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WFF 2021 Daily 08.30
남궁선·조예슬 인터뷰, 주요 상영작 프리뷰
리버스 / Festival / 2021-08-29

-----Interview 1------------------------------------------------------------------------------------------------------------

"최고로 바보 같은 캐릭터를 만들자!"

<십개월의 미래> 감독 남궁선 

남궁선 ⓒ이영진

미래(최성은)는 정확한 논리에 따른 결과 도출을 원한다.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자이자 ‘뼛속까지 이공계’인 미래에게 임신은 ‘로직’이 붕괴한 의문투성이 사건이다. 아무리 회로를 점검해봤자 돌이킬 수 없고, 끊임없이 질문하지만 누구 하나 명석한 답변을 내놓지 않는다. 임신이라는 경험을 치러내는 십 개월 동안, 미래는 대체로 혼자다. 부모는 결혼을, 남자친구는 모성을, 회사는 퇴사를 요구한다. 휘몰아치는 변화 속에서 미래를 잃어가던 미래가 흐느낀다. “망가졌어요, 하나도 빠짐없이.” <십개월의 미래>는 임신을 낭만적으로 포장하지도, 막연한 공포로 마냥 내몰지도 않는다. 대신 벼락 같은 상황에서도 자기만의 최선을 찾아 나가는 미래의 뒤를 늦지 않게 따라갈 따름이다. 미래는 제 몸을 기습한 아이에게 축복 대신 “카오스”라는 이름을 붙인다. 혼돈에서 태어난 새로운 우주는 어떤 모습일까. 단편 <세상의 끝>(2007) <최악의 친구들>(2009) <남자들>(2012) 등을 연출하고, 8년 만에 첫 장편을 선보이는 남궁선 감독을 만났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관객과 만나기를 오래 기다렸다는 감독에게 미래를 품었던 시간에 관해 물었다.

 

제목을 <십개월>에서 <십개월의 미래>로 수정했다. ‘미래’라는 단어를 주인공 이름으로만 사용했을 때보다 중의적 의미를 훨씬 강조한다.

별다른 의미 부여 없이 그저 ‘어떤 시간에 관한 이야기’로 정리하자는 의도에서 ‘십개월’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근데 개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제목이 너무 무심하게 느껴진다며 바꾸자는 의견이 나왔다. 내가 봐도 좀 무미건조하고. (웃음)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많았다. 누군가는 ‘이런 십개월’이라는 제목을 추천했는데, 어떤 말투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뉘앙스가 전혀 달라지더라. 그런 지점을 고려하는 게 어려웠다. 후보 중 하나였던 ‘십개월의 카오스’도 의도와는 다르게 부정적인 의미를 만들어낼 것 같았다. 결국 고민을 거듭한 끝에 ‘십개월의 미래’로 결정했다.

 

새로운 이름으로 찾는 첫 영화제이자 개봉 전에 방문하는 마지막 영화제가 되지 않을까 싶다. 연출작을 들고 서울국제여성영화제를 찾는 건 처음이라고. 

굉장히 기쁘고 반갑다. 여성 연출자가 만든 작품이라고 해서 모두 여성영화제에 초청받는 건 아니지 않나. 결국 주제가 맞아야 하는데, 그동안 상영 기회가 찾아오지 않았다. 속으로 ‘아니, 나도 여성주의자인데 무슨 오해가 있나?’ 했지. (웃음) <십개월의 미래>는 여성에 관한 이야기이자, 어떻게 보면 그간 사각지대에 놓였던 이야기 같기도 하다. 우리는 결혼하지 않을 권리, 낙태할 권리조차 없어서 아직도 싸우는 중이지 않나. 그러다 보니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여성의 이야기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을 두지 못했던 것 아닌가 싶더라. 결혼과 임신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무척 의아했다. 나만의 경험이 아닐 텐데, 왜 비슷한 이야기를 접할 수가 없을까?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 적절한가? 그러다 ‘아, 지금까지 이런 그림이 없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존 작품에서 임신한 여성은 대부분 현실적인 캐릭터로 나오고, 어머니는 처음부터 어머니로 태어난 사람처럼 묘사된다. 임신 상태의 철없는 여성 캐릭터를 쉽게 만날 수가 없는 거다. 그때부터 마음이 복잡했다. 내가 만들어야 할 것 같은데, 너무 만들기가 싫어서. (웃음)

 

만들기 싫은 이유는 뭐였나.

