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보아야 가까이 보인다
DMZ Docs 2021 <1989 베를린, 서울 Now> 최우영
글 손시내 사진 이영진 / Festival / 2021-09-13

<1989 베를린, 서울 Now>는 통일에 관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말로 가득한 영화다. 주인공인 안드레아스, 마크, 소냐는 30여 년 전 독일 통일을 경험했고, 이후 한국에 정착해 지금껏 살고 있다. 2018년 남북의 화해 무드가 조성되고 낙관적인 전망이 드리워졌을 때, 최우영 감독은 이들에게 저마다 경험한 통일의 기억과 현재의 감정을 물었다. 이들이 들려준 개인적이고 내밀한 답변은 여전히 분단국가에 사는 우리에게 일종의 준비운동으로 다가온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 혹은 행정적으로 동독과 서독이 통일되던 날은 특정한 날짜로 역사에 남아 기념된다. 그러나 카메라 앞에 선 이들은 “통일은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말한다. 영화가 보여주는 현실의 통일이란 경제적 어려움이나 정체성의 혼란과 같은 삶의 변화를 모두 포함하는 길고 끈질긴 과정이다. 영화는 그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제대로 담아내기 위해 노력하면서, 비관에 잠기기보다는 우리가 기억하고 준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질문한다. <내일도 꼭, 엉클 조>(2013), <공부의 나라>(2015) 등 인물의 구체적 사례를 통해 사회 문제를 조명해온 최우영 감독의 신작이다.

 

 

1989년 베를린과 지금 서울의 상황을 겹쳐보며 분단과 통일에 대해 생각해보고 사람들의 실질적 삶을 살펴보는 작업을 했다. 어떤 계기로 시작된 프로젝트인가.

2018년에 한반도 정세가 변화하고 남북정상이 도보다리를 횡단하는 일련의 사건이 벌어졌을 때, 독일 영화제나 마켓에서 만난 독일 프로듀서들과 우리가 같이 해볼 수 있는 작업이 있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마침 독일 통일 30주년을 앞두고 있던 시기에 한국에서 그런 상황이 펼쳐졌으니 말이다. 내가 이 주제를 소화할 수 있는 방식은 무엇일지 고민하던 차에, 젊은 나이에 독일 통일을 경험한 세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통일로 인한 혼란 속에서 막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던 이들의 경험과 정서를 들어보는 게 지금 상황에서 꽤 중요한 일이겠더라. 그걸 알아야 우리도 의견을 다듬고 각자의 포지션을 생각해볼 수 있을 테니까. 일단 그런 개개인의 속사정을 들여다보고 싶다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해 취재를 시작했다.

 

통일을 경험했고, 한국에 오래 거주한 독일인들로 인터뷰 집단을 꾸렸다. 섭외는 어떻게 이루어졌나.

주한 독일인의 SNS 네트워크 등에 캐스팅 콜을 올렸다. 연령대를 설정하고 한국어와 독일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았는데, 답이 많이 왔다. 기초 인터뷰를 진행한 이만 20명이 넘는다. 회의를 통해 최종 세 명에게 포커스를 맞췄다. 한국방송통신전파진흥원의 지원을 받아 영화 본편에 들어가지 않은 작은 에피소드를 숏클립으로도 만들었다. 다양한 작업을 동시에 진행했다.

 

영화에는 안드레아스, 마크, 소냐가 등장한다. 서독, 동독 등 출신이 다르고, 직업도 다양해서 평소 쉽게 접할 수 없던 이야기가 풍성하다.

마크는 우리 팀에서 프로덕션 매니저로 함께 일해 온 동료다. 동독 사람이라 정서가 좀 다르다는 걸 평소 느껴왔고, 북한 사람들을 잘 이해하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너무 가깝고, 연출 의도를 이미 많이 알고 있어서 처음엔 인터뷰이로 섭외하지 않으려고 했다. (웃음)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마크만 한 인물이 없더라. 실제로 서울에 사는 동독 분들이 그리 많지 않다. 결국 마크 이야기를 담으면서, 30년 전 펜팔을 주고받은 서독 친구를 찾아가는 여정까지 따라가게 됐다. 피아니스트인 안드레아스는 교수로 재직 중이다 보니, 어린 한국 친구들과 대화도 많이 하고 그 세대를 잘 아는 특징이 있었다. 또 예술가라 그런지 본인 감정을 음악으로 표현해주기도 했다. 소냐는 어머니가 파독 간호사인 하프 코리안이다. 그래서 독일에 살 때는 본인을 독일인으로 여기고 살았는데, 프랑스에서 대학 다닐 때는 다들 자기를 한국 사람으로 봤다더라. 이게 뭘까 싶어 한국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거다. 정체성에 관한 고민을 들려줄 수 있는 인터뷰이였다. 또 수원시의 NPO에서 한국에 처음 들어와 정착하려는 외국인에게 한국을 알리는 활동을 하고 있어, 관련 촬영도 진행할 수 있었다.

<1989 베를린, 서울 Now>
<1989 베를린, 서울 Now>

인터뷰이에겐 주로 어떤 것을 묻고자 했나.

인생의 큰 사건은 몇십 년이 지나도 어제처럼 생생하게 기억할 거다. 기억은 기록과 달리 주관적이기 때문에, 그 기억의 색깔이 이후 살아온 인생에 영향을 미치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일단은 그 기억을 각자가 어떻게 묘사하는지 관찰하고 싶었다. 또 독일 통일 30주년 즈음에 한국에서 30년 전과 비슷한 상황을 맞이하는 그들의 감정도 많이 담게 됐다. 본인들 기억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시기였는데, 예전의 경험과 지금의 정서를 비교하며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무척 흥미로웠다. 처음엔 이 사람들이 한국 상황을 얘기하고 있는지, 독일 상황을 얘기하고 있는지 헷갈리기도 했다. 독일어로 답할 때와 한국어로 답할 때의 감정도 달랐다. 그런 차이를 잘 담으려고 했다.

