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1------------------------------------------------------------------------------------------------------------
또박또박, 뚜벅뚜벅
<애프터 미투> 감독 이솜이·소람

<애프터 미투>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경쟁 섹션인 ‘발견’ 부문에서 상영하는 옴니버스 다큐멘터리다. 직관적인 제목처럼 ‘미투 운동(#MeToo)’ 이후를 고민하고 질문하는 작품이며, 연출로 참여한 네 감독의 다양한 관심과 시선 덕분에 풍성한 모양새로 완성됐다. 강유가람 감독의 제안으로 남순아 감독, 박혜미 프로듀서가 기획을 맡았고, 박소현, 이솜이, 소람 감독이 각자 품어온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렇게 <여고괴담>(박소현), <100. 나는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다>(이솜이), <이후의 시간>(강유가람), <그레이 섹스>(소람), 네 편의 단편이 모였다. 오프닝과 엔딩에는 1991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처음 증언한 고(故) 김학순 님의 이야기와 공직자들의 성폭력 가해 사실이 드러나며 치르게 된 지난 보궐선거의 풍경이 담겼다. 여성들의 말하기, 그 역사를 또박또박 쓰려는 단단한 마음이 영화 전반에 흐른다. 상영을 앞두고 이솜이, 소람 감독을 만났다.
동료들과 치열한 논의를 통해 <애프터 미투>를 완성했다고 들었다.
소람_ 이렇게 내용에 관한 얘기를 많이 나누며 작업한 건 처음이다. 신기하게도 질문과 피드백을 들을수록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점점 더 명확해지는 경험을 했다. 결과적으로 내가 전달하고 싶은 내용을 온전히 담을 수 있는 영화가 됐다.
이솜이_ 난 처음에는 소람 감독과는 반대로 의견을 다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편집했다. 결국 프로젝트 파일이 50개가 넘어가고 외장하드도 한 번 바꾸는 지경에 이르렀다. (웃음) 그런데 결국에는 하고 싶은 방향으로 가게 되더라. 긴 유턴을 거친 셈이다. 동료들과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모두 이로운 내용이었다. 모두가 같은 옷을 입으려 하기보다, 서로 다른 층위에서 각자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어 좋다.
프로젝트에 합류한 계기와 당시 가지고 있던 고민은 뭐였는지 궁금하다.
소람_ 2018년도에 <통금>을 만들고 나서 상근을 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작업에 대한 갈증이 생기더라. 해보고 싶은 이야기는 있었는데, 일하면서 계속 시기를 놓쳤다. 그러던 차에 강유가람 감독님을 통해 <애프터 미투> 프로젝트를 알게 됐다. 그때는 뭐든 하고 싶어서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힘든 작업이 됐다. (웃음)
이솜이_ 당시 영화 주인공인 행복 선생님과는 원래 같이 작업하기로 이야기가 돼 있던 상황이었고, 한편으로는 군대 트라우마와 한국 사회의 남성성에 관한 <이름 없음>이라는 작품을 만들면서 길이 안 보여 힘들어하던 시기였다. 이걸 어떤 식으로 돌파해봐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박소현 감독님 연락을 받고 시작하게 됐다.
‘미투 이후’에 관한 작업을 시작하며 어디에 중점을 두고자 했는지.
이솜이_ 조명받지 못하고 이슈화되지 못한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싶었다. 미투라는 전형이 있다면 거기서 소외되는 자들은 누구인가에 방점이 찍혔고, 중년 여성이 자기 얘기를 전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거칠게 하는 모습을 담아보려고 했다. 실은 그래서 ‘애프터 미투’라는 제목이 내게는 아직 크게 느껴지기도 한다.
소람_ 난 소재 찾는데 7개월 정도 걸렸다. (웃음) 처음엔 피해자다움에 관심이 있었고, 이전처럼 내 경험에서 시작해보려고 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확장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그러는 중에 ‘n번방’ 이슈나 데이트 어플과 관련한 문제가 터져 나왔다. 그걸 지켜보다가 여성의 욕망과 감정, 불쾌감 등에 대해 말해보기로 했다. 주체적으로 욕망을 드러냈다가 그 결과로 불쾌감을 얻었을 때, 여성은 왜 계속 자기 탓을 하게 될까? 그런 문제의식이 시작이었다. 미투 이후라면, 욕망을 가진 주체로서 여성에 대한 담화가 시작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100. 나는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다>는 다른 세 편과 달리 단 한 명의 개인에 초점을 맞췄다. 이전부터 계획했던 작업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시작됐나.
