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임지호)은 엄마 수경(양말복)과 한 집에 산다. 주눅이 든 채 어깨를 웅크린 딸과 달리, 수경은 거침없고 활력이 넘친다. 애인 종열(양흥주) 앞에서는 카랑카랑한 웃음을 터뜨리는가 하면, 매사 소심한 이정을 다그칠 때는 불 같이 화낸다.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여자는 서로가 못마땅하다. 혹독한 말을 주고받은 어느 날, 수경이 운전하던 차가 이정을 향해 돌진한다. 수경은 차량 결함을 주장하지만, 이정은 엄마를 의심한다. 영화는 한쪽 편을 드는 대신, 두 인물이 따로 또 같이 통과해온 얼룩덜룩한 시간을 더듬어보려 애쓴다. 당신처럼 살고 싶지 않은 마음과 당신만은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 사랑과 증오가 한데 꼬이고 서로 엉키는 시린 겨울, 모녀는 상대에게 잊지 못할 흉터를 남긴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수학하는 김세인 감독의 첫 장편으로,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 뉴 커런츠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불놀이>(2018) <컨테이너>(2018) 등 단편에서 치열한 관계를 그려냈던 감독의 역량이 돋보이며, 예상치 못한 감동과 폭발하는 에너지를 두루 갖춘 작품. “드라마 영화이지만, 정서적으로는 공포 영화”라고 작품을 소개하는 김세인 감독을 만났다.
영화제 상영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직은 관객과 만나는 일이 두렵게 느껴진다. 직접 겪은 일을 그대로 반영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내 삶과 밀접하게 연결된 작품이다. 나뿐만 아니라, 나와 엄마의 관계를 다룬 이야기이지 않나. GV가 지나치게 사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거나 내 입장에서만 말하게 될까 봐 조심스럽다. 가족들이 상처받는 일이 없어야 할 텐데. 솔직히 GV를 상상하면, 단두대에 오르는 기분이다. (웃음)
그간 영화제에서 단편을 꾸준히 소개했다. GV를 많이 했는데도 떨리는가 보다.
아무래도 단편에서는 훨씬 우회적으로 감정을 풀어냈으니까. 엄마한테 아직 영화를 보여드리지 않았는데, 나만큼이나 무서워하시는 것 같다. 이번 추석에 친척들을 붙잡고 얘기하더라. 나는 애한테 그런 적이 없다고. 영화와 삶은 별개라고 계속 말씀드리는 중인데, 엄마한테도 얼마간 시간이 필요한 듯하다.
부산에서 상영할 때는 어머니를 초대할 예정인가.
지금도 고민한다. 엄마 앞에서 똑소리 나는 딸이 되고 싶은데, 이렇게 긴장해선 벌벌 떠는 모습만 보여줄 것 같다. 워낙 말주변이 없고, 낯가림도 심하다. 이번에 촬영하면서 확실히 느꼈다. 나는 진짜 소통에 능하지 않구나. (웃음) 영화에 느끼는 재미와는 상관없이, 낯선 사람과의 대화에 스트레스를 받는 편이다. 작업을 마무리한 지 얼마 안 됐는데, 당분간 일상으로 회복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시나리오를 완성하기까지는 얼마나 걸렸나.
2016년에 A4 10장 분량의 트리트먼트를 작성했고, 2020년에 그걸 20장으로 늘렸다. 트리트먼트에서 시나리오로 확장하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 달 정도?
구상하는 시간이 길었다.
내 안에서 묵히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2016년과 2020년에 쓴 트리트먼트를 살펴보면, 결말이 완전히 다르다. 처음에는 철저하게 딸의 입장에서 썼다. 4년이 지난 후에야 조금이나마 중립적 시선으로 인물을 지켜볼 수 있게 됐다. 지금도 완벽하진 않다. 촬영하고 편집하면서 여전히 객관화되지 않은 부분이 눈에 들어오더라. 아쉬운 마음도 들지만, 한편으로는 완벽하게 객관화하기란 어려운 주제라는 생각도 들었다.
객관화되지 않은 부분이라면?
