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된 동네는 대개 회색빛을 띤다. 눈부신 미래를 약속하며 현재를 허물기 때문이다. 밤낮으로 공사 중이거나 그 공사마저 멈춰버린 스산하고 황량한 광경은 현재 한국 사회의 재개발 문제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인천 원도심을 중심으로 재개발과 재생 문제를 세심히 살펴보는 <아주 오래된 미래도시>도 그러한 잿빛 풍경에서 출발한다. 재개발 추진과 새 아파트 건설은 추억과 정감이 가득한 골목길을 없애고 터의 무늬를 지운다. 동네의 기억은 점차 사라진다. 하지만 영화는 상실에 빠져들거나 저들의 행태에 분노하는 대신, 오래된 건축물을 되살리고 도시 재생을 고민하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인다. 그렇게 만난 이들은 근대 개항도시 인천의 오래된 건축물에 숨결을 불어 넣고 도시를 정말로 빛나게 할 방법을 찾기 위해 하루하루 노력한다. 건물의 건축적 가치를 보존하면서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도록 카페나 갤러리로 공간의 성격을 바꾸고, 도시공간에 작동하는 권력의 성질에 대해 함께 고민한다. 사라지는 동네를 기록하기 위해 시작된 촬영은 점차 공간의 미래를 꿈꾸는 데까지 나아간다. 제13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한국경쟁 부문 상영작이다. <션샤인 러브>(2013)에서 불안한 청춘의 사랑을 그려낸 이후, 고향으로 시선을 돌려 첫 다큐멘터리 연출작을 완성한 조은성 감독을 만났다.
인천에 근거하는 창작집단 일취월장에서 활동한다. 설명을 덧붙여준다면.
<아주 오래된 미래도시>를 찍고 나서, 도시 재생에 관해 더 자세히 얘기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엔 도시 재생과 공간을 소개하는 정도였다면, 다음 다큐멘터리에선 인천을 기반으로 재생 건축을 실천하는 이의중 건축가의 작업을 좀 더 면밀히 들여다볼 예정이다. 일취월장은 그런 흐름 속에서 제작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만들어졌다. 인천은 내가 나고 자란 곳이다. 알고 보니 이 도시에 생각보다 조명할만한 소재가 많더라. 인천상륙작전 당시 희생당한 민간인들이 많은데, 그런 역사적 사건도 더 조사해 보고 싶다. 인천이 한국의 LA라고 불리던, 메탈밴드들이 모여 있던 시절 얘기는 어떤가. 나도 예전에 인천에서 밴드를 한 적 있고. (웃음)
메탈밴드였나. (웃음)
그 정도 실력은 안 된다. 소프트 록, 모던 록을 했다. (웃음)
극영화를 연출하다가 도시재생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작업을 시작한 계기는.
인천 중구에 예술가들이 많이 모여 산다. 그들이 신흥동을 기록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내게 영상 작업을 제안했다. 당시 29층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동네가 사라져가고 있었다. 적산가옥과 7~80년대 한국식 이층주택들이 그대로 남아있고, 영화 촬영도 많이 하러 오는 예쁜 곳이었는데, 가봤을 땐 이미 철거가 많이 진행된 상태였다. 그곳을 그냥 기록하기보다는 따로 작업해보고 싶어 동의를 구하고 기획안을 작성했다. 시작은 사라져가는 지역에 대한 작은 동네 다큐였다. 그런데 진행하다 보니 한계가 있더라. 그래서 고민하며 둘러보니 주변에 다른 문제가 꽤 많았다. 바로 건너편 인천항도 폐쇄를 앞두고 재개발 문제로 시끄러웠고, 바로 옆 싸리재라는 동네도 거리를 새로 조성하는 과정이 순탄치 않아 보였다. 이왕 할 거면 좀 더 포괄적인 얘기로 가보는 게 좋겠다 싶어서 그런 이야기들도 담게 됐고, 일본에서 재생 건축을 공부한 이의중 건축가의 얘기를 듣고 일본에도 가게 됐다. 동네에서 시작해 점점 넓어진 거다.
나고 자란 인천에 대한 기억과 정서는 어떤 것인가.