이솜이_ 한국여성의전화에서 운영하는 마음 치료 프로젝트인 ‘마음대로 점프!’를 촬영하며 행복님을 만났다. 가정폭력 피해 여성들이 춤도 추고 노래도 하는 프로그램인데, 자기표현을 스스럼없이 하는 행복 님의 모습을 보며 이 사람에 대해 더 알고 싶다고 느꼈다. 행복 님에게는 정말 많은 레이어가 있다. 아동 성폭력, 친족 성폭력, 교사 성폭력, 가정폭력까지. 행복 님은 그 많은 피해의 레이어 안에서 혼자 힘으로 자기를 지켜가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워낙 교집합이 많으니까, 그중 어느 하나만으로는 그분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행복 님도 그것에 대한 갈증이 있었고. 그렇다고 모든 게 딱 맞아떨어지면서 시작했던 건 아니다. 처음엔 내가 맛있는 거 사가지고 가서 그냥 같이 있는 게 좋았다고 하시더라. (웃음) 그러면서 선생님이 피해 경험을 하나씩 말해주셨고, 천천히 함께 시간을 보내며 작업이 발전됐다.
말하기를 결심하고 이것저것 노트에 적는 행복 님의 모습을 가까이 따라가는 작품이다. 영화는 주인공이 직접 말하는 것 외의 정보를 앞서 말하지 않고, 감독의 감정 또한 많이 절제돼있다.
이솜이_ 50개가 넘는 프로젝트 파일 중에는 내 목소리가 들어간 버전도 있다. 그런데 관계성이 자꾸 드러나는 게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더라. 선생님을 더 왜소하게 만든다고 해야 할까? 결국 힘을 줘야 하는 부분은 발화점이라고 생각해서,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순간에 정확히 포인트를 맞춰 편집하려고 했다. 행복 님은 꾸준히 뭔가를 써온 분이기도 하다. 처음 인터뷰할 때 두꺼운 공책 다섯 권을 주셨는데, 계속 같은 문장이 적혀있는 페이지를 보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 어떤 장에는 여성주의와 아동 성폭력 전문 서적을 필사하며 전문용어를 계속해서 써놓기도 하셨다. 계속해서 언어를 훈련하고 있던 거다. 원래는 말하는 걸 좀 힘들어하셨다. 춤추고 노래하는 것에 비해 좀 더 직접적인 방식이니까. 부담스러우면 말로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드렸는데, 선생님 역시 뭔가 말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셨던 모양이다. 행복 님이 자기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순간이 나한테 많이 와 닿았다.
완성된 영화 보시고는 뭐라고 하시던가.
이솜이_ 본인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하시고, 볼 때마다 우신다. 본인이 얘기하는 모습을 처음 보셨을 텐데, 그게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
<그레이 섹스>는 여성의 경험을 특정한 용어로 규정하려는 압력에 맞서는 대담한 작품이다. 가장 마지막에 배치되어 있되, 다음 논의의 시작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구상하기까지 오래 걸렸다고 했는데.
소람_ 시작은 내 경험이었다. 마음에 두고 있던 상대가 먼저 스킨십을 해 와서, 나름대로 그 관계를 적극적으로 해석했던 일이 있다. 그 이후에 연락이 두절됐는데, 그게 그렇게 기분이 나쁘더라. 대상화된 느낌이라고 할까. 그리고 몇 년 뒤에 미투 운동이 시작되고 나니, 자꾸 그 경험이 생각났다. 그 일을 성추행이라고 이름 붙여서 이해하려고 했다. 동시에 그게 왜 성추행이냐는 질문도 받았다. 어떤 요소들로 따져보면 그런 의문도 가질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객관적인 요소로 분명히 설명되지 않는 여성들의 감정과 경험이 있지 않나. 그동안 그것들이 제대로 조명되거나 언어화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이 얘기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인터뷰도 진행하고 편집을 쭉 했는데, 편집본을 보니 여성들의 욕망과 감정에 대한 이야기가 다 빠져있었다. 내가 가해와 피해, 폭력에만 초점을 두고 있었던 거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피해에 위계가 생기더라. 여성의 경험에는 폭력에 집중했을 때는 조명되지 않는 불쾌감이 있다. 그런 감정들을 다 따라가는 방식으로 다시 편집하면서 지금의 버전을 만들게 됐다.