어려운 주제일 거라고 짐작했고, 역시나 어려웠다. 솔직히 이 정도로 오래 작업할 줄 몰랐다. 빨리 찍고 다음 작품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조차 만만치 않더라. 미래가 왜 낙태를 안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냥 낳으면 되는 걸 왜 저렇게까지 고민하느냐는 사람도 있었다. 읽는 사람마다 반응이 극과 극이었고, 그만큼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주제였다. 게다가 내가 좋아하거나 꾸준히 만들어 온 장르도 아니었다. 나는 영화에서 주로 철없는 청춘을 다뤘고, 액션 영화처럼 좀 더 구조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장르를 좋아한다. 근데 <십개월의 미래>의 경우는 진지하게 담아야 할 메시지가 있다 보니, 원하는 대로 끌고 가기가 어렵더라.

 

외계나 지구 종말을 언급하는 대사처럼 중간중간 감독의 전작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 있다. 

처음에는 더 자유롭게 찍고 싶었는데. 결국 내가 가장 싫어하는 한국식 가족 드라마로 가야 하나 싶어서 답답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때는 내가 이 이야기를 안 하면, 다른 사람도 못할 것 같아서 무서웠거든. 왜 임신한 여성에 관한 이야기가 없는지 상상해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 ‘작업하고 싶은 사람은 똑똑해서 임신을 안 하나 보다. 어쩌다 임신한 사람들은 너무 힘들어서 이 작업을 해내지 못하거나, 아니면 나와 마찬가지로 다루려는 감정 자체가 너무 복잡해서 엄두를 내기가 어려운가 보다.’ 그게 참 불편했다. 영원히 어둠 속에 남겨둘 수는 없는 이야기 아닌가.

 

판도라의 상자를 연 셈이다.

조금 기다려볼 걸 그랬다. 2015년에 <십개월의 미래>를 처음 구상했는데, 그때만 해도 비슷한 주제를 다룬 작품을 찾기 어려웠다. 지금은 ‘어머니 됨’에 관해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고, 관련 도서와 영화도 많다. 이렇게 새로운 세상이 올 줄 몰랐다. (웃음)

<십개월의 미래>
<십개월의 미래>

세상이 달라졌다고 해도, <십개월의 미래>가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어떤 여성에게는 본인이 상상하는 최악의 상황이 임신일 수 있는데, 미래는 그 안에서 제 방식대로 최선의 답을 구하는 인물이다.

임신을 자랑스러워하고, 꿈꾸는 여성도 있다. 반응이 여러 갈래로 나누어질 수밖에 없는 주제다. 그게 영화의 재미 요소 중 하나인 것 같다. 다양한 감상을 듣는 과정에서 “이해가 안 된다”라는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게 됐다. 어쩌면 그건 이해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해를 거부하는 태도 아닐까? 이해하려고 들여다보면, 보기 싫은 것이 자꾸 나오니까. 보기는 싫지만, 진실인 것.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던 건가. 

어떤 소설가가 쓴 표현인데, 픽션은 타인을 보는 창문이자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하더라. 남과 나를 함께 볼 때, 더 많이 이해하고 새로운 걸 경험할 수 있다. 그렇게 세계가 확장되는 과정에서 누군가는 자기 세계를 보여줘야 한다. 의무까지는 모르겠지만, 당시엔 나 아니면 아무도 이런 영화를 안 만들 것 같았다. 설령 만들어도 나처럼 경박하게 만들지는 않을 듯했다.  

 

미래가 남자친구 윤호에게 “난 한 번도 쉽게 말한 적이 없는데 왜 그 무게를 몰라!” 외치는 장면이 떠오른다. 철없는 모습을 지닌 캐릭터인데, 자칫 가벼운 인물로만 받아들이면 어쩌나 걱정하지는 않았나.  