다들 비슷할 텐데, 동네에 대한 정서가 있는 것 같다. 주로 주택에서 자란, 혹은 주공아파트나 낮은 아파트를 익숙하게 여기는 세대가 가진 어린 시절 기억이랄까. 내가 70년대 생인데, 인천에 살았던 내 또래들은 대부분 그 동네에서 중, 고등학교를 나왔다. 그러다 보니 일단 동네에 대한 향수가 있다. 인천 중구에는 아직도 근대 건축물을 비롯한 옛 가옥이 그대로 남아있는 곳이 많다. 거기에 역사적 이야기들도 많은 곳이라, 요새는 알면 알수록 새로운 동네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도시 재생, 재개발 문제에 원래도 관심을 두고 있었나.
실은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영화를 다 완성하고 나서 내가 왜 이걸 찍었을까 고민하게 되더라. 원래 관심 있던 소재가 아니었으니까. 아마 집에 대한 상실감이 내 안에 남아있어서 그런 것 같다. 나 또한 어려운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집을 떠나야 했던 경험이 있다. 그 이후에 내 집을 가져본 적이 없기도 하고. 그런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들이 작용해서 이런 영화를 찍게 된 게 아닐까 한다.
처음 ‘동네 다큐’로 시작할 때 어떤 형태를 생각했고, 또 어떤 부분에서 한계를 느꼈던 건가.
원래는 신흥동에 남아계신 분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고, 제작 지원을 받게 돼서 요코하마에 가보자 정도로 기획을 했다. 요코하마도 항구도시인데 창고나 집이 모범적으로 보존돼있는 곳이라 견학해볼 만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일단 신흥동에 남아계신 분들이 별로 없었다. 또 그 지역만 얘기하기에는 인천 원도심 자체가 겪고 있는 재생, 재개발 문제가 훨씬 넓었다. 게다가 요코하마도 기존에 인천에서 활동하던 분들이 많이 가본 곳이었다. 그래서 인천 지역에서 도시재생 운동을 하는 분들을 만나게 되고, 요코하마보다 덜 알려진 쿠라시키와 오노미치에 가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도시 재생이라는 키워드와 각각의 관련을 맺고 있는, 다양한 위치의 정말 많은 인터뷰이를 만났다. 어떤 질문을 던지며 대화하려 했는지, 어려운 점은 없었는지 궁금하다.
처음엔 알려진 분들 위주로 만났고 대화 내용도 재개발, 내항개발 등 크고 굵직한 이슈에 중심이 가 있었다. 그런데 몇 달 정도 진행하다 보니 처음 하고 싶던 얘기, 그러니까 집에 관한 얘기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인터뷰를 다시 진행했다. 버려진 공간을 어떻게 되살리고 운용하고 있는지 그 과정에 대한 질문에 집중하면서 대화를 이어갔다. 영화에 다 들어가진 않았지만, 인터뷰이만 해도 50명이 넘는다. 일본의 지역 자본가들이나 인천에 들어서는 아파트 개발업자까지 인터뷰했으니까. 그런데 더 파고들기엔 정보의 한계도 있고, 전체적인 톤과 잘 맞지 않아 최종 편집하면서 빼낸 부분이 많다. 아마 다음 작업에서 더 집중적으로 다뤄볼 수도 있겠다.
일본의 사례가 정말 흥미롭더라. 30년 동안 꾸준히 한 도시의 재생을 일궈내고 있는 건축가들의 이야기처럼 평소에 잘 접할 수 없었던 귀한 정보가 담겼다.
나 또한 그런 부분에 대해 지식이 많았던 게 아니고, 찍으면서 공부했다는 표현이 딱 맞을 것 같다. 쿠라시키는 5~6백년은 된 동네인데 지금도 사람이 다 살고 있다. 인천이나 군산처럼 그곳도 개항 도시지만, 다른 게 있다면 이벤트와 관광보다 거주가 우선이라는 점이다. 건축가 여섯 분이 한 집씩 고치다 보니 30년간 몇백 채를 손보게 된 건데, 그러면서 예전에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고 가정을 꾸리면서 동네가 자연스럽게 알려지고 사람들이 점점 들어오게 됐다. 오노미치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사는 게 우선이다. 그들은 빈집, 버려진 건물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고민할 때, 관광이나 축제가 아니라 거주를 먼저 떠올린다. 물론 그 과정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일본 촬영을 하고 다시 한국에 들어왔는데 역시 이벤트가 너무 많더라. 그게 아니면 아파트를 짓는 거지.