감독 또한 그 과정을 따라 변화를 겪은 셈이다.
소람_ 정말 많이 바뀌었다. 실은 내 경험을 성추행이라고 확실히 말하기 위해서 발설하지 않았던 일화들도 있었는데, 그런 것들을 솔직히 이야기하면서 방향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존중할 필요가 있다는 걸 작업하면서 정말 많이 느꼈다.
순서상 편집보다 인터뷰가 먼저인데, 인터뷰이들은 이미 무척 솔직하게 욕망과 상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 것 같더라. 피해자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흩트리는 힘이 있다.
소람_ 애초에 욕망의 영역에 집중하며 인터뷰를 진행했기 때문에, 감정에 관한 질문을 많이 던지긴 했다. 어떤 욕망이 있었고, 그게 어떻게 좌절됐는지. 그 욕망이 본인에게 어떻게 돌아왔고, 어떻게 자책했는지 물어보려 했다. 인터뷰해 주신 분들이 평소에도 그 감정에 대해 항상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솔직하게 잘 말해주셨다. 그래서 나중에 내가 나름의 깨달음을 얻었을 때도 그 지점들을 잘 찾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아마 내가 그분들 영향도 많이 받았을 거다. 이 영화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사람들이 자기 경험을 의심하거나 자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다.
영화 만들기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소람_ 고등학생 때 마냥 다큐멘터리를 좋아했다. 일상의 조각을 가지고 이야기를 만든다는 게 그렇게 신기했다. ‘다큐 3일’이나 ‘인간극장’을 보던 때라, 방송국에서 다큐멘터리 만드는 일을 하고 싶었다. 어떻게 배울 수 있나 찾아보다가 ‘미디액트’를 알게 됐는데, 가보니 방송 다큐 가르쳐주는 곳은 아니더라. (웃음) 그걸 시작으로 영화를 하고 있다.
이솜이_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해서 자연스럽게 영화과에 진학했다. 그런데 권력 관계를 당연시하는 문화가 싫었고, 나는 영화를 못 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작업은 너무 하고 싶었다. 다큐멘터리라면 가능할 것 같더라. 다큐멘터리라는 장르 안에서라면 좀 더 작은 방식으로, 다양한 형식의 실험을 할 수 있겠다는 기대가 있었다.
최근 관심을 두고 있는 작업이나 주제는.
소람_ 가사노동에 관심이 많다. 이게 합리적인 분업인지 불합리한 전담인지 깊게 생각해보고 싶었다. 가사, 육아, 돌봄 노동 등에 대해 고민하는 작업을 해보려고 한다. 언젠가 나올 거다. (웃음)
이솜이_ 제목이 너무 좋다.
소람_ <양말은 누가 빨아요?>다. (웃음)
이솜이_ 일단 <이름 없음>을 마무리 짓는 게 목표다. 또 언어를 가지고 하는 작업, 정체성과 언어의 관계 등에 관심을 두고 있다.
글 손시내 사진 이영진
-----Interview 2------------------------------------------------------------------------------------------------------------
나비와 비비안이 만나서
<너에게 가는 길> 감독 변규리

첫 영화 <플레이온>(2017)으로 신생 노동조합의 일상과 새로운 도전을 유쾌하게 보여준 변규리 감독이 두 번째 다큐멘터리를 선보인다. 이번에 카메라가 향한 곳은 성소수자부모모임이라는 공동체다. 자녀의 커밍아웃을 경험한 부모와 가족, 당사자가 함께 일구어나가는 단체로서 다양한 인권 활동을 진행한다. 감독은 성소수자부모모임에서 활동하는 두 명의 엄마를 찾아간다. 둥글게 둘러앉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은 ‘FTM 트랜스젠더 한결의 엄마 나비’, ‘게이 예준의 엄마 비비안’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폭풍 같은 시간을 거쳐 진짜 내 아이를 만난 나비는 한결의 트랜지션과 성별 정정 과정에 동행하고, 비비안은 아들의 남자 친구를 집에 초대한다. 쉽지 않은 길이지만, 모임에서 만난 이들 덕분에 불행하지는 않다. 그들은 서로 고민을 털어놓고, 응원과 공감을 보내고, 나란히 서서 목소리를 낸다. “우리는 성소수자 부모입니다. 나는 내 자식이 자랑스럽습니다.” 내 아이를 끌어안은 품은 다른 아이에게도 열린다. 이제 나비와 비비안은 누구든 안전하고 행복한 사회에서 살 권리가 있다고 외친다.