철이 없어도 진지할 수 있다. 세상을 몰라서 좌충우돌하지만, 그렇다고 고민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좀 더 관용적으로 여성 캐릭터를 바라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워낙 불평등에 시달리며 여러 피해를 경험하기에, 대다수 여성 캐릭터는 굉장히 무결하게 그려지고는 한다. <십개월의 미래>를 연출하면서 ‘최고로 바보 같은 애를 만들자!’고 생각했다. 정말 바보 같은, 한심한 버전의 나. 간혹 미래에게 직관적으로 불편함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어쩌면 그건 여성에게 허용하는 범위가 훨씬 작다는 걸 보여주는 반응 아닐까. 여성은 완벽을 요구받는다. 거기서 벗어나면 불편해하고, ‘비호감’이라고 부른다. 남자들은 늘 그러면서. (웃음) 일부러 부족하고 모자란 캐릭터를 만들어보려고 했다.

 

안정적인 직장을 관두고 스타트업에서 영혼을 ‘갈아 넣는’ 프로그램 개발자라는 직업 설정도 흥미롭다.

초고에서 미래는 작가 지망생이었고, 윤호는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는 회사원이었다. 그런 세팅으로 가다 보니, 이야기가 너무 복잡해지더라. 판단보다는 경험이 중요한 영화이고, 미래의 감정에 이입시키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좀 더 단순하고 보편적으로 풀어내야 했다. 미래는 코딩을 하듯 사고하는 인물이다. 자신의 논리 구조에서는 문제가 발생하면 해결해야 하는데, 임신하고 보니 어떻게 가도 오류가 뜨는 상황인 거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솔루션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게 있을 리 없고. 아이러니를 보여줄 수 있는 설정이라고 봤다.

 

최성은 배우의 또렷한 에너지와 다채로운 표정이 돋보인다. 카메라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 기세 좋게 움직이더라.

시나리오에서는 꺼벙한 ‘너드’에 가까웠다. 얼굴만 봐도 무슨 생각하는지 전부 알 것 같은 사람. 그러다 성은 배우를 만났는데, 내가 생각했던 미래와 정반대인 거다. 속을 전혀 모르겠더라. 근데 에너지가 어마어마했다. 연기하고 싶다는 욕망이 엄청났고, 어디든 갈 준비가 된 사람처럼 보였다. 어쩌면 미래에게 필요한 건, 저렇게 돌진하는 에너지가 아닐까 싶더라. 일단 직진해서 우당탕 헤쳐나가는 힘. 얼굴도 매력적이었다. 단단한 이미지인데, 나이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16세라고 하면 16세처럼 보였고, 30세라고 해도 그렇게 믿을 듯했다.

 

친구로 나온 유이든, 산부인과 의사 역을 맡은 백현진 배우도 눈에 띈다. 애초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정해둔 것처럼 잘 어울리더라.

영화 속 의사는 특이한 캐릭터라고 생각했다. 특이한 모습을 만들어내기보다는, 처음부터 특이한 사람을 캐스팅하면 좋겠더라. (웃음) 백현진 씨가 떠올라서 연락했고, 기대한 만큼 독특한 느낌으로 표현해줬다. 미래와 의사의 관계에서는 외로움을 보여주고자 했다. 기댈 곳 없는 미래 앞에서 의사는 과학자 같은 입장을 고수한다. 임신 당시, 내가 느낀 사회의 태도가 그랬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결국 돌아오는 이야기는 한마디로 “네가 알아서 해라” 였거든. 근데 미래 입장에서 보면, 의사는 오히려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다. 적어도 거짓말을 할 것 같지는 않으니까. 가족이나 애인처럼 가까운 이들과는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데, 의사는 그런 면에서 자유롭다. 또 다른 아이러니다.

<십개월의 미래>
<십개월의 미래>

영화에서 십 개월이 흐르는 동안, 임신이 얼마나 복합적인 변화를 가져오는지 드러난다. 100분 남짓한 러닝타임에서 몸과 감정의 변화, 관계의 변화, 사회적 위치의 변화를 놓치지 않고 표현했다. 

만들면서 ‘10부작 드라마로 가야 하나?’ 싶더라. 아이의 성장, 산모와 아이의 유대 등까지 전부 담지 못한 점은 아쉽다. 대신 결과적으로 봤을 때, 임신을 경험하지 않은 여성이 가질 법한 불안감을 좀 더 드러낸 것 같다. 결국 시간이 없다는 것이 핵심이다. 십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무수한 변화가 몰아닥치지 않나. 갑자기 나와 세상 사이에 간극이 쫙 벌어지는데, 생각을 정리해서 판단을 내릴 만큼 여유롭지가 않다.