현장에서 양말복 선배님께 “더 강하게 해주세요”라고 자주 말씀드렸다. 내 머릿속에 각인된 엄마의 무서운 모습이 있는데, 화면으로 보는 선배님은 그보다 약하게 느껴졌던 거다. 돌이켜보면 당시에는 캐릭터에 단편적으로 접근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엄마의 어떤 표면적인 모습을 무서워한 것이 아니거든. 과거에 엄마가 했던 말과 행동을 기억하기에, 어느 순간에는 엄마가 쳐다만 봐도 서늘하다고 느꼈다. 그런 맥락을 살피지 못했다는 걸 현장에서 디렉팅하며 깨달았다.
양말복, 임지호 배우는 격렬한 몸싸움과 강도 높은 감정 연기를 모두 소화해야 했다. 특히 수경을 연기할 배우를 찾는 일이 쉽지 않았으리라 짐작한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면서도 끝내 수수께끼로 남는 인물이다.
수경은 ‘비호감’으로 비칠 수도 있는 캐릭터이기에 배우가 본래 지닌 매력을 가장 중요하게 봤다. 매력이 철철 흘러넘치는 배우를 만나길 기대했는데, 양말복 선배님이 딱 그랬다. 처음 미팅했을 당시, 다른 작업을 위해 머리카락을 백발로 만드신 상태였다. 그런데도 선배님의 젊음과 에너지가 감춰지지 않더라. 환하게 미소를 지을 때는 천진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무엇보다 수경의 양면성을 잘 드러내 주셨다. 수경은 애인과 딸 앞에서 사뭇 다른 모습이지 않나. 냉탕과 온탕을 오가듯 변화하는 순간이 있는데, 선배님께서 노련하게 소화하셨다. 리딩할 때도 이정을 대하는 수경을 보면, 우리 엄마가 떠올라서 등골이 오싹하더라. (웃음)
임지호 배우는 장편에서 처음으로 주연을 맡았다. 배우의 어떤 점을 믿고 캐스팅했나.
이정이라는 인물을 깊이 이해하는 배우였다. 처음 봤을 때, 눈에 참 여러 감정이 담겨 있구나 싶더라. 지호 배우의 눈에 담긴 이야기를 함께 펼쳐보고 싶었다. 사실 인터뷰를 통해 꼭 말하고 싶은 게 있다. 오디션 진행하면서 만난 배우들 대부분 이정에게 많이 공감해줬고, 본인 삶의 일부분을 솔직하게 들려줬다. 오디션과 시나리오 퇴고를 동시에 진행했는데, 그분들이 내어주신 진심 덕분에 마지막까지 힘을 낼 수 있었다. 아쉽게도 촬영을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정말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현장에서는 배우들과 어떤 이야기를 나눴나.
솔직히 현장 상황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시나리오를 너무 길게 쓰는 바람에 촬영 일정이 빠듯했고, 현장에서 배우들과 대화를 진득하게 나누지 못했다. 대신 사전에 시나리오와 각자 살아온 과정에 관해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정서적 레퍼런스로 삼은 영화, 음악, 만화 등 다양한 작품을 공유하면서 감각을 일치시키려고 노력했다.
레퍼런스로 삼은 작품에는 어떤 것이 있나.
음악감독으로 참여해주신 이민희 님의 개인 앨범 『빌린 입』(2016), 영화 <피아니스트>(미카엘 하네케, 2001)의 원작 소설 『피아노 치는 여자』(엘프리데 옐리네크, 1983), 그래픽 노블 『엄마들』(마영신, 2015) 등을 배우들에게 추천했다.
영화는 월경, 자위, 섹스, 임신 등 여성의 몸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을 언급한다. 인물이 느끼는 비참한 기분이라든지 그들에게 찾아온 크고 작은 좌절과 무관하지 않은 경험이다.
매체에서 여성의 몸이 한정적으로 소비될 때가 있다고 생각했다. 기존과는 다르게, 좀 더 다양한 의미로 몸을 표현해보고 싶었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를 만들면서 모녀 관계를 탐구하는 심리학 서적을 여러 권 읽었는데, 인상 깊은 구절이 있었다. 여성은 남성보다 몸을 쉽게 인지한다고 하더라. 매달 월경을 하는 것처럼 몸의 당사자로서 신체를 감각하는 일이 생활에 자연스레 자리 잡으니까. 다만 그러한 경험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기존 문화에서 수치심으로 발휘되는 면이 있다고 봤다. 얼마나 성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부분에 관해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좌훈방에서 증기에 휩싸인 채, 제왕절개 흉터를 만지는 수경이 떠오른다. 스릴러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이더라.