3년 전에 만났을 때, 이미 성소수자의 부모님을 찍는 중이라고 했다. 차기작은 “그분들 마음의 여정을 그리는 영화”일 거라고 했는데, 그런 바람이 ‘너에게 가는 길’이라는 제목에 깃들지 않았나 싶다.
맞다, 제목은 일찌감치 정했다. 영화를 기획하는 단계에서 성소수자부모모임 창립 멤버이자 열렬한 활동가인 지인 님과 대화를 많이 나누었는데, 그분의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었다. 나한테 ‘길’은 미완성의 이미지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 계속 완성해나가는 것. 부모님들이 성소수자 당사자에게 다가가는 여정이 그와 같지 않을까 싶었다. 더불어, 단순히 너에게만 가는 길이라기보다는 부모님들 스스로 당신한테 가는 길이라는 의미도 담았다. 어느 순간 ‘이분들은 지금 자신의 이야기를 찾아가는 중이구나' 하고 깨달았다. 자식의 커밍아웃 앞에서 본인이 가야 할 길을 궁리한다는 인상을 촬영 내내 받았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4명의 주인공을 차례로 보여준다. 화장실 거울 앞에 선 한결과 일터에서 움직이는 나비, 캐나다에서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이동하는 예준과 차를 타고 떠나는 비비안. 한결과 나비는 사뭇 대비를 이루고, 예준과 비비안의 모습은 제목과 이어진다.
영화에서 커밍아웃 과정보다는 커밍아웃 이후의 삶을 그려내고 싶었다. 다만, 처음에 화두를 던지는 인물은 성소수자 당사자여야 한다고 봤다. 어쨌든 한결과 예준이 커밍아웃했기에 나비와 비비안도 이전과는 다른 삶을 상상해볼 수 있게 된 거니까. 당사자의 질문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고, 편집 초반에는 계속해서 당사자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다 연분홍치마에서 함께 활동하는 이혁상 감독이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있으면, 그걸 받아주는 사람도 필요하다”는 말을 하더라. 영화를 어떻게 시작할지 많이 고민했는데, 이혁상 감독 덕분에 좋은 오프닝 시퀀스를 만든 것 같다.
주인공은 어떻게 정했나. 한결과 예준을 만난 후에 나비와 비비안을 찾아간 것인지, 혹은 반대인지 궁금하다.
나비와 비비안을 먼저 만났다. 내가 활동하는 연분홍치마에서 성소수자부모모임과 협력하여 영화를 제작하기로 결정한 다음, 사전 취재를 6-8개월 정도 진행했다. 그때 모임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부모님을 찾아가서 생애사 인터뷰를 했는데, 왠지 모르게 자꾸 나비와 비비안이 눈에 들어오더라. 자석처럼 끌렸다고 해야 하나. 비비안은 표현력이 좋고 솔직하다. 부모님들은 아무리 내적으로 고민하는 상황이라고 해도, 인터뷰할 때면 최대한 의연하게 보이려고 애쓴다. 근데 사실 당사자를 이해하고 현실의 차별을 마주하는 일은 한 순간으로 끝나지 않거든. 다들 도미노처럼 연이어 변화가 쓸려 오는 상황을 겪고 계시는 거다. 그때마다 비비안은 감정을 솔직하게 말해줬다.


예준의 남자친구 성준을 만나기 전에 “쿨한 엄마처럼” 보이도록 이미지 트레이닝을 해야겠다며 웃는 모습이 떠오른다.