 

상황은 첩첩산중으로 흘러가지만, 영화는 전체적으로 밝고 유쾌한 분위기다.

웃으면서 접근하지 않으면, 너무 힘든 이야기가 되겠더라. 약간 거리를 두면서 부조리한 상황을 계속 살펴볼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절했다. 좀 가라앉을 만하면 띄우고, 진지해진다 싶으면 집중을 깨고.

 

키워드를 제시하는 챕터식 구성과 변화무쌍한 음악도 영화에 속도와 리듬감을 더하는 중요한 요소다. 특히 음악에는 196-70년대의 오래된 가요부터 모임 별과 협업한 곡까지 다양하게 사용했다.

음악은 ‘가내수공업’으로 완성했다고 보면 된다. 좀 더 멋지게 말하고 싶은데. (웃음) 사실 예산이 적다 보니, 많은 부분을 직접 소화하는 수밖에 없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음악을 만들고, 모임 별의 곡을 다시 편곡하기도 했다. 기존 가요의 경우, 우선 많이 찾아 들었다. 오아시스레코드사의 컬렉션을 들으며, 마음에 남는 곡을 골랐다. 노래 가사와 영화 속 상황이 묘하게 어울린다. 미래가 회사에서 잘렸을 때는 “사랑하다 헤어지면 어떻게 되나”, 계절이 가을로 넘어갔을 때는 “사연 많은 여인이 오네” 하는 식이다.

 

긴 시간 끝에 데뷔작을 공개했다. 관객을 만난다는 건, 작품을 놓아줄 시간이라는 뜻이기도 한데.

코로나19로 인해 출산 파티를 제대로 열어주지 못해서 아쉽다. 세상에 나가면 자기 길을 찾아가겠지만, 내 마음으로는 꽃길을 갔으면 좋겠다. 근데 뭐 알아서 크겠지, 애처럼. (웃음)

 

끝으로, 여성 창작자로서 나이 드는 경험에 관해 묻고 싶다. 계속 창작하려면 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여성 창작자는 오래 살아야 한다. 두 가지 전투를 동시에 치르는데, 병력은 똑같거든. 일단 예술이라는 전투가 있다. 작품을 만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고, 만드는 내내 자신과 싸워야 한다. 여성은 거기에 세상과의 전투까지 같이 치른다. 인생이 두 배로 느리게 흐르고, 두 배로 갑갑하다. 결국 오래 사는 수밖에 없다. 아녜스 바르다를 보면서 생각했다. 뉴웨이브의 창시자라고 할 만한 인물인데, 책에서는 항상 남성 감독부터 가르치지 않나. 자연스레 여성은 그중에 끼어 있던 사람 정도로 여기게 된다. 아녜스 바르다처럼 충분히 오래 살아야 동시대인이 되돌아보고 재발견할 기회를 얻는다. 그때 우리도 비로소 역사를 다시 볼 수 있게 되고. 사실 영화를 공개한 후, 그동안 어디 갔다 왔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았다. 근데 나는 사라지거나 멈춘 적이 없거든. 줄곧 여기서 열심히 살았고, 육아하느라 일을 쉰 것도 아니다. 그냥 불완전한 채로 이것저것 끊임없이 해왔는데, 마치 내가 사라졌던 것처럼 말하더라. 그때 다짐했다. 사라지지 말자. 오래 살자.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Interview 2------------------------------------------------------------------------------------------------------------

사랑의 검은 마술 

<소금과 호수> 감독 조예슬

조예슬 ⓒ이영진

여고생 소금(성희현)의 미성숙한 사랑을 담은 <소금과 호수>는 안전한 길은 다 피해 가는 대담한 작품이다. 소금은 단짝 호수(손영주)를 사랑하고, 호수는 나이 많은 남자와 용돈만남을 한다. 소금의 엄마는 아빠 없는 소금의 미래를 걱정하며 무속 신앙에 빠져든다. 호수에게 뭐라도 해주고 싶은 소금은, 급기야 자신의 팬티를 사고 싶다는 사람과 거래를 시작한다. 인물들은 저마다의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 기꺼이 최악의 길로 빠져든다. 감독의 말에 따르면 “노력할수록 망한다.” 영화는 그들 각자의 마음을 유심히 들여다보려 애쓰면서, 그처럼 나쁜 선택과 결과들 속에서 가능한 성장의 모습을 탐색한다. <소금과 호수>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주관하고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이 주최하는 ‘필름×젠더’의 3회 공모작이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사랑’이 최대의 관심사라는 조예슬 감독을 만났다.