드라마 영화이기는 하지만, 정서적으로는 공포 영화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시나리오 쓸 때부터 그간 영화에서 볼 수 없던 새로운 공간을, 여자들만의 공간을 등장시키고 싶었다. 엄마와 목욕탕에 자주 다녔는데, 욕탕과 좌훈방이 같이 붙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영화에서 수경의 일과 생활이 분리되지 않고, 마구 뒤섞이길 바랐다. 실제 우리가 빌린 공간이 그랬다. 판매품, 컵, 간식 등이 흩어져 있었고, 그 공간과 소품을 활용해서 미술을 완성했다.
서늘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와중에, 문득 아름다운 순간을 보여주기도 한다. 수경이 수영장 물 위에 떠서 하늘을 바라보는 장면은 환상적이다. 흐르는 음악도 서정적이고.
영화가 담는 감정이 기본적으로 무겁다. 심각하게만 진행하면, 내가 봐도 지치고 숨이 막히겠더라. 일부러 재밌는 장면이나 정서적 장면을 넣었다. 수영장 장면에서는 수경을 아름답고 자유롭게 표현하는 동시에, 편집으로 낙차를 만들어냈다. 앞뒤로 이정의 모습을 보여주면, 수경이 더 눈꼴 사납게 보일 테니까. 그런 교차가 둘의 관계를 함축적으로 드러낸다. 애초 한 사람에게 이입해서 따라가는 영화가 아니고, 관객 또한 이정과 수경 사이를 널뛰면서 보게 되리라 생각한다. 편집뿐만 아니라, 음악에서도 거리를 중요하게 여겼다. 인물과 인물의 거리, 인물과 음악의 거리 등에 관해 이민휘 음악감독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이민휘 음악감독과는 원래 친분이 있나. 시나리오를 쓰면서도 『빌린 입』을 많이 들었다고 했는데.
전혀 모르는 사이인데, 흔쾌히 작업을 수락해주셨다. 『빌린 입』을 들으면 터널을 통과하는 것만 같다. 오래된 사진첩을 떠올릴 때와 비슷한 기분이다.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을 때부터 ‘이 영화의 음악감독은 이민휘여야 해’라고 생각했다.
엔딩 크레디트를 보니 타이틀 작업에 ‘윤수경’이라는 이름이 나오더라.
엄마가 타이틀을 써줬다. (웃음) 좀 더 근사하게 만들어야 하나 고민하기도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나만의 영화라고 볼 수가 없겠더라. 어떤 방식으로든 엄마가 참여해서 영화를 마무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엄마가 글씨를 잘 써서 놀랐다. (웃음) 20개 정도 써달라고 부탁했는데, 그중에 되게 멋진 것도 많았다. 스태프들과 회의를 거친 끝에, 일부러 투박하고 거친 느낌으로 쓴 버전을 골랐다. 그게 우리 영화의 개성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어머니는 이름도 빌려주신 셈이다.
처음에 트리트먼트를 쓸 때는 다른 이름이었는데, 이입하기가 어려워서 글이 자꾸 막혔다. 엄마 이름을 가져온 다음부터 신기하게도 글이 잘 써지더라.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나니 도저히 바꿀 수가 없었다. 결국 엄마한테 상황을 설명한 후, 허락을 받고 사용했다. 내 딴에는 흔하지 않은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우리 작품에 수경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많이 모였다. 이정의 아역을 맡아준 안수경 배우부터 현장에 도움을 주신 분들까지 총 4-5명 정도 된다. 영화에 기운이라는 게 진짜 있구나 싶다.
영화를 만드는 동안, 가장 의지한 사람은 누구였나.
함께 사는 고양이 주안과 단무, 그리고 윤수경 씨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영화를 만드는 동안, 엄마가 여러모로 배려해주시는 걸 느꼈다. 어쩌면 그동안 내가 엄마에 관해 안 좋은 기억만 갖고 살았구나 싶은 생각도 새삼스레 들더라. 원래 자주 싸우는 편인데, 이번 작품을 계기로 또 다른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을 것 같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The Apartment with Two Women
감독 김세인 출연 임지호, 양말복 제작연도 2021년 상영시간 140분 등급 15세 이상
248 10-10 19:00 영화의전당 중극장 GV
381 10-11 10:0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3관
451 10-12 19:00 CGV센텀시티 4관 G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