듣고 보니, 이 영화를 공부하고 견학하며 알게 된 정보를 다른 이들과 나누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겠다.
자세히 몰랐을 때는 이 문제가 마냥 커 보였는데, 들여다보니 이렇게 자생적으로 도시 재생을 고민하고 실천하는 분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영화도 그런 흐름을 따라 구성하려고 했다.
경우에 따라선 날 선 시각을 좀 더 드러내거나, 전문가들의 설명을 추가하는 방향을 고려해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고민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하지만 더 들어가기에는 훨씬 많은 취재와 자료가 필요했고, 그걸 다 끌고 갈 역량도 부족했다. 그런 것들을 자각하면서 애초에 하고 싶었던 이야기, 처음 가졌던 의문에 초점을 맞추려고 했다. 이 좋은 곳이 왜 사라지나, 어떻게 보존해야 할까, 그걸 위해 지금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이 알려주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을 하나씩 던지는 거다. 사람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곳곳에 ‘인천콘서트 챔버’의 음악회 영상을 삽입했다. 한국의 근대음악을 감상하면서 인천의 역사도 공부할 수 있는 현장이다.
인천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관련된 노래를 들려주는 독특한 형식의 콘서트다. 역사는 정체성에 관한 것이기도 해서 영화에 넣고 싶었는데, 역사학자분들을 인터뷰하는 것보다 이런 방식이 더 효과적일 수 있겠더라. 거기다 근대 노래를 발굴해서 연주와 함께 노래도 들려주니까, 리듬도 만들고 중간에 쉬는 느낌도 들 것 같았다. (웃음)
인터뷰이들은 개별 건축물의 재생을 넘어서 도시 재생을 말하며, 다음 세대를 생각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자연히 생태나 환경 등의 이슈를 떠올리게 된다.
사실 재생이 중요하고, 무작정 다 허물어버리는 게 나쁘다는 건 누구나 아는 말이다. 그런데 허물지 않고 남겨둬야 하는 근거가 뭔지에 대해서는 아마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거다. 이의중 건축가가 들려준 얘기가 그 대답이라고 본다. 도시 공간은 지금 나만 쓰는 게 아니라 내 이전에도 썼고 이후에도 쓰는 거니까, 공간을 소비하지 않으면서 잘 이용하고 다음 세대가 그곳에서 또 그만큼의 가치를 얻을 수 있게 잘 넘겨주는 게 중요하다는 거다. 그게 바로 재생이 아닐까.
‘아주 오래된 미래도시’라는 제목은 어떻게 지었나.
작업 초기에 어떤 분이 인천역 쪽에 가면 다 찢어진 인상적인 플래카드가 하나 있다고 말씀해주셨다. 거기 ‘미래도시 인천’이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그걸 인용해보면 역설적인 의미를 전달할 수 있겠더라. 아파트만 지어놓으면 미래도시인가? 싶기도 하고. (웃음) 한글 제목은 그렇게 짓고, 영어 제목은 ‘원도심 이야기’(A Tale of Old Cities)로 붙였다.
최근 두 번째 극영화를 완성했고, 작업 중인 다큐멘터리도 두 편이 더 있다고.
무작정 영화가 좋아서 만들기 시작했는데,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계속 고민하고 찾아 나가는 과정에 있는 것 같다. 첫 영화처럼 두 번째도 내 경험에서 시작됐다. 30대 초반에 단편 영화 찍고 빚이 너무 많아서 2년 동안 공장 경비로 일한 적이 있다. 별로 좋지 않았던 그 시기의 경험을 가져와서 이야기를 만들어볼 수 있을 것 같아 시나리오를 썼고, 지금은 후반 작업을 마무리했다. 부상으로 운동을 그만두고 공장에서 일하는 축구선수가 사랑을 만나면서 자신을 찾아가는 얘기다. 주인공 이름은 ‘복서’, 제목은 <낭만적 공장>이다. 도시 재생에 관한 것 외에 우리나라 재즈 1세대 이야기를 다루는 다큐멘터리를 또 하나 준비 중이다. 촬영은 꽤 오래 했는데, 원래 주인공으로 생각했던 박성연 선생님께서 작년에 돌아가셔서 방향을 틀었다. 아직은 숙제처럼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