 

<소금과 호수>는 연출자의 취향이 궁금해지는 작품이다. 학교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있는데, 어떤 영화를 좋아했고 또 좋아하는지.

취향은 그 시기에 누굴 만나느냐에 따라 매번 달라진다. 사랑하는 사람들한테 언제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소금과 호수>를 쓰고 만들던 시기에는 컬트영화를 많이 봤다. 슬래셔 무비나 70년대 일본 영화도 즐겨봤고. 당시에 곁에 있었고, 또 스태프로 참여해주기도 한 친구가 <서스페리아>를 좋아했다. (웃음)

 

이전에 단편 <이렇게 차오르고 완전할 수가>(2019), <북향으로 난 창>(2021)을 만들었다. 시놉시스를 읽어보니 줄곧 감정을 들여다보는 작업을 해온 것 같더라. 이어지는 관심사는 무엇인가.

사랑하는 여자들, 사랑이 끝나고 성장하는 여자들에 관심이 많다. 나 또한 사랑으로부터 성장했다고 믿는다. 나한테 사랑을 준 사람들의 일부가 여전히 내게 남아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그래서 그런 것들을 어떻게 하면 잘 담아낼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글을 쓰고 작업한다. <이렇게 차오르고 완전할 수가>는 애인과 헤어지고 수영장에 다니는 여자가 새로운 남자를 만나는 내용이고, <북향으로 난 창>은 누군가에게 받은 사랑은 본인의 언어로 바꿔서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준다는 내용이다. 사랑을 잘 표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필름×젠더’는 올해 3회째인 공모사업이다. 공모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그 역시 그 시기에 사랑했던 친구와 관련돼있다. (웃음) 가깝게 지냈던 친구와 한창 여성영화제에 출품되는 영화들에 관해 이야기했던 시기가 있다. 사실 나는 젠더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아니고, 실수도 잦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친구가 그런 부분에 있어서 나를 많이 끌어줬다. 그 영향으로 생애 처음 공모전에 지원하게 됐는데, 운 좋게 기회를 얻게 됐다. 심사 자리에서, 앞으로도 한 여성이 사랑으로부터 성장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말했던 게 기억난다. 사랑이 부족한 이 시대에 그런 이야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뚜렷한 주제 의식과 이야기를 길어내기보다 인물의 내밀한 감정에 집중하는 영화다. 어떻게 시작된 이야기인가.

유년 시절부터 20대 초반까지, 내 주변엔 늘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들이 애인 때문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정말 많이 봤다. 사실 그들과 친밀한 감정을 교류하고, 가장 시간을 많이 보내고, 외로울 때 같이 있어 주는 건 나였는데, 그럼 오히려 우리가 사랑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결국 애인들에게서 위안을 얻더라. 그걸 사랑이라고 믿는 마음이 부러웠다. 무력함도 많이 느꼈고. 그 감정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다. 그런 시기를 통과하면서, 누군가에게 받는 사랑이 그 사람이 사는 세계의 한계를 결정한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그 세계의 한계 때문에 인물들이 충돌하는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다.

<소금과 호수>
<소금과 호수>

심사위원단에서는 “청소년의 삶을 개념화된 언어가 아닌, 그들의 맥락 속에서 풀어내는 강점이 있다”고 말했다. 여고생을 바라보고 재현하는 기존의 시선과 방식에 대해 질문을 던지면서 영화를 만들었을 수도 있겠다.

일단 학교와 학원 문제가 등장하지 않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보다 중요한 문제가 많았으니까. 소금처럼 부모와의 관계도 중요했고, 좋아하는 사람과 빚는 갈등도 무척 큰일이었다. 또 이들의 모습이나 세계를 아름답게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소금과 호수>를 카테고리로 분류하면 범죄와도 관련이 있을 텐데, 10대 범죄를 너무 심각한 일, 무서운 애들이 저지르는 일로만 여기는 것도 경계했다.

