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나이 선녀님>은 노년에 이르러 인생의 전환점을 맞은 한 여성의 꿈과 이별에 관한 영화다. 강원도 삼척의 깊고 깊은 산골 마을에 사는 임선녀 씨는 몇 해 전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지내고 있다. 이제 일상을 나누는 가족은 없지만, 선녀 씨는 하루하루 바쁘다. 아침저녁으로 소를 돌보고, 거금의 택시비를 내고 읍내 문해교실에 다니며 열심히 공부한다. 일하고 숙제하며 부지런히 지내면서도, 배운 것 없이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기에 꿈이 없다고 말하는 선녀 씨. 하지만 카메라에 비치는 그녀는 지치지 않고 꿈꾸는 사람이다. 선녀 씨는 남편의 유언으로 인생 첫 글공부를 시작해 이제는 졸업을 앞두고 있다. 또한 18살 때부터 남편과 함께 살았던 집을 떠날 결심을 하고, 집을 새로 짓기 시작한다. 얼추 모양새가 갖춰진 후에는 인부들 사이에서 직접 못질까지 할 정도로 기운차다. 선녀 씨의 맑은 얼굴과 기분 좋은 활기가 스크린을 가득 채우지만, 영화는 그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애틋함과 슬픔까지 전부 한 사람의 삶이라며 끌어안는다. 2002년부터 다양한 방송 다큐멘터리를 연출했고, 영화 작업으로 옮겨가 <강선장>(2012)과 <선두>(2016)를 만든 원호연 감독의 세 번째 장편 다큐멘터리다.
줄곧 인물을 중심에 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이번 만남은 어떻게 시작됐나.
2017년 말에 성인 문해, 그러니까 글을 배우는 어르신들 이야기를 찍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이듬해 2월부터 취재를 시작했다. 어떤 얘기를 하겠다는 기대 없이, 일단 현장을 파악하자는 개념으로 들어갔다. 워낙 비슷한 소재의 작품이 많기도 하고, 제한적인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고민이 많았다. 그렇게 반년 정도 숙성하는 시간을 거치며 강원도에 있는 여러 학습장을 계속 돌아다녔다.
강원도를 택한 이유는.
우선은 전국을 돌아다닐 비용과 시간이 없었고, 강원도가 주는 느낌이 워낙 좋았다. 산 많고 물 맑고 사람들이 순수한 느낌이 있잖나. 글을 배운다는 건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과 닿아있는 일이기도 해서, 지역을 생각했을 때 바로 강원도를 떠올렸다. 여러 사람을 만나며 취재했고, 세 분 정도는 좀 더 가까이에서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하지만 크게 진전되지는 않던 차에 1년이 더 흘러 선녀 어머니를 만났다. 그러면서 스토리가 아예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됐다. 처음엔 강원도에 살며 글공부를 열심히 하는 분들의 이야기 정도로 생각했는데, 선녀 어머니의 독특한 스토리를 만나게 된 거다. 그 이후 1년 반 정도 촬영과 편집을 했다.
인연이 곧장 한 편의 영화로 이어지는 게 쉽지는 않았을 텐데, 어떻게 진행됐나.
다큐멘터리 작업을 해오면서 느끼는 건데, 운명이란 게 있는 것 같다. 일단은 내 눈에 선녀 어머니의 남다른 면이 계속 보였다. 나무로 된 옛날식 축사에서 혼자 소를 키우시는데, 그런 모습을 전에 별로 본 적이 없으니 참 신기하더라. 어머니한테 제가 다큐멘터리 찍는 사람인데, 어머니를 좀 찍을 수 있겠냐고 물었다. 보통 그런 말씀 드리면 고민을 많이 하시고, 삼고초려하는 상황도 많이 발생하는데, 선녀 어머니는 정말 흔쾌히 허락해주셨다.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었던 분이었고, 진행도 너무 순조로웠다. 나와 출연자가 딱 만나는 지점이 처음부터 있었던 거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주인공의 엄청난 활동성이다. 나무도 잘 타시고 담벼락에도 훌쩍 올라가신다. 호기심도 왕성하시고. 감독이 보기에 임선녀 씨는 어떤 사람인가. 영화에는 어떤 점을 담고 싶었나.
어떻게 보면 너무 소녀 같은데, 또 어떻게 보면 너무 소년 같았다. 그게 정말 매력적이었다. 순수하고 청정한 느낌이 있고 분명 수줍어하실 때도 많은데, 나무도 잘 올라가고 못질도 잘하시니까. (웃음) 게다가 그런 인상이 전부가 아니라, 다음에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도저히 감을 못 잡을 정도로 생활력, 생존력이 강한 분이다. 그냥 보고만 있어도 정말 열심히 살아왔다는 게 느껴진다. 평생 척박한 땅을 일구며 살았고, 남편이 돌아가신 후에는 또다시 살아남기 위해 공부를 시작하셨다. 어머니가 들려주신 이야기 중에 정말 인상적이었던 게 꿈에 대한 거다. 배우지 못해서 꿈도 없었다고 하시지 않나. 그래서 이분을 보여주는 중요한 키워드로 생존력과 꿈을 생각했다. 그게 기존의 글 배우는 이야기와의 차별점이 될 수 있으리라 봤다.
촬영을 시작할 당시의 상황이 궁금하다. 집을 새로 짓겠다는 주인공의 계획도 미리 알고 있었나.