정말 사랑스러운 분이다. 촬영할 때 많이 우시기도 했는데, 눈물 닦으면서 “제가 이 타이밍에서 우는 게 맞죠?” 하며 농담도 하시고. (웃음) 한편, 나비는 감정 전달을 어려워하는 편이었다. 본인이 생각하는 바를 표현하지 못하는 분은 아닌데, 나비와 한결 사이에 해묵은 감정이 있구나 싶더라. 나비의 캐릭터도 인상적이었다. 일하는 여성이고, 소방공무원으로 오래 근무했다. 늘 죽음을 마주하는 직업이라는 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두 분을 먼저 찍다가 예준과 한결을 만났다. 예준은 커밍아웃 이후 하늘을 날아다니는 상태였다. (웃음) 연애를 꿈꾸는 친구여서 자연스레 관계나 제도적 측면에 관한 이야기까지 할 수 있겠다고 봤다. 한결의 경우, 성별 정정을 고민하는 때였다. 영화에서 그 과정을 함께 따라가며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와 엄마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특별한 이유가 있나.
사전 취재하는 동안, 성소수자부모모임의 월례 정기모임에 참석했다. 여성, 즉 엄마들의 참여가 훨씬 높더라. 처음에는 의아했다. 모임은 매달 토요일에 열렸거든. 주말이니까 직장 때문에 못 오는 건 아닐 테고, 참석한 엄마들 또한 대부분 직장에 다니는 상태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유를 찾았다. 엄마들은 여성으로 살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아이가 겪는 차별을 좀 더 빠르게 이해하더라. 어떤 면에서 여성은 살아가는 동안, 연대하는 경험을 더 많이 가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경험이 부모모임에 와서 빛을 발하는 듯했다. 엄마들은 본인의 감각으로 아이들과 연대했고, 당사자가 겪는 아픔과 상처에 공감했다. 영화에서 그런 부분을 조명하고 싶었다.
나비와 한결은 카메라를 통해 그간 표현하지 못했던 속마음을 전하는 느낌이다. 정체성을 부정당하는 경험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드러나는 동시에, 두 인물이 쌓아 올린 공고한 유대를 엿볼 수 있다.
나비가 종종 말했다. 원래 자기랑 한결은 3시간 이상 같이 있으면 싸우는데, 내가 옆에 있을 때는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대화할 수 있다고. (웃음) 한결은 생각보다 나비한테 감정을 많이 표현하는 편이었다. 다만, 과거에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좌절한 경험이 상처처럼 남았고, 나비는 그걸 만회하고 싶어 했다. 인터뷰할 때도 “이걸 한결이한테 얘기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이라는 단서를 많이 붙였다. 둘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한다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모쪼록 서로를 향한 마음이 잘 전달되기를 바랐다. 사실 소통 문제는 많은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발생하지 않나. 각자 삶의 반경이 어떤지, 무슨 고민을 하는지 대부분 모르고 지낸다. 그러다가 오해가 생기고, ‘우리는 정말 다른 사람이구나’ 하며 관계를 포기하는 상황도 벌어진다. 부모와 자식, 나아가 사람과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서로에게 다가가야 할까. 어떻게 하면 상처 주지 않고 건강하게 관계를 이어 나갈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영화에 담고자 했다. 나비가 한결에게 속마음을 직접 전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화를 함께 본 후로 관계가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비가 눈물을 보이는 순간이 있다. 한결이 죽는다면, 외롭거나 고통스럽지 않도록 옆에서 지켜주겠다고 말하는 장면이다. 그때 나비는 같은 말을 서너 번 반복하는데, 편집 없이 끝까지 담더라. 그럴수록 말에 담긴 무게와 깊이가 증폭하는 듯했고, ‘당신 이야기를 계속 듣겠다’는 영화의 태도처럼 읽히기도 했다.