 

<소금과 호수>를 시작하면서 가장 포착하고 싶었던 풍경은 무엇인가.

소금이 거울에 키스하는 마지막 장면. 그게 어떤 감정인지 질문도 많이 받았다. 명료하게 말하긴 어렵지만, 그때가 소금이 수많은 과정을 겪고 결국 자기를 돌아보는 자기만의 방에 있는 순간이다. 너무나 사랑받고 싶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을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이 끝에 가서 본인을 돌아보는 그 순간의 감정을 보고 싶었다.

 

두 인물의 이름을 ‘소금’과 ‘호수’로 지은 이유는.

소금은 ‘빛과 소금’에서 따왔다. 세상에 필요한 존재라는 의미로. (웃음) 그리고 소금이 같이 있을 수 없고, 무력해지는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다른 한 명을 호수라고 지었다. 소금은 사랑 때문에 용기를 내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호수는 성숙한 방식은 아닐지언정 자기 욕망에 대해 잘 알고 그때그때 해소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늘 떠날 준비를 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하지만 완전히 자유롭지 않은 그런 인물로 생각했다.

 

배우들과는 주로 어떤 논의를 통해 인물을 완성해나갔나.

나 역시 소금에 대한 이미지가 구체화돼있지 않았을 때 성희현 배우를 만났다. 배우와 소금을 만들어가는 전반적인 과정을 함께 했다. 소금의 순수한 모습을 만드는 데 아이디어를 많이 냈고, 거울 장면에서는 딱 내가 보고 싶던 모습을 구현해줬다. 소금 엄마 역할인 이주영 선배와는 엄마가 신앙에 의지하는 모습을 그려내기 위해 고증을 열심히 했다. 또 인물의 히스테리컬한 정도를 선배님이 많이 잡아주셨다. 손영주 배우가 연기한 호수는 감정을 명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캐릭터다. 소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좋아하는지, 정말 싫어서 그러는 건지, 확실치 않았다. 그래서 배우와 그때그때 대화를 정말 많이 했다. 영화 만들면서 한 가지로 이름 붙일 수 있는 감정이 아니라 좀 더 복잡한 감정의 결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그래서 배우들을 곤란하게 할 때가 종종 있었던 것 같다. (웃음)

<소금과 호수>
<소금과 호수>

촬영하면서도 확신하지 못하는 순간이 많았겠다.

찍어놓고 편집 과정에서 잘라낸 것도 많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인물들의 감정선을 좀 이해할 수 있는 방향으로 다듬었다. 청소년기에는 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며 호수를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로 만들었는데, 그것 자체가 오만이 아니었나 싶다. (웃음) 촬영하면서, 또 후반 작업하면서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았다. 여성 촬영 감독님과 함께 작업했는데, 대상화할 수 있는 시선처럼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들을 많이 짚어주셨다.

 

화면 구성 또한 독특하다. 강렬한 붉은 빛과 식물들의 초록색이 눈에 띄며, 장르 영화의 뉘앙스도 풍긴다.

집은 결국 엄마의 공간이다. 엄마가 빨간 조명 아래서 식물을 돌보고 있는 모습이 소금에게는 답답하게 느껴질 것 같았다. 내가 발 딛고 있는 세계지만, 여기 내 공간은 없다는 마음? 게다가 여름이라 야외로 나가도 온통 푸른 빛 아닌가. 그런 식으로 공간의 연속성을 생각했다. 말했듯이 당시 컬트영화를 주로 봤기 때문에, 미술적으로 참고를 많이 했다. 식물을 배치하면서는 태국 영화도 참고했고. 아, 빨간빛은 식물을 잘 자라게 하기 위해 세팅하는 조명에서 나오는 빛이다. (웃음)

 

영화를 마무리한 소감은.

시나리오는 이것보다 훨씬 길었고, 말했듯이 잘라낸 부분이 많다. 그래서 물론 아쉬움도 있는데, 그 과정에서 내가 했던 선택의 총합이 처음 말하고 싶었던 방향과 맞아떨어지게 나왔다. 참 감사하고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사랑 이야기는 앞으로도 이어지는 건가.

