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ERSE

인디포럼 2021 신작전

<1021>

박동수 / Ground / 2021-09-29

열화된 이미지들이 영화를 가득 채운다. 노영미 감독의 <1021>은 디지털 스크린의 ‘화소’를 고스란히 노출한 듯한 점묘화와 같은 이미지의 모음집이다. 감독은 자막을 통해 "이 이야기는 '10월 21일' 키워드 검색을 통해 발견한 백 년간의 신문 기사, 위키피디아, SNS, 그리고 기타 인터넷 자료로 만들었습니다"라고 밝힌다. 영화 속 이미지는 지난 백 년간 온라인에 퇴적된, 저작권이 없거나 무료로 인용 가능한 것들이다. 여기엔 청산리 전투, 성수대교 참사와 같은 역사적 사건부터 <백 투 더 퓨처 2>의 주인공이 미래로 향한 날짜, 10월 21일에 태어나거나 사망한 여러 유명인, SNS에 쓰인 수많은 이야기가 포함된다. 일제강점기부터 현대까지를 포함하는 수많은 이미지와 텍스트, 유명인들의 이야기는 하이마와 옥토버라는 두 사람의 이야기로 수렴된다. 하이마는 2016년 10월 21일 발생한 태풍의 이름이며, 옥토버는 이름 그대로 10월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노영미 감독은 꾸준히 저작권 없는 이미지와 기존에 존재하던 이야기의 결합을 시도해왔다. <하드보일드 러브스토리>에선 디즈니의 <백설 공주> 이미지를 열화시킨 뒤 이야기를 변형하며, <I am not yours, I am you>는 온라인상의 유사한 이미지 수백 장을 마치 거울상처럼 교차시킨다. <KIM>은 온라인 가상 세계를 떠도는 이미지 사이를 유유히 산책하는 작품이었고, <ZOO>는 움직이는 동물의 이미지를 열화시킨 뒤 새로운 움직임의 방식을 탐구하려는 시도였으며, <하녀들>과 <파슬리 소녀>는 민담과 동화의 이야기를 저작권에서 자유로운 이미지들로 콜라주한다. 노영미 감독의 필모그래피 속에서, <1021>은 그가 지난 몇 년간 시도한 작업의 야심 넘치는 확장판이다.

점으로 열화된 이미지들은 두 주인공의 이야기로 직조된다. 이야기는 에로-그로-넌센스 소설을 쓰던 하이마의 어머니로부터 시작한 그와 옥토버 사이의 사랑, 소설가로 살게 된 하이마와 투쟁하는 삶을 살게 된 옥토버로 이어진다. 감독이 발굴해낸 10월 21일의 방대한 이야기들은 두 사람의 이야기로 직조되고 압축되지만, 압축은 필연적으로 정보 값의 손실을 초래한다. 지난 백 년간의 이미지들은 온라인 접속을 위해 필요한 디지털 스크린의 화소 단위로 열화된다. 저작권이 없는 열화된 이미지들은 영화의 이야기로 직조됨과 동시에, 엔드크레딧의 수많은 레퍼런스 리스트를 통해 개별적인 이야기들로 해체된다. 청산리 전투가 벌어진 1920년 10월 21일부터 2020년 10월 21일이라는 현재까지를 담아낸 이미지들은, 퇴적층 속에 파묻힌 화석처럼 그것의 형체만을 유지하고 있다. <1021>은 본래 모습을 알 수 없는 뼈대 위에 붙여질 모습을 상상하고, 이야기의 형태로 만들어낸다.

백 년간 퇴적된 이야기는 하이마와 옥토버라는 개인의 이야기로 모이지만 끊임없이 점의 형태로 해체된다. 하지만 일렁이는 점들은 뚜렷하지 못한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크고 작은 역사를 통과하며 쌓인 이야기는 수렴과 발산을, 형상을 갖췄다가 잃어버리길 반복한다. 10월 21일이란 날짜는 선택의 우연성으로 인해 수없이 반복되는 날짜에 불과한 것이 되지만, 동시에 지난 백 년간의 10월 21일이라는 필연성 때문에 하이마와 옥토버의 이야기가 존재하는 토대가 된다. 노영미 감독은 엔드크레딧에 자신의 역할을 “Story Weaver(이야기 방직공)”로 표기했다. 어떤 날을 선택해도 유사한 분량의 행복과 슬픔, 이야기의 다양성이 존재한다. <1021>은 그러한 우연성과 필연성 사이에서 발견한 이야기들을 직조한다. 때문에 감독은 이 이야기의 각색가나 각본가가 아니다. 그는 이미 존재하는 이야기들을 점으로 열화시킨 뒤 그것을 패턴으로 삼는 원단을 짜내는 방직공이며, 이야기들의 퇴적층에서 뼈대를 발굴하고 그것의 본래 형상을 다각도로 추리하는 이야기의 고생물학자다. <1021>은 얇은 실타래가 독특한 패턴을 지닌 원단이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뼈대만 남은 고생물의 당시 모습을 그려본 상상도를 둘러보는 것처럼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