그날 촬영이 마음에 많이 남았다. 나비한테 먼저 연락이 와서 놀랐다. 평소에 뭘 찍자고 하는 분도 아니고, 대개 담담하게 마음을 표현하시거든. 내가 나비 집에서 자고 간다고 하면, 말로는 “뭘 귀찮게 자고 간대?” 하면서 새 이불을 준비해주신다. “드라이클리닝 하느라 돈 들었잖아!” 하며 장난도 치고. (웃음) 근데 당시 변희수 하사와 숙대 입학을 포기한 A씨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지 않았나. 나 역시 마음이 안 좋았고, 성소수자 커뮤니티도 걱정됐다. 서로 살펴야 하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 무렵, 나비한테 전화가 왔다. 어떤 이야기라도 하고 싶다고. 한결이가 저렇게 무너져 내리는 걸 보면서도 애한테 힘내라고 할 수가 없다면서, 본인도 너무 절망스럽다고 하시더라. 조용히 찾아가서 뵀다. 딱히 뭔가를 묻지도 않았고, 그냥 나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같이 울었다.


예준의 연애는 사전에 계획한 에피소드가 아니었을 텐데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다만, 예준의 남자친구 성준이라든지 성준의 엄마인 인선까지 출연을 결심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다.
성준이 마음을 정하기까지 6개월 정도를 기다렸다. 영화에 출연한다는 건, 결국 부모에게까지 커밍아웃하는 걸 의미하니까. 단순하게 결정할 수 없는 문제인데, 성준 입장에서는 예준과 비비안의 관계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용기를 얻었던 것 같다. 자신 또한 엄마를 좀 더 믿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고 하더라. 인선 역시 단기간에 큰 용기를 내줬다. 아들의 커밍아웃부터 영화 출연까지 모든 일이 한두 달 안에 벌어졌거든. 처음 성준과 예준을 한 자리에서 만났을 때, 인선이 많은 이야기를 쏟아냈다. 여전히 혼란스럽고, ‘내 인생 어떻게 보상받아야 하나’ 싶어서 막막하다고. 근데 한편으로는 안심했다고 하더라. 성준이 커밍아웃을 했는데도 얼굴이 참 좋아보였던 거다.
아들의 남자친구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인선은 원망을 표한다. 근데 반 년이 지난 후, 부모모임에 참석했을 때는 예준을 굉장히 반겨주더라.
성준의 커밍아웃 이후, 인선도 커밍아웃하기 시작했다. 본인이 운영하는 스킨케어 샵에서 만난 손님들한테 “내 아들은 동성애자”라고 말했지. 그랬더니 몇몇이 “우리 애도 그렇다”고 했다더라. (웃음) 몰라서 생기는 막연한 두려움이 그 과정에서 점차 옅어진 것 같다.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고, 나만 어려운 것도 아니라는 걸 경험으로 아신 거다. 영화를 완성한 다음, 출연진을 초대해서 시사회를 열었다. 그때 인선이 해준 말이 기억에 남는다. 내심 어떻게 보시려나 걱정했는데, “영화를 통해 한결의 삶을 볼 수 있게 돼서 다행이다. 다른 성소수자의 이야기도 궁금해졌다.”라고 하시더라. 정말 감사하고 뿌듯했다.
네 명의 주인공을 통해 다양한 삶의 조건과 맥락을 드러내며, 영화를 풍성하게 채운다. 편집 과정에서 이를 어떻게 엮어낼지 고민했을 텐데.
연분홍치마는 작품을 만들 때, 기획부터 완성까지 협업하는 것을 지향한다. 나로서는 든든한 지원군을 가진 셈인데, 사실 작업하는 동안에는 두 번째 작품이라는 무게에 많이 짓눌렸다. 연출자로서 더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고, 열과 성을 다해준 출연진에게 부끄럽지 않은 결과를 내놓아야 한다는 생각에 압박감도 컸다. 주인공, 동료, 관객,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만족시켜야 했다. 이번에는 초반부터 키 스태프를 구성했다. 이혁상, 조소나 피디, 이세연 조연출에게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 내부 데드라인을 정해서 3주에 한 번씩 가편 시사를 진행했고, 조소나 피디와는 일주일 간격으로 피드백을 주고받았다.
가능한 많은 관객을 만나고 싶을 텐데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나.