계속 사랑하는 여자들에 관해서 쓰고 싶다. 타인에게 받은 사랑을 그녀들이 다시 어떤 식으로 내뿜는지, 그 과정에서 어떻게 변하는지 보여주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글 손시내 사진 이영진 

 

 

-----Choice-------------------------------------------------------------------------------------------------------------------

섬광의 밤 Destello Bravio

발견 | 아이노아 로드리게스 | 스페인 | 2021 | 98분 | 12세 이상 | 컬러 | 극영화 

<섬광의 밤>

2021년 로테르담영화제 타이거 경쟁부문 상영작 중 가장 도발적이고 인상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세계 영화제 서킷에서 주목받고 있는 <섬광의 밤>은 스페인 출신의 여성 감독 아이노아 로드리게스의 장편 데뷔작이다. 스페인의 어느 외딴 시골을 배경으로 하는데, 이 마을은 우리가 사는 세계의 일부일 테지만, 젊은 사람들이 떠난 이곳의 시간은 정지해 있는 듯하다. 영화는 각기 다른 좌절을 겪고 있는 마을 여성들의 정적인 일상을 따라간다. 개인적 상실로 고통받고 있는 시타와 미망인이 된 후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마리아는 유령처럼 마을을 부유하며 사람들은 만나고, 마을의 노부인들은 차와 디저트를 먹으며 끊임없이 수다를 떤다. 예전엔 화려하고 시끌벅적했을 성주간은 이제 장례식처럼 차분하고 조용하다. 하지만 노인으로 가득한 마을의 밑바닥에는 찐득한 욕망이 잔뜩 깔려있다. 거대한 섬광이 모든 걸 변화시킬 바라지만, 그저 바람일 뿐이다. 

아이아노 감독은 부모가 살았던 고향에서 7개월간 머물면서 비전문 배우들과 함께 이 작품을 완성했다. 영화는 외딴 시골 마을에 내재해 있는 두 개의 세계, 카톨릭 중심의 가부장적인 세계와 본능에 충실한 세속의 세계 사이의 상호작용을 묘사하고 보여주는 한편, 다큐멘터리 스타일과 마술적 리얼리즘, 초현실주의를 뒤섞어 이 마을이 가지고 있는 공간적 고립감과 정적인 시간적 감각을 체험케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억눌린 욕망의 흔적과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사라져 가는 가부장제의 죽음을 은유적으로 담아낸다. 엄격한 형식 속에서 신중하게 촬영된 이미지들은 단정하고 아름다운데, 몇몇 장면에서 오스트리아 울리히 사이들 감독의 작품들을 연상시키며, 정교하게 배치된 감각적 사운드는 영화를 볼 때 기억해야 할 또 하나의 감상 포인트다.

조지훈/ 무주산골영화제 프로그래머 

<섬광의 밤>

425 2021-08-30 | 19:20 - 20:58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7관

 

------------------------------------------------------------------------------------------------

성적표의 김민영 Kim Min-young of the Report Card

발견 | 이재은·임지선 | 한국 | 2021 | 94분 | 전체 | 컬러 | 극영화 

<성적표의 김민영>

친구는 본래 평가의 대상이 아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엔 특히 더 그렇다. 마음이 맞아서, 취미나 성격이 비슷해서 등등 여러 이유를 댈 수 있지만 가깝게 두고 만나는 친구가 왜 좋고 편한지는 쉽게 답할 수 없다. 하지만 여느 인간관계가 다 그렇듯, 가까운 사람에 대한 평가는 서운함을 느낄 때 생겨난다. “걔는 다 좋은데~” 시작하는 뒷말들이 그렇다. 