몰랐다. 소 키우고 글 배우는 정도에서 일단 시작했고, 그 얘기만 잘 담겨도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사실 집을 짓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냥 언젠가 지으시겠지 했다. (웃음) 그런데 찍는 동안 그런 일이 벌어졌고, 영화 안에 담기게 됐다. 그만큼 간절하셨던 거라고 생각한다. 누군가 재촉한다고 금방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잖나. 남편분 돌아가시고 고민을 많이 하셨던 것 같다. 내 입장에선 집 이야기로 영화가 풍성해져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 어머니 인생의 너무나 큰 변화 아닌가. 평생 살던 방향에서 다른 쪽으로 갈 기회가 생긴 건데, 그걸 찍을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렸다. 정말 강렬한 전환의 순간에 내가 들어갔다.
카메라 앞에서 이런저런 솔직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시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편안하다. 관계 맺음 없이는 불가능한 방식이다. 한편 감독의 목소리는 영화 안에서 완전히 배제돼있다.
영화 만들기 전에 방송을 오래 했는데, 주로 현장에서 질문하고 그때 나온 답을 그대로 쓰는 방식의 작업을 많이 했다. 그때 느낀 건, 질문을 하면 현장의 흐름이 끊긴다는 점이다. 그것에 대한 부담이 컸다. 영화 작업에선 내가 보는 현장의 느낌을 최대한 살리는 방법을 택해볼 수 있다. 중간에 끊고 들어가기보다는 일단 저 상황이 뭔지 일단 주의 깊게 관찰하고 온전히 지켜보는 거다. 현장에서 인터뷰를 정확하게 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걸 그대로 넣다 보면 완성도가 떨어지게 된다. 물론 느낌이 좋을 때는 질문을 던질 수도 있지만, 일관성을 지키기 위해 내 목소리는 최대한 빼고자 했다. 또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관객이 다큐멘터리의 주인공과 다이렉트로 소통했으면 하는 소망이 있었다. 주인공이 내게 얘기하는 게 아니라 관객한테 얘기하는 느낌이면 좋겠더라. 사실 어머니가 해주신 말씀이 대단히 특별한 건 아니다.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이야기고, 카메라에 담긴 모습도 마찬가지다. 세상 이야기가 다 그런데, 내 임무는 그 일상을 특별한 눈으로 보고 깊이 있게 담아내는 것, 그리고 그걸 잘 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방법을 계속 고민하는 중이다.


그럼 촬영자로서 가진 원칙이 ‘개입하지 않고 지켜보기’ 인가.
그렇다. 말 그대로 개입을 최소화하고 싶었다. 내가 개입하는 순간, 내가 보지 못한 것은 찍히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원하는 걸 찍고 싶다고 그 자리에서 덥석 물면, 그다음 것은 담을 수 없게 된다. 영화의 매력은 좋은 그림을 끊지 않고 1분이고 10분이고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게 아닐까. 방송은 그럴 수 없거든. 예전에는 겁이 나서 자꾸 다른 컷을 붙이고, 넘기고, 그림을 모을 고민만 했다. 요즘은 그 두려움을 좀 넘어서 카메라 앞의 순간을 깨뜨리지 않고 온전히 담아내는 게 중요하다는 마음으로, 더 신중해지려고 노력하면서 촬영하고 있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산의 풍경이 기억에 남는다. 전작인 <강선장>과 <선두>에서도 ‘자연과 인간’ 같은 주제를 길어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스스로 보기엔 어떤가.
자연은 내가 찍으려는 주된 그림은 아니다. 다만 주인공과 동떨어지지 않은, 그들 주변의 상황이 고스란히 담기는 거로 생각한다. 내가 찍는 대상은 어디까지나 사람이다.
오랜 시간 사람을 들여다보고 카메라에 담는 건 원호연 감독에게 어떤 의미인가.
영화를 하기 전부터 사람 이야기를 찍긴 했다. 두 달 가량 취재해서 다큐멘터리로 만드는 방송 작업을 2~3년 정도 했다. 그러면서 일단은 인물을 찍는 작업의 매력을 알게 됐다. 처음에는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모습을 찍는 게 그렇게 재밌지 않았다. 그 전에 방송하면서 워낙 신기하고 특이한 걸 많이 봤거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별걸 다 봤던 사람이 갑자기 평범한 사람들 이야기를 찍게 됐으니, 흥미가 있었겠나. (웃음) 그런데 어느 순간 그게 재밌어지더라. 공감할 수 있게 된 거다. 사람을 단독으로 만나서 평범한 얘기를 나누다가, 깊은 얘기로 들어갔다가, 이 사람이 나랑 어디가 비슷한지 생각해보기도 하고…. 그게 참 좋고 특별한 경험이라는 걸 점차 알게 됐다. 좀 더 깊이 있게 들어가 보고 싶어서 영화 작업을 시작한 거다. 한 사람을 파악하기에 두 달은 너무 짧은 시간이다. 물론 오래 찍는다고 다 아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나는 두 달 찍어봤으니 1년 찍어보면 과연 어떨까 궁금했다. 정성 들여서 오래 세공하면 어떤 느낌과 어떤 그림이 나올까 궁금해하면서 계속 작업하고 있다.


주인공 임선녀 씨는 영화를 보셨나.
삼척 동네에 작은 영화관이 생겨 시사회를 하려고 했는데, 코로나 4차 대유행으로 모든 게 멈추면서 보여드릴 기회가 없었다. 아마 영화제에서 보시게 될 거다. 마침 생신이셔서, 선물을 드릴 수 있게 됐다. (웃음)
개봉을 준비하고 있다고.
10월에 바로 개봉한다. 그래서 지금 무척 바쁜데, 기분은 너무 좋다. 앞의 두 작품은 개봉하지 못해서 주인공한테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한 분의 관객이라도 더 모으려면 내가 열심히 해야지. (웃음)
다음 주인공은 누가 될 것 같나.
아직 모르겠다. 사람을 만나야 감이 잡히고, 내 안에도 감정이 쌓이는데,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잖나. 시간이 좀 걸리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