 

최우영 감독은 1989년, 혹은 2018년의 상황을 어떻게 기억하나.

90년대 후반에 대학을 다녔다. 당시 통일관계학이라는 교양과목을 들을 때 젊은 강사분이 이런 얘기를 했다. 독일 통일되고 나서 콜 총리가 한국에서 담화를 진행했는데, 한국은 언제 통일될 것 같냐는 질문에 30년 후쯤이라 답했다고. 행정적으로 한 세대를 30년으로 보니까, 그게 실은 부정적인 답이었던 거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설마 30년 후에도 통일이 안 될까 싶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생각해보니, 정말 그 이후로 30년이 지나있더라. (웃음) 2018년에는 남북통일의 마지막 기회가 온 듯한 시류가 보였다. 이걸 어떻게든 교차시켜서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추상적으로 시작했지만, 인터뷰이들을 만나면서 방향이 차츰 만들어졌다.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으면서 새로 알게 된 사실이나 다시 생각해보게 된 점은.

완전히 새로운 걸 알았다기보다, 이분들이 실제로 겪은 이야기나 삶의 궤적을 각자의 목소리로 직접 들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본다. 취재하면서 실질적 교류가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런 점에서 마크의 편지에 많이 집중하게 됐다. 영화에 나오진 않지만 안드레아스의 딸은 재한독일인 학교를 다니고 마크의 아들은 한국학교에 다닌다. 그런데 이들이 겪는 교류의 경험이 매우 다르다. 재한독일인 학교는 탈북자 학교와 자매결연이 돼 있고, 교사들은 평양에 다녀오기도 한다. 한국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그런 경험을 할 수 없잖나. 영화에 동독과 서독의 교류 이야기가 들어있는데, 그들은 실제로 편지도 교환했고 은퇴한 이후에는 왕래도 가능했다. 그게 동독과 서독 측이 한 세기 안에 통일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면서 시작된 활동이라고 하더라. 그런데 그런지 3년 만에 통일이 됐다. 그런 작은 교류의 기억과 경험이 통일에 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1989 베를린, 서울 Now>
<1989 베를린, 서울 Now>

마크가 옥상 파티를 열어 북한 이탈 주민, 한국에서 오래 거주한 독일인 등을 초대하는 장면이 있다. 독일 통일의 기억과 한반도 정세 등에 대한 허심탄회한 대화가 오가는 자리다. 어떤 계기로 만들어진 모임인가.

재외 동포들이 한인교회를 중심으로 만나듯이, 한국에 거주하는 독일 사람들이 자주 모이는 일종의 가든파티다. (웃음) 거기에 마크가 탈북 정착민들을 초대했다. 마크와 페터가 동독 출신인데, 그들이 남한에 정착한 젊은 북한 사람들의 생각을 무척 궁금해했다. 그래서 그들을 초대해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했던 거다. 마크로서는 그들이 들려준 답변에 놀라기도 하고, 다시 생각을 정리하기도 하는 시간을 가졌다.

 

남북 관계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촬영을 진행했다. 급변하는 정세는 영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전반적인 틀은 어떻게 잡으려고 했나.

2018년부터 2020년까지 남북 관계의 변화를 큰 프레임으로 쓰되, 정치적 사안을 세세하게 따라가지는 않으려고 했다. 구체적인 변화에 따라 영화가 흔들릴 여지를 줄이고, 좀 멀리서 바라보며 통일이라는 이슈가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는 걸 상기하는 정도로 마무리하고 싶었다. 선입견에서 벗어나서 진영과 관계없이 모여 얘기할 기회가 만들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작업했다. 팬데믹이 끝나고 해외 촬영이 가능한 상황이었다면, 1년 정도 더 프로덕션을 진행해볼 수도 있었을 거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지는 않아서, 처음 생각했던 의도와 메시지를 살리는 선에서 이렇게 정리하게 됐다. 하노이 회담이 드라마틱하게 끝났을 때, 마침 촬영 중이었다. 그때 안드레아스가 방에 들어가서 피아노를 치더라. 감정을 음악으로 표현한 거다. 그게 베토벤의 월광이었고, 영화의 엔딩으로 썼다.

 

영화를 마무리한 소감은.

통일이라는 주제가 유효한 시간이 얼마 안 남은 것 같다. 그걸 다시 상기해보는 기회가 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작업했는데, 많이들 무던해졌다는 생각에 씁쓸하기도 하다. 영화에서도 드러나듯이, 우리 일인데도 통일에 관해 주로 말하는 건 외국 사람들, 외신들이다. 그런 큰 아이러니를 던지고 싶었다.

 

다음 작업은 무엇인가.

함께 제작사를 운영하는 부인 하시내 프로듀서가 연출하고 있는 작품이 있다. 아르헨티나 법원에서 오랑우탄을 비인간 인격체로 인정하면서 생긴 일을 촬영 중인데,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새로 정립하려는 시도를 다루는 영화가 될 것 같다. 해외에서 마무리 취재를 하고 내년에 완성하는 게 목표다.

ⓒ이영진
Festival
천진한 호기심
SIFF 2024 <허밍> 박서윤
글 손시내 사진 이영진
2024-11-30
Festival
아무렇지 않게
SIFF 2024 <환희의 얼굴> 정이주
글 손시내 사진 이영진
2024-11-29
Festival
웃기는 영화, 무해한 남자
SIFF 2024 <인서트> 남경우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2024-11-29
Festival
나도 내가 궁금해
SIFF 2024 <3학년 2학기> 유이하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2024-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