유정희와 김민영, 수산나, 고3인 세 절친은 졸업 후 각자의 길을 간다. 그들은 고교 시절의 우정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지만 각자 다른 생활을 하게 되면서 예전만큼 친하게 지내기가 쉽지 않다. 어느 날, 정희는 도심에 사는 민영의 자취방에 하룻밤 초대받게 되고, 정희는 고등학교 시절처럼 재미있게 놀 생각에 여행 가방 가득 놀 거리를 챙겨 들고 친구 집에 도착한다. 하지만 정작 민영의 태도는 덤덤하다. 정희와 놀 생각은 별로 없고, 그저 자기 일에 신경 쓰느라 정신이 팔려있다. 서운함을 느낀 정희는 민영의 집에서 혼자 하룻밤을 보내면서 민영에 대한 성적표를 쓰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김민영이 받아든 성적표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 제목대로 정희가 평가한 성적표 속 김민영에 대한 이야기에 가깝다. 삼행시 클럽이라는 재기 넘치는 아이디어로 시작된 영화는 시종일관 독특한 리듬의 유머 감각을 유지하며 10대의 우정과 이별하는 정희의 미묘한 감정 변화를 세심하게 담아낸다. 그리고 강하고 자극적인 드라마 장치 없이 그리고 김민영을 악인화하지 않으면서 화자의 시선 그러니까 정희의 시선을 통해 우정과 관계의 본질을 담아낸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이후 올해 개최된 국내 주요 영화제들의 단골 초청작이 된 2021년 상반기 최고의 화제작이다. 

조지훈/ 무주산골영화제 프로그래머 

<성적표의 김민영>

416 2021-08-30 | 17:10 - 18:44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6관

 

------------------------------------------------------------------------------------------------

우리의 전쟁으로 밤은 사라질지니 There will be No More Night

새로운 물결|엘레오노르 브베르|프랑스|2020|77분|15세 이상|흑백|다큐멘터리

<우리의 전쟁으로 밤은 사라질지니>

비릴리오는 전쟁이 시각 기계의 발전에 있어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라 말했다. 기동력이 뛰어나며 더 멀리 볼 수 있는 카메라의 발전은 현대 전쟁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지금의 카메라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볼 수 있게 해준다. 현대전의 군인은 적외선 카메라를 통해 어두운 밤중에도 대상을 볼 수 있다. 더욱이 이들은 드론을 통해 대상에게 직접 다가가지 않고서도 그것을 볼 수 있다.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에 주둔한 미군과 프랑스군의 드론 영상으로 제작된 엘레오노르 브베르의 <우리의 전쟁으로 밤은 사라질지니>는 비릴리오나 하룬 파로키 등의 작가들이 보여준 전쟁과 시각기계 사이의 관계를 탐구해온 작업과 맥락을 같이 한다.

영화 속 군인들은 작전이 벌어지는 실제 장소에 존재하지 않는다. 드론의 카메라 뒤에 있는 이들의 존재는 무전기로 이루어지는 대화를 통해서만 드러난다. 이들이 보는 영상은 선명하지 않다. 영상의 해상도는 대상이 들고 있는 물건이 소총인지 카메라 삼각대인지 명확하게 판별할 수 없을 정도로 조악하다. 하지만 드론을 통해 원격으로 감시와 공격을 수행하는 군인들은 촬영된 영상을 믿는다. 밤이 찾아온 전쟁을 낮으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지적 오류는 작전의 완수를 위해 무시된다. 대상에게 인지되지 않는 원격의 눈을 지닌 군인은 그것의 전능함을 믿고 작전을 전개한다. 정찰의 대상이 된 이들은 자신이 감시 대상이라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감시당하고, 공격당한다. 감시자의 눈에는 목동도 저널리스트도 총을 들고 있다.

드론 카메라 영상에는 대상을 겨냥하는 십자선이 그려져 있다. 밤을 낮으로 변환하는 카메라의 감시체계 속에서 피감시자들의 일상은 전쟁으로 변환된다. 정찰과 감시가 늘어날수록 적과 사상자 또한 늘어난다. 낮으로 변환된 미국의 밤 풍경을 담은 영화 속 한 장면은 밤의 어두움을 낮의 환함으로 변환했을 때의 환상성을 보여준다. 브베르의 영화는 밤과 낮을 뒤바꾸는 디지털카메라의 환상성이 영화의 꿈이 아니라 감시와 살육을 위해 발전하고 있음을, 수많은 증거자료를 통해 지적한다.

박동수/ 영화평론가 

<우리의 전쟁으로 밤은 사라질지니>

423 2021-08-30 | 20:00 - 21:17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5관

 

Festival
타야의 숲
<가가> 라하 메보우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2024-07-20
Festival
순리대로
<내 곁에 있어줘> 황원잉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2024-07-20
Festival
매직 아워
인디그라운드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경아의 딸> 김정은
글 손시내 사진 이영진
2024-02-01
Festival
보이지 않아도 한 발 더
인디그라운드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 장건재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2024-0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