주인공들과 소통하며 개봉을 준비하는 중이다. 여러모로 어려운 상황이지만, 다양한 창구의 문을 두드려볼 생각이다.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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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크 Knocking
새로운 물결 | 프리다 켐프 | 스웨덴 |2021|78분|15세 이상|컬러|극영화
중년의 여성 몰리는 새로운 아파트로 집을 옮긴다. 낯선 사람들과의 어색한 인사 이후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던 몰리는 천장에서 어떤 소리를 듣는다. 처음에는 단순한 층간 소음으로 생각했지만 점차 이 소리가 누군가의 메시지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문제는 이웃은 물론 경찰도 몰리의 말을 믿어 주지 않는다는 것. 몰리는 과연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노크>는 2000년대부터 다큐멘터리 작업을 해온 스웨덴 출신의 프리다 켐프 감독이 처음으로 연출한 장편 극영화다. 요한 테오린의 동명 스릴러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아파트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장르적 긴장을 바탕으로 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은 이야기 전개 과정 자체보다 몰리의 불안과 마음속 혼란을 형상화하는 세심한 연출이다. 감독은 배우의 미세한 표정 변화, 작은 새의 날갯소리, 벽에 남은 정체 모를 희미한 얼룩, 길에서 잠시 마주친 타인의 짧은 눈빛에 모두 꼼꼼하게 주의를 기울이며 주인공의 흔들리는 심리를 최대한 생생하게 묘사한다. 그 결과 관객은 현재 몰리가 외부의 위험에 얼마나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는지 느낄 수 있으며, 그의 신경질적 반응에도 공감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노크’의 비밀을 추적하는 스릴러보다는 외부 세계로부터 소외당한 한 여성의 불안정한 심리를 설득력 있게 그린 작품으로 읽는 편이 더 적절하다. 다소 익숙한 소재와 전개에도 불구하고 <노크>가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데 성공한 이유이기도 하다.
김보년/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209 2021-08-28 | 11:30 - 12:48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9관
414 2021-08-30 | 17:40 - 18:58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4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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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리와 리디아 Cecily and Lydia at the Waypoint
발견|줄리엣 스트랜지오|미국|2020|75분|전체 관람가|컬러|극영화
여러 길이 갈라지는 곳에 선 한 여자가 있다. 그녀는 걷는 여자 세실리다. 지나치는 길가의 한 집을 지키는 여자가 있다. 그녀는 집 안의 여자 리디아다. 우연히, 어쩌면 필연적으로 세실리와 리디아가 만난다. 세실리는 길을 따라 걷는 행군을 멈추고 리디아의 집에 며칠 머문다. 너무도 다른 삶을 살아온 둘의 첫 만남은 어딘가 어색하다. 묘하게도 리디아의 집안에는 나날이 이어졌을 생활의 감정이 없다. 걷기만 한 리디아에게는 먹고 자는 생존의 흔적이 없다. 어디선가 알 수 없는 정체로부터 전화가 걸려오고, 리디아는 본부라 불리는 곳의 명령과 지침서에 따라 집안일을 수행해 간다. 명령이 내려오지만, 명령을 내린 자가 누구인지 모르며 명령 자체도 부조리하다. 사뭇 대조되어 보이는 두 여성의 우정과 환대는 가능할 것인가.
종착지 모를 길을 끊임없이 걸어가는 세실리는 가능성과 자율성의 삶을 산다. 본부의 지침서대로 매뉴얼적 삶을 살아가는 리디아는 예외 없는 규칙적 삶에 익숙하다. 세실리는 정착한 삶에 불안하고 리디아는 길 위의 삶이 혼란스럽다. 영화는 자율성과 종속성이 기실 어떤 존재가 짜 놓은 거대한 구조 안의 다른 형상일지도 모른다고 암시한다. 이윽고 영화의 엔딩에서 세실리가 새로운 지도를 들고 길을 떠나게 되면 다시금 묘한 기시감이 드는 순간이 찾아든다. 영화 <세실리와 리디아>는 밝고 부드러운 조명의 외견을 띤 카프카적 알레고리처럼 보인다. 도달할 수 없으며 정착할 수도 없다는 딜레마 속에서, 우연한 혹은 필연적 가능성으로 남는 것은 세실리와 리디아의 만남뿐이다.
