딪혔던 부분에 관해 좀 더 말해준다면.

내가 걱정하느라 다함 배우를 괴롭혔던 거다. 모니터를 볼 때면 머리 한 구석에 ‘경학이 너무 나쁜 사람처럼 보이나? 여기서는 나빠 보여도 되나?’ 그런 질문이 맴돌았다. 초반에는 톤을 조절해달라고 여러 번 요청했는데, 어느 시점부터는 다함 배우의 연기에 설득돼서 믿고 맡겼다. 내가 갈피를 못 잡고 초조해할 때도 다함 배우는 자신감을 잃지 않더라. 오히려 날 다독여줬다. 인물이 건실하고 순하기만 하면 재미없다면서 모난 부분이 있어야 에지가 생긴다고 하더라. 그렇게 우리가 가는 방향이 맞다고, 그러니 마음 졸이지 말라고 북돋아 줬다.

 

혜진과 농담을 주고받거나 노래방에서 젝스키스의 ‘커플’을 부를 때는 아주 해사한 웃음을 지어 보이기도 한다. 혜진이 왜 사랑에 빠졌는지, 경학의 어떤 점을 아끼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겠더라.

천만다행이다. 다른 사람 눈에도 그렇게 보였다는 말을 들으니 기분 좋다. 그렇지, 다함 배우가 웃을 때 너무 예쁘거든. 현장에서 웃는 장면을 찍을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다함 배우한테도 말했다. 당신은 웃음과 분노, 양극단의 무기를 가졌다고. 욕하거나 화를 내는 연기도 참 잘한다. (웃음)

 

혜진과 경학이 동거하는 집은 어떻게 꾸몄나. 책과 옷처럼 각자 생활을 보여주는 물건뿐만 아니라, 말린 꽃다발과 사진 등 둘의 연애를 짐작할 수 있는 소품으로 공간을 풍성하게 채웠다.

<디바>(조슬예, 2018)랑 <아워 바디>(한가람, 2018) 등을 작업한 김영탁 미술감독님이 애를 써주셨다. 실력이 출중해서 여러모로 도움 받았다. 특히 한 테이블을 식탁 겸 책상으로 사용한 설정이 마음에 든다. 부엌과 거실의 경계가 모호한 좁은 집에서 살다 보면, 정말 그렇게 되지 않나. 한 책상에서 밥도 먹고, 공부도 하고. 그곳이 상도동 재개발지역 주택이다. 주변에 사람이 한 명도 없고, 우리가 촬영한 집도 아예 빈집이었다. 가구며 소품이며 전부 새로 채워 넣었다.

<그 겨울, 나는>
<그 겨울, 나는>

집뿐만 아니라, 학원과 모텔 등 다양한 장소가 등장한다. 후반부에 경학이 들어가는 기숙형 공장도 인상적이다.

최선의 공간을 찾고 싶어서 스태프들한테 떼를 썼다. 나 때문에 애를 많이 먹었을 거다. 공장에서 일하는 분들, 육체 노동하는 분들에게 애정을 느낀다. 나도 생계를 위해 ‘노가다’를 한지 9년 정도 됐다. 공장은 나에게 익숙한 공간이기도 하고, 취향에도 맞는다. 영화에서 경학이 이리저리 치이다가 결국 공장에 도착하는데, 그곳에서는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기를 바랐다. 그냥 한없이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을 만났으면. 노가다 가보면 그런 아저씨들 정말 많거든.

 

<연애경험>(2016) <눈물>(2018) 등 전작에서도 연애와 계급 문제를 지속해서 다뤘다. <그 겨울, 나는>은 그간 작업해온 ‘가난한 사랑 노래’를 확장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내가 지질하고 가난하다 보니, 저절로 그런 인물이 나오는 것 같다. ‘쭈그리’ 정서를 좋아하기도 하고. 연애와 계급 문제를 접목해야겠다고 의도한 적은 없지만, 글 쓰다 보면 자연스레 그런 이야기를 반영하게 된다. 경학을 통해 가난이 대물림된다는 인상을 주고 싶었고, 자본주의 체제에서 사랑이 어떤 갈등에 처하는지 살펴보려고 했다. 사실 전작과 똑같은 영화를 만들게 될까 봐 두려웠다. <눈물2> 아니냐는 반응도 있었는데, 그 말이 맞는다면 나는 가치 없는 일을 한 것 아닌가. 단편이라면 일찌감치 욕심대로 밀어붙였을 거다. 하지만 장편은 처음이다 보니, 주변의 평가에 곧잘 흔들렸다. 타인의 의견에 좀 더 귀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 같다.

특히 편집 크리틱을 거치는 6개월이 가장 힘들었다. 계속 안 좋은 말을 들으니 외로워지더라. 비교당하면서 나도 모르게 경쟁심이나 열등감도 생겼다. 그래도 줄이면 줄일수록 영화가 나아졌다. 가편집본 러닝타임은 150분 정도였는데, 50분을 걷어내고 완성했다. 결국 내가 내 영화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던 거겠지. 그때 권다함 배우를 포함해서 동료와 친구들의 응원에 큰 힘을 얻었다.

 

동료 중에는 누구와 친한가.