송효정/ 영화평론가
201 2021-08-28 | 11:35 - 12:50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1관
426 2021-08-30 | 20:00 - 21:15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8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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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는 짧고 하루는 길지 Short Years, Eternal Days
발견|실비나 에스테베스|아르헨티나|2021|65분|전체 관람가|컬러+흑백|다큐멘터리
“엄마가 되면 하루는 길고 한해는 짧다” 영화 속에서 한 엄마가 읽고 가슴에 콱 박혔다는 이 문장에서 제목을 가져온 <해는 짧고 하루는 길지>는 실비나 에스테베스 감독이 3년 동안 각기 다른 처지에 있는 여성들을 차례로 만나 “수영을 못하는데, 물에 빠진 것과 같다”고 표현되는 임신과 출산에 대해 인터뷰하는 여정을 담은 장편 다큐멘터리다. 감독은 처음에 ‘산욕기(아이를 낳은 산모의 생식계가 임신 전의 정상 상태로 되돌아가는 데 걸리는 적응 기간)’의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 그러나 함께 영화를 찍기로 한 동료는 그만두고, 산욕기의 엄마들은 감독의 생각처럼 쉽게 솔직한 이야기를 둘려주지 않으며, 육아 때문에 흐트러진 자신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기길 원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엄마도 아니면서 왜 이런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냐고 감독에게 반문하기 시작한다.
이런 식으로 이 다큐멘터리가 완성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 무렵, 감독은 카메라를 들고 가까운 가족들을 찾아간다. 그리고 묻기 시작한다. 내가 왜 이런 다큐멘터리를 찍는지 아는지, 엄마가 되면 인생이 변하는지, 임신을 하면 축하해줄 건지, 엄마 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등등. 감독은 끊임없이 임신과 출산, 엄마가 되는 것에 대해 질문하고 할머니, 어머니, 동생, 친구들은 친밀한 대상이 든 카메라 앞에서 솔직한 답변을 들려준다. 감독은 이 과정에서 자신이 이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었던 내밀한 이유를 밝히는데, 이 시점부터 영화의 주제는 여성에 대한 보편적 이야기로 확장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결국 애초부터 아이를 낳거나 낳지 않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존재로 태어난 ‘여성’에 대해 새롭게 사고하는 성찰의 시간을 제공한다.
조지훈/ 무주산골영화제 프로그래머

221 2021-08-28 | 17:10 - 18:15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4관
417 2021-08-30 | 17:00 - 18:05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7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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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페미액션: 몸의 해방 Free Our Bodies: Flaming Feminist Action
쟁점들|윤가현·류현아·이가현|한국|2021|71분|12세 이상|컬러|다큐멘터리

생각하는 것에서 실행하는 것으로 옮겨가는 일은 행위 자체를 넘어 이후 감당해야 할 몫이 생긴다는 점에서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누군가의 앞선 행동에 박수를 보낼 수 있는 것은 그의 ‘감당’하겠다는 용기에 대한 찬사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불꽃페미액션 몸의 해방>에 등장한 이들은, 그러니까 여성의 몸의 규정에서 벗어나는 것, 내 몸에 생각을 새기는 것, 그리고 특정 정당에 속하여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 등을 직접 실행한 이들은 정작 스스로가 행한 일들에 대해 그리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모두가 함께했기에 나도 할 수 있었다거나, 솔직히 나도 어떤 점이 두려웠다거나, 정작 해놓고 보니 그때의 맥락에 대해 지금 다시 생각해봐야겠다는 말들은 도저한 사유나 지금 당장 무엇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식의 투쟁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는 그들이 행동으로 옮겼던 일들이 그렇게까지 대단하게 접근할 필요가 없었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찌찌 친구들>, <My body, My choice tattoo>, <300> 등에서 그들이 담담하면서도 즐겁게 당시를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여성의 몸을 대상화하는 이들에게 당당하게 몸을 보이는 것이, 여성의 몸만 조신하게 간수해야 한다는 생각을 거부하는 것이, 젊은 여성들이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는 법안을 제출하려는 것이 특별하게 간주 될 필요가 없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성 운동의 다양한 퍼포먼스에 대해 늘 따라붙는 질문, ‘그렇게까지 할 것이 있느냐’는 의문에 대해 이 작품은 당당하게 말한다. 우리는 그렇게’까지’ 한 적이 없다고. 그저 당연한 것을 했을 뿐이라고.
송아름/ 영화평론가

231 2021-08-28 | 19:20 - 20:31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5관
519 2021-08-31 | 17:10 - 18:21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9관