친한 사람이 많지는 않다. 동생과는 작업 외에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성인식>(2018)을 연출한 오정민 감독과 자주 연락한다. 계영호 배우와도 친하다. <눈물>에 이어 <그 겨울, 나는>까지 함께했다.

 

혹시 피디로 참여한 단편 <이상한 슬픔>(2019)의 오세호 감독과 형제인가.

맞다, 동생과 영화를 만들면 즐겁다. 필터 없이 터놓고 얘기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자 단점이다. 대화가 잘 통해서 좋은데, 형제다 보니 때로는 필요 이상으로 과하게 개입하기도 한다. 그래도 동생만큼 냉철하게 봐주는 사람이 또 없다. 좋게 말하면 객관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평가가 박하다. (웃음) 언젠가 공동연출 기회가 생긴다면, 함께 해보고 싶다.

<그 겨울, 나는>
<눈물>

<그 겨울, 나는>을 만드는 동안, 참고했던 작품이나 목표로 삼은 기준이 있다면.

가치관의 차이로 다투는 커플에 관한 영화를 많이 봤다. <타이페이 스토리>(에드워드 양, 1985) <레볼루셔너리 로드>(샘 멘더스, 2008) <결혼 이야기>(노아 바움백, 2019) <먼 훗날 우리>(유약영, 2018) 등이 레퍼런스 작품이었고, 지아장커 영화에서도 힌트를 얻었다. 일단 내가 멜로라는 장르를 참 좋아하는 것 같다. <그 겨울, 나는>을 정통 멜로라고 볼 수는 없지만, 결국 사랑 이야기 아닌가. 어릴 적에 드라마 광이라고 할 정도로 텔레비전 드라마를 엄청나게 많이 봤다. 사랑 이야기에 재미를 느끼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그런 걸 하고 싶어졌던 것 같다.

 

당시 푹 빠졌던 드라마는 뭐였나.

드라마라면 가리지 않고 봤는데, 2002년에 본 <네 멋대로 해라>(MBC)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네 멋대로 해라>를 본 날에는 잠도 안 와서 밤새 뒤척였다. 여태껏 봐온 드라마와는 뭔가 달랐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좋았다. 경(이나영)과 복수(양동근) 캐릭터도 좋고, 이야기도 좋고. 막연하게 ‘나도 저런 거 해 보고 싶다’라고 생각하던 중에 연출이라는 영역을 알게 됐다. 그러다 자연스레 영화로 관심이 옮겨 갔다.

 

드라마를 연출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을 텐데.

스무 살 이후로는 드라마를 보지 않는다. 신기하게도 영화를 알고 난 다음부터는 예전만큼 흥미롭게 느껴지지 않더라. 입시도 요인이었다. 드라마를 연출하려면, 방송국 피디가 되어야 하지 않나. 고등학생 때 관련 정보를 찾아보다가 마음을 접었다. 예술이 아니라, 언론 계열 학과를 진학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막막하더라. 나는 중고등학교 내내 공부를 진짜 못했거든. 게다가 드라마는 연출보다 작가의 영역이 훨씬 큰데, 나는 글도 못 쓴다. 한국영화아카데미에 지원했던 이유가 그거다. 내가 따로 장편 시나리오를 써서 제작지원 사업에 지원한다면? 과연 거기서 당선될 만한 글을 쓸 수 있을까? 한국영화아카데미는 시험도 치르지만, 영상 포트폴리오와 긴 자기소개서를 함께 제출한다. 마지막에는 면접도 보고. 내게는 상대적으로 기회가 많아 보였다. 한국영화아카데미가 아니었다면 <그 겨울, 나는> 제작비를 마련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영화감독은 누구인가.

되게 많다. 홍상수 감독 영화는 꼭 극장에서 보려고 한다. 감독님 영화는 정말 감독님만 찍으니까. 볼 때마다 새롭고, 다른 영화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곽경택 감독 작품도 챙겨본다. 사실 멜로만큼 좋아하고 하고 싶은 게 액션 누아르다. 조직폭력배에 관심이 많다.

 

액션 누아르라니 의외다. 차기작이 기대되는데.

깡패, 특수부대, UFC 그런 거 좋아한다. 동경이라고 해야 하나? 내가 ‘쭈그리’처럼 살아선지, 이상하게 마음이 간다. 흔히 남성성이라고 일컫는 면이 부족하다 보니, 정반대에 끌리는 것 같기도 하다. 어릴 때도 SBS 드라마 <야인시대>를 되게 좋아했다. (웃음) 구체적으로 말하기엔 어렵지만, 차기작으로 생각해둔 이야기는 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장르이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진짜 하고 싶은 걸 해보려고 한다.

오성호 ⓒ이영진 

그 겨울, 나는 Through My Midwinter

감독 오성호 출연 권다함, 권소현, 오지혜, 김신비, 정수교, 계영호, 이한주, 권혁성, 이금주, 백승철 제작연도 2021년 상영시간 100분 등급 15세 이상 

 

302 10-10 16:0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6관 GV

351 10-11 13:00 CGV센텀시티 4관 GV

458 10-12 12:0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4관 GV

528 10-13 18:0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10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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